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3) 여호와의 사자와 소리   (삿6:7-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0

사사기(13)

여호와의 사자와 소리

 

(삿6:7-12)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오늘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무기로 쓰였던 항아리 깨지는 소리, 나팔 소리, 외치는 소리에서의 그 ‘소리’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 내용이 상당히 포괄적이기 때문에 조금 어려울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내용을 잘 이해를 해 두시면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오늘의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주일 로마서 설교의 예화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창세기 3장 8절의 이야기로 잡았던 것입니다. 로마서의 ‘다윗의 혈통’도 설명을 하면서 오늘 공부할 사사기 본문의 초석을 깔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설교는 사실 하나로 묶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주 로마서 설교가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면 그 내용도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창세기 3장 8절의 ‘음성’이라는 단어와 10절의 ‘소리’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 여호와의 강림의 소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강림의 소리는 심판의 하나님께서 심판 받아야 할 자들에게 오실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창세기 1장과 연결을 시켜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소리와 함께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심판과 연관이 있다고 했지요? 그 소리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열왕기상 14장 6절과 열왕기하 6장 32절에 똑같이 쓰여 있는데 거기를 보면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그 단어는 모두 ‘심판을 위해 다가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8절에서 강림하시는 하나님이 ‘그 날의 하나님’이셨잖아요? ‘루아흐 하 욤’ 거기에서 그 날은 창세기 1장 3절의 그 ‘욤’이라 했지요? 그런데 그 ‘욤’은 구별의 날이었습니다. 혼돈과 흑암이었던 어지러움을 낮과 밤으로 구별을 하는 ‘욤’입니다. 어두움과 빛이 구별이 되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구별을 성경이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날’을 이렇게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사13:6)

6 너희는 애곡할 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욜1:15)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 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그 날이 어떤 날입니까? 멸망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심판과 멸망이 진행되어지는 가운데 창조가 함께 진행이 되어 지고 있는 것이 창세기 1장의 역설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 창세기 3장 8절의 ‘소리’라는 단어에 집착을 하는가 하면,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미디안을 초토화시킨 것이 바로 그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에 의해 미디안이 심판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초입에서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유일한 무기로 쓴 것도 ‘소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이 무너질 때 ‘소리’라는 개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창세기 3장 8절의 심판의 소리로 강림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관심이 쏠렸고 거기서부터 사사기의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로 연결을 해 보니 성경이 씨줄과 날줄로 아주 견고하게 꿰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드온의 이야기를 창세기 3장 8절 이하의 내러티브 속에서 풀어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의 시작이 창세기 3장 8절이니까요. 이러한 접근은 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몇 년 전에 읽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시는 메리데쓰 클라인(Meredith Kline)교수님의 ‘Images of Spirit’이라는 책에서 힌트를 얻어서 제가 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 그리고 그 여호와의 사자를 모형하고 있는 선지자와 ‘소리’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제가 다음에 시간을 내어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왜 소리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잡았는지는 그때가면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하려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그냥 8절의 선지자와 11절의 여호와의 사자는 같은 역할을 하는 같은 존재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거두절미하고 여호와의 강림의 소리가 어떻게 대적을 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여호와의 소리가 대적을 친다는 것은 과연 어떤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해 집중하여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소리처럼, 심판을 위한 여호와의 강림의 소리가 아주 원색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런 구절들을 찾아서 읽어 가면서 설명을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출19:16~19)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을 하시는데 나팔 소리가 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요? 그리고 불이 보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떠는 백성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로 하나님께서 소리와 함께 강림을 하시자 흑암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피해 숨고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심판이지요? 그런데 왜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이라 하는가? 모세는 지금 창세기의 심판의 하나님을 그대로 출애굽기로 옮겨와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반드시 그렇게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왜 시내 산의 이야기가 심판의 이야기인지를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 심판의 강림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것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이 에스겔서에 나옵니다.

 

(겔1:22~25)

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23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으며

24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25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이 장면은 에스겔이 자신의 신비한 환상에 대해 기록을 해놓은 부분입니다. 그가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은 스랍들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수레인데 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의 보좌에는 영광을 가지신 분이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소리가 납니다. 24절 한 절에만 그 ‘소리, 콜’이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도 또 ‘소리’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에스겔서의 ‘소리의 하나님’께서 9장과 10장 11장에서 창세기의 ‘그 날의 하나님’과 똑같은 행보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들어가 버린 당신 백성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기 위해 그들을 향해 강림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전의 동편으로 쫓아내 버리십니다. 그리고 당신도 성전의 동편으로 함께 나아가시고 그 성전의 동편을 그룹들로 지키게 하십니다.

 

(겔11:22~23)

22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그렇지요? 정확하게 같은 그림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3장 8절이 그 심판의 하나님을 ‘그 날의 하나님, 루아흐 하 욤’이라고 표현을 한단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소리와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1:10-15)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여기에는 소리와 함께 임재하시는 주님이 ‘주의 날’에 임재하시지요? 그런데 이 분이 뭐 하러 오신다는 것입니까?

 

(계1:7)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나팔 소리, 많은 물소리 같은 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주님은 ‘주의 날’에 심판을 하러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8절의 ‘그 날의 하나님’ ‘소리로 오시는 하나님’은 심판을 하러 오시는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심판’ 하면 징벌(punishment)이라고 생각하는데 심판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judgement)을 말하는 것이지 징벌(punishment)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창세기 3장 8절에서 그 소리의 하나님을 ‘그 날의 하나님, 루아흐 하 욤’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창세기 1장 3절의 바로 그 ‘낮, 날, 빛, 시간, 욤’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그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덮으시고 그것들을 분리해내고 구별해 내시는 일을 하셨잖아요?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물론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은 반드시 악한 것의 소멸을 함의하는 구별이긴 합니다. 구별이 일어나고, 즉 죄와 악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그 악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 소멸이 되는 것이 구원이며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의 현실은 창세기의 각 날에서도 보여 집니다. 하나님께서 각 날의 창조 뒤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그게 바로 심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선하다 판정하시고 어떤 것을 악하다 판정하시는 그 하나님의 주권적 판단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로 이스라엘을 가리켜 ‘보시기에 악하다’라는 반대의 표현으로 구별을 지어 버리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그 중 두 군데만 볼까요?

 

(삼하11:27)

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왕상16:30)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보세요.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적 주권에 의해 모든 것을 구별해 버리십니다. 그것을 심판이라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의견은 절대 가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그 하나님의 심판적 주권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처럼 갖겠다는 것이 마귀적 발상이었습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꾀잖아요?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시고 그것을 심판하셔서 소멸해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의 자기 자리이탈, 그것이 죄이고 악인 것입니다. 그러한 ‘보시기에’의 하나님, 선악 분별의 주체이신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에 아주 이해하기 쉽게 그려져 있습니다.

 

(계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심판의 책을 오른손에 들고 계신 보좌의 하나님 앞에 어린양이 서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게 일곱 개의 눈이 있습니다. 그 말은 ‘보시기에’의 주권, 즉 선악의 분별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 개의 눈이란 완전수입니다. 어떤 것을 진짜로 보고 그것의 상태와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은 성령이라고 합니다. 창조의 전면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덮으셨던 분이 누구지요? ‘수면 위의 신, 르와흐’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그 창조의 주체가 ‘지혜’ 곧 예수였다고도 하고, 말씀이신 예수였다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가서의 많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임을 밝히고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심판은 삼위 하나님 공동의 심판 사역, 다른 말로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심판이 구원인가는 차차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악 구별 사역, 즉 심판은 여섯째 날의 창조가 끝나고 비로소 완료가 됩니다.

 

(창1:31)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날마다 작은 심판들이 일어나더니 여섯째 날이 끝나는 시점에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심판의 완료가 일어납니다. 심판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경이 그 완료된 심판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선포해 버리십니다.

 

(창3: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그러니까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은 마지막 날의 안식으로 달려가며 구별의 역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지막 날, 일곱째 날에서 역사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칠 일 창조 안에 들어 있는 모형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 모습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의, 그 역사 속에서의 안식은, 영적인 새 창조의 완료지점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의 안식일은 실패작으로 파기가 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가 완료되는 안식 후 첫날의 유형(prototype)인 것입니다. 마치 성취 유형(antitype)인 새 예루살렘의 유형(protype)이 이 땅의 예루살렘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복을 주고 거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바로 안식 후 첫날의 예수에 의해 완료될 성취 유형(antitype)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안식 후 첫날인 그날의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역사와 묵시를 넘나들며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라 조금 어렵습니다만 이해가 가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서 63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결국 안식하게 해 주셨다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사63:14)

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이같이 하나님 백성들의 안식, 언약의 성취는 반드시 심판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완료가 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말은 새 창조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째 날부터 심판과 구별이 일어나는데,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심판의 선언이 떨어지는데, 창조가 진행이 되고 있는, 역설적 그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바냐서와 요엘서로 가서 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을 하시며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시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습1:7,12,14-18)

7 주 여호와 앞(파님, 임재, 낯, 빛)에서 잠잠할 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 이니라

12 그 때에 내가 등불(빛)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보시기에, 일곱 눈)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욤)의 소리(콜)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그날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리와 함께 강림을 하시는데 그 날은 캄캄하고 어두운 날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그날의 하나님, 루아흐 하 욤’이 강림하셔서 흑암으로 숨어 버린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시고 다시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심판을 당하는 자를 14절이 용사라고 하지요? 용사를 부수시는 하나님, 기드온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지요? 큰 용사여. 그런데 끝은 어떻게 됩니까? 13만 5천 앞의 300으로 끝이 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새 창조의 구원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엄청나지요? 무시무시한 말들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요엘서로 가보겠습니다.

 

(욜2:1~3)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 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역시 나팔 소리와 함께 그 날의 하나님께서 강림을 하셔서 어둡고 캄캄한 이스라엘을 불로 심판을 하시는데 그들이 있던 곳이 에덴동산에서 황무한 들로 변하지요? 마치 창세기 3장과 에스겔서 1장의 그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기 때문에 날개 달린 스랍들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날개달린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전부 초토화시켜 버리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풍자입니다. 이 요엘서의 이야기를 사사기와 연결을 시켜 보자고요. 요엘서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미 메뚜기 떼에 의해 박살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욜1:2-4)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 지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 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 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그 메뚜기 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욜2:25)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그 황충, 메뚜기 떼는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하늘 군대의 대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계9:2-3,7~11)

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무저갱이 열리고 그 속에서 마귀의 군대가 올라옵니다. 그게 황충입니다. 그런데 그 무저갱의 연기로 해가 가려지지요? 어두움, 흑암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내진 대적 메뚜기 떼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세력이 어디에 존재하지요? 내 안에 존재합니다.

 

(롬7:18)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니까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않는 내 속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의 세력이 가입을 합니다. 그러한 마귀의 세력은 ‘나’라는 신을 중심으로 ‘나’라는 신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사고하고 행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러한 마귀 세력의 침입은 때로는 고난으로 올 수도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교만의 자리에 앉게 하는 세상의 풍요로 올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나’의 인기와 평판과 영광과 가치를 챙기게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악으로 드러내시고 그것을 심판하여 소멸해 버리심으로 안식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삶은 결국 ‘나’ 자신을 해하는 고단한 인생이라는 것이고 거기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붙들리는 것이 진짜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거기에서 승리를 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먼지와 같은 것임을 고백하는 모습이겠지요? 그게 하나님의 대적인 황충과 대척점에서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도의 승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황충의 삶이 깨지고 ‘티끌’의 삶, ‘나 아무것도 아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이고, 그게 심판의 열매이며, 그게 새 창조의 완성 지점인 것입니다.

 

그것을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에 대입을 해볼까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 다시 악을 행합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마귀적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안으로 대적들을 침투시켜 버리십니다. 미디안입니다. 사사기의 전개 내용이 전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손에 점령을 당하게 됩니다. 황충의 지배 하에서 황충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악한 자들을 더 악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의 손길을 잠깐 놓으시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마서 1장의 ‘내어 버려두심’의 현실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그러한 마귀적 삶 속에서 자신이 바로 예수를 죽인 마귀라는 것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약함이 바로 강함을 부수는 승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깨우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오롯하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귀이며, 내가 예수 죽인 자입니다’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300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며, 그 자체가 바로 승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가 욥기입니다. 욥기 1장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가 나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는데 사단도 그 앞에 와서 섭니다. 여호와가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사단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사단이 땅을 여기저기 두루 다닌 것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겠습니까? 사단이 땅을 두루 다닌 것은 권세를 가지고 땅을 다스린 것을 말합니다. 황충의 전쟁을 치열하게 치르고 다니는 것입니다. 땅을 두루 다니고 온 사단에게 하나님은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해 보았느냐? 욥같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사단이 대답하기를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욥에게 복을 주시니까 그 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사단은 인간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도 역시 하나님이 복을 줘서 재산과 자손이 많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소유를 치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있었던 일로 인해서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식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사단이 서게 됩니다. 사단은 인간이 그 소유와 몸만 치면 꼼짝하지 못하니까 그의 몸을 쳐 보라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요한계시록 9장의 황충들에게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단에 대해서 노출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즉 고통과 재앙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사단에게 허락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뱀과 인간을 분리시키신 것이 아니라 뱀에게 인간을 먹으라고 줘 버리셨습니다. ‘너는 평생 흙을 먹고 살리라’ 바로 인간을 뱀에게 맡겨 버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을 사단의 활동으로부터, 또는 재앙과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욥조차도 사단이 치도록 허용을 했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욥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큰 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상태 속에서 의아해 하는 것은, 도대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의아해한 사실이었고 욥의 친구들도 바로 이런 점을 들어서 욥에게 지적을 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잘못한 게 있으니까 재앙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욥은 그에 대해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욥은 평소에 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죄와 싸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아들들의 생일이면 혹시 지었을지 모르는 죄를 위해서 번제를 드릴 정도로 죄와 싸운 사람입니다. 때문에 욥은 자신의 재앙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재앙에 대해서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욥에게는 큰 혼란이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라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 재앙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악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고 하나님은 그 가치 위에 차등 있는 상을 내려야 한다는 그런 발상이 바로 인간 중심의 악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다가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되는 그런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기들의 행위와 존재의 가치를 쉽게 놓아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욥에게 마귀를 보내서 겉으로는 착하고 순전하여 흠 잡을 데가 없는 욥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가 없는 것 같은 재앙이 닥치거나 고난이 닥치거나 하면 우리는 곧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뭡니까?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바로 황충이며, 내가 바로 마귀이며, 내가 바로 미디안이며, 내가 바로 예수 죽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를 붙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의 13만 5천 군대 앞의 보잘 것 없는 300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승리인 것입니다. 그 때 미디안인 내가 소리로 오신 연약한 모습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속에 심판의 소리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며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계시록 9장 7절에 보면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말은 모든 신자가 황충들과의 전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우리의 의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300이 되어야 합니다. 욥처럼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존심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던 욥이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던가요? 결국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하고 하나님께 대들지요? 하나님은 마귀를 시켜서 그러한 욥의 실체를 끌어  내신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300이라는 보잘것없는 배설물로 폭로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욥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항복을 합니다. 그게 심판이며, 그걸 성화의 절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전쟁은 칼이나 창이나 병거 같은 무기에 의해서가 아닌 소리로 하는 전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한 자가 되어서, 내가 변함으로, 내가 성숙되어서, 그것을 무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황충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자라는 올바른 자아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도저히 승산이 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대적 앞에 서게 되면 거기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인 것이며 그것 자체가 바로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온 세례요한이 세상 권세에게 붙들려 죽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라는 말만 하셨다는 하나님의 소리이신 예수가 세상 권세에게 잡혀 죽는 것입니다. 300입니다. 그런데 그게 승리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그냥 자기 자신이 300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나를 맡기는 자로 부수어져 가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리의 전쟁이며, 소리의 심판이며, 소리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는 소리는 첫째로 심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로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약한 모습의 심판자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호렙 산 위의 하나님의 모습 속에 나타납니다.

 

(왕상19:11-12)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클라인 교수님은 자신의 논문에서 12절의 세미한 소리를 크고 강한 소리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셨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무슨 근거로 그런 해석을 하셨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세미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떼마마’는 ‘조용함’(욥4:16), ‘평온함’(시107:29)를 뜻하는 명사이고 ‘닥카’는 ‘작은’ (출16:14), ‘고운’(레16:12), ‘가는’(레13:30) 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따크’의 여성형입니다. 그러니까 ‘때마마 닥카’는 ‘작고 평온한’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그 말은 11절의 ‘크고 강한’ ‘웨르아흐 께돌라’와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엘리야의 사역이 어떠했습니까? 불로 제물을 사르고, 마른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크고 강한 외형적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회개했나요? 아니지요? 오히려 그러한 역사 뒤에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크고 강한 외형적 능력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북 이스라엘의 악은 어떻게 처리가 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라는 세미한 소리, 예수라는 세미한 소리에 의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킴과 동시에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유약한 무기인 십자가와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강한 바람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불도 아닌 세미한 소리로 오신 하나님의 심판자, 예수님께서 그 날의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4:4~6)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도 여호와의 날이 등장하지요? 말라기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강림으로 임할 종말적 심판을 주제로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자로 오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지요? 어떻게 압니까? 그 심판자가 오기에 앞서 엘리야가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엘리야가 누구라고 하세요? 세례 요한이라고 하지요? 세례 요한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말하는 심판자 하나님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미세한 소리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미세한 소리처럼 죽어 버리셨습니다. 그러한 미세한 소리의 활약으로 세상이 교회와 불신자로 크게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에 의해 드러나 버린 것이 심판입니다. 이 역사 속에 종말의 심판이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리가 어떻게 우리를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는가? 어떻게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으시는가에 대해 히브리서 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성경 전체가 어떻게 일관성 있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심판은 새 창조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고 그러한 심판의 현실은 바로 우리 안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우리 안에서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새 창조의 완성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300으로, 티끌로 발각이 되고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진정한 쉼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게 안식이며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말4: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세요. 심판의 날이 이르는 데 불이 임할 것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불은 악에게는 소멸하는 불이되지만 선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처음 탄생할 때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흑암이었던 교회 위에 임했던 것과 흡사한 그림이지요? 이 말을 악한 육신 속에 선한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에 의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올바로 인식을 하게 되지요? 구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와 악이 하나님에 의해 살라지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는 것으로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악이라는 것이 사건화 된 어떤 더러운 일을 저지르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용사됨의 추구, 신 됨의 추구를 가리키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날에 치료하는 광선을 받게 되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진행이 되어져 갈까요?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과 인기 등이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이란 ‘나’라는 존재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고 우리는 ‘나’가 없어진, 다른 말로 300의 자리로 내려가 버린 자기부인의 현실을 점점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후3:4,10,12-13)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보세요. 주님의 강림의 날에 이 세상의 역사가 불에 태워지는데 13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대조적으로 등장하지요? 내 안의 ‘나’라는 우상이 불에 태워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존재들은 다 태워버리는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치료하는 광선으로 받게 되었지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품에 안으시고 그 무시무시한 불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다 받아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작은 심판들을 경험하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로, 티끌로 치료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