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7)
하나님의 유머, 삼갈
(삿3:31)
31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 하였더라
오늘은 삼갈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성경은 삼갈이라는 사사를 단 한 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갈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는 핑계로 삼갈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미 없는 구절이 그냥 들어 있을 리는 만무입니다. 분명 삼갈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기에 성경이 한 줄이나마 삼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삼갈 뿐 아니라 돌라나 야일, 입산, 엘론, 압돈 등의 사사도 한 줄이나 두 줄 정도만 할애를 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겠지만 그러한 짧은 이야기 속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풍성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갈은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암살한 후 이스라엘의 사사로 80년을 다스렸을 그 시기에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삼갈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갈이라는 이름은 히브리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역사서를 보면 당시 고대 헷 족속 왕의 이름이 삼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지에서 발굴된 문서들에 따르면 삼갈은 후리아 사람의 이름이자 후리아 사람들이 숭배하던 태양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삼갈은 가나안 지역에서 활동하던 후리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아낫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아낫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전쟁의 여신, 다산의 여신입니다. 그런데 삼갈이 아낫의 아들이랍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삼갈은 히브리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고 우상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사사의 자격이 전혀 없는 그런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삼갈을 한 마디로 표현해주는 단어가 소모는 막대기입니다. 소모는 막대기 같은 자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니 블레셋이 혼비백산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의 지팡이처럼 보잘것없는 막대기가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게 되자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처럼 삼갈이라는 소모는 막대기가 하나님에게 붙들려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위대한 사사의 임무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4장 1절을 보시면 삼갈이 활동했던 시기가 참 모호해 보입니다.
(삿4:1)
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3장 31절에는 에훗의 후에 삼갈이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4장 1절 이후에서는 에훗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드보라가 사사가 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3장 31절의 ‘에훗의 후에’라는 어구와 4장 1절의 ‘에훗의 죽은 후에’는 완전히 다른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 선 사사는 드보라라는 말이고 삼갈은 에훗이 죽기 전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한 번에 두 사람이 사사로 활약을 했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문맥을 잘 생각해 보세요. 사사기는 처음 시작부터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하면서 출발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이 묻습니다. ‘누가 올라가서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게 전쟁을 명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손에 가나안을 붙이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에 의해 이스라엘 전체가 값없이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임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길갈과 보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한 번 강조한 후, 갈렙의 사위 옷니엘 사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쟁에는 인간 측에서의 배경이나 열심이나 능력 등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때에는 벌레처럼 숨어있던 옷니엘이 성령이 임하자 용사가 되어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단 칼에 물리쳐 버립니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왼손잡이 에훗의 사건이었습니다. 기름과 배설물로 가득 찬 에글론을 약한 자의 상징인 왼손잡이 에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살해 버리는 사건입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나(두 배로 나쁜 놈) 기름과 배설물로 가득 찬 에글론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 속의 패역과 어두움을 죽이시기 위해 때로 우리가 죄에 장악되어 헤매게 놔두십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게 우리 자신인 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죽여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무력함과 추악함,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잘 보시면 사사기는 처음부터 줄곧 인간 측에서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반복하여 지적하고 그것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삼갈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삼갈이 활약했던 시기를 ‘태평한 시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삿3:30)
30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 하였더라
이게 에훗의 시대거든요. 그런데 태평한 시대에 웬 전쟁입니까? 이게 오늘 설교의 키포인트입니다. 태평성대라는 건 평화의 시대라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편안한 상태잖아요? 그런데 왜 태평한 시대에 전쟁이 있느냐 말입니다. 드보라의 노래 속에 보면 삼갈의 시대가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삿5:6)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왜 태평성대여야 할 에훗의 통치시기에 삼갈의 날이 오버랩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역사 속에서의 교회의 실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은 평화를 외쳤습니다.
(눅2:11-14)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 서에서 거의 매번 ‘평강’을 비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평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의 인생이 평화롭기만 합니까? 전쟁과 전쟁의 연속이지요? 에훗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의 시절에 삼갈의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완료된 언약 안에서의 미래와 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깨달음의 장이 태평성대의 에훗의 시대(결과)와 초라한 소모는 막대기로서의 삼갈의 시대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완료된 승리를 거머쥐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을 그대로 작은 모형으로 살게 됩니다. 자신이 소모는 막대기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평강이 아니라 혼돈이며 패배가 아닌가? 세상의 세계관으로 볼 때 그건 혼돈으로 보일 수 있고 패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판단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힘 앞에서 무력한 소모는 막대기가 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그 완료된 승리는 번복되거나 변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평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증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료해 놓으신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고 실패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평강 속에서 전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전쟁 속에서 평강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절대로 아무 일도 없는, 무사안일의 평강이 올 수 없습니다. 그건 하늘에서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운명적이고 선언적인 평강의 나라를 살면서, 왜 예수가 그 평강을 값없이 선물로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왜 그 평강을 쟁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 그리고 왜 꼭 평강을 얻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육신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며 처절하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힘의 원리 속의 세상에서는 자기부인이 소모는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육의 죽음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블레셋에는 철기 문명하의 대단한 무기들과 철 병거가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신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모는 막대기가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렸을 때 거기에서 승리가 터져 나온다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누구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만 드러나야 하고, 예수의 피만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갈이 6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쳐 죽였다고 하지요? 6이라는 숫자는 칠일의 안식에 이르는 데에 실패한 암울한 인간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흉내를 비슷하게 내지만 절대로 하나님의 자리에 이를 수 없는 마귀의 세력을 666이라는 숫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숫자 6에 완전수 10의 제곱이 곱해졌습니다. 그건 첫째 아담 속에서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인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러한 블레셋이, 첫째 아담들이 소모는 막대기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한단 말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왼손잡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평화의 나라로 입성을 한 성도들이 육이라는 블레셋을 여전히 품고 삽니다. 그 블레셋은 너무나 강력하여 600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블레셋을 쳐부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나의 육이 무너지고 내 속에 사시는 예수라는 새 생명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소모는 막대기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삶을 통하여 ‘나’라는 우상 섬김에서 조금씩 탈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평가 절상하여 대단한 자리에 앉히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지나치게 의지하게 되고 그러한 힘과 능력을 더욱 강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세상 것들을 끌어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것들로 자신의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쟁취하려 합니다. 한 마디로 ‘나의 강함’을 챙겨서 그것으로 평강과 행복에 도달해 보려 하는 것이 세상의 시도요 추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거든요. 그래서 성도는 절대 쇠막대기가 될 수 없고 철병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소모는 막대기로 낮아지고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소모는 막대기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안에서, 예수와 연합되어 구원을 받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총칼이 되고 철병거와 탱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도바울은 어떠했는지 볼까요?
(빌3:4-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사회적 배경을 다 배설물로 여겨 버렸습니다. 왜요? 성도에게 힘이 되는 것, 그리고 성도에게 자랑이 될 만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밀어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철병거와 같은 바리새인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아 소모는 막대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소모는 막대기로 내려간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승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존재가 소모는 막대기,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이 담으시는 것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가 빈 그릇으로 낮아졌더니 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바울이 빈 그릇으로 낮아졌더니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이 격발되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평강은 이 역사 속에서 이 세상 속 아담들이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엉뚱한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에훗의 태평세대에 삼갈의 전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이런 구절도 저절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니라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감정의 부분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이게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열심히 순종하고 계십니까? 가끔은 되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앞에 ‘항상’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범사에’라는 말도 붙어 있고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요? 그냥 ‘그건 목적지이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이라고 얼버무리지 마세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해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20%?, 30%? 50%?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고,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99%여도 안 됩니다. 100% 항상 기뻐해야 하고 100%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엄청난 죄를 지어서 다른 이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때에도 기뻐해야 하나요?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까.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교회에 가던 교우가 교통사고로 옆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나요? 전쟁터에서 내 전우가 포탄에 맞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때도 기뻐해야 합니까? 내 자식이 정신이상자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하고 살해를 당했습니다. 기뻐해야 합니까?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항상, 범사에’라는 이런 제한적 용어가 감정에 대한 명령 앞에 떡하니 들어가 있느냐 말입니다. 아울러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고전13:4-6)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절을 보시면 기뻐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고 하지요?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범사에’가 기쁨과 감사 앞에 붙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법칙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어구가 있지요? 하나님은 지금 성도들에게 무작정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군데 더 확인하고 갈까요?
(빌4:4)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역시 항상 기뻐하라는 감정에 명령이 떨어지는데 ‘주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것이지요? 인간이 기쁨을 느끼고 감사의 감정을 느낄 때에는 항상 그 대상과의 관계성에 근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 항상 변하는 사람이나 사물, 현실 등이 될 때 인간의 감사와 기쁨은 수시로 변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나에게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늘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 변하지 않는 것일 때는 어떻습니까? 그때 비로소 ‘항상, 범사에’라는 단어가 기쁨과 감사 앞에 붙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대상은 수시로 변하는 이 세상에서의 업적과 그로 인한 결과물과 열매, 행위, 인간 등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그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현실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좀비들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고통과 시험의 현실로 자각이 되고 인식이 됩니다. 그러나 그때 성도는 완료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를 격발해 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기쁨과 감사의 나라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과 감사의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성도에게 감지가 될 때에는 영원 속에서의 그 나라와 다르게 감지가 됩니다. 우리는 영원 속에서 항상 감사할 것이고 범사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그러나 지금 이 역사 속에서는 타락한 육신과 죄만 생산해 내는 사회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늘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나라에 들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과 내 안의 죄가 인식이 되고 자각이 되면 고통스럽고 안타깝고 슬프고 눈물이 나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항상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그렇게 완료가 된 자는 이 세상 속에서 죄로 인한 고통과 상실감과 슬픔과 안타까움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분과 현실의 차이이며 완료와 경험의 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과 감사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겪는 것은 슬픔과 분노와 안타까움과 고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항상 기뻐하는 자요, 범사에 감사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완료와 현실의 차이, 묵시와 역사의 차이, 신분과 경험의 차이, 이 차이가 바로 우리 인생 속에서 기쁨과 감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기쁨과 감사를 경험케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에훗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태평성대의 시절 동안에 삼갈의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스라엘, 즉 교회는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에 의해 완료된 그 평강을 깨는, 내 속의 블레셋을 경험과 체험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블레셋을 향하여 철장을 들고 공격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열심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낮아지고 부인되어 질 때 성도는 블레셋의 철병거였던 그 교만의 자리에서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 그게 진짜 평강의 나라를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강의 나라에 들어간 성도는 아무 일없이 무사태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쟁, 전투와 전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해치는 세력과 존재들의 실체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더욱 더 하나님 나라의 완료된 평강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니라 바로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장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에서 성도의 대적은 반드시 궤멸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옛 사람의 죽음이요, 이 세상 자랑의 죽음이요, ‘나’라는 우상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항상 기뻐하는 자로서 슬픔을 살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서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평강의 나라를 사는 자로서 전쟁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소모는 막대기가 되어 결국 하나님의 영광만을 오롯이 드러내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12:5-10)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게 소모는 막대기로서의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나는 나의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만 계속 폭로당합니다. 그런데 이미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승리는 누구의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찬양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강함에 의해 성도는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흘러가게 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분은 평강의 나라의 왕이시며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그 나라를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취급을 받으셨나요? 하나님은 그분이 입으신 육신을 공격하여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새 몸으로 부활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소모는 막대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소모는 막대기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그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전쟁, 성도의 전쟁을 성경이 이런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막1:35-45)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 오더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시험을 받으신 후에 귀신들린 자들과 병에 걸린 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해볼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중 가나안 정복 전쟁의 부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빛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에 의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동일한 그림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 사건을 바울이 ‘세례’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은 어떤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40일 광야 시험 이후에 귀신들린 자들과 문둥병자들을 비롯한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은 바로 그 가나안 정복 전쟁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던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귀신을 내어 쫓다’에서 ‘내어 쫓다’라는 단어나, ‘문둥병이 떠나가다’에서 ‘떠나가다’라는 단어 등이 전쟁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들과 싸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어두움의 세력의 대표로 귀신들린 자와 문둥병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나 문둥병자는 반드시 진 밖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진 밖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진 밖이나 광야는 하나님 나라의 이방인들이 사는 저주받은 곳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에서도 그들이 광야에서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35절과 45절에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레모스, 광야’입니다. 아니, 조금 전에 이 귀신 들린 자나 병자의 치유 사건은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상징이 된 예수님의 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이 전쟁이 광야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실체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다른 세력과의 전쟁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마귀의 세력, 죄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나’만을 우상삼아 살려고 하는 귀신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고, 문둥병보다 더러운 죄의 질병이 여전히 만연하게 퍼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자신과 전쟁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가나안 정복 전쟁의 실체입니다. 가나안, 즉 약속의 땅은 성도에게 이미 완료되어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 그 완료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분의 어떠한 수고에 의해, 그리고 어떠한 자들을 위해, 주어지게 된 것인지를 이 세상 속에서 알아가야 하는 것, 그게 바로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귀신들린 자, 문둥병자는 어디에 살지요? 진 밖, 광야에 삽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세상에서 광야라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가나안이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말로 가나안 땅 안에서, 저주 받은 광야 안에서 저주받은 자들이 저주의 삶을 체휼해가는 모습으로 치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진 밖의 삶을 체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마귀와 문둥병을 쫓아내 버리시는 것이 가나안 정복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예수 혼자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들이나 문둥병자들이 그들의 질병 치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에서 그렇게 부정한 자로 폭로되며 자신을 부인당하고 예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소모는 막대기로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시는지.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있는 광야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라고 그 구원의 주체가 당신임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도 예수님께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로 구원의 주체가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밝히지요? 그겁니다. 성도는 광야를 통과하며 자신이 불치의 문둥병 환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이 죄는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모는 막대기입니다.
(마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 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보세요. 예수님의 전쟁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는 예수님 혼자의 전쟁입니다. 예수님도 조금 고쳐주시고 우리도 힘을 내서 질병 치유에 힘을 쓰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무력한 존재로 소모는 막대기로, 죽은 흙으로 존재하고 예수님께서 죽은 흙에서 사망이라는 질병을 빨아내어 당신의 몸속으로 끌어들이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저주받은 땅 광야에서 영원한 사망에 처해져야 할 우리 대신에 예수께서 광야에서 문둥병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밀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이 마가복음 1장의 에피소드에서 병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집니까? 진 밖, 광야에서 진 안의 성전으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한적한 곳에 남아 계셨다고 하시지요? 한적한 곳은 어디다? 광야입니다. 우리의 광야를 예수가 차지하시고 예수님의 성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예수의 바보 같은 삶을 좇아 살도록 인도된다는 말입니다.
(히13:12-14)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렇지요? 우리보고 어디로 나가라는 겁니까? 영문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러 나가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지라고.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그리로 밀려 내려갑니다. 영문 밖, 진 밖 광야에서 원래의 자리, 처음자리, 문둥병자에 불과했고, 귀신들린 자에 불과했던 나의 모습을 죽는 날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에 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믿음으로 확인되는 우리 구원의 완료성에 대해 감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평화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삶이고, 그게 항상 기뻐하는 자의 삶이며, 범사에 감사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왜 에훗의 평화의 시대에 삼갈의 전쟁이 소모는 막대기라는 소품에 의해 설명이 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바로 진 밖에서 죽어야 하는 광야의 문둥병자, 삼갈이었고, 소모는 막대기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우리 안에서 전쟁을 치르시며 결국 우리에게 승리를 선물하고야 마시는 그 구원의 여정, 여러분이 바로 그 구원의 여정에 들어가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소모는 막대기로 초라하게 내 몰릴 때 너무 부끄러워하시거나 창피해 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뻐하세요.
'김성수 목사 > 사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기(9) 인간아, 너의 이름은 여자니라 (삿4:4~9) (0) | 2013.10.17 |
---|---|
사사기(8) 왜 야빈에게 파셨을까? (개역한글 삿4:1~24) (0) | 2013.10.17 |
사사기(6) 왼손잡이 에훗 왼손잡이 예수 (삿3:12~30) (0) | 2013.10.17 |
사사기(5)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시험 (삿3:1~11) (0) | 2013.10.17 |
사사기(4) 사사와 함께 살고, 사사와 함께 죽고 (삿2:6~23) (0) | 2013.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