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8) 왜 야빈에게 파셨을까?   (개역한글 삿4:1~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6

사사기(8)

왜 야빈에게 파셨을까?

 

(개역한글 삿4:1~24)

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일만인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은지라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서 내려가니

15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17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 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가로되 장막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가로되 오라 내가 너의 찾는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말뚝은 그 살쩍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이기어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여 사사 드보라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워낙 오해가 많은 그런 내용이라 오늘은 그 드보라의 이야기의 개관을 설명해 드리고 다음 주부터 구체적인 본문 강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보라 하면 여성들의 우상이지요? 그래서 드보라 여선교회, 드보라 권사회, 드보라 중보기도 팀 등 많은 이름들이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드보라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바락을 부르고 찬양 한 곡 부른 것 외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우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교회 안의 인본주의가 드보라를 마치 잔다르크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하고 그들을 몰아낸 후 이스라엘이 80년간 태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사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 어구를 직역을 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기를 더하니라’입니다. 이것은 악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사기의 그림들은 사사가 등장해서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죄도 함께 씻겨 졌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는 계속 쌓여가고 있는 가운데 그 죄가 하나님이 택하신 사사에 의해 잠시 가려지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해부를 해 보려고 합니다. 

사사가 죽고 이스라엘의 죄가 다시 전면으로 드러나게 되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까? 이스라엘을 팔아 버리십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삿4:2)

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십니다. 이스라엘을 팔아버리는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에 닥치는 고난의 주관자가 누구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구산 리사다임이나 에글론을 보낸 분이 누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사를 보내셔서 건져내시지요? ‘병주고 약주고’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벌이실까요?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팔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마카르’는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건 우리가 구속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판 것은 반드시 돈을 주고 사와야 합니다. 그걸 구속이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게 팔아버리시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속전을 지불하시고 그 백성들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아폴뤼트로시스)은 반드시 속전을 지급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무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속전을 지불하고 죄의 노예 되었던 자들을 사 올리는 구속의 은혜를 설명하시기 위해 당신 백성들을 죄의 세력에게 잠시 팔아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신의 모습을 ‘곤고한 몸, 사망의 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팔림에 의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에게 극심한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죄에 대한 자각에 의한 성도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죄에 대한 치 떨리는 울부짖음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죄를 도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죄의 노예로 팔려 수시로 죄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은 가끔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이미 죄에서 건짐을 받아 죄와 무관한 자가 된 것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운명적이고 선언적이며 신분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죄밖에 내 놓지 못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의 말처럼 존재와 행위는 따로 떼어서 객체화하고 대상화하여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고 의인에게서는 선만 나옵니다. 무용수와 춤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춤인 것입니다. 성도의 실존은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는 죄라는 행위만 내어 놓게 되지만 그 모든 행위를 합력시켜 선의 재료로 쓰시는 분의 개입에 의해 그들의 행위가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의 본질은 죄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후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해 죄에게 당신의 백성들을 학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사기 전체가 이스라엘의 죄가 계속 더해지는 모습으로 전개가 되는 것이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대적, 즉 죄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대적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 ‘내가 바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자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가 도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 온통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득 차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창세전 언약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창세전 언약, 즉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엡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보시다시피 창세전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거저, 값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다 칭해주시는 것이 바로 창세전 언약인 것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위해 만물이 창조된 것입니다.

 

(골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은 이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 즉 미리 준비된 대본에 의해 착착 진행이 되어져 가는 하나님 연출의 대하드라마가 이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한 마디로 줄이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 따라서 역사란 십자가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에 의해 창세, 세상이 창조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십자가에 빛을 비추면 십자가의 그림자가 땅 위에 그려지지요? 그 그림자 전체를 역사라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토막토막 내어보면 전부 십자가가 튀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슬레이트가 쳐지는데 그 커트마다 전부 십자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긴 갈치를 토막 내면 갈치의 모양은 없어지지만 그 각자의 토막이 여전히 갈치의 맛과 향과 본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역사는 아무리 토막토막 자른다 해도 그 속에는 창세전 언약, 즉 십자가만 튀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사란 ’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 역사를 다 통합하여 꾹 하고 짜 버리면 십자가와 예수와 죄인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와 예수를 중심으로 죄인들이 두 부류로 분류가 되어 버립니다. 구원받은 죄인과 유기된 죄인. 그게 십자가 양쪽으로 갈라진 두 강도의 모습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양쪽에 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는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쟁취한 어떤 운 좋은 사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을 어떻게 갈라 버리는가를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한쪽은 힘없이 스러져가는 예수의 죽음에 자신을 던지는 바보 같은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여전히 기고만장하여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를 조롱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 안에 들어있는 죄를 폭로해 버림으로 해서 멋지게 감추어 둔 위장막 뒤의 죄의 실체를 까 발려 버립니다. 그런데 한 쪽은 그 까발림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붙들게 되고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실체가 죄 덩어리인지 조차 모르고 여전히 자신을 의지하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의 첫 창조에서 그림으로 힌트 되고 있지요?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자,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빛과 어두움이 갈라지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물과 뭍이 갈라지지요? 분리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은 분리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합쳐지고 물과 뭍이 섞여 버리지요? 어둠과 빛이 섞이는 형국입니다. 그걸 저주요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옷을 두 가지 재료로 만들면 안 된다는 항목이 있는 것이고, 나귀와 소를 묶어서 함께 멍에를 메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한 밭에 두 종류의 씨를 뿌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죄 속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장악된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 속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죄에 대한 처절한 자각,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처절한 자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궁창 아래의 물이, 저주의 바다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빛과 궁창 위의 물과 뭍과 공존한단 말입니다. 그 때 그 섞여 있던 혼돈이 죄에 대한 자각으로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 갈라진 것 중, 어둠과 궁창 아래의 물과 저주의 바다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 그 모든 혼돈과 공허들이 십자가에서 도말되었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을 복음의 이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가 성도의 인생에 찾아오게 되면 성도가 어떻게 됩니까? 선택받지 못한 자들과 분리가 되지요? 그 말은 성도의 인생에 예수가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끌려나와 종말로 투입이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승승장구, 일취월장, 탄탄대로의 삶을 살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사는 자들이 세상과 분리가 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의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과 동행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하나님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한쪽에 대해 죽어야 한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요한이 ‘밖에서 띠를 띠우고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에녹을 동경합니다. 아닙니다. 에녹은 우리 성도의 인생을 모형하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에녹은 세상에서 죽음의 삶, 종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승천의 삶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에녹의 삶인 것입니다. 에녹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 언제 입니까? 에녹이 65세 되었을 때였습니다.

 

(창5:21~24)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에녹이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 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65년간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까?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그해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혹은 ‘이가 죽으면 새 세상이 열린다, 새 세상이 확장된다’라는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므두셀라라는 아이를 얻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수긍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뒤 어떻게 살았을까요? 에녹을 볼 때마다 ‘이 세상은 곧 끝난다. 아울러 나도 이 세상에서 곧 끝난다. 따라서 난 곧 끝날 이 세상에 내 생명을 걸 수 없다. 이 세상 다음에 열릴 그 나라를 준비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게 세상에서의 죽음입니다. 자기부인이란 말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택한 자의 삶에 임하면 그 사람은 곧 이 세상에서 죽는 자의 삶으로 돌입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는 자만 삽니다. 이렇게 성도가, 죄로 인해 이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당할 것이고 자신도 자신의 죄로 인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붙들게 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동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은 가장 먼저 자신과 세상의 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라는 아들과 함께 온, 하나님의 계시를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유1:12-16)

12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 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입니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구름 곧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이요, 가을이 되어도 열매 하나도 맺음이 없이 죽고 또 죽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요,

13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을 잃은 별들입니다. 짙은 어둠이 영원히 그들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14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16 이들은 불만에 쌓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

보세요. 아담의 칠 대손 에녹이 예수님의 구원을 이야기 하지요?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의 불가능함과 추악함, 그리고 심판과 구원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과만 동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그러한 죄인들의 욕망의 배설물인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방인처럼 둥둥 뜨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은 에녹의 증손자인 노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산 위의 배짓기에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심판이라는 대 전제 앞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설명하는 동일한 모형들인 것입니다.

 

산 위의 배짓기는 시내산이나 호렙산이나 변화산 등에서 유추되어지는 거룩의 장소에서의 거룩한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의 거룩의 행위, 세상과 구별된 행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바보 같은 행위입니다. 산꼭대기에다 배를 짓는 행위란 말입니다. 비 한번 오지 않았던 때입니다. 땅에서 솟는 이슬로 농사를 짓던 때에 산 위에다가 배를 만드는 짓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 사람에게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일상이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짓을 하는 자처럼 보이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성도의 인생에 예수가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미친 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당에 나오는 성도들은 모두 확실하게 미치기 위해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가 죽는 날 이 세상에 홍수가 임했습니다.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때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미친 자의 삶을 살던 노아만 저주의 물위로 뜬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에녹처럼 죽음을, 사망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므두셀라가 죽었더니 이 세상에 심판이 임했고 에녹을 상징하는 노아가, 살아서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에녹의 승천인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었더니 심판이 임했고 노아가 살았으며, 예수가 죽었더니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교회가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에녹에게 므두셀라는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메시아의 상징으로 에녹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므두셀라,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야 새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은 성도는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주어짐과 동시에 그 죽임 당하는 메시아의 삶을 이 세상에서 모형화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에녹처럼. 노아처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찾아오게 되면 ‘예수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그리고 내가 산다.’라는 이 역사의 실체, 이 역사의 존재 목적이 우리에게 깨달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미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에녹과 노아는 미래에 되어질 일을 기대하면서도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종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이미 일어난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그들보다 더 확실하게 이 세상에서 미친 자의 취급을 받고, 이상한 자의 취급을 받는 삶으로 몰리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찾아온 성도의 삶 속에서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그 심판을 초래하게 한 죄에 대한 처절한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구원의 도에 집중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일상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구원자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그런데 죽었다, 그래서 이 땅은 이미 심판에 던져졌다, 그래서 난 이미 심판에 던져진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에 내 목숨을 걸 수가 없다’라는 진리를 조금씩 조금씩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의 분리가 일어남과 동시에 내 안에서의 빛과 어두움이 극명하게 분리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좌정해 계신 빛이신 주님과 온통 어두움뿐인 나의 실체가 분명하게 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자각되고 들켜야 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분리의 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인 중의 괴수들이 사는 곳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나는 여기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내용이 십자가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민수기로 가서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민21:1-9)

1 남방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 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 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 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의 도달 했을 때 네게브 사막 동북부에 위치했던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 즉 이스라엘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 가데스바네아로부터 헤브론으로 올라갔던 그 길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해서 몇 사람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여기에서 서원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다르’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발적 의지와 적극적인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에 보면 인간의 서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시면 그 성읍을 멸하고 얻어진 모든 것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고, 자기 자신들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레27:1-5) 하나님은 아랏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랏을 이기고 이제 한 발만 내딛으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한 셈입니다.

 

지도를 잠깐 보시면

 

 

 

아랏이라는 나라는 지도 중간의 네게브 사막 동북부입니다. 그러니까 부산서 출발한 전투 행렬이 과천까지 와 있는 형국입니다. 이제 과천 수방사 고개만 넘으면 서울입니다. 고지가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흥분했겠지요? 자기들의 편을 들어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관문이라 여겼던 아랏과의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자기들은 그 일로 하나님께 서원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돔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 왕을 그 사이에 두십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의 서원의 실체를 폭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제 에돔만 통과하면 가나안인데 에돔이 이스라엘을 막아서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돔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시지요?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 길을 돌아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이라는 장막으로 인해 그들의 실체를 폭로 당합니다. 곧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불편한 상황이 펼쳐지자 곧 자신의 왕 됨이 들켜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십니다. 그 불 뱀은 이스라엘에게 보내진 교육용 교보재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건 속에서 마치 이스라엘을 막고 있는 에돔이 불 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양육을 위해 불 뱀을 동원하신 것이고 에돔이 바로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 뱀에 물려 아우성을 치며 죽어가는 이스라엘에게 그 불 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고 그것을 쳐다보면 낫는다는 처방을 주십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에돔으로 상징이 되어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바로 내 안에 불 뱀으로 존재하는 죄라는 것을 이스라엘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놋 뱀을 보고 자신들 안의 불 뱀, 즉 자신들 안의 죄를 바라보는 자가 구원에 이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당해 장대에 높이 달리는 자가 사는 자이고, 여전히 그 불 뱀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 놋 뱀을 바라보지 않는 자가 죽는 자인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대로 재연이 된 것입니다.

 

(요3:13~15)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놋 뱀이 되셔서 장대에 달리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무엇이 되셔서 장대에 달리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가 되셔서 장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장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내가 바로 저기에 달려서 저주 속에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자들이 어떻게 된다고요? 에녹처럼 하늘로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12:32~33)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주님께서 땅에서 들리신다는 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 지신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하늘로 승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승천, 즉 구원은 반드시 십자가와 병행되어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번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거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에녹처럼 이 세상의 심판을 위해 죽으신 분의 삶에 연합되어 종말의 삶을 살게 되는 자만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을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야빈에게 팔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야빈은 애굽의 바로, 그랄의 아비멜렉처럼, 가나안 왕의 일반적 호칭입니다. 그런데 그 하솔 왕 야빈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완전히 도륙되어 진멸된 나라의 왕입니다. 물론 야빈도 죽었습니다.

 

(수11:10~12)

10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 죽이고

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12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그런데 왜 그렇게 멸망한 하솔과 야빈이 사사기에 다시 나타나느냐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하여 가나안에 입성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서입니다.

 

(출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그렇지요?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정말 두 손 두 발 다 묶인 채 가만히 있었나요? 아니지요? 앞장서신 하나님의 뒤를 좇아 전투에 참여 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가만히 있은 거예요?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꼼짝 말고 마네킹처럼 서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의 계획과 의지대로 이리저리 뛰지 말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끌려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밖에서 띠 띠우고 끌고 가겠다고 하신 그 이야기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의 한 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게 만든 그 백성들을 어디로 끌고 가시는가 하면 십자가로 끌고 가신단 말입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버리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십자가로 끌고 가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을 집어 넣으셔서 그들 안에 숨어 있는, 아니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는 그들의 죄를 밖으로 드러내시어 ‘난 하나님께서 지금 지옥에 보내신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어내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죽인 자입니다’ 이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을 십자가로의 이끄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 말년의 ‘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불 뱀의 공격으로 ‘내가 불 뱀이었군요’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고, 야빈의 공격으로 ‘내가 하나님의 대적인 야빈이었습니다’를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에녹처럼, 노아처럼, 세상에서 격리되어 종말의 생으로 가게 되는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분리, 그 분리를 잊지 마세요. 복음이, 예수가, 은혜가 우리에게 떨어지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에서의 분리, 죽음의 레이스에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에서 분리해 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분리해 내시고, 교회를 유대교에서 분리해 내시고, 예수를 세상에서 분리해 내시는 것, 그 속에 항상 옛 것의 죽음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삿4:19~20)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가로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0절을 보시면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피해 도망가서 야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누가 와서 찾으면 없다고 하라고 합니다. 그 어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주 재미있는 워드플레이가 보입니다. 그 어절에 ‘하야’라는 단어, 즉 ‘존재’라는 단어와 ‘아인’이라는 단어, 즉 ‘부존재’라는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이스라엘 사람이 와서 ‘존재’에 대해 묻거든 ‘부존재’로 대답을 하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시스라 자신이나 시스라를 찾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둘 다 부존재, nothingness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시스라가 야엘이라는 여자에 의해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 죽습니다. 이 드보라의 전쟁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의 전쟁이 아니라 누가 ‘자신은 말뚝에 박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아느냐의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미 멸망한 가나안 왕 야빈을 다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가능하며 패역한 존재인지를 야빈과 시스라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어내시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싸움은 이 세상에서 살아나는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10:39)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시퍼렇게 살아 존재할 수 있는 비결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교회 부흥 100주년 기념 연합 예배가 상암 경기장에서 열렸을 때 주제가 ‘하나님 살려 주옵소서’였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죽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죽여주옵소서’를 외쳐야 할 자들이 ‘하나님 살려 주세요’를 외치면서 회개를 하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은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의 어두운 죄 성을 그대로 투영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앞에 비워진 존재, 죽은 존재로 살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아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고 피조물은 모두 ‘없음’의 자리로 내려 앉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자신들을 맡겨야 그것이 안식이 되는 것이고, 보시기에 좋은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완벽한 창조, 보시기에 좋은 창조에 자신의 손을 대어 기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가 왜 죽은 흙으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판단도 스스로 하고 힘을 키우고 세상의 힘을 모아서 이 세상의 세상 됨에 기여를 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그때 안식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없음은 없음의 자리에 구별되어 내려 앉아 있어야 하는 데 없음이 있음의 흉내를 내며 구별과 거룩이 혼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걸 타락이라고 하고, 혼돈이라고 하고,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기에서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다시 ‘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흙입니다. 죄인입니다’를 고백하는 자리로 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날 때부터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난 살아야해’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난 살아야 한다고 엉엉 울다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엄마의 젖을 미친 듯이 빨아 댑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살짜리 아이가 발을 헛디디면서 ‘아이고 죽을 뻔 했네’하고 탄식을 합니다. 그 아이가 정말 죽음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그냥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살기 위해 경쟁을 하고, 살기 위해 일을 합니다. 살기 위해 결혼을 하고, 살기 위해 노후를 준비합니다. 모든 게 다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살기 위해 사는 자들은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심으로 ‘아, 난 죽어 마땅한 자구나’하는 자기부인의 탄식을 들어내시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들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몸으로 다시 입혀주기 전까지는 옛 몸을 왜 꼭 벗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그 옛 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죽을 수 있는 것인지를 경험하며, 체험하며 배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죄의 몸을 여전히 입고 있기에 죄만 짓습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나의 유익만을 위해 선택을 하고 나의 유익만을 위해 손발을 움직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확실하게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연성 앞에 두 손 번쩍 들고 항복을 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는 아무리 가르쳐도 앞으로 못갑니다. 열심히 연습을 해서 앞으로 기어가는 건 게가 아니라 거미인 것입니다. 다리 숫자는 비슷해도 게와 거미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게는 옆으로 옆으로 가다가 결국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옆으로 밖에 갈 수 없는 것을 죄라고 비유해 보자고요. 앞으로 가야 사는데 옆으로 밖에 갈 수 없는 죄인들은 결국 다 죽어야 하는데 그 멸망의 자리에 예수가 밀치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청년부의 최 영이가 캠핑장을 하나 예약을 해 주어서 2월 달에 캠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추워서 바닷가에도 차를 가지고 가야 했는데 그 바닷가에서 작은 연두색 게가 한 마리 차 발판에 붙었던 모양입니다. 한 이틀을 그곳에서 묵다가 LA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따뜻한 순두부나 한 그릇씩 먹기 위해 순두부집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동차 발판에 붙어있던 그 연두색 작은 게가 옆으로 열심히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뿔싸, 위기일발, 옆 차가 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게가 계속 그렇게 옆으로 달리면 영락없이 차바퀴에 치일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가 저도 모르게 ‘야, 앞으로’하고 외쳤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야, 앞으로, 안 그러면 죽어’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게는 여전히 옆으로 열심히 달리다가 결국 그 자동차 뒷바퀴에 치어서 납작하게 찌그러졌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저게 바로 우리 죄인들의 모습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 열심히 비전과 야망을 품고 달리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는 죄인들의 모습과 해변을 벗어나 광활한 아스팔트 위를 보무도 당당히 달리던 그 게의 모습이 또렷하게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는 자들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동차 뒷바퀴에서 우리를 밀어내시고 당신이 납작하게 깔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과녁을 벗어나 달리고 있는가(하마르티아, 죄)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주는 반드시 사망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망의 자리로 예수님께서 밀고 들어오셨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부인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부인의 삶이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밖에서 띠 띠우고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앞으로도 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건 뒤에서 누군가 살짝 밀어 주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 게가 앞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간혹 나타나는 선한 삶을 보면서 ‘이건 내 실력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사심’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의 죽음입니다. 그렇게 나의 실체를 발각당하면서 우리는 왜 예수가 죽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가르쳐서 앞으로 갈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오래 오래 이 세상에 사시면서 잘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게가 앞으로 달리며 400 미터 계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게는 아무리 가르쳐도 앞으로 못 갑니다. 그래서 게가 깔려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가 깔려 죽고 앞으로 갈 수 있는 새 몸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다가 여러분의 거처를 구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의 노마디즘입니다. 끊임없는 재 고착화, 재 영토화, 재 고정화의 궤적을 남기며 삽니다. 그건 ‘나’라는 국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 세상 건축자들의 집요한 죄 성인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이 됩니다. 왜 여러분은 꼭 자기가 앉던 자리에만 앉으십니까? 거기에 사탕이라도 붙여 놓으셨나요? 그런데 왜 꼭 그 자리에만 앉지요? 그 자리를 자기의 자리로 고정화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 자리’라는 것이지요. 인간들은 자기의 거처를 자기가 마련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것처럼 인간은 예수님이 마련하시는 거처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는 나의 열심과 노력과 업적과 공로와 무관한 곳이기 때문에 그 거처를 마련하시는 예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없이는 절대 불안해서 못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천국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율법이요, 성화입니다. 그래야 내가 고정화한 그 자리에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영원한 불에 타버릴 자리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과 지혜가 가입이 되어 건축된 천국의 거처는 절대 영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거처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엇을 보태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저 ‘왜 예수님께서 천국의 거처를 홀로 마련하실 수밖에 없는 지’를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만원 버스를 타도, 만원 전철을 타도 우리는 우리의 거처를 확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만든 거처에서, 다른 말로 내가 구축한 ‘나’라는 나라에서 인간은 안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자기자리 고정화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걸 부수어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이방인이요, 나그네요, 노마드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지 마세요.’하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그러한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예수 앞에 엎드려 통곡하자는 말입니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그게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