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1) 육도환생(六道還生)이냐 부봉익(附鳳翼)이냐   (삿10:1~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5

사사기(21)

육도환생(六道還生)이냐 부봉익(附鳳翼)이냐

 

(삿10:1~18)

1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이십 삼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 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 이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 하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 되었더라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8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 팔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 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 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7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 치고

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불교에는 육도환생(六道還生)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은 인과의 보응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살면서 내어놓은 원인의 모양에 따라 이생에서 혹은 내생에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상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악도, 곧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의 세 가지 도와 아수라, 인도, 천도의 세 가지 도가 있어서 사람이 이 여섯 가지 길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게으르게 산 자들은 축생도, 즉 가축으로 다시 태어나서 죽도록 일만 하다가 고기까지 빼앗기고 죽는 생을 살게 되고, 선신들의 대적인 아수라처럼 살던 자는 육도의 아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그런 인과응보의 공식입니다. 그래서 지옥변상도 (地獄變相圖)라는 불화를 보면 무시무시한 야차들과 지옥의 불길, 그리고 망인들이 제4오관대왕 앞에서 생전의 죄업을 저울에 다는 모습, 망인들이 칼을 쓰고 고통을 당하는 지옥고(地獄苦)를 자세하게 그려놓고 거기에 육도환생(六道還生)의 모습을 그려 놓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그러한 지옥고(地獄苦)의 실상과 육도환생의 현실을 보고 생전에 선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교훈적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육도환생의 공식으로, 인과에 관한 응보의 방식으로 인간들을 대우하신다면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냥 거기서 멸망시켜 버리신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또 구원자를 보내심으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인과응보의 공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용린 부봉익의 원리로 거저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또 확인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공식으로 이스라엘을 대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이 사사들이 죽고 나서 곧바로 우상이라는 우상들은 전부 자기들 땅으로 끌어 모아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우상 전시장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블레셋과 암몬에게 팔아 버리십니다. 인과응보 같잖아요? 정말 그런가요? 먼저 그들이 어떤 우상들을 섬겼는지 그 목록부터 볼까요? 본문 6절입니다.

 

(삿10:6)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렇게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또 내려가자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들어 호되게 후려 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늘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또 부르짖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삿10:10)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또 다시 용서해 주시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하실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양상이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치 심술을 부리듯이 ‘나한테 그러지 말고 너희들이 섬기는 신한테 가서 도와 달라 그래’하십니다.

 

(삿10:11-14)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 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그러자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며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 신상들을 다 부수어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좀 더 분명한 회개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삿10:15-16)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 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주석하기를, 이스라엘의 철저한 회개가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하려거든 우상을 부수기까지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이스라엘이 철저한 회개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건져내신 것일까요?

먼저 15절을 보시면 성경이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셔도 좋으니까 일단 우리 먼저 구원해 주세요’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회개는 ‘나’의 안위를 챙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과 근거로 제시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니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로 결론이 나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의 신상을 부수고 부르짖으면서 자기들의 안위를 챙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 회개해줄 테니까 내 소원 들어달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진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좀 더 분명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을 하셨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곤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히브리어 ‘아말’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고통, 고난’이라는 의미보다는 ‘사악함, 진저리나는 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말은 ‘걱정을 하셨다’ 혹은 ‘안타깝게 여기셨다’는 말이 아니라 ‘몹시 싫어하다, 낙심하다’라는 의미의 ‘카짜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다시 번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악함을 몹시 싫어하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사악하게 여기셨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거절하시자 우상의 신상을 부수는 실제 행동을 보여 줬잖아요? 하나님이 그들의 그런 행동을 믿어주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믿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몹시 싫어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카짜르’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을 보시면 잘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슥11:8~10)

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8절의 ‘싫어하고’가 오늘 본문에서 ‘근심하고’로 번역이 된 ‘카짜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상을 부수면서 연극을 하는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회개의 실체를 알아차리시고 그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의 이야기 서두에 그러한 이야기를 심어두신 것은, 지금부터 입다를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가 되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회개를 근거로 하여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시기 위함입니다. 제가 너무 사사기의 등장인물들을 폄하한다고 생각하세요? 바로 뒷장으로 가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회개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임시방편의 가짜 연극이었음이 분명하게 확인이 됩니다.

 

(삿11:4~8)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8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암몬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하나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입다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장면입니다. 입다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길르앗에 거하는 어떤 유력한 인사의 사생자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유력한 인사라는 것은 성경이 그의 아버지 이름을 길르앗이라는 지명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길르앗 하면 떠오르는 그 지방의 유력한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길르앗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의 사생자로 태어난 사람이 입다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쫓겨나서 돕 땅에 거하면서 잡류들을 모아 수호지의 양산박 같은 잡류 공동체를 만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세력이 아주 막강해졌던 것 같습니다. 암몬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를 찾아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8절에 나오는 장로들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장로들이 기드온에게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이라고 용건을 말하지요? 거기에서 ‘찾아오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슈브’라는 단어로 ‘회개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금 입다 앞에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의 신상들을 부수며 도와달라고 부르짖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깡패 두목에게 찾아가서 자기들의 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0장에서의 이스라엘의 회개는 사악한 회개였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간파하시고는 참을 수 없어 하셨다는 것이 맞는 해석인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짓이었는지를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재통일이라고 부릅니다.

 

(엡1:7~10)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을 ‘애나케팔라이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통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시’라는 의미의 ‘ana’라는 접두어가 통일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어 있던 상태를 골로새서가 이렇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골1:15-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하지요? 그 말은 만물이 그의 안에서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더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한 회개의 현실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것으로, 아담을 위하여(아담의 독처를 위로하기 위해), 아담 안에서 창조가 된 사람입니다. 하와, 즉 신부는 신랑에게서 나왔으므로 신랑에게로 들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은 자기의 살과 뼈를 빼 내어 신부인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신부가 신랑 안으로 들어와 신랑의 빈 곳을 채워야 신랑도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엡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바로 교회인 신부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부인 아담이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로 지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영생을 주실 것이면 생명나무 실과고 뭐고 그냥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면 일이 편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번거롭게 생명나무 실과를 통해서만 영생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신부는 신랑을 먹어야만, 다른 말로 신랑의 희생을 통해서만 신랑 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재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구원의 교리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아담을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생명을 먹어야 예수와 연합이 되어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예수 안에서 나온 자들이 예수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 예수만 온전히 의지하는 상태를 회개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래 한 몸이었던 두 존재가 다시 한 몸으로 재통일 되는 것을 부부라는 관계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한 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완전히 먹혀, 다른 말로 완전히 희생을 해서 한 몸이 된 이들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성경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부부 중 진짜 부부는 단 한 쌍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부 두 몸이니까요. 그리고 진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부부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교회만 진짜 부부요, 진짜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 재통일의 현실은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을 포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요? 어차피 나라는 존재는 예수로부터 말미암고 비롯되었으며 예수를 위한 존재였음을 아는 것이 회개이므로, 진정한 회개에 이르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회개는 인간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신부를 품어 안고 끌어 당겨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불가항력적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주인의 행위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낸 주인의 행위를 회개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찾아가는 이에게서 격발이 되는 것이지 찾아지는 쪽에서는 절대로 생산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회개일진대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회개를 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테니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적군을 물리쳐 주세요.’라고 억지 회개를 꾸며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입다라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회개를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상을 부수어 버린 이스라엘의 기특한 행위나 눈물을 쏟는 회개의 부르짖음을 근거로 하여 인과응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봉익(附鳳翼)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로의 종묘 부근에 가면 봉익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동네의 이름이 바로 반용린(攀龍鱗) 부봉익(附鳳翼)이라는 한자 숙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왕궁 주변인 봉익동에는 조선초기부터 환관들이 많이 거주해 왔다고 합니다. 환관은 궁중에 들어가서 왕의 시중을 들며 행세를 하던 이를테면 일종의 특수층 사람들입니다. 환관이 이러한 특수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그 친족이나 친지가 그들을 통하여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출사(出仕)를 노리는 일부의 무리들은 이 환관들에게 간청하여 자기의 앞길을 열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환관의 존재와 같이, 높은 곳에 붙어서 행세하는 것을 ‘발봉익(發鳳翼)’ 곧 봉익의 날개에 붙어 다니는 물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의 ‘용인부봉익(龍麟附鳳翼) 이성기소지이(以成其所志耳)’에 어원을 두는데, 용의 비늘에 매달리고 봉의 날개에 붙어서 자기의 뜻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유방이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권세에 빌붙어 제후들이 되었던 번쾌와 하후영, 관영, 역상의 이야기입니다.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를 붙잡고 하늘에 오르게 된 행운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반용린이나 부봉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나 회개를 근거로 하여 육도환생적 인과응보의 공식 하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비열하고 추악한 행사를 일삼는 자들로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용서하시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그림이 바로 사사 입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사생자라고 쫓아낸 자의 희생에 의해 면목 없이 구원을 받는 성도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사사기를 읽으면서 오늘 본문 서두의 소 사사 이야기 (소 사사란 일을 적게 해서 소 사사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설명이 짧게 기록되었다는 의미에서 소 사사인 것임)와 입다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붙어 있는 소 사사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왜 그러한 소 사사의 이야기가 입다의 이야기 앞뒤로 붙어 있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소 사사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사사 돌라 같은 사람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사사의 사명에 충실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23년간을 사사로 섬기다가 무덤에 묻힙니다. 그의 이름 돌라는 ‘벌레’라는 뜻입니다. 그는 벌레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사사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반면에 야일이라는 소 사사는 아들 30명에 성읍도 30개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 2장에 보면 그 야일이 나오는데 그는 왕국을 구축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망각하고 인간적인 힘을 추구하며 인간의 왕국을 구축하려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그와 함께 했고 그는 사사의 역할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사사기 12장에 나오는 소 사사 입산은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역시 세상 적인 힘을 추구하느라 딸들을 외국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정략결혼입니다. 그도 역시 야일처럼 세상의 왕국을 구축하려 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사 엘론은 돌라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자식에 관심이 없이 그저 사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밑의 압돈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엘론이나 돌라와는 많이 다르지요? 그와 그의 가족은 어린 나귀 칠십 필을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에 어린 나귀는 오늘날 최고급 승용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그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하나님이 장악하셔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쓰시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됨됨이나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은 그저 불가능한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각양의 인간들을 들어서 쓰실 때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 사사들 전부의 마지막이 무덤으로 끝나지요? 누구는 어디에 묻히고 누구는 어디에 묻혔더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은 지팡이는 맞지만 단순히 메시아의 모형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덤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사망에 붙들려 있는,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빈 무덤을 남기고 가셨지요? 그렇게 구원은 하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침노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그러한 은혜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요일 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언뜻 보면 ‘회개하라, 죄를 자백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라고 하는 것 같지요? 그건 산데마니즘이라는 이단 사설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미쁘시고’라는 단어와 ‘의로우사’라는 단어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미쁘시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피스토스’는 ‘진실하고 정직한’이라는 뜻이고 ‘의로우사’라고 번역이 된 ‘디카이오스’는 ‘공정하고 의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사람을 죽여 놓고 자기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때에 ‘진실하고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그 사람을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게 맞아요? 아니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이 맞아요? 공정하고 의로운 재판관은 그냥 용서해 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과 죽은 사람의 가족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요한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의 고백을 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죄를 자기 아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아들을 벌하시고 우리의 죄와 불의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쁘시고, 의로우사’라는 어구가 그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 대신에 그들에 의해 버려진 어떤 이가 십자가의 희생을 치름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선 입다 안에 숨겨져 있는 메시아의 모형을 구체적으로 살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입다는 사생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로부터 쫓겨납니다. 그건 이 세상에 사생자로 오셔서 율법주의자들에게 쫓겨나 결국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요1:11)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고 결국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입다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11장 7절을 다시 보시면 입다가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찾아 온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삿11:7)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내게 구원을 요청하느냐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똑같은 소리를 하시지요? ‘나를 버릴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느냐?’

 

(삿10:13-14)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보세요. 똑같은 소리를 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입다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입다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행4:11)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로 이 이야기가 입다의 이야기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나오는 ‘다른 신’이라는 어구의 ‘다른’이라는 단어는 11장에서 똑같이 등장합니다.

 

(삿11:2)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여기에 보면 입다의 형제들이 입다를 가리켜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고 하지요? 그 말은 입다가 지금 다른 신들과는 ‘다른’ 어떤 인물을 모형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자식이 아닌 자를 사생자라고 하지요? 입다는 지금 사생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사생자는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자입니다.

 

(신23:2)

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그런데 이스라엘 총회 밖의 외인이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사생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총회 밖으로 내쳐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총회 밖으로 내쳤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메시아의 모형인 것입니다.

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사기 11장 3절을 보시면 그 입다가 거하던 땅이 돕 땅이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에레쯔 토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땅을 지으시는 장면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후렴구가 계속 붙지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땅, 그것이 바로 ‘토브 에레쯔’입니다. 거기에 입다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상징하는 입다가 새 창조의 완성지점을 상징하는 ‘토브 에레쯔’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의 적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하늘의 나그네처럼 그렇게 외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다와 함께 암몬이라는 대적과 싸울 그의 군사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세요.

 

(삿11:3)

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입다에게 몰려와 입다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잡류’입니다. 그 단어‘레크’는 ‘empty, vain, worthless’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망해서, 세상적으로 볼 때 완전히 비워지고 망해서, 가치 없는 자들로 전락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모험가’라는 말로도 번역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다 비워진 자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입다와 함께 암몬을 부수는 자들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입다라는 인물 안에 들어 있는 불가능하고 추악한 죽은 흙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입다는 기드온이 그러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큰 용사가 되고 싶어 하고,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군상, 즉 이스라엘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입다의 이야기도 ‘큰 용사’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삿11: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기드온이 정말 큰 용사였습니까? 아니지요? 큰 용사가 되고 싶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그 힘을 의지하여 세상 왕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13만 5천 앞의 300으로 낮추셔서 그 손에 항아리와 횃불을 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큰 용사이고 싶은 입다를 부수시고 진짜 하늘의 큰 용사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또 다시 펼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의 이야기가 큰 용사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기생’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자나 이솨’는 ‘창녀, 간음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녀, 간음한 여자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머리로 붙여 버리십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우상을 섬기는 간음한 여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창녀의 자리로(다말, 라합) 내려가셔서 죽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근거로 건져 올리시는 것이 구원임을 입다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큰 용사에로의 욕망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청원을 수락하는 그의 말 속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삿11:9)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의 말을 잘 보시면, 여호와가 자신을 도와 이기게 하시면 자기가 이스라엘의 머리가 될 것임을 확실하게 약속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두 말 않고 약속을 합니다.

 

(삿11:10)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이 세상에서 큰 용사로 살고 싶어 하는 두 부류가 부창부수로 거래를 성사시킵니다. 한쪽은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깡패 두목을 찾아가서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시키려하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복수도 하고 그들의 지도자로 군림을 하겠다는 야멸찬 꿈을 갖고 있는 입다입니다. 그 두 부류는 공히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를 하는 듯 쇼를 하다가 정작 위급한 일이 생기자 세상의 힘을 동원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로부터 보상을 챙겨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 하는 불신앙의 모습, 둘 다 패역한 죽은 흙들의 모습입니다. 입다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이고, 모든 전투의 성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분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자로 서지 않고, 전쟁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챙겨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러한 아담들의 ‘하나님처럼’의 욕망을 부수시는 전쟁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다가 어떻게 죽습니까?

 

(삿12:7)

7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 되었더라

 

협상의 명수요, 힘깨나 쓰던 입다가 초라하게 죽어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떤 마을에 조용히 묻힙니다. 왜 하나님은 큰 용사 입다를 이렇게 마무리 시키실까요? 이게 바로 구원인 것을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지혜와 힘을 믿고 길길이 날 뛰다가 결국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예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을 ‘애나케팔라이오’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호세아서의 몇 구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호11:1~9)

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2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 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5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 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