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4) 여호와 샬롬   (삿6:7~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0

사사기(14)

여호와 샬롬

 

(삿6:7~24)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 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 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오늘 본문 속에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샬롬이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샬롬’하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배경이 좀 낯섭니다.

보통 ‘평강’하면 아무 일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떠 올리게 되는데 지금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로 말미암아 그의 연약한 정체를 폭로 당하고 죽어야 할 자로 드러나게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여호와 샬롬’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여호와 샬롬’,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이 정의하고 기대하는 그런 유의 평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드온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강의 실체가 아주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대로 기드온은 원래부터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300인을 이끌고 미디안의 13만 5천 대군과 전쟁을 할 때에도 그가 한 것이라고는 항아리를 깨고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지른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 소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림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내지른 소리도 결국 그의 것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드온에게서는 용사로서의 면모를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큰 용사’라는 닉네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용사와 이 세상 용사와의 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용사는 자신의 힘과 열심과 노력을 근거로 결정이 되어 지는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용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의 문제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발생이 되는 하늘의 용사는 반드시 그 존재의 비워짐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란 곧 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연합이란 나와 하나님의 힘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나의 내용이 비워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채워지는 것을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늘의 용사는 존재의 비워짐이란 전제를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그건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의 문제입니다. 하늘의 군사, 하늘의 용사들의 삶의 지향성은 존재의 비워짐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과의 연합의 현실이 문득 문득 경험이 되어 진정한 하늘 용사의 면모가 아주 가끔씩 우리에게 체감되고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게 자신이 부인되고 부정되는 가운데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거나 의지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내어 맡기게 될 때 그때 성도에게 찾아오는 것이 ‘여호와 샬롬’입니다. 그건 태평성대의 그 태평과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사사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가 ‘태평, 솨카트’라는 단어입니다.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의 그 태평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사에 의해 주어진 그 ‘솨카트’는 평강의 모형이기는 하지만 ‘샬롬’으로서의 실체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 사사에 의해 주어지는 평강은 제한적이며 한시적입니다. 그 사사가 죽으면 금방 깨어질 평강입니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 주어진 평강은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에 의해서 주어진 ‘평강’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진짜 평강 ‘샬롬’이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양도 많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밀고 당기는 시험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는데 기드온은 한사코 사양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그건 겸손이 아니라고 했지요? 모세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을 한사코 사양한 것은 오히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었습니다.

 

진짜 겸손은 ‘나’의 존재가 진정으로 무익하고 무용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나’라는 존재의 힘이나 자격, 처한 상황이나 현실을 바라보며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라는 존재에게서는 선한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서 어떤 배짱이 생기겠습니까? ‘나’를 근거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나’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나가겠다는 배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용사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비워진 사람에게서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용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과 지혜가 있어서 미디안을 격파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면 자신도 나가 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포도주 틀에서 밀이나 벗겨서 먹는 초라한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보고 어디를 나가라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걸 교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그 존재의 소유와 가치를 사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니까요.

 

‘교만, 휘브리스’라는 단어는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지향성을 말합니다. 피조물은 원래 신의 통치 아래에서 죽은 흙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야 그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의 풍요가 담기고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서 하늘의 존재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신들의 존재성을 확보하고 추구하려 할 때 자아의 그릇이 엉뚱한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그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대로 평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과 가치와 열매와 업적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는 그런 불신앙 속에서는 그 누구도 평강의 열매를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항상 자기보다 강하고 훌륭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이미 꼭대기에 올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늘 좌불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만족을 위해 사는 빗나간 삶의 지향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잘못된 삶의 지향성인 그 교만을 때려 부수십니다. 왜요?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짜 평강을 주시려고요. 그 여호와의 평강이라는 말을 조금 쉬운 개념으로 바꾸면 ‘쉼’이라 바꿀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솨롬’이나 ‘솨카트’는 어근이 같은 단어인데 둘 다 평강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들은 모두 호흡과 관계있는 단어들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고른 숨을 내 쉬게 되는 상태로의 전환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과 기쁨을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해 내야 하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에는 진짜 평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짜 평강은 나 이외의 어떤 존재에 의해 내가 이루려 하는 모든 것이 완료가 되었을 때 그 완료된 상황 하에서 비로소 내가 숨을 고르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휴식 혹은 안식이라는 말 안에 숨쉴 식(息)자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평강입니다.

 

가나안의 천수답 농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맡겨 놓고 그분의 처사에 모두 맡겨 버리는 상태에서 우리는 가쁜 숨을 비로소 고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 의존의 삶이 책임감도 없고 나약하고 못나 보이기까지 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평강과 이 세상의 평강이 다르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강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와중에서도 그 안에 평강이 있었다고 하신 것은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일은 당신과 함께 창세전에 이미 영원 속에서 완료해 놓으신 창세전 언약에 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평강을 가지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 속에서도 안식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해 보였고, 불쌍해 보였으며, 나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하늘의 평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평강이 이 세상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모습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평강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양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은 평강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마음을 쉬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평강입니다. 쉼은 쉼인데 마음의 쉼입니다. 그런데 겉모양은 쉼의 모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기드온이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근거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상황을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삿6:15)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자기의 가문이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약한 가문이고 자신 또한 자신의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나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은 얼토당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굉장히 겸손한 반응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됨됨이,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의 힘이 하나님의 일에 가치 있는 것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한 인본주의가 들키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정확하게 샬롬과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나’의 존재를 근거로 실망과 좌절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거기에 뭐라고 대답을 하시는지 보세요.

 

(삿6:16)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나는 너의 됨됨이나 너의 능력이나 너의 처지나 너의 상황에 관계없이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쓰시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가 용사가 되는 것이고 그에게서 평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다 싸워 주신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게 완료된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의 평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잠이라는 것이 한 낮 동안 바쁘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게 쉬게 되는 상태니까요.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완성하려는 자들이 잠을 제대로 자는 거 보셨습니까?

 

아무튼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에 기드온이 증거를 보여 달라고 여호와의 사자께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설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금빛 옷을 차려입고 하늘의 병거를 타고 불이 붙은 번개 칼을 들고 나타나서 기드온에게 명령을 했다면 기드온이 이렇게 무례하게 증거를 보여 달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마 그 위용에 압도되어서 두말없이 ‘예’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아무리 뜯어 봐도 도저히 여호와가 보낸 사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기드온이, 당신이 주님이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을 힘으로 여기는, 믿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타락한 죄인들의 죄 성이 다시 한 번 폭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철저하게 죄인으로 폭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감지가 되고,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안 되지요. 그러한 자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자신들의 정성으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삿6:18)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 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자기가 예물을 가지고 올 테니 그때까지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가 드리는 예물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걸 전제한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리는 가치 있는 예물이 여호와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게 성령 받지 못한 가짜들의 허울 좋은 종교행위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고 하늘은 그 원인에 의해 결과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인과론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의 불신앙에,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해주십니다.

 

(삿6:21)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여호와의 사자의 손에 잡힌 기드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게 되는 기드온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은 그 지팡이가 하나님에게 들려 쓰이기 위해서는 지팡이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내가 너와 함께 간다’ 였지요?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기드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준비한 예물은 기드온이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려 하는 기드온의 열심에서 발생이 된 열매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건 바꾸어 말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전쟁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기드온은 그 열매가 자신의 열심과 노력과 힘과 지혜에 근거하여 맺혀질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열매와 결과는 당신이 맺으실 것이라는 걸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예물에다가 지팡이를 갖다 댑니다. 기드온의 생각대로라면 지팡이가 그 예물을 태워야 합니다. 그래야 지팡이의 능력이 입증이 되는 것이니까요. 만일 그렇게 되면 예물이라는, 하나님 앞의 결과물은 지팡이의 힘과 능력과 열심에 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지팡이는 예물을 가리키는 역할만 했고 불은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여 지는 지팡이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지팡이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어선 안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의 모든 지팡이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화살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화살표가 무슨 힘과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오해가 오늘날 너무 편만하게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지팡이가 되어 예수가 하신 일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가 불을 뿜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교훈 앞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됩니까? 그때까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가치 있게 여기며, 그러한 자신의 힘과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드온이 갑자기 뭐라고 고백을 하지요? ‘난 여호와 앞에서 죽어야 할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기드온에게 ‘두려워 말라, 넌 죽지 않는다’라고 선언을 해 주십니다.

 

(삿6:22-23)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기드온의 인본주의 적 사고가 무너지자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무력한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 위에 ‘두려워 말라, 내 은혜가 너를 덮고 있으니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선언이 떨어지는 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성도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마치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이 일목요연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삿6:24)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여호와 샬롬, 여호와의 평강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놓으신 완료된 구원을 면목 없이 찬송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켜 재현하는 도구가 지팡이로서의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성도의 헌신(지팡이)은 하나님의 헌신에서 격발된 모형으로서의 헌신인 것이지 그 헌신이 무언가 쓸모가 있는 것이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 들려서 쓰임을 받는 자들은 이렇게 ‘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죽은 흙입니다’라는 고백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을 때 ‘난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문둥병 환자입니다’라는 고백이라 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입술을 숯으로 지져서 정하게 만들어 줍니다. 입술을 정하게 했다는 것은 입으로 나오는 모든 것, 즉 이사야 안의 모든 것이 부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땠나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 말은 ‘나는 아마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이 갖는 지향성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입니다’라는 방향으로 설정이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 완료가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지향성의 문제라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꼭 이루고 가야 할 것이 예수를 알고 예수만 믿는 자가 되는 것이잖아요? 다른 것은 없습니다. 성도의 일이나 환경이나 처지나 성도가 겪는 사건 등 모든 것이 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는 자로 완성되기 위한 징검다리 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앙의 여정에서 성도의 능력이 웬 말이며 성도의 헌신이 웬 말입니까?

 

히브리서로 가면 기드온이 왜 믿음의 용사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히11:32~34)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4절을 보시면 믿음의 선진들의 용사됨이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는 것이라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사들은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전1:27~31)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나 됨됨이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로 보여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에서 기인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시면 예수가 우리의 지혜이고 예수가 우리의 의로움이고 예수가 우리의 거룩함이며 예수가 우리의 구속함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우리의 자격이나 우리의 조건을 근거로 주어지게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 예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구원 받은 성도의 연약함과 무력함이 지팡이로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완벽하게 드러내시고 자신은 십자가에서 티끌처럼 죽어 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짜 사사이신 것입니다. 다른 사사들은 모두 다 진짜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각도에서 모형하고 있는 기능적 모형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드온도 나중에 에봇을 만들어 우상으로 섬기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잘나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인 것이 아님을 성경이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삿8:24~27)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 지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지니

26 기드온의 청한바 금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27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에봇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봇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에봇은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신 제사장의 옷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에봇을 입고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봇 그 자체에 어떤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신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백성이므로 자신들의 뜻을 거두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 에봇이었습니다.

 

에봇만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에 대한 규례나 의식이나 절기 등의 것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세우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가입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고 찾고 예배하고 찬송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을 붙들고 거기에 가치를 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바로 그 에봇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쓰이는 에봇을 만드는 것이 다 죄인가?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신 것인데 그것을 만드는 것이 죄가 되는가? 아닙니다. 사사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성전은 실로에 있었는데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고 하지요? 성전 밖에 있는 에봇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가 사는 성읍에 두었다는 것은 기드온의 사고방식이 당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하여 배운 바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계획되고 성취된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여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자기의 힘과 지혜와 노력과 열심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그러한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도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의도는 좋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실로에 있지만 에봇을 만들어서 오브라에 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도움이 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추론이 가능하냐하면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때 그의 태도를 보면 압니다.

 

(삿8:22~23)

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보세요. 이스라엘은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의 13만 5천을 쳐부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 지팡이로 쓰인 기드온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단박에 기드온을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기드온뿐만 아니라 기드온의 자손들이 대대로 자기들을 다스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기드온에 대한 믿음이 컸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지팡이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하고 측정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기드온은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전쟁을 치른 300의 군사들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찾아온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백성이 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귀고리를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에봇 만들기의 의도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에봇 이 기드온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단초 역할을 했다고 명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성경이 왜 이런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드온이 ‘나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내 아들도 너희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멋지게 대답을 하는 그림 바로 뒤에 왜 기드온의 기특한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붙여 놓고 있는 것일까요? 기드온이나 이스라엘이나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었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세요. 기드온은 오늘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의 종말을 맞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끝까지 자신들의 지혜나 힘의 가치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성경이 기드온의 이야기 말미에 이러한 에봇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을 해 보면,  

첫째, 하나님 백성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도구나 행위들에 의해 가감되거나 흔들리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도구나 방법론들이 성도들의 믿음 함양과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론이 나오고 각종 세미나나 워크샵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열립니다. 아닙니다. 인간들의 지혜에서 나온 그 어떤 가시적 도구들이나 방법론들도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래 개혁교회에서는 십자가도 달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희생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십자가 자체에 무슨 힘이 있는 줄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십자가 가까이에서 하려고 하고 심지어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를 해야 기도 응답이 빠르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 오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우상으로 만드는 몹쓸 죄 성을 본능으로 갖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대들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처방으로 주셨던 놋 뱀도 히스기야 왕 때까지 우상으로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 놋 뱀 또한 우리의 저주가 되셔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은 그 놋 뱀 안에 숨어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지 못하고 놋 뱀을 붙들고 자신들의 소원을 빌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신앙을 도우려고 했던 기드온의 시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한 죄인 것입니다. 에봇을 우상으로 섬겼던 이스라엘이나 에봇에 어떤 힘이 있어서 그 힘에 의해 이스라엘의 신앙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기드온이나 오십 보 백 보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성도의 신앙에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을 때 눈에 보이는 예수를 이 세상 누가 알아보았나요?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인간 세상의 선악구조는 절대 보이는 것 속에서 하늘의 것을 간파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가 구유에 오신 가난뱅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은 하나님 백성만이 보이는 것 이면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 속의 실체인 보이지 않는 것을 신앙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 어떤 도구를 사용한다 해도 그 길이 첩경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 겪어야 할 것들을 다 겪으며 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3 요소 중 하나인 세례나 성찬 등의 성례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행위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구원의 현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아지고 안 한다고 해서 신앙이 흐려지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드온의 에봇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밖에 내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팡이로 선택이 되어서 하나님에게 근사하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이 해 낸 일이 그 사람 안에 사유된 어떤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롤 모델로 삼아서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찾아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위대한 기드온의 지혜에서 비롯된 어떤 기특한 행위가 나왔는데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 전체를 망하게 하는 행위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으면 죄만 양산해 내는 죄 자판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겉이 아무리 깨끗해 보이고 그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그를 죽이시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 할례의 흔적이 없으면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서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 기드온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삿8:29-32)

29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하였는데

30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인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비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하였더라

 

기드온의 아내가 너무 많아서 아들만 칠십 명이었습니다. 딸들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하겠지요? 그리고는 결국 무덤 속에 장사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눈에 보이는 인간 영웅들의 말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죄만 토해 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게 보이는 것의 한계입니다. 보이는 기드온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그들이 기드온을 이내 잊어버리고 바알에게로 모두 달려갔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고쳐서 쓸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자꾸 밀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수긍하게 되는 것을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자기부인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한발 한 발 밀려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려 내려가다가 가장 아랫녘에 도달하게 되면 ‘제가 감히 주를 뵈옵습니다. 주님 이 부정한 저를 떠나소서’라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죄인 중의 괴수’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진심어린 고백 위에 하나님의 긍휼이 덮이면서 인간이 가진 모든 짐이 십자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며 거기에 진짜 평강,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l�~ 3.�� � AN style="mso-fareast-font-family:굴림;font-family:굴림;mso-hansi-font-family:굴림;font-weight:bold;">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도 여호와의 날이 등장하지요? 말라기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강림으로 임할 종말적 심판을 주제로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자로 오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지요? 어떻게 압니까? 그 심판자가 오기에 앞서 엘리야가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엘리야가 누구라고 하세요? 세례 요한이라고 하지요? 세례 요한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말하는 심판자 하나님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미세한 소리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미세한 소리처럼 죽어 버리셨습니다. 그러한 미세한 소리의 활약으로 세상이 교회와 불신자로 크게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에 의해 드러나 버린 것이 심판입니다. 이 역사 속에 종말의 심판이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리가 어떻게 우리를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는가? 어떻게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으시는가에 대해 히브리서 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성경 전체가 어떻게 일관성 있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심판은 새 창조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고 그러한 심판의 현실은 바로 우리 안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우리 안에서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새 창조의 완성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300으로, 티끌로 발각이 되고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진정한 쉼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게 안식이며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말4: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세요. 심판의 날이 이르는 데 불이 임할 것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불은 악에게는 소멸하는 불이되지만 선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처음 탄생할 때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흑암이었던 교회 위에 임했던 것과 흡사한 그림이지요? 이 말을 악한 육신 속에 선한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에 의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올바로 인식을 하게 되지요? 구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와 악이 하나님에 의해 살라지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는 것으로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악이라는 것이 사건화 된 어떤 더러운 일을 저지르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용사됨의 추구, 신 됨의 추구를 가리키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날에 치료하는 광선을 받게 되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진행이 되어져 갈까요?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과 인기 등이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이란 ‘나’라는 존재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고 우리는 ‘나’가 없어진, 다른 말로 300의 자리로 내려가 버린 자기부인의 현실을 점점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후3:4,10,12-13)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보세요. 주님의 강림의 날에 이 세상의 역사가 불에 태워지는데 13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대조적으로 등장하지요? 내 안의 ‘나’라는 우상이 불에 태워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존재들은 다 태워버리는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치료하는 광선으로 받게 되었지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품에 안으시고 그 무시무시한 불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다 받아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작은 심판들을 경험하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로, 티끌로 치료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