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2)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는 큰 용사   (삿6:1~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9

사사기(12)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는 큰 용사

 

(삿6:1~18)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제가 어떤 이의 간단한 인생 고백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길지 않으니까 잘 들어보세요.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졌군,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대하고 있어

친구,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내가 확신하는 바대로 살았던

삶의 방식을 얘기해 볼게

 

난 충만한 삶을 살았고,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며 돌아 다녔지만,

그 보다 훨씬 더 굉장했던 것은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라, 꽤 있었지

그렇지만 달리 보니,

딱 꼬집어내어 이야기할 정도로

많았던 것은 아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었고,

한 치도 예외 없이 그것을 끝까지 해냈지

 

난 계획된 길을 따라가기도 했고,

샛길을 따라

조심스러운 걸음도 계획 했었어

그리고 그 보다 더 가치 있었던 것은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그래 맞아,

자네도 잘 알겠지만,

어떤 때는 지나치게

과욕을 부린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모든 일을 겪는 도중,

의심이 생길 땐,

전적으로 신용했다가도,

딱 잘라 말하기도 서슴지 않았어,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난 당당했고, 내 방식대로 해냈던 거야

난 나의 길을 걸었던 거야

 

사랑도 해봤고,

웃기도, 울기도 했었지

가질 만큼 가져도 봤고

잃을 만큼 잃어도 봤지

이제, 눈물이 가신 뒤에 보니,

모두 즐거운 추억일 뿐이야

 

내가 한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지

‘아니, 아니야, 난 아니지, 난 나의 길을 간 거야’

 

사나이가 사는 이유가 뭐고,

가진 것이 과연 뭐겠어?

그 자신의 주체성이 없다면,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지

비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게

진정 남자 아니겠어?

 

내 경력이 말해주고 있듯이

난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고

항상 내 방식대로 해결 했어

그래, 그건 나만의 방식 이었어

그래, 그것이 나의 길이었어

I did it My Way!

 

여러분이 잘 아시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My Way’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어떠세요? 자신의 삶을 관조적으로 잘 그리고 있는데, 그것이 너무 자신만만하지 않습니까? 나는 누가 뭐래도 내가 원하는 길을 남자답게 걸었으므로 그러한 나 자신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길을 가는 이들을 가리켜 용사라 부릅니다. 많은 이들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 ‘My Way’라는 곡을 듣고 부르며, 나도 그렇게 후회 없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결심하며 용사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용사가 되어 버린 인간들의 본능이며 본성이니까요. 그래서 그 노래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의 말로가 불과 유황으로 살라질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용사가 되려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추구를 부수고 깨 버리시는 그림으로 역사의 스케치북은 가득 메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종말의 날에는 이 인류의 역사 전체가 불태워 질 것이고 그 역사의 원형인 묵시가 완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의 용사됨의 추구를 철저하게 밟아 버리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사가 되고 싶어 하고 용사들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이 포스터는 비전향 장기수 김 선명씨의 이야기를 홍기선 감독과 이맹유 작가가 영화화시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선택’의 포스터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김 선명씨는 해방 후 좌익 운동가 우 봉수의 휘하로 들어가 좌익 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인민군에 입대해 참전을 했습니다. 그는 1951년 인민군 정찰대의 일원으로 철원 부근에서 잡혀서 무려 44년간을 남한의 교도소에서 복역을 했습니다. 1951년에 포로로 잡혀서 1995년까지 남한의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 끊임없는 남한 측의 전향요구를 거절하고 결국 8.15 특사로 풀려나 2,000년에 자진월북을 한 사람입니다.


홍기선 감독이 그 분이 갇혀 있던 대전 교도소에 직접 들어가 김선명씨를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비인간적 처우와 학대를 잘 그려 내어, 저는 그 영화의 화면을 통해서도 그 분의 44년 수감 생활의 고통을 미약하나마 미루어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44년 중에 25년 이상을 0.7평의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사람을 거의 미치게 하는 고문입니다. 심지어 군사 정권 하에서는 말할 수 없는 폭력과 고문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이 급사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 하나를 빌려 볼 때에도, 면회를 할 때에도 전향서를 들이미는, 아주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교도소 내의 전향 담당자들은 감옥 안의 깡패들을 시켜 허구한 날 폭력을 휘둘러 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명씨를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전향서를 쓰지 않은 것은 조국의 통일을 향한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는 공산주의 하에서 모든 인민이 다 행복하게 사는 통일 조국에 대한 열망이 그들의 수형 생활을 견디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선명씨가 8.15 특사로 풀려난 후 일간지와의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인간의 마지막 투쟁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내가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폭력에 굴복하면 그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공범이 된다.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잣대가 아니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다.’ 


어떠세요? 섬뜩하지요? 처음에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향서를 쓰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자기에게 전향서를 요구하는 자들에 대한 굴복이 싫어서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를 44년간 견디게 했던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수형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살을 해 버린 이영운 씨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큰 사상은 버릴 수 있어도 작은 양심은 버릴 수 없지 않은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감옥의 철장에 수건을 묶고 목을 매달았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를 용사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집단으로 단식 투쟁을 합니다. 그래서 장기수들에 대한 처우개선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러니까 용사들의 투쟁 목적은 결국 양심을 지키겠다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처우 개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나중에 북송되기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44년간은 작은 감옥에 있었고 지금은 조금 큰 감옥에 있을 뿐이다.’ 저는 그 말이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를 비꼬는 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 안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0.7평의 감옥 속에서도 자기의 양심은 자유 했노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외쳤음에도 결국 자신은 감옥 안에서도 감옥 밖에서도 한 번도 자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들켜 버린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은 어디에 있어도 그 지긋지긋한 ‘나’의 용사됨을 위해 꽁꽁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의 수형생활과 사회생활이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출옥을 해서 세상에 노출이 되었을 때에 아주 심각한 혼돈 속으로 빠져 들었을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그토록 열심히 부여잡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이미 역사의 단두대 뒤로 사라져 버렸고, 그로 말미암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던 인민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피폐한 상태로 내동댕이쳐져 있었으니 그 분의 상실감과 박탈감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세상 용사들의 말로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옳다고 믿었고, 그게 용감한 것이라 믿었는데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 실체가 쓰레기로 드러나 버렸을 때의 그 절망감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김선명씨나 비전향 장기수들의 신념을 싸잡아 헐값으로 쳐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러한 타락한 인간들의 용사에로의 추구를 부수어 버리시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납작 엎드리게 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진짜 용사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이며 그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기드온은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의미의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단한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과 함께 기드온의 300용사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특공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용사’의 휘하에서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돌격을 한 ‘용사’들의 이야기가 기드온과 300 용사의 이야기로 알고들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사이트를 얻어 제작 된 영화가 300이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시기에 그 용사들의 이야기의 시작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셨는데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타작은 바람이 통하는 넓은 공간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포도주를 짜는 포도주 틀은 먼지가 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 11절을 보시면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추수 때만 되면 낙타 떼를 몰고 들어와 이스라엘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런 일이 7년 동안 계속 되다 보니 이스라엘에게 노하우가 생긴 것입니다. 줄만큼 다 주고 감추어 둔 것은 들키지 않게 실내에서 타작을 해서 겨우 목숨만은 유지하자는 것입니다. 실내에서 타작을 할 정도면 아주 적은 양입니다. 그 적은 양의 밀을 몰래 숨어서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용사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인간 측에서 구축하려고 하는 이 세상 용사의 상을 무참하게 부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용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이 기드온의 이야기는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 뒤에 붙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 내용이 전부 뭐였지요? 하나님께서 홀로 전쟁을 치르셔서 승리를 쟁취하신 후 그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거저 주셨음을 찬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용사되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그 승리를 거저 받은 자들이 용사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에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은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을 부연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이야기는 용사 기드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사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짜 용사에 의해 용사로 부름을 받는 거저먹는 용사,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러한 유의 찬양은 출애굽기에서도 등장합니다.

 

(출15:1-5)

1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5 큰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큰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용사이신 여호와가 큰물로 용사인척 했던 애굽 군대들을 다 몰살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용사들을 치시는 진짜 용사, 하나님의 일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큰물로 이 세상의 용사들을 치신 사건은 창세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창6:4-7)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는 용사인 척하는 자들을 치시는 진짜 용사이신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받아 용사 아닌 자리로 내려가 비워진 자들을 성경이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게 기드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의 개괄적 내용을 말씀드리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야빈과 시스라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서 보신 것처럼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적들의 손에 붙이시는 것은 그들을 징계하셔서 고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징계를 받아 고쳐지고 수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노아의 언약을 한 번 보고 갈까요?

 

(창8:20~22)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더 이상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유가 뭡니까? 사람이 홍수로 혼쭐이 나더니 정신을 차려서입니까? 아닙니다. 홍수로 온 세상이 다 물바다가 되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 외에는 이 세상의 기식하는 것들이 모두 멸망을 당했음에도 사람이 여전히 악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징계나 벌로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나 벌로 인간들을 고치는 방법을 쓰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패역을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으며, 왜 하나님은 그 패역한 이스라엘을 반복하여 징계를 하시는 것일까요? 사사기 6장까지 오면서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엄청난 대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시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손에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실체를 폭로시키시는 용도로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손에 붙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대적들의 손에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관심을 가졌고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실체를 계속 드러내 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의 상태와 자격과 조건에 무관하게 그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이런 공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징계를 퍼부으시고, 이스라엘은 회개와 함께 부르짖음의 기도를 올려드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와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곤경에서 구하신다는, 그런 식의 공식은 어서 잊으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 이하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부르짖는 그들을 야단치십니다.

 

(삿6:7~10)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의 일갈의 내용이 뭡니까? 왜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을 청종치 않느냐는 책망입니다. 한마디로 왜 하나님을 살아계신 존재로 인정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했다면 아무리 미디안이 그들을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절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을 혼내주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을 고쳐내는 것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존재인지를 드러내시는 용도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마자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모든 학대에서 건져낸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난도 살아있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거늘 어찌 너희들은 닥친 고난에만 집중하고 있느냐?’

 

이렇게 인간들의 부르짖음은 고작해야 ‘이 어려움에서 어서 나를 건져 주세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르짖음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지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내어 놓을 답이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자기부인의 부르짖음이 진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서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용사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자들! 그게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가 바로 기드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 뒤에 붙어 있는지 아시겠어요? 인간들은 절대로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할 수도 없고, 고쳐지지도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하나님 찬양 뒤에 바로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기드온이라는 사람 안에 넣어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의 압제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부르짖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그러한 그들에게 일갈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그분만의 모든 처사에 순종하고 순응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자세에 대해 교훈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건 하늘나라에서나 완성이 될 것들입니다. 따라서 교훈도 단순히 그들을 고치기 위한 교훈이 아니라 폭로용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징계를 통하여 고쳐내시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인지를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잘 보세요.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현장을 들키자 뭐라고 대듭니까?

 

(삿6:12-13)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기드온이 뭐라고 대들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그렇게 멸시를 당하게 놔두시겠냐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신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힘으로 용사됨을 추구하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서 역사하셨다면 이스라엘이 세상 속에서 용사가 되었을 것이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15절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삿6:15)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기드온은 자신의 상황과 처지와 조건과 자격을 들추면서 자신은 힘이 없는 자이니까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을 보시면서 누가 생각나세요? 미디안 땅에서 양치기로 40년을 살았던 모세가 생각나시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서 부르짖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해오라고 시켰더니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난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못갑니다’라고 거절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러 가지 표적을 보여주시고 모세를 설득해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굽으로 떠나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지요? 그리고는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출4:22~26)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기껏 가라고 해놓고 가는 모세를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모세가 다른 사람과 뭐가 달라서 모세를 용사로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할례 언약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그런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모세가 모세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기드온이 얼마나 무력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완벽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기드온이 미디안을 한 칼에 물리치는 용사가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삿6:16)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기드온은 계속 못 간다고 빼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시면서 ‘넌 반드시 이긴다’고 기드온의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약속은 기드온의 자격이나 힘이나 노력이나 열심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근거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이야기는, 진정한 용사란, 진짜 용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여야 함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강함은 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사건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환경에 매여 사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에게 단호하게 명령을 하십니다. 기드온의 아비의 집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의 단과 신상을 헐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 세상의 가시적 힘과 눈에 보이는 현상들로 용사됨을 판단하려고 하는 세상의 가짜 용사들의 추구를 ‘종교’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에게서 그것을 부수시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 이스라엘, 그래서 조금만 불편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부르짖음을 토해내는 이스라엘과,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하고 대들던 기드온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서 그것을 종교라고 규정해 버리시고 그것을 부수어 버리시는 전쟁이 기드온의 전쟁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종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이 세상의 용사가 되려 하는 모든 인간들의 추구인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의 종교를 부수시는 전쟁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용사됨을 부수시는지 보세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 군대가 13만 5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호출로 모집된 군사가 3만 2천 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장정의 수가 얼마였지요? 6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어디 간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오합지졸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3만 2천 명에게 ‘두려운 사람은 그냥 가라’그랬더니 2만 명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제 남은 군사는 만 2천 명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물을 마시게 하시는데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300명만 남기시고 나머지 1만 1천 700명은 실격시키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용사로 만들고 싶어 해서 그 300명의 행동을 주의 깊은 행동이라고 추켜  세웁니다. 군인은 물을 마실 때도 사주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다가 적군이 나타나서 갑자기 공격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미디안의 13만 5천 명의 대군과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13만 5천이라는 대군 앞에 300명의 군사는 조족지혈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300이라는 숫자로 이스라엘의 실체를 은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기드온은 13만 5천 앞의 300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심지어 무기도 주지 않으십니다. 기드온과 300인의 군사가 가지고 간 것은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었습니다. 어디 대보름 놀이 가는 것도 아니고, 13만 5천의 대군과 전쟁을 치르러 가는 사람들이 나팔과 항아리만을 들고 나서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그 전쟁은 진 전쟁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따라 붙어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적진에 들어갔는데 그 적진의 보초들이 꿈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보리떡이 자기들의 진을 부수는 꿈을 꾸었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이 기드온에게 다 들리도록 해몽을 해 줍니다. 그 보리떡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고 부수어지는 진은 미디안이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떠 올리게 되고 13만 5천 명의 적들이 야영을 하는 산지로 숨어들어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깹니다.  

13만 5천명의 군대가 진을 짜고 야영을 하는 곳은 작은 도시만한 곳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동네에서 누가 장독을 깨고 소리를 지르면 벌떡 일어나서 자기 집 식구들을 막 찔러 죽이십니까? 두세 집만 넘어가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명의 군사가 항아리를 깨고 나팔을 불었다고 13만 5천 명 중 12만 명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전멸 당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설사 말이 된다고 해도 그게 기드온과 300명의 공로가 될까요? 그 전쟁은 유일한 용사, 하나님께서 혼자 하신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 그리고 항아리와 나팔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드온의 이야기 초입에 기드온을 가리켜 ‘큰 용사여’라고 부르셨을까요? 용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비워져 13만 5천 앞의 300명이 되어 하나님이 담으라고 하는 것을 담고 있으라고 하는 곳에 서 있는, 비워진 그릇을 용사라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용사는 그 자신이 능력이 있거나, 인격적 자질을 갖추었거나, 많은 소유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의존하는 죽은 흙들을 용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용사이신 하나님이 그 비워진 그릇에 가득 찰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이 역사라는 것은 하늘의 묵시에 의해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묵시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고 의미도 없다는 것을, 역사를 이루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한시적 공간과 한시적 시간 속에서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역사는 그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온 힘을 다해 수호하려 애를 쓰는 것이고요. 그것이 이 역사 속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장기판의 장기알이라 할 수 있고 묵시는 그 장기알을 들고 이리 저리 장기를 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역사 안에는 ‘나’라는 존재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묵시에 의해 공격을 당해 힘없는 장기판의 말로 폭로되고 떠밀려 내려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이 이리 저리 옮기고 있는 장기 알이라는 그 올바른 자아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용사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을 깨닫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그 보잘 것 없는 300의 자리로 내려가 항아리와 나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밀려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너무 당황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할 것이고, 너무 나약하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람의 자리가 바로 용사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용사의 자리는 이를 악물고 인내를 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여 쟁취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며, 자신을 계발하고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여 얻어낼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수어지고 낮아지고 깨져서 항아리와 나팔을 든 자로 폭로될 때 그 때 성도는 용사라 불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용사란 자신의 강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분명 자신의 강함이 증거될 때 그에 따른 쾌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결국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자신의 약함을 실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기쁨을 두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가 바로 큰 용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