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28 오리, 십리, 구하는 자, 꾸는 자
본문에서 오리라고 번역을 해 놓은 그 단어를 원문으로 보시면 밀리온에이스 라고 되어있어요. 신학생들 많으니까 언어 성경 펴보세요. 밀리온에이스, 밀리온은 밀리언, 백만이라고 쓰죠? 지금은요? 그 때는 천이라고 썼어요. 밀리언. 에이스는 하나에요. 하나. 그러니까 천, 하나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오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 그 천이라는 걸, 걸음으로 환산을 해서 오리 이렇게 2Km 번역을 한 것 같아요. 아니면 당시 로마에서는 그 밀리온 이라는 걸, 거리의 단위로 쓰기도 했는데, 그것을 리, 단위로 바꾸어서 오리로 번역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리가 4Km 죠? 오리는 2Km 정도 되는 거죠. 뿐만 아니라 로마 강점기에는 식민지 백성이 로마 사람의 요구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2Km 정도는 부역을 해 주도록 정해져 있었어요. 법으로. 그래서 아마 그러한 법을 떠올려서 오리, 2Km 라는 번역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Km를 함께 가자는 로마 사람에게 4Km 라도 함께 가주겠다고 아량을 베풀라. 라는 말로 이렇게 번역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성경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오십 리를 같이 가 줘도 하나님이 그거 칭찬 안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과 환경 등을 사용해서 지금 복음을 진리를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헬라어 성경을 보면요. 그 십리라고 번역을 해 놓은 단어가 듀오에요. 결혼정보회사 이름 듀오 있죠? 결혼해 듀오. 이렇게 써 있던데, 그 짝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헬라어를 잘 알아가지고. 듀엣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죠. 짝. 그 십리라는 말은 없어요. 성경에. 그냥 듀오인데 그걸 그냥 오리라고 앞에 걸 번역을 했으니까 곱하기 2 해서 십리라고 이렇게 이제 써 놓은 거죠. 의역을 한 거죠. 자, 그 듀오라는 단어는 앞에 밀리온에이스 그 짝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짝. 듀오. 짝. 혹은 두 번째 밀리온에이스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되죠. 제가 본문 41절을 원문 그대로 직역을 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하나의 그 첫째의 천, 안에서 강제로 억지로 안가리오. 거든요. 억지로 하게 하거든 그 천에 짝, 두 번째 천으로 데리고 가라. 라는 뜻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직은 잘 모르시겠지만 조금 이따가 다 이해가 가실 거예요. 여기서 억지로 라고 번역이 된 안가리오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단어에요. 히브리어에는 억지로 라는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키고 하는 그런 것이 억지로 한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인간들의 본능이 그래요. 억지로 안 해요. 그게 굉장한 보람과 성취감을 주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억지로 라는 말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들의 말, 말에. 그렇게 자발적으로 기쁘게 율법을 지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히브리어에는 있지도 않은 억지로 라는 말을 주님께서 굳이 끌어다 쓰신 이유가 있겠죠? 여러분 억지로 어떤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에요? 종이에요. 종. 종은 자기 일이 없어요. 모두 주인의 일이에요. 그게 억지로 에요. 그 종들이 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일 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뭐라고 그랬죠? 너희는 죄의 종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억지로 하는 자들이다. 라는 말이에요. 그게요. 아들이 되면 자유하다. 이런 말이에요. 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죄의 종의 자리에서 억지로 뭔가를 하는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은 진리밖에 없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억지로의 개념은 하기 싫은 것을 강제에 의해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그 원래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그 두 마음, 원래의 그 두 마음, 생래적으로 운명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그 두 마음, 선악구조 속의 그 두 마음으로 그냥 옵타노마이 인식한, 그냥 껍데기로 인식한 그 수준으로 그냥 해버리는 거. 이걸 억지로 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하는 자들을 종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우리가 누구의 종 된 적이 없어.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너희가 억지로 일을 하는 종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억지로 일을 하게 하는 율법의 성전, 그 율법의 성전이 천, 천, 천, 천이거든요. 사이즈가 그 율법의 성전, 그것이 첫 번째 천이라는 것이고, 그 첫 번째 그 천, 성전이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 진리가 짝으로서의 듀오, 짝으로서의 천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이가 너에게 그 율법의 천 아래에서 안에서 억지로 하게 하거든 그를 짝인 그 진리로 두 번째 천으로 인도해라. 이런 말이에요. 그게 오리, 십리 이렇게 번역이 된 거죠. 혹자들이 그 신학생들이 그런 질문이 요즘 많이 하던데, 아 그렇게 뭐 우리가 다 헬라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성경을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성경을 봐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들을 하시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진리를 말씀을 주면서 가르치는 자를 함께 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그걸 배우셔서 또 가르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전해지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자, 먼저 그 성경이 말하는 그 짝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드리고 본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짝의 대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거든요. 이사야서 34장 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창세기 1장 1절이 베레시트 라는 단어로 시작을 하죠? 레시트 그 앞에 이제 베 전치사가 붙어 있단 말이에요. 베레시트.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면서요. 성경의 첫 글자가 첫 단어는 베레시트인데 그 베레시트의 첫 글자가 뭐냐면 알레프도 아닌 두 번째 글자인 베에요. 그게 성전이거든요. 히브리어 첫 번째 문자인 알렙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그랬죠? 그런데 왜 성경이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베부터 시작을 하냐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문자 속에 갇힐 수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베레시트 라는 첫 단어가 그 두 번째 그 문자인 베에서 시작해서 타우 완료로 끝나거든요. 그게 뭐냐면은 내가 성전으로 러시 시작하여 타우 완성하겠다. 가 베레시트에요. 성전이 뭐에요? 호코스모스, 이 아래의 것, 성전, 옛 성전, 성경, 율법, 뭐 천지 이런 것들, 아래의 것들로 러시 시작하여 머리라는 뜻이거든요. 시작하여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전을 머리라고도 하고 예수님을 자기를 머리라고 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내가 머리 둘 곳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알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뜻 외에 천이라는 뜻도 있고, 하나라는 뜻도 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소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요. 하나가 천이고, 천이 소이며 그 소가 바로 하나님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 문자 하나가 가진 뜻이.
하나님은 그렇게 문자의 세계에 갇힐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리로 말하다. 라는 단어가 아마르인데 그 단어가 나오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요. 그 하나님이 말하는 건데, 그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글로 쓸 수도 없고 소리로 낼 수도 없는 분이란 말이에요. 그 하나님 그래서 없음으로밖에 감지가 안 되는 분, 그래서 그 하나님은 보이는 어떤 것으로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죠? 왜냐면은 하나님은 소리도 없고 모양도 없어요. 아니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그 소리, 그 모양이 없다는 거예요. 너무 크신 분이라 그래서 우리의 수준에 맞는 소리와 모양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성전으로 주시고 이게 하늘이야~ 이게 나야~ 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성전을 또 호코스모스라고 하잖아요. 그걸 또 세상이라고 또 우리가 번역을 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베레시트를 이제 파자를 하면요. 성전에서 시작하셔서 완성하시는 하나님, 성전으로 시작하셔서 진리로 완성해 내시는 하나님,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성경에 그 첫 번째 단어가 이렇게 두 번째 글자인 베로 시작해서 마지막 완료의 글자인 타우로 끝나는데, 그거를 베레시트, 바라 라고 그래요. 바라가 뭐냐면은 창조하다. 라고 우리가 번역을 하죠? 바라, 아싸 이렇게 창조라는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 바라는 말씀으로 되게 하다. 라는 뜻이에요. 말씀으로 되게 하다. 그 단어도 파자를 하면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라는 뜻이에요. 바라, 창조라는 단어 자체가 거기다가 모음만 바꿔 갖고, 히브리어에 모음 몇 개 없어요. 그래서 소리만 다르게 내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어는 해석을 할 때 모음은 다 빼고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 그거는 소리로 가르치기 위해 나중에 붙여 놓은 거기 때문에.
자,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시작하세요. 뭘 시작하세요? 하늘을 계시하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이게 베레시트 바라에요. 창조하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을 하시냐면 그 다음 단어가 엘로힘이잖아요. 그 엘로힘, 그 단어도 파자하면 하나님께서 말로 물, 진리를 요드가 주다니까. 주다에요. 하나님께서 말로 진리를 손을 펴서 주다. 이게 엘로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소리도 없고, 모양도 없으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감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소리와 모양이 필요하죠? 그렇게 피조물이 감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소리와 모양으로 주신 하나님, 그게 엘로힘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크셔서 없음으로 밖에 감지가 안 되는 그 진짜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에서 설명하기 위해 엘로힘으로 하나님을 담아 천지를 시작하시는 거예요. 이 창세기 1장 1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이라는 단어는 솨마임 거기에 물이 있다. 라고 그랬습니다. 쉠 하고 마임이 물이니까. 거기에 물이 있다. 그러면 거기에 물이 있는데 이 땅에는 그 물이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땅이 그 물을 받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죠? 그 물이 흘려 내려야죠? 이게 레마에요. 흐르다. 그러니까 그 위에 물이 흘러 내려 땅을 생명으로 만들어서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거, 이게 하나님의 목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아래의 것들, 땅으로 하늘을 설명하여 아 이게 그거야~ 그러면 이걸 하늘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이 하늘들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늘. 그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늘이에요. 그게. 하늘,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하늘의 물, 그 진리를 빛처럼 흘려서 물이 없는 땅에 물을 대시므로 물댄 동산이라고 그러죠? 물을 대시므로 말미암아 그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시는 거예요. 그런데 천지에서 그 하늘들이 복수가 아니라 쌍수거든요. 히브리어의 쌍수는 이렇게 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늘은 어떤 거에 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땅으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그 땅이 갖고 있는 진짜 내용이 이 하늘이라는 의미에서 쌍수로 쓰는 거란 말이에요. 이 솨마임을. 자, 그렇게 하나님이 물을 흘려 비를 진리로 흘려, 물이 없는 땅에 물을 대시므로 그 땅과 하늘을 하나로 만드는 거, 진리로 하나로 만드는 거,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이에요. 그 호코스모스, 땅의 그 그물에 잡히는 그러한 이가 진리의 물을 마시는 자가 되어서 하늘과 하나님과 이렇게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러한 현실을 신명기가 이렇게 묘사합니다. 신명기 32장 1절 보세요.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물을, 말을) 들을찌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말씀 아니 더 나아가서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왜? 그게 아래의 것으로 줬잖아요. 말로 줬잖아요. 우리 걸로 줬단 말이에요. 그게 로고스죠? 그죠? 그 성경을 통해서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하면 그 성경을 가지고 어두움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옛 성전을 주시고, 이 성전으로 내가 하늘을 설명할 거야. 그랬는데 그 성전에 갇혀버렸죠. 구약이. 그래서 하나님이 그걸 죄라고 그랬잖아요. 그걸 사망이라고 그랬잖아요. 마찬가지에요. 성경이 하늘, 하늘의 성전,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건데, 그것으로 그냥 문자에 갇혀버리면 그게 어두움이라니까. 그러니까 그 안에서 진리를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어둠이에요. 그것 자체가 걸림돌이에요. 성경이 걸림돌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네들이 죄가 없었을 텐데, 내가 말했기 때문에 죄가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에 걸린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이심전심이라는 말 있죠? 그거는 마음으로 내 마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진리를 심비에 새겨준다. 라고 그러잖아요. 그게 내 마음이에요. 우리가 마음으로 갖는 거거든요. 그걸. 그 마음을 가지면 한 마음이 되어서 그게 모든 걸 진리로 보게 되죠? 그런데 내가 가진 거는 진리인데, 이게 밖으로 나오면 또 이 아래의 말로 밖에 표현이 안 되잖아요. 나는 갖고 있어요. 그걸. 그런데 그걸 또 말로 이야기하면 그건 또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그게 아닌 이 말을 통하여 어떤 이가 그걸 듣더니, 이 마음을 그 마음으로 가져~ 이걸 이심전심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아닌 말로 또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이 마음이 그 마음으로 전해지냐고요. 그런 이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건 누가 한 거냐고? 하나님이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이 마음이 그리로 가서 그 마음이 되냐고요. 신명기 30장 19절 보세요.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똑같은 말이에요. 이게 솨마임 에레츠 천지를 가지고)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계시한다는 거예요. 이제. 설명한다는 거예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택하라) 하나님이 천지를 사용하여 당신의 말을 한다는 거예요. 호코스모스의 세상, 성경 뭐 다 마찬가지에요. 말을 한다는데, 그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과 복으로 여겨지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와 사망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같은 말인데, 어떻게 보느냐, 어떤 눈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말이죠.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관계가 이러한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보함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나무라고 그랬어요. 그게 뭐냐면, 보기에 좋다. 먹기에 좋다. 그러니까 보기에 좋은 것, 먹어야 좋은 것 이런 말이에요. 나무는 하나인데, 이걸 보기에 좋은 것으로 보아 그걸 해버리면 죽음이요. 먹어서 마음으로 간직하면 생명이란 뜻이에요. 그게 보함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에요. 그것이. 그러나 이건 하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짝을 구약에서 제가 한번 찾아 드릴게요. 민수기 35장 1절. 1 여호와께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베드로후서 3장 8절 보세요.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그렇게 창세기의 첫째 날이 연합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둘이 같은 거니까. 그 둘째 날이 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둘째 날 이라는 단어 자체가 쉐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듀오라는 똑같은 단어에요. 그 히브리어에요. 그게. 둘째 날이 아니라 듀오, 짝이에요. 짝. 짝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어떻게 짝이냐고요? 궁창 위에 물과, 아래에 물이 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래의 물은 위의 물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알은 사람들이 그 위의 물을 받아 위의 물화 되는 거. 이걸 짝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 둘째 날이 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다 언약을 담고 있는 거라고 그랬죠? 첫째 날은 빛은 반드시 그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그것을 없애버리고 빛만 충만하게 나타나게, 진리로 완성해 내는 것, 첫째 날. 둘째 날은 아래의 물이 그 위의 물, 진리를 설명하는 거니까 이거를 알게 되면 아랫물은 당연히 위엣 물 안으로 함몰 돼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셋째 날은 물과 뭍, 저주의 물이 아닌 하늘의 물을 뭍이 받아서 이게 하늘이 되는 거. 씨를 담게 되는 거. 그래서 그 셋째 날에 씨가진 채소, 제라 라는 단어가 그 개념이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녁이 되면 저녁으로 밤으로 아침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게 쉐나, 짝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다. 그 쉐나, 이게 짝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자, 그렇게 위의 물과 아래 물이 하나가 되는 그 일을 누가 하셨죠? 예수님이 휘장을 찢어버림으로 궁창을 찢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위에 물과 아래 물이 하나가 됐잖아요. 구약 성경이 그 궁창을 휘장, 커텐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거 누가 찢었냐고요. 십자가. 스타우로스. 언약에서 예수님이 찢은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아래 물과 위에 물이 하나가 됐잖아요.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심으로 진리의 성령이 오셨잖아요. 그래서 이게 위의 걸 이야기했던 거야~ 구약이 바로 그거 이야기했던 거야~ 이 예수가 그 그리스도 이야기했던 거야~ 이걸 알려줬으니까. 그 십자가가 궁창을 찢었다. 휘장을 찢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 천이라는 단어 킬리오이는 그 사단이 결박당한 그 천년이라는 그 기간에도 쓰이는 단어죠. 그건 뭐겠어요 그러면? 충만, 완성이라고 그랬으니까. 완전한 결박이에요. 나중에 뭐 잠깐 풀린다는 건 나중이 이제 진리는 여러분 점점점 줄어들죠? 줄어든다고요. 불을 하나하나 꺼 가시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란 말이에요. 그 마지막에 하나가 남을 거 아니에요. 한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싹 데리고 가면 불이 확 꺼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사단이 잠깐 풀린다. 라고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지, 어떤 용 같은 이런 것이 있는데 나중에 풀려나고 이런 얘기 아니란 말이에요. 완전한 결박이에요. 성도에게 있어서는 걔네들이 어떻게 만지지도 못하니까. 144,000에서도 바로 글 칼리오이라는 단어가 쓰였어요. 그거 천이에요. 12, 열두 지파 곱하기 열두 사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충만, 천으로 완성 됐다. 에서 144,000인 것이지 144,000명 아니에요. 구원 받은 12, 12이 완성된 그 진짜 하나님 나라 백성, 그들의 이름이 144,000이지. 144,000명 아니란 말이에요. 거기도 천, 킬리오이라는 단어가 쓰였단 말이에요. 이렇게 천, 에레프는 하늘이요. 하나님이요. 충만이요. 완성이에요. 그걸 성전으로 주신 거예요. 그래서 레위인의 성전 구획이 사방이 에레프, 천, 천, 천, 천인 거예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 첫 번째 천으로 그 충만의 천을 알아먹는 이가 없어요. 진리가 오기 전에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게. 그래서 그 천, 천, 천, 천 그걸 하나님이 줬는데, 그 천, 첫 번째 천, 안에서 사람들이 뭘 해요? 열심히 율법 지키고 희생제사 지내면서 억지로 죄의 종노릇을 한단 말이에요. 그 말하는 거예요. 억지로. 그 천, 하나의 천, 천, 천, 안에서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는 자가 있거든 율법주의자, 그것의 진짜 짝, 그것으로 인도해 줘~ 이런 말이에요. 많이 다르죠? 그죠? 그런 말이에요. 오리, 십리 그런 말은 있지도 않아요. 옛 성전을 곡해해서 그 안에서 열심히 율법의 종 릇하고 이가 있으면 그 옛 성전의 실체인 진리로 인도해 주라는 말이에요. 그거 예수가 한 거 아니에요. 겉옷 넘겨 준 것도 예수가 한 거고, 속옷을 겉옷과 함께 넘겨 준 것도 예수님이 한 거고. 그래야 이렇게 예수님이 해 놓으셔야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43절이 나올 거 아니에요. 그 앞에 거 우리가 못하는 거니까.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35장에서도 그 앞의 천은 다 단수거든요. 천, 천 그런데 바로 그 아래 절의 천은 쌍수에요. 또. 무슨 말이에요? 이 천은 레위인들의 성전, 그 천은 진짜 내용인 다른 천을 의미하는 거야~ 그래서 위에는 단수로 천, 천, 천, 천 이야기하고, 그 밑에서는 쌍수로 천, 천 에레프 이렇게 쓴단 말이에요.
그 천이라는 단어, 그 에레프는 소라는 뜻도 있다고 그랬죠? 당시의 소는 그 애굽의 태양신 그 라아의 모형, 땅의 모형이라고 그랬죠? 애굽사람들도 그 신, 라아가 신이라고는 알고 있는데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땅에다가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소였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네들 신, 네들이 믿는 하나님 만들어 봐. 그랬더니 당연히 알고 있는 게 소밖에 없으니까. 소 만든 거라고요. 금소, 송아지 아니에요. 금소, 그것도 금으로 소를 만든 게 아니라 소 한 마리, 자기들이 끌고 나온 소 한 마리 가져다가 금으로 치장한 거예요. 그리고 귀고리를 떼어서 귀고리라는 건 뭐죠? 종들이 당시에는 희년이 되도 안 나가면 이것 뚫어가지고요. 한쪽만 뚫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나는 당신께 순종합니다. 라는 말이에요. 당신 말만 듣겠습니다. 이쪽 말은 안 듣겠습니다. 그래서 한쪽만 뚫어요. 그러니까 귀고리를 내 놓아서 소를 만들었다는 건 뭐죠? 나는 모든 걸 이제 저 소로 듣겠습니다. 라는 말이에요. 율법주의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팔찌도 있고 목걸이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굳이 성경이 귀고리만 뺏다. 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이제 소로 듣겠다는 거예요.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거예요. 소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소를 갖고 당신을 설명하기로 하셨어요. 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소니까. 그게 나야~ 그게. 설명해 가는 거죠.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소라는 단어가 셋이 있다고 그랬죠. 그 알렙, 에레프라는 소와 일하는 소, 바카르, 밭 갈아~ 밭가는 소, 밭가는 소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소, 아래의 이렇게 그냥 서 있는 소, 성전을 갖고 이걸 열심히 진리로 설명하여 밭가는 소, 바카라, 이 소가 일을 하여 아 그게 그거였어요. 그 하나님, 이 소가 하나님이었어요. 라고 알게 되면 그 소를 토르라고 그래요. 그게 거기에서 토라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 토르라는 단어는 또 산비둘기라는 말로도 써요. 성경에 제물의 산비둘기, 집비둘기 나오죠? 집비둘기는 습성이 여러분 도시의 사는 비둘기들 보세요. 떼를 지어 다니죠? 이게 율법주의 아래에서의 인간들의 속성이에요. 자기들끼리 힘을 규합해야 되요. 민주주의 해야 된다니까. 그런데 산비둘기는 항상 짝으로만 다녀요. 짝이에요. 그래서 토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그 짝이야~ 이게 하나님이야~ 라는 의미에서 토르. 그러니까 율법도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아래의 것으로 문자적인 그런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 버리면 말 그대로 토라 되는 거예요. 율법 되는 거예요. 그런데 토라는 다른 말로 성경이라는 말도 되죠? 그러는 위의 것, 진리로 알아먹으면 그게 진리, 토라, 성경이 되는 거예요. 진짜 말씀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짝이에요. 짝. 자, 이제 그 밀리언에이스, 하나의 천, 안에서 억지로 하게 하는 이가 있으면 둘, 짝, 듀오로 인도해라. 라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죠? 여러분 보세요. 어떻게 이 많은 내용, 다른 글자, 다른 단어들이 어떻게 전부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이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이 항상 하나로만 수렴이 되요. 다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만 알아들어서 그 천의 성전 안에서 억지로 종노릇하는 이가 있으면 진리를 짝으로 전해 주어서 그에게 자유를 주라. 라는 말이에요. 예수가 그거 했으니까 이제 그 진리가 네 안에 겉옷으로 주어졌을 거 아니에요. 네들도 구하라는 거예요. 전해주라는 거예요. 짝으로 전해주라는 거예요. 두 번째 본문으로 넘어갑니다. 42절 보세요.
여기서 구하다.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이테오인데요. 그건 단순히 뭘 달라. 이거 주세요. 이렇게 구하는 게 아니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거 있죠? 너 빚 갚아~ 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쓰는 거예요. 내놔 내 거 내놔~ 이럴 때 쓰는 거죠. 구하는 자에게 주라. 라고 그래요. 디도미, 주라. 라는 말도 밝히 보여 줘라. 라는 말이에요. 밝히 보여 줘라. 허락해라. 넘겨줘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초 하는 것이 악한 것임으로 반드시 네페쉬에 내 진리를 넣어서 내 곁에 신부로 만들겠다. 라는 창세 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우리가 요구해서 되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는 있지도 않았어요. 그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건 반드시 돼야 되죠? 그러면 반드시 돼야 되려면 내가 뭘 받아야 되요? 그분이 주시겠다. 라는 그 생명, 그 호흡, 그 진리를 그 말씀을 그 복음을 내가 받아야 되잖아요. 아니 내가 요구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그걸 진짜 내가 믿는다면 그래요. 하나님 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주세요. 당신이 언약하신 당신은 번복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걸 내가 아니까 그거 약속하신 창세 전 언약으로 주신 그것 주세요. 할 때 그걸 아이테오라고 해요. 구하다. 라고 해요. 그걸. 그러니까 그거는 무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것, 그것 없으면 난 죽는 것, 이렇게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네페쉬에게 하나님이 생기, 르와흐를 불어 넣어서 생령으로 만들어야 그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네페쉬에게 하나님이 눈과 귀를 주셔서 오 그거 없으면 나는 안 돼~ 이리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뭘 구해요? 그거 주세요. 그 네페쉬가. 그때 하나님이 왜 그걸 안 주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구하라. 찾으라. 아이테오제테오 이게 뭐냐면 다 빚 갚아, 제테오는 감추어진 거 그거 줘~ 이거거든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그러면 그거 왜 안 주겠니? 왜?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건데 왜 안 주겠느냐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영생을 우리가 더 원하겠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더 원하겠어요?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원해요? 하나님이 더 원하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 갖고 이제 달려갈 준비하고 있어요. 구하는 자에게 줄려고, 그런데 아무도 안 구해.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그리하면 내가 다 준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도하는 거 그게 뭐든지 하여튼 다 이루어 준다.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도 애들이 해 달라는 거 다 안 해 주잖아요. 애들이 아빠 마약 사게 오천만 주세요. 그러면 줘요? 그런데 다 해준다는 게 무슨 말이겠느냐고? 그거 얘기하는 거예요. 그 빚, 나에게 넘겨 달라고 그러면 그건 내가 다 준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그때마다 아이테오 라는 단어가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운행하세요.
이 땅의 나라는 백성이 왕에게 항상 빚진 자처럼 무엇을 바치면서 살죠? 오늘날 교회에요. 뭔가 바쳐야 돼. 뭔가 내가 이렇게 섬김으로 내 놓아야 돼. 이게 세상 나라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진 분처럼 사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흘려주셔요. 그걸 하늘의 생명이라고도 하고 그걸 바라크라고 그래요. 그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니까요. 완전히 반대잖아요. 그걸 끊임없이 받으면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이라고요. 아 피조물이, 먼지들이 뭘 어떻게 그 하나님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뭘로 섬기느냐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하는 게 뭐에요? 진리의 빛, 하늘의 물, 생수, 하나님 백성은 그거 구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거 구하는 이가 너희들에게 나타나서 그거 구하거든 당연히 네 안에 있는 거니까 줘~ 이런 얘기에요. 구하는 자에게 줘라~ 아무거나 달라는 대로 다 주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자, 하나님은 그걸 우리에게 빚으로 넘겨주셔야 되요. 진리를 넘겨주셔야 되요. 생명을 넘겨주셔야 되요. 생명. 그게 복이라니까요. 그런데 인간들은 다른 걸 넘겨달라고 그래요. 마태복음 20장 20절 보세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우리가 조금 전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인 이삭의 신부를 구하러 종을 보내는 이야기에 데칼코마니 같은 거예요. 딱 붙이면 정확히 같은 거.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그러죠. 종을 보내요. 어디로 보냈냐면 우물가로 보냅니다. 보내서 여자를 찾으라고 그래요. 찾아서 물을 대봐. 라고 이야기하라고 시켜요. 원어로 보면. 너 물을 좀 대봐. 물을 좀 나에게 대봐 라고 이야기를 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물을 대는 여자가 있거든 데리고 와라. 그가 약속의 후손의 신부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요. 리브가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이 우물가에 가서 물을 좀 대봐~ 했더니 그 여자가 물을 못 대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예수님이 물을 가진 이가 줘야 되는 거예요. 다 상징이에요. 주면 어떻게 되요? 그가 동네로 가서 그 물을 대죠? 그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 여자가 구원을 받았네. 못 받았네. 그때 진리를 이해했네. 못 했네. 이거는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우리의 이야기하는 거라고. 우리 이야기요. 그렇게 오늘 본문 42절은 하나님께 구하여 선물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걸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뭐 다른 거 섞어 주지 말고, 그대로 넘겨주라는 말이에요. 이것도 짝 한 번 찾아보죠. 신명기 15장 7절 보세요.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선물로 넘겨주라는 거예요. 진리가 없어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서 진리로 넘겨주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진짜 부자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는 못 줘요. 성경이 그걸 악인이라고 그래요. 시편 37편 21절 보세요.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보세요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그러니까 그냥 아무 때나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뭐 십자가 돌아다니면서 뭐 이렇게 해라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네 안에 그걸 갖고 있으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하는 자가 있으면 꾸러오는 자가 있으면 선물로 빨리 줘버리라는 거예요. 빚 갚으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운행 원리니까. 계속 흘려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고난이란 말이에요. 베드로전서 3장 14절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자, 고난을 받아요. 그런데 그게 복이래요. 왜? 당연히 세상이 다 동의하고 박수치는 건 진리 아니니까. 그러면 너도 아니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너에게 고난으로 오면 네가 가진 게 맞아 왜? 거의 없다고 그랬으니까. 그러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 전하다가 쫓겨났다고 그러시는데 복이란 말이에요. 그게. 가슴은 아프지만. 그런 일 있다니까요. 이렇게 그 진리 가서 전했더니 나가! 그러더라는 거예요. 못 듣겠어!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복 그래요. 복.) 가지고 있으라는 거예요. 네 안에 마음으로 가지고 있어야 이게 이심이 전심 될 거 아니에요. 대다수의 세상은 못 알아들어요. 그러나 그게 복이니까 두려워 말고 전해~ 그러는 거죠. 그거 쉽지 않아요. 여러분. 그래서 그 구약의 선지자들도 계속 도망간 거예요. 아 싫어요. 안 해요. 계속. 집비둘기처럼. 집비둘기가 요나라는 말이거든요. 그 인간은 하나님을 끝까지 반대하죠? 하나님이 하라는 걸 그냥 끝까지 반대하면서 그 떼를 짓는 자의 모형이에요. 요나가. 로마서 13장 8절 보십시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잠언 11장 24절. 24 흩어 구제하여도(내 걸 다 흩어서 구제하여도, 넘겨주어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많이 도와줄수록 더 많이 주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 당장 다 팔아서 올인해버려야지. 이거. 여러분 교육학에서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100을 던지잖아요. 그러면 95개는 가르치는 자에게 쌓이고 5개가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갑니다. 그건 교육학에서 하는 말이에요. 진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진리를 전하면 95개가 내 안에 풍요로 쌓여요. 5개가 전해지는 거예요.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이 뭐 복습 안하고 이러고 다음 주에 오잖아요. 그 전주의 설교 제목도 기억 안나요. 5% 딱 남는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 번 들으셔야 되요. 그런데 내가 내 것을 자꾸 퍼주면요. 그게 내 안에서 또렷해져요. 더 깊어진다고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더 풍요롭다고. 그런데 들을 사람이 없어, 그러면 나에게 계속 들려주는 거예요. 그게 시편이에요. 시편은 다 독백입니다.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나에게 들려 준 거예요. 자기에게 그걸 묵상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생각할 시간을 다 뺏어 버리고 열심히 어디로 달리게 만들어요. 특별 새벽기도 그냥 막 한 달씩 하고 뭐 무슨 선교, 무슨 선교, 막 계속 돌려 생각할 시간을 안 주네. 앉아서 생각하려고 그러면 잡념 생긴다고 또 일시키고 ,삽 주고 지하실 파라고 막 그런다니까요. 아니 여러분은 다른 것 다 멈추시고 그것부터 하셔야 되요. 여러분에게 자꾸 들려주셔야 되요. 그리고 그걸 기도라고 그래요. 여러분. 나중에 뒤에 가면 6장에 가면 나오지만, 시편이 그게 다 기도에요. 그리고 그것 자체를 찬송이라고 그래요. 너무 바뻐하지 마시고 자기에게 자꾸 들려서 나하나 구원하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길에 그 진리가 흘러가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최고로 부유하신 하나님이 계속 흘려주는 거예요. 왜? 그 풍요로운 거라며요. 그게 원칙이라며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은 다르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퍼주는 거예요. 그 땅의 모든 존재들이 다 퍼줘요. 다른 이를 위해서 거길 천국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다 퍼 주는데 점점 그들이 풍요해 지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란 말입니다. 그게 하늘의 부자에요. 자 오리, 십리 구한 자, 꾸는 자, 잘 이해하셨죠? 다음 주에 에스카톨로스코드란테스 그 사랑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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