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7) 지피지기면 백전백패   (삿6:33~4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2

사사기(17)

지피지기면 백전백패

 

(삿6:33~40)

33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혹시 올해 개봉되었던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는 그 영화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나오자마자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린 보람도 없이 그 영화는 제게 실망만 안겨 주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의 아류 같은 시나리오와 극 전개도 그러했지만 그 영화 속에 나오는 최민식이나 이병헌은 둘 다 얼치기 악마들이었을 뿐 그 영화 속에서 진짜 악마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독은 아마도 연쇄 살인마 최민식과 그 연쇄 살인마를 좇으면서 그에게 잔인한 복수를 해대는 이병헌에게 공히 숨어 있는 인간 속 악마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진짜 악마는 그렇게 인간의 세상살이에 해꼬지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짜 악마는 피조물을 미혹하여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악마인 것입니다. 살인이나 잔인한 복수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이 선인 줄 알게 만들어서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유익과 가치와 영광만을 위해 살게 된 자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가 되어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악마를 본 사람은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살인자나 강간범을 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내 육적 영광의 추구를 감지한 사람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악마는 다른 곳에 있다가 살짝 살짝 내려와서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나’만을 위해 살게 만드는 나의 죄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속 군상들은 절대 자기 속의 악마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은 자신의 ‘하나님처럼’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켜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자신을 진짜 자신으로 착각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뱀의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 절대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찾아가서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왜 네가 하나님의 말만 순종하며 살아야 하니?’라고 속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신 됨을 챙기기 위해 하나님의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있는 자를 마귀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육신을 입고 있는 자신이 바로 예수를 죽인 마귀임을 자각하는 자인 것이고 그들이 바로 십자가의 필연성을 붙들게 되는 자이며, 그들이 바로 승리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의 이야기는 바로 그 ‘악마를 보게 된 자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끝까지 마귀의 역할을 하다가 가게 됩니다.  

 

오늘은 그렇게 기드온이라는 인간의 정체를 성경이 어떻게 폭로시키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살펴봄으로 해서 그러한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 위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 것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다음 주까지 설명을 해야 기드온을 완전히 마귀로 폭로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귀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마귀의 모습으로, 저주받은 놋 뱀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드온이 어떻게 닮아 있는가에 관해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출발합니다. 복습을 조금 해 볼까요? 사사 드보라가 죽고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자 하나님이 미디안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처럼 수시로 몰려와서 자기들의 가축과 소산을 약탈해가는 이방의 적들에 의해 거의 알거지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그를 큰 용사로 쓰겠다는 전언을 하셨습니다. 그건 기드온을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을 근거로 큰 용사로 살고자 하는 기드온의 헛된 망상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일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주 틀에서 몰래 자기가 먹을 소량의 밀을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큰 용사됨의 추구를 지적하여 깨부수고 하늘의 큰 용사로 바꾸어 내시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투입이 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기드온은 지금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동시에 패역한 이스라엘의 모형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되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패역한 이스라엘이 되셔서 죽으신 분이시니까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드온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낱낱이 폭로시켜 버리신 후에 반석에서 불을 내심으로 말미암아 기드온이라는 인간 자체를 부정해 버리십니다. 넌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힘과 지혜를 사용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가리키는 도구로 그를 부르셨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약함 위에 강함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하여 지금부터 보여주실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임을 반석의 불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거든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처럼’의 삶을 고집하던 아담 군상들 중 어떤 선택된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리시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 절대의존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니까요. 성경은 그러한 ‘존재의 자기 자리 찾기’를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구원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분명 반석과 불의 체험을 한 뒤 ‘내가 여호와를 만났다’는 고백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는 대답까지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뒤 거기에 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는 이름까지 지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 아버지 집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 버렸고 그 제단을 헐어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일을 행한 기드온을 죽이려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과연 바알이 신이라면 그 신이 직접 벌을 줄 것이니까 너희들이 경거망동 하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로써 바알은 죽은 신, 없음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드온의 별명이 바알과 쟁론하는 자, 즉 여룹바알로 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의 신이며 다산의 신입니다. 그건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아담적 욕망의 가시적 현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의 모습이었고, 기드온이 대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으며, 그 이스라엘이 기능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알과 아세라의 단을 헐고 그 상을 찍으라는 명령을 하심으로 해서 ‘내가 바로 너희 안으로 들어가 그 일을 행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육적 자아를 찍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의 전쟁의 실체입니다.

 

그 정도 되면 이제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드온이 또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어떤 시험이었습니까? 이번에는 이슬의 시험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내가 정말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하나님께 이슬을 내려 확증해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또 다시 그의 말의 주어가 ‘나’입니다. 기드온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보고 확인을 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까지 한 사람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고 너는 그들을 한 사람 치듯 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또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을까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기 위해서입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지금 기드온이 하나님께 이슬을 내려 ‘나’의 사역을 확증해 달라고 한 그 시점이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시점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세요.

 

(삿6:34-35)

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자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을 때에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노린 것일까요?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봐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모두 꼼짝 마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담 군상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의 열망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경 지식이나 심지어 십자가까지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데에 사용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지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잖아요? 고린도 교회는 은사나 체험이나 종교 행위까지도 자기의 자랑으로 삼아서 다른 이들과의 차별을 챙기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아담들이 그렇게 자기의 의를 챙기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고 들어오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출정식이 기드온의 죄인 됨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걸 부수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슬의 시험이 어디에서 벌어졌지요? 타작마당입니다. 이슬과 타작마당, 그건 이스라엘의 생명과 직결이 되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셔서 이스라엘의 농사를 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맺힌 열매를 추수해서 타작을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송하며 감사하던 곳이 타작마당인 것입니다.

 

(창27:28)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11:9)

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신33:28)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슬은 이스라엘이 먹고 생명을 유지할 양식을 맺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슬은 눈에 보이는 양식을 자라게 하고 거두게 하는 형이하학적 습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32:2-4)

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 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2절의 ‘교훈’은 히브리어 ‘이므라’를 번역한 말인데 그 단어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슬’이 지칭하던 것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면 그 말씀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성도에게 임하셔서 성도를 살려 내십니다. 따라서 이슬은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내가 하늘의 만나, 하늘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슬에 의해 열매를 맺고,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는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아무런 공로 없이 구원을 얻게 되는 새 창조의 현실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여호와는 반석이시고 그의 공덕, 일이 완전하시다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여호와의 일에 피조물이 보탤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이슬이 갖고 있는 진의를 알지 못하고 그 이슬로 말미암게 되는 이 세상 양식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하늘의 비밀을 간파하지 못하고 모든 영적인 현실을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그렇게 엄청난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지금 일을 시키려는 분을,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엎어서 이스라엘의 타작마당을 이슬로 적셔 주실 분,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태평을 회복시켜 주실 분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때요? 기드온은 여전히 이 세상의 양식과 이 세상의 힘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의 시험에 순순히 응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기대처럼 이스라엘의 육적이며 세상적인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뜻으로 그 시험에 순순히 응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응대는, 인간의 기대는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그들의 육적 기대를 부수어 버리심으로 해서 영적 생명에 관여 하시겠다는, 역설의 응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은 여전히 육적 자아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기드온과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며, 교회와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고 새 창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불가항력적 은혜의 구원을 성경이 여러 가지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10:24-27)

24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25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을 애굽과 이스라엘의 전쟁 그리고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전쟁과 동일시하여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24절을 보시면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는 어절이 나오는데 그건 사사기 7장 25절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이 오렙 바위에서 죽지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사건이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이나,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전쟁을 하고 있는 사건이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굽과 이스라엘간의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과 가나안과의 전쟁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올바로 규명하면 미디안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수5:1-9)

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가나안으로 입성을 시키시기 전에 가나안 초입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1절을 보시면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스라엘의 소문으로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겁을 먹고 있습니다. 병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적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즉시 공격을 해서 가나안을 무력화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건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제로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쟁과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이스라엘의 육적 힘을 근거로 치러지는 것이 아님을 확고히 증명해 버리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지요? 요단을 가르고 그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신 후 그 요단 바닥에서 가지고 온 돌 열둘을 길갈에 세우고 그 요단 도하 사건을 기념하라 하시지요? 여호수아 4장을 보면 그 요단 도하 사건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길갈에다가 요단의 돌 열둘을 세우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요단 도하 사건이 이스라엘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에 의한 것임을 절대 잊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요단 도하 사건을 출애굽 홍해 사건과 같은 맥락으로 기술을 합니다.

 

(수4:20-24)

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쟁과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전쟁도 역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전쟁인 것이고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초입에서 가나안과의 정복 전쟁을 치르기 전에 할례를 행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이스라엘의 힘과 능력에 의해서 치러지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치러지는 하나님의 전쟁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으로 가면 바울이 그 길갈에서의 할례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이렇게 확실하게 설명해 줍니다.

 

(골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할례가 뭡니까?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건 육적 아담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격과 조건, 열심과 노력, 힘과 지혜가 다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그릇 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뜻이 덮이는 것이 할례입니다. 내가 아무런 능력과 자격이 없어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희생이 되어서 내가 살았다는 표시를 몸에 가지는 것을 할례라 하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육적 몸을 벗고 영적인 몸,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은혜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걸 출애굽 전쟁이, 미디안과의 전쟁이, 앗수르와의 전쟁이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할례 언약이 누구에게 가장 처음 주어집니까?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할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자손의 출생이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전적인 은혜로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새 창조의 구체적인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되어 버려, ‘하나님처럼’의 삶을 생의 모토로 삼고, 그 길로만 일로매진하는 이 세상 아담들을 죽이시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순종의 백성들로 다시 살려내시는 것이 출애굽 전쟁이요, 미디안과의 전쟁이요, 앗수르와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스라엘의 할례사건을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5:8~9)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기에서 ‘수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헤르마’는 ‘모욕, 치욕, 성기’ 등을 가리키는, 모든 ‘부끄러움’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게 하시면서 그 초입에서 그 전쟁의 성격과 내용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쟁과 동일한 내용의 전쟁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부끄러움, 이 세상 아담들의 부끄러움, 즉 육적 자아에 대한 기대와 신뢰와 의존을 부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는 그런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굴러내야 할 애굽의 수치입니다. 애굽에 살면서 힘의 원리의 상징인 애굽화 되어 버린 이스라엘의 수치.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치러내야 하는 영적 전쟁은 ‘나’라는 존재의 육적 자아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아실현과 자아성취, 자아발전과 자기계발 등의 육적 자아를 향한 모든 시도들을 부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율법을 부수고 은혜로 덮으시는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의 초입에서 그 전쟁에 임해야 하는 모든 백성들의 육적 자아에 칼을 대시는 것입니다. 그게 할례이며, 그게 세례인 것입니다.

 

(롬4:13~18)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거기에서 출생한 이삭에게 할례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 즉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것을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존재원리와 삶의 원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의인은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존재하고 살게 되는 것이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태서 존재하고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 이슬 시험 이야기는 인간 측에서의 육적 욕망(타작마당의 이슬)이 폭로되는 현장임과 동시에, 하늘의 은혜(이슬)로만 그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그러한 아담들의 육적 욕망을 부정하시고, 오직 당신의 열심으로만 승리를 쟁취해 내시고 열매를 내실 것임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슬 시험 바로 앞에 바알과 아세라의 단과 상이 부수어지는 그림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바알과 아세라, 즉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신의 타작마당을 풍성하게 채워 자신의 육적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아담들의 육적 욕망을 부수어 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는 전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기드온의 이름이 여룹바알로 바뀐 것입니다. 바알은 ‘나’라는 우상의 존재 가치 챙기기의 다른 이름이잖아요? 그 ‘나’라는 우상의 육적 욕망과 싸우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제 여룹바알이 되어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바알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다 여룹바알인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하나님의 300인 남기기를 이해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쟁에 자신들의 힘을 보태겠다고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두려운 사람 가라고 했더니 2만 2천명이 도망갔습니다. 그 남은 만 명중에서 300명을 남기시는데 그 과정이 이러합니다.

 

(삿7:4~7)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우리는 지금까지 여호와의 전쟁의 성격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인간의 육적 자아를 부정해 버리시고 오직 여호와의 능력과 영광만을 오롯하게 드러내시어 그 아래 모든 것을 굴복시켜 버리는 전쟁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하나님처럼’의 욕망과 싸우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이 어떤 존재로 폭로가 되어야 합니까? 힘없고 나약한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유약함이 계속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물을 손으로 떠먹은 300은, 물을 먹으면서도 사주경계를 철저히 한 사려 깊은 용사들이 아니라, 적들이 무서워서 물도 손으로 떠먹는 겁쟁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아직 전선이 한참 먼데도 겁이 너무 많아서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 겁쟁이 300명만 남기고 다 보내 버리신 것입니다. 아마 기드온이 그 300명에게 ‘너희가 최종적으로 선택이 된 정예부대다’라는 통보를 했을 때 그 자리는 초상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겁쟁이들 300명이 이제나 저제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택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겁쟁이들이‘왜 하필 나냐?’고 통곡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전쟁에 참여 하는 자들을 그렇게 낮추십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능력으로 임하셔서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전쟁에서 무력한 자로 폭로가 되는 것 자체가 승리입니다. 대적이 몇 십만 명이 죽었느냐는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자들이 300으로 폭로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죽음 목숨이구나’라는 진심에서 우러난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승리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절대의존자들의 삶이니까요.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아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피지기면 백전백패라고 오늘 설교의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진짜 승리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리려 하는 아담들의 인생에 찾아가셔서 그들을 빈 그릇으로 털어내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인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이 승리하실 때 내가 패배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패배할 때 하늘의 승리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술합니다.

 

(고전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죽은 흙으로 폭로 되고, 그것을 본인이 수긍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 안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받은 성도에게서만 나타나는 십자가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달려야 할 자가 바로 나였다는 의미에서 죽어야 할, ‘나’라는 육적 존재의 추악한 죄악상이 폭로되는 현장이고, 동시에 그 십자가를 믿어야 살 수 있는 것에서 옛 사람의 무력함과 무용함이 발각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바로 예수를 죽인 더럽고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이들이며, 자신들이 소유한 그 어떤 능력과 지혜와 소유와 행위도 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야 할 것임을 아는 자들인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마를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29절 이하의 말씀처럼 우리의 지혜도 의로움도 구속함도 거룩함도 다 예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자랑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은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성도의 힘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즉 하나님이 부으시는 이슬은, 이 세상의 이슬과 이 세상의 타작으로 자신을 살찌우려 하고, 자신의 용사됨을 자랑하려고 하는, 성도 안의 애굽과 미디안과 앗수르를 부정해 버리고 박살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이 인본주의의 세상 속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고전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렇게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구나, 하나님 흉내 내며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죽은 흙으로, 비워진 그릇으로 사는 것이 진짜 가치 있는 삶이요, 승리의 삶이구나’를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을 홀딱 벗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계속해서 이 세상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이스라엘은 겁쟁이 300으로 횃불과 나팔과 항아리를 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폭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어떻게 계속 폭로가 되는지 다음 시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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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사마리아 문둥병자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시 개취급도 못 받던 사마리아 사람, 즉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만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께 사례를 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의 진짜 문둥병, 사망이라는 죄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게 진짜 구원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제사장이고 뭐고, 일상이고 뭐고, 이스라엘 진 안이고 뭐고, 그런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의 눈에는 예수만 보입니다. 그게 성도의 지향점이며 그리로 향하는 지향성이 성도의 삶의 궤적이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구원에 이르는 자는 하나님께 일상을 차압당합니다. 그건 곧 그의 용사됨의 추구를 차압당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나아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마리아 문둥병자도 온 관심이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인간의 용사됨이 깨지고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의 지향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일에 인간의 힘은 조금도 가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절대 사례를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아만은 어떻습니까? 그는 더더욱 사례를 받을 처지가 못 되지요. 자기의 문둥병 치유에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은 것뿐입니다. 혹시 지금 ‘그것도 나아만 측에서 일조를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나아만이 요단 강물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나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열 세 바퀴 돈 것 등의 이야기는,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성이 무너지거나 문둥병이 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렇게 했더니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이야기에 사례를 받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게하시는 문둥병을 고치고 떠나는 나아만을 쫓아가서 기어코 사례를 받아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을 하여 흠집이 난 것입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의 망령이 바로 나아만의 문둥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이며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장의 문둥병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누가복음 17장의 문둥병자 치유 사건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에 대해,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이 절대 그것과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문둥병자와 하나님의 아들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엡2:12-13,19)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밖에 부르지 못했던 이방인, 외인들이었던 우리가 오직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주님과 가까워 진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둥병자가 한 일이 뭡니까? 때 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밀었나요? 아니면 좋은 약을 장복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신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모여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거처로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9절의 말씀처럼 하늘나라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권속’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이케이오스’, ‘오이코스’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죽어야 할 문둥병자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가족, 하나님의 집에 무엇이 먼저 임한다고 했지요? 심판이 먼저 임한다고 했지요?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권속이 된 자들은 일상과 육적 자아를 하나님께 차압당하는 심판을 먼저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찬송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성도는 무엇이 진짜 복이며, 무엇이 진짜 가치이며,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믿음 안에서 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빌3:20)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래서 우리는 그 크신 은혜를 찬송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찬송이 진심으로 깊어질 때 우리에게서 이 세상 문둥병자들이 내어 놓은 해답인 이 역사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이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던 문둥병자로서의 나의 모습이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깊이 배우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방종으로 흐르거나 게을러 질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도의 신앙 행위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 성도의 의지나 결정에 의해 첨가되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의 설교를 들으시고 방종을 하거나 게을러지신 분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서 나온 가짜 열심이었던 것이지 성령이 내어 놓은 진짜 성도의 열심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전하면 ‘그러면 이제 나의 의를 쌓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혹시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자기 의를 쌓지 않기 위해 안하는 겁니까? 아니면 원래 하기 싫었던 것을 안 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 있었는데 십자가라는 핑계 거리가 생기니 거기다 다 뒤집어 씌워 버리는 거죠? 그리고 괜히 죄책감이 드니까 그런 설교를 한 목사에게 그 죄를 다 전가시키고 싶은 거지요? 좋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원래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이제 그동안 여러분이 넉살 좋게 내어 놓았던 열심들은 모두 헛것이었음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동안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했었다면 그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겁니다. 왜? 하기 싫은 것 억지로 시키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그 분보다 힘만 세면 당장이라도 때려 눕혔을 텐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여태 참은 것 아닙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내가 하나님보다 힘이 세진다면 그 하나님은 당장 묵사발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억지로 한건 하나님 앞에 하나도 카운트 안 되는 선이요, 착함이요, 섬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를 그냥 인정하시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요즘 제가 많이 받는 질문들입니다. ‘언제부터 봉사하고, 언제부터 섬겨야 하나요? 저는 언제 준비가 될까요?’ ‘어떤 것이 자기 의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알지요?’ ‘목사님 설교를 듣고 제가 많이 게을러졌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여러분도 이런 질문이 드십니까?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릴게요. 여러분은 선행에, 혹은 종교 행위에 열심을 부리셔도 되고 열심을 부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것도 여러분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이 그를 생명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고후2:14-16)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보세요. 복음이 전해지면 그 은혜의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로 전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반드시 둘로 분열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찬송을 진심으로 내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육적 자아가 부인되어 지고, 그로 말미암아 이 역사의 덧없음과 무용함과 추악함을 알게 되어 자기의 소유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이 세상 힘 가진 자 앞에서 당당하고, 힘없는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그러한 삶을 사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완료 하셨으므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그 구원에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아 부으신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살겠습니까?’라는 적용이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둘 다 십자가를 근거로 얼마든지 선포되어질 수 있는 적용의 부분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와야 맞습니까? ‘맞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문둥병자로, 부정한자로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내셨으니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하겠지요? 그렇다고 감사에서 격발된 그 사람의 행위가 한 순간에 멈추어 버리겠습니까? 혹은 ‘맞아, 우리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신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데 비록 내 육신이 약하여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봐야지, 그리고 경험상 죄를 벗어난 삶이 자유롭고 한결 홀가분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으니 더 이상 죄 속에서 뒹굴 수는 없지.’이리로 안 가겠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실수를 하고 큰 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더욱 더 십자가를 꼭 붙드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복음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적용이 떨어져도 그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단 말입니다.

 

반면에 순전히 자기의 자랑과 인기와 만족을 위해 종교 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했던 사람은 똑같은 적용이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들으면 그걸 빌미로 자신의 게으름을 변호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열심을 내자고 하면 열심을 부리면서 자기의 의를 챙겨 가질 것입니다. 둘 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분량과 모양은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으로 작용을 하게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부리셔도 되고 안 부리셔도 됩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발길은, 그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달리는 때와 비교하여 한결 가볍고 가뿐하며 기쁜 길이라는 것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을 품어 안은 하늘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서 행복할까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에 모든 걸 바치면서 자랑스러워질까요? 아닙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에도 그냥 놔두시는 것은, 성도는 그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고통 속에 처박아 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성화론에 근거한 열심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론은 우리의 열심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지만 저는 지금 우리의 열심으로 오히려 우리의 무력함을 확인하고, 하나님 나라의 참 기쁨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가자는 취지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이는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점점 관심을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며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삶이 진행되어지면서 우리는 하늘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되는 것이고, 성도의 특권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움을 조금씩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셔야 하고 그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먼저 배우고 체험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다 합력하여 선으로 향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여러분에게 가입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의 힘의 원리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나만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던 그 자리에서 밀어 내실 때, ‘아멘’하고 일어서십시오. 거기에서 하늘 백성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