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43~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라는 건 그대로 되라는 거거든요. 그 온전하심까지 열심히 달려서 하는데 까지 해봐라. 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거를.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네 번째인 그 부분인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그 사랑의 단계로 넘어 왔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님께서 지금까지 설명한 그 율법 전체를 그 아가페 하나로 사랑으로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보내 주라는 거예요. 성경에서의 아가페 사랑은 그거에요. 진리를 사랑으로 깨달아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는 걸 사랑한다. 라고 그래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율법 전체를 살인, 간음, 거짓증거 이렇게 축약을 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사실 율법은 전부 그 이야기라는 거예요. 살인하지 마. 뭐라고 그랬죠? 도륙하지 마. 너릐들이 익숙한 희생제사 반복해서 드리지 마. 그런 말이라고 그랬죠? 그리고 간음하지 마. 진리가 아닌 율법을 네 남편으로 삼아 간음하지 마. 행위의 아들 낳지 마. 그런 말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곡해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지 마. 그게 거짓증거야~ 거짓맹세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그랬잖아요. 율법이 그냥 법,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요구사항, 이런 것인양 그렇게 알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 그거는 사망을 전하는 것이다. 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그들의 생래적 성향인 두 마음으로 그 율법을 거꾸로 듣고 거꾸로 말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거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주님이 그러한 아담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제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줬으니까 거짓말 하지 말고, 이제 그 진의를 흘려주라. 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제자들이 알아먹었어요? 하나도 이해 못했어요. 그리스도가 오면 그렇게 될 거야~ 라는 이제 그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마음으로 가져 아버지의 마음이 되는 것, 그렇게 내가 아버지의 처소,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고, 그거를 히브리어로 그냥 읽으면 아브, 아바, 아버지에요. 그게.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가 되는 거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진리로 받게 되면. 자, 그 마음으로 내 마음이 된 그 진리, 그걸 그 마음으로 가난한 그 푸토코스 그거 없으면 죽는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거. 그게 이웃사랑이다. 라는 거예요. 그게 이제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흘려줄 수 있으면. 오늘 본문은 그 네 번째 상태를 온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뭔지 알기나 해요. 우리가. 몰라요. 너희 수준에서 내가 이렇게 되면 온전이라고 해 줄게. 라는 말이에요. 뭐 어떻게 온전해요? 우리가. 한절한절 한번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43절을 보시면 이웃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원수라는 단어가 나오죠. 선악의 두 마음을 이러한 구절들을 얼핏 보게 되면 얼른 우리는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과 미워해서는 안 되는 원수를 찾아서 확 사랑해버릴라고 그러죠. 미워하면 절대 안 되지. 라고 결단한단 말이에요. 그죠? 이런 구절을 읽으면 그래 누구를 사랑을 해야 되는 거지? 내 이웃이 누구인 거지? 금방 고민하게 되잖아요? 율법사가 똑같은 고민 했었잖아요. 예수님이 너 가서 사랑해 그랬더니 누가 내 이웃인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확 사랑해 버릴게요. 그랬잖아요.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다 들으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일차적으로 선한 이웃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나에요. 나. 그 이웃은. 자,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율법 박사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율법 박사죠?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이거는 도키마조가 아니에요. 페이라조에요. 실패하게 만들기 위해 하는 시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 저 그거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그래 가서 해~ 그러면은 살 거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율법의 완성이라고 오늘 분명히 얘기해요. 사랑해. 그러면 그게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넷의 마지막이 완성되어 이제 되는 그렇게 되는 거야~ 성취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도 그런다고요. 사랑해. 그러면 가서 찾아서 사랑하라는 거예요? 주님의 이 대답은 두 가지를 함께 내포하는 거죠. 하나는 네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그 사랑을 정말 할 수 있는지 가서 해 봐. 라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율법이 이야기하는 진짜 사랑이 뭔지 알고, 그 사랑을 하면 넌 살아. 라는 말이에요. 네가 사랑이라고 하는 거, 그거는 가서 한번 해봐. 되는지? 그러나 그 사랑이 내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율법, 계명을 통하여 이야기하는 그 사랑이 뭔지 알고, 그거 가서 하면 살아. 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어줍지 않게 그 율법사가 '네가 갖고 있는 그 사랑의 개념으로 가서 사랑해.' 라는 그 말로 듣고 그걸 덜컥 잡아 버렸어요. 그리고는 내가 가서 할게요. 그랬단 말이에요. 할게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가르쳐만 주세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그게 살인이고 간음이고 거짓증거라니까요. 그렇게 확 잡아버리면. 율법으로 잡아버리면.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던지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물은 그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너는 강도 만난 자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왜? 율법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 진리를 전해주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그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없는 자는 뭐에요? 강도 만난 자에요. 거반 죽는 자, 할 수 없는 자, 그래서 거반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 "너는 그거 없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네가 그거 없으니까. 선한 이웃으로부터 그거 받아야 된다." 하시는 거예요. 먼저. 네가 먼저 그걸 받아야 내가 말하는 그 사랑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계명, 율법이 말하는 그 사랑하려면 네가 먼저 선한 이웃으로 온 이방인으로 이 땅에 오는 어떤 이로부터 그 사랑을 먼저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이니까. 그 분은. 거기 분이니까요. 그 율법사에게 시급했던 건, 강도 만난 자에 불과한 자기의 실체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선한 이웃으로 자기를 찾아온 그 진리의 사자, 그걸 전하러 온 분을 사자라고 그러죠? 앙겔로스, 뭐 천사라고도 번역하지만, 그 사자로부터 그 아가페의 사랑을 듬뿍 받아 그 헐어진 마음, 그 강도당해 피폐해진 마음을 그 마음으로 채우고 그걸 흘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나면 이렇게 끝나요. 누가복음 10장 36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불쌍한 사람 만나면 지나치지 말고 꼭 도와줘라 이런 말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가페를 그 마음으로 딱 접하게 됐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굴까? 이게 부사로 쓰였거든요. 가장 가까운 이웃. 나에요. 나. 내가 진리를 접하자마자 내가 자각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나라니까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나 말고 누구에게 먼저 신경을 쓰냐고요? 가장 가까운 이웃, 그 단어에요. 이게. 그 이웃을 먼저 사랑해라. 라는 거예요. 무슨 말일까요? 그 이웃을 먼저 사랑해라. 그 진리가 아 이거야~ 라고 알게 되면 이제는 그게 뭔지 알았으니까 그 가까운 이웃인 너에게 그 진리를 계속 들려주라는 얘기에요. 그게 사랑이라면서요. 그러면 내가 진리를 접하고 가장 처음 만난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에게 나를 사랑하라. 라는 게 뭐에요? 그 이웃을 사랑하라. 그에게 그 진리를 계속 들려주라는 얘기에요. 나에게. 그게 이웃을 사랑하라. 에요.
우리가 진리를 처음 접하면 그게 너무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태풍이 왔는데 이렇게 와서 앉아 있는 거 아니네요. 여기에. 너무 궁금하죠? 자꾸 들려주고 싶잖아요. 여기에. 그게 사랑하는 거예요. 육적인 여러분을 사랑하라. 라는 게 아니라 진리에 입문을 한 나, 이제 그것 없이는 못살겠는 그 나에게 계속 그 사랑을 흘려주라는 거예요.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일차적으로 거기에 계속 목말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푸토코스 하게 된다니까요. 심령이 가난해져요. 자꾸 듣고 싶어. 그거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그죠? 생각해 보세요. 진리를 아는 여러분, 그게 없다면 이 세상을 이 헛깨비에 불과한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기를. 오늘도 하루 종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이 원고를 열 네 시간, 열다섯 시간 이렇게 쓰고 앉아 있으면서 내가 이거 아니면 뭐 하러 이 헛깨비 같은 세상을 사나? 아무리 사람들이 뭐 부러워하고 좋은 거 그것도 다 그냥 헛 거고. 그렇잖아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 어떤 법칙으로 확 묶어 두니까 이렇게 존재가 되어 보이는 거지. 이게 다 헛깨비거든요. 아무리 멋진 것도 다 헛것이고, 그러면 여기를 왜 살아야 돼? 거기다가 어떤 놈은 협박 편지까지 써 가지고 너와 너의 가족, 네네 교인까지 몸조심해라. 막 이렇게. 그런 거 한 두 번 받았어야 겁이 나지. 오면서도 아 비 오는데,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곳에 가서 또 뭘 해야 되나? 심란한 마음으로 왔더니 세아가 여기다가 최고라고 딱 붙여~ 목사님 최고라고 붙여 줘 가지고, 겨우 진정이 됐는데, 이 세상은 진리가 없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니에요. 우리 노량진에 오면서 우리 집사람이 그러더만요. 여기만 오면 골치가 아프대요. 왜? 다 학원에 일등, 일등, 우리가 최고 다 써있으니까.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를 공부하나 이렇게 쭉 봤더니 진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들. 다. 그거를 그렇게 머리 터지게 공부하면서 그러니까 다 헛수고들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 이렇게 목말라 하게 되어 있어요. 푸토코스가 된다니까요. 가난한 자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흘려줘서 나를 사랑해 주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접하기 이전의 나, 율법에 묶여서 그 열심, 율법적 수고가 다인 줄 알았던 그 나, 그 나가 나에게 어떻게 느껴져야 되요? 그 전에는 그게 참 기특하고 보람 있고 잘 하는 건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진리를 접하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네. 그러면 그게 뭐 어떻게 나에게 여겨져야 되요? 미워져야죠.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줘요. 선한 거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두 마음으로 그걸 곡해해서 그거를 그냥 율법으로 붙들어서 그걸로 행위의 열매를 계속 낳는다고요. 그런데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어요. 사도바울도 그래요. 내가 열심을 부렸다. 난 거기에 대해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열심을 부렸다. 잘하는 건 줄 알았단 말이죠. 그런데 보니까 그게 전부 살인이고 간음이고 거짓증거였네. 그러면 진리를 안 나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에요? 알기 전의 나라니까요. 그러면 그게 미워져야, 아이고 이건 미운 놈이네. 그러면 미운 놈에게 어떻게 해야 그가 살아날 수 있어요? 사랑을 흘려주어야 살죠? 그거에요. 원수는 미워하고 나, 이웃은 사랑해야 하는 게 구약의 율법이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 얘기한 거였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원수, 그 이웃을 우리는 항상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나를 늘 제외시킨다니까요. 아니 여러분과 관계없는 말씀은 여러분 거 아니라니까요. 다 여러분의 이야기여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다음 절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그렇게 아쿠오 들었지? 율법이 그거잖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할게. 그 원수도 사랑해. 그래요. 이거 무슨 말일까요? 우리 주일날 배웠잖아요. 그렇게 내가 율법을 갖고 행위의 죄를 낳았어요. 행위의 자식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라고 그랬죠?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걸로 생명을 낳아버리면 내가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런데 나는 피조물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꽉 쥐면은 그냥 먼지도 아닌 피조물. 그 먼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하늘의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 어두운 것 이런 것들로 하늘을 설명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거란 말이에요. 있어야 되는 거예요. 당연히. 그러면 성도라는 존재, 진리가 되는 그 존재에게 있어서 그 아래의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열매를 낳은 그 원수가 꼭 나쁜 거겠냐고요? 아니죠? 거기를 거쳐서 우리는 진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 그것도 사랑해야 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사랑스러운 게 되면 죄까지도 그렇다면 그 원수 짓을 한 그것까지도 나의 선에 선용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서 죄가 뭐에요? 삭제되는 거예요. 그걸 용서라고 한단 말이에요.
물론 진리가 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그냥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사망이고 멸망이에요. 네크로스의 사망. 죽음이라니까요. 그게 멸망이라고. 그런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걸 디딤돌로 딛고 생명으로 간 자, 진리로 간 자들에게 있어서 그거는 반드시 있어야 될 거쳐야 할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 사랑해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얘기할게. 그것도 나쁜 거 아니야~ 네가 진리가 됐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라는 말이 있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 몇 번은 해 줘야 돼 이런 말이 아니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공, 완성이라는 게 이제 우리 목표지점이에요. 그러면 성공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은 전부 뭐에요? 실패에요. 그게요. 그렇잖아요. 이게 목표지점이라니까요. 그런데 20% 달성, 30% 달성, 40% 달성 이게 기특한 게 아니라 99% 달성해도 실패에요. 이거는. 완성이 성공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실패를 거치지 않고 완성이 오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실패를 거쳐서 과정으로 딛고 성공해요. 완성에 이르는데 그것이 정석이라면 이 실패가 왜 나빠요? 자, 발차기 돌려차기를 연습하는 사람이 있어요. 삼천 번을 찼더니 그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 완성된 돌려차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 2999번까지의 그 사람,의 발차기는 뭐에요? 다 실패에요. 실패라니까. 아니 2000번 찰 때하고, 1000번 찰 때하고 100번 찰 때하고 물론 성숙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완성이 진리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다 실패라니까요. 그게. 그렇다고 이 과정이 가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완성이 된 자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즉시 삭제됩니다. 왜? 나는 이제 그거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완성 지점에 올라간 이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삭제되지만 내 자랑이 되요. 얘깃거리가 된다고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담을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계속 그러는 거예요. 그게 자랑이거든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진리가 된 사람들은요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 즉시 삭제된다고요. 그런데 그 아래에서 머무르고 이게 다 아니야~ 이게 완성 아니야~ 그리고 어줍지 않은 돌려차기 하면은 펭귄 발차기 하는 거예요. 심형래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완성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에게는 그것 자체가 다 가치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얘기할게 그 원수, 거기에 머문다면 당연히 미워해야지? 네가? 그렇지? 진리에 입문했는데, 그전의 그거 너, 그게 너에게 옳게 보이면 안 되지? 당연히 그건 원수잖아. 하나님이 하라는 거, 반대로 다 했으니까 하나님의 원수잖아. 그러나 그건 미워해야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여 네가 진리가 되었다면, 그것도 사랑해야지. 하나님이 준 거니까. 그 말 하는 거예요. 원수 같은 인간 이 악물고 한번 사랑하는 척 해 보라는 그런 말 아니에요. 아니 하나님이 그런 거 요구 하시겠냐고요? 우리한테. 그러니까 이 구절을 자기에게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도 인간적인 그 에로스의 사랑을 주라. 라는 말로 들어서 이를 악물고 벼름의 사랑을 결단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 주세요. 어차피 인간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냥 불쌍한 존재 아닙니까? 진리가 된 사람들이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죠? 그 모든 게 이렇게 우스워 보이지 않아요? 우습다기 보다는 좀 아 왜 그때 거기에 그렇게 집착을 했던가? 뭐 이렇게. 진리가 된 사람이 참아 줘야지 뭐~ 자, 그 말은 율법 안에 담긴 아가페의 사랑을 잘 깨달아서 그것으로 이웃들을 섬기라는 거예요. 자기 안의 진리로 그 진리를 흘려낼 수 있는 또 다른 선한 이웃들을 만들어 내라는 거예요.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진짜 이웃사랑.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십니다. 율로게오 호 카타라오마이 수 칼로스 포이에오 호 비세오 수, 이 전체가 한글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어요. 그 왜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몽땅 빠져 있고 한글 개역성경에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요. 심지어 그 문장 안에서도 에페라조 수 라는 어구가 빠져 있어요. 너희를 거짓으로 모욕하고, 이 어구도 빠져 있어요. 아마 개역성경을 번역을 할 때 그때 이제 원어 성경도 참조를 했지만, 킹 제임스 버전을 갖고 번역들을 했거든요. 중국어 성경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킹 제임스에서 빠진 건 다 빠져 있어요. 킹 제임스가 영국 왕 제임스가 번역 하라고 해서 번역한 거거든요. 그런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그것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우기고 다니는 사람들 있어요. 진짜 미국에 있을 때도 몇 사람이 찾아와서 저한테 요즘은 하나님이 영어를 당신의 말로 선택했다고, 어디 그런 말이 있냐고 그랬더니 그렇대요. 무조건. 그래서 킹 제임스 버전만 읽어야 된다고. 헛소리하고 앉아 있더라고요. 다 빠져 있어요. 거기에도요. 개역성경이 빠져 있는 부분을 다 넣어서 다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너희에게 카타라오마이, 주문 같은 걸 주는 자, 주문이 뭐에요? 성경 구절을 앞뒤 문맥 다 빼고 뚝 떼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렇게 성구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는 사람들 있죠? 그리고는 자기가 필요할 때 갖다 써 먹는 거. 이걸 주문이라고 그래요. 그런 카타라오마이, 주문을 주는 자에게 선한 말로 주고. 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진짜 말로 주고, 너희를 몹시 하나님이 미워하게 만드는 자(미쎄오), 왜? 엉뚱한 말을 갖게 만들어서 미워하게 미쎄오, 미워하게 만드는 자를 칼로스(선)가 되게(포이에오) 하고, 거짓으로 협박하고, 에페레아조, 이게 너 그렇게 하면 지옥 가! 너 그렇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어! 이거 꼭 해야 돼. 이렇게 분리하여 협박하는 걸, 에페레아조라고 그래요. 그렇게 협박하는 자, 그리고 잘못된 선생의 교훈으로. 데일로, 디오코가 데일로스와 디아코노스를 그 합성한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데일로스가 '믿지 않는, 어두운' 이런 말이고, 디아코노스가 뭐 집사, 목사 뭐 여러 가지로 이제 번역할 수가 있죠? 그런 자들. 그 믿지 않는 그런 어두운 자들의 그 교훈. 그거를 너희에게 주어 그게 핍박이라고 그래요. 뜰립씨스, 그냥 곡식을 딱 철판위에 놓고 요철 같은 거로 밀어 버리는 거예요. 핍박에요. 그게. 진짜 엉뚱한 말로 여러분을 주는 걸 그걸 핍박이라고 그래요. 너 교회 가면 죽여~ 그러고 시어머니가 꼬집고 이게 핍박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핍박은 엉뚱한 말을 주어가지고 그것으로 헛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그걸 핍박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핍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프로슈코마이, 흘려주어라.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즘 제 생각엔 그래요. 그냥 멍하니 개역성경만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열심히 읽어 갖고는 절대 진리에 도달 못해요. 프로슈코마이, 를 기도라고 번역 했지만, 그 프로슈코마이가 뭐냐면 깨달은 것을 전해주다. 그리고 어디 어디를 향하여 원하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도라는 게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원하는 게 있죠? 일차적으로. 그래서 우리 안에서 우리는 기도를 뭘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먼저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있죠? 우리를 향해서. 그 뜻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흘려주는 거예요. 너희는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 이거. 그러면 우리가 그걸 받아다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도 그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가 기도죠. 프로슈코마이. 그러니까 내가 그걸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면 기도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기가 막히게 제자들이 다 받아 적었죠? 산 속에 들어가서 심지어 자고 있었는데도 그걸 또 다 받아 적었네. 어떻게 적었을까요? 기도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였단 말이에요. 혼자 하나님께 중얼중얼 거린 게 아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으로 흘려주어서, 그들의 모든 걸 선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웃사랑이라면, 우리가 함부로 어떤 이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면 되요? 안 돼요? 안 되죠. 그들에게 그거 흘려주면 그들이 그 과정을 거쳐서 진리로 올 수 있잖아요? 우리는 그 결과를 모른다니까요. 그들이 현재 가는 그 길이 잘못된 것이다. 라는 것을 지적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러니까 넌 죽어라. 가 이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들이 언제가 진리로 완성이 되었을 때 그들의 과거의 그 원수의 행적도 모조리 삭제되어 버린단 말이에요. 그게 구원의 공식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45절 이렇게 이으시는 거예요.
내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불리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으로 죽을 때는 딱 한번 하나님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 이외는 전부 아버지라고 불러요. 하나님이라고 안 부른다니까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진리로 깨달아져서 내 안에 이렇게 마음으로 되면 그걸 아브, 아바, 아버지라고 그래요. 아버지. 그러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진짜 아버지를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장사 지내고 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주님이 그러죠.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 지내게 하라."라고 그러죠. 너 지금 나를 쫓아와서 진리를 받아야 네 아버지가 살아, 산 아버지 만나는 거야~ 그런데 그 아버지, 죽은 자의 아버지는 네가 만약에 나를 지금 쫓지 않고, 거기에 가서 장사가 뭐에요? 율법이에요. 규례란 말이에요. 그걸 한다면, 네 아버지 장사 지내게 되는 거야~ 너 살아 있는 아버지 못 만나. 라는 말이에요. 무슨 인륜을 저버리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매정하게. 성경은 전부 메시지가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내 안에 그 아버지 그거 만나려면 나 쫓아와서 내가 가진 진리를 네가 넘겨받아야지. 이런 말이에요. 거기 가서 율법 행해서 진짜 네 아버지 초상 치를 거야~ 그럼 네 아버지 죽어~ 진리가 안 되니까.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가서 장사 지내라고 그래. 그러는 거예요. 자, 그렇게 아버지를 간직한 그 사람이 또 아버지, 진리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다른 이에게 그 아버지를 전해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걸 진리의 흐름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온전하다. 라고 여겨주는 거예요. 무슨 뭐 성품도 그냥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다 변하고, 뭐 그냥 누가 그냥 막 툭 쳐도 그냥 씨익씨익 웃고 무골호인 되는 이런 온전함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는 진리의 나라와 아무 상관없어요. 자, 그게 바로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주신 온전의 상태에요. 요한복음 17장 23절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내가 저희 안에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 그러면 그 아버지가 저희 안에 있는 거죠?) 저희로(어떻게 된대요? 그러면 온전함이 이루어진대요. 자, 예수님이 가진 그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온전함이다. 그래요. 성품이 바뀌고 행실이 바뀌고 이게 아니라 그 상태, 그것이 온전함이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진리를 충만하게 담았죠? 그래서 내가 진리다. 그러잖아요. 내가 길이고 내가 방법이요. 내가 내용이다. 진리다. 그게 생명이야~ 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잖아요. 내가 진리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를, 그 안에 진리를 하나님이 부었다면 사랑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진리를 갖고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 거다. 그 말이에요.)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4장 15절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그거 봐 예수를 사랑해야지~ 그게 아니라 나로 사랑한다. 에요. 나를. 이 아니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그렇게 Keep 하고 그 그리스도를 진리를 이렇게 Keep 하게 되면 마음으로 Keep 하게 되면 그 분과 내가 연합되는 거죠? 그분이 내가 연합된 나가 세 번째 성전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로, 그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네 이웃 가장 가까운 이웃, 너 사랑하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나로, 그렇게 진리가 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계속 흘려준단 말이에요. 사랑을 받는 거예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리스도가 진리로 내 안에서 계속 밝혀준다는 거예요. 그것으로, 진리로. 그게 사랑이에요. 그러면 그는 그 나타나신 주님이신 그 진리를 이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겠죠? 그걸 뭐라고 그래요? 독사가 뭐라고 그랬죠? 여러분. 영광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그것을 이 피조물의 수준으로 보이게 주면, 그렇게 하나님의 것이 나타날 때 그걸 독사라고 그래요. 영광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우리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 그 하나님이 진리로 나타나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발광체가 먼저 자기를 나타내야 영광이란 말이죠. 그게. 그러면 그걸 반사체가 받아서 마치 해의 빛을 받아 달이 반사하여 해가 있어요. 를 보여주는 것처럼, 이거는 달의 빛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반사체에서 나오는 걸, 내가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여호와가 뭐라고 그랬어요? 파자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가 여호와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말씀, 계시되는 말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그게 무슨 상이니? 그러죠.)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엑소시아, 권 복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을 때 그 간직하는 그 능력, 이게 엑소시아죠? 두나미스는 그걸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이고, 그 엑소시아, 그거를 다 쓰지~ 가 아니라 남용하지 않는 것. 이게 내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 왜 그게 상이에요? 당연하죠. 내 안에 원래 없던 거잖아요. 나는 피조물이라고. 내가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그 하늘의 진리를 하나님이 나에게 흘려줬네요. 그래서 그게 내 마음이 되었어요. 내 마음에 새겨졌어요. 그 진리가. 그래 나는 흘려줄 수 있는 자가 됐죠? 그게 크리스토스에요. 그리스도들.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 기름을 받아 이 기름을 다른 이에게 발라 줄 수 있는, 흘려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그걸 하나님께 올바로 받아서 남용하지 않고 잘못 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자가 됐다면 이게 이거보다 더 큰 상이 어디 있어요? 나한테. 내가 뭔데 그거를 그 예수가 하신 그 일을 내가 하냐고요?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동참 하냐고요? 그게 내 상이야~ 라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내 상이면 그렇게 내 거 내게 주신 걸, 이렇게 흘려줘야 그게 내 상이죠? 내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잖아요. 아들을 낳는 아비의 역할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거를 하라고 우리에게 사랑을 흘려줬더니 그걸로 열심히 그냥 하나님만 여기서 두들기면서 예수님 찬양 이러고 있네. 그러면 그게 무슨 상이냐? 그게 무슨 상이냐? 너한테는 아직 그 예수 안 죽었네. 그러니까 예수님 찬양 그러고 있는 거 아냐? 그걸 흘려줘야지~ 그게 무슨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급, 상급하지 마세요. 이게 여러분의 상이라는 그 인식이 없으면 여러분은 엉뚱한 상, 지금 바라게 된다니까요. 하나님한테.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에요. 설교시간에 상급 얘기하는 사람 100%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우리 수준에서 원하는 그런 상급, 거기에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100% 거짓 선지자에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헛깨비 같은 세상에서 고지 꼭대기에 올라 가갖고 성공해라. 120%. 120% 용이에요. 용. ㅂ 자도 모르는 복음의 ㅂ 자도. 자, 그러면서 세리는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라고 그래요. 갑자기 왜 세리가 나오죠?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서 세리라는 이야기를 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세리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첫 번째 강화로 하신 겁니다. 유일무이해요. 다락방 강화는 그냥 완료고. 산상수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걸 못 알아듣지? 이 산상수훈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적, 표적, 말, 비유 던져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것만 이해하면 나머지 부분은 몰라도 되요. 지금 여기서 세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뜬금없이 세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세리 그때 얘기했던 산위에서 얘기했던 그 세리가 이 거였어. 라고 세리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세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텔로네스, 텔로네스 여기서 조금 아까 해를 비추다. 에서 비추다. 가 텔로스라고 했죠? 완성하다. 결국 완성. 이런 말이 텔로스라고 그랬잖아요. 텔로스라는 단어하고 오네오마이 값 주고 사다. 구입하다. 라는 말이에요. 이거 두 단어의 합성어거든요. 세리가. 그러니까 세리는 완성, 그 안식을 값 주고 사는 자. 라는 말이에요. 완성을 어떻게 값 주고 사요? 그래서 세리에요. 그게 죄인이에요. 원래 세리라는 직업은 세금을 징수하는 자에요. 그들은 자기들의 조국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가망성이 없다. 라고 낙심하고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지중해 등지에 그런 휴양지에 가서 편안하게 살자고 로마의 주후가 된 자들이 세리였어요.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 욕망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세리의 직업에 뛰어 들어. 어차피 가망 없는 나라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튀자. 좋은데 가서 살자. 그 세리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예요. 무조건 가서 걷는 만큼 자기들에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유대 안에서의 세리는 그냥 죄인이었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그러면 그냥 세리였다니까요. 율법과도 무관하게 살아. 욕심 부리면서 살아. 그러니까 지들도 알았고, 다른 이들도 저거 죄인 저거. 그랬단 말이에요. 그게 세리에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안식을 행위, 율법 지킴, 제사라는 걸 지불하고 살려고 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은 다른 종류의 안식이지만, 자기들의 돈으로 그걸 살려고 했던 자들이죠? 둘은 같은 자들이에요. 이 율법주의를 부수기 위해 하나님이 세리를 끌어다 쓰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세리를 부르시고 진짜 세리인, 바리새인들 저주하죠? 그 말은 네들이 진짜 세리야~ 가르치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세리가 나오는 데는 바리새인이 같이 등장해요. 항상. 주님이 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그래요. 아니 거기서는 바리새인 아예 삭제돼요. 의로운 자는 저 세리다. 저 세리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그러니까 자기의 성전으로 내려가는 자야~ 라고 이야기해요.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토색이라는 게 엉뚱한 말로 준적이 있으면, 그러니까 쉬코판테오 거든요. 쉬코판테오, 이게 쉬콘이 무화과고 판테오가 들어내다. 그러니까 무화과로 들어내다. 무화과는 항상 율법의 모형이죠? 열매도 아닌 게 열매인 척 하는 것. 내가 율법으로 잘못 전한 적이 있으면 내가 그것으로 가서, 이제 내 안에 들어왔어요. 주님이? 그러니까 네 배가 아니라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 에요. 넷이 뭐라고 그랬어요. 하늘의 셋이 땅에서 완성된 게 넷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겉옷도 넷으로 넘겨주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것도. 보세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마태 유대인에게 준 책이죠? 간음하지 마. 마가, 니들 율법 빠지면 안 돼. 그 다음에 거짓증거하지 마, 거짓증거 안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내 것을 모두 들어내 주는 거. 가감 없이 이거를 헬라어로 친구라고 그래요. 내 거를,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하신 그 분이 내가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다 알려주지 않겠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복음이 어떻게 시작해요? 데오빌로우, 하나님의 친구, 내가 다 밝혀줄게. 라는 뜻이에요. 한번 보세요. 거짓증거, 살인, 간음, 거짓증거, 마태, 마가, 누가. 사랑, 요한, 이게 넷이라니까요. 그 이야기가 사복음서가 그대로에 나오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똑같이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사람이 썼다고 하겠냐고. 이 책을. 자, 그렇게 쉬코판테오, 내가 토색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이제는 내가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 이게 세리장이에요. 세리가 완성된 거라니까요. 그런데 어디서 시작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 진리를 주니까 넘겨주는 자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그래요? 세리는 이 같이 안 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을 흘려준 자로 섬긴다고 너스레 떨지 않아. 이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래서 세리는 이같이 안 해.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세리일까? 이건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리와 세, 세금으로 진리를 설명하셨기 때문에 그걸 그냥 갖다가 쓰시는 거예요. 민수기 31장 40절 보세요. 40 사람이 일만 육천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리운 자가 삼십 이명이니
말씀 안 주는 거예요. 말씀 없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엉뚱한 세받는 거죠. 그러니까 세는요 성전을 이루고 성전을 완성하는 거, 그 세금을 받아서 성전을 유지했단 말이에요. 성전 지을 때도 그 세 받아서 성전 지었잖아요. 반 세겔. 그게 성전 지을 때 받았던 성전 세란 말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안 내도 되는 건데, 이 사람들이 성전은 바로 우리 힘이 모아져서 지어지는 거다. 를 그걸 붙들기 위해서 계속 지들이 낸 거예요. 그냥요. 성전세는요. 레위인들이 그걸 받았단 말이에요. 성전세를. 반 세겔씩. 그런데 그 세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걸 여러분이 주의 깊게 보셔야 되요. 하나님의 성전은 에베소서가 그러잖아요. 너희들이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진짜 성전에서 요구하는 성전세는 사람이에요. 성도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를 세금, 성전세라는 것으로 모형화 하여 뭔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하나님의 성전은 성전에 세로 들여지는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완성이 되는데 그게 에베소서의 논리에요. 그 세를 받는 자들이 엉뚱한 세를 받아 버리면 성전이 더럽혀지고 완성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가 엉뚱한 것들이 가버리면 그 성전이 흠이 있는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표면적, 구약의 표면적 성전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어요. 레위인들이죠? 레위인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레위인이 성전을 이루는 성전세의 역할도 한 거고, 그 성전세를 거두는 세리의 역할도 한 거예요. 레위인이. 그 레위인은 곧 우리잖아요. 하나님께 드려진 자. 그렇죠? 그래서 그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연합, 덮음, 휘장 다 성막을 덮던 용어들이죠.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성전이에요. 그들이 거두어 간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어요. 그러니까 레위 사람들이 바로 반 세겔이었던 거고, 성전세였던 거고, 그 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던 거예요. 그 성전세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이렇게 나오죠?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누구? 제사장, 레위인)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반 세겔 내냐? 안 내도 되는 건데)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왜 일부러 레위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세관이라는 건 세금을 걷는 곳이니까. 옛 성전이에요.) 나를 좇으라 하시니 (모든 것을 다 팔아, 이런 말이에요. 다 팔아. 진리를 만나면 행위를 다 팔게 되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거기 때문에 다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진짜 마태가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금방 가갖고 어디 숨겨둔 배 찾아갖고 낚시질 하러 가잖아요. 그물 던지러. 그런 것들을 사용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러나 좇으니라.)
그러니까 예수를 섬기려고 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있었던 진리를 마음으로 담아서 Keep 해서 가난한 자들, 푸토코스, 그 필요한 자들에게 흘려주는 거. 이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온전한 자의 삶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전부 그걸 섬기는 데에, 왜냐면 내 안에 진리가 없어.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전부 그냥 어떻게 하면 잘 섬기는가? 어떻게 하면 율법의 행위를 잘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근사한 가짜 성전을 구축할까? 수천억씩 들여서 이것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꾸 섬기라고 얘기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래야 뭘 자꾸 내 놓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선동당하지 마세요. 돈 없으면 밥부터 사 먹어요. 헌금하지 말고, 왜 밥 굶어가며 헌금하고 그래요. 그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거.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배를 이렇게 신문지에 싸갖고 우리에게 줬더니 보배는 못 알아보니까 버려 버리고, 신문지를 벽에다가 걸어놓고 그걸 섬기고 있네. 예수가 그걸 담았던 그릇이란 말이에요. 보배는 그 진리라니까요. 그리스도의 말, 성령, 그거 그게 보배지? 여러분이 행위로 섬기는 그게 그건 가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 그런데, 이게 뭐가 이렇게 기분이 나쁘세요? 그런데 왜 우리 가족들까지 뭐 조심하라고. 왜 그러는 거예요? 난 도대체 이해가 안가요. 내가 뭐라고 그랬다고. 아니 헌금하지 말고 밥부터 사 먹으라는 게 나쁜 말인가요? 그게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쁠까? 여러분이 예수와 십자가를 그 내용을 진리로 여러분 안에 이해하고 깨닫고 있지 못하면, 그건 신문지 조각에 불과한 거예요. 그거 갖고 자랑하지 마세요. 무슨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 그게 나랑 상관이 있어야 십자가지. 그것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온전인 거예요. 진리가 온전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걸 내 안에 갖고 있으면 내가 온전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온전이 하나님의 그 온전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그 온전에 그 모양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하시면 되요. 이것이 되면 여러분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마지막 걸 채워서 온전한 성전, 사각형이 되는 거예요. 재미있죠? 재미있다고 해야지 뭐 여기서.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거 말고 그냥 아 세상을 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기쁘게 행복하게 사람대접 받으면서 그런 방법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 거 잘하는 분들 소개해 드릴게요. 제가. 그리로 가시면 되요. 저는 이 이야기 이외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이렇게 연구하고 원고를 쓰고 또 설교를 하다보면 모든 게 이렇게 하나이기 때문에 저는 그 하나님이 두려워서 다른 이야기 못해요. 여러분도 제발 그 하나 속으로 들어가 그 하나를 여러분 마음으로 가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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