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2) 입다의 서원   (삿11:29~4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6

사사기(22)

입다의 서원

 

(삿11:29~40)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 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 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37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 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38 이르되 가라하고 두 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사사기 11장에는 전쟁에 출전하는 입다가 섣부른 서원을 함으로 해서 일어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입다의 딸이 번제로 바쳐집니다. 입다가 암몬과 전쟁을 하기 위해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암몬 자손을 붙이시면 자기가 돌아올 때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와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에 승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한 이는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대로 그 딸을 번제로 잡아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입다가 돌아올 때 누가 제일 먼저 나올 것인지 아셨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입다의 서원을 받아들이셨을까?’ 두 번째로, ‘아무리 입다가 철없이 촐싹대다가 딸을 번제로 잡을 위기를 맞이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려주지 않으시고 그 딸을 번제 단에서 잡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입다의 서원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러한 의문들이 말끔히 씻겨 졌습니다. 역시 답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먼저 율법은 이스라엘의 서원에 대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기 7장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에는 어떠한 절차와 규례를 행해야 하는지가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공부해보면 지금 입다가 어떤 잘못을 하고 있으며,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허락하셨는지가 풀어집니다.

 

(레7:11~18)

11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 희생의 규례는 이러 하니라

12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13 또 유교 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 지니라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 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이것은 화목제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 화목제 안에 서원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펴 볼 화목제입니다. 이 제사들은 각각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야기를, 속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이야기를, 화목제는 완료, 승천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화목제에는 감사제와 서원제, 그리고 낙헌제라고도 하는 자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화목제의 제물은 다른 제사와는 달리 제사를 드린 자와 제사장,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실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 출애굽기 24장입니다.

 

(출24:5-11)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단에 뿌린 모세와 70장로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바로 화목제라는 제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화목제는 속죄의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닙니다.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된 것을 선포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성도들의 천국 혼인잔치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에 감사제와 자원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원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 드릴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래용으로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을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료된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 다른 말로 자원하여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서원입니다.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완료시켜 놓으신 어떠한 사건에 대해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을 하는 것이 화목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 특히 서원제의 제물은 첫 새끼로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27:26)  

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그렇지요?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물은 단순히 대속의 대가가 아닙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대속의 대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정하고 더러워서 차마 받을 수 없는 것들 대신에 그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드린 자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과 동일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고 은혜라 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자고요. 제물이 하나님에게 바쳐져서 하나님의 철장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형벌의 의미보다는 피조물의 육적 자아가 파기되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져서 육적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대표로 육신을 입으시고 그 피조물의 구원의 과정을 먼저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그 부활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결정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요. 그러한 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성경의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처음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음 것이 바쳐짐으로 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난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출13:12-16)

12 너는 무릇 초 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 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 지니라

14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 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16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신명기에도 똑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신15:19)

19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이렇게 이스라엘의 처음 것은 식물이건 가축이건 전부 하나님께 갖다 바쳐야 합니다. 그건 출애굽기 13장의 말씀처럼 첫 새끼가,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자체로는 너무나 더러워서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더러운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자들로 편입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장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동생들, 즉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신분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새끼가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다른 제물들이 그 첫 새끼 안에서 제물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첫 새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사에서는 꼭 첫 새끼가 아니더라도 제물로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화목제의 제물은 절대로 첫 새끼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나 셋째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화목제는 속죄 제물로 오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완료된 속죄와 그로 말미암아 완성되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또 제물이 필요한가요? 그리고 그 제물을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왜 그런 번거로운 제사가 또 있어야 하지요?

여러분, 예수라는 맏아들 다음에 줄줄이 살아나는 자들이 있지요? 그들이 교회입니다.

 

(고전15:20~23)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똑같은 제물로서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롬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제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뛰시아’가 제물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제물의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맏아들처럼 당신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자격 있는 제물이 되라는 권면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우리를 거저 하나님의 제물로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됨’이라는 방향성과 지향성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육적자아가 부인되고 그 안에 사시는 예수만이 드러나게 되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에 의해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화목제의 현장에 맏아들이신 예수의 동생으로 입적이 된 ‘나’라는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맏아들이신 예수가 가신 길을 좇아 자기를 부인당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져서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양식으로 주는 하늘 백성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나’가 비워져서 상대방의 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이 아닌 제물, 즉 구원받은 ‘나’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지고 그들이 나를 먹고 배가 부르게 되는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게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육적 자아가 부인되어져 가는, 역사 속에서의 구원의 현재 시제를 살게 되는 성도이기에 세상 속에서의 고난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밟히고 빼앗기고 비워지고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처음 것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저 하나님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우리를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 것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게 되고 결국에는 처음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약1:18)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맏아들이 가신 그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실제 화하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안에서 거저 구원을 얻은 입양된 장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진짜 장자가 가신 그 길로 좇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서원은 하나님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게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것으로 보상을 받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하나님에게 엉터리 서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볼까요?

 

(삿11:29-32)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그렇지요? 입다는 제사를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원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입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원을 한 시점이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한 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여 입다가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엉터리 서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꼭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어떤 존재가 대단하게 훌륭한 삶을 보여줄 때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처음 자리를 폭로하시며 그러한 추악한 자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성령 충만의 상태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이 뭡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 대한 교훈을 다시 떠오르게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가르치시는 역할로 성령이 오신 거잖아요? 따라서 역사 속에서의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에게 행하신 일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일에 동원이 되는 피조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로 가서 다시 한 번 역사의 존재목적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신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이 광야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을 안 듣는 쓰레기인가를 폭로 당하는 자폭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의 힘이나 인간의 노력, 즉 세상의 떡으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끌려 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성도가 이 인생을 사는 이유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입다가 어떻게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고 자신을 부인 당하는지 보세요. 입다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서원이라는 것을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게만 해주시면 자신을 제일 먼저 맞이하러 나오는 자를 번제로 잡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입다를 맞으러 나올지 모르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입다의 서원을 묵인하십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서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을 입다의 개선 행렬 맞이에 제일 먼저 내보내셨을 지도 모릅니다. 왜요? 하나님의 교회에게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입다의 딸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아버지 입다의 죄 때문에 잡혀 죽도록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너무 입다를 깎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원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료하신 일이 너무나 경이롭고 감사해서 그분께 ‘나’를 드리는 행위를 서원이라 한다고 했지요? 그게 화목제이니까요. 만일 입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경이로워서 하나님께 서원을 한 것이라면 누가 번제물이 되던,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므로 수긍하고 인정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게 하나님 중심의 서원 자의 태도니까요. 그런데 입다는 자기 딸이 번제물이 되자 옷을 찢고 통곡을 합니다.

 

(삿11:35)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이게 뭡니까? 이게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서원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입다는 자기에게 별로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어낼 요량으로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옷까지 찢으면서 애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입다는 서원을 통하여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얻어내려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감사한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 유익에 탐닉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아닙니까? 그러니까 입다는 처음부터 뭐가 잘나서 사사로 선택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 성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는,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나야 하는 죄인들의 실존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요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구원 받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지요? 아무 죄도 없는 순결한 이가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지요? 오늘 본문에서 무죄한 입다의 딸이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이스라엘의 대표인 아버지 입다에게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삿11:36)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 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자신은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와의 언약에 의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약에 의해 죽기로 결정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시지요? 예수님입니다. 입다의 딸은 지금 아버지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벧전2:22~24)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래서 성경이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는 것을 반복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삿11:37-39)

37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 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나이다

38 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입다와 이스라엘은 창기의 자손임이 확증이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로 남자조차 알지 못하는 숫처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창기의 자손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시면 아비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하는 입다의 딸이 산 위에서 애곡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한 대신 죽는 자의 눈물을 어디에서 보셨지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이 애곡하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요11:29~35)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도 그렇고 마르다도 그렇고 공히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의 하소연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도 믿는다고 하고 부활도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관심의 초점이 인간의 육적 자아와 이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망에 떨어지는 죄라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정작 죽어 있는 것은 무덤 속의 나사로가 아니라 바로 살았다고 자처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들을 좇아온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어 있는 그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사로와 함께 무덤 속에 있던 그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입다의 딸의 애곡이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곡과 닮아 있지 않습니까?

 

결국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는 아버지의 손에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렇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입다의 딸이 스스로 죽겠다고 자원을 한 것은 입다의 서원대로 암몬과의 전쟁의 주체가 하나님이셨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입다가 서원을 하기를 ‘하나님께서 전쟁에 이기게 해주시면’이라고 서원의 조건을 달았잖아요? 그런데 입다의 딸이 그 서원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입다의 딸만이 그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죽어 이스라엘의 승리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장이 어떻게 끝이 납니까?

 

(삿11:39-40)

39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 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다의 딸을 기리며 해마다 애곡을 하더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이 입다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입다와 입다가 대표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입다의 딸, 즉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나는 창기의 아들 입다,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살아나는 창기 이스라엘. 그것이 바로 입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입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대적 암몬을 쳐부수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어떻게 마무리가 됩니까? 결국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죽는 것으로, 다시 말해 육적 입다가 망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보세요. 사사기가 너무 일관성이 있지 않아요? 사사기는 이렇게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어서 하늘 왕을 왕 대접하지 않는 타락한 죄인들의 ‘하나님처럼’의 추구를 박살을 내 버리심으로 그들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왕 노릇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 도구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사사로 모형 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들려 쓰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기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작전에 말려든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 힘을 빼앗기고 차단당하고 해체 당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가난하게 되고, 다 건강을 잃게 되고, 다 망하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 분들 중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힘을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시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제가 일전에 저희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해 드렸지요? 지난 수요일에 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일찍 조퇴를 하고 교회로 왔었다고 했잖아요? 그 사정이 이러합니다. 저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백인들이 특별히 많은 학교입니다. 반면에 동양인은 아주 적은 그런 학교입니다. 당연히 인종차별이 좀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늘 그러한 것에 불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백인 아이들이 자기를 가리켜 치노라고 놀리기도 하고, 눈을 옆으로 찢는 시늉을 하면서 ‘go back to your country!’를 외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태권도를 오래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태권도 사범을 아예 일대일로 붙여서 하루에 대 여섯 시간씩 사사를 받게 하셔서 치고 차는 기술이 아주 뛰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을 때에는 늘 차고에 만들어 놓은 체련장에서 아이들과 운동을 합니다. 제가 격투기와 특공무술을 오래한 터라 특별히 태권도를 하는 우리 둘째에게 실전 격투 무술을 가르쳐 주곤 합니다. 어디를 차고 어디를 꺾어야 상대방이 큰 타격을 입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기선을 초반에 제압을 할 수 있는지 등을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제가 직접 아이를 상대로 기술을 넣어서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제 또래의 어떤 상대와 싸움을 해도 절대 지지 않을 수 있는 격투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쉬는 시간에 어떤 백인 아이가 자기 친구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둘째 녀석이 멀리서부터 달려가서 목을 조르고 있던 아이를 밀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yard duty 가 우리 아이만 달랑 붙들어다가 교장실로 데려다 놓은 겁니다. 이유인즉슨 그 두 아이가 싸우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던 것인데 우리 아이가 갑자기 달려 와서 한 아이를 폭력적으로 밀어 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일단 학교에서 힘을 쓴 것에 대해 저에게 호되게 혼이 났지요. 그 다음 날 아이가 조심스럽게 제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이번에는 제가 잘 모르고 실수를 했는데 만일 다음에 진짜로 어떤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자기를 때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냥 맞으라고. 아이가 제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태권도는 뭐 하러 배워요? 그리고 왜 아버님은 나한테 격투기 기술을 가르쳐 주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힘이라는 것은 자기를 증명하고 상대방을 제압하여 나의 강함을 입증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힘을 주시는 것은 그 힘이 진짜 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주시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때때로 힘을 허락하시고는 그 힘으로 자신을 자랑하거나 증명할 수 없도록 만드신단다. 그러니까 너는 네가 가진 그 기술이 너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누가 널 때리거든 네가 직접 대응하지 말고 하나님께 일러 바쳐. 네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이 네 진짜 아버지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일러라. 그걸 기도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떡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 떡을 왜 주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떡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힘은 우리를 자랑하고 우리를 증명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힘으로 우리를 증명하고 우리의 강함을 자랑하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방패라는 것을 깨닫는 도구로 우리에게 힘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어차피 나를 위해 쓰지도 못할 힘, 조금 덜 주어져도 불평불만 가질 것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힘과 가치를 조금 못 가졌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절망하지 마시고 힘들 내세요. 이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서 빨리 그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그러면 절망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내려오려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세요. 그러니까 그러한 때에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