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0) 즐거이 헌신하셔서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   (삿5:1~13,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8

사사기(10)

즐거이 헌신하셔서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

 

(삿5:1~13,23)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 할 지어다

11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 깰 지어다 깰 지어다 드보라여 깰 지어다 깰 지어다 너는 노래할 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 이니라 하시도다

 

여러분께서 지금 읽으신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침으로 야빈의 압제에서 벗어난 드보라와 바락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시면 드보라와 바락이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축복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33:2)

2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결국 가나안에 넣으시는 구원의 전 과정에 주체가 되셨음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은 하나님께서 야빈의 군대를 물리친 그 사건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과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사기의 전쟁이야기가 사실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강력한 대적을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이 파해버리고 그 대적의 압제 속에 놓여 있던 당신의 자녀들을 건져내시는 구원의 이야기가 사사기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전투와 전투 속에서 죽어가고 파괴되어 가는 파국(破局)의 전쟁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죽어도 죽는, 죽음으로만 끝나는 그런 전쟁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그 구원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 홀로 싸우시고 하나님 홀로 승리하시는 싸움입니다. 그 전쟁은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그런 전쟁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헌신’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을 합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가 하나님의 전쟁에 즐거이 헌신을 한 것에 대해 드보라와 바락이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구원의 전쟁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보탤 일이 있다는 말일까요? 로만 가톨릭이나 알매니언 주의가 맞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 2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삿5:2,9)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분명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헌신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헌신이 칭찬 받을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 헌신을 허락하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헌신으로 이스라엘이 헌신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근거 구절이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삿5:20~21)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그 시스라와의 전쟁을 누가 했다는 것입니까? 보시다시피 하늘의 별들이 싸웠습니다. 그리고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에게 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기손 강이 범람하여 그들의 철 병거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손 강물을 퍼다 날랐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강을 범람케 하여 시스라의 군대를 치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그 하나님의 헌신과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헌신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23절을 보시면 드보라와 바락이 메로스 거민을 저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삿5:23)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 이니라 하시도다

 

그렇지요? 그런데 드보라와 바락이 메로스 거민을 저주하는 이유가 ‘여호와를 돕지 않음’입니다. 다른 말로 여호와를 위해 헌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전쟁, 즉 우리 성도의 구원의 전쟁에 우리 자신이 헌신을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의 전쟁에서 전혀 무익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드보라와 바락은 어떤 헌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헌신을 하지 않은 메로스가 저주를 받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사기 5장 14절 이하를 보면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야빈과의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그렇지 않은 지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14절의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라는 구절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번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멜렉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라는 말도 역시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라는 말은 므낫세 지파에서도 군대의 지도자들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마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므낫세 지파는 반으로 나뉘어져서 요단의 동편과 서편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요단 서편에 거하게 된 마길만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므낫세라고 말하면 요단 동편과 서편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편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전투에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17절에서와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을 추구한 지파도 있습니다.

 

(삿5:17)

17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이렇게 볼 때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만 메로스 거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보시는 것처럼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스라엘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울러 그것은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라 자처하는 자들에게 던지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신자로서 여호와를 도우며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으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찾아보겠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즐거이 헌신을 했던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쳤다’고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의 용사는 당연히 야빈과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그리고 그들의 세력 전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스라엘의 대적 세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의 대적, 리산 구사다임이나, 에글론이나, 야빈 등이 사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흔적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죄의 정체를 은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대적들을 보내심으로 그 대적 속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고 그 대적을 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그렇게 죽어야 하는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그들 대신에 죽이고 그들을 살려 낸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끊임없이 실제화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품어 안고 죽어버린 내 안의 죄가 내 실제의 삶 속에서 매일같이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 죽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대적이 출현하고 그 대적이 공격을 당하고, 다시 대적이 나타나고 그 대적도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그렇게 우리의 대적이 죽어 갑니다. 그 말은 단순히 우리가 죄를 덜 짓게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 대적은 ‘나’라는 존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자아 숭배의 신앙이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의해 내 안의 대적이 공격을 받을 때마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라는 우상이 매일같이 죽어가며 힘이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사가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내 안의 아담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헌신입니다. 내 안의 용사가 죽어가는 것이 헌신이란 말입니다. 그 일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므로 그러한 헌신이 없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에서 진짜 헌신을 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헌신, 첫 번째 헌신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헌신에 의해 구원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자기부인의 헌신이 필연적 과정으로 격발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전쟁에 헌신을 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헌신이 뭡니까? 몸을 바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짜 헌신은 자기의 옛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헌신을 하게 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헌신으로 말미암는 헌신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 헌신에 의해 자기가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이 여호와의 전쟁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에 빗대어 찬양을 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도출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헌신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 즉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공격하여 죽이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 속에 가득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찬양입니다.

 

그렇게 옛 것을 죽이시고 새 것을 창조해 내시는 새 창조의 그림이 사사기 전체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사기의 에피소드들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서 나의 창조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고 그 새 창조의 전쟁이 내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난 구원받은 사람이 맞구나’를 확인하며, 드보라와 바락처럼 진짜 찬양, 구원의 감격이 묻어 있는 찬양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드보라와 바락의 에피소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왜 하나님의 전쟁이 내 안의 용사를 치시는 전쟁인 것인지, 왜 우리는 그렇게 내 안의 용사가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찬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창세전 언약에서부터 출발해서 다니엘서의 70이레를 통과하여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아마 오늘은 서론 부분까지만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론 부분은 그냥 옛날이야기 들으시듯 들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다음 주에 이어질 본론 부분으로 가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서론 부분을 잘 들어두시면 다음 주에 조금 수월하게 들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설교 내용을 잘 숙지해 놓으시면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전쟁, 즉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창조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세요? 창조(創造)란 말은 ‘~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에요. 창(創)이라는 단어는 ‘비롯할’ 창(創)이고, 조(造)라는 단어는 ‘지을’ 조(造)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어 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있고 그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 비롯되어 나타나는 것이 창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세전에 이미 있었던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 창조라는 것인데 그게 무엇일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 언약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창세전 언약을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엡1:4~12)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보시다시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창세전 언약은, 죽은 흙에 불과한, 아니 없음에 불과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의 피로 창조해 내어 그들의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 만물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만물 안에는 인간도 포함됩니다. 아니 인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하늘의 존재, 천사들과 그들의 영역 또한 창세전 언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청사진(blue print)에 의해 창조가 된 모든 존재는 다 그 창세전 언약을 담아내는 언약적 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묵시라고 하면 이 역사와 존재는 다 그 묵시를 그려내는 붓이요 물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골 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세요. 인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들까지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다른 말로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언약의 도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낼 필요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 지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의 운행과 방향에 조금도 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니엘서의 70이레 안에 아주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69이레까지는 역사인데 나머지 한 이레가 묵시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묵시를 사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나머지 한 이레를 사는 동안의 인생과 역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무거운 짐을 70이레의 정점인 십자가 앞에서 벗어 버릴 때 성도라는 사람의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를 대적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헌신을 하면서 바로 그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전부 하나님의 영광, 창세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타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절간의 스님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와 성도도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역사는 완료된 묵시를 펼쳐서 설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역사 자체는, 그리고 그 역사를 메우고 있는 존재들은 묵시 속의 참 가치와 참 존재에 대한 설명용 교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세례 이후로 이어지는 마지막 한 이레에 해당하는 기간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묵시로 편입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과 그들의 인생을 가득 채우는 그들의 행위가 그 자체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해 버립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받지요? 그 인이 하나하나 떼어질 때 이 세상에 사건과 현상이 생기지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미 완료되어 있는 하나님의 책,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묵시가 펼쳐지니까 역사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분이 ‘너는 평생 간장만 담고 살아라’고 하시면 군소리 없이 간장만 담고 있으면 돼요. 그러한 토기장이의 뜻 앞에 ‘저는 고추장을 담고 싶은데요.’하고 나설 수 있는 그릇은 없다는 말입니다. 총감독이신 하나님께서 목사의 역할을 맡기시면 목사로 사는 것이고, 중으로 살라고 하면 중으로 살아야 돼요. 따라서 중으로 살아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옥가라고 중으로 만드셔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해요. ‘그럼 우리 인간은 뭔가?’하고 따지시면 안 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의 분수(分數)니까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 속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만 구원해 내심으로, 거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빠져 있어야 합니까? 죄 속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고 버려두시는 모든 존재와 상태가 다 죄인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에서는 ‘내어버려 두심’이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으시고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시는 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고 그냥 놔두시는 상태가 죄인 것이고, 그 상태가 바로 사망, 죽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어떤 상태여야 하지요? 죽은 상태여야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죄 속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죽은 상태니까요. 없음의 상태니까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기 위한 필연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세상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3:22~23)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롬11:32)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누가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습니까? 하나님이 가두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두신 감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없지요? 가두신 분이 그분의 힘으로 빼내 주실 때까지는 아무도 못나옵니다. 때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들을 권능의 손으로 빼내는 이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역사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자들의 실체와 구원을 하시는 이의 권능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구원하시는 이의 영광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서 47장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전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는 용도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23절을 보시면 죄 아래 가두어졌던 자들을 가리켜 ‘율법 아래 가두어졌던 자’라고도 표기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 와서 그들을 풀어 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즉 없음에서 있음으로 살아 올라오는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믿음 앞에서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부정되고 기각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능적 존재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민족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이 된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기능으로 선택이 된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옵니까? 야곱에게서 나오지요? 야곱이라는 인물과 에서라는 인물, 둘 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한 쪽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태중에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로 결정이 되어졌고, 한쪽은 사랑을 받는 자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무엇을 잘못해서 지옥엘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는 자로 창조가 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의 있으신가요? 그게 토기장이에게 대드는 진흙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능적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구원받는 자와 유기되는 자를 우발적으로 튕겨내면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누어준 차표를 하나씩 받아들고 하나님이 타라고 하는 차를 탄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행선, 어떤 사람은 하행선입니다. 왜 내가 그 방향의 차를 타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손에 주어진 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젖어 살던 인본주의가 박살이 나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하시지요?

 

그런데 그러한 구별은 우리 성도의 몸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계속 공격을 당하여 멸망의 자리로 가고 다른 한 쪽은 계속 살아납니다. 그리고는 결국 한쪽이 멸망하고 남아있는 존재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능적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성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는 세대주의는 정말 얼토당토한 주장인 것입니다.

 

(고전10:5-6,10~12)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렇게 이스라엘은 우리의 거울로 미리 기능적 존재의 삶을 살고 사라진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욕하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나란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담을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과 이스라엘이 기능적으로 택해진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성도의 삶에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람석에서 성경이라는 무대로 밀어 넣어 버리십니다. 성도는 그 무대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성경의 수많은 엉터리들의 삶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이 되어서 성경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바로 나였구나, 즉 내가 바로 예수 죽인 자이고, 내가 바로 하나님께 수시로 대든, 죽어 마땅한 자구나’라는 고백을 하는 자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신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 어떤 조건과 자격과 배경도 근거하지 않으시고 그냥 일방적으로 선택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냥 ‘너 믿음의 조상 해’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의 조건에 의해 선택이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조건과 행함에 의해 선택이 취소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어지는 사람이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들은 아직 자기의 행위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거니까요.

 

(요일4:18)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죄란, 사건화 되어 밖으로 튀어 나온 몇 가지 오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형벌을 받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창세전 언약의 위대함을 증거 하는 증거물들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존재를 존재케 하는 힘이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들켜져야 하나요?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도 없고, 살아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로 폭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잖아요? 이스라엘은 누구를 나타내는 기능적 존재다? 바로 ‘나’란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바락바락 대든 모든 사건들이 내 속에서 똑같이 튀어 나오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를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오롯하고 위대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