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9) 인간아, 너의 이름은 여자니라   (삿4:4~9)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6

사사기(9)

인간아, 너의 이름은 여자니라

 

(삿4:4~9)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팔아 버리신 이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여자들에게 맡기셨는지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사사로 드보라라는 여자가 세움을 입고 그 여자를 돋보이게 하는 쪼다의 역할로 바락이라는 남자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야 할 장수가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겠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여한 전쟁의 수훈갑이 역시 여자인 야엘에게로 돌아갑니다. 적장 시스라를 여자인 야엘이 죽입니다. 승전의 최종 공로가 여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드보라도 아니고 야엘도 아닌 바락만이 버젓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히11:32)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분명 이 명단에는 드보라도 없고 야엘도 없지요? 바보 같은 바락만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여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의 사실상 주인공은 바락인 셈이지요? 물론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락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드보라를 동경하고 야엘을 본받으려 하고 있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드보라를 본받아 용사가 되라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야엘을 본받아 순종해야 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보 같은 바락의 모습이 믿음을 선물 받은 올바른 성도의 모습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왜 하나님은 여자를 사사로 세우셨는가?’에서부터 출발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 여자들은 인구 계수에도 들지 않을 만큼 미천한 존재로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여겨졌었고 남자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남자들을 다 제치고 여자가 사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을 전부 부정해 버리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남자 중에서는 도저히 사사로 세울 자가 없어서 여자로 사사를 세운다는 하나님의 일갈이 그러한 여사사의 임명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여자인 드보라 앞에서 남자인 바락이 바보처럼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사로 세움을 받은 드보라라는 여자가 남자들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드보라는 그냥 모든 남자들을 바보로 몰아붙이는 역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사의 자격과 신분에 대해 추론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사는 남자 흉내를 내는 자가 아닌, 누군가에게 귀속된 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그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쥐고 있는 남자에 의해 가치가 결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민수기로 가서 당시에 여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나타나 있는 성경 구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민30:1-16)

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 하니라

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 이니라

3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 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4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 이니라

5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6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7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 이니라

8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9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무릇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지킬 것 이니라

10 부녀가 혹시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서원을 하였다든지 마음을 제어하려고 서약을 하였다 하자

11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함이 없으면 그 서원은 무릇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무릇 지킬 것 이니라

12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케 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일에 대하여 입술에서 낸 것을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그 남편이 그것을 무효케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

13 무릇 서원과 무릇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은 그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케도 할 수 있나니

14 그 남편이 일향 말이 없으면 아내의 서원과 스스로 제어하려는 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그것을 들을 때에 그 아내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므로 지키게 됨이니라

15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

16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비가 자기 집에 있는 유년 여자에게 대한 것이니라

 

뭐 어렵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 같지만 한 마디로 줄이면 ‘여자야, 너희는 서원을 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까 아버지나 남편, 즉 남자를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입니다. 난 여자하고는 약속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맹세나 서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그 여자의 맹세나 서원을 담보하였을 때에만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난 이것을 지키겠습니다.’혹은 ‘난 이렇게 살겠습니다.’ 등의 서원을 하게 되었을 때에 남자가 ‘이 서원은 이 여자가 절대 지킬 수 없는 것이니까 취소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 서원은 취소가 됩니다. 여자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은 ‘이 여자의 능력과 의지로는 이 서원을 도저히 지킬 수 없으므로 제가 대신 지키겠습니다.’하고 남자 자신이 그 서원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역시 여자의 의견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개입되지 않은 여자의 모든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에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남자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은 여자는 자신의 행위로 망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자신의 서원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자와는 약속을 하지 않으시고 남자하고만 약속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로 돌아가서 남자와 여자가 어떠한 순서로 만들어 지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창2:7~9,18-24)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먼저 만드시나요? 남자를 먼저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여자를 나오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여자를 뭐라고 정의하시는가 하면 ‘남자에게서 취한 것’이라 정의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관계로 공포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 안에서 창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남자와 연합이 되어 한 몸이 되기 전에는 존재로서의 가치도 상실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어떠한 관계로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가 되는 것인지에 관한 은유적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 창조의 모형으로 남자와 여자의 창조가 이렇게 장황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새 창조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두움이 물러가는 형국인 것이므로 창세기의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되는 것으로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남자인 아담의 창조에서 여자의 창조가 비롯되는 것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빛이신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되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시는지 보세요.

 

(창1:26~28)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 즉,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삼위 하나님의 보좌, 즉 하늘의 공회를 원형으로 하여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라고 표현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그 ‘우리’안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나 그 ‘우리’라는 말 안에는 삼위 하나님을 포함한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 나라의 공회, 하나님 나라의 어전회의 전체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우리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말은 사람 안에 하나님 나라의 어전회의의 뜻과 결정사항이 담겨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외모나 형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체와 모양이 없으시니까요.

 

그것을 창세기 3장과 연결시켜 이해를 해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처음 만들어진 것이 남자이고, 그 남자 안에서 여자가 창조되어 그 둘이 연합이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께서 존재로 인정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 어전회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우신 남자, 신랑에 의해 여자, 신부가 창조되고 그 둘이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 다스리고 정복하고 번성케 하는 일이 맡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창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와의 탄생은 사람이 ‘우리’안으로 연합이 되었다가 ‘우리’에게서 나와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시키는 일을 위해 파송이 되는 형국입니다. 그 그림이 이사야서에 똑같이 그려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사6:1-8)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창세기의 ‘우리’)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잘 보시면 창세기 1장의 내용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보좌가 등장하고 그 앞에 티끌에 불과한 이사야가 등장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탄식은 ‘난 망할 수밖에 없는 가치 없는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망해야 할 이사야는 하나님의 숯불에 의해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요?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이사야가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그렇지요? 망해야 할 죽은 흙, 이사야가 하나님의 숯불에 의해 새로운 사람이 되어, 정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 어전회의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우리’에게서 누구에겐가로 보내집니다. 그 누구는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하나님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부들에게 보내지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어전회의, 즉 ‘우리’에게로 합일이 되었다가 그 ‘우리’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렘23:21~22)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그렇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내지는 자는 하나님의 회의, 즉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하나님의 신부들에게로 보내지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누구를 모형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입니다.

 

(히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렇지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예한 자들이고, 다른 말로 ‘우리’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고, 그 어전회의에서 하나님의 신부들에게 파송이 되는 자들인데, 그들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던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전회의, 즉 ‘우리’안으로 들어가 다시 ‘우리’에게서 여자에게로 파송이 되는 첫 번째 선지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아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즉 ‘우리’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은 여자를 창조하여 자신과 연합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연합이 되느냐하면 ‘없음’이어야 할 여자와 함께 죽는 모습으로 연합이 됩니다.

 

그래서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는 것입니다.

 

(딤전2:11-14)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 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먼저 마귀의 꾐에 속아서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징벌로 ‘사망’이라는 언도를 이미 내리신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죽은 것입니다. 남자는 아직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자만 죽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에게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습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가 죽음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그녀와 연합이 되어 함께 죽어야 합니다. 아담이 여자와 함께 죽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 아담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짓는 아담 속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죄인 됨의 모습을 우리 성도는 타락한 아담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는 죄인으로서의 첫 아담의 모습과 죄인과 함께 죽어 그 죽음에 연합해 버리는 마지막 아담의 모습이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아담이 죄를 지은 여자, 하와와 함께 죽음으로 들어가는 그러한 형태로 남자이신 예수가 죽어야 할 죄인들과 함께 연합이 되어 죽으심으로 구원이 일어날 것임이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에서부터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속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여자, 즉 신부는 자신의 죽음에 연합되어 자신의 죽음을 가져가는 남자의 희생에 의해, 그로 말미암아 그 남자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자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주인은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고전11:3,7-9)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잘 보시면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창세기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인 남자의 희생에 의해 죽어야 할 여자가 남자와 연합이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 번째 하나님의 형상, 아니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렇지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서 나와 여자에게로 가서 여자와 함께 죽으시고 여자와 함께 부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사람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미한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메카니즘을 성경이, 하늘의 어전회의인 ‘우리’에게서 보내지는 이사야의 그림에서(사6)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고, 당신의 신부를 위해 신부의 죽음에 동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 때의 남자라는 단어는 곧 생명을 주는 자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생명을 주어 여자에게서 생명이 자라고 출생하게 되는 그러한 생물학적 메카니즘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런데 진짜 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있나요? 없지요? 어떻게 알지요? 하늘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생명나무가 하나님에 의해 감추어져 버렸잖아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 여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말은 남자로부터 생명을 받아 비로소 산 자가 될 수 있는 여자인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민수기의 말씀 안에서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상대할 수 있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와도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민수기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남자와만 상대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 남자가 나타납니다.

 

(마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비둘기가 상징하는 ‘전서’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비둘기는 보내는 자의 뜻을 받는 자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어전회의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려와 어떤 존재에게 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아들, 남자’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요, 사랑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그 남자와만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양이 누구지요?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계19:7)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하신 아들, 남자가 되는 것이고, 그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 짐을 떠넘긴 자들을 교회, 즉 신부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어린양으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비로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개입하기 전에는요? 그냥 죽은 흙입니다.

 

(창2:7)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죽은 흙에 생기가 들어가지요? 그래서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 생령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로 가면 그 생기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애4:20)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여기에서 콧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창세기 3장의 생기라고 번역이 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생기가 누구라고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입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죽은 흙에 부어져서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남자가 죽은 여자에게 부어져서 둘이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다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누구의 공로로? 남자의 공로로.

 

그렇다면 이제 다시 민수기 30장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고요. 거기에서 거론되는 여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서원을 받으신다고 했나요? 아니면 안 받으신다고 했나요? 하나님은 여자의 서원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의 서원만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여자의 서원과 제어를 남자가 실행에 옮길 때 그것만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린양의 행실만 보시고 그와 연합된 여자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여자의 행실이나 서원은 전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 즉 여자의 옳은 행실을 어린양의 세마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19: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 신부들의 옳은 행실은 어린양의 세마포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세마포는 십자가 피입니다.

 

(계7:14)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신부로서의 인간의 구원은 오직 어린양이신 신랑에게서만 나온다고 성경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계7:10)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는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의 은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실컷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라고 마무리를 지었던 것입니다.

 

(엡5:31-32)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지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히3:6)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가족의 짐을 다 떠맡고 아들로, 남자로 충성하셨더니 그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모든 인간을 ‘여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신 남자에게 의존해서 비로소 존재가 되는, 여자에 불과한 남자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저마다 용사가 되고 싶어 하고, 남자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상태를 ‘육체’라고 부릅니다.

 

(창6:3~7)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셔서 인간 세상을 홍수로 멸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여자로 살아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사 흉내를 내는 것을 참지 못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보라 사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바로 인간들의 남자 흉내 내기를 부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이 에피소드가 여자 사사 드보라에서 시작하여 여자 용사 야엘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남자 흉내를 내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진짜 남자를 여자의 모양으로, 하나님 절대 의존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보내셔서 승리를 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땅의 가짜 남자들을 전부 부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만 했는지 아시겠지요?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여자로 살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승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여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1:3,5,6,16)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교회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임과 동시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교회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 다섯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 여자들 이름 다음에만 ‘에게서’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헬라어 전치사 ‘에크(from)’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이 여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 유독 여자들 이름 다음에만 그 단어가 붙어 있을까요? 마태는 지금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전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라를 팔아먹은 이방의 창녀 아니면, 시아버지와 통간을 한 자발적 창녀, 그리고 남편을 잃고 거지가 된 이방의 여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왕과 정을 통하는 불륜녀, 정혼한 남자가 있는데도 임신을 한 부정한 여인 등입니다.

그 여자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진짜 신랑, 진짜 남자이신 예수가, 죽어야 할 여자를 대신해서, 여자의 역할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여자가 되어 죽으시고 죽어야 할 여자들을 어린양의 신부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여자로 죽어야 할 죄인들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되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죽어야 할 여자들을 아들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이해가 가십니까?

 

(롬9:25~26)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죽어야 할 여자, 하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요? 진짜 아들이신 예수가 여자가 되어 죽으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엡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을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신부인 성도인 것입니다. 바락이 그렇게 쪼다 짓을 하면서 그걸 배운 것입니다. ‘난 남자 흉내를 내면서 자기 영광과 가치를 챙기고, 자신을 자랑하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되는 자구나’를 배운 것입니다. 쉬운 말로 여자보다 못한 자신의 실체를 발각당하면서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구나, 신랑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신부구나’를 배운 것입니다. 그 사람을 믿음이 있는 자라 하는 것이고 그래서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쪼다 바락만 면목없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와 남자의 대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삿4:17~18)

17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시스라를 장막 꼬챙이로 찍어 죽인 야엘의 남편 헤벨이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바로 위 11절로 가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삿4:11)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헤벨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이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모세의 장인 이름이 호밥입니까? 이드로지요?(출3:1)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입니다. 그런데 왜 사사기 기자는 모세의 장인을 호밥이라 했을까요? 그건 ‘장인’이라고 번역이 된 ‘호텐’이라는 단어가 ‘처남’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이는 단어라서 아마도 호밥은 모세의 처남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아무튼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헤벨이라는 사람은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겐족, 즉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온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 왕의 군대장관인 시스라와 친구지간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 남자들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자 흉내를 내려는 자들은 이 세상의 힘과 필연적으로 결탁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도 아닌 자가 가나안의 세력가들과 결탁을 하여 친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다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야엘은 헤벨과 같은 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부부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왕 야빈과 화친을 맺고 사는 헤벨과 달리 야엘은 시스라에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못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사는 여자의 삶입니다. 야엘이 자신의 삶의 평안과 가족의 화평을 생각했더라면 절대 시스라를 그렇게 죽이면 안 됩니다. 그건 큰 손해를 입는 사건이고 큰 힘을 잃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하고 많은 집들 중에 자신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가 하나님의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런 탄식의 고백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아마 야엘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우리 집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여자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야엘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합니다. 그 이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헤벨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스라가 그녀의 집에 들어오기 전과 그녀가 시스라를 죽인 후의 삶이 동일하게 평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여자들의 삶을 그렇게 몰고 가십니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굴러 갑니다. 그래서 성경이 헤벨의 장막이라고 하지 않고 야엘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를 기각하고 여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이름으로 그 집의 문패를 걸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남자이신 예수께 오롯이 순종하는 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자아가 그 여자의 삶을 너무 싫어하지요? 왜 내가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됩니까? 이게 아담의 일갈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자 흉내를 내 버리는 바람에 그 안에 들어 있던 인류가 전부 남자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남자들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고픈 가짜 하나님, 가짜 신들과 진짜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나선 것이 인간들의 남자 흉내 내기이며, 하나님 흉내 내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 82편에서 인간들을 신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그 시편 82편의 구절들을 인용하셔서 자신의 신 됨을 피력하시지요? 인간의 신 흉내 내기, 남자 흉내 내기와 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죽은 흙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교회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고, 로만 가톨릭이 그랬고, 그 전철을 밟아 오늘날 개신교가 그렇습니다. 여자여야 하는 자들이 남자 흉내를 내며 오히려 하나님을 여자처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누구와 싸우신다는 말이 됩니까? 교회가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하여 상정해 놓은 가짜 하나님과 가짜 기독교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교회와 싸우시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와 싸우시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내어 놓는 교회의 종교 행위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과 하나님이 전쟁을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야곱과 전쟁을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모형인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진짜 복음이 강대상에서 선포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동안 내 마음대로, 아니 인류 마음대로 조작해 놓은 가짜 하나님 상이, 가짜 기독교가 박살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부리던 종교 행위가 무너져 버리고, 나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던 가짜 하나님이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나라는 우상이 부수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그게 진짜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이외의 모든 다른 이름과의 전쟁을 하는 이름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전쟁은 남자 흉내, 하나님 흉내를 내는 ‘나’와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학생들이 강남에 있는 어떤 절에 가서 그 절 대웅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서 그 절 마당을 밟으며, ‘하나님 이 땅이 우상의 땅이 아닌 하나님의 땅이 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한국 불교계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땅 밟기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건 신명기나 여호수아서에서 말하는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데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밟는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을 치러 이스라엘에게 거저 주시는 땅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취한 당신의 나라에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을 집어넣으시겠다는 하나님 측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밟아서 하나님 것으로 만들겠다니요. 그건 무속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속신앙의 지신밟기와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땅 밟기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의 전쟁 대상은 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절에 가서 두 손 들고 통성기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내 안의 가짜 신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나의 신 됨이 부수어 지고, 나의 가능성이 부수어 지며, 나의 가치가 박살이 날 때, 내 안에서 진짜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행복해 하세요. 왜 드보라의 이야기에서 여자들이 설치고 있는 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왜 남자들이 쪼다처럼 등장하는 지도 아시겠지요? 그리고 왜 쪼다 바락이 믿음의 선진의 대열에 끼어 있는지도 아시겠지요? 여러분도 ‘나는 쪼다 바락입니다. 나는 여자만도 못한 바락입니다’를 고백하시어 진짜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이 되는 진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