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4) 사사와 함께 살고, 사사와 함께 죽고   (삿2:6~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53

 사사기(4)

사사와 함께 살고, 사사와 함께 죽고

 

(삿2:6~23)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 이어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얼마 전 아주 유복한 집안에서 부족한 것 모르고 살던 어떤 중견 연기자의 몰락 소식이 뉴스에서 보도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었습니다. 집안에 가정부와 운전기사를 포함한 일곱 명의 가사 도우미들을 두고 살았고, 당시로서도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건물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 분이 역시 동료 연기자였던 아내와 이혼을 한 후에 잇단 사업 실패로 완전 알거지가 되어 노숙자로 전락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겨우 후배의 보신탕집에서 주차 관리를 해주며 일당 삼 만원씩을 받아 찜질방에서 숙식을 하고 있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며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것이 가슴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주변 분들의 관심과 배려에 의해 그분이 다시 재기의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도 과거에 친분이 있던 분이라 일부러 그분의 재기 소식을 화면에 담아 전해 준다는 어떤 방송국의 아침 방송을 인터넷을 통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사람을 일곱씩이나 부리며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빌딩의 사장님이었으며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연예인이라는 찬사까지 듣던 그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손님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모습이라든지, 이제 겨우 찜질방 신세에서 벗어나 두 평짜리 고시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천 원짜리, 이천 원짜리 생활용품들을 동전까지 세어가며 사는 모습 등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겸손한 모습으로 제발 재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중 저를 너무나 화나게 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를 화나게 했던 것은 그분의 후배라는 어떤 개그맨의 무례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개그맨은 몇 년 전에 동남아에서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고 몇 년 간 그 나라에서 거지처럼 살다가 이제 겨우 한국에서 다시 방송이나 행사로 자리를 잡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사회에 진 빚을 갚아보겠노라고 지인들을 대동하여 일 년에 한번 자전거를 타고 열흘 남짓 전국을 돌면서 모금을 하여 휠체어를 구입하여 기증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선배 연기자가 자기도 그 후배의 일을 좀 도우면서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하자 그 후배가 떨떠름한 허락을 했습니다. 그 분은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그 일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랫동안 운동도 못하고 고생만 하던 터라 수시로 낙오가 되었습니다. 저를 화나게 했던 것은 그러한 선배를 대하는 그 후배 개그맨의 태도였습니다. 그 선배 연기자가 너무 힘이 들어 잠시 낙오를 했다가 뒤쫓아 가면 보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타박을 했습니다. 게다가 행사를 마치고 밥을 먹으면서 그 후배 개그맨이 그 선배 연기자에게 일장 훈수를 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자기는 이미 개과천선을 하여 훌륭한 성자가 되어 있는 듯 그 선배를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조금씩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둥, 방송에 나와서 눈물이나 흘리면서 사람들의 동정이나 사는 그런 행위보다는 자기 자신이 변한 모습을 세상에게 증거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둥, 완전 석가모니가 현현한 것처럼 타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배 연기자는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는지 그 무례한 충고를 다 들어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도박판에서 굴러다니다가 가족들에게로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미지 좀 바꿔 보겠다고 휠체어 몇 대 사서 기증한 것 외에 뭐 대단하게 착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찾아 온 선배를 자기 일과 비교하여 마치 대역 죄인을 대하듯 그렇게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을 보고 저는 인간의 추악한 자기 확장의 욕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그 후배 개그맨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다면 자신과 똑같은 나락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을 찾아 온 그 불쌍한 선배를 그렇게 훈육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상위의 선을 선점하여 누구를 가르치거나 훈육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됨됨이는 내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됨됨이가 나에게 사유된 것이라면 인간은 그 것을 사유한 이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수시로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됨됨이는 인간이 사유하여 자신을 증명하고 드러내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어떤 선한 행위를 내어 놓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당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게 성도라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한 실체를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는 것이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사는 것이지, 착함이나 선함을 사유하여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나 첩경을 제시하고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건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6:63)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서 살리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떡을 구하러 온 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간을 살려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그 인간에게 사유화 되어 그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은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에 도구로까지 쓰는 아주 악독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내가 먼저 선점하고 사유한 착함과 깨끗함 앞에서 넌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지요. 그게 이 세상의 지배구조입니다.

 

그렇게 언제 어디서나 ‘나’의 위상만을 걱정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사기는 그런 인간의 무력함과 추악함을 아주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여호와를 잘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대적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이유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에 의해 사사가 세워졌을 때입니다.

 

(삿2:18)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 이어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주셨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아래 놓여 집니다. 왜일까요? 이스라엘에게 사사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그 사사의 말을 잘 듣고 순종했기 때문일까요? 본문 16절과 17절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삿2:16-17)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주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사사를 청종치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돌이켜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사가 있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 예표 되는 메시아의 공로에 의한 것임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사사기 내내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들은 사사가 있건 없건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 삽니다. 사사가 있을 때에는 사사의 말을 청종치 않고 사사가 죽으면 더욱더 악하고 패역하게 패괴를 일삼았습니다.

 

(삿2:19)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렇지요? 사사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이스라엘은 패괴와 음란과 불순종의 역사를 토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사가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나 효용이 없습니다. 그냥 주인이 두는 곳에 두어지는 신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나’라는 존재의 가치나 효용을 챙기거나 자랑할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행위나 됨됨이 등으로 자기의 가치를 매기거나 자랑을 하는 자기규정의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규정이란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야’하고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인간을 꾈 때 인간에게 바로 그 자기규정이라는 매력적인 당근을 던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선악을 아는 일에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이게 바로 자기규정에로의 유혹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처럼’되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악을 아는 일에도 하나님처럼 되어 이 세상의 모든 판단의 주체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을 꾈 때 조건으로 거는 것이 있지요? ‘선악과를 따 먹으면’이라는 인간 행위를 조건으로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인간이 행한 행위에 의해 자기가 규정되고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두시는 곳에 존재함으로 그 존재 가치가 결정 되고 규정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어떤 행위가 요구되고 있고 그 행위에 의해 ‘하나님처럼’이라는 인간의 자기규정의 열매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그렇게 자기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처럼’이라는 자기규정의 장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규정의 장 안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기 자신을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리곤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규정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두시는 장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규정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지 내가 속한 환경을 ‘나’라는 존재의 행위로 뒤집어엎을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환경을 성경은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라는 어구를 습관처럼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 주 안’이라는 것이 환경입니다. 구조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어떤 환경과 구조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존재가 규정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능동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수동적이며, 피동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무력한 피조물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가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인간은 환경이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그런 바보 같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추겨 줍니다. 아담이 받은 시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아담 안에 들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떨어지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나’라는 존재가 주체가 되어 살겠다고, ‘나’는 ‘나’ 스스로 규정하며 살겠다고, 마귀의 편으로 몰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규정의 장으로 넘어가 버린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창3:8~13)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자기규정의 장으로 들어가 자신을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십니다. 그리고는 아담을 찾으시는데 그 질문이 ‘아담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아 아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아담은 지금 자기가 한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 대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규정하여 숨어있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담의 환경과 구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구조 안에 있을 때 그의 행위 여하에 관계없이 복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구조 속에서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에 의해 발생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모든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그 행위의 책임도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행위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지는 하나님의 행위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을 때 그는 그의 행위 하나 하나를 전부 카운트 당하게 되고 그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이라는 구조와 하나님 밖이라는 구조 둘 중 한 곳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의 인간 중 ‘하나님 안이라는 구조 속에 값없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 은혜이고 바로 그게 구원이라는 것이구나’를 깨닫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그의 위치를 물으시는데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내가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실과를 먹어서’라는 행위를 근거로 한 자기규정의 대답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밖의 존재의 행위를 하나님 은혜 안의 존재들이 행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의 존재들이 하나님 밖의 존재들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절하게 붙들게 되는 교육의 장 속에서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행함이 됨으로, 역시 하나님께서 다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 밖에 있는 자인가인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는 나의 외부에서 환경으로 나를 감싸서 나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도구인 것이지 내가 개별적으로 챙겨서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는 받은 자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하는 도구인 것이지 그것을 받은 자들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를 대주제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전체가 죄(sin) - 슬픔(sorrow) - 간구(supplication) - 구원(salvation)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가 열 네 명의 사사를 중심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사기 내내 죄(sin) - 슬픔(sorrow) - 간구(supplication) - 구원(salvation)의 구조가 열네 번 이상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원의 서정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슬픔과 간구의 부분에서는 인간들의 회개와 기도가 행위로 전제되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올 것만 같지요? 슬픔과 간구가 전제되지 않으면 구원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구조지요? 아닙니다. 이 구조는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하는 구조입니다. 슬픔과 간구의 회개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의 유익을 위해 울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절대 회개가 아닙니다. 죄 앞에서의 인간의 슬픔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이지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 자복이 아닙니다. 간구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하나님 여기에서 구원해 주세요’의 외침입니다. 여전히 ‘나’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단 말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속셈이 뻔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를 한 것이 아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분명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하나님의 사자의 전갈을 듣고 마치 크게 회개한 것처럼 슬피 울었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 이름을 보김(우는 자들)이라고 지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김의 울음이 오늘 본문 11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삿2:11-15)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어떠세요? 실컷 울어놓고 그 울음이 악을 행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 섬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회개의 울음을 운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나요? 그런데 왜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은혜는 그 받는 대상이 무엇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특이성이나 차별성의 차원에서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자’라는 전적인 타락의 확증의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기 전체의 구조인 죄(sin) - 슬픔(sorrow) - 간구(supplication) - 구원(salvation)의 구조 내내 인간의 행위는 ‘죄’로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변화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계속 ‘죄’의 장 안에서 ‘나’라는 존재의 유익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의 정체를 폭로시키시고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죄(sin) - 슬픔(sorrow) - 간구(supplication) - 구원(salvation)의 구조 안으로 인간들을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죄를 지은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무력함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에게 율법과 제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자가 와야 하지요? 율법과 제사가 주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구원자가 와야 했다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완전하게 기각되고 부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사사로 예표 되는 메시아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고 그 구원은 완전히 완료된 구원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구원자가 와서 그 인간을 구원해 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죄와 슬픔과 간구와 구원의 모든 과정 속에 전부 인간의 전적인 타락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침노해 들어 온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양일 것 같으세요? 그걸 알려면 하늘의 식양대로 만들어진 성막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성막 중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를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출애굽기 25장 10절 이하에 보면 지성소에 들어갈 증거 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증거궤는 속죄소라는 뚜껑으로 덮여 있는 데 그 속죄소 밑에 무엇을 넣으라고 하십니까? 증거판, 즉 십계명 돌 판을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으로 가면 모세가 바로 그 속죄소 아래에 들어갈 증거판을 받아서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데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모독하지요? 그때 심판이 일어납니다. 돌 판이 죄와 맞닥뜨리게 되자 심판의 깨어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 판은 다시 만들어 집니다. 이번에는 모세가 돌 판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돌 판입니다. 하늘의 것과 이 세상의 것이 연합되는 형국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끌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소 밑에 들어가게 되는 증거판은 인간의 죄와 불가능을 전제할 뿐 아니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죄소가 덮고 그 속죄소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덮은 어떤 존재의 피가 그 죄인들을 가려버리는 모습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용서하는 분으로 남고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로 존재하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용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용서로 덮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 또한 죄인은 계속 죄인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덮는 분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속죄소라는 뚜껑이 되어 죄를 눌러 버리면 죄로 가득 찬 성도라는 깡통이 그 속에 숨겨 둔 죄를 들켜 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 속에서 사사로 쓰인 자들까지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무력한 자로 폭로가 되고 모든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쓰레기라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것입니다.

 

(렘5:1-9)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 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4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6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 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 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7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8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9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 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유대교의 중심을 가리키며 그 안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해 버리십니다. 그럼에도 그 예루살렘에서 사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구원을 얻는 사람과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시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와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묵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심어서 그 묵시를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 확 펼쳐낸 것입니다. 묵시라는 씨 속에 역사가 들어 있는 것이고 역사를 축약하면 묵시로 축약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 언약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묵시의 만개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묵시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도구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자기들이 은혜와 구원과 믿음과 선함과 착함 등을 미리 선점하고 사유한 것으로 착각을 하여 누군가에게 선함에 이르는 길, 은혜에 이르는 길, 착함에 이르는 길, 됨됨이에 관한 조언 등을 한다는 것이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주인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 도구로 쓰이는 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가치를 챙기고 나서는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그 개그맨 후배에게 화가 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자기는 죄와 회개의 과정을 다 통과하고 이미 무슨 대단한 성자가 된 것처럼 선배 연기자를 가르치고 있는 꼴이 꼭 강대상 위에서 교인들에게 ‘성도다운 삶’을 가르치는 저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 저의 설교 안에서 디다케의 부분이 사라져 가고 케리그마로 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하늘의 묵시를 깨달은 만큼 선포할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앞에서의 피조물의 실체에 대해 낱낱이 해부하여 독자인 성도에게 제시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그 성경을 근거로 하여 영위해 나가게 되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세상의 허황됨과 덧없음과 죄인들의 더러움과 쓰레기 됨을 올바로 자각하고 하나님의 크심과 그분의 영광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는 것임을 배우는 것이지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것을 챙겨갖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경륜하시며 하나님께서 완료하시는 역사와 영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지 내 구원과 내 영생과 내 유익과 내 가치를 챙기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어떤 힘을 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에 관해 단 한 절도 할애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달이 되어지면 모든 인간이 다 일단 아파야 합니다. 자존심 상해서 아프고, 감추어 둔 자기 실체가 폭로되어 아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 않는 게으름과 추악함 때문에 아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50:4~8)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 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 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그 말씀을 올바로 전했더니 사람들이 등을 때리고 뺨을 때리며 얼굴의 수염을 뽑고 침을 뱉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땠나요?

 

(렘20:7~1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 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 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7절에 ‘권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파타’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자기는 하나님한테 속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말씀을 전했더니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겠다고 하면, 또 그 삶 자체가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호시탐탐 그의 실수와 타락을 기다리며 그를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끌려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입으로 살아내며, 그것을 전하는 이들의 삶은, 하나님도 시험하시고, 권징하시는 삶이며, 세상으로부터도 조롱과 멸시와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인 것이며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여러분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사기의 사사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사용은 당하는데 그 자신이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자신도 죄인으로 계속 폭로당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챙겨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아주 달았는데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는 고통으로 번역이 되어 나오더라는 넋두리를 한 것입니다.

 

(렘15:16~19)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의 말씀을 받아먹었는데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하나님의 분노처럼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고통이 계속되었고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이 마른 시내와 같았답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육의 무익함과 육의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삶으로, 경험으로 깨닫고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며 우리를 은혜로 당신 자녀 만드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해, 내 소원과 문제를 해결해 주고 성취해 주는 그런 힘으로서의 신을 찾는 정도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찾는 신은 자신들이 조작한 ‘나’라는 신일 뿐입니다.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하지요?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런데 바알이 수놈이고 아스다롯이 암놈입니다. 그 둘이서 교접을 하게 되면 다산과 풍년이 세상으로 쏟아지게 된다는 것이 바알과 아스다롯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도 신전 제사장들과 신전의 여 사제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욕을 돋우기 위해,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의 대리자로서 성행위를 했고 여 사제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는 남자들과 신전에서 매춘 행위를 함으로 풍요와 다산을 빌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유익, 즉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다산을 구하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 행위가 바로 그러한 매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바알과 아스다롯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지키시며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를 한순간에 무너뜨리신 후 가나안에 정착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다니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기적이나 신비를 체험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만의 신을 조작해 냅니다. 인간은 은혜의 구조 속에 무기력한 자로 서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주체를 살찌우고 강화하여 세상의 지배구조 속에서의 우위를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조작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원하는 신은 ‘나’의 삶에 주체로 개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여야 하고 내가 조작해 낸 신은 그 주체인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간에 의해 조작된 신은 늘 달램의 대상이 됩니다. 먹을 것으로 달래주고, 치성으로 달래주고, 제물로 달래주면 됩니다. 그러면 각자가 가진 특기를 발휘하여 인간을 돕는 방식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인간의 조작된 신을 향한 신앙 행위를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들의 신앙행위는 초월을 인정하고 초월에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초월을 조종하고 부리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의 반대편에서 자연과 자신을 교활하게 합일시킵니다. 신의 반대편에 선 자들은 항상 신을 대항하여 하나로 뭉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연을 설득하고 복종하는듯하지만 결국에는 자연과 합일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풍요와 다산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살찌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와 다산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동양 사상의 음양의 조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유의 사유의 열매들입니다. 자연은 음과 양, 암컷과 수컷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암컷과 수컷의 조화로 인하여 풍요와 다산이, 빈곤과 결핍이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암수의 조화를 인간의 치성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도 드리고, 치성도 드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신앙행위의 주인공은 인간 자신입니다. 따라서 자연주의는 초월과 초월자를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초월과 초월자를 무시하고 자연의 조화를 조종하여 이 세상에서의 ‘나’를 살찌우고자 행하는 모든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는 제한적 존재와 이 세상이라는 한시적 공간에 매여서 초월과 초월을 보지 못하는 자연주의에서 이신론이 파생이 되는 것이고, 진화론이나, 역사 낙관론에 근거한 역사 진보주의도 그러한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자고요. 진화론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태양, 즉 양이, 대양, 즉 음에 비추자 유기적인 분자 생명체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음과 양의 조화, 동일한 발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발전하고 진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철저하게 신의 존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역사 낙관론이나 역사 진보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이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창조에만 관여를 했고 나머지는 자연의 법칙에 맡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신론 하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주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 교인들이 왜 알라를 위해 스스로 인간 폭탄이 되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 모든 것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암컷과 수컷 신에게 의존하던 고대시대의 우상 섬김과 일맥상통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 섬김은 고대 시대에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는 인간의 자아숭배 사상인 것입니다. 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오늘날 예배당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초월과 초월의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실 속의 ‘나’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흐르는 인간의 자기숭배, 자기규정의 장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로 수렴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덮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 즉 메시아를 그 불가능한 자들에게 보내셔서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빌립보서 3장 3절 이하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빌3:3~9)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행사와 언행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좋아 보이는 것도 우리를 살려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살 수 있는가만 잘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많이 낙담도 하고 절망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수고도 하면서 예수의 필연성만 잘 배우면 됩니다. 그렇게 잘 살아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