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사기

사사기(26)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   (삿14:1-7, 15:15~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10:11

사사기(26)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

 





(삿14:1-7, 15:15~20)

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 오소서 하니

4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 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 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이 삼손의 이야기가, 신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여자로 살아야 할 피조물들이 어쭙잖게 남자의 흉내를 내며 살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이며, 그로 말미암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고자 하는 피조물들의 추구와 시도를 당신의 철장으로 박살을 내셔서, 결국 신랑에게 온전히 순종을 하는 여자로 만들어 내심으로 당신과 하나로 연합을 시켜,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해 내신다는 그 천상의 시나리오가 이 삼손의 이야기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끝까지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산 자들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몇 명만 보고 갈까요?

 

(삼상15:11~12)

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하18:17~18)

17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 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울 왕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이야기입니다. 둘 다 처참하게 사망으로 들어가지요? 그런데 그 둘의 공통점이 뭡니까? 자기의 이름을 위해 기념비를 쌓고 비석을 만든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 모든 아담 군상들의 공통된 인생살이의 목적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 자아 숭배의 총화를 성경이 바벨론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이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벧전5:13)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

 

이 베드로서의 기록 연대는 AD64년경입니다. 그 때는 베드로의 사역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이고, 베드로는 그 때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로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바벨론이라고 칭한 그 곳은 당시 세계 최고의 강국이었던 로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곳을 그 어떠한 부연 설명도 달지 않고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그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진멸이 될 큰 성 바벨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들이 어디에서 힌트를 얻어 이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마귀의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구체적인 그림으로 예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바벨탑 사건이지요? 


그 바벨탑이 어디에 지어졌다고 했습니까? 시날 땅에 지어졌습니다. 거기가 누구의 땅이었지요? 함의 손자인 니므롯의 땅이었습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이한 사냥꾼, 영걸이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 때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당한 이 세상 죄인들의 대표격으로 기록되어 있던 자 중에 용사가 있었지요? 그 단어가 영걸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 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 세상에서 영걸이 되고 싶어 하는, 다른 말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죄 성을 축약하고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으로 오셔서 부수시는 땅 이름을 니므롯의 땅이라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미5:2,6)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니므롯의 땅은 바벨론입니다. 앗수르 또한 니므롯의 땅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셔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전부 진멸시켜 버리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는 자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 전체가 다 바벨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부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곳에서 빼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바벨론의 멸망(최후에 있을 바벨론 멸망의 원시 모형)이 바벨탑 사건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에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창11:4)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성과 대를 쌓아서 우리의 이름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이름을 주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 즉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자기들에게 스스로 이름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해 내는 이 세상 바벨론은 우리의 마음 밭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한 인간 존재의 마귀성이 모여 하나의 세력이 된 것이 바로 큰 성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 가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벨론을 역사 속에서 부수십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눈은 큰 성 바벨론에서 옮겨지게 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성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줍니다.

 

(히11:8~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 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대표적인 약속의 후손들이지요?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장막, 즉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요즘도 툰드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춤’이라는 텐트에서만 삽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순록의 먹이를 찾아 그 춤을 옮겨가며 삽니다. 이 세상에서 지진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과 중동의 베두인들이랍니다. 왜냐하면 땅이 흔들려도 잃을게 없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땅에다가, 그리고 건축물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을 자기 성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러 오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건축물들과 자기들의 땅이 부정을 당해야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거든요. 인간의 문패가 지워져야 하나님의 이름이 적힌 문패가 이마에 새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자꾸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 건축자의 마음이 우리 안에 공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건축물들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눈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가 버린 예수라는 모퉁이 돌로 지어진, 하늘의 도성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 곳에 삼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11:32-37)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의 사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대해 묘사를 하는 33절 이하가 조금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때는 승리자의 삶을 사는 듯 싶다가 어떤 때는 죽도록 고생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 세상의 바벨론에서 눈을 돌려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게 되는 성도의 인생은 어떠한 정해진 공식대로 흘러가거나 정형화된 틀에 부어져 찍어낸 붕어빵처럼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의 삶 속에 고난과 시험, 때로는 승리와 이김의 사건들을 허락하셔서 기필코 그들의 옛 자아를 죽여 버리시고 결국에는 그들의 눈이 이 땅과 자기의 이름에서 들어 올려 질 수 있도록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삶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딴 판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삼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삼손을 죽여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살짝 힌트를 드리면 그 삼손 속에는 예수도 들어 있고, 블레셋도 들어 있고, 이스라엘도 들어 있고, 마노아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 속에서 죽는 자들이 하늘에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할 우리의 육적 자아의 추악한 현실과 그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시는 메시아를 이중적으로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나 입다 등도 힘을 추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여러 가지 실수를 하는 것을 폭로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 홀로 일을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그들의 손을 통해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분명,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들과 함께 죽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에 기여를 하는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삶은 자기의 힘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명성과 영광과 가치와 쾌락과 선호를 위해 일로매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삼손이 이방의 블레셋 여인인 딤나의 여인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삼손은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난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하게 하나님의 법을 대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 철저해야 했던 사람이 삼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여러 번이나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그것부터 어기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의 신부들의 간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철저하게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삼손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태평을 누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블레셋의 통치 아래에서 태평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삼손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지요? 그래서 안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노아가 블레셋의 통치 아래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전에서조차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에게 파셨다는 선언 바로 아래에 ‘태평, 안식’이라는 이름의 마노아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모형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가 그러한 이스라엘의 패역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말2:11~12)

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하나님은 그렇게 이방 신의 딸들과 결혼을 한 유다를 당신에게서 다 끊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끊어짐을 당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을 구해 내라고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삼손이 이스라엘과 똑같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죄인과 연합이 되는 그런 형국인 것입니다. 삼손은 이방 여자와의 결혼으로 나실인, 즉 구별 된 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삼손의 모습이 하나님에 의해 연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삿13:24~25)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보시다시피 삼손의 인생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삼손의 삶의 시작이 그러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를 택하여 결혼을 하려 한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작전이었습니다.

 

(삿14:4)

4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그렇지요? 성경은 그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했다고 나오는데 그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히브리 원어를 보면 이 구절에 삼손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을 치다’의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고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 방법으로 채택이 된 것이 삼손과 블레셋 여자와의 결혼이었다’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삼손의 삶이 이방 여자와의 결혼에서부터 시작이 되는가? 잘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비롯되는 성도의 구원을 어떻게 표현을 하지요?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건 세례 요한의 세례 현장에서 확인이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자리인 요한의 세례 현장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과 연합이 되신 것입니다. 한 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랑이신 예수님과 여전히 죄인이었던 신부인 교회와의 한 몸 되기, 혼인 사건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개역 성경은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성경은 ‘저주가 되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가 되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우리에게 쏟아 부어질 저주가 동시에 다 소멸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자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손이 바로 그렇게 죄인들과 연합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죽어야 할 이방여자와 혼인을 함으로 해서, 그 여자가 살아나게 되는 구원의 현실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 여자는 간음한 자로 죽어야 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에 의해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영원한 저주로부터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메시아의 모형인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여자는 지난주에 언급을 했던 잉태치 못하는 여자를 상징합니다. 마치 요나서에서 절대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나타났던 니느웨 사람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 블레셋 여자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늘의 아들들을 출산해 내시겠다는 암시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창녀 고멜에게 당신의 종인 호세아를 계속해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에서 원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호2:18~20)

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늘의 왕자가 게달의 장막 같은 검둥이 노예 술람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살려내는 것이 구원이며,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의 이름을 위해 이 세상의 힘을 축적하고 자랑하는 이 세상 바벨론의 모습을 담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구원자’ 즉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딤나로 내려간 것은 힘과 쾌락을 추구하는 이 세상 바벨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잉태치 못하는 여자, 더러운 여자, 부정한 여자로 취급을 받던 이방여자와 혼인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출산해 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도저히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의 울타리 안에서 용해되어질 수 없는 종류의 진리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타락한 피조물과 결혼을 합니까? 그것도 자기의 목숨을 빙폐물로 내어놓고요. 어떻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죽어서 그 속에서 생명을 출산해 냅니까? 그건 힘의 원리 하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어질 수 없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그 혼인 이야기 바로 밑에 아무도 풀 수없는 수수께끼 이야기가 따라 붙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짐승이라고 여겨졌던 어린 사자가 등장합니다. 어린 사자라는 것은 고양이만한 갓 낳은 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늙은 사자에 대조되는 힘 있는 젊은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 사자가 사사에게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달디 단 꿀이 창조가 됩니다. 그 꿀이 잉태치 못하던 마노아와 삼손의 어머니에게 먹여 지는 것입니다. 그 꿀을 퍼먹은 삼손이 그 사실을 퀴즈로 만들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 놓습니다. 그 수수께끼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삿14:14)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였더라

 

이걸 누가 풀 수 있습니까? 이 수수께끼는 그 현장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다른 이들은 모르지요.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먹는 자, 강한 자는 사자를 말하고, 먹는 것, 단 것은 꿀을 가리킵니다. 먹는 자, 강한 자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승리자, 힘 있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고 먹는 것, 단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재케 하고 유지케 하는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강한 자, 먹는 자였습니다. 그 블레셋은 힘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수시로 배반하고 우상에게로 달려갔던 이스라엘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대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시키시고 그 대적들을 멸해 버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힌트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삼손이 블레셋에게 이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는 것은 ‘블레셋아, 너희들이 지금 승자인 것 같고, 강자 인 것 같지만 너희들은 먹히는 자가 되고 말거야’라는 경고를 던지는 것입니다. 물론 삼손의 머리에서 나온 삼손의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수수께끼는 성경의 독자인 성도들에게 ‘교회들아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힘을 추구하고 세상의 가치를 숭앙하며 이 세상에서 강한 자, 먹는 자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나선 아담의 모습 아니었니? 그건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의 모습이란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은 사자로 사는 것이야. 그런데 너 아니? 이 땅에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것을.(전9:4)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그 옛 사람을 죽이고 그 속에서 생명을 끄집어 낼 거야. 그런데 그 방법이 뭔지 알아? 이 세상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늘의 사자인 내 아들을 죽여서 그 아들의 죽음으로 단 것을 만들어 너희에게 먹일 것이란다.’ 이게 바로 그 수수께끼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삼손이 그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사자를 죽이고 꿀을 퍼 먹고 수수께끼를 내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자신의 나실인 신분을 까맣게 잊고 사자를 죽이고 시체를 만지고 그 속에서 꿀까지 퍼먹는 세상의 바벨론으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서서히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눈까지 뽑아 버리시고 우상의 신전과 함께 그를 저주의 땅에 묻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삼손이 진짜 삶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꾀로 삼손의 수수께끼의 답이 블레셋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 일로 블레셋이 더욱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삿14:17~19)

17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 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 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잘 보세요. 여러분, 계시라는 것은 지식으로 정보로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 낸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인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은,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음의 심비에 새겨져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요14:26)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렇지요? 성령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 밭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속에 복음을 새기셔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본문에서 성령을 받은 자는 삼손 하나뿐입니다. 그에게만 복음이 유효합니다. 나머지는 그저 팩트(fact)만을 인식할 뿐, 그 속에 담긴 진의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계시에 접근을 하게 될 때 엄청난 재앙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삼손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힘의 원리 하에서의 바벨론은 절대로 십자가의 원리로 풀리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단의 회라는 것을 블레셋의 도륙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2:9)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지도 않은 자들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열심도 부리고 정성도 쏟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의를 부수는 자들이라고 바울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마귀, 즉 사단의 회일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마태복음 7장에 등장합니다.

 

(마7:21~2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기 보시면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죽하면 심판대 앞에서도 자기들의 열심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판결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우린 열심히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쫓아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한 비유를 덧붙이시는데 그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입니다. 그들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둘 다 어떤 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 쪽은 구원을 받고 한 쪽은 유기를 당합니까? 전자는 내 말을 듣고 행한 자이고, 후자는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은 자여서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내어 놓은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의 올바른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면 다 쓰레기라는 말인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어설프게 풀어낸 블레셋이 그 일로 오히려 크게 도륙을 당한 것이 바로 이러한 비밀인 계시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로 삼손이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가 버리고, 그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동무에게 주는 일이 일어나며, 그 일로 인해 삼손이 또 대노하여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에 불을 붙여서 블레셋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을 다 불태워 버립니다. 그랬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장인과 삼손의 여자를 불태워 죽여 버립니다. 보세요. 삼손이나 블레셋이나 다를 바가 없지요? 자기의 이름을 위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쉴 새 없이 다른 이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그들에게서 공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분명 강한 자, 먹는 자는 멸망하고, 그 속에서 생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것인데 삼손이나 블레셋이나 모두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상대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안에 삼손이 들어 있고 삼손 안에 블레셋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 안에 패역한 이스라엘이 들어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러한 삼손과 블레셋의 전쟁 와중에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겠다고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에게 넘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셋은 다 똑같이 죽을 존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비단 그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지금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유익과 행복 앞에서 수시로 예수님을 결박하여 대적에게 내어 주지 않나요? 취미 생활을 위해서도 예수를 결박하고,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도 예수를 결박합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도 예수를 결박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도 예수를 결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철장에 맞아, 죽은 사자가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단 것을 낼 수 없는 잉태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단지 삼손은 성경의 독자인 교회를 위해 메시아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고 블레셋은 마귀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손이 뭐가 잘나서 지금 메시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도 블레셋과 다를 바가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을 선물로 받아 이 역사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하늘의 존재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은 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삼손이 하나님의 대적 역할을 하고 있는 블레셋을 새 나귀 턱뼈로 천 명이나 도륙을 한 후에 자신도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되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삿15:16~18)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 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 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경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수를 의미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천이라는 숫자는 산술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 내면에 담긴 진의의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삼손에 의해 완전히 도륙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메시아가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마치 자기의 힘으로 그 일을 한 사람처럼 자기가 블레셋과 결전을 치른 곳을 라맛 레히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 말은 턱 뼈의 동산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귀 턱 뼈로 이런 전과를 세웠다는 것이지요. 역시 자기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바벨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 전과는 전부 하나님의 신의 권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삿15:14)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그렇지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은 삼손의 행색은 밧줄 하나 끊어내지 못하는 초라한 행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그 밧줄이 불 탄 삼처럼 떨어져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힘으로 블레셋과 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무지한 삼손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 버리십니다. 그랬더니 그의 입에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 부르짖음과 함께 생수가 터집니다. 그 샘 이름이 ‘엔학고레’입니다. 그 뜻은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진짜 생명이 잉태되고 출산 되는 것입니다. ‘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자에 불과 합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생명수가 뿜어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라맛 레히가 부수어지고 그 자리에 엔학고레가 열리는 철저한 자기부인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 길을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가셨던 것입니다.

 

(요19:28)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삼손이 ‘내가 목마르다’하고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레히의 우목한 곳을 터지게 하셔서 그에게 생수가 주어졌지요? 예수님께서 똑같이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십니다. 그 예수가 우리의 목마름을 다 품어 안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분이 엔학고레의 생수가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요6:53~57)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잘 생각해 보세요.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때려죽이는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대적을 물리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것은 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신 덕분입니다. 그건 대적의 진멸을 상징하는 완전수로서의 천이라고 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종국에 가서 우리의 대적인 우리 안의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이 될 텐데 그 일이 전부 누구의 열심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라맛 레히’하면서 우리의 열심과 공로를 자랑하게 되면 우리는 사망에 던져질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엔학고레’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셨다. 그래서 내게 생수가 주어졌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가 성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구로치 못하고 잉태치 못하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의 씨, 생수를 부으심으로, 나와 결혼하시고, 나에게서 하늘의 아들을 출생케 하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라맛 레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신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순복하고 항복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지향성을 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용사가 되고 싶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그는 뭔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용사됨의 추구와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을 부수시는 분이시지 그것들을 공고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엔학고레’의 고백을 들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여러분이 삼손과 방불하게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고, 혹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고, 혹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과 공로를 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생수를 부으시지 않으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이 삼손의 이야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힘센 삼손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성령으로 해갈을 하여 하나님 나라의 믿음의 선진의 자리에 떡하니 올라가 있는 그 ‘엔학고레’의 삼손을 부러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손은 그림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떠나면 보잘것없는 연한 순과 같은 자가 맞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대적인 바벨론을 물리치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