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27 겉옷을 잃은 대 제사장의 죽음 마54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18

산상수훈27 겉옷을 잃은 대 제사장의 죽음 마5:40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자 우리는 지난주에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꼭 겉옷까지 함께 넘겨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죽기 위해 이 땅에 온 그 형제,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가 한 일 즉,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그 의미를 올바로 알아 세트, 셋으로 옷 입으면 그게 바로 생명이고, 여전히 자기의 제사의 묶여서 에녹, 그게 봉헌하다. 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 에녹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면 그게 바로 유리방황이요 죽음이라는 걸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섬김이 원동력이 되어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섬김이 유일한 동력이 되어서 움직이는 그런 나라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동력은 백성들의 에너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섬김으로 움직여지는 나라가 그 나라란 말입니다.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 되는 나라죠.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 진리의 겉옷을 넘겨받아서 그 겉옷을 율법과 세상의 그 속옷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야 하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겉옷을 넘겨 줘~ 라는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건 겉옷을 가졌다는 말 아니에요. 우리가. 넘겨 줘~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그 겉옷은 어떠한 경로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 살펴봄으로 해서 우리가 겉옷을 넘겨줄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보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그러죠. 제사장이 겉옷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죠? 지성소에 들어갈 때, 겉옷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겉옷을 넘겨줬을 때 어떻게 됐어요? 죽음이 임하는 거란 말이에요. 미리 팁을 드리는 거죠. 자 우리에게 겉옷이라는 진리를 넘겨주고 가신 분이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예수에요. 그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떤 양반들이 제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랬다고 또 시비를 걸던데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참 나, 얘기를 좀 똑바로 듣고 얘기를 하던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죠. 당연히.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소리나 모양을 가지신 분이 아니잖아요. 그 분은 영이시니까. 그래서 예수라는 육신에 몸 안에 말씀으로 담겨서 이 땅에 오신 분이란 말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예수를 진리로 보지 못하는 자, 왜? 눈에 보이는 분으로 왔기 때문에 그 예수가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실체, 내용을 못 보는 자들에게는 그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예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니까요.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모르면. 제 얘기는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예수는 진리로 이해되어질 때, 그리스도예수가 되는 것이지 로고스로서의 예수로만 인식이 되면 그 자체는 부수는 돌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돌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건 부순다니까요. 그게 우리 위에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난다고 얘기하잖아요. 따라서 그 예수라는 이름은 실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당시 유대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어요. 우리 애들 이름이 죠슈아, 다니엘, 폴인데 학교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에요.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은 학교 가서 이렇게 부르면 열 명 중에 다섯 명은 돌아봐요. 그거보다 더 흔한 이름이었어요. 예수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이 그 이름을 빌어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던 예수라는 이름을 빌어서 이 땅에 오신 건, 하나님께서 모든 보편적 인간의 죄를 속하러 오신 분이심을 힌트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가장 흔한 이름을 취한 거란 말이에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니까요. 마태복음 1장 16절 보세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보시면 예수라는 이름을 그리스도라 칭하는 이라는 수식을 하죠? 이게 예수의 진짜 이름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그리스도라 칭하는 이게 그 로고스의 수동태에요.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한 이름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내용은 그리스도라는 거죠. 지금.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니까. 로고스의 수동태란 말이에요. 그게. 그래서 예수의 진짜 이름은 그리스도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담고 오셨던,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한사람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십자가 이전의 예수의 말씀을 단 한사람이라도 이해를 하고 믿으면 안 돼요. 왜냐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담아서 로고스로 말씀을 하시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행하시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게 그거잖아요. 내가 말씀으로 왔다. 그때 그게 로고스잖아요. 로고스에 담아서, 말씀을 진리를 로고스에 담아서 말을 하시고 그리고 표적, 눈에 보이는 표적, 기적을 행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그 표적에만 관심을 가졌어요. 그 내용이 뭔지는 관심도 없었잖아요. 눈에 보이는 그 표적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 분이 던지신 그 표피적 말씀에 다 걸려 넘어졌단 말이에요. 그걸 이해한 게 아니라, 그래야 맞아요. 그래야 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종으로서의 그 육신을 삭제당하시기 전에 누군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어버리면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그 스타우로스의 그 십자가가 무용하다는 게 입증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서기도 전에 로고스로 이야기를 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행하는데 그걸 누군가가 알아먹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면 십자가가 필요 없잖아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진리의 성령이. 따라서 헐려야 하는 두 번째 성전, 그 호코스모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그 말씀은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귀 없음과 눈 없음이 이렇게 폭로되고, 하나님의 언약이 땅에 박혀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잖아요. 그 언약, 하나님의 언약, 네들의 눈은 멀었고, 네들의 귀는 막혔으므로 이제 내가 내 언약으로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어. 그 언약을 땅에다 꽂는 일이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언약이 그 십자가로 굳게 서는 거죠. 그게 스타우로스라고 그랬잖아요.

 

이스템이에서 스타우로스라는 단어, 기둥, 언약, 그걸 십자가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지만, 왜냐면 콘스탄틴 대제가 왕이었잖아요. 그거는 당시의 왕은 교회의 수장이었거든요. 그 사람이 태양신의 표식인 십자가를 기독교의 표식으로 정하고 기독교의 수장인데, 각 교회에게 그거 걸어라~ 그러니까 교회에서 다 걸어 버린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원래 개혁교회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으면 안 돼요. 그 시중의 개혁교회도 그거 걸어 놓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 뭐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어요. 하여튼 우리가 그걸로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자는 말이에요. 


그 기둥,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셔서 언약이 서야 되요. 그 언약이 서서 그 언약을 담고 오신 예수의 육이 거기서 삭제를 당해야 되요. 그래야 그 육은 삭제를 당하고, 그 분이 담고 온 진리만이 오롯이 남는 거예요. 남고 그 진리가 진리의 성령으로 각 사람의 그 언약을 타고 하나님이 언약하셨으니까. 내가 네들 마음에 새길 거야~ 라고 새 언약을 했었기 때문에 그 진리만 남아서 그 진리의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지는 거예요. 그걸 은혜라고 그러고 그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들 마음에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침노해 들어가신다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 이전의 그 예수가 행하신 표적이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죠? 복음서에 나오잖아요. 그들이 예수를 믿었더라. 믿었더라. 믿었더라. 그러다니까요. 그런데 왜 십자가 앞에 하나도 안 남았냐고요. 그것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믿으면 하나님 죽이게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표적, 그리고 귀에 들리는 대로 들은 내가 두 마음으로 들은 로고스로 예수의 말을 들어버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살해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많이 믿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들은 그 예수의 기능에 반한 거고, 자기들의 선악구조로 이해한 예수님의 로고스만 받았던 사람들이었어요.

 

요즘도 그런 신비주의 교회에서 뭐 사람들이 안수하면 병이 막 낫고 뭐 하나님께 막 거품 물고 쓰러졌다 일어났더니 은 이가 금 이로 변하고 하는 거, 잘 생가해 보세요. 그거에 광분하는 건, 그렇게 한 하나님의 어떤 기능을 신뢰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감동하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기능 안 하시면 어떡할 거예요? 그 하나님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은 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 속에는 제자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를 팔아버리는 거고, 그 열두 제자 중에 하나가 저주하여 배신하는 거예요. 그 그림이 굳이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호코스모스적 모습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제자들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 설 수 있었던 거예요. 당신 죽으면 안 된다고 야단 쳤다니까요. 질책 했단 말이에요. 성경은요 그러한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그래요. 이방인. 성경에서 이방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뜨노스인데 그 단어가 전부 중성복수로 쓰였어요. 남성이나 여성도 아니고 중성 복수에요. 그러니까 그 단어는 이방인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이방적인 것이라고 번역해야 되요.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방적인 것. 이스라엘 안에 들어 있어도 이방적인 것을 갖고 있는 자, 그것으로 말씀을 대하는 자들은 전부 이방인이에요. 에뜨노스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호코스모스의 세상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말씀을 진리로 듣지 못하고 나타난 표, 그 표의 수준, 껍데기의 수준으로만 보는 것을 총칭하는 거, 곧 그 율법의 세상, 이것이 이방적인 것, 에뜨노스에요. 그래서 중성 복수란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이방적인 것, 그 이방의 대표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에서 가나안 땅으로 끌고 들어오는 거죠. 이방적인 것, 애굽이. 거기에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의 성과 성전을 짓고 있는 사람들. 출애굽기 1장에 보며는 나오죠? 그들이 무거운 짊을 지고 성과 신전을 짓죠? 그게 세상 신전을 건축하는, 세상에 성전을 건축하는 세상 건축가들, 건축자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퉁이 돌을 반드시 버려 버리는 그 세상 건축자들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단어들을 일부러 끌어다 쓴다고요. 그런 사람들, 그들이 바로 종이다. 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종살이가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제가.

 

당시에 애굽이라는 강대국에 다 부족국가였는데 고만고만하게. 애굽에서 나와서 그들이 가나안 갔을 때, 가나안의 일곱 부족밖에 없었다니까요. 가나안 칠 족. 그런데 거기에서 그 어마어마한 국가가 하나 있었단 말이에요. 당시에 전체 세계 인구가 노아의 홍수 이후에 그 시대에 전체 인구가 삼 천만 명밖에 안 됐어요. 여러분 거기서 애굽이란 한 나라에 이스라엘 사람만 이백만이 넘었어요. 어마어마한 거죠. 그들이 나가버리면 어떻게 되요. 나라가 이 존속이 될까? 안 될까? 이게 걱정이 됐던 시대라니까요. 그러니까 바로가 보내 줄 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를 해서 종을 삼느냐고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아 밖에서 일부러 돈 벌려고 용병들이 그것 지러 왔다니까요. 피라미드 지는데, 일자리 없나? 이렇게. 돈을 워낙 많이 줘가지고. 그리고 밥도 다 줬어요. 거기에. 그래서 빵 굽는 터가 항상 그 옆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거는 이 율법주의 세상 속에서의 인간들의 현 그 현 그 상태, 그거를 그려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뽑아내는 것. 그걸 구원이다. 를 설명해 주는 것이지. 단순히 뭐 종살이하는 데 하나님이 그냥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부르짖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구원해 주고,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거는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불러내세요. 그 이방적인 것, 그걸 상징하는 그 애굽에서 어떻게 불러내시죠? 열 가지 표를 주신다고 표, 설명이 안 붙어 있는 그냥 표, 열 가지 재앙, 뭔지 설명을 안 해줘요. 그런데 그거 하나하나가 다 구원과 관계있는 거예요. 마지막이 장남이 죽는 거 아닙니까? 그죠? 처음에는 물이 피가 되는 거고, 다 의미가 있는 건데 설명을 안 해주고 그냥 표만 줘버려요. 이방적인 것 안에 하나님이 던지는 건 표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신비주의 교회는 그냥 거기에요. 애굽이에요. 거기가. 표밖에 안 준다니까요. 안 주지 않아요. 줘요. 그런데 설명을 안 해줘요. 그런데 거기서 나왔어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만 나온 게 아니에요. 출애굽기 1장에 보면 그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래요. 그리고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나오느냐면 중다한 잡 족이 나와요. 중다한 잡 족이 나와서 광야에서 열 가지 계명을 받는 거예요. 여기 이방적인 것, 이 나라 안에는 열 가지 표로만 주어지는데 이제 열 가지의 말이 주어진다니까요. 그런데 이 광야 교회라는 데에서 사람들이 이제 막 오죠? 예수 믿겠다고 온단 말이죠. 이 안에서 그걸 진리로 이해한 사람들이 아 이게 언약이구나. 하고 그 언약, 약속이 되어 그들이 들어가는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라는 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약속들이 들어가는 그게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그 약속이 된 자들이 들어가는 곳, 거기가 약속의 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광야에서는 표가 이제 말로 바뀌어요. 그 광야에서 그 계명이 가리키는 약속이 된 자들, 그들이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신약에서 그 중다한 잡 족을 헬라어로 바꿨는데 뭐라고 바꿨는지 아세요? 허다한 무리라고 바꿔요. 똑같은 단어에요. 그게. 중다한 잡 족과 허다한 무리. 그런데 그 허다한 무리는 늘 예수님을 쫓아다니죠? 관사가 붙은 단수의 허다한 무리가 있고, 그건 제자들, 아들이 될 제자들을 가리키는 거라고 그랬죠? 그리고 그냥 허다한 무리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허다한 무리들이 쫓아다니면서 떡 먹으면 왕 삼으로 쫓아오고, 기적 보여 주면 병 고쳐 달라고 쫓아오고 이 허다한 무리였어요. 그런데 이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죽여요. 이 허다한 무리가. 아들이 되지 못한 그 자들. 그러니까 그 허다한 무리, 중다한 잡 족은 열 둘, 언약 안에서 아들이 되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거지. 그 계명, 말씀을 진리로 깨닫지 못하면 그냥 허당인 거예요. 거기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 중다한 잡 족은 반드시 약속의 자손으로 다시 나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 중다한 잡 족은 다 죽은 것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요. 애굽에서 그 율법의 짊을 지고 무거운 짐이라고 그래요. 짊을 지고 자기들이 원하는 성전과 성을 쌓는 그 중다한 잡 족은 다 죽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말씀, 만나를 먹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로 탄생된 자, 위의 것으로 낳은 자들이 약속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어떻게? 요단을 건너, 요단이 무슨 말이라고 그랬어요. 흐르는 물, 흐르다. 라는 뜻이에요. 흐르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 우리를 깨끗이 씻는 게 레오, 레마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흐르는 물에 씻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거. 그거를 그려주는 거란 말이에요. 출애굽 사건이.

 

그런데 그 약속의 땅도 영원한 본향은 아니죠? 히브리서가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그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는 거예요. 젖은 성경에서 구약성경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죠? 꿀은 절대 제물에 섞이는 안 되는 누룩, 꿀, 둘 중에 하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그게 저주로 주어지게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꿀로 들어가서 이게 변질을 시키게 된단 말입니다. 거기도 아니다. 라고 그러잖아요. 영원한 본향을 향해서 갔다. 라고 그러죠? 믿음의 조상들이. 그 성경을 보면요 너희들이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 말씀이 되지 못하면 거기는 애굽과 같을 것이다. 그러죠? 이스라엘 같은 것이다. 그래요. 성경이. 보세요. 가나안이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거기 들어가서 너희들이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 거기가 애굽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 여기에서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율법적으로 하게 되면 여기가 세상이에요. 여기가 애굽이라니까요. 여기 와서 앉아 있는다. 고 다 예수 믿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자 그런 그 진리의 겉옷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넘겨지는지 요한복음으로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장 23절 보세요.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위에 옷은 겉옷이에요.)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겉옷은 넷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는데 속옷은 안 찢어요. 하나로 놔둡니다. 얼핏 보면 마치 군사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넷으로 찢어 나누어 가진 것처럼 보이죠? 원문을 보면 옷이 넷으로 넘겨졌다. 에요. 찢겨졌다. 가 아니라 넷으로 넘겨졌다. 예수님이 넘겨주신 것으로 나와요. 물론 당시 현장의 상황은 군사 넷이서 예수님의 옷을 찢어서 나눠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갖고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니까요. 그 상황을 가지고 성경이 교회에게 하고 싶은 말 한단 말이에요. 원문을 보면은. 그래서 마치 기둥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겉옷을 넘겨주신 것처럼 단어들을 끌어다 써요. 못 박힌 분이 어떻게 옷을 벗어서 넘겨주느냐고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문자는 그렇게 쓴다니까요. 그림은 그렇게 펼쳐지지 않는데 글을 그렇게 써서 우리에게 줘요. 성경은. 말씀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은 그 현장에 상황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내용을 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여기에서 깃이라고 번역이 된 메로스라는 단어는 그걸 네 깃이라고 그러잖아요. 깃이라는 단어가 메로스인데 그 단어는 분깃, 짝, 부분, 이런 뜻이에요. 분깃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죠? 분기, 짝, 부분.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옮기면 제라인데 그 단어가 창세기에서 아담의그 갈비뼈라고 번역이 되어 있죠. 갈비뼈. 그건 부분이에요. 한 측면. 어떤 존재의 한 측면. 제라에요. 갈비뼈라고 했지만, 부분. 이걸 떨어뜨려 보내고 거기를 살로 채운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얘가 여기 와서 합쳐져야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 분깃이에요. 그래서 다른 부분, 그 제라, 그 메로스가 신랑이 원하는 어떤 존재가 되어서 그 한 부분이 되어 신랑과 짝 붙어 버리면 그게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게 하 아담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건 에베소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예수라는 신랑과 교회라는 신부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 둘은 그렇게 연합을 해서 하늘의 사람이 되어 영원으로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신랑의 그 한 부분으로 서야하는 신부는 어떻게 그 신랑의 한 부분으로 완성이 되죠? 그 신부는 신부의 옷을 입어야 된다고 그래요. 진리의 옷, 겉옷을 입고 하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살아야 되요. 이 땅에서. 그 신부가. 제가 지난 시간에 히브리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해드렸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1을 하나님의 숫자로 사용하고, 왜? 하나님은 늘 진리는 늘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어요. 2를 사람의 숫자로 사용한다고 그랬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항상 둘로 나누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3을 하늘의 숫자로 쓰고 4를 땅의 숫자로 써요. 그래서 하늘을 삼층 천으로 묘사를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그 구원의 처서, 하늘의 모형이죠? 그 노아의 방주를 삼층으로 만든 거죠. 창세기를 보면요 맨 아래 층을 칸탄이라고 그러는데 그 말이 가장 저급한 하늘, 가장 저급한 것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율법과 성전으로 주어진 하늘이 일층 천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하늘은 가장 저급한 하늘의 묘사 방식이다. 라는 의미에요. 뿐만 아니라 성전도 세 부분, 제단도 삼층, 성전의 기단도 삼층, 집을 지을 때 계단도 삼층, 이렇게 3은 하늘의 숫자에요. 반면에 땅은 전부 4로 되어 있죠? 계시록에 보면 땅을 항상 네 바람, 무슨 뭐 네 뭐 네 모퉁이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고대 때에는 땅이 네모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바다 멀리 나가면 그 네모의 끝에 도달해서 뚝 떨어진다고 가지 말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콜롬보스 이런 사람들은 용감한 거죠. 동서남북, 춘하추동, 상하좌우 하여튼 땅의 숫자에요. 넷.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하늘을 모형 하는 그 성전, 3의 성전이 3의 하늘이 이 땅에서 완성이 되면 정사각형이 되요. 사각형이 됩니다. 땅에서 그게 완성이 되면. 지성소도 정사각형, 성전도 전체가 정사각형이에요. 요한도 그 완성된 하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시록 21장 16절 보세요.


16 그 성은(거룩한 성)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이게 완성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거든요. 이게 하늘이에요. 물론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하늘이 네모반듯하다. 고 그래요. 3의 하늘이 4의 하늘이 된 거예요. 원래 3의 하늘에 하나가 끼어들어서 4가 된 형국이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그 네모반듯한 하늘이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래요. 12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들의 숫자라고 그랬어요. 야곱의 열 두 아들, 그래서 베냐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으로 그 열둘이 끝나버리는 거죠. 그 천은 일과 같은 숫자에요. 히브리어 알렙이 일이고 천이에요. 그리고 사람이고 하나님이에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천은 일이에요. 그건 제가 나중에 이 뒤에 가면은 이 천이 나오는데 거기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거거든요. 아무튼 완성된 아들, 하나로 와성된 아들, 그리고 진짜 완성된 천의 아들, 이게 일만 이천이에요.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에요. 그게. 그리고 그게 신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걸 하늘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3의 하늘이 자 3의 하늘이 땅에서 4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완전, 안식 등으로 불러요. 그래서 그 둘을 합한 수인 7이 완전수로 쓰이는 거예요. 4라는 땅이 3이라는 하늘을 수용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합하면 7이 되어 안식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 둘이 이제 자칼과 네케바 신랑과 신부로 합쳐지는 형국이에요. 그런데 삼각형이 사각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이 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이 옆 변이 갈라져야, 찢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 하나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로 마지막 하나로 척 갖다 붙어서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3의 성전이 땅에서 4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진리의 말씀으로요. 그래서 그게 연합이 되면 7이 되는 거거든요. 그게 십자가죠. 하늘이 찢어지는 거, 휘장이 찢어져 버리는 거, 그렇게 찢어져서 4로 완성이 돼야 이 피조물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갖다가 너희가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옥에서 못나온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호리라도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넷의 마지막 하나, 그게 완성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옥에서 나올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넷이 되죠?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마지막 하나로 채워지지 않으면 너희는 절대로 옥에서 못 나온다. 라고 해 놓고 네 개를 준단 말이에요. 뭐 뭐를 줘요? 살인하지 마. 이건 희생 제사 드리지 마에요. 원래.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사랑해. 이렇게 네 개를 주죠. 그러니까 이거를 세 개를 이게 확실히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것을 갖다가 아 이게 그 말이었구나. 라고 내가 알아 겉옷으로 입어, 이것을 다른 이에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래요. 라고 흘려주면 그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이웃을 사랑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그분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 보이지 않는 무한의 하나님을 유한의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그래서 그 위에 십계명의 위에 하나님 사랑에 대한 거는 예수님이 말씀 안 하시는 거예요. 이거는 너희가 안 되는 건데, 네가 그 밑에 것을 네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건데, 그 아래 것을 네 개로 말씀해 주신단 말이에요. 이게 이웃사랑이야. 라고 하면서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다. 말에 관한 거잖아요. 우리는 이제 배웠으니까 알잖아요. 그걸 알아서 배워서 이걸 흘려주는 거. 이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전달해 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니까 그 뜻이 되어드리는 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렇게 넷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그게 말씀이 계명이 뭔지를 알아 그걸 진리의 겉옷으로 입고 그 겉옷을 넘겨주는 거예요. 그 넘겨줄 때는 우리의 말, 이 말로 밖에 그리고 호코스모스로 밖에 못 넘겨주잖아요. 그래서 속옷이잖아요. 어차피, 속옷과 함께 그 네가 입은 진리, 겉옷을 같이 넘겨 줘. 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넷은 진리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요한복음 19장에 그 네 깃, 그 네 메로스 그건 말씀으로 완성이 되는 그 신랑의 그 부분, 제라, 자칼과 그 네케바가 그 자칼의 그 네케바 그 신부, 그 신부가 입을 진리의 겉옷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 분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부분, 넷으로 완성된 그 부분, 그 뜻이란 말이에요. 이 뜻이. 그거 입고 3인 신랑과 연합하여 7로 완성이 되어 영원한 사바스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그 십자가에 목 박다. 라고 이제 이야기를 해 놔는데, 그 말은 그냥 스타우로 라는 단어 하나만 써요. 그 말은 스타우로스 십자가의 동사형인데 언약, 기둥, 세우다 이게 동사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똑바로 세우다. 굳게 세우다. 그 이시템이라는 그 단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그랬잖아요. 스타우로스가. 그러니까 그 현장에서 진행되는 그 그림을 이제 지워 버리고, 그거는 거기에서 진짜 그렇게 있었어요. 일이 있었다고. 십자가에 못 박고 옷 찢어서 가졌고, 이 그림은 현장에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그 그림을 갖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성령이 해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에요. 이제는. 그 그림을 지워 버리고. 그러니까 그 군병들이 언약을 굳게 세웠다. 스타우로에요. 그러니까 굳게 세웠다. 말씀대로 되어 신랑 곁에 섰다. 옷을 입고 신랑 곁에 섰다. 누가? 군병들이.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뭘? 넷으로 완성 된 겉옷을 각각 하나로 넘겨주었다. 이런 말이에요. 그랬더니 속옷이 속옷은 율법은 여러 가지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진 게 율법이잖아요. 그랬더니 속옷이 호지 않은 속옷이 하나가 되었다. 에요. 그 속옷이 어떤 속옷이냐면 위로부터 짠 속옷이라고 그러죠. 그게 아노뗀이에요. 뭐냐면 예수님이 니고데노에게 넌 위로부터 거듭나야 돼. 그 단어라니까요. 그게. 위에서부터 이렇게 짠 이란 말이 아니라, 엉뚱한 단어를 갖다 쓴단 말이에요. 위에 것으로 짠 그 호지 않은 통으로 사람의 손이 가지 않고 그냥 통이 되 버리는 거예요. 바느질 흔적이 없는 거예요. 그 옷이더라는 거예요. 그게. 아 율법이 원래 이런 거였구나. 라고 하나로 그들이 갖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바로 군병들이 야 이제 이걸 찢지 말자. 그러는 거예요. 찢으면 율법되니까. 이거 찢지 말자. 그러는 거예요. 속옷. 군병들이 겉옷을 가지는 순간, 율법의 시대가 저무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갈기갈기 찢어진 율법이 하나로 진리로 깨달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이해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로고스에 담아서 전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로고스 안에 담긴 그 레마라는 내용을 알아채지 못했어요. 따라서 예수님이 던지신 그 로고스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율법의 역할을 한 거죠? 왜냐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 레마가 그들에게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그 예수님이 던지신 말씀은 그냥 로고스로 그들에게 꽂힌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치는 돌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이. 그러니까 그들에게 오히려 율법의 역할을 한 거란 말이에요. 그 말에 맞고 다 죽은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온 세상이. 예수님의 말에 맞고 온 세상이 하나님 살인범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아 버린 거예요. 죽은 거라니까요. 그게. 예수님이 말하심으로 말미암아 말 안 했으면 안 죽죠? 왜 죽어요? 잘 이해하셔야 되요. 여러분. 그걸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을 하세요. 요한복음 15장 22절 보세요.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내가 와서 저희에게 로고스로 말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그걸 로고스로 듣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걸 자기 것으로 마음에 새기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왜? 내가 말했거든. 그런데 그들이 그걸 레마로 못 듣고, 난 아버지의 말, 진리를 내 안에 들어있는 아버지를 말했는데 그들이 그걸 못 알아먹었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걸 못 알아먹으면 그 진리의 말씀을 못 알아먹으면 선악과 먹지 마. 라고 했을 때 그걸 못 알아먹으면 그게 죄에요. 사망이란 말이죠. 그런데 내가 와서 말했단 말이에요. 말을 했는데 그들이 못 알아들었으면 그게 뭐에요? 죽음이에요. 그게 죄라니까요. 핑계치 못하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아무도 못한 일이 뭐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기적으로 보여준 일들 있죠? 그걸 안 했으면, 안 했으면 그게 뭔지도 몰랐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해버렸는데 오 신기해~ 그러고 잡았단 말이에요. 그것만. 어 감동적이야 잡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게 죄가 됐다니까요.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못 봤단 말이에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건 무엇을 갖다가 입증하려고 한 거냐면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한다. 인간들은 본래,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을 못 알아먹게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폭로하러 온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일을 했다는 거예요. 그거 내가 입증하려고 해 본 거라는 것이죠. 그랬더니 진짜 아무도 못 알아듣네. 그걸 하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뭐에요? 하나님 살해란 말이에요 그것이.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바로 이 진리의 성령, 이 진리의 성령이 은혜로 우리에게 꽂히는 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로고스로 기적으로 막 던져 버린 거예요. 이거 듣고 죽으라고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을 거 아니에요. 이게 가치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십자가가 선 이후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잖아요.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세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로고스로 던지고 기적을 보여줬더니 인간들이 땅의 왕으로 세우려고 그러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게 뭐냐면 땅의 것이에요. 그리고 뭘 배우겠다고 계속 오는데 그들이 먹을 것만 먹겠다고 온 게 아니라 교훈을 달라고 찾아왔단 말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가르쳐 달라고 왔다니까요. 뭘 가르쳐 달라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왜? 진리가 뭔지를 모르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가르쳐 주고, 그들이 요구하는 떡을 주는 땅의 왕으로 오면 안 돼요. 그건 생명이 아니니까. 그래서 도망가신단 말이에요. 그 때마다. 그 분은 하늘의 왕이 되어야 되요. 그 하늘들의 왕이 된다. 라는 건 무슨 말이냐면 그 백성들이 진리를 깨달아 그 마음에 갖게 되면 그들이 세 번째 하늘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성경에는 하늘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켜요. 그러면 그 하늘들의 왕이 하늘 왕이에요. 뭐 어디 있는 저기 무슨 하늘이라는 공간의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하늘들의 왕. 그 분이 하늘의 왕이에요.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게 그런 의미란 말입니다. 그 분이 이 하늘들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 분이 먼저 하늘이 돼야 되요. 그러면 그 땅의 것은 삭제당하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된단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란 말이죠. 그리고는 그 분이 하늘이 올라가셨다고 그러죠? 승천하셨다고 그러는데, 그 승천이 뭐냐면 그분이 진리가 되어 하늘이 되셨다는 뜻이에요. 그 분이 하늘이 되시니까 그 하늘이 진리의 성령이 이제 우리에게 꽂히는 그 언약에 근거하여 그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분이 먼저 하늘이 됐기 때문에, 그 일이 우리에게서 똑같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넷이라는 완성의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 되죠? 그걸 겉옷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진리의 성령은 성경이 뭐 누누이 반복하여 이야기하시죠? 주님도 말씀하신다고요. 내가 가지 않으면 못 오는 것. 이라고 이야기하세요. 내가 가야만 오는 것. 내가 하늘로 가야 오는 것. 하늘로 가야~ 하늘이 되어야~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육이 삭제되어야 오는 것.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계명의 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적의 차원에서 감동해 버리면, 그게 곧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는 예배당에 있어요. 하나님은 저 세상에는 관심도 없어요. 애굽에는 열 가지 표만 딱 주고 아예 눈길도 안 줬어요. 하나님은 거기 관심 없다니까요.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을 둘로 나누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게 성경이란 말이에요. 자 달리 표현해 볼게요.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선지자가 없었다면, 아니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에게 선악과 먹지 마라는 계명, 말씀이 법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죄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율법과 선지자, 말씀, 계명이 없었다면 거슬러 올라가 선악과 먹지 마라는 하나님의 최초의 법, 그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그 말씀이 없었다면 죄라는 개념이 성립이 되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로고스로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죄라는 게 성립이 되요. 안 돼요? 조금 아까 예수님이 그 말씀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죄인은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죄와 완전히 다른 거라니까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라는 건.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을 던지면 항상 죄가 드러나요. 항상 그 자리에 죄가 드러난다니까요. 그걸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 한계라고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 백성을 살려내어서 신부로 세우셔야 되요. 옷을 입혀서.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쓰신 거예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진리를 던지세요. 피조물은 당연히 못 알아들어야 되요.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걸 죄라고 그러세요. 못 알아들으면 그걸 죄라고 그러세요. 그것으로 어떤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이 로고스로 던져 버린 말, 로고스라니까 뭐 대단한 거가 아니라 우리의 수준으로 던져 버린 걸,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의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우리 수준에서 두 마음으로 이해해 버리는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로 몰아넣으시는 게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죠?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를 확실히 보라는 거예요. 그게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어요. 
민수기 21장 5절 보세요.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먹을 양식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보세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만나를 주고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거를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그 물은 반석에서 나오는 건데, 그 반석이 예수라고 했으니까 말씀이죠? 만나도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세요. 하늘의 떡, 말씀이라고 그러죠. 하나님은 그걸 내용으로 담아서 주셨더니 이스라엘이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지금. 광야에서. 광야 교회에요.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불러요. 교회에서 뭐라고 그래요? 그거 우리 마음에 안 맞아~ 그러는 거예요. 그 말씀 우리 마음에 안 맞아~ 못 알아듣는 거죠. 그 말을 싫어하는 거예요. 내 마음에 없는 거예요. 그 말이. 그러니까 그거 우리 마음에 안 맞아~ 이야기 했어요. 그랬더니)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는 그 놋 뱀이 나다. 그랬습니다. 내가 그 놋 뱀처럼 달려야 된다고 그랬어요. 놋 뱀으로 달려야 된다. 어디에? 장대에. 그러니까 그거 보고 나은 거만 봐가지고 요새 병원에다가 그거 다 붙여 놓죠? 기둥에다 뱀 이렇게 또아리 틀고 이거 그거 이걸 새겨 놓은 거예요. 보니까 낫거든. 진리를 못 알아들으면 심판이에요. 그게 불 뱀에 물린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다 죽음이다. 그건. 죽음이다.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표적을 주시고 로고스를 진리로 담아 주셨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다 죽었어요. 그죠? 하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 말 때문에.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왜 죽이냐고 그 사람을. 그 분을 왜 죽이냐고요. 말해 가지고 사람들이 그 말에 걸려서 하나님 죽인 거 아닙니까. 그러면 세상 사람들을 문 게 누구냐고요? 예수님이 물었다니까요. 와서. 왜? 살리려고. 어떻게 살려요? 네들은 이렇게 다 죽어야 될 자들이라는 걸, 예수님이 로고스로 던지심으로 말미암아 폭로시킨 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죽을게. 내가 죽어서 그 언약의 장대에 달릴게. 그러면 이게 도대체 뭔가를 알면 사는 거야~ 라는 걸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의 내용이에요. 네들을 그렇게 다 죽어야 되는 거야~ 그런데 나는 살려야 되. 독초 하는 게 악하다고 내가 이미 선언해 버렸기 때문에, 네들은 반드시 내 신부 만들어 내 네케바로 붙여야 되거든. 그 넷이라는 분깃으로 네들이 내 옆에 세워야 되거든. 그러니까 살려야 돼. 그러니까 내가 죽을게. 내가 달릴게. 독사에게 물리면 그 독사의 독이 해독제에요. 보세요. 모든 게 진리를 담고 있다니까요. 예수님이 와서 말씀으로 물어 버렸단 말이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네들을 죄 없었을 텐데 말을 해 버렸어. 죽어야 되요. 사망이에요. 죄의 삯은. 그런데 살릴 거라는 거예요. 어떻게? 뱀이 살리는 거예요. 다시. 누가? 예수가 뱀이 되어 죽어야 할 우리 뱀들이 살아나는 거. 그거 보면, 거기 와서 뭐 하면이 아니에요. 그냥 새벽기도 하라고 그러면, 철야기도 하라고 그러면 그 십자가 붙들려고 말이죠. 그거. 그거 붙들고 기도하면은 뭐가 좀 효험이 나지나요? 그거 하는 거 아니라 보는 거예요. 보고 뭔지 알면 호라호 하면 살려 줄게.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걸 진리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 예수가 죽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예수를 죽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물어 버리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 요한복음 15장 25절로 가보세요.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거는 원래 그들은 나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 라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의 생래적 본능이, 하나님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다. 라는 거예요. 그게 응하게 하려 함이래요. 그리고는)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진리의 영, 영은 곧 말이라고 그랬어요. 진리의 말이 오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들이 그 말을 알아먹으면, 그 불 뱀을 보고 호라호 하면, 너희들이 사는 거야 그게 생명이야 이 얘기하는 거예요. 그거 아시냐고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그 십자가 아래의 군병들이 그걸 깨닫고 스타우로, 언약을 굳게 세웠다. 라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십자가가 골고다에 섰고, 예수님이 거기에 박혔고, 그들이 옷 나눠 가졌는데, 그 안에다가 하나님은 교회에게 줄 진리를 담아 이렇게 얘기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헬라 사람들이 이걸 보면 왜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들을 여기다가 갖다 이렇게 썼어. 보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서기관들이 이건 틀렸어 라고 고치면 그게 진리를 훼손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기관들의 어리석은 붓이 진리를 망친다. 라고 하는 거죠. 아무리 봐도 아니거든요. 문법도 틀리고, 단어도 여기 갖다 쓰면 안 되는 것 갖다 썼고 그런데 진리가 된 이들만 보는 거예요. 거기에서. 이 내용을요. 자 그렇게 그 스타우로 라는 단어는 언약을 굳게 세우다. 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은 사람의 어떤 욕심, 정욕을 못 박다. 이런 뜻도 있어요. 욕심을 정욕을 못 박아 버리다. 죄를 기둥에 박아 버리다. 이런 뜻도 있어요. 우리가 언약이 되어서 서 버리면 우리의 죄가 거기서 박혀 버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옆에 이렇게 서게 되는 거예요. 그게 죽어 버리고, 그게 못 박혀 버리고, 그렇게 우리의 죄들을 십자가에 이젠 못 박아 버리자. 예수 안에서 못 박아 버리자. 그들에게 겉옷이 넷이라는 분깃으로 주어지더라는 거예요. 이제 넷이 된 거예요. 셋 옆에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라니까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넷이라는 분깃으로 넘겨지더라. 그러니까 율법이 호지 않은 하나로 깨달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군병들이 그러는 거예요. 이거 찢지 말자. 이제. 찢지 말자.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군병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는 말이겠죠? 당연히 그 십자가 아래에 군병은 로마 군병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그 군병들을 모델로 사용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을 주의 군사, 주의 군병이라고 그러죠. 겉옷을 넘겨받는 이들의 이야기일 거 아니에요. 그런데 밑에서 군사들이 받고 있잖아요. 군병이. 나는 죄의 군병이라며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이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로마 군병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라고도 불러요. 그건 군병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만군. 교회를 군병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군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되어서 그 말씀을 흘려낼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에요.

 

군병, 군사 예를 들어 드릴게요. 구약의 사복음서를 말하라면 창세기는 모든 성경의 핵심이고 서론이에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사복음서에요. 구약의 사복음서. 그래서 신약을 설명할 때, 설교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을 성경 신학이라는 게 있잖아요. 찾아보려면 항상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먼저 가는 거예요. 성경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가서 거기서 찾아서 연결을 시켜요. 그다음에 선지서에서 증거를 대주면 성경 신학적 해석이 될 수 있어요. 그 넷 책이 신약의 사복음서와 맥을 같이해요.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온 자들에게 계명, 말씀, 율법이 주어지는 거고, 레위기는 그걸 일상의 많은 일들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많은 거예요. 레위기가. 그리고 그걸 알아먹은 자들을 군병으로 해서 민수기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신명기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사람들을 계수하는 거예요. 그래서 Numbers 에요. 민수기가. 그런데 누굴 세냐면 군사를 세요. 그리고 마치 그 군사만 하나님 나라에, 가나안 땅에 들아 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어요. 민수기. 군사를 센단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전부 만 이천, 만 이천, 만 이천 이렇게 나오죠? 그래 갖고 144,000으로 합산을 해 놓잖아요. 그게 아들이에요. 아들. 각 지파에서 아들로 완성되는 거예요. 각 지파가. 군병, 군사라고 그래요. 에스겔서에서도 보면 마른 뼈들이 조합이 되어 형태가 되는데 그 상태는 네페쉬에요. 그런데 생기가 바람처럼 불어서 들어가자 그들이 뭐가 된다고 그래요? 군대가 된대요. 일어나서. 군대. 이제 말씀을 흘릴 수 있는 자들이 된 거예요. 왜? 생기, 진리를 받았잖아요. 진리의 성령의 모형이니까. 그게. 그걸 덜거덕거리면서 일어나서 딱 에게이로 되니까. 모든 기능을 조합하는 게 에게이로, 딱 서니까 이제 그들이 군대가 되는 거예요. 나가서 뭐하라 라는 거죠? 비 진리와 싸우는 거예요. 다 나가서 막 노방 전도하라 이런 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비 진리의 대적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군대라고 그래요. 계시록 19장 13절 보세요.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누구에요? 주님이에요. 이거요.)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라고 그러죠? 군병이에요. 성도를 교회를 이렇게 묘사를 한단 말이죠. 그런데 비 진리 쪽에도 용과 군대가 있어요. 거기도. 계시록 보면 나와요. 두 군대가 싸우고 있는 게 역사에요. 사실은.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세요. 출애굽기 29장 21절에 보면 제사장들의 옷에 피를 뿌려라. 그러잖아요. 그 율법의 제사장의 모습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그리고 하늘 군대들이 타고 있는 게 좀 이상하죠? 말을 타고 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은 절대 말을 타면 안 됩니다. 전쟁 할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예요. 그런데 왜 하늘 군대, 하늘의 이스라엘들은 말을 타고 있을까요? 어디로 지금 싸우러 나가는데 그들이 말을 타고 간다니까요. 원래 이스라엘은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동쪽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두세요. 왜냐면 동이라는 단어가 동편이라는 단어가 대적자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가인도 그렇고, 아담도 그렇고 동쪽으로 다 쫓아 버리시죠. 그리고 그 동쪽에서 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 앞에서 패역할 때 그 대적들을 항상 불러서 치세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말과 그 병거로 벤허 같은데 보면 그 말 병거 옆에다가 큰 칼 같은 거 달아가지고 확 밀고 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반으로 뚝뚝 잘라진대요. 그러니까 탱크가 있는 군대와 도보로 싸우는 군대가 싸우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무조건 전쟁이 일어나면 병기창고가 있는 므깃도로 달려가야 되요. 그래서 거기에서 무기 꺼내서 도보로 싸워야 된다니까요. 그 므깃도 골짜기가 아마겟돈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 만들기 위해 비 진리와 싸우게 하는 게 아마겟돈이에요. 나중에 일어날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병기 창고가 있던 곳이라니까요. 거기가. 무슨 중국의 무슨 뭐 대평원 어디서 무슨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헛소리들 하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말을 타고 있단 말이에요. 도대체 그 말이 뭐길래, 이 땅의 이스라엘에게는 절대 타면 안 된다고 그러고 하늘의 이스라엘에게는 타게 놔두신 걸까? 이사야서 31장 3절 보세요.


3 애굽은(자 이방적인 것,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애굽은 세상은) 사람이요(육이요) 신이 아니며(하나님이 아니며) 그 말들은 (말은 애굽의 말은 지금도 굉장히 고가에요. 갖고 와 봤으면. 애굽의 그 말들, 세상의 그 말은 뭐에요?) 육체요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 깨끗한 말이 아니라 육체란 말이에요. 우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을 생명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 말이 아니라 그 육체인 그 말, 그걸 타버리면 하나님의 말이 아닌 육체를 의지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래서 이거 못 타게 하는 거예요. 전쟁할 때. 말이 뭐에요? 육체다 그래요.)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네들이 아무리 말 갖고 와가지고 전쟁 해봐야 하나님이 손 들면은 걔네들 다 죽어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진짜 믿는다면 그 말, 애굽의 말, 그런 거 의지하지 마. 그냥 달려~ 도보로 달려~ 므깃도까지. 내가 이기게 해 줄게 그런 말이에요.)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말 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데 천상의 주님께서도 계시록에 보면 전쟁하러 가실 때 백마를 타고 가시고, 여기 하나님 백성들도 말을 타고 가요. 말이 뭐라고 그랬어? 육체다. 그래요. 호코스모스적인 것, 이방의 것, 애굽의 것이란 말이에요. 이방적인 것, 에뜨노스. 자 그걸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타고 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그를 자, 율법을 타고 가요.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을 탈 수 없죠? 많은 물, 진리의 앉은 자들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많은 물, 많은 물소리, 그 진리의 물, 진리의 앉은 물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세상이 우리를 백마 탄 자, 말 탄 자, 율법으로 보면 그게 전쟁인 거예요. 우리는 진리인데, 진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로고스로밖에 못 봐. 그들과 싸운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말 탄 자로 보게 되면은.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해질 때 하나님의 모습을 둘로 표현해요. 그 하나가 미가엘이죠. 엘이 뭐에요? 하나님. 미가? 전쟁하는 하나님. 그리고 또 하나는 가브리엘이에요.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 이렇게 둘로 인식이 된단 말이에요. 안겔로스 천사가 뭐 날개 달린 이런 게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사자잖아요. 그러니까 전쟁하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이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사람들에게 백마 탄 자로 보이면 율법으로 보이면 말 탄 자로 보이면 호코스모스적인 것으로 보이면 그 분은 전쟁하는 하나님이에요. 이거 죽여야 되요. 그러나 그 하나님, 그 말씀을 진리로 보게 되면 가브리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선물 받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브리엘, 전능한 하나님. 그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원래는 모든 자들이 진리를 못 알아먹게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 진리가 내려 왔을 때 미가엘과 전쟁하게 된다니까요. 다 죽여야 되요. 그러면은. 그런데 전능하신 가브리엘의 하나님이 그 중에 당신의 택한 백성들 안으로 들어가서 가브리엘, 전능한 하나님이 진리를 심어 버리는 거, 이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내가 진리의 겉옷을 받았어요. 그러면 내가 또 진리를 전하는 안겔로스가 되잖아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진리를 전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나를 미가엘로 본다니까요. 진리를 받지 못한 자는 나를 미가엘로 본다고요. 전쟁하는 하나님. 전쟁하는 말을 갖고 오는 자로 보는 거예요. 군병이에요.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이 말이 뚫고 들어가 전쟁을 해서 뚫고 들어가서 그를 살려내네. 어째든 나는 군병이인 거예요. 그래서 군사, 군대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그렇게 신랑이 잃어버린 한 쪽이 진리의 겉옷을 넘겨받아서 넷의 분깃으로 완성이 되어 언약으로 굳게 서게 되면 그가 바로 신랑의 반쪽인 신부로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신부로 연합이 되면 그 상태가 뭐라고 그랬어요. 이제 여자는 없어지고 아들이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사람, 아들. 그걸 성경이 또 내가 아들을 낳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를 낳는다. 라고 표현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넷의 겉옷이 그 군병들에게 주어지는 그 이야기 바로 밑에 마리아에게 아들이 주어지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9장 25절 보세요.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바로 그 아래의 구절이에요. 이게.)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모친, 이모 마리아죠? 막달라 마리아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죠? 전부 마리아만 있죠?)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마리아는 뭐에요? 쓴물이라고 그랬죠? 마라. 쓴물은 뭐에요? 잘못된 말, 비 진리. 자, 그 마리아가 서 있어요. 잘못된 말, 쓴물이. 마라의 쓴물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쓴 물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제 진리의 물, 위의 물, 겉옷이 주어졌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그 위에 군병들에게 네 분깃이 주어진 이야기였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되냐고 이제? 단물이 되죠. 단물이 되어 뭘 낳아요? 이제 깨끗한 말, 거룩한 말이 됐으니까 아들로 완성이 돼야죠. 아들을 낳아야죠? 그런데 자기가 부정모혈로 낳으면 안 돼. 그러니까 자기가 혈통과 아무 상관없는 어떤 이가 아들로 거저 주어지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아들의 집, 거기에 가서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인 거예요. 그걸 이렇게도 설명하죠. 성경이. 누가복음 8장 27절 보세요.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옷을 입지 아니하며가 겉옷이에요. 귀신들린 자)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이 비 진리 쪽의 군대가 등장해요.)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자, 하나님이 군대라는 비 진리 그 앞에 섰어요. 그러면 그분은 백마 탄 주님이 되는 거예요. 전쟁이에요. 미가엘이 되는 거죠. 그래서 쫓아 버렸습니다. 어디로? 돼지 떼로. 그러면 무슨 말이에요? 돼지 떼에 넣어 바다에 넣었대요. 부정한 것에 넣어서 저주의 바다 속으로 멸망시켜 버리는 모형이죠. 상징이죠. 그러면 그 돼지가 군대가 나가 버렸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제 깨끗한 말, 진리의 말이 그 안에 들어갔단 말이란 말이에요. 그분이 진리이신 분이 그 일을 했으니까 그래서 겉옷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전에는 겉옷이 없어요. 그리고 어디에서 살았다고 그래요. 집에 거하지 않고 이게 성전이거든요. 성전에 있지 못하고 무덤가에 있다. 시체처럼 사는 거예요. 겉옷이 없으면. 귀신들린 자, 이 다이모니아 라는 말은 더러운 말이란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더러운 말, 성경이 악령이라는 말을 푸뉴마 엘로힘 그러니까 르와흐 엘로힘 라아 라고 하거든요. 구약에서. 그런데 르와흐는 성령이고, 엘로힘은 하나님이고, 악령이라는 단어에 이런 단어 쓰면 되요? 그런데 성경이 악령이라는 단어를 항상 르와흐 엘로힘 라아 라고 한다고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말을 라아, 잘못 사용하는 것이에요. 이걸 번역하면. 그걸 악령이라고 그래요. 그걸 그대로 옮기면 다이모니아 에요. 그걸 귀신들린 자라고 한다니까요. 입에 거품 물고 막 쓰러지고 이상한 거 보고 이상한 목소리 내는 거는 미친 거예요. 그거는요. 병원에 가면 낫는 거예요. 그거는. 귀신 들린 게 아니라 성경이 귀신들렸다. 라고 하는 건 르와흐 엘로힘 라아 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잘못된 말을 가진 자가 겉옷이 없으니까. 겉옷을 벗고 벌거벗어 성전에 못 있고, 무덤가에 있어요. 예수님이 갔다니까요. 진리가. 그분은 가서 뭘 해주는 분이에요. 겉옷을 넘겨주는 분이잖아요. 넌 뭐니? 군대래요. 너는 그런 군대로 살면은 안 되는 건데, 그러면 그 군대를 하늘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요. 그 악한 말을 뺏어버리고 깨끗한 말을 줘야죠? 백마 타고 가서 전쟁하는 거예요. 미가엘로. 전쟁하는 하나님으로 그래서 쫓아내는 거예요. 그 군대를. 그 군대가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죠? 당연히 겉옷이 주어져서 겉옷을 입죠. 입고 그 예수님의 발아래에 있다. 라고 그러는데 이거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발로 옆에 섰다. 에요. 자 겉옷을 넘겨받아서 입었어요. 입고 이 사람이 뭐가 되냐면 군대가 될 거 아니에요. 그 군대가 뭐에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복된 발이여 그러잖아요. 이제 겉옷을 넘겨받았으니까 예수님의 발로 곁에 서더라. 이렇게 써 있다니까요. 겉옷을 받았으니까. 
계시록 3장 4절 보세요.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겉옷이에요. 그러니까 겉옷은 더러워지면 안 돼요. 섞이면 안 된단 뜻이에요. 말씀은. 그거 더럽히면, 섞이면 끝장나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라는 게 중요한 거예요. 에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아. 그런 거 없어요.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시록 16장 13절 보세요.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더러운 말이에요. 세 더러운 말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거짓 선지자, 용, 짐승 같은 거예요. 거짓 선지자는 어디 있다? 교회에 있죠? 절에 있는 건, 거짓 중! 거짓 선지자는 교회에 있다니까요. 그들 입에서 뭐가 나와요? 더러운 말, 섞인 말, 더러워진 겉옷. 겉옷도 아니지 그건. 그게 나온다는 거예요)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또 나오죠? 귀신의 영, 귀신의 말, 다이모니아, 더러운 말) 이적을 행하여(효만 주는 거죠?)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전쟁하는 거예요. 군대에요. 얘네들도)
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도적 같이. 가 아니라 도적으로 오리니. 에요.) 누구든지 깨어(왜? 예수님이 와서 도적으로 왔잖아요. 물러 왔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안 물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깨어 있으라는 거예요. 어떻게? 진리의 말씀, 성령을 받은 자는 깨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자기 옷을 지켜(자기 겉옷을 지켜, 진리의 말씀을 잘 지켜, 복음을 잘 지켜 올바로 깨달아)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이거 누가복음에서 나온 그 귀신들린 자, 그 사람이잖아요.)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보세요. 아마겟돈이 그거냐고요. 아니죠? 여러분 삶 속에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에요. 지금. 이 예배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여러분이 그 이 깨끗한 말,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벌거벗고 있다가 무덤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 차리고 그 겉옷 지켜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성경은 애굽, 세상에 관심이 없어요. 거기서 나오는 중다한 잡 족들, 광야로 나와 있는 그들, 교회에 나와 있다고 하는 그들, 그들 중에 엉뚱한 말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계속 경고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깨끗한 말을 갖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네들이 맞아. 라고 계속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대다수가 그렇게 간다고 거기에 속지 마. 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그들이 광야에서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그것으로 진리가 되면 약속이 되어 지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약속들의 땅, 아니면 그냥 광야에서 죽는 거예요. 교회에서 죽어버리는 거죠. 따라서 여러분은 썩을 것 위에 썩지 아니할 것을 입으셔야 하는 거고, 죽을 것 위에 죽지 아니할 것을 입어야 되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입는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게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서 엉뚱한 옷 쟁취하기 위해 엉뚱한 수고와 노력을 하는 귀신 들린 자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말씀, 그리고 주어지는 상황뿐만이 아니라 나라는 이 존재, 이게 다 우리에게 로고스로 오는 거예요. 호코스모스로 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이게 썩을 것이고, 죽을 것이라는 걸 먼저 알고, 그런데 하나님이 네 능력으로 그거 깨끗하게 만들어라. 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해 준 것을 언약의 기둥 위에서 우리에게 넘겨주어 그걸 덧입히시는 거구나. 라고 이해를 못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걸 덧입는 게 아니라 이걸 먼저 벗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여러분이 귀신 들린 잘못된 말 속에 거하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 52절 보세요.


52 나팔 소리가 나매(나팔 소리는 항상 말씀이 선포되어지면. 이에요. 구약에 제가 나중에 찾아 드릴게요. 말씀이 선포되어지면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이 죽어 있던 자들인데)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내용물은 뭐에요? 썩을 것이에요. 여전히.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아래 내용물은 죽을 것이에요.)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그렇게 덧입는 게 그게 이기는 거야~ 그게 사망에서 벗어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 자체가. 진리의 겉옷, 입으시면 되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체가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바로 성자가 될 거라고 착각들을 하시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잘못된 습관과 버릇 속에 한참 동안 머물 수도 있고, 심지어 아주 오랫동안 벗어던질 수 없는 실패의 옷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썩을 것입니다. 죽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 위에 겉옷만 덧입고 있으면, 여러분은 안전한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이 그 속옷에 불과한 나와 함께 겉옷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거란 말이에요. 엘리아가 엘리사에게 뭘 벗어 주고 가죠? 겉옷을 벗어 주죠? 어디로 가요? 하늘로 가죠? 하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겉옷을 벗어주면 에녹처럼 그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이제 삭제되어지는 진리로 함몰되어 지는 거예요. 그 엘리사는 그 겉옷을 받자 어떻게 되요? 요단도 가르고, 강도 건너고, 흐르는 물에 자기를 씻어 권능을 발휘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뭘로? 겉옷으로. 그러니까 갑절의 능력이라니까 뭐 그 겉옷을 받아서 엘리아보다 두 배의 기적을 행했다. 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겉옷을 넘겨주고 네들이 나보다 더 큰일 할 거야~ 그랬잖아요. 왜? 예수님이 계셨을 때는 아무도 못 구원하고 갔잖아요.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야 되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 진리를 전했을 때 그게 그리스도이지만 그게 예수님이 담고 있었던 거였지만, 우리가 그걸 전했을 때 사람들이 살아난다니까요. 그게 갑절의 능력이에요. 그 겉옷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 겉옷을 넘겨 줄때는 이미 나는 이게 진리야~ 라고 하면 세상과 상관없는 자가 되잖아요. 그걸 깨달아 전해 줄 수 있는 정도가 되면 그래서 진리를 전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죽는 것으로 다 그려지는 거예요. 뭘 대단하게 변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진리 안으로 함몰되어 자유로운 자가 되는 거. 그게 죽는 거예요. 그래서 겉옷을 넘겨주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다 죽어요. 두 증인 다 죽잖아요. 그래서 엘리야도 겉옷을 주자마자 없어지는 거예요. 불 병거 타고 뭐 하늘로 가고, 그런 거에는 성경이 관심이 없어요. 그거 타고 가면 뭐 할 거예요. 뜨겁기나 하지~ 요한복음 8장 37절 마지막으로 봅니다.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말이 없으면 뭐죠? 겉옷이 없는 거죠? 겉옷이 없으면 어떻게 된다. 하나님을 죽인다.)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호라호 한 것을 나는 말하는데)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아비는 누구? 마귀, 잘못된 말, 그 들은 걸 행한다. 그러죠.)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여러분은 어떤 수준에 머물러 계세요. 겉옷이 없어서 여전히 로고스로 들은 걸, 행하는 데에 역점을 두십니까? 아니면 그 진리를 호라호 하고 그걸 전하는 데에 흘리는 데에 말하는 데에 더 애쓰고 계십니까? 그건 여러분 자신이 아실 겁니다. 겉옷을 지키셔야 되요. 안 그러면 여러분은 형제를 때려죽인 가인의 후예가 되어서 열심히 제사만 지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처참한 결국을 맞게 될 겁니다. 그걸 아셔야 되요. 그 장대에 달리 뱀이 뭔지를 아셔야 되요. 그리고 그걸 보게 만든 그 원인 제공자가 그 불 뱀이 누구였는지도 아셔야 되요. 그리고 세트, 수트, 겉옷을 입으셔야 됩니다. 그래야 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뭐 그렇게 대단히 성숙되면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겉옷이 허락되어 우리는 그것을 덧입고 있다. 라고 말씀 하시니 면목 없을 따름입니다. 하나님 그 진리의 겉옷이 하루 속히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끊어내어 우리의 삶 또한 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래도 예수 믿는 이들이 괜찮구나. 라는 그런 삶으로 보여 질 수 있도록 그래야 우리 마음도 편하므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