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0)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 왕들의 종말   (삿8:33-9: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5

사사기(20)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 왕들의 종말

 

(삿8:33-9:6)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35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3 그 어미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온 세겜 사람들의 귀에 고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5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 세겜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 가서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으니라

 

이제 우리는 기드온의 이야기의 대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사사 기드온과 300인의 군사 이야기를 ‘용사가 되자’는 선동의 이야기가 아닌, 당신의 백성을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리에서 반드시 건져 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측면에서 해석을 해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모두가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며 저마다 신이 되어 자신의 육적자아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욕망의 각축장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간섭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의 처음 자리로 끌고 내려가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오롯하게 드러내시는 구원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드온의 이야기였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기드온 이야기의 결론 부분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의 정체가 폭로되고,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을 냈던 기드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비멜렉의 정체와 결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육적 인간의 집요한 악마 성이 여지없이 들켜지고 있습니다. 먼저 사사밑에서 순한 양처럼 평화의 세월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사사의 사후에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발각당하고 있나요?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알과 바알브릿을 섬깁니다. 바알브릿은 가나안의 세겜 지역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우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언약을 맺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센 용사 기드온을 믿고 따랐던 것이지 기드온을 기드온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기드온이 사라지자마자 우상에게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면 대적의 손에서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요? 그렇게 인간의 불가능함이 계속해서 폭로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의 성숙을 위해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들을 찾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주시거나 기적을 체험케 해주시면 자신들의 신앙이 훨씬 성숙되고 깊어질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나타나면 그 기적을 붙들지 절대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보세요. 그들 앞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그 기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되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건 죽은 흙들의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소치였습니다. 인간들의 무지는 눈에 보이는 특정한 사건에만 관심을 둡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 특별한 것, 이런 것들 속에서만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찾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나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건과 사건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거나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새 창조의 완성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며 일으키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세밀하게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구속사라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동행을 한다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왜 인간들은 특별한 사건들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감지하게 되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한 애를 쓰게 되고 그것이 용이치 않을 때 안타까운 탄식을 하기도 하며 매 순간을 그렇게 삽니다.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며, 그 뜻을 알기 위해 애쓰는 모든 몸짓과 사유와 언어를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언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들의 일상 전체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이 되는 것이고, 그 사건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해 보이는 사건들 뿐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감지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러한 밀접한 관계 속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속에서만 신의 존재와 간섭을 추측할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일상 속의 신이 감지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눈앞에서 그 특별한 현상들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생각할 것 없어요. 우리가 바로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부수어 가시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을 하려고 하는 지향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지요?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 앞에서 초라하게 밀을 까고 있던 기드온의 모습으로 시작이 되지요? 그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도 자신의 연약한 현실을 근거로 하여 순종치 못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 군상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힘이 없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만 믿고 일을 진행하느냐는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에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이 되고, 추진이 되며, 결론이 맺어진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실제 전투의 현장 속에서도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두 손과 두 발을 다 묶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실하게 경험케 해 주십니다. 즉 눈에 보이는 힘이 진짜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경륜하신다는 것을 말로, 사건으로, 표적으로, 열심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 후의 기드온은 또 다시 보이는 힘을 추구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아내를 많이 얻고,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합니다. 인간의 육적 욕망의 집요함이며 추악함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의 욕망의 산물이 아비멜렉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아버지의 세상 왕에 대한 욕망을 구체화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사사기 9장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영웅, 기드온이 죽자 금방 바알과 바알브릿에게로 돌아섭니다. 그들이 기드온과 기드온의 전쟁 뒤에서 일을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조금이라도 감지를 했다면 눈에 보이는 기드온이 죽었다고 해서 금방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는 죄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며, 성경은 그들을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왕 삼아 사는 죄인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전쟁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패역한 이스라엘 안에 자중지란을 일으키십니다. 세상 왕의 자리를 추구하고 열망하던 기드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비멜렉이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시 왕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추악한 계략을 꾸밉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분신인 것이고,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바로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달려갔던 그 이스라엘이 바로 기드온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처럼’의 욕망을 펼쳐 보여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기능적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바로 ‘나’의 모습과 그러한 ‘나’를 부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이렇게 일관성 있게 인간 속의 악마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이 외가 식구들을 찾아갑니다. 그의 외가는 다름 아닌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은 바알브릿을 섬기던 곳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그들도 역시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세상 왕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여 사는 죄인들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 보아도 왕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 뿐이요, 저리 보아도 왕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 뿐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가 다 경쟁자요 적이기 때문에 아주 쉽게 이합집산을 합니다. 자기의 유익에 득이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뭉쳤다가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겠다 싶으면 뒤 돌아서 상대방의 등에 칼을 꽂는 자들이 이 세상의 용사들이요, 유명한자, 거인들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외가인 세겜에 찾아가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의 왕위 찬탈을 도우라고 설득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비멜렉은 지난주에 제가 설명해 드렸던 단 지파나 유다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지친임을 내세워서 설득을 합니다. 난 너희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이 ‘맞다, 우린 너의 형제다’하며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 바알브릿의 신당에서 은 70냥을 꺼내어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개역 성경에는 ‘묘’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단어는 ‘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알브릿을 섬기던 신당이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의 신, 풍요의 신인 바알브릿에게 바쳐진 인간 욕망의 배설물 같은 우상 신당의 헌금이 아비멜렉의 권력 찬탈자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처럼’의 추구를 돕는 더러운 세력인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깡패들을 삽니다. ‘방탕하고 경박한 유’라고 나와 있는 그 어구가 깡패들을 가리키는 어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는 일없이 경박하게 남의 돈이나 뜯어 먹고 사는 조폭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깡패들을 데리고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반석 위에서 다 죽여 버립니다. 은 한 냥에 형 한 명씩의 목숨 값을 계산해 준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 왕의 추구는 이렇게 잔인하고 포악하며 무섭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 안에 숨어 있던 악마성이었음을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삶으로 폭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300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한 와중에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이라는 사람이 아비멜렉과 깡패들의 칼을 피해 숨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아들은 총 72명인 것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숨어서 겨우 살아난 요담이 자기 형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심 산으로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우화 하나를 이야기 합니다.

 

(삿9:7-16)

7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소리를 높이 외쳐 그들에게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이 우화에는 ‘나무들’이라는 불특정 다수 집단이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가 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른 세 나무는 나무들의 왕의 추대를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가시나무만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말미에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붙여 넣어, 그 나무들의 우화가 아비멜렉의 왕위 찬탈 사건을 비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종류의 나무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과 마귀 나라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그러한 아비멜렉 안에 들어 있는 기드온과 이스라엘, 즉 성경의 독자인 우리 자신의 악마성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이루실 언약 성취의 필연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먼저 감람나무의 반응을 한 번 보세요. 본문 9절입니다.

 

(삿9:9)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감람나무는 자신을 기름 부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다른 나무들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뭡니까? ‘사람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화를 위해 사는 자라면 당연히 왕위 추대를 수락해야지요. 그런데 그의 관심은 이 세상 왕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현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실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 현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맞다면 그 현실 속에서 분명 하나님 스스로가 당신의 영광을 챙겨 가실 것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집중하고 있지요? 두 번째 나무를 볼까요? 본문 10절 이하로 갑니다.

 

(삿9:10-11)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의 현재 현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현실이 이 세상 왕의 추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포도나무입니다.

 

(삿9:12-13)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일상이 이 세상 왕의 추구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인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전부 하나님과 타자를 위해 삽니다. 그래서 누구 위에 군림한다든가,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근거로 상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평가나 대우를 받으려 한다든가, 타자와의 차이성을 입증하여 자신의 높음이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천국 백성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자원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사용하며 삽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든 존재가 각기 다른 역할과 직업과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최선의 만족과 행복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만큼의 영화를 내어 놓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가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떤 모양의 일을 얼마만큼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하나님과 이웃의 영화로움이니까요. 그냥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영화를 위해 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그게 행복이고, 그게 평안이며, 그게 안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산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확하게 그것과 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요? 그것이 아비멜렉, 즉 가시나무의 삶입니다. 본문 14절 이하를 보세요.

 

(삿9:14-15)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다른 세 나무가 전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능력과 자원에 만족하며 그것들을 세상 왕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만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이나 힘이나 능력이 자기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영화롭게 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자기의 존재와 자원과 됨됨이와 능력이 자신의 것인 양 너스레를 떱니다.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하지요?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뜻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불을 내어 다 살라 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세상 왕들의 자기 존재 인식입니다.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왕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세상 왕 노릇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우리의 모습은 가시나무의 모습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을 하시는지 볼까요?

 

(삿9:17-24)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었거늘

18 너희가 오늘날 일어나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도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 요담이 그 형제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달려 도망하여 브엘로 가서 거기 거하니라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삼년에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악으로 연합이 되어 있던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악신을 보내십니다. 23 절의 악한 신은 ‘라 루아흐’입니다. 직역을 하면 악한 성령입니다. 악한 성령이라는 어구의 조합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성령은 절대 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한 성령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로마서 1장으로 가면 그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롬1:24)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 쓰인 ‘파라디도미’라는 동사는 붙들고 있던 것을 ‘넘겨주다,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죽은 흙을 어거하며 붙들고 계시던 손을 놓아버리는 형국입니다. 그때 타락한 피조물, 즉 죽은 흙들이 죽음의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하게 하셨다고 할 때, 그 의미가 하나님이 바로를 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바로 안에 들어 있던 악을 하나님께서 제어하지 않으시고 놔두시며 그 악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쓰신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말은 악하지 않은 그들을 일부러 악하게 만들어 버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악의 조성 자가 되시니까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일반 은총을 거두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흙들의 본질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때 그 속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악의 본질이 그대로 폭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난 사람들처럼 그렇게 놔두실 때가 있지요? 하나님이 말려주실 만도 한데 안 말려 주시고 그냥 놔두셔서 우리 자신의 악마성을 그대로 폭로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가 가장 아프고 괴로울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동안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것들까지도 전부 끄집어 내셔서 죄로 진열을 해 보이십니다. 그러한 죄는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도저히 자기들의 의로 그 심판을 모면할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복음의 현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의 맨 앞줄에 서 있는 것이 죄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그게 악신이 임한 하나님 백성들의 상태인 것입니다.

성도는 사업이 망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명예가 손상되거나 할 때보다 자신 안의 마귀적 성향이 스스로에게 들켜질 때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성도는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육적 자아의 욕망에 타격을 입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다가 급기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처절한 고백을 하게 될 때 성도의 육적 자아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 땅에서 온전하게 성취 될 수 있는 문제의 것이 아닙니다. 지향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의 육적 자아가 그렇게 분열과 난항을 겪으면서 지리멸렬의 길을 가게 되고, 육적 자아의 멸망의 길을 가게 될 때, 자신을 향하던 왜곡된 사랑이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지향성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에 아가서를 함께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아가서를 예화로 들게 되는데, 아가서 1장에 보면 지금 설명한 내용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1:12-14)

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 말은 지금 술람미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신랑이 침상에 있을 때 술람미에게서 나도(나드) 기름 향기가 토해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사실 밥상으로 번역을 해도 무방하고, 침상이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원어 본문에는 ‘앉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밥상에 앉았는지 침상에 누웠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추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랑 솔로몬과 신부 술람미의 하나 됨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단어인 것입니다.  

침상이라는 것은 부부가 함께 눕는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부부를 한 몸이라고 하지요? 그건 지난 주일에 설명을 해 드린 것처럼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모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신랑의 희생으로 신부가 탄생을 하여 신랑의 몸으로 연합이 되어 신랑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가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부부라는 관계 속에 담긴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신랑과 함께 침상에 누웠다는 것은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엡5:31-32)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지요? 신랑의 침상에 신부가 들어가 둘이 하나가 되니 신부의 몸에서 나도 향이 뿜어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도 신랑과 신부는 하나가 됩니다. 성경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를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묘사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신랑이신 예수께서 신부인 교회에게 ‘나는 하늘의 양식이니 나를 먹어라’고 외치십니다. 그렇게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를 먹고 비로소 신부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는 그렇게 하여 신랑 안으로 들어가 신랑과 연합이 됩니다. 그건 또 신랑이 신부를 먹는 형국입니다. 요한복음 4장으로 가면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의 양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4:31-35)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때 그 여인에게 구원이 임하지요? 곧 제자들이 도착하여 예수님께 식사를 권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잡수실 양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식이 뭡니까?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34절의 ‘이것’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거기에서의 ‘이것’은 지금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하나 구원해 내시면서 그들을 당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먹고 교회로 충만하게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그렇게 언약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랑은 신부를 품에 품는 하늘의 식사를 하는 것이고,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 즉 은혜를 먹는 은혜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랑과 신부의 식탁입니다. 역시 한 몸 됨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침상에서의 한 몸 됨이나 식탁에서의 한 몸 됨은 전부 신랑 측에서의 희생을 근거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왕의 신분인 솔로몬이 얼굴이 검은 노예, 술람미를 사랑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것 자체가 왕의 희생이 전제가 된 하나 됨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신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된 신부에게서 향기가 토해져 나옵니다. 그건 신랑이 좋아하는 향기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그 향의 발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향이 술람미의 젖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몰약 주머니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당시 고대 시대 여인네들은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몰약 향낭을 젖가슴 사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목에다 걸어 젖가슴까지 늘어뜨린 향수 주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여염집 아낙네들이 저고리 속에 사향 주머니를 품고 다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2절의 나도 향이나 13절의 몰약 향이나 똑같이 시체의 방부제로 쓰이던 것이고 여인네들의 향수로 쓰이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술람미가 자기의 몸에서 나는 향을 시체를 싸는 나도나 몰 약의 향이라 표현을 했을까요? 게다가 그 향기는 자기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술람미가 ‘솔로몬 당신은 내 품의 몰약 향낭’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술람미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솔로몬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그 향낭 자체가 솔로몬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 성도에게서 향기라는 것이 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젖가슴 사이의 몰약 향낭이 되어 주셨다는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체와 함께 싸여지는 몰약의 향낭이시라면 우리는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시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밖에 안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체에게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게 되는 것은 시체의 공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와 함께 연합이 된 몰약 향낭의 효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됨을 폭로 당하면서 죽은 흙의 자리로 내려가게 될 때에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 즉 죽은 시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나를 품어 안으시고 내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조금씩 밖으로 토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2:19-20)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시체 냄새를 가리는 몰약 향낭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흠 없는 제물의 향기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하나님 앞에서 전부 가시나무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기의 소유와 자원과 힘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남을 지배하려 하고, 그것이 용이치 않을 때 서슴없이 남을 밟아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완전한 멸망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시체가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자각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부정되어지는 과정을 고난 속에서 통과를 하며, 자기의 시체 냄새를 가리고 계시는 몰 약 향낭이신 예수님을 신랑으로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 신랑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랑은 당신이 신부의 목에 걸어 놓은 향기만 흠향하십니다. 그 외에 신부가 내어 놓는 다른 것은 전부 시체 썩은 냄새로 취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신랑이 우리를 찾으러 오실 때 우리가 받은 믿음과 은혜만을 내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결혼 관습을 보면 왜 성경이 하나님과 교회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을 했는지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하게 될 때 제일 처음 과정이 신랑 부모의 신부 간택입니다. 신랑이 결혼 전에 신부를 보는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전 예정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창세 전에 예정하십니다.

 

(엡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렇게 신부가 간택이 되고 혼인날이 가까워 오게 되면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친구나 믿을만한 종을 신부에게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신랑에 대해서 소개를 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엘리에셀을 먼저 보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누가 먼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요3:28-29)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자신을 히브리 사람들의 결혼 관습 속의 신랑 소개용 친구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신랑이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보내져서 신랑을 소개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그렇지요? 지금 우리 신부들에게 신랑을 소개하시는 신랑의 친구는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렇게 신랑의 친구로부터 신랑에 대해 소개를 들은 신부는 신부 집에서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속전을 지불하고 신부를 사게 됩니다. 만일에 돈이 모자라면 종살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속전이 완전하게 지불이 되면 신랑이 드디어 신부를 데리러 가는데 그 때가 밤입니다. 이 밤 같은 세상에 신부를 홀로 두었다가 나중에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왜 신랑이 이 밤 같은 세상에 당신의 신부를 두고 가실까요? 왜 솔로몬은 술람미를 신부로 택하여 입맞춤 한 번 해주고는 떠나버렸을까요? 왜 솔로몬의 왕궁으로 즉시 데려가지 않았지요? 신부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신랑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자기에게 신랑이 필요한지 가슴 깊이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거의 일 년 가까운 기간이었다고 하니 정혼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시간 치고는 꽤 긴 시간입니다. 신랑은 밤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찾아 가서 정확하게 신부의 손을 잡아끕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신부는 신랑이 보내준 신랑의 빙폐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자기가 준 것을 자기에게 내어 놓는 자를 신부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신부가 아닌 들러리들이 아무리 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어도 신랑은 자기가 보낸 빙폐물을 지닌 신부만을 데리고 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만이 하늘같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미리 보내주신 빙폐물이 뭡니까? 돈입니까? 선행입니까? 종교 행위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혼인예물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믿음을 내어 놓아야 신랑이신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하늘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예복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예복만이 하나님 나라로 입성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이삭을 내어 놓으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진짜 신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히11:5-6)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에녹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동행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하다가 하늘 신부가 되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요? 믿음으로 산 것이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그 믿음을 내 놓은 자만이 신랑이신 예수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아 또한 믿음으로 산 자라는 말이지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 속으로 들어가 방주의 은혜로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도 믿음으로 산 자입니다.(히11:7)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내가 바로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기드온이고, 내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성패의 근거로 삼으며 ‘나’라는 우상 섬기기에 여념이 없는 이스라엘이며, 내가 바로 나의 왕 됨을 위해 내 형제들의 목숨을 한 반석 위에서 몰살할 수 있는 아비멜렉인 것이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아비멜렉의 편을 들었다가 자기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 싶으니까 금방 배신을 하여 피 묻은 칼을 어제의 동지에게 들이대는 세겜 사람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그러한 마귀성을 폭로해 버리시고 결국은 진멸해 버리십니다. 기드온도 죽고, 세겜 사람들도 전멸 당했으며, 아비멜렉도 맷돌 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살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13만 5천이라는 세상 앞의 300의 자리로 몰고 내려가셔서 결국은 완전히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오롯이 바라는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당신의 구원의지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시체일 뿐이고 너희가 내게 바치는 향기는 내 아들의 몰약 향낭일 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내가 주는 복을 받아 살아야 한다’ 이게 바로 기드온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로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화려한 가짜 빙폐물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빙폐물인 믿음을 내어놓는 자로 밀려 내려가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의 양식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오신 우리 신랑의 은혜를 찬송하고 찬미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게 진짜 승리입니다. 기드온과 300인의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역시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