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18) 항아리 속에 든 횃불   (삿7:9~25)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4

사사기(18)

항아리 속에 든 횃불

 

(삿7:9~25)

9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 가에 내려간즉

12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14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 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21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24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어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행하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나루턱을 취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그 나루턱을  취하고

25 또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 사람을 추격하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요단 저편에서 기드온에게로 나아오니라

 

오늘은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의 미디안 병사의 꿈과 그 해몽, 그리고 그 꿈대로 현실이 되어버린 이스라엘과 그 대적들과의 전투의 내용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것처럼 기드온은 계속해서 자기 속의 마귀적 본성을 폭로 당합니다. 아마 다음 주까지 공부를 해야 기드온 안에 자리 잡은 모든 아담 군상들의 보편적인 마귀적 속성을 다 펼쳐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복습을 해 보면, 기드온이 처음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에 자신에게 사유된 능력의 부재를 빌미로 그 사자의 명을 거절하지요? 그건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피조물의 처음자리를 벗어난 추악한 첫째 아담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한 기드온은 곧 염소새끼를 예물로 가져와서 자신의 그 행위를 근거로 여호와의 사자를 붙들어 놓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에게 당신의 열심으로만 그 전쟁을 치르실 것임을 표적으로 보여주셨지요? 제물을 가리키고 있는 지팡이에서 불이 나온 것이 아니라 제물을 올려놓은 반석에서 불이 나와 그 제물을 태워 버림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며, 거기에 동원된 인간은 그 일을 가리키는 참관인 역할을 하는 것 뿐 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모여 있는 가운데 하나님을 또 시험합니다. 그건 이스라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처럼’의 꿈을 품은 타락한 아담 적 속성이 들켜지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과 기드온이 대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마귀적 자아 숭배를 깨 버리시기 위해 이스라엘 군사를 줄이고 줄여서 300명만 남기십니다. 그 숫자는 인간 측에서는 절대로 어떤 계획이나 전략을 세울 수 없는 작은 숫자입니다. 그 숫자로는 그 어떤 도모나 시도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자리로 몰고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 자리에서는 자기 힘으로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거든요. 세상적 시각으로 볼 때 그러한 300의 자리는 초라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관점에서 그 300의 자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도우심을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자기 부정의 자리이며, 오히려 안전한 자리이며, 완벽한 자유의 자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힘이시며, 진짜 능력이신 하나님이 모두 하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있고,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마귀적 본성이 계속해서 줄기차게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적진으로 보내셔서 적군 병사의 꿈 이야기를 듣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기드온이 적진에 몰래 잠입해 들어가자마자 적군 병사들이 꿈 이야기를 하는데, 기드온이 그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용기백배하여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옵니다. 도대체 어떤 꿈 이야기인지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삿7:13-14)

13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14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여기에 보시면 마치 다니엘서의 신상과 뜨인 돌의 이야기가 다른 버전으로 기록된 것처럼 보이는, 꿈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적의 장막을 무너뜨리는 것이 뜨인 돌이 아니라 보리떡입니다. 우선 보리떡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보리떡의 이야기는 레위기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레위기 23장 9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곡식을 거둘 때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하나님께 바치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곡식 단이 바로 보릿단이었습니다.

(레23:10~14)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처럼 첫 보릿단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전에 떡이든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그 어떤 것도 먹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고 그 땅의 소산을 얻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기 이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이 소산으로 취하거나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각인 시키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에발산에 올라가서 단을 쌓고 ‘우리는 원래 저주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첫 보릿단이 하나님께 바쳐진 후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보리떡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의 양식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뭔가 노력을 하고 힘을 써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에게 약속의 땅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을 반드시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이스라엘의 수고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주어지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만나를 차압당하고 그 땅의 곡식을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증거제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첫 이삭이 바로 보릿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릿단과 보리떡은 언약 성취의 증거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첫 보릿단을 바치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내셨습니다.’라는 은혜의 신앙고백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보리떡이 적진을 초토화 시키는 꿈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보리인가? 보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의 마지노선과 같은 식량이었습니다. 보리는 원래 가축들에게나 먹이던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사람이 먹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마저 없으면 이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리떡은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살리는 생명’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없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주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레위기에 나오는 보릿단이 신약의 오병이어의 현장으로 그대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리떡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6:35-36)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에서의 보리떡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힘과 지혜와 가능성을 다 부정하고 예수님의 의만을 오롯하게 붙드는 것을 말하고, 그 믿음은 반드시 자기부인이라는 행함과 함께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주일 설교 때 조금 심도 있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예수님은 보리떡, 즉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당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다른 말로 ‘성도의 행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게 지금 보리떡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사실은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렇게 보릿단, 보리떡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예표적이며 기능적으로 담고 있던 소품입니다. 그러니까 보리떡은 인간의 행함을 부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료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첫 열매, 즉 첫 보릿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15:20)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에서의 첫 열매가 레위기의 그 첫 이삭을 인용해서 쓴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보리떡이 주체가 되어서 치루는 전쟁이지 성도 자신의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고전10:17)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여기에서의 한 떡은 성찬식에서 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떡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레위기에서의 첫 보릿단인 것이며,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바로 그 떡에 참예함을 입어 살아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떡의 지체로 편입이 되어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하늘의 떡,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쟁의 주체이신 것이고, 우리는 그 하늘 떡의 지체로 연합이 된, 전쟁의 객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떡은 힘의 원리 속에서 볼 때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이며 약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보리떡의 전쟁은 약함으로 강함을 부수는 전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강함을 추구하는 이 세상 속 아담 군상들 중,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을 약함의 자리로 몰아내려 구원을 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의 용사, 하나님 앞에서의 유명한 자, 하나님 앞에서의 거인이 사실은 패배자이며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존하는 자가 진짜 승리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전쟁인 것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치러지는 자기부인의 전쟁의 양태인 것입니다. 그게 기드온과 미디안과의 전쟁의 진짜 실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떡이 무엇을 부수었다고 나옵니까? 한 장막을 부수었다고 합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한 장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 성경을 보면 ‘오 헬’ ‘그 장막’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연거푸 나옵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tabernacle’‘성막’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리떡이 부수어 버린 것은 적진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어떤 특정한 장막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장막’, 즉 율법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옛 성전을 부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은 율법주의의 기능적 예표인 이스라엘과 그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는 기드온의 그 마귀적 본성을 믿음의 주이신 하늘의 보리떡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수고 들어오시는 전쟁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의 싸움이란 말입니다. 그 전쟁에서 기드온이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전무입니다. 기드온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가리키는 지팡이이며 참관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병의 입을 통하여 그 전쟁의 양상을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삿7:14)

14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이 어절에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그 전쟁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의해 지팡이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꿈 이야기 속에 담긴 은혜의 현실을 인지한 기드온의 손에 횃불과 항아리가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이 되는데 기드온과 300인의 병사들의 손에 무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횃불과 항아리가 주어집니다. 그건 무장이 아니라 오히려 무장을 해제시켜 버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무기를 들어야 할 손에, 전쟁터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횃불과 항아리가 들려집니다. 그건 곧, 세상의 무기로 싸울 생각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곧 메시아의 역할로 투입이 됩니다. 기드온은 300의 병사들에게 자기만을 따라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립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삿7:17)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기드온은 지금 하나님 앞에 패역하여 죽어 마땅한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중보 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할 이스라엘이 되셔서 죽으신 바로 그 이중적 모습을 예표적 내용으로 담고 있는 사람이 기드온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300인의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자신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오라고 명령을 합니다. 마치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그렇지요? 기드온이 300인의 병사 앞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삿7:18)

18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드온은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를 먼저 각인시킵니다. 누구를 위한 전쟁입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치르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 치르는 전쟁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기드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치르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전쟁인 것이지 성도 자신을 위한 전쟁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혹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육적 자아를 섬기지요?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와 선한 행위는 다 자기의 가치와 인기와 만족과 영광을 챙기기 위한 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를 섬기던 자리에서 밀려 내려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의존하는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은 ‘하나님처럼’의 삶을 살고자,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던 이 땅의 아담 군상들과 그들을 쳐서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리로 밀어 내리시는 하나님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 보리떡이, 하늘의 떡 예수가 공격 무기로 등장하는 것이고 그 보리떡의 구체적인 설명이 횃불과 항아리인 것입니다.

 

이제 횃불과 항아리의 설명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횃불, ‘라피드’는 구약 성경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단어인데, 그 첫 번째가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옵니다.

 

(창15:17)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여기에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횃불이 ‘라피드’입니다. 그 단어가 그 뒤로 한 번도 안 나오다가 오늘 본문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횃불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 내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횃불은 언약 속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보리떡도 언약 속의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횃불이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항아리에 들어 있습니다. 항아리에 들어 있는 횃불, 그것이 바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쪼개지시는 것입니다. 그게 항아리 속의 횃불입니다. 그 항아리 ‘카드’는 전도서에도 등장합니다.

 

(전12:6~8)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에서의 항아리는 깨지기 쉬운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미디안을 부수는 무기로 등장한 항아리 속의 횃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깨지기 쉬운 질그릇 속의 횃불, 언약의 하나님, 누구입니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게 보리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까 미디안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인 것이며,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실체를 예표하고 있는 전쟁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언약의 주 예수에 의해 부인당하고, 부정당하여, 끝내는 300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로 서게 된다는 구속사의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언약의 여호와를 질그릇에 담고 있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고후 4:7)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안에 담고 사는 질그릇 들입니다. 그 질그릇이 바로 300의 자리인 것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영이 전쟁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항아리와 횃불은 성육신 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처럼’의 자리에서 자아숭배의 삶을 살던 죄인들이 300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전쟁이 바로 미디안과 기드온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확증해 주는 소품이 양각 나팔 ‘쇼파르’입니다. 본문 18절로 갑니다.

 

(삿7:18)

18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여기에서 기드온이 처음으로 분 나팔이 ‘쇼파르’입니다. 그 나팔은 양각 나팔인데 양각 나팔은 원래 전쟁에서 쓰이는 나팔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쓰이는 나팔은, 은 나팔 ‘하초츠라’입니다. 그런데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과 300인이 분 나팔은 평화의 나팔인 양각 나팔 ‘쇼파르’였던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간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평화입니다. 여호수아서로 가면 그 ‘쇼파르’라는 단어와 ‘요벨’이라는 단어가 혼용되어 쓰이는데 둘 다 양각나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다름 아닌 여리고가 무너질 때의 장면입니다.

 

(수6:2~6)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 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 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이 장면에서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분 나팔이 양각 나팔입니다. 역시 평화의 나팔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이나 그 사건을 시작으로 진행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실체는 단순히 대적들을 물리쳐서 땅을 확보하는 전쟁이 아니라 철옹성 같은 자아 숭배의 현장을 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육적 자아 해체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가 평화의 관계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전쟁에 이스라엘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보세요. 나팔과 언약궤와 제사장과 소리가 등장하지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언약의 중보자로 이 땅에 오셔서 평화의 나팔을 부심으로 철옹성 같은 여리고가 무너지고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이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처음 자리로 밀고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전쟁이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미디안과 기드온과의 전쟁이나, 전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전쟁인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열심을 드러내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하루하루 자기 부인의 삶을 삽니다.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아리 속의 횃불로 오셨고, 보리떡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정말 올바로 인지하고 있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이렇게 대면 대면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 계신 어떤 교수님께서 거의 매일같이 이메일로 제게 설교에 쓸 만한 예화들을 보내주시는데 처음 몇 편은 그 분의 정성이 너무 황송해서 예의상 읽다가 너무 쓸데없는 시간 낭비 같아서 스팸메일로 처리해서 그냥 지워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그 분이 보내주신 예화 메일을 열어 보았더니 한국의 구제역이 아주 심각하다는 그런 종류의 예화가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구제역이라는 가축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져서 한국 전체가 거의 초토화 되다시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제역 방제와 예방의 차원에서 가축을 도살하거나 매장하는 일을 하는 공무원들이 그 소와 돼지들의 눈물과 비명이 생각이 나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의 결론은 구제역으로 가축을 잃은 농가의 아픔에 동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부분을 제가 인용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모님은 지난 13년간 한우를 키우셨다. 2010년 12월 19일 밤 11시, 파주시 축산계장에게서 우리 부모님 농장이 예방적 살(殺)처분 대상에 포함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12일 출하를 위해 우리 농장을 방문한 차량이 구제역 오염농장을 들렀던 차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20일, 파주시 축산 계 사람들은 살 처분을 위해 우리 농장 한가운데를 파서 매립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같이 키우던 소 121마리를 묻은 곳에서 편히 살 수 없다고 눈물을 지으셨다. 매립지 때문에 살 처분은 하루 연기됐다. 21일 오후 3시, 살 처분을 하기 위해 방역담당 여자직원 1명과 남자직원 1명이 농장에 왔다. 우리 가족은 이 사람들에게 항의도 하고,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오후 5시, 파주시 관계자가 찾아와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예방적 살 처분에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사정했다. 이 직원은 어머니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오후 6시, 아버지와 나, 동생은 마지막으로 가는 소들을 위해 고급사료를 줬다. 소들을 안락사 시키려고 주사기에 독약을 넣던 30대 여자직원은 주사기 개수를 확인할 때마다 구토를 했다. 이 직원은 살 처분 때문에 사흘째 밤샘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일을 하면서부터 계속해서 소화가 전혀 안 된다고 말했다. 오후 7시가 되자 안락사가 시작됐다. 큰 소는 2분 만에, 암소는 1분 만에, 송아지는 몇 십초 만에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엎어져 죽었다. 우리 농장에는 3일전에 갓 태어난 송아지가 4마리 있었다. 여자 방역직원은 그 어린 송아지들을 죽이기 위한 독약 주사기를 들고 그 송아지들의 눈망울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제가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네요'라고 울면서 바늘을 찔렀다. 그리고는 다시 구토했다. 자정 무렵 마지막 송아지가 죽는 것을 확인했다. 농장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소들을 덤프트럭에 실었다. 22일 오전 4시30분, 파주시 직원들은 '죄송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돌아갔다. 121마리의 소들이 밥 달라고 울어대던 농장에는 적막만 흐른다. 소들을 묻었다. 너무 많은 소들을 한 장소에 묻어서 그런가? 소들의 피와 소들이 썩으면서 나오는 물이 함께 흐른다. 시냇물처럼. 주사기로 수백 마리의 소를 죽여야 했던 축산계 직원들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 아이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짓이 아닙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다가도 그 눈동자들이 어른거려 깨곤 합니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대인기피 현상에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끼곤 합니다.’ 축산 계 직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구약 시대에 이들과 똑같은 트라우마를 겪었을 이스라엘을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초롱한 눈망울의 소나 양이나 염소 수십 마리를 도륙하여 배를 가르고 뼈를 발라내고, 피를 받아 내어야 했던 사람들. 그들에게는 지금 축산계 공무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가 없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다 치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를 드려야 했던 제사장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대한민국의 축산계 직원들이 구제역이라는 전염병이 돌 때 잠시 겪는 일을 평생 겪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짐승들이 왜 죽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에 쓰인 제물로서의 짐승들이 왜 죽어야 했지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매번 잡아 죽여야 했던 불쌍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나의 칼에 의해 도륙된 제물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그게 실감이 나지 않지요?

 

내가 예수 죽인자라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보신 분 계세요? 그까짓 송아지 새끼 몇 마리 죽인 것에는 그렇게 구토까지 하면서 유난을 떨면서 왜 우리가 잡아 죽인 예수의 죽음에는 그렇게 무관심 한 거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는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면 알수록 ‘내가 바로 예수 죽인 마귀’라는 처절한 트라우마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300의 자리입니다. 내가 예수 죽인 자인데 그 예수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그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질그릇으로, 항아리로 비워질 때 내 안에 계시는 횃불이신 예수가 나를 대신 살고 계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올바른 성화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전쟁에 승리한 이후의 기드온의 행사를 살펴보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