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5) 죽으러 온 선지자   (삿6:8~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1

사사기(15)

죽으러 온 선지자

 

(삿6:8~12)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오늘은 기드온에게 나타난 선지자와 그 선지자 뒤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와의 연관성을 살펴봄으로 해서 기드온과 300용사의 에피소드가 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더욱 확실하게 강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 하나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쪼개보면,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조문에 항상 등장하는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소개하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때 그분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을 상기시키시며, 이스라엘에게 충성을 요구하실 수 있는 당신의 권리를 전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 즉 아모리 족속의 신들에게 굴하지 말라는 당신의 명령을 상기시키시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하게 질책을 하십니다. 이 모든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에 나타났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한 내용과 패턴이 사사기 2장에도 등장을 합니다.

 

 

(삿2:1~3)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보시면 1절에 여호와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내용이 이어지며,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율법의 내용이 나오고, 그 법을 어겼을 시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에 관한 언약 조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조건에 따른 징벌이 이스라엘에게 선포됩니다.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불법에 대한 언약적 법정소송(covenantal Lawsuit)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언약적 법정소송을 하는 이가 선지자인 반면에 여기 2장에서 언약 중보자로 나서는 이는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선지자와 이곳에서의 여호와의 사자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은 모두 신적 표본 선지자(Divine paradigm Prophet)인 주의 사자의 그림자요 모형이며 전형(prototype)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만 기억하시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언약 체결의 원시적 모형을 찾는다면 당연히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시내산 위에서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앞부분만 잠깐 읽어 볼까요?

 

 

(출20:2~7)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도 보시면 여호와의 소개가 나오고 그 분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의 내용이 나오지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이 명령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겼을 시에는 어떤 징벌이 내려지게 될지, 그것을 잘 수행해 내었을 때에는 어떤 상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한 언약 조건이 이어집니다. 똑같은 패턴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체결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의 언약의 중보자는 모세라는 선지자입니다.

 

이 모세라는 인물은 구속사 안에서 표본 선지자, 즉 모든 선지자들의 표본으로 그 기능적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놓아주라고 엄포를 놓으시면서 ‘그는 선지자라’고 말씀을 하시지만 거기에서의 선지자는 우리가 나중에 결론 부분에서 다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게 되는 사명과 본질의 차원에서의 선지자이지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특별한 선지자는 모세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표본 선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이 세상과 당신과의 사이에 세우셔서 일을 하신 것일까? 그건 하나님과 죄인은 절대 독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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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9:24~25)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25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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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 임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견뎌내질 못하고 이렇게 모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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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0:18~19)

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 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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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는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을 때 그들에게 성령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공회로 끌어 올려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세워질 때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성령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지성소에 무상으로 드나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형으로 존재했던 기능적 일군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원형으로 보여주고 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그때부터 수난의 길을 걸으시지요? 그러다가 결국 세상에게 맞아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은 옛 아담의 형상으로 죽으시고 새 아담으로 재창조되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한 모형을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먼저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편린들을 실제로 나타내며 살았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내려 왔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의 빛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카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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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4:29)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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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얼굴 꺼풀에 나타난 광채는 ‘뿔’이라는 단어인 히브리어 ‘캐렌’의 동사형인데 그 단어가 하박국 3장 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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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3:4)

4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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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선지자가 모세 당시 하나님께서 남으로부터 나오시는 모습을 시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현현으로부터 발하였던 빛의 광선을 ‘캐런’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 형상의 온전한 완성에 도달할 그 종국적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언적 암시로 모세의 얼굴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본 선지자인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끝에 체험하게 될 일들의 종말론적인 상징으로 역사 속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렇게 완료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도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료가 될 성도의 모습들을 단편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가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음과 동시에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백성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과하게 될 것인지에 관해서도 몸으로 입으로 전해 주도록 기능적 역할을 부여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엘리야가 공간적 제약이라든지 능력의 법칙을 벗어나 자유로워져서 하늘로 올라간 것 등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좀 쉬우실 것입니다. 그건 엘리야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종국적으로 부여받게 될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선지자들이 모두 순교를 당하거나 아니면 이사야처럼 수년간을 벌거벗고 다녀야 하는 수치를 통과한다거나 에스겔처럼 아내를 졸지에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고, 병자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등, 성도가 이 땅에서 통과해야할 신앙의 여정을 그대로 살기도 하고 이 세상의 실체와 그들에 대한 경고 또한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선지자 직이 성령과 함께 다른 백성들에게 전해지고, 또 전해지고 하는 형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모든 선지자가 다 그렇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이어지는 등의 그림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의 원형에서 어떻게 교회들에게 선지자 직이 전수 되는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표본 선지자인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70장로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표본 선지자로서의 모세의 직분이 어떻게 아래로 흐르지요?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선지자 직분이 흘러 내려가는데 여호수아가 영광의 공회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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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1:14-15)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문 위에 머물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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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구름 기둥은 종종 하나님의 현현에 등장하는 구름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던 바에 의하면 그 구름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그룹들이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현현에 등장하는 구름은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어전회의, 하나님의 공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앞에 여호수아가 서고 모세의 선지자 직분이 그에게로 전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모세와 똑같이 기능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의 선지자요 중보였습니다. 그는 모세가 했던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와 훈계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했고 언약의 공인과 갱신을 주관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기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물을 가르는 기적을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에 보면 모세의 선지자 직이 여호수아에게 확실하게 전달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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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4:9)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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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게 임했던 성령이 여호수아에게 흘러 들어가는 듯 보이지요? 예수에게 임했던 성령이 교회에게 흘러 들어가는 그러한 패턴입니다. 출애굽기 18장과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러한 모세의 선지자적 기능을 70인의 장로들이 나누어 받는 듯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가 너무 힘들다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은 70인의 장로를 세우라고 하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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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1:16~17)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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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표본 선지자인 모세의 사법적 직분이 70인에게 분담이 되는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선지자 직을 물려받을 때처럼 그들이 성막 앞으로 가서 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공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모세의 선지자 직분 중 사법적 직분이 다른 이들에게 성령과 함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지자 직분이 나누어 졌다는 증거가 민수기 11장 25절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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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1:25)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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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의 장로가 회막 앞에서 성령을 받자 그들에게서 예언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물론 그들에게 선지자의 기능이 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시적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쓰인 동사가 히브리어 ‘아싸알’인데 그것은 아버지의 유업이 아들에게 전해질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17절에서도 동시에 쓰였습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아버지 장자의 축복은 야곱에게 주었을지라도 혹시 자기를 위한 축복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쓰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나 70인의 장로들은 모세의 영감을 물려받은 모세의 장자들로 등장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것들이 왜 중요하냐면 이 선지자 직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가 되는 과정에 성령이 함께 흘러가게 되고 그들에게서 또 똑같은 일이 계속 아래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 중요한 구속사적 패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녹명했던 70명 중에 엘닷과 메닷이라는 자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진중에 거하다가 얼떨결에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이 다른 장로들과 똑같이 진중에서 예언을 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그들을 괘씸하게 여겨서 모세에게 ‘금하게 하소서’라고 고하자 모세가 뭐라고 하는 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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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1:29)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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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모세는 지금 70인의 장로들을 선지자로 부르고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성령을 받는 자들은 다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모세의 소원이 실재화되어 나타난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자 각 나라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이 선포되어졌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선지자 적 공동체로 탄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선지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그 형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오순절 날 교회가 성령을 받고 선지자 적 공동체로 탄생을 하게 된 것은 창세기 1장 2절과 창세기 1장 27절,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 등의 말씀의 구속사적 재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바로 그러한 교회의 탄생이 어떠한 메카니즘과 어떠한 패턴에 의해 탄생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인지를 몸으로 입으로 보여주는 모형으로서의 기능적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바로 그 구속사의 메커니즘과 패턴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세워서 구속사를 경륜해 가셨던 것입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표본적 선지자였던 모세가 그 선지자들의 원형인 신적 표본 선지자에 대해 이렇게 힌트를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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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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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란 모세가 기능적으로 담당했던 출애굽 구원의 실체를 이루실 진짜 선지자의 원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 분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으로 가면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베드로가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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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20~24)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 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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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지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사건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변화되신 주님 위로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뭐라고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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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7:5)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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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바로 이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을 철저하게 공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이야기 한 그 선지자를 오매불망 기다려 왔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네가 그 선지자냐?’(요1:21)고 물은 것이나,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가리켜 ‘이가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요6:14)라 한 것에서 그들이 얼마나 그 선지자를 기다렸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이가 바로 그 선지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그 분이 빛나는 광채를 입으시고 변화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모세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의 원형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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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3)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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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나타났던 모든 선지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던 전형(prototype)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의 광채시고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선지자는 바로 그 분을 모형하고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될 모든 성도 또한 바로 그 선지자를 좇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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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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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그리스도의 광채가 등장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기술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지자는 예수의 모형이며 전형이고 교회 또한 예수의 모형이며 전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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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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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지게 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의 가신 길을 따라 새롭게 창조가 될 것임을 미리 보여준 것임을 잘 알 수 있지요? 성도는 맏아들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지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미리 알리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도의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면 그러한 선지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신 분이 나옵니다. 그게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와 사사기 2장의 여호와의 사자가 똑같은 언약송사를 하는 것을 보셨지요? 이사야서로 가면 선지자 이사야가 모세라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자를 동일한 존재로 혼용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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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3:7~11)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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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사야가 이야기 하는, 자기 앞의 사자, 즉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현현이었던 불기둥, 구름기둥과 항상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여호와의 사자와 그 여호와의 사자를 모형하고 있었던 모세를 동시에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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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4:14)

14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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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 현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기둥, 구름기둥과 함께 이스라엘을 인도하시시만 불기둥, 구름기둥과는 다른 어떤 존재가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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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4:19~20)

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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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하나님의 사자는 구름기둥, 불기둥과 달리 움직이시는데 같은 일을 하십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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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1-8)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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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여호와는 창세기 2장 4절부터 나타나는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그 여호와이시면서 여호와의 사자이신 이가 ‘내가 내려가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인도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이시면서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내려오시는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라는 것이지요?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처음으로 내려오셨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계속 일을 하고 계셨던 분인 것입니다. 그 일을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동원하여 미리 그림으로 예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도 보세요. 모세를 보내시면서 ‘내가 내려가서’모든 일을 다 할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선지자로 보내질 우리도 예수님의 하신 일과 그분의 하실 일을 그림자로 모형으로 나타내고 보여주는 자로 사는 것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예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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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3:20-25)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23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24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25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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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이고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사항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분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 체결의 조항들이나 여호와의 사자가 전하는 언약 체결 조항이나 선지자가 전하는 언약 체결 조항이 모두 동일합니다. 그래서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와 그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라고도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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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3:6,17-22)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 하리이다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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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뿐만 아니라 사사기 13장에 여러 번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 ‘엘로힘 이쉬’는 선지자 ‘나비’와 동의어로 혼용되어 쓰이던 말입니다.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쓰였던 이 단어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자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가리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지요? 하나님, 여호와의 사자, 선지자가 헛갈리게 이렇게 저렇게 섞여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시면 그 여호와이시면서 여호와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자의 이름이 기묘입니다. 그 기묘라는 이름은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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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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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에서는 그 사자가 이렇게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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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3:1~5)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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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약의 사자는 이 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하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4장을 보면 그 분 앞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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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3:1~5)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 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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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나오고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가 등장하지요? 그런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옷은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본 바로 그 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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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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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율법주의 속에서 덕지덕지 쌓아놓은 자기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하지요? 히브리 원어로 보면 그 4절의 여호와가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옷을 벗기실 수 있는 힘을 가지신 분이고, 죄과를 제하여 버리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러한 여호와의 사자, 모든 선지자들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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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21)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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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도 똑같이 선지자로 사자로 세상으로, 역사 속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사자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백성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세상에게 맞아 죽으셨지요? 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은 일도 하나님의 사자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군데만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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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0:6)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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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 세상으로 보내지는 여호와의 사자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예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은 하나님께 차압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그림으로만 살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두 증인을 두 선지자라 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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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1:3~12)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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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이 땅에 살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똑같이 못 박히게 됩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보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는 때가 있으니 그때가 종말입니다. 그때까지는 그 두 증인, 두 선지자, 성도,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계속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세요.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전쟁터로 기드온을 보내는 선지자와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게 사람으로 왔던, 아니면 천사로 나타났던 그 안에는 당신의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선지자가 기드온을 보냅니다. 뭐 하라고요? 가서 죽으라고요. 그래서 기드온이 13만 5천 앞의 300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건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것이 바로 승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드온과 300 용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그렇게 예수만 오롯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의 힘으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수긍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의로운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름도, 자랑도, 명예도, 인기도 챙기지 못하고 바벨론 길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탄식으로 점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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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5;4)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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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성도의 인생을 탄식의 인생이라고 진술을 합니다. 그 이유는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고자 함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해보겠다고 하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탄식이 아니라 ‘으라차차’라는 기합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스스로 옷 벗기’의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기’로 돌아 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존심이 묵사발이 나기 때문에 탄식이 쏟아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고 죽을 자로 폭로되고 밀려 내려가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생명에 삼킨바 되기 위해 죽을 것으로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내는 ‘나’가 ‘나’의 의지를 발동하여 ‘나 ’안에서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이로선 이를 악물게 되는 만큼이나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도에게 있어 '인내'의 기간은 곧 '탄식'하는, 입을 벌리게 되는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왜 성도는 인내의 기간 동안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정작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힘으로 버틸 것 같으면 참고 견디면서 이를 악물 수도 있겠지만, 타의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것이라면 문득문득 외마디 소리나 비명, 탄식이 터져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자의가 아니라 외압에 의한 것이라면 그만큼 반발이 심할 수 있고, 아울러 정서적으로도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목표 지점에 가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에 올무를 걸고 그 목표지점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취향과 선호를 다 차압당하고 이리 저리 끌려서 결국 목표지점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바구니를 타고 도망가기도 하고, 삼층천까지 갔다 왔다는 사람이 매나 맞고, 강도나 당하고, 가짜들한테 모욕이나 당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기에 너 스스로 강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나로 인해 약함을 자랑하라고. 말씀이, 약속이 네 인생, 네 존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성도의 죽음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자로 살아야 하는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이 탄식으로 점철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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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23-26)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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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려갑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성령께서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까지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기드온을 13만 5천 앞의 300으로 만드신 후, 그를 큰 용사라 부르셨던 것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도 매일 매일 300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셔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성령을 전수 받고 그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게 된 하나님 백성들의 올바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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