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4) 잉태치 못하는 자들의 출산, 삼손 이야기   (삿13: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10

사사기(24)

잉태치 못하는 자들의 출산, 삼손 이야기

 

(삿13:1-7)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 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이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 삼손의 이야기에 당도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등장한 사사들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전쟁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를 부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내용들을 통하여 인간들은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 중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처음자리를 폭로해 버리시고 당신의 열심만을 오롯하게 붙드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전쟁을 쉬지 않고 치러 내고 계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삼손의 이야기에서 불가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의 실체와 그것을 은혜와 긍휼로 덮어 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고 하지요. 이 사사기의 이야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즉 출애굽 이스라엘의 3세들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딱 80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엄청난 유월절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 광야의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이내 이런 모양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이렇게 패역하고 부패한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구원자를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은 삼손 이야기의 서론 부분을 공부할 텐데, 여러분이 사사 삼손으로 이어지는 사사기의 문맥을 잘 보시면, 성경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삼손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 사사들의 됨됨이와 그들이 추구했던 삶에 대해 간단하게 나열을 해 줍니다. 그게 입다의 이야기 이후에 이어지는 12장 말미 부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사들의 자격이나 조건 등을 근거로 되어 진 것이 아님을 설명해 주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모양들의 사사들이 한 줄, 혹은 두 줄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근거로 시작되고 완료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들의 자격이나 조건 심지어 열심 있는 노력까지도 근거로 첨가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 모두 다 배제되고 부정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소 사사들의 말도 안 되는 모습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사사의 일을 홀로 해내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삼손의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항상 문맥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고 했지요? 우리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삼손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점입가경으로 진행되어져 오던 하나님의 전쟁, 즉 구원의 이야기가 결론 적으로 펼쳐지게 될 것임을 미리 추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배경이나 조건이나 자격이나 됨됨이를 내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타고 넘어서 홀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여러분이 삼손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주의 깊게 보셔야 할 것이, 이 삼손이라는 마지막 사사 앞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사사 입다에서부터 ‘태평’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삿12:7)

7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 되었더라

 

그렇지요? 그 이전에는 항상 사사가 통치하고 있던 시기에는 태평성대가 왔음을 꼭 기록했던 성경이 입다 때부터는 그 태평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삿8:28)

28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

 

보세요. 이처럼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모든 사사의 통치 때 태평이라는 단어가 그 시대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평이라는 단어가 입다 때부터 생략이 됩니다. 이 태평이라는 단어는 ‘안식’이라는 말인데 그 ‘솨카트’라는 단어는 ‘노아’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라는 인물의 이름의 의미가 ‘안식’이거든요. 이 노아의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건 조금 있다가 다루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의 활약으로 대적들이 평정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이 태평했다고 기록을 하신 것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전쟁이 바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활약상, 즉 안식으로 완료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이야기라는 것을 주지시키시기 위해 하늘에서 완료가 될 ‘태평, 안식’이라는 단어를 그 뒤에 꼭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전쟁은 그 전에 치러졌던 다른 전쟁들과 양상이 다른 전쟁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입다의 전쟁도 다른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입다의 통치 시기에는 ‘태평’이라는 단어가 생략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삼손의 이야기 속에서 그러한 이스라엘의 패역함이 어떻게 해결이 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입다 때에 ‘안식, 태평’이 생략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의 안식을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단지 당시 이스라엘의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인류의 보편적 죄성인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 중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을 때려죽여 블레셋 사람들을 격동시킨 삼손에게 찾아와서 내 뱉은 이야기를 보면 그러한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추악함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삿15:11)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삼손이 자기 아내를 동무에게 주어버린 장인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노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을 다 살라버리고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한 뒤 에담 바위틈에 거하고 있는데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옵니다. 무려 삼천 명이 옵니다. 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보내주신 사사를 작정하고 자기들 손으로 대적에게 잡아 넘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 치하에서 태평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네가 이 태평을 깨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기지요? 그 전까지는 어땠나요?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는 항상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불러 세워서 그들을 대적들의 통치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통치 하에서 부르짖음은커녕 태평하게 살며 그 통치를 달가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 입다의 때부터 ‘태평’이라는 단어가 빠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대적의 통치 아래에서 더 태평하게 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전도서 1장에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나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하지요? 그 말은 세대가 바뀌어도 저주받은 땅에 속한 인간의 행사들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을 비롯한 성경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저주를 받은 땅의 사람, 인간들은 변함없이 패역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마저도 자기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적 행복 앞에서 수시로 초개처럼 던져버리는 불가능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 종들을 보내셔서 당신 백성들을 부르시는데 그 백성들이 결국 마지막 보낸 아들까지 죽여 버림으로 자신들의 열매 없음을 감추려 했던 모습이 신약에도 나오지요? 포도원 농부의 비유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린 당신 아들을 모퉁이 돌로 삼아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새 성전을 완공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도륙해 버려도 아깝지 않은 포도원 농부들을 새 집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의 원수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일 때 주인의 아들이 그 원수들을 품어 안고 함께 죽는 방식입니다. 물론 그 비유에서는 그런 과정은 생략되어 있고 그 포도원 농부들이 진멸되는 것만 기록이 되어 있지만 그 행간의 이야기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그들이 거할 처소를 만들어 내는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완전하게 폭로해 버리고는 순전히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만으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 내시는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바로 그 비유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결국은 메시아의 모형인 사사가 대적들과 함께 죽어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어떤 여자와 대적의 치하에서 ‘태평, 안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남자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차근차근 보자고요.

 

(삿13:1)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도대체 이러한 이야기가 사사기에서만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까?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 어떤 교훈이나 경험으로 변하지 않는 종자임이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적들의 통치 속에서 안식을 추구하려 하는 자들이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성막 위로 높이 솟아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쉐키나의 영광 앞에서 이스라엘이 보란 듯이 세상과 간음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목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또 이스라엘을 블레셋에게 팔아 버리셨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그런데 이스라엘이 부르짖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태평을 찾으려 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세상이 주는 쾌락과 행복에 만족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마노아’ 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노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노아’라는 이름은 ‘태평, 솨카트’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버젓이 블레셋의 치하에서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만 올 수 있는 그 안식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마노아라는 이름이 갖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노아는 대적인 블레셋의 통치 하에서의 안주를 가리키고 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삼손의 아비인 마노아와는 전혀 상대를 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여자와 이야기를 하시고 여자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십니다.

 

어찌되었든 삼손의 이야기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원색적으로 제시하며 그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성경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 보세요. 그 마노아의 아내가 잉태치 못하는 자라고 하지요?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잉태치 못하는 자, 즉 생명을 출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들의 처음자리의 모습입니다. 도저히 생명일 수 없는 죽은 흙들의 모습, 그것이 잉태치 못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사기 전반에서 폭로된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에 그러한 여자들이 꽤 많이 나오지요? 사라부터 시작해서 리브가, 한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 잉태치 못한 여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을 하여 약속의 후손이 탄생을 합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원래 고대 시대 때에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가문의 태를 닫아 버리시지요? 그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시대 때에 여자가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의 현실을 보여주는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그 태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었잖아요? 그게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시편 113편에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이 아주 선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113:9)

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이 이야기가 사사기 전체의 내용인 것이고 삼손의 이야기 속에 축약이 되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66:9)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이게 긍휼과 은총의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인 것입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 잉태치 못하는 여자의 태에서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시는데 그가 바로 삼손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나실인이 됩니다.

 

(삿13:4-5)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 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나실인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자를 말합니다. 아모스 2장 11절과 12절을 보시면

나실인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켜 세운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개인적인 문제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인 이스라엘이 도탄에 빠지고 흐림과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자기를 구별하여, 자기는 그런 죄악에 물들지 않은 위치에서 이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 노릇을 하겠다고 서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은 자신의 희생과 구별됨으로 민족을 대신하여 대속의 삶을 사는 서원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은 포도주와 포도의 소산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머리에 삭도를 대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역사 속에서의 세상적 쾌락과 멋을 포기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상징입니다. 그래서 나실 인은 포도주와 머리 손질을 금하게 되는 것이고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러한 나실인의 삶이야말로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포도주를 즐기며 머리 손질을 하며 이 세상에서의 멋과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지만 그 삶은 곧 죽음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을 위해 누군가가 이 세상의 행복과 멋과 쾌락을 포기하고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이 담겨 있게 되는 창세 전 언약의 내용이 나실인의 서원 속에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실인의 신체의 일부만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모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속한 그 어떤 신체의 일부도 하나님 앞의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타락한 죄인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이 자기가 서원한 기간 동안 기른 머리카락은 나중에 잘라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집니다. 그건 그가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산 그 날 동안만큼은 하나님 앞에 열납 되어 지는 시간이었다는 상징적인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나사렛이란 단어의 어근이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나사르’입니다. 그 단어에서 나실인이 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어절에서 선지자라는 단어가 복수로서 많은 선지자들이 공통으로 이야기를 한, 예수님의 경멸과 멸시와 천대의 예언을 통틀어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 둘 다 결국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나실 인으로 사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선물하신 분입니다.

 

삼손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름이 히브리 말로 ‘쉬므숀’인 것입니다. 그 단어는 ‘쉐메쉬, 태양’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를 해와 태양과 빛에 자주 비유하지요?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손은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삼손이 잉태치 못하던 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건 잉태치 못하던 교회가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를 낳는 것과 똑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게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었고요. 400년 암흑기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어두움을 뚫고 빛이신 예수가 기어코 오시고야 마신 것이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도 구원의 시작이라는 단어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5절 말미가 무엇으로 끝나지요? ‘그가 블레세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입니다. 그 구원은 다윗 왕 때에 완성이 되지요? 사무엘하 8장 1절에 보면 블레셋은 그 때에서야 진멸이 됩니다. 그 다윗의 완전한 승리가 삼손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것처럼 삼손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전편에 걸쳐 설명이 되어졌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구원의 이야기를 좀 더 종합적이며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은혜의 수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대적들과의 간음을 통하여 안식을 얻으려 하는 ‘마노아’로, 그리고 도저히 잉태할 수 없는 불임 여성으로 빗대어 제시하고 그들을 어떻게 살려내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삼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했던 부분이 에브라임의 억지 부분이었지요? 거기에서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대표요, 오늘날 교회의 대표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에브라임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왜 우리를 안 불렀냐고 입다에게 따진 후 진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삼손 한 사람이 블레셋 전체를 대적하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자격과 조건을 근거로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삼손 한 사람의 전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출현은 에브라임으로 대표되었던 모든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그러니까 인본주의를 묵사발 내버리는 하나님의 유머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내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어떤 자격 있는 모습을 내어 놓아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사기의 이스라엘과 같은 잉태치 못하는, 대적들의 세상에서의 마노아들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기필코 생명을 창조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 잉태치 못한 자의 이야기는 이사야서에서 명쾌히 밝혀집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서 54장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삼손의 이야기가 다 이해가 되었을 때 잉태치 못하던 자에게서 탄생하시는 예수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이해가 되어 지게 될 것입니다.

 

(사54:1-3)

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 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 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잉태치 못하는 사람보고 찬양을 하라고 하고 구로치 못한 사람, 즉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 노래를 하라고 합니다. 이유는?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홀로 된 여자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아질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지금 이루어진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한 자, 그리고 홀로 된 여자에게서 많은 후손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이미 노래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이미 창세기에서 마른 장작처럼 말라버린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타났던 것이지요? 바로 밑으로 가면 어떻게 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54:4-5)

4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어떻게 잉태치 못하는 자들에게서, 홀로 된 자들에게서 자식이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남편이 되셔서 남편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내심으로 저주받은, 불가능한 자들에게서 생명이 탄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부들은 자기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어서 신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신부가 되고 생명을 잉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못생긴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으로 가장 사랑받는 솔로몬의 왕비가 되는 그 그림이 어린양이신 신랑과 교회라는 신부의 성혼의 모습인 것입니다. 술람미가 뭐가 잘나서 솔로몬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지요? 외모나 자격은 오히려 예루살렘 여자들이 훨씬 출중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못 생기고 얼굴도 검은 포도원의 노예 술람미를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 즉 아무 자격이 없는 자에게 신랑의 씨가 불가항력적 은혜로 침노하여 그 속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불가능함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우리가 생각해도 다 죽여 버려야 할 만큼 악한 자들인데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서 하나님의 씨가 싹을 틔우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너를 지으신 목적이 네 남편이 되기 위함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씨를 심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아내에게서 생명이라는 열매가 맺히게 만드는 존재가 남편입니다. 그렇게 잉태할 능력이 전혀 없는 신부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그러한 신부에게 남자의 씨를 심어 잉태를 하게 만들어 기필코 생명을 창조해 내는 신랑의 이야기를 신부에게 올바로 인식을 시키시기 위해서 남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꾸어 질문해 볼까요? 자기들이 잉태치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기고만장하여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가르치셔야 할 것이 무엇이지요? 자기들은 무슨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절대 잉태가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야지요? 사사기의 내용이 전부 그 이야기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신부를 택하자마자 잠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6절 이하의 이야기입니다.

 

(사54:6~9)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아내로 택한 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먼저 하나님께 버려진 자처럼, 다른 말로 잉태치 못하는 홀로 된 자들처럼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신부들이 남편의 영원한 자비와 긍휼로 비로소 존재케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남편이 자기가 택한 아내를 넘치는 진노로 대하시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자신의 실체를 폭로 당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처럼 살아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죠? 무슨 죄를 지어서라기보다 남편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여 질 수밖에 없는 죽은 존재임을 실감케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신부의 패역함을 강제적으로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원하는 것은 그렇게 둑처럼 잠시 막혀 있는 죄인들의 유보상황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신랑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신랑 절대 의존자로서의 신부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시면 그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덮으심의 은혜가 더욱 선명히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사54:9~10)

9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 하였노니

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9절을 보시면 그렇게 잉태치 못하는 자들의 남편이 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언약이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나타난 메시지와 동일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홍수로 너희들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잉태치 못하고 홀로 된 자처럼 이 땅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부분으로 가볼까요?

 

(창8:20~21)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사야서 54장에 나오는 그 약속의 원형이 여기에 나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입니다. 그 말을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잉태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잉태치 못한다는 말은 생명으로 연결이 안 되는 죽은 자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다 죽여야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기에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가 일어날 수 있는 근거가 20절입니다. 모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이 뽑혀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들이 거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셈과 함과 야벳의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이라 했지요? 벌거벗은 아담의 역할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세상에 취해 벌거벗은 자,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바꾸면 ‘잉태치 못하는 마노아’입니다. 그건 정확하게 사사기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아를 함이라는 아들이 판단을 하지요? ‘벌거벗었다. 그건 부끄러움이다’

 

(창9:21~22)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있었습니다. 잠을 잤는지 깨어서 횡설수설하고 있었는지 그건 모릅니다. 그런데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라아’는 ‘분별하다, 판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하다’라고 번역이 된 ‘나가드’라는 동사는 ‘고발하다, declare’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다, 판별하다, 판단하다’ 이게 다 무엇을 먹은 결과입니까?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게 된 아담의 모습이 거기에서 보이지요? 제가 지난주에 아담의 죄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벌거벗은 거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벌거벗겨 놓으신 그 상태를 부끄러운 상태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지킴으로 옷만 바꿔 입고 성경에 나타납니다. 그게 피조물의 자기자리 이탈, 휘브리스,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의 자기자리 이탈을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남,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덮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덮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셈이 부끄러움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역할로 등장을 하여 축복의 사람으로 등극을 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는 하나님께서 덮으시고 노아의 이야기에게서는 셈이 덮는 것입니다.

 

(창9:23)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

 

여기에서 ‘덮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카싸’는 ‘더러움을 덮다, 죄를 덮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시편 32편입니다.

 

(시32:1)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서 ‘죄의 가리움’에서 쓰인 단어가 ‘카싸’입니다.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셈의 이야기는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의 모형(type)이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 잉태치 못함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덮으심 또한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이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 54장의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부 무슨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죄를 거저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사54:11~12)

11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12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지금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부를 치장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무엇으로 치장되고 있어요? 보석들로 치장되고 있지요? 이 보석들을 어디서 보셨나요?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신부가 나오지요? 그 신부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 이사야서 54장의 잉태치 못하던 여자의 모습이 똑같은 모습입니다.

 

(계21:2, 18-19)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러니까 이 신부의 치장은 전부 누가 해 준 것입니까? 이사야서에서 뭐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신부에게 입히시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신부의 치장을 다른 곳에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세마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세마포는 어린양의 피에 빤 옷이랍니다. 그러니까 그 신부의 옷은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그게 보석입니다. 그걸 호세아가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보세요.

 

(호2:19~20)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창녀 고멜같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세요? 은총과 긍휼로 장가를 들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걸 덮고 신랑의 것으로 신부를 치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랑의 약속과 의지 앞에서 신부의 됨됨이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잉태치 못하는 자로 비워져야 신랑의 것으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피로 덮여서 비로소 생명이 되는 메커니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잉태치 못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신랑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서 54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바로 이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이사야서 54장이 어디 뒤에 붙어 있는 것인지 명심하셔야 합니다. 54장은 그 유명한 53장 뒤에 붙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의 핵심 요절이 뭡니까? 6절입니다.

 

(사53: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는데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심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건져져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잖아요? 여기에서 각기 제 길로 가서 그릇 행하는 자를 54장에서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는 자로 표현하여 다시 한 번 구원의 복음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잉태치 못하는 신부를 건지러 오시는 분이 54장에 나오는, 남편에게 버림받아 넘치는 진노의 잔을 받는 모양으로 신부의 집으로 내려오십니다.

 

(사53:2~4)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마치 잉태치 못하고 홀로 되어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이 신부들의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선택한 신부들은 그 신랑을 알아보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타락을 하여 사망으로 던져진 자들의 현실을 다 품어 안고 죽으셔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제 눈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선악과 사건을 물고 늘어지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보무도 당당히 로마의 황제나 그와 버금가는 장수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가치관이 그 메시아를 거절했을 리가 만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에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걸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의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 벌거벗겨져 걸려 버린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 더 형상화하고 구체화하여 풀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 다른 말로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한 자의 모습으로 (그러나 죄는 없으신)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아는 그런 모습으로 와서는 안 된다’는 세상의 판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이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메시아를 판단하고 분별하여 ‘저런 메시아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판단을 하여 하나님이신 그 분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타락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은, ‘하이 네페쉬 하야’ 이전의 그냥 ‘네페쉬’의 모습인 것입니다. 보세요. 인간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가 결국 하나님을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 가치관 아래에서의 무가치한 자로 보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두를 정죄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은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잉태할 수 있는 것처럼 약함과 마음에 들지 않음을 정죄해 버린 세상이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치는, 그리고 행복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그런 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찔림, 상함, 징계, 이런 것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볼 때 저주받은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세상의 선악구조에 의한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대속과 구원이라는 보석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53:5)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며 존재 성립의 메커니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커버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있는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성립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계속하여 드러내고 폭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한 자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도 하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사사기를 보시면서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이라고 반응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끌고 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치 아담을 선악과로 밀어 넣으셔서 그의 벌거벗은 실체를 보게 해 주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의해 자기들의 실체를 폭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선언을 해 버리십니다. ‘너희들은 잉태치 못하는 자들이 맞지? 그럼 이제 내가 일을 시작 하겠다’하고 메시아의 모형인 삼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갑니다. 그가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도 하나님의 작품이었고 그를 들릴라의 품으로 보내어 블레셋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것도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이 되어 한 것이고 유다가 블레셋에게 아부하기 위해 삼손을 묶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렇게 끌려 가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해 이 세상 속에서 잉태치 못하는 자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의 대적인 블레셋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실 일은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 또한 우리들의 선악 구조를 가지고 삼손의 도덕성이나 됨됨이에 집중하여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웅숭깊은 메시아의 이야기를 꺼내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주부터 이 삼손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