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26 속옷을 달라고 하는 변태들에게 주신 것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17



산상수훈 26 속옷을 달라고 하는 변태들에게 주신 것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어떤 이가 여러분에게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속옷을 달라. 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시겠습니까? 변태죠? 당신 속옷을 나에게 주세요. 그러면 그건 변태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를 불쌍히 여겨서 겉옷까지 함께 주라고 그러세요. 주님께서 지금 그러한 종류의 변태들조차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다른 항목들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려면 오늘 본문도 그렇게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어떤 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행하고 어떤 거는 에이 어떻게 그래, 그러고 타협하고 그렇게 읽는 겁니까? 성경이.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그 속옷 벗어서 겉옷까지 함께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러면 적어도 성경이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닐 거예요. 그죠?

 

 이 구절을 여는 키는 헬라어 원문에 맨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델로와 크리노라는 단어에요. 델로는 결정하다. 선택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고, 크리노는 구별하다. 분리하다. 율법으로 판단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걸 너를 송사하여~ 이렇게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그 어구를 원문 그대로 풀어서 번역을 하면 무슨 고소했다. 라는 이런 말이 아니라 너를 율법으로 판단해서 그런 사람으로 결정한 사람이~ 이런 뜻이에요. 너를 그렇게 율법으로 판단하여 너를 그렇게 율법의 사람으로 판단한 사람, 결정한 사람이 이런 뜻이에요. 그 사람이 너에게 속옷을 요구할 것이라는 거죠? 이런 말이에요. 


율법주의에 묶여 있는 어떤 사람이 나도 그런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왜? 그 사람들 눈에는 그것밖에 안 보이거든요. 그것밖에 몰라요. 그 사람들은요. 나도 그런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나에게 속옷을 넘겨달라고 요구할 때 그가 요구하는 것도 주되 겉옷을 함께 주어야 한다. 이런 말이에요. 그가 요구하는 것은 변태들이나 요구하는 거니까. 아이 그거 말고 내가 다른 거 줄께. 이렇게 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가 요구하는 것도 주고, 겉옷도 함께 주어라. 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제가 로마서 강해 때 의의 병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예로 들어서 겉옷과 속옷의 관한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해드렸는데, 그걸 함께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속옷은 율법이고, 겉옷은 그 율법의 진의인 진리다. 라고 설명을 해 드렸죠? 오늘은 제가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예를 들어서 그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를 좀 더 쉽게 정리를 해 드리고 다음 주에 완결해 드릴게요. 


오늘 본문에 쓰인 속옷이라는 단어가 키톤이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를 헬라어 사전에서 찾으면 거기에 히브리여 3801번에서 유래라고 되어 있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스트롱 사전은 번호가 똑같아요. 그러니까 그러면 반드시 히브리어 사전을 펴서 그 3081을 찾아 봐야 되요. 왜? 헬라어는 히브리어를 어원으로 하여 번역이 됐거든요. 


그 히브리어 사전 스트롱 코드 3801번을 찾으면 케토네트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 단어는 가리우다. 옷을 입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요. 그리고 겉옷이라는 뜻도 있어요. 속옷이 아니라.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속옷과 겉옷의 구별은 사실 별 의미가 없어요. 그냥 그걸 겉옷이라고 썼다가 속옷이라고도 쓰고 반대로 쓰기도 하고 그래요. 그냥 둘 다 옷이에요. 옷.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운 것을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는 것. 이런 거예요. 그걸 안에 입으면 속옷이고, 겉에 입으면 겉옷이 되는 거예요.

 

그 케토네트 라는 단어를 추적을 해서 올라가요. 추적을 해서 올라가면 케템으로 까지 이어지는데 그 단어가 금입니다. 금. 그 금이라는 단어는 기름이라는 단어와 자하브라는 금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케템이라는 단어도 기름이라는 단어와 항상 혼용하여 쓰여져요. 그래서 금을 씌우다. 라는 말은 기름을 바르다. 라는 말과 같은 말로 쓴단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요. 


기름과 금하면 얼른 생각나는 곳이 성전이죠? 성전의 기명이 조각 목으로 만들어졌다. 라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익히 아실 거죠. 그 조각 목이라는 건, 가시나무에요. 가시나무는 예로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나무입니다. 심지어 가시까지 있어요. 얘는 뗄감으로도 적당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냥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을 하나님이 그걸로 만들으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의 모형인 성전을 굳이 그런 쓸모없는 나무로 만들라고 하신 건 바로 -우리의 모습,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완성될 거잖아요. -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다 걸 보여주시고자 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조각 목을 뭘로 싸라고 그러세요. 성전의 모든 기명은 금으로 싼단 말이에요. 금을 펴서. 성전의 모든 기명은 금으로 싸고 성체를 만들어요. 성체. 


애들보고 성 그리라고 그리면 이렇게, 이렇게 요철처럼 그리죠? 그게 성체잖아요. 그죠? 그 성체는 거룩하다. 구별되다. 깨끗하다. 라는 의미를 가져요. 그래서 모든 성전의 기명들은 다 성체를 만들어요. 떡 상에도 성체가 있고, 번제단에도 성체가 있고, 다 성체가 있어요. 거룩하다. 라는 거예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수치스러운 조각 목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덮여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둔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의 가치는 조각 목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수치를 둘러 싼 금에 있는 거예요. 그 금은 곧 기름이고, 기름은 곧 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결론은 수치스러운 조각 목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덧입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자 이 이야기를 토대로 오늘 본문을 설명해 드릴 거예요. 조각 목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금으로 말씀으로 기름으로 덧입혀져서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조각 목이 금을 덧입는 게 옷 이야기란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는 용도로 사용되는 게 케토네트, 옷이에요. 


베게드, 뭐 겉옷, 케토네트, 속옷 그러는데 사실 그건 구별 안 해도 되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굳이 겉옷과 속옷으로 나누더라는 거죠. 인간의 생래적 성향은 항상 모든 걸 둘로 나누어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거예요. 왜? 인간들의 원래 마음이 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항상 인간은 뭘 봐도 둘로 판단하고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의 수를 2로 써요. 2, 1은 하나님의 수, 2는 인간의 수, 3은 하늘의 수, 그래서 삼층 천인 거죠. 4는 땅의 수에요. 그래서 그런데 진리는요 항상 나뉘어져 있는 걸 하나로 모으는 성향을 갖고 있죠? 그래서 결국은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것으로 완성해 내는 거예요. 진리는 항상.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아담들이 겉옷과 속옷으로 나누어 놓은 걸 우리는 하나로 볼 수 있어야 되요. 그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창세기 3장이죠? 옷 이야기가 처음 나오니까. 


창세기 3장 20절 보세요.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 둘은 합쳐서 사람이에요. 아담, 그죠? 아담과 하와는 아담이에요. 사람이 선악과 따먹고 소위 죄인이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그들 눈에 보인 게 뭐였어요? 제일 먼저 본 게. 자기들의 벌거벗음이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보인 게. 그걸 우리는 죄라고 그러죠. 그래서 그걸 가리는 게 구원, 뭐 그걸 또 유식한 말로 뭐 성화 뭐 이렇게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요. 그건 그 벌거벗음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입고 있던 어떤 것이 없어져서 발생한 벌거벗음이 아니라 원래 벌거벗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 원래 벌거벗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야단친 적 있나요? 너희들 왜 이렇게 수치스럽게 하고 있어? 빨리 옷 좀 입어~ 쯧쯧쯧 거리면서 자 저것들 언제 철들어서 저거 옷을 해 입나, 이걸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의 눈에는 그게 수치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놓아두었다니까요. 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니까요. 하나님이 무슨 관음증 환자에요? 벌거벗겨 놓고 보시기에 참 좋다 이러게. 그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니까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율법 속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선한 그것을 야 이거 뭔가 부족해, 이거 뭔가 부끄러워, 뭔가 수치스러워, 이렇게 판단을 하더라는 거죠. 인간이,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자리를 타고 넘어간 거죠.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당신이 만들어 놓고 참 보기 좋다. 아 완벽해. 그랬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자마자 자기들을 보더니 "아냐 뭔가 부족해, 부끄러워, 수치스러워" 그랬단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은 게 죄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걸, 지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부정하며 아냐 이건 부족해! 내가 봐도 이건 수치스러워 하는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니까요. 교회가.

 

여러분 피조물이 벌거벗은 거, 우리들이 이야기할 때 수치스럽다. 라고 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왜? 그 분이 전능자거든요. 그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 분 앞에 문제가 될 게 뭐가 있냐고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인간들이 규정하고 상정해 놓은 도덕적 윤리적 개념의 벌거벗음, 도덕적 윤리적 개념의 죄라는 것에는 사실 관심이 없으세요. 거기에는 아무 관심 없다니까요. 


그냥 흙은 흙으로 돌아가면 되요. 나는 그 안에 있는 내 영, 내가 부은 그거 찾겠다는 거예요. 흙이 흙의 행사를 하는데 하나님이 시비 걸게 뭐 있냐고요. 그냥 걔네들을 흙으로 돌리면 된다니까요. 인간들이 그걸 모르고 자기 들이 마치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걸로 생각하니까 그 하나님이 나의 행위를 굉장히 가치 있게 생각하여 그걸 근거로 뭐라고 상 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흙은 흙으로 가! 그랬다니까요. 하나님이. 나는 그거에 관심 없어. 나는 내 것 찾을 거야~ 내가 불어 넣은 그 영, 그 진리, 그 말 찾을 거야~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들이 규정하고 정리하고 합의해 놓은 그걸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옳다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건 다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치 있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옳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중에 몇 개를 골라 "이거는 옳죠?"하면서 내 놓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죄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죄는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말하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그런 것과는 다르다니까요. 하나님은 벌거벗겨 놓고 그건 나에게 아무 문제 안 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율법주의에 딱 빠지자마자 "이게 왜 문제가 안 된다고 그러세요?" 하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가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이, 얼마나 완벽하게 가리는가를 가리켜 santification 이라 부른단 말이에요. 그걸 성화라고 한다니까요. 그게 옳아요? 여러분 생각을 좀 하세요. 그게 옳습니까?

 

하나님이 그 찢어버렸다니까요. 잘 들어 보세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이라는 두 마음을 가지게 되자 이건 하나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준다. 그러는 거예요. 새 마음 준다. 그러는 거죠. 두 마음이 되자 하나님도 문제 삼지 않으시는 자신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워졌어요. 그건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들이 부정하고 무시해 버린 거죠. 그걸 성경이 휘브리스 라는 단어로 표시해요. 그걸 교만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 그 뜻은 자기 자리 이탈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할 때 그걸 휘브리스라고 그래요. 그걸 교만이라고 한다니까요. (휘브리스는 본래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여 해를 입히는 행동, 신과 인간의 권리를 범하는 참된 규범의 위반, 침해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바로 그거에요. 왜 니들이 너희 자리를 떠나느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건 인간들의 수치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부끄러운 모습,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니들이 니들을 용서해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니들이 니들을 벌주고 그래?" 그거라니까요. 


차치하고 그렇게 인간들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자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말은 자기들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이 마음에 안 찼다는 말과도 같은 거죠. "뭘 이 따위로 만들어 놨어?" 이거 아니에요? "내가 거기다가 화룡점정의 점을 찍어야지." 이거죠? 그래서 치마 만들어 입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완벽한 거지. 부끄러움도 가리고' 그죠? 그런데 그 화룡점정의 행위가 뭐였어요?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은 거였어요.

 

그런데 그건 정확히 말해서 옷이 아니라 띠에요. 띠. 성경에서 띠는 항상 진리를 상징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의 허리 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전도하러 갈 때도 항상 띠를 띠고 가라고 그러죠. 그리고 유월절 나갈 때도 띠를 띠라고 그런단 말이죠. 진리의 띠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게 뭔가 부족해~ 그래서 화룡점정의 점을 자기들이 확 찍어 버리고 이게 진리야~ 라고 한 거예요. 율법, 이게 진리야~ 그 뜻이에요. 띠. 


그런데 그 옷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들었다. 그래요. 무화과는 씨도 없는 것이 열매인 척 하는 위선의 나무에요. 상징적이죠. 그래서 항상 무화과나무만 말라비틀어지는 거예요. 씨도 없는 게 저 열매인 척 하네. 꽃이. 그건 수술머리라고 그랬죠? 사각사각 씹히는 거. 그렇게 잎사귀로 만든 치마, 그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란 말이에요. 


진리도 아닌 것이 진리인 척 하는 게 뭐죠? 그 인물이 아닌데 그 인물인 척 뭐에요? 연기자죠? 그 연기자를 뭐라고 그래요. 휘포크리테스, 외식하는 자라고 그래요. 그걸. 외식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건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근사하게 흉내 내는 자,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속을 알거든요. 너 그거 아닌데, 왜 흉내 내고 있어~ 이게 외식이란 말이에요. 휘포크리테스. 


그게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부끄러움을 가린 자들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수치스러운 모습이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서 인정하는 걸, 주님은 기뻐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한 일을 하나하나 계수해서 그걸로 개털모자부터 시작해서 금 면류관까지 등급을 나누시는 분이 아니라니까요. 


이 상급을 얼마나 들 원하는지 남가주에서도 이 상급 없다고 그랬더니 왕창 나갔어. 그래 놓고 상급 없다고 그랬다고 말이야~저한테. 살려 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슨 상을 받겠다고. 도대체가 말이죠. 그렇게 아무리 부끄러운 모습, 수치스러운 모습, 벌거벗은 모습이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제가 이렇게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인정하면 하나님이 그걸 덮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들이 얼기설기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그 풀은 곧 마르거든요 그걸로 띠 해 입고 와서 그 띠가 뭐에요? 그 허리띠 그 한다고 부끄러움이 가려져요.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가면 꼭 허리띠 하나 해 놓고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거기서 나온 거라고요. 띠를 열두 개씩 한다고 꼭. 그 사람들도 어디서 배웠는지. 인간들이, 인간들이 그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그걸 부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조각 목으로 서지 못하면 하늘 존재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아담들의 수고, 그 무화과나무 띠를 찢어버리셔야 되요. 왜요? 살려내기 위해서.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옷은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찢어져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옷을 어떤 방법으로 찢으시는가 하면 그 옷 위에 덧입히시는 방법으로 찢으세요. 이게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느냐~ 완성하러 왔다. 우리 거기 공부했잖아요. 그 얘기랑 똑같은 얘기에요. 


창세기의 이 이야기를 바울서신과 연결하면 바로 그 결론이 나와요. 덧입혀서 찢어버리세요. 없애버리신단 말이죠. 그건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어째든 하나님께서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은 아담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는데 그 옷이 가죽옷이죠? 그 단어가 '오르 케터네트'에요. 오르는 성막을 덮는 가죽을 이야기해요. 성막을 덮는 가죽. 그러니까 성전을 지어 놓고 싸 가죽으로 덮잖아요. 붉은 색 가죽으로 덮잖아요. 그게 오르에요. 


성전을 하나님이 아들의 가죽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제물의 가죽. 무죄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가죽, 아들의 가죽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가죽. 아담은 바로 그 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그 진리의 띠, 그 가죽 그걸 옷으로 입어야 사는 거예요. 그걸 모형으로 해서 성막과 성전을 주신 거예요. 그거 알아먹으라고요. 그래서 조각 목에다가 금 싸고, 뭐 기름칠하고 피 흘리게 하고, 다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거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담들이 그 생래적 성향은 두 마음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성전을 주자마자 그 성전에서 뭐 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만들고 있어요. 거기서. 야~ 그렇게 하면은 안 되는 거야~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의 그 무죄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내가 준비한 제물의 그 은혜로 가려야 되는 거야~ 이걸 알아먹으라고 그 무화과나무 잎사귀 그거 만들어서 네들 스스로 수치 가리는 그거 하지 마. 라고 성전을 줬더니 그 안에서 희생 제사 드리고 율법 지키면서 그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를 더 열심히 만들고 있더라는 것이죠. 인간들이. 아담들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희생 제사와 율법 준수에 올인을 했죠? 그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할 거라고 믿었잖아요. 이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실 거야~ 이게 우리가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리는 유일한 길이야~ 라고 생각하고 그거 한 거에요. 그게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 만드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라는 걸 아담들이 몰라요. 그래서 그걸 부정하시는 예수님을 때려죽인 거예요.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가를 교훈하려 하시는데, 아담들은 그 성전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 가질까를 궁리하더라는 거죠. 잘 생각해 보세요. 


옷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옷을 율법으로 곡해할 때 그 옷이 속옷이 되는 거고, 

그걸 진리로 깨달을 때 그 옷이 겉옷이 되는 거예요. 


둘 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거지만, 속옷은 가렸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에요. 요즘은 무슨 속옷 입고 돌아다니는 그런 미친 사람이 있어서 실감이 잘 안갈지 모르지만 무슨 속옷 패션이 다 있더라고, 속옷 입고 다니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죠. 그럴 입고 어딜 돌아다녀요? 그거 자체가 부끄러움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거 가려 놓고 자기들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이 그거라니까요. 그럼 반드시 겉옷 화 되어 나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가려줘야 된단 말이에요. 속옷을 겉옷으로 만들어야 수치가 완전히 물러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너를 판단하는 그 선악구조 속의 아담들이 너에게 그 율법을 넘겨달라고 요구하거든, 그것을 주면서 이걸 겉옷으로 설명해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진리는 반드시 어떤 그릇에 담아 줘야 되잖아요. 

레마는 로고스에 담아 줘야 되고, 

아마르는 다바르에 담아서 넘겨줘야 되기 때문에 

진리는 호코스모스에 담아서 넘겨줘야 

우리의 이 제한된 이성과 이 울타리에 갇혀있는, 땅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우리가 알아먹을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걸 우리는 감지조차 못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 하나님을 우리들의 수준에 맞게 이렇게 제시해 준 거를, 그게 진짜 하나님은 아닌데, 그렇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이해할 수 있게 제시해 준 걸 엘로힘이라고 그래요. 그 엘로힘도 그런데 진짜 그 분은 아니라니까. 그 분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도 없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창세기 1장 1절이 엘로힘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진리를 율법으로 붙들고 있는 자들, 그 속옷만 입은 자들을 성경이 죽었다. 라고 표현을 하고 진리가 된 자들, 그걸 겉옷으로 깨달아 갖고 있는 자들을 성경이 산 자라고 하고, 새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세상에서 볼 때에는 전자가 산 자처럼 보이고, 후자가 죽은 자로 보여요. 왜? 이 사람들이 세상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렸거든요. 죽은 자로 보여요. 그래서 세상이 못 본다니까요.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이 원래 죽기로 작정이 되어 이 땅에 온 의로운 형제 아벨을 죽여요. 그죠? 가인이 아벨을 죽여요. 가인은 아담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 먹은 아담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가인이 죽기로 작정된 형제를 죽인 건, 가인의 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이었잖아요. 에베소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렇죠? 창세전에 이미 그건 하나님이 세운 언약이란 말이에요. 가인의 죄이기 전에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니에요. 그렇죠?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 그 피의 공로로 원수를 살려내는 게 창세전 언약이죠? 하나님은 그 나라의 존재는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함을 창세전 언약에 담았던 거고, 그걸 가인과 아벨의 그림으로 보여 준 거란 말이에요. 지금.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거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가인이 자신이 한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 우리는 다 예수 죽인자들이라며요. 괜히 해본 소리에요. 그러면 가인이나 여러분이나 뭐가 다르냐고요. 그런데 왜 가인만 그렇게 욕하고 있냐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핵심이 아니라니까요. 그가 그걸 알아먹었는가. 못 알아먹었는가가 핵심이란 말이에요. 성경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바.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물으세요. "아마르 마 아싸,(네가 되게 한 것, 그게 뭔지 알아?)" 그러는 거예요. 네가 무엇을 되게 만들었니? (이게 아마르에요. 성경은 아마르 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주어가 없어요. 왜? 아마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이야기하는 거라 주어를 쓸 수 없었다니까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래서 동사부터 나와요. 항상 남성 단수로 아마르 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그 뒤에 뭐 엘로힘 이건 다 복수로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주어가 될 수 없다니까요. 주어는 항상 생략되어 있어요. 써 줘도 우리가 모르니까.) 


하나님이 '아마르', 진리로 말씀하셨다. '마 아싸', 네가 되게 만든 그게 뭐야? 가인에게 물은 거예요. 

하나님이. 그게 뭐야? 알아? 라고 물으신 거예요. 알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죽였잖아요. 왜 죽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분이 날 살렸는지 알면 그게 뭐에요? 생명이에요. 그게 구원이잖아요. 마찬가지라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알면. 그걸 알아야 구원이에요. 


안 죽이면 안 된다니까요. 왜? 그는 이미 하벨, 죽은 자, 없음, 공허, 허무로 왔다고요. 죽으러 왔다니까요. 아벨이. 그래서 아담의 그 인자의 라인이 아벨이란 존재가 없어요. 의인이라면서요. 그런데 없다니까. 왜? 이 아벨은 죽어서 셋으로 옷으로 와야 완성이기 때문에 아벨이 없는 거란 말이에요. 당연히 죽어야 되요. 그런데 가인이 그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단 말이에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창세기 4장 9절 보세요.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9절부터 제가 히브리 원어에 맞게 직역을 해드릴게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형제 아벨이 무엇이냐? 그 아벨이 의미하는 바를 네가 알아? 

아벨이 어디에 있니?가 아니라 아벨이 뭐니? 이렇게 물으셨어요. 


가인이 대답하죠.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죠? 히브리 원어가 그래요. 나는 모릅니다. 그래요. 

죽여 놓고 시치미 뚝 뗄려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그 아벨이 의미하는 바를 모릅니다." 그런단 말이에요. 가인이. 

그러면서 "내가 그걸 지켜야 합니까?" 

여기서 지키다.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솨마르인데 Keep 이에요.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라고 이야기할 때 이 단어를 옮겨다 쓴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켜 행하라. 라는 건 그 율법이 이야기한 걸 잘 지켜 이게 아니라 Keep 하라 라는 거예요. 마음에 간직하라. 그게 뭔지를 알아 네 마음에 새기라는 거지, 그걸 네 행위로 내 놓으라는 게 아니에요. 솨마르가 그 뜻이라니까요.. 


그런데 가인에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그걸 Keep 해야 됩니까? 그게 내 의무입니까?" 그러는 거예요. 

솨마르, 내가 그걸 Keep 해야 되나요? 그 말씀으로 온 그걸 내가 깨달아 Keep 해야 됩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벨은 이 세상에 이 세상 가인들에게 뭔가를 메시지로 전달하러 말씀으로 온 예수의 모형이에요. 

죽기 위해, 없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온 모형, 므낫세도 바로 그 뜻이라고 그랬죠? 제거하다. 없어져야 하는 거예요. 므낫세. 그래서 장자의 자리에서 그가 제거되는 거란 말이죠. 그 모형은 반드시 죽어서 사람들 마음속에 진리로 새겨져야 돼요. 그래야 그 존재의 완성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아벨과 셋은 한 쌍이에요. 한 쌍. 우리가 그 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하여 진리로 깨달아 가져야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처럼 그러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돌로 부수어 죽여 버리면 그게 부수어져 율법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깨달아 마음으로 가져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진리가 아닌 사람은 그게 불편해요. 내가 만든 치마가 더 나아 보여 죽이게 되요. 그러면 그걸 율법이라고 그런다니까요. 진리를 죽이는 거를.

 

하나님께서 다시 가인에게 물으세요. 네가 한 게 뭐니? 네가 되게 한, 아싸 동사가 써 있어요. 네가 되게 한 그게 뭐야? 반복하여 물으시는데 여전히 몰라요. 율법주의 하의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열심과 수고로 만들어낸 그 율법의 치마를 입고 그 진리를 부수는 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자기들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 보니까 하나님이 한 게 이게 공의가 아닌 거 같아~ 불공평해,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반드시 죽이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인이 그렇게 뻔뻔스러운 거예요. 그걸 왜 내가 내 안에 간직해야 됩니까? 내가 걔를 왜 Keep, 지켜야 합니까? 왜 나 보고 그 자를 지켜 간직하라 합니까? 그거 마땅히 부수어져야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내가 제사 열심히 드렸잖아요. 왜 내 제사 안 받고 그것만 받아요? 하나님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인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가치 없는 걸 내가 왜 지켜야 합니까? 내 제사가 최고인데, 


가인이 이런 겁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입에 문 율법주의 하에 아담의 실존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이 그 모습으로 나오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율법주의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 거라니까요. 


반면에 "예, 제가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거예요. 저는 생래적으로 두 마음으로 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무조건 다 두 마음이에요. 그건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게 구원이고 그게 생명의 창조에요. 그것이.

 

자 그렇게 저는 두 마음을 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율법으로 진리를 부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내가 옳은 것처럼 보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뭔가 불공평하고 공의롭지 못한 것처럼 보이니까. 사실은 그게 은혜이고 진리잖아요. 그게 용서잖아요. 그런데 그건 아닌 거야~ 왜? 내가 한 성과대로 상주고 벌 줘야 되는 게 우리 선악구조 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의 정의잖아요. 그것이. 그래서 나는 그 두 마음을 진리를 부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저를 위해, 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대제사장이 제물이 되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은 내가 두 마음으로 율법으 로 진리인 그 대제사장을 때려죽일 때 썼던 바로 그 율법이 되어서 죽으셨네요. 그래서 저는 이제 그 진리를 때려죽이는 그 악, 그 율법에서 해방된 거네요. 


이걸 성도라고 그래요. 여러분이 이걸 이해하셔야 되요. 이걸 심비라고 한다니까요.

예수님은 진리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 분은 진리십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진리를 절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 땅에 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진리를 당연히 부수어 버려야 되요. 그 불빛을 꺼버려야 된다니까요. 그런 율법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진리를 때려 부순 자기를 때려 부순 율법이 되어서 죽는대요. 그게 성경의 진술이잖아요.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를 때려죽인 자들이 자기들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때 그들은 그 율법을 죽인 자가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 율법으로 진리, 하나님을 때려죽인 그 죄 이것이 되어서 왜? 나는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이 되어서 죽었다. 라는 걸 인정하면 거기서는 내 육이 죽는 거고 왜? 나는 불가능한 자입니다. 라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때에 그 율법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 때려죽인 율법이 되어서 죽은 예수를 인정하게 되는 것임으로 나에게는 그 악이 없어져 버리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구원의 심비라니까요. 이게 안 되면 여러분은 성경 골 백번 읽어봐야 헛 읽는 거예요. 제가 예수를 죽여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을 함축하여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를 진리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에요. 왜? 생래적으로 두 마음을 갖고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입에 문채로 나오니까. 그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본능이란 말이에요. 본능. 운명처럼 갖고 태어나는 본능.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그런 나를 위해 죽음을 자처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설 때 나는 벌거벗은 자 맞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설 때에 우리는 율법이 되어 죽으신 그 율법의 예수를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마음 편히 보내드릴 수 있는 거라니까요. 맞아요. 죽으러 오셨으니까. 마리아처럼 향유 갖고 가서 빨리 뿌려야지요. 빨리 가세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이렇게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율법이 되어 죽으신 예수를 계속 섬김의 대상으로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죽여야 거기에서 나가 부인되고 죽는 거예요. 그게 진짜 예수를 섬기는 거라니까요. 그리스도예수를. 그러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래의 존재가 아닌 위의 존재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는 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확 불로 멸할 때 안 보이는 자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들이. 그러니까 예수를 죽인 이 세상 가인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져서 각기 다른 옷을 입게 되는데, 그 옷이 율법주의인 속옷과 은혜의 진리의 겉옷이에요. 그래서 그 옷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니까요. 어떤 옷 입었니? 그리스도, 기름, 말씀의 옷 입었어? 너는 양. 너는 무화과나무 치마 입었네. 염소. 그걸 벌거벗었다. 그런다니까요. 너 왜 예복 안 입었어? 이렇게. 옷을 안 입었다는 건 벌거벗었다. 라는 거예요. 나중에 제가 다음 주에 계시록에서 찾아 드릴게요. 네네 벌거벗지 않도록 조심해 그때 전부 겉옷이에요. 옷 잘 지켜! 겉옷이랍니다. 속옷만 입은 자들, 가인처럼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율법주의자들은 사망에 이르게 되요. 그 율법이 바로 수의에요. 그들의 수의. 열심히 자기들 수의 만들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 옷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달아서 그것으로 진짜 수치를 가리게 되는 겉옷의 사람들이 생명의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주신 게 셋이라고 그랬죠? 그 셋, 셋이라는 이름이 뭐라고 그랬어요? 수트, 옷이에요. 제대로 차려 입은 정장이 셋트에요. 셋, 옷이에요. 그게.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쉽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가죽을 벗겨서 친히 가리시는 가죽옷, 겉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게 되면 셋, 수트가 되는 거고, 진짜 옷 입은 사람이 되는 거고, 선악체계 하에서 자기의 제사를 지키겠다고 끝까지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 그 띠를 고집하면 벌거벗은 가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의 라인은 곧바로 수트, 셋트로 이어지는 거예요. 아벨을 거치지 않아요. 가인 거치지 않아요. 바로. 창세기 5장 1절 보세요.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이거 누가복음 3장의 그 족보가 이제 시작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3장도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전부 소유격이기 때문에. 그런데 거꾸로 해석해 놔가지고 다시 뒤로부터 내려오느라고 힘들었잖아요.)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게 히필 동사에요. 나가 히필 동사로 쓰이면 나아지게 하다. 말씀으로 낳다. 라는 말이라고 했어요. 칼동사로 쓰이면 그냥 부정모혈로 그렇게 나는 거예요. 이렇게 그냥 생물학적으로 낳는 거, 부정모혈로 낳는 거. 히필 동사란 말이죠. 그러니까 아담이 말씀으로 진리로 낳은 아들은 셋 아들 하나라는 거예요. 셋, 수트, 옷, 아벨은 땅에 와서 가인들에게 맞아 죽어야할 예수의 모형이고, 그 아벨이 셋으로, 옷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에서 그 그리스도로 와야 성령, 진리로 와야 완성이에요. 그래서 짝이잖아요. 그리스도예수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예수라고 한단 말이에요. 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단 한군데도 없어요. 다 그리스도의 예수에요. 예수는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으로 쓴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예수란 말이에요. 셋의 아벨이란 말이란 말이에요. 그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의 속한 존재에요. 그래서 그 예수를 섬기면 안 돼요. 그리스도예수를 깨달아 진리로 붙들어야 되요. 그렇다면 벌거벗은 가인과 아벨의 피로 옷 입은 셋의 라인이 어떻게 대조되는지 한번 보세요. 창세기 4장 16절 보세요.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 여호와 앞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판임에요. 판임 여호바 판임은 나타난 말씀, 감추어진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났을 때 판임이라고 한다고 그랬죠?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요? 못 보죠? 그 때 아 하나님이 나타난 그 말씀을 접했다. 깨달았다. 이럴 때 하나님의 얼굴, 판임을 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판임 여호바를 떠났다. 말씀을 떠났다. 로 이해하는 거예요. 물론 가인이 하나님을 떠났어요. 떠났는데 그걸 갖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진리로 행간으로 이야기한단 이야기에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떠났다니까요. 떠났는데, 성경은 그걸 문자로 진리인 성도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그 말을 쓰고 있다. 라는 거예요. 여기서. 그래서 예호아 판임이에요. 자 말씀을 떠나요. 어디로? 동편, 동쪽 케뎀은 반대쪽이란 뜻이에요. 동서남북의 동이 아니라. 서는 바다, 남은 사막, 광야, 물이 없는 거예요. 네게브에요. 북은 어둠, 죄,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봐라 어디 갈 데 있니? 그 말은 넷 중에 하나 골라~ 내가 다 줄게. 이게 아니라. 동서남북을 봐, 동은 반대쪽, 하나님과 반대쪽, 서는 바다, 저주의 바다, 남은 물이 없는 광야, 북은 죄, 어둠, 이 땅에서 갈 데 어디 있니? 네가 서 있는 곳,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거기가 어디였어요? 벧엘이었잖아요.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골라 하나 줄게.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동쪽으로 갔다는 건 뭐에요? 여호와 판임을 떠나 그 반대편에 서더라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니까 무화과나무 치마가 이게 왔다. 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여호와 말씀, 진리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니까요. 우리 인간들의 자존심을 무시하지 마.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반대편에 섰어요. 그런데 그 땅 이름이 놋이죠? 유리방황이에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넌 유리방황해야 돼~ 라고 저주를 내리셨어요. 그래서 그가 유리방황이란 땅으로 가게 된 거예요. 아니 그가 그리로 가게 된 게 아니라 그는 거기 가서 정착하러 갔어요. 하나님은 유리방황해야 돼~ 라고 얘기했는데 그는 어디 가서 정착을 했는데 그 땅 이름이 놋이네. 유리방황이에요. 거기가.

 

거기서 뭐합니까? 성 쌓습니다. 성전을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쌓는 율법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에서? 여호와 판임 여호바의 반대쪽에서. 그런데 그렇게 인간들이 자기들의 열심, 자기들의 능력, 자기들의 지혜를 동원하여, 야 우리 유리방황하지 말고 여기서 우리 정착하자. 우리 안전하게 우리가 여기서 안주하자. 라는 그 행위가 유리방황이다. 를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가인이 에덴동편에서 이 기쁨의 동산이잖아요. 에덴이. 거기에서 그 반대쪽에서 이제는 제사 안 지내야지 그러고 그 제사를 멈췄을까요? 그 제사 지키려고 동생도 때려 죽였는데 어떻게 그 제사를 버립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가인은 예수님 때려죽인 이스라엘의 모형이라고 그랬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그 제사 버렸습니까? 안 버렸어요. 동편에 가서 더 열심히 드렸다니까요. 내 제사 지키려고. 그래서 그 라인에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오는 거예요. 율법주의가 오는 거예요. 유대주의가 오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긴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그래요. 자식을 낳자마자 에녹, 하나크 라고 짓는데 그게 봉헌하다. 에요. 드리다. 누구에게? 하나님께. 그리고 성을 쌓고 그 성도 드리다. 하나님께. 그런데 결국은 내가 이렇게 한 걸 하나님은 가치 있게 받아주세요. 라고 한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 누구에게 바친 거냐고. 그게. 나에게 바친 거란 말이에요. 그게 율법주의자들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내 배를 위해 하는 모든 행위, 겉으로는 아닌 거 같죠? 다 손해 보는 것 같아~ 모든 걸 다 털어서 하나님께 드린 것 같은데 결국은 자기가 그 기쁨, 성취감, 가치, 챙겨 갖는다고요. 칭찬, 평판 그게 감춰진 악이라니까요. 여러분. 자 거기에서 그 성에서, 그 에녹 성에서 가인이 꾀한 게 뭐죠? 유리방황을 면하는 거 아니에요. 나의 유리방황, 내 이 죄를 내 스스로 성을 쌓아 가리겠다는 거예요. 내 스스로 나의 안전을 추구하겠다는 거는. 이게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라니까요. 이것이. 성경이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인간은 지옥에 가기 싫어서, 이 부끄러움 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그냥가면 지옥 갈 것 같거든요. 선악구조 하에서의 자기들 생각에. 그래서 열심히 율법을 지켜내죠. 그리고는 그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우겨요.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겨요. 사실은 무서워서 하는 거면서 지옥 안 가려고. 혹시 지옥 보낼까봐 하는 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니까요. 이스라엘이 유리방황이 하기 싫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짓고 그 둘레에 성을 쌓았어요. 지긋지긋했거든요. 광야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느라고. 성을 쌓았어요.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 지냈어요.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수시로 너희가 나를 버렸다. 라고 말씀하세요.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 안 드렸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게 유리방황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거기가 놋 땅이야~ 네들이 정착하여 성 쌓은 거기가 유리방황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게. 거기가 구천을 떠도는 구천이야~ 이렇게 가인의 라인은 스스로 성을 쌓아서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로 유리방황을 모면하려는 자들이에요. 그들은 이 땅에 성을 쌓고 그 성의 주인이 되죠? 땅의 왕이 되는 거예요. 땅의 왕. 그 왕들은 전부 멸절될 왕들이지만요. 그런데 그 대척점에 다른 라인이 있어요. 그게 셋의 라인이죠. 셋의 자손 중에도 똑같이 에녹이 있어요. 창세기 5장 21절 보세요.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가 뭐죠?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죠?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는 날, 노아의 홍수가 시작 되요. 계산해 보면. 그러면 그가 죽고 심판이 임한다는 건, 심판과 함께 항상 같이 오는 건 뭐에요? 구원. 그러면 그가 죽고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자가 누구에요? 예수. 므두셀라는 바로 그 예수를 모형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예수를 낳는 자가 누구냐고? 성도의 모형이란 말이에요. 에녹이. 그러면 그 에녹이 어떤 삶을 사는지 보세요.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부럽죠?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이 데리고 올라갔대요. 23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이러합니다. 하라크하노크에트엘로힘아인킬라카흐에트엘로힘이에요. 우리말로 직역하면 에녹이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니 그가 엘로힘으로 취해져 없음이 되었다. 에요. 많이 다르죠? 하나님이 에녹의 손을 잡고 늘 동행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너는 죽음보지 말고 그냥 가자 이렇게 올라갔다는 뜻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 안,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 연합이에요. 엘로힘으로 안으로 들어가 엘로힘으로 취해지자, 그가 세상이라는 말은 아예 없어요. 아인이라는 게 없어지다. 라는 뜻이에요. 그가 없음이 되더라. 이 뜻이에요. 에녹이.

 

그러니까 봐요. 여러분 이거는 실제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인간들이 이런 걸 신비롭게 얘기해 주면 그걸 믿어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냥 너무 너무 기특하게 착하게 잘 사니까 데리고 올라가 버렸대~ 이렇게 얘기해 주면 그걸 믿는다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 주면 자기가 진리가 되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뭐야~ 이렇게 안 믿어요. 오히려. 그러니까 간단해요. 인간들이 감정의 갖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면 교회는 부흥하게 돼 있어요. 인간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감정 안에 갖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 줘서 탁탁 쳐주면 다 좋아해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되게 신기해한다니까요. 이게 사실이면 이런 일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만 한번 있고 말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누구냐고요? 어디 본적 있어요? 그런데 무슨 어떻게 동행을 하냐고 추측하지 말아요. 내 마음 속에 지금 그분과 늘 함께 하는 게 동행 아닐까요? 거짓말. 무슨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하고 맨날 동행 하냐고요? 마귀와 동행하면 했지. 그런데도 그냥 막연히 자기가 이렇게 그려놓고 그게 그걸 거야~ 이러고 있는 거죠. 그거 예수 믿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렇게 가인처럼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며 스스로 죽는 것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거고,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세상의 율법주의와 무관하게 사는 걸 죽었다고 그래요. 성도는 그 죽음을 죽는 거예요. 세상이 그를 안 봐요. 없는 자 취급해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예수를 죽이는 행위에 의해 지옥 가게 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지옥에 가는 거예요. 이 땅이 바로 그 지옥의 작은 모형이라니까요.

 

보세요. 모든 인간이 자기의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어요. 그런데 그건 좋은 거죠?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착하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이려고 애쓰고, 건강한 사회, 우리가 구현하여 야 이 땅에서 오래오래 잘 살자. 이게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인데 갈수록 피가 튀기네. 갈수록 불편해져요. 사는 게. 그게 지옥이에요. 여러분.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나라라서 지옥의 모형을 땅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 하늘을 안 만들어 놓은 거예요. 상상도 할 수 없게. 하늘 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땅은 누를황인데 하늘이 왜 검을 현이냐고요? 그거 다 짝이거든요. 천자문이. 하나님이 검게 안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건 네들이 상상할 수도 없어~ 추측할 수도 없어~ 생각하지 마. 저기에 내가 만들어 놨어.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그 나라를 추측하면 고작 만들어내는 게 금으로 된 길, 다이아몬드로 만든 대문, 수정으로 된 변기, 그러니까 천국 갔다 왔다. 라는 놈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100%, 100% 아니면 정신분열증 환자던가. 자기가 막 열심히 머리 속에 그리면요. 그게 실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니 하나님이 하늘을 저렇게 텅 비게 놔두었다니까요. 이렇게 보면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거예요. 거기는. 왜? 내가 만든 진짜 하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텅 비워 놓은 걸, 지가 어떻게 갔다 오냐고. 이 육을 입고 못가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나 좋은 곳입니다. 진짜 자유가 있는 곳, 정말 기쁨이 있는 곳,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게 뭔지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완전한 자유, 완전한 기쁨. 성경이 우리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건 익히 아실 겁니다. 그 제사장들은 반드시 옷을 제대로 입어야죠. 그래서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복식의 약간 문제가 있어도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해요. 그런데 여러분이 엉뚱한 옷 입고 거기 들어가면 어떻게 되요? 들어가다가 죽어요. 못 들어갑니다. 그 겉옷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 이 땅에서. 출애굽기 28장 39절 보세요.


39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이게 예수님이 입었던 거예요. 금보다 비싼 거.)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 놓아 만들찌니라 (띠를 만들으래요.)
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아론은 제사장의 자손이에요. 그죠? 제사장의 아론의 아들들, 제사장의 자손들)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속옷, 띠 만들어야 되요.)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그런데 제사장 그 옷 위에 베게드 라는 겉옷을 입어야 되요. 그 겉옷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출애굽기 39장 41절
41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이라 

이게 베게드 거든요. 겉옷. 이 겉옷을 뭐라고 그래요?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옷이라고 그래요. 섬기기 위한 옷. 이 솨라트는 신약에서 말씀으로 섬기다. 라고 번역이 되어 나와요. 말씀으로 섬기기 위하여 입는 옷, 진리의 옷, 말씀의 옷, 거룩한 그리스도 기름의 옷, 이게 베게드, 겉옷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진리로 말씀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하늘의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가. 왜? 그분이 진리로 겉옷을 입고 왔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대제사장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분은 복식을 완벽하게 갖추고 왔다. 라고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복음으로 전할 때 우리는 베게드, 겉옷을 가진 자가 되는 거예요. 그 겉옷을 나누어 주는 걸 전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여인도 또 혈루 병 앓던 여인도 모두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던 거예요. 제가 로마서 때 설명해 드렸죠. 그게 다 겉옷이라는 단어거든요. 속옷 아니에요. 옷 술이라고 번역된 것도 겉옷이고, 옷 가도 겉옷이에요. 그냥. 겉옷. 겉옷을 만졌다. 겉옷을 만졌다. 라고 그런데 그 만졌다. 라는 그 단어도 그냥 이렇게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건드렸다가 아니라. 아교 알죠? 민어 부레로 만드는 거. 그거 붙으면 안 떨어지는 거. 아교로 딱 붙여버리다. 라는 뜻이에요. 겉옷과 그 병자들, 혈루 병이 뭐에요? 진리, 피를 생명을 담지 못해 땅에 흘리는 걸, 혈루 병이라고 그래요. 그건 부정함이죠. 죽음이에요. 그게. 그가 죽은 자가 겉옷의 진리의 딱 붙으니까. 연합이 되니까. 이게 에녹의 이야기에요.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 엘로힘으로 그가 취해지자, 그가 없어지다. 세상에서 없어지다. 그러잖아요. 겉옷의 병자들의 손이 딱 붙으면 나아요. 그 단어가 예수님이 누구를 안수했다. 라고 성역이 나오잖아요. 안수를 했다. 가 예수님이 손을 뻗어 그에게 댔다가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예수님에게 갖다 댔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요. 안수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하고 싶으면 끌어다가 여기다 대는 거예요. 왜? 그 죄, 죄를 내가 갖고 가겠다. 이게 진짜 제물의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제사 때도 그 제물에게 내 죄를 얹어서 전가시킨다니까요. 그래 요즘 목사들이 머리에다 대 놓고 이렇게 안수하는 건 지 죄를 다 나눠주는 거예요. 뭘 알고 받으세요. 그 때에 이렇게 그 손을 갖다가 예수님 몸에 대었다. 짝 붙였다. 라는 거예요. 그게. 그 때 쓰는 단어에요. 그게요. 딱 붙여버리는 거예요. 겉옷에. 그렇게 구별되어 이제 사라지게 되는 에녹들이 막 나타난 거예요. 그게 겉옷이에요.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는 거죠. 겉옷을 가진 자들아 아직 겉옷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속옷을 입고 마치 자기들의 수치는 다 가려진 것처럼 너희들에게도 속옷을 내나봐 라고 요구할 때 그 속옷과 겉옷을 같이 줘. 왜냐면 모든 인간들은 다 속옷을 입고 태어나거든요. 죄를 입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처음에 반드시 속옷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속옷으로 겉옷을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요구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못 알아먹어서 그렇지. 달라고 그러면 같이 줘야 되는 거예요. 겉옷까지 같이 줘라.

 

진리는 우리의 말로 설명되어져야 되고 자연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율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성경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속옷과 겉옷을 함께 주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께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성경을 속옷으로 주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똑같은 성경을 갖고 주는 거예요. 이게 진리로 설명 안 되면 그냥 속옷이라니까요. 이거 해, 저거 하지 마. 이렇게. 그런데 이걸 겉옷과 함께 진리로 설명해 주는 걸, 속옷과 겉옷을 함께 주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선악과로 생명나무 실과를 설명하고, 악으로 선을 설명하며, 죄로 의를 설명하는 게 하나님의 진리 계시 방법이에요. 어떻게 그 하늘의 묵시를 이 땅에다가 어떻게 전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그래요.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은 이 땅에 의가 없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그래요. 하나님만 선하다. 그래요. 그러면 이 땅에 선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선도 없고, 의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선과 의를 설명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선과 의가 뭔지도 몰라. 그리고 이 땅에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뭘 갖고 선과 의를 설명하겠느냐고요. 이 땅에는 죄밖에 없다고 그래요. 그러면 죄 밖에 없는 곳에서 선과 의를 설명하려면 뭘로 설명해야 되냐고. 죄가 뭔지를 가르쳐 주면 그게 의라니까요. 그러면 의와 선을 가르쳐주기 위해 죄가 동원된 거라면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히 나쁩니까? 뭐 때문에 그렇게 파르르 떠는 거예요. 그게 뭔데. 자기는 더 더러우면서, 이걸 하나로 보지 못하면 여전히 두 마음이라니까요. 그게.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네가 판단 받은 대로 너도 판단 받을 거야. 그러는 거예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막 살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살려면 인간답게 살아야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가이사의 건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건 하나님에게. 왜? 자꾸 율법을 갖고 와서 이걸로 이게 이거 맞아요? 이게 하늘의 것 맞아요? 자꾸 그걸로 시비를 거니까. 동전 하나 갖고 와봐. 가이사의 모양과 글이 적혀 있었다고요. 주님이 그래요. 그걸 그대로 보이는 걸, 에이돈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안 물어 보세요. 이게 형상이라는 뜻이라고요. 에이콘이라고 해요. 그 형상이 의미하는 게 뭐니? 그 안에 그게 진짜 뭘 이야기하는 거니? 라고 물으세요. 그런데 그걸 갖고 온 사람들이 그 에이돈은요? 라고 껍데기를 보고 얘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주님이 그래 가이사의 건 가이사의 세상에서 필요한 거니까 줘~ 도덕, 윤리는 이 세상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필요한 거니까 해! 그러나 하나님 거 아니야~ 하나님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라니까. 하나님 거만 갖고 와. 이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건 하나님에게. 에요. 막 살으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무화과나무 잎사귀 그거에 멈춰 서서 이게 신앙생활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열매가 이거죠? 라고 하면 그게 죽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반드시 속옷과 함께 겉옷을 넘겨받아야 되요. 안 그러면 속옷에서 머물며 부끄러워 이를 갈게 된다니까요. 여러분 열심히 개미들 보면 저 개미 말고, 개미 얘기하면 자기 표적설교한가고 그럴까봐 아주, 겁나서. 개미들이 줄을 지어 열심히 일을 하죠? 그때 옆에서 대포를 쏘면 그 개미들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냥 갑니다. 개미는 그 포 소리를 못 들어요. 한계죠? 여러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들려요? 못 듣습니다. 그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있는데 못 듣는 거예요. 우리의 한계에. 저 묵시의 하나님, 우리는 감히 뭐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분. 그분이 당신의 나라와 당신을 설명하려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담을 귀와 눈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에 맞는 그 하나님을 제시해 주신다니까요. 그래놓고 그 정도를 깨달으면 네가 나와 벗이다. 라고 인정해 주는 거예요. 여겨 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수준의 그 하나님을 내 안에 담았을 때 네 안에 나 있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냐고요. 무소부지하시니까. 편재하시니까 그 요만큼 들어와 있나? 여기에. 그게 아니라 그분은 어떤 피조물 속에 담길 수 있는,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수준으로 주셨어요.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다 설명합니까? 그게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다 설명하느냐고요. 우리의 수준에 맞게 줬어요. 자 그 개미들에게 네들 조금 이따가 이제 대포알이 막 떨어지게 되면은 네네 큰일 나. 이걸 가르쳐주려면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것, 침을 뱉는다든지 뭐 이렇게. 흩어버리는 나뭇가지로 흩어준다든가 우리 둘째가 잘 하는 거. 그러면 개미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요. 이거 뭔가 위험 거 있구나. 이거. 그런데 그 개미들이 그 나뭇가지 피하는 것에만 몰두하여 이것만 어떻게 피하면 되겠지 하고 하면 진짜 대포알 날라 오면 죽는 거예요. 그걸 통하여 정말 무시무시한 어떤 게 있겠구나. 이걸 깨닫는 걸 성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준비한다니까요. 성도는.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어 뭔가를 깨달으라고 준 그 나뭇가지에만 묶여 있는 거예요. 율법에만. 곧 죽습니다. 그 개미는.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내 안의 진리로 영으로 말로 갖고 있지 못하면 성경이 그걸 어리석다. 그래요. 그 말은 얼이 섞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원래가. 얼, 뭐에요? 영, 이 내말이 혼탁하게 섞인 거를 술이라고도 해요. 누룩하고 발효시킨 거니까. 그러면 항상 진리의 말, 깨끗한 말과 그 술이 대조되어 나오잖아요. 이거는 섞인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기에 취하지 말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깨끗한 말에 취하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어리석은 자를 얼간이라고 그래요. 얼이 갔다. 라는 뜻이에요. 진짜 그 말이라니까요. 얼이 간 사람을 얼간이라고 그래요. 그걸 성경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짐승이라고 그래요. 짐승. 
베드로후서 2장 12절 보세요.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여기서 이성 없는 이게 알 로고스 죠엔이에요. 로고스가 없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 이게 이성 없는 짐승이에요.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걸 모르니까 훼방한다고 그래요. 블라스페미어가 말을 깨다. 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알지 못하니까 말을 깨는 거예요. 어떻게? 율법으로 깨는 거예요. 결국 어디로 간다고 그래요. 멸망 가운데서 멸망으로 간다고 그래요. 유다서 1장 10절 보세요.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말을 깨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이것도 알 로고스 죠엔이에요.)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로고스가 없이 말이 없이 말씀이 없이 살아 있다. 라고 우기는. 그들은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본능으로 아는 그게 뭐에요. 선악 구조 속에서의 율법이지 뭐에요. 두 마음. 그들은 본능으로 아는 그걸로 망한다. 얼간이들. 어리석은 자들. 자 이게 겉옷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결국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 속옷만 갖고 있는 그들이 훨씬 깨끗해 보이고, 정의롭게 보이고, 투명해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착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보여요. 그들은. 진짜 하나크, 에녹들은 안 보여요. 그렇게 안 산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를 들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못 봐요. 그래서 그들이 아인, 없어지더라. 그런 거예요. 그러면 그 옷은 겉옷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다음 주에. to be continue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이렇게 속옷을 겉옷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게 진짜 수치를 가리는 것인데, 엉뚱하게 선악구조 속에서의 수치만을 가리느라 여전히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너스레를 떠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겉옷이 함께 넘겨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어떤 이가 여러분에게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속옷을 달라. 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시겠습니까? 변태죠? 그건. 당신 속옷을 나에게 주세요. 그러면 그건 변태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를 불쌍히 여겨서 겉옷까지 함께 주라고 그러세요. 주님께서 지금 그러한 종류의 변태들조차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다른 항목들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려면 오늘 본문도 그렇게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어떤 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행하고 어떤 거는 에이 어떻게 그래, 그러고 타협하고 그렇게 읽는 겁니까? 성경이.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그 속옷 벗어서 겉옷까지 함께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러면 적어도 성경이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닐 거예요. 그죠?

 

이 구절을 여는 키는 헬라어 원문에 맨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델로와 크리노라는 단어에요. 델로는 결정하다. 선택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고, 크리노는 구별하다. 분리하다. 율법으로 판단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걸 너를 송사하여~ 이렇게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그 어구를 원문 그대로 풀어서 번역을 하면 무슨 고소했다. 라는 이런 말이 아니라 너를 율법으로 판단해서 그런 사람으로 결정한 사람이~ 이런 뜻이에요. 너를 그렇게 율법으로 판단하여 너를 그렇게 율법의 사람으로 판단한 사람, 결정한 사람이 이런 뜻이에요. 그 사람이 너에게 속옷을 요구할 것이라는 거죠? 이런 말이에요. 율법주의에 묶여 있는 어떤 사람이 나도 그런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왜? 그 사람들 눈에는 그것밖에 안 보이거든요. 그것밖에 몰라요. 그 사람들은요. 나도 그런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나에게 속옷을 넘겨달라고 요구할 때 그가 요구하는 것도 주되 겉옷을 함께 주어야 한다. 이런 말이에요. 그가 요구하는 것은 변태들이나 요구하는 거니까. 아이 그거 말고 내가 다른 거 줄께. 이렇게 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가 요구하는 것도 주고, 겉옷도 함께 주어라. 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제가 로마서 강해 때 의의 병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예로 들어서 겉옷과 속옷의 관한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해드렸는데, 그걸 함께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속옷은 율법이고, 겉옷은 그 율법의 진의인 진리다. 라고 설명을 해 드렸죠? 오늘은 제가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예를 들어서 그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를 좀 더 쉽게 정리를 해 드리고 다음 주에 완결해 드릴게요.

 

오늘 본문에 쓰인 속옷이라는 단어가 키톤이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를 헬라어 사전에서 찾으면 거기에 히브리여 3081번에서 유래라고 되어 있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스트롱 사전은 번호가 똑같아요. 그러니까 그러면 반드시 히브리어 사전을 펴서 그 3081을 찾아 봐야 되요. 왜? 헬라어는 히브리어를 어원으로 하여 번역이 됐거든요. 그 히브리어 사전 스트롱 코드 3801번을 찾으면 케토네트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 단어는 가리우다. 옷을 입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요. 그리고 겉옷이라는 뜻도 있어요. 속옷이 아니라.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속옷과 겉옷의 구별은 사실 별 의미가 없어요. 그냥 그걸 겉옷이라고 썼다고 속옷이라고도 쓰고 반대로 쓰기도 하고 그래요. 그냥 둘 다 옷이에요. 옷.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운 것을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는 것. 이런 거예요. 그걸 안에 입으면 속옷이고, 겉에 입으면 겉옷이 되는 거예요. 그 케토네트 라는 단어를 추적을 해서 올라가요. 추적을 해서 올라가면 케템으로 까지 이어지는데 그 단어가 금입니다. 금. 그 금이라는 단어는 기름이라는 단어와 자하브라는 금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케템이라는 단어도 기름이라는 단어와 항상 혼용하여 쓰여져요. 그래서 금을 씌우다. 라는 말은 기름을 바르다. 라는 말과 같은 말로 쓴단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요. 기름과 금하면 얼른 생각나는 곳이 성전이죠? 그죠? 성전의 기명이 조각 목으로 만들어졌다. 라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익히 아실 거죠. 그 조각 목이라는 건, 가시나무에요. 가시나무는 예로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나무입니다. 심지어 가시까지 있어요. 얘는 뗄감으로도 적당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냥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을 하나님이 그걸로 만들으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에 모형을 모형인 성전을 굳이 그런 쓸모없는 나무로 만들라고 하신 건, 바로 우리의 모습,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완성될 거잖아요. 바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다 걸 보여주시고자 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조각 목을 뭘로 싸라고 그러세요. 성전의 모든 기명은 금으로 싼단 말이에요. 금을 펴서. 성전의 모든 기명은 금으로 싸고 성체를 만들어요. 성체. 애들보고 성 그리라고 그리면 이렇게, 이렇게 요철처럼 그리죠? 그게 성체잖아요. 그죠? 그 성체는 거룩하다. 구별되다. 깨끗하다. 라는 의미를 가져요. 그래서 모든 성전의 기명들은 다 성체를 만들어요. 떡 상에도 성체가 있고, 번제단에도 성체가 있고, 다 성체가 있어요. 거룩하다. 라는 거예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수치스러운 조각 목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덮여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둔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의 가치는 조각 목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수치를 둘러 싼 금에 있는 거예요. 그 금은 곧 기름이고, 기름은 곧 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결론은 수치스러운 조각 목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덧입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자 이 이야기를 토대로 오늘 본문을 설명해 드릴 거예요. 조각 목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금으로 말씀으로 기름으로 덧입혀져서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조각 목이 금을 덧입는 게 옷 이야기란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는 용도로 사용되는 게 케토네트, 옷이에요. 베게드, 뭐 겉옷, 케토네트, 속옷 그러는데 사실 그건 구별 안 해도 되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굳이 겉옷과 속옷으로 나누더라는 거죠. 인간의 생래적 성향은 항상 모든 걸 둘로 나누어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거예요. 왜? 인간들의 원래 마음이 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항상 인간은 뭘 봐도 둘로 판단하고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의 수를 2로 써요. 2, 1은 하나님의 수, 2는 인간의 수, 3은 하늘의 수, 그래서 삼층 천인 거죠. 4는 땅의 수에요. 그래서 그런데 진리는요 항상 나뉘어져 있는 걸 하나로 모으는 성향을 갖고 있죠? 그래서 결국은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것으로 완성해 내는 거예요. 진리는 항상.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죠? 그죠? 그렇다면 아담들이 겉옷과 속옷으로 나누어 놓은 걸 우리는 하나로 볼 수 있어야 되요. 그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창세기 3장이죠? 옷 이야기가 처음 나오니까. 

창세기 3장 20절 보세요.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 둘은 합쳐서 사람이에요. 아담, 그죠? 아담과 하와는 아담이에요. 사람이 선악과 따먹고 소위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그들 눈에 보인 게 뭐였어요? 제일 먼저 본 게. 자기들의 벌거벗음이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보인 게. 그걸 우리는 죄라고 그러죠. 그래서 그걸 가리는 게 구원, 뭐 그걸 또 유식한 말로 뭐 성화 뭐 이렇게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요. 그건 그 벌거벗음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입고 있던 어떤 것이 없어져서 발생한 벌거벗음이 아니라 원래 벌거벗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 원래 벌거벗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야단친 적 있나요? 너희들 왜 이렇게 수치스럽게 하고 있어? 빨리 옷 좀 입어~ 쯧쯧쯧 거리면서 자 저것들 언제 철들어서 저거 옷을 해 입나, 이걸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의 눈에는 그게 수치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놓아두었다니까요. 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니까요. 하나님이 무슨 관음증 환자에요? 벌거벗겨 놓고 보시기에 참 좋다 이러게. 그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니까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율법 속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선한 그것을 야 이거 뭔가 부족해, 이거 뭔가 부끄러워, 뭔가 수치스러워, 이렇게 판단을 하더라는 거죠. 인간이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자리를 타고 넘어간 거죠.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당신이 만들어 놓고 참 보기 좋다. 아 완벽해. 그랬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자마자 자기들을 보더니 아냐 뭔가 부족해, 부끄러워, 수치스러워 그랬단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은 게 죄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걸, 지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부정하며 아냐 이건 부족해! 내가 봐도 이건 수치스러워 하는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니까요. 교회가. 여러분 피조물이 벌거벗은 거, 우리들이 이야기할 때 수치스럽다. 라고 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왜? 그 분이 전능자거든요. 그 분은 만드신 분이에요. 우리를. 그런데 그 분 앞에 문제가 될 게 뭐가 있냐고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인간들이 규정하고 상정해 놓은 도덕적 윤리적 개념의 벌거벗음, 도덕적 윤리적 개념의 죄라는 것에는 사실 관심이 없으세요. 거기에는 아무 관심 없다니까요. 그냥 흙은 흙으로 돌아가면 되요. 나는 그 안에 있는 내 영, 내가 부은 그거 찾겠다는 거예요. 흙이 흙의 행사를 하는데 하나님이 시비 걸게 뭐 있냐고요. 그냥 걔네들을 흙으로 돌리면 된다니까요. 인간들이 그걸 모르고 자기 들이 마치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걸로 생각하니까 그 하나님이 나의 행위를 굉장히 가치 있게 생각하여 그걸 근거로 뭐라고 상 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흙은 흙으로 가! 그랬다니까요. 하나님이. 나는 그 거에 그 거에 관심 없어. 나는 내 것 찾을 거야~ 내가 불어 넣은 그 영, 그 진리, 그 말 찾을 거야~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들이 규정하고 정리하고 합의해 놓은 그걸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옳다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건 다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치 있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옳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중에 몇 개를 골라 이거는 옳죠? 내 놓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죄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죄는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말하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그런 것과는 다르다니까요. 하나님은 벌거벗겨 놓고 그건 나에게 아무 문제 안 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율법주의에 딱 빠지자마자 이게 왜 문제가 안 된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스스로 가리기 시작했는데 인간들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완벽하게 가리는가를 가리켜 santification 이라 부른단 말이에요. 그걸 성화라고 한다니까요. 그게 옳아요? 여러분 생각을 좀 하세요. 그게 옳습니까? 하나님이 그 찢어버렸다니까요. 잘 들어 보세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이라는 두 마음을 가지게 되자 이건 하나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준다. 그러는 거예요. 새 마음 준다. 그러는 거죠. 두 마음이 되자 하나님도 문제 삼지 않으시는 자신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워졌어요. 그건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들이 부정하고 무시해 버린 거죠. 그걸 성경이 휘브리스 라는 단어로 표시해요. 그걸 교만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 그 뜻은 자기 자리 이탈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할 때 그걸 휘브리스라고 그래요. 그걸 교만이라고 한다니까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바로 그거에요. 왜 네들이 네 자리를 떠나느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건 인간들의 수치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부끄러운 모습,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네들이 네들을 용서해야 되.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네들이 네들을 벌주고 그래~ 그거라니까요. 차치하고 그렇게 인간들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자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말은 자기들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이 마음에 안 찼다는 말과도 같은 거죠. 뭘 이 따위로 만들어 놨어 이거 아니에요. 네가 거기다가 화룡점정의 점을 찍어야지~ 이거죠? 그래서 치마 만들어 해 입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완벽한 거지. 부끄러움도 가리고 그죠? 그런데 그 화룡점정의 행위가 뭐였어요?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은 거였어요. 그런데 그건 정확히 말해서 옷이 아니라 띠에요. 띠. 성경에서 띠는 항상 진리를 상징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의 허리 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전도하러 갈 때도 항상 띠를 띠고 가라고 그러죠. 그리고 유월절 나갈 때도 띠를 띠라고 그런단 말이죠. 진리의 띠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게 뭔가 부족해~ 그래서 화룡점정의 점을 자기들이 확 찍어 버리고 이게 진리야~ 라고 한 거예요. 율법, 이게 진리야~ 그 뜻이에요. 띠. 그런데 그 옷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들었다. 그래요. 무화과는 씨도 없는 것이 열매인 척 하는 위선의 나무에요. 상징적이죠. 그래서 항상 무화과나무만 말라비틀어지는 거예요. 씨도 없는 게 저 열매인 척 하네. 꽃이. 그건 수술머리라고 그랬죠? 사각사각 씹히는 거. 그렇게 잎사귀로 만든 치마, 그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란 말이에요. 진리도 아닌 것이 진리인 척 하는 게 뭐죠? 그 인물이 아닌데 그 인물인 척 뭐에요? 연기자죠? 그 연기자를 뭐라고 그래요. 휘포크리테스, 외식하는 자라고 그래요. 그걸. 외식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건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근사하게 흉내 내는 자,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속을 알거든요. 너 그거 아닌데, 왜 흉내 내고 있어~ 이게 외식이란 말이에요. 휘포크리테스. 그게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부끄러움을 가린 자들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수치스러운 모습이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서 인정하는 걸, 주님은 기뻐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한 일을 하나하나 계수해서 그걸로 개털모자부터 시작해서 금 면류관 까지 등급을 나누시는 분이 아니라니까요. 이 상급을 얼마나 들 원하는지 남가주에서도 이 상급 없다고 그랬더니 왕창 나갔어. 그래 놓고 상급 없다고 그랬다고 말이야~저한테. 살려 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슨 상을 받겠다고. 도대체가 말이죠. 그렇게 아무리 부끄러운 모습, 수치스러운 모습, 벌거벗은 모습이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제가 이렇게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인정하면 하나님이 그걸 덮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데 지들이 얼기설기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그 풀은 곧 마르거든요 그걸로 띠 해 입고 와서 그 띠가 뭐에요? 그 허리띠 그 한다고 부끄러움이 가려져요.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가면 꼭 허리띠 하나 해 놓고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거기서 나온 거라고요. 띠를 열두 개씩 한다고 꼭. 그 사람들도 어디서 배웠는지. 인간들이, 인간들이 그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그걸 부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조각 목으로 서지 못하면 하늘 존재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아담들의 수고, 그 무화과나무 띠를 찢어버리셔야 되요. 왜요? 살려내기 위해서.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옷은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찢어져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옷을 어떤 방법으로 찢으시는가 하면 그 옷 위에 덧입히시는 방법으로 찢으세요. 이게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느냐~ 완성하러 왔다. 우리 거기 공부했잖아요. 그 얘기랑 똑같은 얘기에요. 창세기의 이 이야기를 바울서신과 연결하면 바로 그 결론이 나와요. 덧입혀서 찢어버리세요. 없애버리신단 말이죠. 그건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어째든 하나님께서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은 아담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는데 그 옷이 가죽옷이죠? 그 단어가 오르케터네트에요. 오르는 성막을 덮는 가죽을 이야기해요. 성막을 덮는 가죽. 그러니까 성전을 지어 놓고 싸 가죽으로 덮잖아요. 붉은 색 가죽으로 덮잖아요. 그게 오르에요. 성전을 하나님이 아들의 가죽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제물의 가죽. 무죄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가죽, 아들의 가죽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예수의 가죽. 아담은 바로 그 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그 진리의 띠, 그 가죽 그걸 옷으로 입어야 사는 거예요. 그걸 모형으로 해서 성막과 성전을 주신 거예요. 그거 알아먹으라고요. 그래서 조각 목에다가 금 싸고, 뭐 기름칠하고 피 흘리게 하고, 다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거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담들이 그 생래적 성향은 두 마음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성전을 주자마자 그 성전에서 뭐 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만들고 있어요. 거기서. 야~ 그렇게 하면은 안 되는 거야~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의 그 무죄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내가 준비한 제물의 그 은혜로 가려야 되는 거야~ 이걸 알아먹으라고 그 무화과나무 잎사귀 그거 만들어서 네들 스스로 수치 가리는 그거 하지 마. 라고 성전을 줬더니 그 안에서 희생 제사 드리고 율법 지키면서 그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를 더 열심히 만들고 있더라는 것이죠. 인간들이. 아담들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희생 제사와 율법 준수에 올인을 했죠? 그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할 거라고 믿었잖아요. 이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실 거야~ 이게 우리가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리는 유일한 길이야~ 라고 생각하고 그거 한 거 아니에요. 그게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 만드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라는 걸 아담들이 몰라요. 그래서 그걸 부정하시는 예수님을 때려죽인 거예요.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가를 교훈하려 하시는데, 아담들은 그 성전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 가질까를 궁리하더라는 거죠.

 

잘 생각해 보세요. 옷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옷을 율법으로 곡해할 때, 율법으로 곡해할 때 그 옷이 속옷이 되는 거고, 그걸 진리로 깨달을 때 그 옷이 겉옷이 되는 거예요. 둘 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거지만, 속옷은 가렸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에요. 요즘은 무슨 속옷 입고 돌아다니는 그런 미친 사람이 있어서 실감이 잘 안갈지 모르지만 무슨 속옷 패션이 다 있더라고, 속옷 입고 다니면 되요? 안 돼요? 아니 되요. 안 되죠. 그럴 입고 어딜 돌아다녀요. 그거 자체가 부끄러움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거 가려 놓고 자기들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이 그거라니까요. 그럼 반드시 겉옷 화 되어 나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가려줘야 된단 말이에요. 속옷을 겉옷으로 만들어야 수치가 완전히 물러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너를 판단하는 그 선악구조 속의 아담들이 너에게 그 율법을 넘겨달라고 요구하거든, 그것을 주면서 이걸 겉옷으로 설명해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진리는 반드시 어떤 그릇에 담아 줘야 되잖아요. 레마는 로고스에 담아 줘야 되고, 아마르는 다바르에 담아서 넘겨줘야 되기 때문에 진리는 호코스모스에 담아서 넘겨줘야 우리의 이 제한된 이성과 이 울타리에 갇혀있는 땅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우리가 알아먹을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걸 우리는 감지조차 못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들에 그 하나님을 우리들의 수준에 맞게 이렇게 제시해 준 거를 그게 진짜 하나님은 아닌데, 그렇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이해할 수 있게 제시해 준 걸 엘로힘이라고 그래요. 그 엘로힘도 그런데 진짜 그 분은 아니라니까. 그 분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도 없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그것도. 창세기 1장 1절이 엘로힘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진리를 율법으로 붙들고 있는 자들, 그 속옷만 입은 자들을 성경이 죽었다. 라고 표현을 하고 진리가 된 자들, 그걸 겉옷으로 깨달아 갖고 있는 자들을 성경이 산 자라고 그래요. 새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 사람을. 새 사람. 그런데 세상에서 볼 때에는 전자가 산 자처럼 보이고, 후자가 죽은 자로 보여요. 왜? 이 사람들이 세상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렸거든요. 죽은 자로 보여요. 그래서 세상이 못 본다니까요.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이 원래 죽기로 작정이 되어 이 땅에 온 의로운 형제 아벨을 죽여요. 그죠? 가인이 아벨을 죽여요. 가인은 아담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 먹은 아담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건 가인의 죄이기 이전에 죽기로 작정된 형제를 죽인 건, 가인의 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이었잖아요. 에베소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렇죠? 창세전에 이미 그건 하나님이 세운 언약이란 말이에요. 가인의 죄이기 전에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니에요. 그렇죠? 오늘 참 분위기가 안 좋은데, 전혀 못 알아듣고 있는 거 같은데,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 그 피의 공로로 원수를 살려내는 게 창세전 언약이죠? 하나님은 그 나라의 존재는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함을 창세전 언약에 담았던 거고, 그걸 가인과 아벨의 그림으로 보여 준 거란 말이에요. 지금.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거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가인이 자신이 한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 우리는 다 예수 죽인자들이라며요. 괜히 해본 소리에요. 그러면 가인이나 여러분이나 뭐가 다르냐고요. 그런데 왜 가인만 그렇게 욕하고 있냐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핵심이 아니라니까요. 그가 그걸 알아먹었는가. 못 알아먹었는가가 핵심이란 말이에요. 성경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바.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물으세요. 아마르마아싸, 네가 되게 한 것, 그게 뭔지 알아? 그러는 거예요. 네가 무엇을 되게 만들었니? 이게 아마르에요. 성경은 아마르 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주어가 없어요. 왜? 아마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이야기하는 거라 주어를 쓸 수 없었다니까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래서 동사부터 나와요. 항상 남성 단수로 아마르 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그 뒤에 뭐 엘로힘 이건 다 복수로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주어가 될 수 없다니까요. 주어는 항상 생략되어 있어요. 써 줘도 우리가 모르니까. 하나님이 아마르, 진리로 말씀하셨다. 마아싸, 네가 되게 만든 그게 뭐야? 가인에게 물은 거예요. 하나님이. 그게 뭐야? 알아? 라고 물으신 거예요. 알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죽였잖아요. 왜 죽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분이 날 살렸는지 알면 그게 뭐에요? 생명이에요. 그게 구원이잖아요. 마찬가지라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알면 그걸 알아야 구원이에요. 안 죽이면 안 된다니까요. 왜? 그는 이미 하벨, 죽은 자, 없음, 공허, 허무로 왔다고요. 죽으러 왔다니까요. 아벨이. 그래서 아담의 그 인자의 라인이 아벨이란 존재가 없어요. 의인이라면서요. 그런데 없다니까. 왜? 이 아벨은 죽어서 셋으로 옷으로 와야 완성이기 때문에 아벨이 없는 거란 말이에요. 당연히 죽어야 되요. 그런데 가인이 그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단 말이에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창세기 4장 9절 보세요.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9절부터 제가 히브리 원어에 맞게 직역을 해드릴게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형제 아벨이 무엇이냐? 그 아벨이 의미하는 바를 네가 알아? 아벨이 어디에 있니? 하나님이 물으신 거예요. 아벨이 뭐니? 이렇게 물으셨어요. 가인이 대답하죠.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죠? 히브리 원어가 그래요. 나는 모릅니다. 그래요. 죽여 놓고 시침 뚝 뗄라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그 아벨이 의미하는 바를 모릅니다. 그런단 말이에요. 가인이. 그러면서 내가 그걸 지켜야 합니까? 여기서 지키다.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솨마르인데 Keep 이에요. 그게 Keep.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라고 이야기할 때 이 단어를 옮겨다 쓴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켜 행하라. 라는 건 그 율법이 이야기한 걸 잘 지켜 이게 아니라 Keep 하라 라는 거예요. 마음에 간직하라. 그게 뭔지를 알아 네 마음에 새기라는 거지, 그걸 네 행위로 내 놓으라는 게 아니에요. 솨마르가 그 뜻이라니까요.. 그런데 가인에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그걸 Keep 해야 됩니까? 그게 내 의무입니까? 그러는 거예요. 솨마르, 내가 그걸 Keep 해야 되나요? 그 말씀으로 온 그걸 내가 깨달아 Keep 해야 됩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벨은 이 세상에 이 세상 가인들에게 뭔가를 메시지로 전달하러 말씀으로 온 예수의 모형이에요. 죽기 위해, 없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온 모형, 므낫세도 바로 그 뜻이라고 그랬죠. 제거하다. 없어져야 하는 거예요. 므낫세. 그래서 장자의 자리에서 그가 제거되는 거란 말이죠. 그 모형은 반드시 죽어서 사람들 마음속에 진리로 새겨져야 되요. 그래야 그 존재의 완성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아벨과 셋은 한 쌍이에요. 한 쌍. 우리가 그 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하여 진리로 깨달아 가져야 구원의 합당한 자가 되는 것처럼 그러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돌로 부수어 죽여 버리면 그게 부수어져 율법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깨달아 마음으로 가져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진리가 아닌 사람은 그게 불편해요. 내가 만든 치마가 더 나아 보여 죽이게 되요. 그러면 그걸 율법이라고 그런다니까요. 진리를 죽이는 거를. 하나님께서 다시 가인에게 물으세요. 네가 한 게 뭐니? 네가 되게 한, 아싸 동사가 써 있어요. 네가 되게 한 그게 뭐야? 반복하여 물으시는데 여전히 몰라요. 율법주의 하에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열심과 수고로 만들어낸 그 율법의 치마를 입고 그 진리를 부수는 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자기들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 보니까 하나님이 한 게 이게 공의가 아닌 거 같아~ 불공평해,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반드시 죽이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인이 그렇게 뻔뻔스러운 거예요. 그걸 왜 내가 내 안에 간직해야 됩니까? 내가 걔를 왜 Keep, 지켜야 합니까? 왜 나 보고 그 자를 지켜 간직하라 합니까? 그거 마땅히 부수어져야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내가 제사 열심히 드렸잖아요. 왜 내 제사 안 받고 그것만 받아요. 하나님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인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가치 없는 걸 내가 왜 지켜야 합니까? 내 제사가 최고인데, 이거 아니에요. 가인이. 그게 바로 선악과를 입에 문 율법주의 하에 아담의 실존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이 그 모습으로 나오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율법주의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 거라니까요. 반면에 예 제가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거예요. 저는 생래적으로 두 마음으로 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무조건 다 두 마음이에요. 그건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게 구원이고 그게 생명의 창조에요. 그것이. 자 그렇게 저는 두 마음을 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율법으로 진리를 부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내가 옳은 것처럼 보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뭔가 불공평하고 공의롭지 못한 것처럼 보이니까. 그게 은혜이고 진리잖아요. 그게 용서잖아요. 그런데 그건 아닌 거야~ 왜? 내가 한 성과대로 상주고 벌줘야 되는 게 우리 선악구조 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의 정의잖아요. 그것이. 그래서 나는 그 두 마음을 진리를 부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저를 위해, 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대제사장이 제물이 되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은 내가 두 마음으로 율법으로 진리인 그 대제사장을 때려죽일 때 썼던 바로 그 율법이 되어서 죽으셨네요. 그래서 저는 이제 그 진리를 때려죽이는 그 악, 그 율법에서 해방된 거네요. 이걸 성도라고 그래요.

 

여러분이 이걸 이해하셔야 되요. 이걸 심비라고 한다니까요. 예수님은 진리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 분은 진리십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진리를 절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 땅에 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진리를 당연히 부수어 버려야 되요. 그 불빛을 꺼버려야 된다니까요. 그런 율법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진리를 때려 부순 자기를 때려 부순 율법이 되어서 죽는대요. 그게 성경의 진술이잖아요.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를 때려죽인 자들이 자기들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때 그들은 그 율법을 죽인 자가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 율법으로 진리, 하나님을 때려죽인 그 죄 이것이 되어서 왜? 나는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이 되어서 죽었다. 라는 걸 인정하면 거기서는 내 육이 죽는 거고 왜? 나는 불가능한 자입니다. 라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때에 그 율법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 때려죽인 율법이 되어서 죽은 예수를 인정하게 되는 것임으로 나에게는 그 악이 없어져 버리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구원의 심비라니까요. 이게 안 되면 여러분은 성경 골 백번 읽어봐야 헛 읽는 거예요. 제가 예수를 죽여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을 함축하여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를 진리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에요. 왜? 생래적으로 두 마음을 갖고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입에 문채로 나오니까. 그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본능이란 말이에요. 본능. 운명처럼 갖고 태어나는 본능.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그런 나를 위해 죽음을 자처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설 때 나는 벌거벗은 자 맞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설 때에 우리는 율법이 되어 죽으신 그 율법의 예수를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마음 편히 보내드릴 수 있는 거라니까요. 맞아요. 죽으러 오셨으니까. 마리아처럼 향유 갖고 가서 빨리 뿌려야지요. 빨리 가세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이렇게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율법이 되어 죽으신 예수를 계속 섬김의 대상으로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죽여야 거기에서 나가 부인되고 죽는 거예요. 그게 진짜 예수를 섬기는 거라니까요. 그리스도예수를. 그러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래의 존재가 아닌 위의 존재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는 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확 불로 멸할 때 안 보이는 자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들이.

 

그러니까 예수를 죽인 이 세상 가인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져서 각기 다른 옷을 입게 되는데, 그 옷이 율법주의인 속옷과 은혜의 진리의 겉옷이에요. 그래서 그 옷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니까요. 어떤 옷 입었니? 그리스도, 기름, 말씀의 옷 입었어? 너는 양. 너는 무화과나무 치마 입었네. 염소. 그걸 벌거벗었다. 그런다니까요. 너 왜 예복 안 입었어? 이렇게. 옷을 안 입었다는 건 벌거벗었다. 라는 거예요. 나중에 제가 다음 주에 계시록에서 찾아 드릴게요. 네네 벌거벗지 않도록 조심해 그때 전부 겉옷이에요. 옷 잘 지켜! 겉옷이랍니다. 속옷만 입은 자들, 가인처럼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율법주의자들은 사망에 이르게 되요. 그 율법이 바로 수의에요. 그들의 수의. 열심히 자기들 수의 만들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 옷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달아서 그것으로 진짜 수치를 가리게 되는 겉옷의 사람들이 생명의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주신 게 셋이라고 그랬죠? 그 셋, 셋이라는 이름이 뭐라고 그랬어요? 수트, 옷이에요. 제대로 차려 입은 정장이 셋트에요. 셋, 옷이에요. 그게.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쉽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가죽을 벗겨서 친히 가리시는 가죽옷, 겉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게 되면 셋, 수트가 되는 거고, 진짜 옷 입은 사람이 되는 거고, 선악체계 하에서 자기의 제사를 지키겠다고 끝까지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 그 띠를 고집하면 벌거벗은 가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의 라인은 곧바로 수트, 셋트로 이어지는 거예요. 아벨을 거치지 않아요. 가인 거치지 않아요. 바로. 창세기 5장 1절 보세요.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이거 누가복음 3장의 그 족보가 이제 시작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3장도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전부 소유격이기 때문에. 그런데 거꾸로 해석해 놔가지고 다시 뒤로부터 내려오느라고 힘들었잖아요.)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게 히필 동사에요. 나가 히필 동사로 쓰이면 나아지게 하다. 말씀으로 낳다. 라는 말이라고 했어요. 칼동사로 쓰이면 그냥 부정모혈로 그렇게 나는 거예요. 이렇게 그냥 생물학적으로 낳는 거, 부정모혈로 낳는 거. 히필 동사란 말이죠. 그러니까 아담이 말씀으로 진리로 낳은 아들은 셋 아들 하나라는 거예요. 셋, 수트, 옷, 아벨은 땅에 와서 가인들에게 맞아 죽어야할 예수의 모형이고, 그 아벨이 셋으로, 옷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에서 그 그리스도로 와야 성령, 진리로 와야 완성이에요. 그래서 짝이잖아요. 그리스도예수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예수라고 한단 말이에요. 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단 한군데도 없어요. 다 그리스도의 예수에요. 예수는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으로 쓴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예수란 말이에요. 셋의 아벨이란 말이란 말이에요. 그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의 속한 존재에요. 그래서 그 예수를 섬기면 안 돼요. 그리스도예수를 깨달아 진리로 붙들어야 되요. 그렇다면 벌거벗은 가인과 아벨의 피로 옷 입은 셋의 라인이 어떻게 대조되는지 한번 보세요. 창세기 4장 16절 보세요.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 여호와 앞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판임에요. 판임 여호바 판임은 나타난 말씀, 감추어진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났을 때 판임이라고 한다고 그랬죠?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요? 못 보죠? 그 때 아 하나님이 나타난 그 말씀을 접했다. 깨달았다. 이럴 때 하나님의 얼굴, 판임을 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판임 여호바를 떠났다. 말씀을 떠났다. 로 이해하는 거예요. 물론 가인이 하나님을 떠났어요. 떠났는데 그걸 갖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진리로 행간으로 이야기한단 이야기에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떠났다니까요. 떠났는데, 성경은 그걸 문자로 진리인 성도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그 말을 쓰고 있다. 라는 거예요. 여기서. 그래서 예호아 판임이에요. 자 말씀을 떠나요. 어디로? 동편, 동쪽 케뎀은 반대쪽이란 뜻이에요. 동서남북의 동이 아니라. 서는 바다, 남은 사막, 광야, 물이 없는 거예요. 네게브에요. 북은 어둠, 죄,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봐라 어디 갈 데 있니? 그 말은 넷 중에 하나 골라~ 내가 다 줄게. 이게 아니라. 동서남북을 봐, 동은 반대쪽, 하나님과 반대쪽, 서는 바다, 저주의 바다, 남은 물이 없는 광야, 북은 죄, 어둠, 이 땅에서 갈 데 어디 있니? 네가 서 있는 곳,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거기가 어디였어요? 벧엘이었잖아요.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골라 하나 줄게.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동쪽으로 갔다는 건 뭐에요? 여호와 판임을 떠나 그 반대편에 서더라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니까 무화과나무 치마가 이게 왔다. 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여호와 말씀, 진리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니까요. 우리 인간들의 자존심을 무시하지 마.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반대편에 섰어요. 그런데 그 땅 이름이 놋이죠? 유리방황이에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넌 유리방황해야 돼~ 라고 저주를 내리셨어요. 그래서 그가 유리방황이란 땅으로 가게 된 거예요. 아니 그가 그리로 가게 된 게 아니라 그는 거기 가서 정착하러 갔어요. 하나님은 유리방황해야 돼~ 라고 얘기했는데 그는 어디 가서 정착을 했는데 그 땅 이름이 놋이네. 유리방황이에요. 거기가. 거기서 뭐합니까? 성 쌓습니다. 성전을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쌓는 율법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에서? 여호와 판임 여호바의 반대쪽에서. 그런데 그렇게 인간들이 자기들의 열심, 자기들의 능력, 자기들의 지혜를 동원하여, 야 우리 유리방황하지 말고 여기서 우리 정착하자. 우리 안전하게 우리가 여기서 안주하자. 라는 그 행위가 유리방황이다. 를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가인이 에덴동편에서 이 기쁨의 동산이잖아요. 에덴이. 거기에서 그 반대쪽에서 이제는 제사 안 지내야지 그러고 그 제사를 멈췄을까요? 그 제사 지키려고 동생도 때려 죽였는데 어떻게 그 제사를 버립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가인은 예수님 때려죽인 이스라엘의 모형이라고 그랬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그 제사 버렸습니까? 안 버렸어요. 동편에 가서 더 열심히 드렸다니까요. 내 제사 지키려고. 그래서 그 라인에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오는 거예요. 율법주의가 오는 거예요. 유대주의가 오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긴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그래요. 자식을 낳자마자 에녹, 하나크 라고 짓는데 그게 봉헌하다. 에요. 드리다. 누구에게? 하나님께. 그리고 성을 쌓고 그 성도 드리다. 하나님께. 그런데 결국은 내가 이렇게 한 걸 하나님은 가치 있게 받아주세요. 라고 한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 누구에게 바친 거냐고. 그게. 나에게 바친 거란 말이에요. 그게 율법주의자들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내 배를 위해 하는 모든 행위, 겉으로는 아닌 거 같죠? 다 손해 보는 것 같아~ 모든 걸 다 털어서 하나님께 드린 것 같은데 결국은 자기가 그 기쁨, 성취감, 가치, 챙겨 갖는다고요. 칭찬, 평판 그게 감춰진 악이라니까요. 여러분.

 

자 거기에서 그 성에서, 그 에녹 성에서 가인이 꾀한 게 뭐죠? 유리방황을 면하는 거 아니에요. 나의 유리방황, 내 이 죄를 내 스스로 성을 쌓아 가리겠다는 거예요. 내 스스로 나의 안전을 추구하겠다는 거는. 이게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라니까요. 이것이. 성경이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인간은 지옥에 가기 싫어서, 이 부끄러움 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그냥가면 지옥 갈 것 같거든요. 선악구조 하에서의 자기들 생각에. 그래서 열심히 율법을 지켜내죠. 그리고는 그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우겨요.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겨요. 사실은 무서워서 하는 거면서 지옥 안 가려고. 혹시 지옥 보낼까봐 하는 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니까요. 이스라엘이 유리방황이 하기 싫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짓고 그 둘레에 성을 쌓았어요. 지긋지긋했거든요. 광야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느라고. 성을 쌓았어요.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 지냈어요.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수시로 너희가 나를 버렸다. 라고 말씀하세요.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 안 드렸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게 유리방황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거기가 놋 땅이야~ 네들이 정착하여 성 쌓은 거기가 유리방황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게. 거기가 구천을 떠도는 구천이야~ 이렇게 가인의 라인은 스스로 성을 쌓아서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로 유리방황을 모면하려는 자들이에요. 그들은 이 땅에 성을 쌓고 그 성의 주인이 되죠? 땅의 왕이 되는 거예요. 땅의 왕. 그 왕들은 전부 멸절될 왕들이지만요. 그런데 그 대척점에 다른 라인이 있어요. 그게 셋의 라인이죠. 셋의 자손 중에도 똑같이 에녹이 있어요. 창세기 5장 21절 보세요.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가 뭐죠?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죠?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는 날, 노아의 홍수가 시작 되요. 계산해 보면. 그러면 그가 죽고 심판이 임한다는 건, 심판과 함께 항상 같이 오는 건 뭐에요? 구원. 그러면 그가 죽고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자가 누구에요? 예수. 므두셀라는 바로 그 예수를 모형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예수를 낳는 자가 누구냐고? 성도의 모형이란 말이에요. 에녹이. 그러면 그 에녹이 어떤 삶을 사는지 보세요.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부럽죠?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이 데리고 올라갔대요. 23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이러합니다. 하라크하노크에트엘로힘아인킬라카흐에트엘로힘이에요. 우리말로 직역하면 에녹이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니 그가 엘로힘으로 취해져 없음이 되었다. 에요. 많이 다르죠? 하나님이 에녹의 손을 잡고 늘 동행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너는 죽음보지 말고 그냥 가자 이렇게 올라갔다는 뜻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 안,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 연합이에요. 엘로힘으로 안으로 들어가 엘로힘으로 취해지자, 그가 세상이라는 말은 아예 없어요. 아인이라는 게 없어지다. 라는 뜻이에요. 그가 없음이 되더라. 이 뜻이에요. 에녹이. 그러니까 봐요. 여러분 이거는 실제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인간들이 이런 걸 신비롭게 얘기해 주면 그걸 믿어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냥 너무 너무 기특하게 착하게 잘 사니까 데리고 올라가 버렸대~ 이렇게 얘기해 주면 그걸 믿는다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 주면 자기가 진리가 되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뭐야~ 이렇게 안 믿어요. 오히려. 그러니까 간단해요. 인간들이 감정의 갖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면 교회는 부흥하게 돼 있어요. 인간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감정 안에 갖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 줘서 탁탁 쳐주면 다 좋아해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되게 신기해한다니까요. 이게 사실이면 이런 일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만 한번 있고 말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누구냐고요? 어디 본적 있어요? 그런데 무슨 어떻게 동행을 하냐고 추측하지 말아요. 내 마음 속에 지금 그분과 늘 함께 하는 게 동행 아닐까요? 거짓말. 무슨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하고 맨날 동행 하냐고요? 마귀와 동행하면 했지. 그런데도 그냥 막연히 자기가 이렇게 그려놓고 그게 그걸 거야~ 이러고 있는 거죠. 그거 예수 믿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렇게 가인처럼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며 스스로 죽는 것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거고,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세상의 율법주의와 무관하게 사는 걸 죽었다고 그래요. 성도는 그 죽음을 죽는 거예요. 세상이 그를 안 봐요. 없는 자 취급해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예수를 죽이는 행위에 의해 지옥 가게 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지옥에 가는 거예요. 이 땅이 바로 그 지옥의 작은 모형이라니까요.

 

보세요. 모든 인간이 자기의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어요. 그런데 그건 좋은 거죠?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착하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이려고 애쓰고, 건강한 사회, 우리가 구현하여 야 이 땅에서 오래오래 잘 살자. 이게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인데 갈수록 피가 튀기네. 갈수록 불편해져요. 사는 게. 그게 지옥이에요. 여러분.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나라라서 지옥의 모형을 땅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 하늘을 안 만들어 놓은 거예요. 상상도 할 수 없게. 하늘 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땅은 누를황인데 하늘이 왜 검을 현이냐고요? 그거 다 짝이거든요. 천자문이. 하나님이 검게 안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건 네들이 상상할 수도 없어~ 추측할 수도 없어~ 생각하지 마. 저기에 내가 만들어 놨어.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그 나라를 추측하면 고작 만들어내는 게 금으로 된 길, 다이아몬드로 만든 대문, 수정으로 된 변기, 그러니까 천국 갔다 왔다. 라는 놈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100%, 100% 아니면 정신분열증 환자던가. 자기가 막 열심히 머리 속에 그리면요. 그게 실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니 하나님이 하늘을 저렇게 텅 비게 놔두었다니까요. 이렇게 보면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거예요. 거기는. 왜? 내가 만든 진짜 하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텅 비워 놓은 걸, 지가 어떻게 갔다 오냐고. 이 육을 입고 못가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나 좋은 곳입니다. 진짜 자유가 있는 곳, 정말 기쁨이 있는 곳,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게 뭔지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완전한 자유, 완전한 기쁨. 성경이 우리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건 익히 아실 겁니다. 그 제사장들은 반드시 옷을 제대로 입어야죠. 그래서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복식의 약간 문제가 있어도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해요. 그런데 여러분이 엉뚱한 옷 입고 거기 들어가면 어떻게 되요? 들어가다가 죽어요. 못 들어갑니다. 그 겉옷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 이 땅에서. 출애굽기 28장 39절 보세요.


39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이게 예수님이 입었던 거예요. 금보다 비싼 거.)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 놓아 만들찌니라 (띠를 만들으래요.)
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아론은 제사장의 자손이에요. 그죠? 제사장의 아론의 아들들, 제사장의 자손들)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속옷, 띠 만들어야 되요.)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그런데 제사장 그 옷 위에 베게드 라는 겉옷을 입어야 되요. 그 겉옷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출애굽기 39장 41절
41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이라 

이게 베게드 거든요. 겉옷. 이 겉옷을 뭐라고 그래요?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옷이라고 그래요. 섬기기 위한 옷. 이 솨라트는 신약에서 말씀으로 섬기다. 라고 번역이 되어 나와요. 말씀으로 섬기기 위하여 입는 옷, 진리의 옷, 말씀의 옷, 거룩한 그리스도 기름의 옷, 이게 베게드, 겉옷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진리로 말씀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하늘의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가. 왜? 그분이 진리로 겉옷을 입고 왔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대제사장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분은 복식을 완벽하게 갖추고 왔다. 라고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복음으로 전할 때 우리는 베게드, 겉옷을 가진 자가 되는 거예요. 그 겉옷을 나누어 주는 걸 전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여인도 또 혈루 병 앓던 여인도 모두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던 거예요. 제가 로마서 때 설명해 드렸죠. 그게 다 겉옷이라는 단어거든요. 속옷 아니에요. 옷 술이라고 번역된 것도 겉옷이고, 옷 가도 겉옷이에요. 그냥. 겉옷. 겉옷을 만졌다. 겉옷을 만졌다. 라고 그런데 그 만졌다. 라는 그 단어도 그냥 이렇게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건드렸다가 아니라. 아교 알죠? 민어 부레로 만드는 거. 그거 붙으면 안 떨어지는 거. 아교로 딱 붙여버리다. 라는 뜻이에요. 겉옷과 그 병자들, 혈루 병이 뭐에요? 진리, 피를 생명을 담지 못해 땅에 흘리는 걸, 혈루 병이라고 그래요. 그건 부정함이죠. 죽음이에요. 그게. 그가 죽은 자가 겉옷의 진리의 딱 붙으니까. 연합이 되니까. 이게 에녹의 이야기에요. 엘로힘 안으로 들어가 엘로힘으로 그가 취해지자, 그가 없어지다. 세상에서 없어지다. 그러잖아요. 겉옷의 병자들의 손이 딱 붙으면 나아요. 그 단어가 예수님이 누구를 안수했다. 라고 성역이 나오잖아요. 안수를 했다. 가 예수님이 손을 뻗어 그에게 댔다가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예수님에게 갖다 댔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요. 안수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하고 싶으면 끌어다가 여기다 대는 거예요. 왜? 그 죄, 죄를 내가 갖고 가겠다. 이게 진짜 제물의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제사 때도 그 제물에게 내 죄를 얹어서 전가시킨다니까요. 그래 요즘 목사들이 머리에다 대 놓고 이렇게 안수하는 건 지 죄를 다 나눠주는 거예요. 뭘 알고 받으세요. 그 때에 이렇게 그 손을 갖다가 예수님 몸에 대었다. 짝 붙였다. 라는 거예요. 그게. 그 때 쓰는 단어에요. 그게요. 딱 붙여버리는 거예요. 겉옷에. 그렇게 구별되어 이제 사라지게 되는 에녹들이 막 나타난 거예요. 그게 겉옷이에요.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는 거죠. 겉옷을 가진 자들아 아직 겉옷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속옷을 입고 마치 자기들의 수치는 다 가려진 것처럼 너희들에게도 속옷을 내나봐 라고 요구할 때 그 속옷과 겉옷을 같이 줘. 왜냐면 모든 인간들은 다 속옷을 입고 태어나거든요. 죄를 입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처음에 반드시 속옷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속옷으로 겉옷을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요구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못 알아먹어서 그렇지. 달라고 그러면 같이 줘야 되는 거예요. 겉옷까지 같이 줘라. 진리는 우리의 말로 설명되어져야 되고 자연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율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성경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속옷과 겉옷을 함께 주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께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성경을 속옷으로 주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똑같은 성경을 갖고 주는 거예요. 이게 진리로 설명 안 되면 그냥 속옷이라니까요. 이거 해, 저거 하지 마. 이렇게. 그런데 이걸 겉옷과 함께 진리로 설명해 주는 걸, 속옷과 겉옷을 함께 주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선악과로 생명나무 실과를 설명하고, 악으로 선을 설명하며, 죄로 의를 설명하는 게 하나님의 진리 계시 방법이에요. 어떻게 그 하늘의 묵시를 이 땅에다가 어떻게 전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그래요.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은 이 땅에 의가 없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그래요. 하나님만 선하다. 그래요. 그러면 이 땅에 선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선도 없고, 의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선과 의를 설명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선과 의가 뭔지도 몰라. 그리고 이 땅에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뭘 갖고 선과 의를 설명하겠느냐고요. 이 땅에는 죄밖에 없다고 그래요. 그러면 죄 밖에 없는 곳에서 선과 의를 설명하려면 뭘로 설명해야 되냐고. 죄가 뭔지를 가르쳐 주면 그게 의라니까요. 그러면 의와 선을 가르쳐주기 위해 죄가 동원된 거라면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히 나쁩니까? 뭐 때문에 그렇게 파르르 떠는 거예요. 그게 뭔데. 자기는 더 더러우면서, 이걸 하나로 보지 못하면 여전히 두 마음이라니까요. 그게.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네가 판단 받은 대로 너도 판단 받을 거야. 그러는 거예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막 살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살려면 인간답게 살아야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가이사의 건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건 하나님에게. 왜? 자꾸 율법을 갖고 와서 이걸로 이게 이거 맞아요? 이게 하늘의 것 맞아요? 자꾸 그걸로 시비를 거니까. 동전 하나 갖고 와봐. 가이사의 모양과 글이 적혀 있었다고요. 주님이 그래요. 그걸 그대로 보이는 걸, 에이돈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안 물어 보세요. 이게 형상이라는 뜻이라고요. 에이콘이라고 해요. 그 형상이 의미하는 게 뭐니? 그 안에 그게 진짜 뭘 이야기하는 거니? 라고 물으세요. 그런데 그걸 갖고 온 사람들이 그 에이돈은요? 라고 껍데기를 보고 얘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주님이 그래 가이사의 건 가이사의 세상에서 필요한 거니까 줘~ 도덕, 윤리는 이 세상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필요한 거니까 해! 그러나 하나님 거 아니야~ 하나님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라니까. 하나님 거만 갖고 와. 이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건 하나님에게. 에요. 막 살으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무화과나무 잎사귀 그거에 멈춰 서서 이게 신앙생활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열매가 이거죠? 라고 하면 그게 죽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반드시 속옷과 함께 겉옷을 넘겨받아야 되요. 안 그러면 속옷에서 머물며 부끄러워 이를 갈게 된다니까요. 여러분 열심히 개미들 보면 저 개미 말고, 개미 얘기하면 자기 표적설교한가고 그럴까봐 아주, 겁나서. 개미들이 줄을 지어 열심히 일을 하죠? 그때 옆에서 대포를 쏘면 그 개미들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냥 갑니다. 개미는 그 포 소리를 못 들어요. 한계죠? 여러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들려요? 못 듣습니다. 그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있는데 못 듣는 거예요. 우리의 한계에. 저 묵시의 하나님, 우리는 감히 뭐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분. 그분이 당신의 나라와 당신을 설명하려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담을 귀와 눈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에 맞는 그 하나님을 제시해 주신다니까요. 그래놓고 그 정도를 깨달으면 네가 나와 벗이다. 라고 인정해 주는 거예요. 여겨 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수준의 그 하나님을 내 안에 담았을 때 네 안에 나 있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냐고요. 무소부지하시니까. 편재하시니까 그 요만큼 들어와 있나? 여기에. 그게 아니라 그분은 어떤 피조물 속에 담길 수 있는,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수준으로 주셨어요.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다 설명합니까? 그게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다 설명하느냐고요. 우리의 수준에 맞게 줬어요. 자 그 개미들에게 네들 조금 이따가 이제 대포알이 막 떨어지게 되면은 네네 큰일 나. 이걸 가르쳐주려면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것, 침을 뱉는다든지 뭐 이렇게. 흩어버리는 나뭇가지로 흩어준다든가 우리 둘째가 잘 하는 거. 그러면 개미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요. 이거 뭔가 위험 거 있구나. 이거. 그런데 그 개미들이 그 나뭇가지 피하는 것에만 몰두하여 이것만 어떻게 피하면 되겠지 하고 하면 진짜 대포알 날라 오면 죽는 거예요. 그걸 통하여 정말 무시무시한 어떤 게 있겠구나. 이걸 깨닫는 걸 성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준비한다니까요. 성도는.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어 뭔가를 깨달으라고 준 그 나뭇가지에만 묶여 있는 거예요. 율법에만. 곧 죽습니다. 그 개미는.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내 안의 진리로 영으로 말로 갖고 있지 못하면 성경이 그걸 어리석다. 그래요. 그 말은 얼이 섞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원래가. 얼, 뭐에요? 영, 이 내말이 혼탁하게 섞인 거를 술이라고도 해요. 누룩하고 발효시킨 거니까. 그러면 항상 진리의 말, 깨끗한 말과 그 술이 대조되어 나오잖아요. 이거는 섞인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기에 취하지 말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깨끗한 말에 취하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어리석은 자를 얼간이라고 그래요. 얼이 갔다. 라는 뜻이에요. 진짜 그 말이라니까요. 얼이 간 사람을 얼간이라고 그래요. 그걸 성경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짐승이라고 그래요. 짐승. 
베드로후서 2장 12절 보세요.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여기서 이성 없는 이게 알 로고스 죠엔이에요. 로고스가 없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 이게 이성 없는 짐승이에요.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걸 모르니까 훼방한다고 그래요. 블라스페미어가 말을 깨다. 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알지 못하니까 말을 깨는 거예요. 어떻게? 율법으로 깨는 거예요. 결국 어디로 간다고 그래요. 멸망 가운데서 멸망으로 간다고 그래요. 유다서 1장 10절 보세요.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말을 깨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이것도 알 로고스 죠엔이에요.)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로고스가 없이 말이 없이 말씀이 없이 살아 있다. 라고 우기는. 그들은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본능으로 아는 그게 뭐에요. 선악 구조 속에서의 율법이지 뭐에요. 두 마음. 그들은 본능으로 아는 그걸로 망한다. 얼간이들. 어리석은 자들. 자 이게 겉옷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결국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 속옷만 갖고 있는 그들이 훨씬 깨끗해 보이고, 정의롭게 보이고, 투명해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착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보여요. 그들은. 진짜 하나크, 에녹들은 안 보여요. 그렇게 안 산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를 들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못 봐요. 그래서 그들이 아인, 없어지더라. 그런 거예요. 그러면 그 옷은 겉옷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다음 주에. to be continue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이렇게 속옷을 겉옷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게 진짜 수치를 가리는 것인데, 엉뚱하게 선악구조 속에서의 수치만을 가리느라 여전히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너스레를 떠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겉옷이 함께 넘겨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