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2)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철 병거를 쫓아내지 못하더라
(삿1:11-36)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 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15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17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22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 곳의 이름이더라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 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 함이었더라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35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가나안 정복 전쟁의 출발 지점인 여리고와 아이 성의 전투에 관해 공부를 함으로 해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관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약속의 땅 입성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완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 사사기라 했지요?
그 중 아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게 되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답을 얻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였는데 그러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아간이 외투 한 벌과 금덩이와 은덩이를 조금 숨긴 사건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며 하나님은 그러한 불신앙 위에 아골 골짜기를 쌓으시는 진노의 하나님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골 골짜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몽땅 받아 죽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가 된 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간의 이야기를 통해 ‘아간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라는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아간이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무더기에 불과한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돌무더기에서 하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 것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똑같은 일이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는데 한 지파도 빠짐없이 전부 가나안 지파를 남겨 둡니다. 본문 28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삿1:28)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그들의 문명과 그들이 갖고 있던 이기들을 사용하여 가나안의 풍요를 누리고 싶어 그들을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들에게 사역을 시키기 위해 다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술을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전부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맞습니까? 쫓아내지 않은 것이 맞습니까? 쫓아내지 못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인 반면에 쫓아내지 않은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며 자발적인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맞습니까? 본문 19절을 보세요.
(삿1:19)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와 함께 하셨는데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가나안의 철병거는 여호와보다 강한 것인가요? 여기에서 철병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서운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은 그 철병거를 자기들이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철병거를 만들어 낸 골짜기 거민들을 진멸하여 쫓아내지 않은 것은 철병거가 여호와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가나안의 산물인 철병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을 하느냐? 이 세상의 힘과 가치가 주는 매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은 존재는 절대로 가나안의 그 매력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을 하지 않고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을 하는 것은 여호와와 함께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 그 세상의 산물들을 쫓아내기가 싫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할 정도로 그 매력이 강하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쫓아내지 못했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하신 그 세상 것들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사용하고 사역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겨둔 것임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하여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의 도움을 얻어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 혼자서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땅을 선물해 주시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은 굳이 가나안 거민들이 사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집어넣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비어있는 좋은 땅이 천지에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철병거와 온갖 문명의 이기로 무장하고 있는 매력적인 가나안 땅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들여보내시면서 그러한 것들의 허구성과 부질없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절대성과 하나님 절대의존의 삶의 필연성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저주받은 함과 가나안의 후예들이 세운 두 땅, 애굽과 가나안을 철저하게 경험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지리멸렬하게 되는지를 경험케 해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셈의 후예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그 저주받은 세상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면 안되는지를 교훈하시기 위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매력은 너무나 치명적으로 강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가 없음을 낱낱이 폭로하시고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이대시는 것입니다. 셈의 후예들이 저주받은 함과 가나안의 후예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이 가나안에서 밝혀집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덮쳐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땅에서 약속의 땅 정복 전쟁을 치르며 살게 되는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대단한 삶을 살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똑같이 불가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게 될 때 그 삶이 어떤 양태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이지 자신의 뛰어남과 별다름을 보이며 자신을 증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나안 정복전쟁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다 쫓아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준비하신 십자가의 위대함을 배워야 할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 조금씩 항복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오늘 본문 1장 11절에서부터 15절 사이에, 여호수아서에서 이미 나왔던 갈렙과 악사, 그리고 갈렙의 사위 옷니엘의 이야기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삿1:11-15)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 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15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15장 13절부터 19절까지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해 놓은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시간적 순서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사건은 여호수아가 죽기 이전의 일이거든요.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으로 진격을 시키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지요? 여호수아 1장으로 가보지요.
(수1:1-9)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요약하면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니까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라, 너희는 아무 걱정 말고 내 말, 즉 율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입니다. 마치 창세기 때 아담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과 흡사하지요? ‘내 말 잘 듣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서 내가 네게 준 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렇게 내가 너에게 주려는 땅으로 가서 그 땅을 밟고 정복하라는 것은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 ‘선악과 따먹지 말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씀과 똑같은 맥락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땅에서 일개 선악과에게 정복을 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대적의 힘입니다. 우리 대적의 무기는 혐오스럽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아간이 바로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고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가나안의 철병거와 문명 앞에서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거든요. 모든 인간은 그렇게 세상의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피조물은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4장에 가면 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가나안 땅 분배 과정에서 돌연변이 같은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다름 아닌 갈렙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시켜서 아직 다 정복되지도 않은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나누게 하십니다. 땅을 제비뽑아 나눈다는 것은 그 땅의 소유권이 그들에게 없다는 것을 각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인 것은 제비뽑아 가지지 않지요? 자기 소유가 아닌, 자기 권리를 주장 할 수 없는 땅이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는 땅입니다. 원래 자기 것이 아니므로 아무 불평 없이 걸리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발 좋은 땅이 뽑히기를 간절히 원하며 제비를 뽑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갈렙이 뜬금없이 여호수아 앞으로 나와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헤브론 땅을 달라고 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는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지파라고 했지요? 유다 지파의 지도자 갈렙은 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서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인간들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대적의 무기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들과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나 ‘나는 눈에 보이는 좋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주시오’하고 나섭니다.
(수14:7~13)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갈렙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그 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다른 땅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헤브론 땅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아낙 사람들, 즉 가나안 거민 중에서도 가장 장대한 거인 족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땅은 쓸모도 없는 산지였습니다. 게다가 갈렙은 그때 이미 여든 다섯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든 다섯의 노구가 12절의 위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수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어떤 그림이 생각나세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거인 족들 앞으로 여든 다섯의 노구가 나아가면서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시면 넌 내 밥이다’하며 전진을 합니다.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거인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며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고 외쳤던 다윗의 모습과 흡사하지요?
(삼상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은 지금,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므로 나는 물맷돌 다섯 개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의 고백이 다윗의 고백과 너무나 닮아있지요? 성경은 그러한 상태, 즉 세상 적으로 볼 때에는 아주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인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만을 좇아가는 상태,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14:13)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의 미래를 던졌을 때에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축복을 했다고 하지요? 그건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축복을 함으로써 힘을 불어 넣어 아낙 자손을 이기도록 기원을 해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갈렙의 그러한 믿음이 바로 축복의 상태라는 것을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사실은 누구의 믿음이었습니까? 거인 골리앗을 때려죽인 어린 다윗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모형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든 다섯 노인 갈렙의 믿음 또한 예수님의 믿음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하늘의 성자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땅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들을 초개처럼 여기셨습니다. 그 분은 모두들 두려워 벌벌 떠는 사망의 힘을 향해 ‘너는 내 밥이다’라고 조롱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생기셨고, 가난했고, 힘이 없는 연한 순처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세상의 힘에게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은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결국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실패의 현장에서 당신의 승리를 쟁취해 내셨습니다. 갈렙이 바로 그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이렇게 밝히십니다.
(민14:22~24)
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신1:35~36)
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 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여기에서 오직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집중하셔야 합니다. 정말 오직 갈렙만이 가나안을 보았습니까? 그리고 갈렙의 후손만이 가나안을 차지했나요? 아니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굳이 갈렙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다’라고 반복하여 밝히시고 있습니다. 갈렙도 다른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갈렙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여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갈렙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 분께만 목숨 걸고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을 모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갈렙의 전쟁에 갈렙의 믿음으로 동참을 한 사람이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입니다. 원어를 분석해 보면 갈렙의 막내 동생의 아들이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힘‘입니다. 갈렙의 전쟁, 다윗의 전쟁, 예수의 전쟁에 아주 걸맞은 이름이지요? ’여호와만이 나의 힘이다‘ 그 옷니엘이 갈렙의 전쟁, 즉 예수의 전쟁에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3장으로 가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되는 대목이 나오는데 옷니엘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옷니엘은 무적의 아낙 사람들을 완전히 다 몰아내고 갈렙이 내 건 상품, 갈렙의 딸 악사를 차지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전쟁에서 거인인 대적을 물리치고 신부를 차지하는 모습, 어떤 그림이 떠오르세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마귀와 전쟁을 치르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떠오르시지요? 그렇게 옷니엘의 신부가 된 악사가 아버지에게 밭을 구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풍습인 ‘모하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딸이 시집을 가게 되면 아비가 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빙물이라 합니다. 반면에 사위는 장인에게 딸을 데리고 가는 대가를 지불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빙폐라는 것입니다. 갈렙의 딸 악사가 아버지에게 빙물로 남방 땅, 즉 네게브 사막의 땅을 받았습니다. 옷니엘로 모형 되고 있는 예수에게 교회라는 신부가 시집을 가게 되고 그 교회에게 이 세상 약속의 땅이 주어지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약속의 땅이 쩍쩍 갈라지는 죽음의 땅인 것입니다. 신부 악사가 신랑 옷니엘과 남방 땅으로 떠나려 할 때 갈렙이 묻습니다. ‘뭐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
(수15:18~19)
1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19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 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갈렙이 ‘뭐 더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자 악사가 ‘복’을 달라고 합니다. 그 복이 ‘바라크’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샘’입니다. 마른 땅으로 내려가는 신부가 그 말라버린 죽은 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인 ‘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라고 바라야 할 유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사는 다른 땅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있었고, 많은 재물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사의 관심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그러한 세상 것이 아니라 마른 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 생수의 근원인 샘을 구한 것입니다.
오늘 사사기가 왜 이 갈렙과 악사의 이야기를 굳이 이곳에 삽입을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를 바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안에서의 이스라엘이 무엇을 구하다가 어떠한 지경에 처해지게 되는지를 앞으로 잘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독자들도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1912년 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타닉 호에는 바다 위의 궁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적인 부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보석과 돈을 가지고 배 위에서 호화스러운 사치와 도박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던 삼등칸의 일반인들이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출항 4일 째 되던 날 그 궁전 같은 배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부자들에게 돈과 보석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장의 구명조끼와 구명보트의 빈자리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구명조끼와 구명보트는 배가 멀쩡히 운항을 하고 있을 때에는 정말 무용지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요? 그러나 이 세상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구명조끼보다 귀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이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빙산과 부딪힌 타이타닉 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4:37~39)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렇게 이 세상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거대한 유람선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밭을 소유하고 있어도, 아무리 넓은 집을 소유하고 있어도,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쌓아두고 있어도, 이 세상이 침몰하는 그때에는 아무것도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한 것들을 양손에 많이 쥐고 있는 사람부터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마24:40~41)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 이 데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데려가는 날이 온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나만 데려가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심판의 날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때에는 누구 밭이 더 넓은가, 누구 밭의 소출이 더 많은가로 배 아파 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합니다. 누구의 맷돌에 무엇이 갈리고 있는가도 아주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요. 그러나 심판의 날이 되어 그 모든 세상 것과 전혀 다른 가치로 존재하고 운영이 되는 하늘과 땅이 엄격하게 분류가 되어 갈라지고 사람들도 그 양쪽으로 철저하게 갈라지게 됩니다. 그때 옆 집 밭의 소출이 우리 밭의 소출보다 많은 것이 그렇게 부러운 일이 될까요? 옆집 맷돌에서 갈리고 있는 내용물과 우리 집 맷돌에서 갈리고 있는 내용물을 비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될까요? 남느냐, 떠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남게 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생수이신 예수를 믿는 자로 사느냐 아니냐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 가나안의 철 병거가 마음에 들고, 가나안의 매력들이 좋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미치겠지요? 아무리 아니라고, 난 이 세상 것에 대해 마음을 비웠다고 우기고 우겨 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이 세상 것 때문에 넘어지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을 해 들어오시는가가 사사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하고 남겨둔 곳의 지명이 참 재미있습니다.
(삿1:33)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고, 벧아낫은 ‘아낫 여신의 집’입니다. 그리고 35절의 헤레스 산은 ‘태양의 산’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실패는 단순히 그 땅을 점령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타파하는 성전을 실패한 것임을 그런 지명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경각시키는 간섭을 하시는데 그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고난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폭로당하는 현장에서의 고통과 그 현장을 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폭파의 현장에서 새 생명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이 후손을 낳는 장면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가 예수를 낳는 것이지요.
(요16:20~21)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사사기 1장 서두에 시므온 지파와 유다 지파가 등장한 것 기억하세요? 거기에서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에게 잉여를 선물해주기 위해 홀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게 바로 신부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부는 잉여를 잉태하기 위해 자기가 폭파되는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였지요? 교회를 출산하기 위해 예수라는 신부가 이 땅에서 말도 안되는 임산부의 망가짐을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해산의 고통, 즉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라는 생명을 잉태한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라는 생명의 씨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예수라는 생명의 씨가 심겨져 우리 안에 작은 예수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창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잉태한 신부처럼 폭파되고 망가지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임산부의 삶을 통과하며 예수님의 자기부인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될 때 우리는 드디어 해산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해산이 바로 구원의 완성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2:15)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멋진 새색시의 모습을 자랑하려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결혼을 하자마자 악사처럼 마른 땅으로 쫓겨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른 땅은 예수라는 생수가 흐르는 마른 땅입니다. 세상은 그 땅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게는 그저 연약한 땅, 저주받은 땅, 고통의 땅으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바로 그 땅의 상태가 생명을 잉태한 신부의 모습인 것입니다. 생수를 품은 마른 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 땅에다가 돌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라’고 명령을 하셨지요? 그런데 가나안 땅 어디에다 그 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까?
(신27:1~7)
1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에발 산 위입니다. 그리고 그 위의 단은 철기를 대지 말아야 하고 다듬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 말은 가나안의 것이 묻지 않고 인간의 공로가 닿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에발 산에 서야 합니까? 왜 이스라엘의 단과 율법의 돌이 에발 산에 서야 하지요? 에발 산이 어떤 산입니까?
(신11:29)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에발 산은 저주가 선포되는 산입니다. 왜 거기에 단을 쌓아야 합니까? 이왕이면 그리심 산에다가 단을 쌓는 것이 낫지 않아요? 성도의 인생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산제사, 겉으로 보기에 저주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생명을 잉태한 신부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를 덮고 들어오시는 신랑의 옷자락이 있기에 신부가 무사히 생명을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주 심하게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개차반으로 폭로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 연약한 자리를 덮고 들어오시는 우리 신랑의 은혜의 옷자락을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성도는 신랑이신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이지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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