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1) 왜 찬송해야 하는가? (삿5: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8



사사기(11)

왜 찬송해야 하는가?

 

(삿5:1~3)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지난주에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들의 찬송의 내용이 전부 하나님의 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의 무력함에 관한 것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헌신도 하나님의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승리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승리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내용이었고,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이해하고 깨달은 자들에게서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찬송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찬송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아래에서 무용한 거름더미로 발각이 되어야 하는 인간들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구속사 안에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기능적 존’재로 선택이 된 것이라 말씀을 드렸지요? 바로 그 기능적 이스라엘의 시작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전체 기능적 이스라엘의 모형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셨습니까? 멍하니 우상이나 만들어 팔아먹고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일방적으로 어디론가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던 그 땅을 430년 뒤에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창15:12~18)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기능적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넣어서 종살이를 시킨 다음에 정한 때가 되면 그때에 거기에서 나오게 하셔서 당신이 약속하신 땅으로 넣어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전적인 피동적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지 않으시고 홀로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건 하나님 홀로 언약을 수행하시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이 이스라엘의 행동 여하에 따라 결과물이 결정되는 그런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결과물이 생기게 될 것임도 아울러 암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당신의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창세 전 언약의 모형이었습니다. 창세 전 언약이 뭐였지요? 그리스도의 피로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도 어린양의 피가 담보가 되어 생명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곧 이 세상 역사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이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행위는 하나님이 완료하시는 언약의 결과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아브라함 언약이 언제 임합니까? 캄캄한 밤에 언약이 이루어지지요? 캄캄한 밤에 하나님의 횃불이 임하며 언약이 떨어집니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캄캄한 흑암에 빛이 비추는 것으로 창조가 시작되는 그런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캄캄한 흑암 속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빛으로 비추어짐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게 되는 유월절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모형들은 밤에 잡히신 어린양 예수라는 빛에 의해 어두움이 빛으로 돌아오게 되는 십자가 구원 사역에서 그 원형 안으로 흡수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담은 채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누가 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430년을 보냅니다. 미국의 역사가 몇 년입니까? 고작 200년입니다. 그런데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족들이 미국인이 되어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가서 430년을 보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애굽화 되어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배우고, 애굽의 학문과 풍습과 신관을 가진, 애굽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고서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실까요? 조금 바꾸어서 질문을 해 볼까요? 왜 하나님은 이미 약속의 땅이 확보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이 애굽같은 역사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까?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와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들 자신에게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죽은 흙에서 창조가 되는 아담의 모습인 것이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에게 새 창조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애굽이 다른 것이 있지요? 이스라엘의 피 속에는 아브라함의 피, 즉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똑같이 어둠인 자들인데 한 무리의 피 속에는 언약의 피가 들어 있고 다른 무리의 피 속에는 언약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겉으로 봐선 애굽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똑같이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창세 전 언약의 폭력적 침노, 불가항력적 덮으심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은혜에 덮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할은 ‘죽어있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애굽과 구별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유일한 조건이 뭐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의 됨됨이도 아니고, 그들의 열심도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떨어졌다는 이유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애굽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언약의 때에 애굽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죄의 노예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실체를 보고, 경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힘인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존재들의 사명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서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거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에서 나옵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묵시의 그림자로서의 역사가, 모형으로서 한 번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형국으로 흘러 갈 것이다’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기능적 이스라엘의 삶이 반복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홍해를 건너기까지의 과정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었다면 광야에서부터 가나안까지의 여정은 이 역사 속에서 그 구원이 어떻게 설명이 되며, 그 구원의 대상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체휼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오늘 제가 설명해 드릴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 중 일곱이레와 62이레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처지를 금방 잊습니다. 다시 죽은 흙,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을 위한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수시로 원망합니다.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노예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는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에게 자기들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애굽의 신관이 그대로 이스라엘을 따라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광야 인생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하며, 왜 그 구원의 방법이 어린양의 피로만 가능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렇게 죄를 많이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1 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그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기능적 존재로서 보여주었던 그 양태를 이 광야인 역사 속에서 그대로 보여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광야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죄인으로 폭로당하다가 결국 옛 사람이 완전히 부정되어 버리는, 자아 상실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신관이 어떤 신관이었습니까? 애굽의 신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 사람들이 되어 있었거든요. 애굽의 신관, 세상의 신관이란 ‘신은 나를 위한 신일뿐이다’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하는 하나님이고, 인과응보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데도 광야가 푸른 초장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기들을 위한 신을 조작해 냅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그들이 조작해 버린 하나님이 뭐였지요? 금송아지였습니다. 자기들의 치성을 받아주고 그 대가로 풍요와 다산을 허락해 주는 애굽과 가나안의 신이 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나온 하나님을 한낱 송아지로 조작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아론에게 뭐라고 요구를 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자기들을 위한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지요? 그게 죄인들의 공통된 신관입니다.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라는 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를 폭로해 버리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폭로시키시고 ‘과연 너희들이 그 꼴을 하고도 나에게 긍휼을 바랄 수 있는 자들이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일어나는 것이고 거기에서 진짜 속 깊은 찬양이 튀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모세를 시켜 율법을 주십니다.

 

(신8:1-2)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을 왜 주셨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정말 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인지 아닌지 그들 자신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걸 쌍무언약(雙務言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일방적이었는데 이제 쌍무언약이 주어집니다. ‘네가 지키면 복을 받고 네가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입니다. 그게 신명기 28장에서 자세하게 나타나지요? 이 쌍무언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 아래 가두어 버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의 구원의 통로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미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피의 계약이 맺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홀로 피의 계약자로 서셨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피의 계약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출24:6-8)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 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피로 쌍무 계약이 맺어졌다는 것은 이제 누구든 계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계약입니다. 그렇게 계약이 체결되자 모세는 하나님에게 계약서를 받으러 시내 산으로 올라갑니다. 바로 십계명 돌 판입니다. 그 계약서에는 계약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계약서의 내용을 하나라도 어길 시에는 이스라엘이 피로 갚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의 계약을 할 때 그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켜 준행할 것이라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약서를 받아 내려오는 동안에 아래에서는 이미 계약 파기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자로 살겠다고 피까지 뿌리며 계약을 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기들을 위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약은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가지고 내려온 십계명 돌 판이 깨지는 것입니다. 계약이 깨지면 반드시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이 피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피의 계약은 반드시 죽음으로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 약속이 지켜집니다. 순식간에 삼천 명이 도륙을 당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하나님의 칼에 이스라엘이 다 죽을 판입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 앞을 가로 막습니다.

 

(출32:31-32)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 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이스라엘을 살려 내십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났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의 수중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모세가 죽으면 이스라엘도 죽고 모세가 살면 이스라엘도 사는 형국으로 연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고전10: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기를 든 고라 자손을 다 죽여 버리시고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신 사건은 바로 이러한 중보자로서의 모세의 신분을 입증해 주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중보자 모세에게 다시 계약서가 주어집니다. 율법의 돌 판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대할 때마다 ‘우린 중보자 모세 때문에 산 자들이다’를 기억해 내야 할 판입니다. 자기들은 계약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해 버린 자들이니까요. 그게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참으로 뻔뻔합니다. 율법을 볼 때마다 자기들의 불가능함을 반추하고, 중보자 모세의 은혜를 떠 올려야 하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자기들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라고 교만을 떤 것입니다. 그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얻어먹은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난 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찬송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지키고 있고, 내가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찬송이 나와도 ‘나’를 위한 찬송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바리새인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꼬박 꼬박 드립니다.’ 거기에서 찬양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과 그러한 바리새인의 찬양이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어요?

 

그걸 그대로 교회의 현실로 가져와 보자고요. 이스라엘은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했으니까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그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법을 전혀 지킬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그제도 어겼고 바로 조금 전에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계약이 깨졌으니까요.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피의 계약 시에 바로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피의 계약의 당사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중보자이신 예수의 생명을 담보로 우리가 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난 것처럼 우리 성도도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을 볼 때마다 무엇을 떠 올려야 합니까? ‘아, 나는 나의 행위를 근거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나를 막아서서 나를 위해 중보자가 되신 예수 때문에 살아난 자구나’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지켜서 변화된 나를 구축하고, 발전된 나를 확보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어버린 죄인들은 절대 누구에게 먼저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습니다. 일단 자기의 체면과 가치와 영광을 챙기고 보자는 것이 인본주의의 망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니라 ‘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보자 모세는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분의 말을 들어야 산다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라고 당부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의 결국을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신31:16~22)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이스라엘은 절대 하나님의 법을 못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모세의 예언이 구체화 되어 나타난 곳이 우리가 공부하는 사사기인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고 자꾸 살아납니다.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도 살아나고, 에글론의 손에서도 살아나고, 야빈의 손에서도 살아납니다. 원래 그들에게 죽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징책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대적들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누구 때문에 살지요? 사사가 일어나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막고 서면 이스라엘이 살고, 사사가 죽으면 이스라엘이 다시 멸망의 길로 치달려 갑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멸망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 확증되는 곳이 사사기인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피로 맺은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다 죽어야 했던 이스라엘이 모세라는 중보자에 의해 살아나는 것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창세전 언약의 그림자인 것이고요.

 

(삿3:1-6)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그 조상들이나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후손들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시험에서 낙방을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사로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마침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기대했던 것처럼’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또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며 그것을 하나님으로 조작하고 왜곡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이미 기대되었고 예정되었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스라엘은 그 시조인 아브라함에서부터 줄곧 어떤 역할을 기능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절대 지킬 수 없는 무력한 자의 역할을 기능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소수의 무리에게 임하여 그들만을 살려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십자가의 피 앞에서 인간 측에서의 모든 행위가 전부 부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묵시를 사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입니다. 지금부터 그 70이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창조의 수 7과 관계를 하고 있으며,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은 과연 그 70이레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이 되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역사가 묵시로 편입이 되어, 역사의 가치를 잃게 되는지에 관해 설명을 해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아마 오늘 다 끝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다음 주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주일 로마서 강해 때 땅에 대한 토픽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구원이란 땅의 회복인데 그 회복될 땅은 약속을 품은 땅, 즉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어서 죽어 있던 자들을 살려 내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 내는 창세전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창세기의 그 죽은 흙이 하나님의 신부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으로 성경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죽은 흙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사이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여야 합니다. 그 사이에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행위나 업적이나 공로는 전부 불살라집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의 역사가 끝이 나는 지점까지를 70이레로 정해 주십니다.

 


        (단9:1-2, 24~27)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 이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할 당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다니엘에게 주어졌던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까?

 

(레26:27-35)

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 하리니

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30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3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 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이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된 이유입니다. 왜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대항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34절과 3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한 것이, 땅을 쉬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땅을 지키시기 위해 인간들을 땅에서 쫓아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땅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땅을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당신의 약속을 향한 하나님의 집착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자들은 절대로 그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사건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날 살펴본 것처럼 그 약속의 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천수답 농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들이 채소와 초목에 물을 대어서 자기들의 수고로 소산을 내어야 했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만 의존하여 소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약속의 땅은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이 가입하여 소산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340년, 그리고 사울 왕에서 부터 시드기야까지의 이스라엘 왕조 460년, 도합 800년간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을 왕 취급하지 않고 ‘왕이 없으므로’라는 변명을 앞세워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고, 왕조 시대에는 왕조시대대로 자기들의 종교행위와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내 보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9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 70년 포로 생활이 이미 예레미야의 서책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애굽 종살이가 아브라함 때 이미 언약이 되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그 70년이 지나면 바벨론에게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천사 가브리엘이 어떻게 풀어주는가 하면 70이레로 풀어 줍니다. 그 내용을 잘 보시면 70이레가 지나면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시기’가 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바로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때입니다.

 

(단9:24)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구절이 70이레를 푸는 아주 중요한 키가 되는 구절입니다.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거룩한 자가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기름부음은 성령이 부어지는 것으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 머리 위로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이 어디에서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시점이 바로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식적인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하늘로부터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왕 되심이 밝히 증명이 되는 그 장면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확실하게 그 의미를 펼쳐내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데 무엇을 타고 들어가시지요?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건 스가랴서에서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슥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곳이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요12:12-15)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새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들어가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게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에 나오는 거룩한 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 장면과 그로부터 3년 뒤의 일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어떻게 같은 내용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들어가시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슨 성? 거룩한 성. 그런데 그 성은 하나님의 저주 속에 들어 있는 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은 로마에게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힘의 세계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이방의 로마에게 점령당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타락이라고도 하고 흑암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 시대에는 거룩한 성이 바벨론에게 훼파당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다니엘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단9:16)

16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보세요. 지금 다니엘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지금 거룩한 성을 회복하러 오시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풀고 있는 것입니다.

 

(단9:22~24)

22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 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보세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거룩한 성과 거룩한 백성들의 회복을 예언하시면서 ‘네 백성, 네 거룩한 성’이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8장에서는 다니엘을 가리켜 인자라(단8:17)하십니다. 그 인자라는 단어는 다니엘서 7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풀려 날 때에도 바벨론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성의 중건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의 중건 정도가 아닌,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이라는 것을 계시를 통해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러 나갔을 때에 그는 나가지 않고 바벨론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 모습은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계11:8~9)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두 증인, 즉 교회가 바벨론 성에서 죽지요? 그런데 그 곳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회복되기 전의 예루살렘 성은 어디라는 말입니까?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으로 하늘의 왕이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계시는 그때에 죄악이 영속되며(영원히 속죄가 이루어짐)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게 되는 종말이 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승천 하신 그 이후의 역사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공중에 붕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역사를 끝내 버리셨다고 하시는데 이 역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선 70이레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를 좀 하셔야 합니다. 이레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한 주간, 즉 7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70이레 하면 490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예언서의 날짜 계산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따라서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490년 이후에는 역사가 종결이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나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잠시 후에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490년, 70이레는 우리가 레위기 26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70년 포로 생활을 통한 7배의 징책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항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칠 배로 징책 하실 것이라 하시고 70년 포로 생활로 밀어 버리시잖아요?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그 70년 포로 생활을 70이레로 다시 풀어 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70년 포로 생활이 담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칠 배로 징책을 당하는 현장, 즉 죽도록 두들겨 맞는(벌이 칠 배)현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70년 포로 생활은 70이레의 축소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70년 포로 생활이 왜 발생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년은 물론이요, 희년도 지키지 않고 땅을 혹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70이레, 즉 이 인류의 역사는 무엇이 폭로되는 현장이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완료하신 약속의 실체를 모르는 자들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종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현장을 폭로 당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벨론에 인자의 모형인 다니엘이 투입이 되고 그가 바벨론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은 어느 때에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그것이 규명이 되어야 70이레의 시점을 알 수 있잖아요?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세 차례에 걸친 침공에 의해 완전히 불타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1차 침공이 BC605년이었고 2차 침공이 BC597년입니다. 그리고 BC586년에 3차 침공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완전히 초토와 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BC538년에 고레스에게 망합니다. 그 고레스의 나라가 메대와 바사입니다. 그가 BC537년에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서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이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약 5만 명이 귀환하여서 BC 516년에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걸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고 성전 예배가 다시 회복된 때는 BC457년 2차포로 귀환 때입니다. 그때의 페르시아 왕이 아닥사스다입니다. 성전은 고레스가 재건하라고 했고 성은 아닥사스다가 중건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스7:11~13)

11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하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그렇지요? 이때가 바로 BC457년 아닥사스다 왕 7년 때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의 시작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 중건이 시작되어서 정확하게 49년 뒤인 BC408년에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중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난 뒤 49년 만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중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49년 동안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회복이 됩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온전히 성취되어 은혜로 운영이 되는 나라인데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리고 외형상의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49년은 일곱이레지요? 그렇다면 일곱이레 동안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다 완성이 된다고 해야 맞는데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의 예언에서는 일곱이레가 지나고 또 그 후로 62이레가 지나서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그 부분을 보겠습니다.

 

(단9:25)(표준 새 번역)

25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  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 성 중건 명령이 떨어지고 정확하게 일곱이레 만에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었습니다. 그건 기름부음 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성이 회복이 되는 구원이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거룩한 성이 중건이 되는 일에는 반드시 기름 부은 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역사 속에서는 예루살렘 성 중건이 일곱이레 동안에 일어났는데 계시 속에서는 일곱이레가 지나면 기름 부은 왕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2이레가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거꾸로, 62이레 동안에는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는 계시가 나오는데 역사 속에서는 기름 부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지요? 이게 조금 힘들어요.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먼저 62이레 후에 정말 기름부음 받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셨는지 계산을 해 드리겠습니다. 일곱이레동안에 역사 속에서 실제로 거룩한 성이 중건이 된 것이 BC408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62이레면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62X7=434입니다. 434에서 408을 빼면 26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스물여섯 살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BC에서 AD로 넘어가는 기점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가 실제화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세례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 이전 존재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의 합일과 연합을 이루는 것을 세례라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는 AD26년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70이레의 계산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예수님은 BC4년에 태어나셔서 AD3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이 BC2년에 죽었으니까 적어도 그 전에 태어나셨어야 했잖아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AD526년에 로마 황제 유스틴이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게 예수님 탄생을 기점으로 서력기원을 바꾸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보다 4년 뒤인 로마 시 창건일을 기준으로 서력기원을 바꾸었습니다. 로마시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서력기원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4년 뒤를 기점으로 해서 출발을 합니다. 그러니까 BC4년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AD26년이 맞는 것이고, 그 때가 예수님의 나이 서른이었을 때였던 것입니다. 소름끼치게 정확하지요?

 

그렇다면 이제 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이렇게 혼동이 되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죄인과 연합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거룩한 성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사와 묵시의 오버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역사 속의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임해버리지요? 그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역사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역사를 살지만 역사와 관계없는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을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 역사적인 세월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은 1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3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10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의 결국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거기에 이미 완료 상태로 존재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과 역사가 묵시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부터 역사 속에서 그가 당하는 고난에 의연했고 세상의 무시와 멸시와 천대에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일을 시작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진짜 거룩한 성으로 회복시켜 내시는 그 사건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두 묵시 속에서 한 경점으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같은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지만 그때는 이미 묵시 속의 한 이레이기 때문에 그 사건들이 전부 하나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혼돈스럽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거룩한 성의 중건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를 이 세상 마지막 나라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뜨인 돌이신 예수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나는 신상에 대한 해석이 나오지요? 느부갓네살의 꿈 말입니다. 그것은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에 대한 계시임과 동시에 종말에 대한 계시입니다.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에 대한 환상, 사자, 곰, 표범, 열 뿔 달린 짐승 역시 네 나라에 대한 계시입니다. 거기에서 공히 마지막 종말을 장식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로마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 가셔서, 뜨인 돌로서 로마를 부수시는 것으로 역사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언약 아래에서의 묵시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결된 역사를 묵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 역사 속에서의 그 어떤 가치 있는 행위나 업적도 전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이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육일동안 창조를 하시고 칠일 째에 안식을 하셨지요? 그 안식의 날인 칠일 째까지가 천지창조의 완성지점입니다. 그건 하나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죽음의 땅이 생기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에 의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거룩한 성이 되는 창세전 언약이 성취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처음 일곱이레가 바로 그 창조의 수, 칠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가 그렇게 안식으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제자리 회복으로 끝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칠이라는 상징적 기간 안에서 완료가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의 주기가 7이라는 숫자를 주기로 하여 순환되는 것입니다.

그건 시간과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의해서 성취가 될 것임을 첫 일곱이레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62이레에서도 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고 그의 죽음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62이레는 첫 일곱이레를 역사 속에서 설명해 주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이레와 62이레는 똑같은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역사 속에서 풀려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BC408년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었습니다. 그 일은 다니엘이라는 인자의 모형이 바벨론에서 죽는 것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간 400년을 이스라엘의 암흑기라 부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지 않는 시기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 신앙으로, 성전 제사로 돌아가게 되면 그 끝은 죽음이며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된 그 시기를 암흑으로 덮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암흑의 이스라엘에 빛이신 예수가 오셔서 거룩한 성인 이스라엘을 십자가로 회복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두움에 빛이 오셨는데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62이레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이레는 62이레가 모형화 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고 62 이레는 그 일곱이레를 역사 속에서 펼쳐 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 마지막 한 이레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일곱이레 안에 모든 역사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62이레 속에도 역시 모든 역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마지막 한 이레, 즉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70이레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으로 돌아가 보시면 그 마지막 한 이레 동안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지요?

(단9:26-27)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 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마지막 한 이레 바로 전에 기름부음 받은 이가 죽습니다. 그리고는 한 왕이 오는데 그 왕은 성읍을 훼파하여 전쟁을 하는 왕입니다. 심판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일까요?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다시 와서 전쟁을 일으키는 왕은 마지막 한 이레 동안 언약을 세우는데 그가 무엇을 금하느냐 하면 제사와 예물, 즉 성전 제사와 율법신앙을 금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료가 되는,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대상에게 전가가 되는 언약입니다. 따라서 그 언약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가 누구와 전쟁을 합니까? 62이레 동안에 가짜 거룩한 성으로 발각이 된 이 세상의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왕에 의해 가짜 성읍이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그리고 그 왕은 마지막 날까지 성전 꼭대기에 흉물스러운 끔찍한 것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게 뭘까요? 가짜 거룩한 성의 가짜 종교행위를 종말 때까지 공격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가짜 교회들에게 흉물스러운 괴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와 바리새적인 위선들을 공격할 것이니까요.

물론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로마의 황제와 로마의 군대로 역사화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묵시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역사 속에서 묵시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도 한 번 모형으로 나타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지요? 그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주의는 흑암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다 파괴되고 훼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한 이레 동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이레 동안 이 세상의 인본주의가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고 이 세상의 성, 즉 이 세상 땅이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훼파될 것이라면, 그 한 이레 동안 이 세상이 어떤 상태로 던져지겠습니까? 고난으로 던져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이레를 7년 대환난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속에서 묵시 속의 왕의 나라로 편입이 된 자들이 천년 왕국을 산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묵시의 세계는 시간 밖의 세계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곳이라고 하신 거거든요? 거기에서의 천년이 영원, 즉 묵시의 영역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 창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준비되었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아담 때부터 시작하여 전부 일곱이레와 62이레를 설명하는 모형의 나라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 그 묵시의 세계 속의 존재들이 천년 왕국을 역사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므로 그 마지막 한 이레를 사는, 묵시와 역사를 동시에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 즉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를 공격당하면서 예수만 믿는 자로 부수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찬송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이 왜 전부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