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5)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시험   (삿3:1~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4

사사기(5)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시험

 

(삿3:1~11)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3장부터 드디어 사사기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속을 썩이는 그런 존재로 드러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상황을 누가 연출해 내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1절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1절을 다시 보세요.

 

(삿3:1)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가나안 열국을 남겨 두셨다는 것이지요? 그 시험이 무슨 시험일까요? 그 시험이 어떤 시험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시험의 내용을 먼저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22장으로 가면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시험, 나싸’라는 단어가 똑같이 등장합니다.

 

(창22: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이었지요?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브라함의 보물 이삭을 버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2절을 한 번 보세요.

 

(창22:2)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보시면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데 그 이삭이 그냥 이삭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네가 네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험의 내용은 ‘하나님이냐?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의 시험인 것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죄를 들추어내시는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 자체가, 피조물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험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주어졌던 시험이 아닙니다. 그 시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악과 시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하나님의 법을 내려 주십니다. ‘선악과만 먹지 말아라’ 하나님의 법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지킨다는 것은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법을 어겨버렸습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였습니다. 그걸 한 마디로 줄이면 ‘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의 유익으로 마음이 기울 때 그것을 ‘죄’라 하고 ‘악’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오실 때 이스라엘에게 똑같은 시험을 던지십니다.

 

(신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십니다. ‘너는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고 연이어 2절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인지를 판별하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3장으로 가면 하나님의 시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 여러 모양으로 떨어지고 있음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13:1-3)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데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는지를 밝혀내시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가짜 선지자와 환상을 보는 꿈꾸는 자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을 좇으면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갈을 함께 들어 보자고요.

 

(신13:4-9)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 지니라

6 네 동복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이적과 기사는 ‘나의 관심’과 ‘나의 욕구 충족’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절대로 그러한 자들의 미혹에 속지 말아라’ 그런데 그들을 누가 보내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뭘 하시기 위해서요?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요. 하나님이 보내셔놓고 그러한 자들은 분명 이스라엘을 우상에게로 이끄는 자들이니 그 우상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절대 그들을 좇아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한 자들은 죽여 버리라고 반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광야 시절 내내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우롱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렇게 역사 내내 계속되어 집니다.

 

그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시험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 가나안 열국들을 이스라엘 주변에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본문 5절 이하를 보세요.

 

(삿3:5-7)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다 쫓아내고 죽여 버리라고 했던 가나안 족속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깁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그들 주위에 흩뿌려 놓았더니 이스라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름 주워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 밝혀내려는 내용인 것입니다. 5절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마침내’입니다. ‘마침내’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 추진되던 일이 그 목적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마침내 이루어졌는데 그게 뭐라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죄인으로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험은 ‘너희는 죄인이다’를 밝혀내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래야 메시아의 필연성이 증명이 되잖아요? 이 사사기 3장 서두의 이야기는 창세기 6장의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이미 예표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창6:1-8)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결과 어떤 자손들이 나오게 되었나요? 용사, 유명한 사람, 네피림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건 유사 이래로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목적지 아닌가요? 모든 인간이 용사가 되고 싶어 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결과를 보시고 한탄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자들을 싹 쓸어버리시겠다고 저주를 선포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 큰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유용한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큰 자 되기, 유명한자 되기, 용사되기의 시도를 저주하십니다. 그건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고, 비워지고, 낮아져야 하는 것이지 절대 커지고 높아지고 잘나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그러한 자리로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들은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 속에서 당신의 은혜를 부어 몇 사람을 건져 내십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열국의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 그들과 혼인을 했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익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쓰레기가 됩니다. 다 쫓아내고 죽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불순종은 바로 바알과 아세라라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바알과 아세라는 ‘나’라는 우상의 모형일 뿐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말씀을 버리고 나니 내 말을 들어 줄 다른 우상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은 듣는 존재이지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상은 자기에게 부탁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일 처리 비용으로 내어놓는 제물과 헌금을 받아 챙깁니다. 그리고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일을 마칩니다. 그게 신전의 구조입니다. 마귀 나라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만큼 반대급부로 보상을 받는 원리, 그 속에 은혜와 배려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자기 발전을 꾀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환경과 조건과 재화를 이용하려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을 내리시고 그 말씀을 성취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여야지 자기의 말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자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성이나 헌금 등의 보수를 받고 그 보수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게 샤머니즘입니다. 무속신앙이지요. 그렇게 인간이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켜서 그 원함을 성취시키기 위해 자기의 말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자가 ‘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을 하는 ‘나’만 남고 나에게 말을 하는 그 대상이 잊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우상 섬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애굽의 종 되었던 자신의 실체를 잊어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미래의 되고 싶은 나’를 추구하게 될 때 그들의 하나님은 우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8:11~20)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 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 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 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인간은 조금이라도 환경이 편해지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모든 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동의하실 수 없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짜 너희가 나를 잊는지 안 잊는지 보라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생래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들과 혼인을 해 버립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을 자의로 버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성경이 그렇게 ‘나’라는 우상에게 묶여 있는 자들을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가나안 전쟁이 뭡니까? 땅 빼앗기 싸움인가요? 가나안 전쟁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 거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가나안 사람들은 그게 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행위의 전쟁이 바로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내 힘과 세상의 재화로 내 존재의 근거와 기반을 삼는 자들과 어린양의 피만을 존재의 근거와 기반으로 삼는 자들과의 전쟁이 가나안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가나안 전쟁의 전사로, ‘나’를 살찌우고 ‘나’를 높이는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아래로 무릎을 꿇는 자로 털리는 삶을 사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일차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거든요. ‘나’ 자신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니까요. 거기에서 은혜와 행위의 전쟁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게 가나안 전쟁입니다. 그게 세상으로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아는 우리 성도의 삶은 원칙적으로 자기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와 노력과 세상의 재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매진하는 삶이 축복받은 삶이 아니라 저주받은 삶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가나안에서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그 전쟁의 내용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의 존재의 근거를 세상의 힘과 나의 에너지와 열심으로 붙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과 전쟁을 해야 하는 자들이 가나안이 되어 버리는 형국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과 가나안 딸들과의 혼인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는 우리 성도들의 이 세상살이를 대변하고 대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이 그러한 반복되는 실패의 삶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것을 환경으로 줘 보시기도 하고 도에 넘치는 부유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야 함을 선포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모든 현실은 다 시험의 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이 닥쳐오면 그 고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세상의 힘을 붙들고, 풍요가 환경으로 주어지면 그 풍요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어야 겨우 마음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놓인 마음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수순을 밟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떤 전쟁에서도 자신의 손에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되는 자들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쓰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전쟁,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큰 자, 용사, 유명한 자가 되어 그 전쟁에 도움이 되겠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도구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게 실패하는 가나안 전쟁입니다. 쉬운 말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사유하려 할 때 가나안 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행군해 가면서 처음으로 맞게 된 적이 누구였습니까? 아말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거기에서 보여주십니다. 모세의 두 손이 하늘로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두 손이 내려오면 밀립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과 노력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전쟁임이 거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전쟁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의 고백이 전제된 전쟁이어야지 우리의 힘과 노력을 보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그런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전제된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고 가신다고 해도 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순종의 고백이 도출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을 보태겠다고 하는 전쟁에서는 우리의 뜻이 반드시 개입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개입한 이상 나의 의견도 존중하여 내가 그리고 있는 ‘되고 싶은 나’의 성취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두 손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28:2-5)

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의 손은 주님을 향하여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의 손에는 자기들이 행한 행위가 들려 있지요?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대로 갚아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며 사는 자들인데 자기들이 무언가 세우고 건설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전쟁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자기들의 지혜와 힘을 사용한 전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파괴하고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과 지혜를 사용하여 건설하고 투쟁하는 것의 결과물은 항상 우상숭배로 출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63:4)

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성도는 이렇게 주님의 하신 일을 송축하며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그 시험에서 합격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침내’ 이스라엘의 정체가 폭로가 되자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사사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정석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환경을 조작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나’라는 우상을 붙들 때 그들을 징치하시는 분은 누구세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보내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관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간까지도 바로 그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도구들이 각자 자기들의 영광을 챙기려 할 때 거기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삶은 인간의 소유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자기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번영시켜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사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것을 보아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그곳에서 건지셔야 합니다. 왜요? 거기가 바로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을 위해 사는 곳.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사사를 보냅니다.

 

이스라엘에게 사사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확연히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사가 필요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붙드는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삿3:9)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기에서 부르짖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철저한 자기절망을 전제한 단어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시험에서 완전히 절망적 실패를 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부르짖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구원자의 필연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구원자’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자리로의 내몰림인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한가를 부르짖어 고백하는 자리로 내몰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은 바로 그 구원자를 위해 창조가 되고 구원자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이 다 타락했다가 전부 구원을 받습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교회는 개별적인 성숙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성숙한 어떤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집단적으로 어떤 교육장으로 내몰렸다가 모두 함께 구원자의 도움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의 개별적 성숙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인간의 행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급 이론이나 상급 차등론 같은 것은 정말 얼토당토 한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성숙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행위에 따라 차등 있는 상급이 주어집니까?

 

그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어떻게 등장하는 지를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의 사사가 조금 이상하게 등장을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이미 8년간 메소보다미아에게 점령을 당해 고생고생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사가 8년 뒤에 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사가 누구입니까?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이 누굽니까? 갈렙의 조카이자 사위입니다. 그는 이미 여호수아 15장에서 기럇세벨을 무찌르고 악사를 차지한 용사입니다. 그런데 왜 자기 조국 이스라엘이 메소보다미아에게 점령을 당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8년간이나 잠수를 타고 있었을까요? 8년 뒤에 나타나서 메소보다미아를 무찌를 수 있는 사람이 좀 진작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면 안 되나요?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의 그림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품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양식에 대해서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옷니엘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용사이고, 갈렙의 가문이라는 훌륭한 가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배경과 힘이 하나님의 전쟁에 조금도 유용하지 못하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옷니엘의 힘과 용맹과 가문이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옷니엘이 하나님의 사사가 되어 하나님의 전쟁에 사용이 되지요? 본문 10절을 보세요.

 

(삿3:10)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임하자 옷니엘이 하나님의 전쟁에 투사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에 필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개입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귀의 세력과 한 판 전쟁을 벌이신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방법으로 전쟁을 하셨습니다.

 

(빌2:6~10)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냥 양 손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손을 번쩍 들었더니 하나님께서 승리를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전쟁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빌3:4-8)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 바울은 가진 것이 참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들이 우글거리던 아테네에 가서도 조금도 꿀리지 않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철학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것을 다 비우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전쟁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다른 모든 배경과 지식과 소유들이 조금도 유용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 전쟁의 실체를 오늘 본문의 옷니엘 사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옷니엘은 이미 가나안 거인들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개입하지 않으시자 찍소리도 못하고 숨어 있습니다. 8년 뒤 드디어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했습니다. 옷니엘은 분연히 일어나 메소보다미아를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합니다. 그 승리는 누구의 승리입니까?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 전쟁에서 옷니엘이 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손 들고 여호와께 전쟁을 맡기었던 모세의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러한 가나안 전쟁의 실체를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 전쟁에서의 인간 능력의 무용함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절대 의존자의 삶을 가르치시는가? 본문 10절을 다시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붙이셨다고 하지요? 메소보다미아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로는 ‘아람-나하라임’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두 강들의 시리아’(Syria of the two Rivers)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두 강들로 이루어진 시리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구산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한 구스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리사다임’이라는 말이 단수도 복수도 아닌 양수로 되어 있고, 나하라임이라는 말도 양수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양수는 ‘두 개 혹은 두 배 또는 두 겹’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산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한 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악함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악한데 그 이스라엘을 징치하는 데에 쓰이는 구산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한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산 리사다임은 나중에 예레미야서에서도 등장을 합니다.

 

(렘50:21)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올라가서 므라다임의 땅을 치며 브곳의 거민을 쳐서 진멸하되 내가 너희에게 명한 대로 다 하라

 

여기에 나오는 ‘므라다임’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바벨론의 별명입니다. 역시 ‘두 배의 쓴맛’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산 리사다임, 므라다임 등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훈을 위해 하나님께 들려 쓰이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의 재미와 매력에 푹 빠져서 정작 기억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그들을 그 세상의 포로로 던져 버리십니다. 악한 성도가 두배로 악한 세상에 젖어 버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이들을 세상 깊은 곳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그들이 더 행복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깊은 곳으로 포로 되어 들어가게 되면 부르짖음, 즉 비명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간섭 하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용어로 바꾸면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기쁨과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과 비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체질에 안 맞아요. 당뇨병 환자에게 맛있는 쌀밥이 독이 되어 그들을 죽여 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성도는 빈곤 속에서, 혹은 풍요 속에서, 그 어떤 환경과 배경을 통해서도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세요’라는 비명을 부르짖음으로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에게 구원자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창세전에 작정이 된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구원의 본질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배로 나쁜 놈에게 시달림을 받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십니다. 8년만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하신 후에 안식이 있었고, 타락이 있었고, 그래서 인간이 죄악 중에 출생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을 8일 만의 할례에 두셨습니다. 육으로 난 인간이 언약 속에 들어가게 하는 날로서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8은 언약 속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 언약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도 8일 만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8은 새 언약 속에 들어가는 날을 의미하며, 구원의 새 세계 속에 들어가는 날을 의미하는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8년 만에 나타난 구원자 옷니엘이 구산 리사다임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사건, 그것이 바로 구속사입니다.

 

그런데 이 옷니엘은 원래는 이스라엘도 유다 지파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옷니엘은 원래 겐 족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의 친척이었으니 갈렙과 함께 이스라엘이 아니면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부에서 온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외부에서 온 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며 유다 지파가 능력과 위엄을 갖추게 될 것을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셔서 유다 지파의 뿌리가 되셨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옷니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는 마침내 바벨론을 궁극적으로 파괴하셨습니다. 계시록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선포처럼 용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마지막 옷니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무너질 것입니다. 아니 영원 속에서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 예수가 어떻게 싸우셨다고요? 자기를 비워서 싸우셨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무장 해제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새 언약의 현실, 은혜의 현실, 십자가 피의 현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역사와 인생을 시험대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실패만 합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옷니엘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여호와는 나의 힘,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옷니엘은 여호와의 능력을 드러내는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한 것 기억나세요?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걸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두 손이 자꾸 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거룩이라 하고 그걸 진정한 의미의 성숙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의 문명과 가나안의 소산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명심하시고 잊지 마세요. 그리고 수시로 가나안의 우상을 붙들고 있는 우리의 손이 나 자신에게 들켜질 때 우리의 본전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드세요.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음을 볼 때, 정말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구나, 하고 감사하고 기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