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1)
사사기 개관,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
(삿1:1-10)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 갈 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우리는 요즘 매 주일마다 예수님의 비유를 공부하면서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의 본질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그 은혜의 현실을 곡해하고 있는 듯하여 설교자로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주에 요한복음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사사기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이 땅에 침노해 들어온 천국을 어떠한 모양으로 살게 되는지를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의 삶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약속의 땅은 궁극적으로,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땅에서 살게 될, 은닉되어 있는 천국의 모습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사기를 공부하면서 성도가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천국을 살면서 어떠한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공부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읽다보면 마치 무슨 여흥구처럼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사사기의 저자를 사무엘이라 추측을 합니다. 하나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삼상8)’는 요구를 하지요? 사무엘이 바로 그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사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사기는 하나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사는 와중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 당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어두움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깊이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비단 사사기만의 내용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격적인 사사기 강해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경이 어떻게 이 사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사전 지식을 확보시켜 드린 뒤에 본격적인 사사기 공부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지만 그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언약’이라는 우산으로 묶여지는 책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잘 표현을 해 놓은 곳이 출애굽기 19장입니다.
(출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지니라
이건 하나님께서 세우신 만고불변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주어지지요?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다른 말로 ‘내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을 하게 된다는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몇 가지 항목을 지켜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이 담기는 것을 연합이라 하고 그걸 순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때에 피조물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살아있는 상태라 하고 그 나머지 상태를 죽은 상태라 말합니다. 따라서 존재란 하나님과 연합이 된 상태에서만 존재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연합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을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측에서 그 분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피조물의 삶에 개입을 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부수어 버리시고 인격과 이성을 소유한 채 하나님 앞에서 납작 엎드리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시작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첫 번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죽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치마가 등장하고 그 치마에 의해 인간의 사망이 덮여지게 됩니다.
(창3:10)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무력한 존재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아담은 지금 ‘저는 하나님께 벌거벗은 제 몸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죄라 하고 그 상태를 죽음이라 합니다. 아담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인간의 실패를 무상으로 덮어 버리십니다.
(창3:21)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게 덮으심의 은혜인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의 사망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냥 덮여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 언약 성취의 은혜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시고 그 아담의 자손을 통해 다시 한 번 덮으심의 은혜를 설명해 주십니다.
(창3:23)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에게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한 시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래야 순종이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흙에서 만들어진 티끌 같은 자들에게 흙을 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티끌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할 아담의 장남 가인이 자신의 제사를 지키겠다고 동생을 죽여 버리는 사건이 터집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nothing’이라고 했지요? 근본 된 토지를 가는 자들의 자아 인식이 바로 ‘아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사를 지키겠다는 ‘있음’의 대명사 가인이 ‘없음’을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 세상에 존재하게 될 두 종류의 인간이 확연하게 분리가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살게 되는데, 그 한 종류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살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그들에 의해 맞아 죽지만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에 의해 그 무력함의 자리에서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게 될 은혜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자는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맞아 죽어서 살아나는 역설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셔서 세상을 이용하여 그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시고 그 처참한 죽음의 현장에서 당신의 은혜의 덮으심으로 그들을 살려내시는 일을 역사 속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인물과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덮으심의 은혜를 설명해 주십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부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로 삽니다.
(창6:4~8)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렇게 모든 인간들이 전부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를 추구하며 사는데 노아라는 사람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120년간 어떻게 삽니까?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삽니다. 노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만 살려내십니다. 네피림, 거인, 용사, 유명한 자 들은 전부 죽여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고 그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절대 자신들의 연약함의 폭로를 전제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과 열심을 또 한 번 박살을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게 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구원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상이나 만들어 팔던 불가능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심으로 시작되어 모리아 산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아브라함은 계속 실수와 실패의 삶만 내어 놓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구원이란 무엇이며 영생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그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애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맞아 죽는 모습을 연출해 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들겨 패던 세상의 장자들이 모두 살해를 당하고, 그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모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에 의해 거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은 불평과 원망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가 그렇게 패역한 자들을 살려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40년 간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보내신 계기가 된 사건이 뭡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다른 말로 자기들의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이 가나안에는 아낙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자신들은 절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그들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신들의 판단을 더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들을 광야로 내몰아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 자들인지를 직접 체험케 하신 것입니다.
(신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광야 인생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는 자임을 폭로시키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떡을 구하는 삶을 사는데, 하나님은 그 세상 떡의 무용함과 허황됨을 체험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는 티끌로 사는 것이 진짜 복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하나님 백성들이 다 거쳐야 할 과정이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행7:38) 광야의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광야 교회에게 율법이라는 것을 주시고 제사 제도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광야 교회가 율법을 전혀 지켜낼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해서 희생 제사로 상징이 되는 십자가 제사의 필연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제사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에서 제사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백성들의 삶은 전부가 다 자신들의 티끌 됨을 폭로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용도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첫 세대 장정 60만의 몰살로 확증을 받은 이스라엘은 순전히 은혜로만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기록한 여호수아서를 지나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공부할 사사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실재화하여 살아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사기를 공부하면서 역시 하나님 백성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그리고 그것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으로 사사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기는, 보이는 하나님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사라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실 것인가에 관한 책인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실패를 하고 여호수아도 실패자로 죽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 역할을 마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미완료적 존재이며 불가능한 존재인지까지 보여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완료된 승리의 지점으로 끌고 가시는지를 사사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세우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게 전쟁을 명령하시고 시므온 지파를 따라붙게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없이 치러온 상태입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땅을 정복한 상태이고 얼마 남지 않은 잔당들만 처리하면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그 하나님 나라 전쟁의 내용에 대해 체험학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의 서론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사사기 전체의 내용이 훌륭하게 요약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많은 지파 중에 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사사기 서론에 등장할까요?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참 왕이 나올 지파이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의해 저주를 모면하는 그러한 교회의 모형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창49:8-11)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다른 지파의 왕이 되어 홀을 쥐고 치리자의 지팡이를 간직한 채, 메시아가 오기까지 그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게 되는 지파가 유다 지파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에서 참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옷을 포도주에 빨며 나타나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사사기 1장에서의 유다 지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시므온 지파는 어떤 지파였지요?
(창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죄인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므온 지파입니다.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져 버려야 할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을 잉여로 받게 되어 살아나게 됩니다.
(수19:1)
1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보시다시피 시므온 지파는 유다 자손의 기업을 잉여로 나누어 받아 살아나는 하나님 백성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잘 보시면 유다 지파가 가나안과 전쟁을 하러 나가는데 시므온 지파가 함께 전쟁에 나갑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가 전쟁을 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기사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시므온이 그 전쟁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대목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사사기 기자는 시므온이라는 저주받을 백성들이 유다 지파에 의해 잉여의 선물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잉여 증폭기에 의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성도의 이야기가 사사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사기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언약에 이어지는 것임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수24:15-16,19)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니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한 이스라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다 쫓아내지 않으셨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십니다.
(삿2:16~17, 21-22)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마치 신명기 8장의 그 광야 교회의 이유와 똑같은 이유가 적혀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내 말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려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다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도 똑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시기 위해 그들의 대적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통하여 성도의 티끌됨을 낱낱이 폭로하시고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실체를 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삿2:1-4)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마치 출애굽 때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데리고 나왔느냐?’고 항의를 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사기 내내 이스라엘은 티끌로 폭로를 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티끌로 폭로된 이스라엘을 다시 새 창조의 창조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신9:5)
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의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주어지는 무상의 수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은닉되어 들어온 하나님 나라에서 치르는 전쟁은 전부 어떤 전쟁이라는 말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의 전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전쟁의 주체이시며 승리자이심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을 할 때 해골을 앞장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50:24~26)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 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출13:18~19)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 이었더라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폭로당하면서 요셉의 해골을 앞세워 들어가게 되는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해골을 헬라어로 바꾸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의 공로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유다가 열심히 전쟁을 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지요?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의 심장입니다. 그 약속의 땅의 심장을 유다가 공격을 하여 함락을 시켜 버립니다.
(삿1:8)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그런데 다윗의 시편을 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51:18)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러니까 이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사들은 전부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시오 진짜 사사이신 하나님의 모형인 것이고, 모든 전쟁들 또한 하나님이 치르시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무력함이 함께 폭로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삿11:27)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 하시옵소서 하나
수많은 사사가 등장하는 사사기에 갑자기 심판하시는 이는 여호와라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렇게 사사들의 이야기인 사사기는 진짜 사사(judge)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 가나안 정복전쟁의 시작이 어떻게 진행이 되어졌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사사기 개관에 확인 도장을 찍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리고 성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손 하나 까딱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망치질 한 번 안하고 그 철옹성 여리고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판단이 되는 것도, 그 판단을 유보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 양태이기에 그 엄청난 여리고를 마냥 돌기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 즉 교회의 전쟁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나’를 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 여리고는 그저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전쟁에서 발생을 합니다. 여리고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이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수7:7)
7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투정을 하지요? 사사기에서도 똑같은 투정이 나왔다는 건 조금 전에 보셨고요. 이렇게 인간들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한 것입니까?
(수7:1,11)
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11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대패를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에서 취한 전리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수6:18~19)
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여기에서 ‘바친 물건’ 혹은 ‘바칠 물건’이라고 번역이 된 ‘헤렘’이라는 히브리어는 ‘완전히 멸하기로 정해진 것, 완전히 바쳐지기로 정해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멸해져야 할 것이 조금 남겨져서 아간이라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 바쳐져서 진멸되어져야 할 것과 그 물건을 바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시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7:12)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힘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진멸되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수긍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비워져서 철저한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서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망에 처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 챙기기나 영광 챙기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되면 그들은 아이 성 앞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불순종의 죄인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수7:15)
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그래서 아간은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간이 전리품을 숨길 때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수7:21)
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여기에서 ‘보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라아’는 창세기 3장에서 ‘보암직도 하고’의 그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스라엘의 범죄를 아담의 범죄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호6:7)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저주받을 인간과 그를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바로 ‘나’인 것입니다. 아담이 그러했듯이 아간 안에 들어 있는 ‘나’도 아간처럼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체적인 구원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아간이 뽑히는 과정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수7:16~18)
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자가 뽑히고 뽑히는데 하필 유다 지파에서 뽑힙니다. 그리고 그가 아골 골짝에서 죽은 후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조금 감이 잡히세요? 다시 여호수아 7장 1절로 가겠습니다.
(수7:1)
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간 하나가 범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하신다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는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는데 하나님은 그를 대표로 한 모든 집단을 다 저주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롬5:19)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간이라는 사람이 죽자 이스라엘이 저주에서 풀려 승리를 하게 됩니다. 물론 아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뽑히고 뽑힌,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가 죽었는데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중에서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힌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대신 유다 지파에서 뽑히고 뽑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아간이 되셔서 대신 죽어 주시는 방법으로 죽어야 할 아간들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구원의 이야기가 아이 성 전투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수7:25~26)
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려져야 하는 자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기의 자존심과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그 상태가 이렇게 돌에 맞아 죽고 불에 살라져야 할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로 내려 가셔서 우리에게 쏟아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그 아간이 맞아죽은 그 아골 골짜기를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사65:10)
10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호2:15)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중에서 죄인으로 뽑히고 뽑힌 자가 죽은 곳이 소망의 문이 됩니까? 이러한 구절들은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구절들입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이야기를 통하여 죄의 실체와 그 죄에 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저주와 그 저주가 해결되는 방법까지 아울러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아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아간이 죽고 아골 골짜기가 생기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는데 완벽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도 잊지 않으시고 설명을 해주십니다.
(수8:18,24-26)
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24 이스라엘이 자기를 광야로 따르던 아이 모든 거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25 그 날에 아이 사람의 전부가 죽었으니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
26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현장에서 우리가 많이 보던 장면이 연출이 됩니다.
(수8:28~31)
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사탄의 나라를 상징하는 아이 성의 왕이 나무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시체가 해질 때에 나무에서 내려집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가 돌무덤에 갇힙니다. 어떠세요? 어디서 본 그림이지요? 예수님도 나무에 달리셨지요? 왜 나무에 달리셨습니까?
(신21: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은 저주받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셔서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나라 왕으로 상징이 되는 아이 성의 왕도 나무에 달리고 돌무덤에 갇힙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사탄의 나라 왕과 같은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탄나라 왕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한 번 더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간과 같이 아이 성의 왕도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돌무덤은 아직도 그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돌무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흘 뒤에 열렸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빌2:8) 우리의 불순종을 은혜로 덮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실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표의 원리와 은혜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는 로마서 5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롬5:19)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나, 율법주의, 인본주의는 자존심이 상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약속의 땅에서, 우리는 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처절하게 삶으로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의 범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들켜 지기도 하고, 아이 왕의 행사가 우리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돌에 맞고 나무에 매달리고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날 덮으셨다’는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자만감이 해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또한 성도의 영적 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노력과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가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삿1:7)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가나안 왕 아도니 베섹이 그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아 손발의 엄지가 끊긴 채로 죽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은 아도니 베섹의 상황이 되면 ‘나는 그런 악한 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악행을 덮으신다’라고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 베섹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나의 행한 대로 내가 갚음을 받는구나’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주의, 인본주의, 알매니언 주의의 종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계22:12)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게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결국인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갈3:13~14)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성도는 믿음이라는 배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나안 정복 전쟁이며 사사기 전체에서 기술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사사기, 기대가 되지 않으세요? 우리는 앞으로 사사기 공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욱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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