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3) 에브라임의 죽음, 큰 용사 입다의 죽음, 역사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삿12: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06

사사기(23)

에브라임의 죽음, 큰 용사 입다의 죽음, 역사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삿12:1-7)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우리는 이제 큰 용사 입다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당도했습니다. 7절을 보시면 그 큰 용사 입다가 죽어서 어느 이름 모를 성읍에 장사되는 것으로 입다의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노아가 죽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마치는 것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메시아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입다가 초라한 죽음으로 그의 인생을 마칩니다. 그건 실체가 온다는 예언적 사건이요, 인간 역사의 종국에 대한 예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죽음이 에브라임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 사건 다음에 붙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입다의 이야기가 순결한 처녀로 모형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이 세상 아담 군상들 중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는 구속의 이야기임을 이미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큰 용사가 되고 싶어 제사까지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해 버리는 입다의 육적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멸해지고, 하나님을 왕으로 하여 사는, 하나님 절대의존자로서의 새로운 하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되는 구속의 이야기가 바로 이 입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의 이야기는 입다의 육적 자아가 초라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세상 적 가치관으로 볼 때 입다의 죽음은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사사답지 않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복음 안에서의 입다의 죽음은 철저한 자기부인의 완료인 것이며, 그래서 복된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사사기 12장 1절에서 6절까지는 빼 버려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입다가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엉터리 서원을 하는 바람에 그 엉터리 같은 작자를 살려내기 위해 무죄한 처녀가 죽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입다의 옛 사람이 죽고 하늘의 사람 입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이 나도 됩니다. 그런데 왜 처녀의 죽음과 입다의 죽음 사이에 에브라임의 이야기가 굳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에브라임의 이야기가 입다의 이야기 전체를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진멸이 되듯 입다가 진멸이 되어야 하는데 입다의 딸이 대신 죽음으로 입다의 죄가 죽고 새로운 입다가 탄생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입다의 승리 소식을 들은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의 승리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입다에게 찾아와 억지를 부리다 결국 4만 2천명이 몰살을 당하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지파의 이런 모습은 여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브라임지파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억지는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삿8:1-3)

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 하냐

3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

 

사사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연합군을 대파하고 승리를 하자 에브라임이 찾아와서 사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고 전쟁을 치러서 자기들이 차지할 전공을 너 혼자 독차지 하느냐는 억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는 이기적인 아담 군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자기 주체성을 여전히 공고히 붙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기드온의 전쟁은 인간의 힘과 지혜를 깡그리 부정하는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그 죄성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십니다. 3만 2천 명의 군사를 300명으로 줄여 버리시고는 오로지 당신의 능력으로만 전쟁을 치르십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마치 자기들이 큰 용사인양 착각하며 살던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난 300에 불과한 죽은 흙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진짜 영적 전쟁의 승리임을 기드온의 전쟁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의 전쟁 말미에 에브라임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여전히 의지하는 자들로 기드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달랩니다. 에브라임 너희들이 미디안의 오렙과 스엡을 죽여서 전쟁을 마무리 했으므로 너희들의 공로가 내 공로보다 훨씬 큰 것이다, 그러니까 노여워 말라고 추켜세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노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이 자기들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다른 이들의 공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간 안의 마귀성을 대표하고 있는 것임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지요? 그런데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한 말을 잘 보시면 에브라임이 오렙과 스엡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붙이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브라임은 자신들의 영광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영광을 다른 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십니다.

 

(사 42:8, 48:11)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그렇지요? 어떤 면에서 이 역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다른 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모든 피조물의 심장에 각인시키는 체험 삶의 현장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내 영광을 찬탈하려고 하는 시도의 결국이 어떤 것인지 잘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만 삽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거든요.

 

(요 5:44)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12:43)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에브라임은 바로 모든 죄인들의 자기 영광 구하기의 본보기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기드온의 본 모습이었고 입다의 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입다가 에브라임을 진멸한 이유가 나오는데 그게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삿12:4)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보세요. 무슨 애들도 아니고, 에브라임이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에게 너희는 원래 우리에게서 도망간 그런 근본도 없는 자들이라고 욕을 해대자 입다와 길르앗이 ‘이게 어따 대고 감히’하면서 4만 2천명을 몽땅 죽여 버린 것입니다. 입다와 길르앗의 분노가 어떤 지경까지 끓어올랐는가 하면 요단 나루턱에 가서 지키고 있다가 ‘십볼렛’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해서 ‘십볼렛’하지 못하고 ‘씹볼렛’하면 다 죽여 버렸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쉰’이라는 발음과 ‘쒼’이라는 발음이 있는데 경상도 분들이 쌀을 ‘살’이라고 하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히브리어 ‘쉰’이라는 발음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루턱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 중에는 얼떨결에 발음 한 번 잘못했다가 오해 받아 죽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무시를 당한 것에 대한 인간들의 분노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인간들의 힘에 대한 추구, 자기 영광 챙기기에 대한 추구는 이토록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부수시러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자기 영광 구하기’ 즉 ‘하나님처럼’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마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의 진멸 바로 다음에 입다의 죽음이 이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게 바로 은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결국 마지막 날에 그렇게 진멸이 되고 말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그러한 육의 진멸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놔두시면 안 되잖아요? 잘 보세요. 여기서는 에브라임이 다 진멸 당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속마음이 어떠하신 지가 호세아서에 나옵니다.

 

(호11:8~9)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 하리라

 

보세요. 하나님의 속마음은 에브라임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브라임을 진멸하십니까? 역사 속의 에브라임이 부인을 당해야 묵시 속의 에브라임이 살게 되는 것이 창세 전 언약의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에브라임과 입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곧 사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었을 때 그러한 인간의 ‘큰 용사되기, 자기영광 챙기기, 하나님처럼’의 삶의 정체와 말로가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삿9:22~29)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년에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25 세겜 사람들이 산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무릇 그 길로 지나는 자를 다 겁탈하게 하니 혹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하니라

26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 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27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배설하고 그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8 에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9 아하,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고 말하니라

 

이 이야기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 싶어서 자기의 형제를 70명을 모두 도륙해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그 사건 바로 뒤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자기의 왕 됨, 자기의 영광을 챙기기 위해 형제들까지도 살해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아비멜렉의 그 잔인한 추구가 세겜의 배반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의 선동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결국 다 죽습니다. 심지어 아비멜렉은 맷돌 짝에 맞아 묵사발이 되어 죽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진멸을 당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입게 된 자들은 그러한 역사 속의 진멸 과정을 통과한 후 하늘의 존재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어떤 선언 뒤에 일어나는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삿8:33-34)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바로 이 선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9장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의 이야기나 세겜의 배반이야기 가알의 선동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바알을 음란하게 위하는 죄인들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알을 음란하게 섬기는 행위가 자기 영광 챙기기와 그에 따른 시기와 질투로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의 자기 주체성 챙기기, 자아실현의 욕구, 큰 용사됨의 추구 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악한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요? 그래서 그대로 두면 그들은 모두 죽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내려오셔서 그걸 멸해버리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을 사망으로 몰고 가는 죄의 집요함과 추악함을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셨는지를 이해하게 되니까요.

 

(갈3:22)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그렇지요? 성경이 진술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자를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고 하십니다. 그 모든 자 안에는 성도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진짜 생명이 뚫고 들어가 버리심으로 어떤 삶이 죽음이고 어떤 삶이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철장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에브라임이 또 시비를 걸고 들어 옵니다. 그런데 입다는 기드온과는 달리 에브라임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에브라임을 쳐버립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을 안 불렀냐는 것입니다. 내가 불렀을 때는 승리의 주사위가 누구에게 유리하게 던져질지 몰라 들은 척 만 척 해 놓고 이제 내가 승리를 하고 나니까 이제 와서 승리의 전과를 나누어 갖자는 것이냐고 혼 줄을 내줍니다. 결국 에브라임은 입다에 의해 완전히 진멸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대표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호5:3~5)

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 많은 지파 중에 유독 에브라임이 이러한 악역을 맡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에브라임을 들어서 전체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러한 육적 자아의 자아실현과 자기 영광 챙기기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에브라임의 진멸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선악과 따먹은 자로서의 자기 영광 챙기기의 삶은 반드시 멸해져야 할 이 땅의 것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입다가 쓸쓸하고 초라하게 죽는 장면을 그 뒤에 붙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이 땅에서의 결국에 대해 힌트를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간들의 ‘하나님처럼’의 추구가 개별적이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 몇 명이 와서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 전체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정욕을 뿜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죄인들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그걸 부수어 내십니다. 그건 역사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뜨인 돌로 역사 속의 어떤 나라들을 부수는 환상 이야기가 다니엘서에 나오지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부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보세요.

 

(단2:31-35)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 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 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수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 하였었나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꿈자리가 좀 뒤숭숭했습니다. 꿈에 커다란 신상이 하나 나왔는데 그 신상의 머리가 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으로 되어 있었으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고 종아리는 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의 발은 철과 흙이 섞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뜨인 돌 하나가 마치 볼링공이 핀을 타격하듯 그 신상을 가격하자 그 신상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뜨인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 차 버렸습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 신상의 각 부분은 장차 이 세상에 올 강력한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합니다. 머리는 바벨론이요, 가슴과 팔은 메대와 바사이며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를 말하고 철로 된 종아리는 로마를 가리킵니다. 이상 열거된 나라들이 다 어떤 나라들입니까? 각기 자기들의 시대를 호령하던 세계 최강국들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전부 이스라엘의 징계에 한 몫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그건 이 세상 힘의 추구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없어져야 하는 것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음란하고 추악한 실체를 그러한 대적들의 모습을 통해 폭로하시고 결국 그들을 멸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어떠한 모양으로 진행이 될 것임을 힌트 해 주신 것입니다. 사사기의 내용이 전부 그러했잖아요?

 

(단2:44-45)

44 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그 신상이 부수어 지는 꿈은 하나님께서 장래에 반드시 하실 일이라고 하지요? 그 일이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세상 나라와 그 나라를 이루고 있는 아담 군상들의 멸망, 그것이 이 역사가 수렴되고 있는 목표 지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철로 된 종아리와 철과 흙이 섞인 발 이후에는 이어지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후에는 그냥 뜨인 돌이 세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 집니다. 그런데 철은 어떤 나라라고 했지요? 예수님 당시 세계를 통치하던 로마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라는 철과 섞여 있는 발가락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는 작은 로마들을 말합니다. 곧 로마라는 나라로 대표되는, 로마의 속성을 가진, 로마 이후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될 모든 인간들의 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부수어지면 그 나라들도 함께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로마라는 나라가 어떻게 부수어졌습니까? 정작 뜨인 돌이신 예수를 죽인 것이 로마인데 결국 그 뜨인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로마가 점령을 당합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건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였다고 해서 모든 로마인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제정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조차 밀라노 칙령 이후에도 태양신을 함께 섬기는 우스꽝스러운 기독교인 행세를 했었던 것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심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후 자신과 하늘을 동일시하는 왕권신수설적인 사상을 주장하며 자신을 신격화 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하늘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나타난 표피적인 그림으로만 보면 예수를 죽인 로마가 예수에 의해 정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들키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새 나라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의 당위성을 스스로 입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의해 로마가 망하는 것으로 이 세상 역사는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이미 승부는 결판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나머지 한 이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내신 하늘의 승리를 실제화하여 그려내는 묵시와 역사가 공존하는 이상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 중 한 이레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이라 했지요? 한 이레는 묵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70이레를 설명해 드릴 때에도 69이레 때에 이미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응하고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 했지요? 그게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시점, 즉 십자가 사건에서 종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70이레가 다 끝난 후에 완성될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이레를 비역사적, 묵시적으로 해석을 해야만 70이레가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은 뜨인 돌이신 예수님에 의해 세상의 힘과 가치만을 추구하며 악신이 들린 자들처럼 살아가는 우리 안의 신상이 박살이 나는, 그러다가 결국 초라한 어떤 마을에서 이름도 없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철저한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육적 자아 박살이라는 완료지점을 향해 정해진 길을 끌려가는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갈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게 69이레, 즉 로마가 예수님에 의해 박살이 나던 그때 이미 신상의 발과 발가락의 파괴 지점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이미 역사는 끝장이 난 것입니다.

로마에 속한 작은 로마들, 그게 우리잖아요? 다니엘서가 왜 로마의 멸망에서 이 세상의 종말을 완료시키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그러한 작은 로마로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 모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은 세상의 힘과 권력과 가치와 성공과 번영에 눈이 뒤집혀 있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입다의 정체이기도 했던 것이고요. 그래서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의 멸망과 입다의 죽음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해 버리고 말겁니다. 어줍지 않은 역사 낙관론은 어서 집어치우세요.

로마에서 결론이 난 69이레의 역사가 어떻게 한 이레 동안 재현되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로마가 동 로마와 서 로마로 나뉜 뒤 5세기경에 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 없어진 것 뿐이고 또 다른 형태의 로마가 나타났습니다. 라틴을 중심으로 힘을 응취한 가톨릭입니다. 라틴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은 기실 로마 제국보다도 더 강렬한 힘의 응취로 이루어진 세력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게르만이 가톨릭의, 즉 라틴적인 힘의 응취를 파괴하고 일어나기 위하여 차츰차츰 민족적으로, 종족적으로 결집을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는 게르만 민족이 새로운 계명, 새로운 빛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르만은 그들의 경제 체제를 근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강렬한 시민사회로 건설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과거 라틴에게 눌렸던 것에 대한 소위 반 세력적인 작용입니다. 그러한 게르만족이 19세기에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나의 제국으로 뭉쳤습니다. 비로소 독일 제국이 된 거지요.

잘 보세요. 바벨론에서 메대와 바사로, 메대와 바사에서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가톨릭이라는 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세력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그 종교 개혁을 기화로 독일이 제국화 되고 그 독일 제국에서 힘의 철학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니체의 철학이 나왔습니다. 그는 약할 때 강함이 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약하고 저열한 것들의 기준에 맞추어 인류를 타락시키고 있는 더러운 것이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의 철학 사상 중, 초인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완전히 반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힘의 의지’라는 글에서 ‘힘은 곧 정의’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약한 것이 강함이며,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그 따위 연약한 사상을 가르치는 신은 죽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한 힘의 철학에 힘을 입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진화론이 터져 나왔지요? 강한 자만, 적자만 살아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키우라는 것이지요. 약육강식이니까요. 힘이 곧 진리이며 정의이니까요.

그렇게 프러시아 군벌로 통합이 된 통일 독일에 의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고, 그러한 힘의 흐름은 히틀러라는 괴물을 통하여 2차 대전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 후 힘의 양상이 소련과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그 힘의 흐름은 지금 미국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미국의 힘은 바벨론에서, 아니 더 위로 올라가면 아담과 가인에서부터 출발한 추악한 저주의 흐름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세상 힘의 흐름을 쳐부수시며 달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주체성과 존재성을 버리지 못한 아담 군상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에서 발생되는 대표적 증상이 뭡니까? 질투입니다. 에브라임이 기드온 때나 입다 때 모두 그놈의 질투 때문에 그런 억지를 부린 것 아닙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의 발생 동기가 뭡니까? 질투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나요? 질투 때문에 죽인 겁니다. 질투란? ‘왜 내가 너보다 가치 없는 자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왜 내가 너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못 받느냐?’라는 이기적 감정에서 격발되는 것이 질투지요? 그러한 질투심에서 차등 상급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상을 받아 너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겠다는 것이 차등 상급론의 핵심이지요? 그래서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일도 열심히 하고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이들의 인간 행위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인간의 행위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충분히 하나님께 상을 요구할 만한 무게가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장에 칼을 꽂을 능력은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보다 나은 자라 여기시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사기 안에서의 에브라임의 시기와 질투가 꼭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미리 알렸으면 자기들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영광이라는 상급을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광’이라는 것에 대한 아담 군상들의 오해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관 안에서의 영광은 자기들의 힘과 능력이 전시되거나 자랑이 되었을 때에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쉬운 말로 내 자랑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광은 ‘나’라는 존재 안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밖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광은 자신의 자원과 재주와 소유와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넌 내꺼야’라고 선택을 해 주시는 것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신자의 영광은 주님과 함께하는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에서 근거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역사는 자신의 잘남이나 강함을 증명하고 자랑하여 자신의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힘의 철학 하에서 짐승처럼, 약육강식의 추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가 2장에서의 그 신상을 7장에서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신상으로 보여 졌던 것이 다니엘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보세요.

 

(단7:4-8)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전부 입에 뭘 물고 있거나 씹어 먹고 있지요? 이 짐승들이 바로 이 역사와 아담 군상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약육강식, 그건 짐승의 본능입니다. 맹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자리에서 빼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리들 앞의 양으로 보내져서 오히려 맹수들에게 먹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는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삶에 그러한 것들이 닥치게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그것에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내가 무시되고 내가 부인되는 것이 잘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육적 자아의 멸망! 그런데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심이 일어나서 견디질 못하겠는 겁니다.

 

그렇게 우매한 자에 대한 예가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서 놀고 있는 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갑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작업시간이 아침 여섯 시부터였다고 하니 주인이 제일 먼저 장터로 나간 시간은 새벽 여섯 시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홉 시쯤에 또 나가보니 역시 일자리가 필요한 품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 품꾼으로 채용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가 마지막에는 작업 종료 한 시간 전인 십일 시, 그러니까 지금 시간으로 저녁 다섯 시에도 품꾼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임금으로 지급을 한 것입니다. 그게 그 품꾼들에게 약속된 임금이었거든요. 그때 먼저 온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보세요.

 

(마20:10~16)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 온 사람들이, 왜 내가 일을 많이 했는데 똑같은 보상을 해 주냐고 따집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임금을 주겠다는데 왜 너희가 따지고 드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들의 시기요 질투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준 것은 은혜요 ‘선’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이 내어 놓은 것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힘의 철학 하에 있는 자들은 주인의 그 행위가 악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고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되는 것은 모두 선이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고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바로 그러한 질투가 주인을 악하게 몰아붙이는 것이고 그런 자들은 다 나중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중 된다는 말은 1등이었던 자가 2등으로 밀려 내려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자고요. 여기에 등장하는 품꾼은 ‘엘가테스’ 일용직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있어서 그 날에 주어진 일이란 자신과 가족의 생계 뿐 아니라 생명과도 직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에게 일을 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준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이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의 질이나 양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렇게 여러 번, 수시로 나가서, 심지어 한 시간 전까지 품꾼들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에게 자신의 긍휼과 은혜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생명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오히려 주인이 더 바빴던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은 임금이 정산되기 전까지는 저마다 기쁘게 일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날의 생명에 필요한 임금을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임금 정산 과정에서 발생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즐겁고 기쁘게 일을 했던 품꾼들이 자신보다 덜 수고한 사람과 자신에게 똑같은 임금이 주어지자 분노한 것입니다. 왜 그랬지요? 나의 노동이 가치가 있다는 사고에서 출발한 분노입니다. 모든 포도원 품꾼은 포도원 주인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날의 생명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에서 눈을 돌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힘,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와 차이를 바라보자 금방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에브라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너나 할 것 없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 자체가 생명이며 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가치와 힘과 영광에 눈을 돌리면서부터 시기와 질투와 전쟁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진짜 복과 가치를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이 비유가 어떤 이야기에 붙어 있는지 아세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19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그 부자 청년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종류의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도 베드로가 ‘그 사람은 부자라서 못 들어간다고 해요. 그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리고 주님을 좇은 우리는 어떤 상을 받게 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마19:27~30)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보세요. 여기에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똑같은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부자 청년이나 나에게 무슨 보상을 해 줄 것이냐고 물은 베드로나 똑같이 예수님이 나중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부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바로 그 부자 됨,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겨 그것으로 어떤 차등 있는 보상을 요구하는 그러한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밀려 내려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저 포도원에 들어가서 생명에 관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모르니까 그 일이 수고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차등 있는 상급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이가 그 생명의 일에 동참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기뻐할 일인지를 아는 이들은 일찍 불려 올수록 감사가 더하겠지요? 그 일이 자신의 생명에 관계된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생명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자기의 행위와 자신의 가치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이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가치와 영광을 쟁취하려 여전히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한만큼 차등 있는 대우를 해 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입니다. 하늘의 질서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하늘의 질서는 긍휼과 은혜와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 받은 자의 능력이나 업적이나 배경이나 조건이 개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본주의의 질서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차등 있는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하늘의 질서인 은혜와 긍휼을 들이대시면 그들은 하나님을 살해하는 자로 돌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 아니었습니까? 그 안에 가인이 들어 있고, 그 안에 에브라임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바로 우리의 여전한 죄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의 질서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롬4:4-8)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보시다시피 우리를 포도원으로 부르신 하늘의 주인은 우리의 일과 행위에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은혜와 자비를 부으셔서 생명의 나라로 거저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 생명 안에서의 삶이 어떠한 모양으로 전개가 되던 생명으로 기뻐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의 소유의 차이나 명예의 차이 등에 별 관심을 안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과 행복은 상대와의 차등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도저히 산 자가 될 수 없는 죽은 흙에 생명의 생기가 부어져 영생이 주어진 것에서 오는 절대적 기쁨이어야 하고 절대적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처음 자리는 죽은 흙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을 불러 주셔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다른 이들과 자신의 조건과 소유를 비교하여 질투를 하고 시기를 하고 전쟁을 일으킵니까? 그러한 삶을 노력해서 살아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 안의 마귀를 수시로 폭로시켜 버리실 때 위장을 하거나 조작을 하지 마지고 ‘아 나는 도저히 용서 받아서는 안 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어떻게 나에게 생명이 주어졌는가?’하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아인식을 가지시란 말입니다. 우리 안의 에브라임은 반드시 멸망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입다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순히 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