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32
그렇게 고기를 먹지 않는 카니발이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 절기가 무교절이에요. 히브리어로 무교절을 읽으면 하그하마초트 에요. 그 하그하마초트는 하그라는 단어와 하마초트 란는 단어의 합성명사인데 하그는 카니발, 축제일, 뭐 경축일 그런 뜻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종교적 기념일, 뭐 이런 걸 가리키는 거죠. 하그. 하마초트는 정관사 그를 뜻하는 하와 얻다. 흡수하다. 뻗다. 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마초트와 결합이 되어서 누룩 없는 그 떡, 그런 의미에요. 누룩 없는 그 떡, 그것만 가지고 잔치, 카니발을 벌이는 게 하그하마초트에요. 따라서 무교절을 뜻하는 하그하마초트는 누룩 없는 떡의 축제일, 그때는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돼요. 제단에 바쳤진 고기 먹는 일은 유월절에서 끝나야 한다. 라는 그런 의미에서 유월절이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돼요. 사흘 간 땅에 묻어 두었던 누룩 없는 떡만 먹어야 되요. 왜 사흘일까요? 예수그리스도 누룩 없는, 죄 없는, 떡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걸 먹는 게 잔치에요. 하그하마초트. 그걸 칠(7)일 간 먹어야 되요. 칠(7)은 완전수죠? 안식의 수, 그러니까 하나님의 수 삼(3)과 인간의 수, 세상의 수가 사방, 계시록에 보면 사(4), 많이 나오잖아요. 그게 이게 이 땅의 숫자란 말이에요. 하늘의 수 삼(3)과 땅의 수 사(4)가 합쳐지면 칠(7)이죠. 그게 연합되는 게 안식이에요. 그래서 이제 히브리 사람들은 칠(7) 그러면 안식, 그래서 이 역사 전체 우리가 성도가 살아가는 역사 전체를 칠(7)이라고도 하고 그걸 칠(7), 칠(7), 49해서 49 다음 해가 50 희년이잖아요. 그래서 그 안식 이전에 그 숫자를 49라고 해서 사람들이 49제 지내는 거 있죠. 그게 구천이 떠도는 영혼이 49일 동안 구천을 떠돈다고 그러잖아요. 동양학에서는 팔천다음에 구천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덟 번째 하는 다음이. 그 구천을 떠도는 자들이 안식으로 들어가는 제사 드리는 게 49제인데 그 사람들은 뭔지 모르고 지내는 거예요. 그게 다 성경이 나온 거란 말입니다. 49제 지내란 말 아니에요.
그게 칠(7)일 동안에 그 무교병만 먹어요. 맛없는 떡이에요. 인간의 입맛에는 안 맞는 떡, 누룩이 안 들어간 떡을 어떻게 먹어요. 유월절이 출애굽이라면 무교절은 광야 교회의 역사 속 삶을 의미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고기를 추억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광야교회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있는 교회시대 그러면, 세대주의자들이 나눠놓은 그런 시대 같아서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그 교회가 있는 이 역사 동안에 그게 광야 교회에요. 그걸 광야라고 그래요. 그냥. 그 역사 동안에 우리는 고기를 추억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당시 고기라는 건 전부 신에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전체를 아울러서 한방에 끝낸 게 어린양 제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나 홍해를 건넜으면 더 이상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게 그런 말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기를 추억했다는 건 또다시 희생 제사를 그리워했다. 라는 그런 의미에요. 그거 안 해도 된다고 하나님이 어린양 제사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게 유월절이죠? passover 넘어 간 거란 말이에요. 이미. 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여전히 불안해 떨면서 제단의 고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예요. 안 하면 불안해요. 인간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불안해해요. 그건 아담들의 본능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시고는 그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을 때 그러죠? 성경이. 잇 사이에 있을 때, 씹기도 전에 저주를 퍼부어 버리셨어요. 여러분 뭐 먹다가 맞으면 그거 얼마나 불쌍한지 아시죠? 그렇게 맞은 거예요. 광야에서. 그 먹다가. 하나님의 어린양이 하나님께 영단번에 바쳐지는 십자가 사건이 유월절이 품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단의 제물로서의 고기는 출애굽한 자들에게 있어서 추억거리로 조차 존재하면 안 되는 거예요.
창세기 1장 20절 이하를 보면요 하나님께서 다섯 째날 창조를 하시면서 물, 그 아랫물이에요. 거기에는. 아랫물에 생물이 번성케 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물에. 그 단어가 정확히 번역하면 우글우글 거리다. 에요. 우글우글 거리다. 그게 아랫물 속 생물들의 특징이며 본질이에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아랫물 속에 생물이 우글우글하게 하다. 이 말이 생육하고 번성하다. 라고 거기서 번역이 됐는데, 여러분 구더기떼 본 적 있어요? 재래식 화장실 같은데 가보면 구더기 떼가 정말 우글우글할 때 있어요. 그 단어에요. 이게요. 하나님께서 아래의 인생들을 이렇게 내려 보실 때 바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아 우글우글하다. 그 예뻐 갖고 그거를 뭐 여러분 어디 떠다가 이렇게 보관하시고 그런 적 있나요. 그건 죽이는 거예요. 우글우글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글우글한 것들이 그 자리에서 우글우글하는 거, 그렇게 움직이며 우글우글 떼를 지어서 우글우글하면서 어디로 자꾸 나가죠? 나가면 죽는 거예요. 사실은요. 그게 인생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그 단어가 거기 있는 거고, 지옥의 모습을 구더기가 우글우글하게 죽지 않는 곳. 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게 이 세상이에요. 이 땅의 특징은 항상 떼를 지어 힘을 모아 우글우글하면서 움직이는 거예요. 안 그러면 불안해요. 그게 율법주의라고 그래요. 그게 희생 제사 계속 드리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영원의 특징은 움직임이 없다. 그래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움직이는 그림자도 없다고 그러죠. 영이시기 때문에 없다. 라는 말의 의미보다는 영원 속에서는 어떠한 이 땅적 차원의 그런 움직임이 없는 곳이 영원이다. 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그러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우글우글 거리지 마. 가만히 있어. 그게 영원의 특징이에요. 그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고정되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자원으로 움직이지 않고 은혜의 생명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곳 그런 의미에서 가만히 있어. 라는 거예요. 우글우글 거리지 말고,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여러 곳에서 제발 하나님이 하시는 걸 좀 봐 그러는 거예요. 움직이지 마. Stop 이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가만히 있는 와중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그 세계, 거기를 하나님 나라라고 그래요. 거기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만 들려야 되요. 그걸 잔치라고 그래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이 하신 일만 찬송되는 곳이에요. 그게 진짜 잔치란 말이에요. 거기는 술과 고기가 필요 없다. 그래서 까르네레바레 잔치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술은 누룩으로 발효를 시켜서 본질을 변이시켜낸 섞은 거죠? 술은 항상 섞어야 되요. 그렇게 누룩이 들어가면 항상 섞은 것이 나오게 되요. 본질에서 변질이 된 섞은 거. 그건 사람을 미혹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항상 술과 성령, 술과 바른 말, 이 진리가 대조되어 나오는 거예요. 누룩이 들어간 떡도 마찬가지에요. 본질을 변이시켜서 사람의 입맛에 맞추어 내는 역할을 하는 거. 섞어서 사람이 맛있어 하게끔 만들어 내는 거. 변질시켜 내는 게 누룩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출애굽 이후의 무교절에는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으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그랬죠? 진리에다가 다른 말 섞은 자들 그들 조심해. 이런 뜻이에요. 은혜에다가 율법 섞지 말라는 거예요. 그건 쉬운 말로 진리를 사람의 입맛에 맞게 다시 요리하지 마. 이런 뜻이에요. 그걸 누가 하죠? 율법주의자들이 하죠. 진리를 진리 안에는 은혜만 들어있어요. 그런데 그걸 율법주의자들, 대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한 일이 그거에요. 율법주의자들이 사람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해요. 그리고는 이게 하나님이 맛있어 하는 거겠지~ 라고 너스레를 떠는 게 율법주의에요. 그래서 오늘날 요리사들의 복장이 제사장의 복장과 흡사하죠? 관을 쓰고 제사장들이 고기를 쪼개 놓고 거기다가 붓는 게 포도주, 기름, 소금이에요. 요리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드시기 좋게~ 그러나 하나님은 그거 안 받는다는 거예요. 다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스스로 요리를 하셔서 받는 게 하나님이 시작하는 그리고 완성하는 제사에요. 그 제사는 하나님이 한번 드리고 마는 거라니까요. 율법에 묶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추억했던 출애굽 이후의 그 고기가 바로 누룩과 섞인 술이요. 떡인 거예요. 먹고 싶은 거예요. 매력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 고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물은 이제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아니 있으면 안 돼요.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거든요. 그런데 이 믿음 없는 자들이 불안해서 자꾸 또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에 기도, 새벽 기도 안 나가면 뭔가 찝찝해 갖고 졸려 죽겠는데 나가서 졸다가 오더라도 나가죠. 그 식구들은 쫄쫄 굶고 회사가고 금식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선교도 가고 헌금도 하고 별 거다 하는데 그게 다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글우글 움직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그걸. 그걸 희생 제사라고 그래요. 또 다른 고기를 추억하는 거라고 그래요. 그거를. 고기는 더 이상 유월절 어린양 이후에 나타나면 안 되는 데 또 고기, 고기 하는 거. 왜? 그게 매력적이고 그게 내 입맛에 맞아요. 그게 익숙해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습관이 되어 있다니까요. 젖어 있어요. 거기에. 안하면 불안해요. 그래서 그들의 잔치는 고기로 드리는 잔치요 술로 드리는 잔치요 맛있는 유교병으로 드리는 잔치가 되는 거예요. 사람 입맛에 맞죠? 감동적이기도 해요. 만족감도 줍니다. 여기를 우리가 천국잔치라고 그러죠. 예배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원래 예배라는 건 그 천국 백성들의 잔치는 사람의 입맛에 맞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보편적 사람, 보편적 인간들이 진리도 모르는 이들이 와서 다 야 오늘 은혜 받았어. 오늘 감동 받았어. 하고 가면 그건 가짜에요. 사람의 입맛에 맞으면 안 돼요. 진리는. 예배는. 그 잔치는. 누룩 없는 떡이어야 된다니까요. 먹고 퉤퉤 뱉어야 되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서 감동을 주고, 사람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줌으로 해서 기고만장하게 만들고, 사람의 행위를 칭찬해서 으쓱하게 만들어주는 잔치는 술과 고기로 하는 잔치에요. 성도들의 잔치는 사람의 가능성과 거기서 나온 모든 행위가 죽고, 그게 희생 제사라고 했으니까 그게 고기에요. 그게 죽고 고기 없는 잔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어린양이라는 고기가 이미 드려졌기 때문에 여러분의 잔치에는 여러분의 입맛에 사람으로서의 육으로서의 여러분의 입맛에 맞는 그 고기 없다니까요. 모든 행위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살아나는 잔치여야 되요. 그래서 마음 한켠에서는 반드시 곡소리가 나야 되요. 지금. 내가 아파요. 죽어야 된다니까요. 그거에 맞아서.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곡소리가 나는데 이 죽음이 곧 살아남으로 인지되는 사람들, 그 부활의 환호가 잔치란 말이에요. 죽음으로 살아나는 나의 행위, 나의 희생 제사는 부정되고 영단번에 완료된 유월절 제사가 찬송이 되는 현장, 그게 성도의 축제에요. 그걸 예배라고 그래요. 그래서 잔치는 보편적 인간들, 아담들 입맛에 안 맞아요. 성도들의 입맛에만 맞아요.
제가 이메일을 하루에도 수십 통, 수백 통씩 이렇게 받는데 쭉 읽어보면 진짜 야 이거 정말 입맛에 맞는 거네요. 하고 쫙 끌려오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여전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사람이 있어요. 입맛이 안 맞아요. 막 불평해요. 그러면 안 오면 돼지~ 요리사가 내 놓는 음식이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요. 더 맛있는 걸, 달라고 그러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거저 빠져 나올 때 천사들과 나눠 먹은 게 뭐에요? 무교병이에요. 양 안 잡았어요. 자기를 저주의 불에서 건지러온 사자들에게 왜 그 까짓 양 한 마리 안 잡고 맛없는 무교병만 내 놓고 나눠 먹었을까요? 여러분? 출애굽이거든요. 롯의 출애굽. 출애굽 할 때 어린양 고기 다 먹고 무교병 먹잖아요. 그 사람들이. 뭐에요? 롯을 건지기 위해 천사들이 갔다. 라는 건 이미 양이 잡혀 죽은 후라는 거거든요. 그래야 이 사람이 나올 수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애굽이라고도 하고, 세상이라고도 하고 계시록에 보면 그러잖아요. 예루살렘이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이미 어린양의 제사가 드려진 거예요. 물론 상징적인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는 고기가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롯이 무교병만 나눠 먹고 나와요. 거기서. 그런데 롯, 너의 희생 제사는 필요 없다. 는 거예요. 이미 제사가 드려졌다. 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육으로서의 너의 입맛에는 안 맞을 거다. 라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 은혜를 이야기하면 뭐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냐고 그래요. 야 인간을 뭐로 보고 손발 묶인 그런 인형처럼 이야기하느냐고 막 화를 내다니까요. 우리는 뭐냐고, 은혜를 안 받아드려요. 그래서 무교병이에요. 맛없어요. 그러나 그걸 먹어야 살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본문 바로 위에 그 살인에 관한 계명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던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3절 보세요.
뭐 제사를 드릴 때에 누구랑 이렇게 싸운 그런 일이 있으면 가서 화해하고 와서 제사 드려라. 이런 말 아니에요. 예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도로’는 제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선물이라는 뜻도 있어요. 제물은 곧 선물이다. 그 단어의 이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내가 희생 제사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희생 제사의 제물을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또 드리게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러 온 이미 십자가에서 도륙되어 죽은 그 형제에게 카타, 반하게 되는 거죠? 그죠? 그걸 뭘 원망할 만한 일이 있거든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카타에요. 반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에요. 네가 제물을 갖고 번제단 이란 말이거든요. 번제단에 드리러가다가, 드리러 가는 것은 너를 구하러 와서 이미 제물을 도륙되어 죽은 그 형제에게 반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놓고 가서 그 형제가 한 일을 알아라. 화목하고 화해하고 와라.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가진 그 제물, 그가 드리는 그 예배가 이제는 뭐가 되요? 아 이거는 내가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준 선물이구나. 가 되죠?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가서 화해하고 와서 드려라. 그러면 그게 선물이 된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뭘 드려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라면서요. 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나의 제물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준 거지 하나님은요 여러분 거 안 받아요.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를 받는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거 여러분이 만든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거 아니라니까요. 선물로 준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도른’ 이에요. 선물이에요.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 때도 이게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 뭘 드린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오산이에요. 이걸 선물로 주신 거라니까요. 하나님이. 그런데 여기 와서 이거 해 놓고 일주일을 안심하면 산다니까요. 사람들이. 나 뭐 했다고.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거냐고요. 우리가. 예수를 섬기러 와요. 여기에. 하나님께 뭘 드리러 온다니까. 아니 그거 아니라고 하나님이 와서 죽었는데, 여전히 와서 섬기고 여전히 와서 드리겠다는 거예요. 아 내가 섬김을 받으러 왔니? 섬기러 왔어~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여전히 아니에요 내가 섬겨 드릴게요.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섬길 건데요. 예수는 어떻게 믿을 거예요.
내가 아주 기초적인 질문부터 하게요? 왜 예수님 당시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었을 까요? 실제 그분이 오셨는데 인간은 예수를 보고 예수를 못 믿는 존재라는 걸 보여 준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서 진리로 깨닫게 해주는 걸 예수 믿는다. 그래요.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 눈앞에 나타나도 여러분은 그 말씀이 여러분을 이 눈을 띄워주고 귀를 열게 해주지 않으면 그 예수 못 알아본다니까요. 그런데 자꾸 예수를 믿겠다는 거예요. 그 어떤 예수요? 이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던 그 예수 믿겠다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는 거예요. 그 말은 그 예수가 담고 있는 그 진리 전체를 성령을 통하여 깨닫는 거. 그걸 예수 믿는다. 라고 하는 거지. 그 분을 막연히 이천년 전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어떤 분으로 놓고, 그래서 날 위해 죽으신 분으로 놓으면 그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니까요. 그 분이 죽은 게 뭐요? 아니 그 분이 죽어서 내 죄를 속했다면서요. 진짜 믿겨져요? 그거? 그렇게 믿는 게 아니라니까요. 막무가내로. 그 분이 죽었는데 여러분의 죄가 어떻게 사해졌냐고요. 그 분의 죽음이 내 안에서 진리로 이해가 되어 질 때 아 그래서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거고 내가 우글거리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할 때 그 죽음이 내 죽음이 되는 거잖아요. 그걸 예수 믿는다. 라고 하지 여러분이 이천년 전에 오신 그분을 추억하고 섬기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여러분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한 우상이라니까요. 내 것도 아닌 거, 그냥 어떻게든 붙들고 있으려고 하는 그거. 성경은 그렇게 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 할 때, 그걸 살인이라고 하잖아요. 도륙하지 마. 라는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희생 제사 하지 마. 살인하지 마. 이게. 예수를 또 죽이는 거니까요.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 분의 죽음, 나의 죽음, 그 분의 부활과 나의 부활이 하나여야 되는데 그분과 내가 동떨어져서 그분은 내 섬김의 대상이 되어 있으면 그게 간음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여야 하는 게 떨어지는 걸, 이혼이라고 하고,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니까요. 원래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라는 단어는 따로 있어요. 안트로폭토노스 라는 단어가 진짜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에요. 반면에 산상수훈의 쓰인 살인은 푸호노스 에요. 그 단어는 도살하다. 상습적으로 죽이다. 습관적으로 죽이다. 반복하여 죽이다. 잡아서 신에게 드리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신과 내가 타자로 존재하면서 한 쪽은 섬김의 대상이 되고, 한 쪽은 섬겨야 하는 종의 상태가 되면 계속해서 나는 그분께 뭘 바쳐야 되는 희생 제사를 반복해야 하는 자가 된단 말이에요. 그걸 살인이라고 그래요. 도륙하지 마. 에서 도륙이 그 단어라니까요. 그러니까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살인과 간음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단어. 살육하지 마. 살인하지 마. 도륙하지 마. 여기에서의 그 푸호네오 라는 이 단어를, 푸호노스 라는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솨하트에요. 히브리어도 두 단어가 있어요. 살인이라는 단어에. 그 솨하트 라는 단어,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산상수훈에서 쓴 푸호노스의 단어의 히브리 단어가 솨하트 인데 그 단어가 어디 쓰였냐면 레위기 1장 3절에 쓰였어요. 보세요
내가 그 제사를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는데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러더니 계속 희생 제사 드렸잖아요. 그걸 살인이라고 그래요. 그걸 마귀의 일이라고 그래요.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네가 진리를 못 알아듣고 그냥 로고스로만 알아듣는 구나~ 그게 마귀고 그걸 살인이라고 그래~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안트로폭토노스, 푸호노스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거짓을 말하는 것, 진리를 모르는 것,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거짓이라고 그래갖고 뭐 여러분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병 낫습니다. 은 이빨이 금이빨로 변합니다. 이런 거짓말 말고요. 그거는 말도 아닌 거고. 재미있죠? 말이 아닌 거, 이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말도 아닌 게 뭐에요? 개 소리에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라. 거짓을 말한다는 건, 뭘 말하는 자 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선지자에요. 그게. 그래서 거짓 선지자 그러는 거거든요. 거짓을 말한다는 건, 거짓이 뭐에요? 참을 설명하기 위해 모형으로 준 걸, 거짓이라고 그래요. 짝퉁은 진짜와 똑같이 만들어야 짝퉁이지 아니면 다른 상품이라니까요. 그걸 가짜라고도 하고 거짓이라고도 해요. 그런데 그 가짜와 거짓을 통하여 진짜와 참을 진리를 알게 되면 이것도 가치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 껍데기만 그냥 이야기하는 거. 그러니까 성경을 그냥 표피적으로만 이야기해서 착하게 잘 삽시다. 좋은 사회 만듭시다. 건강한 교회 만듭시다. 가 거짓말이에요. 그 안에 들어있는 예수와 그 안에 들어있는 구원의 이야기, 그 이야기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그게 거짓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 그러냐면 예수님이 살인이라고 그래요. 그거를. 그리고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니까요. 껍데기만 보는 거.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거.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여태까지 감동받은 설교가 뭐에요? 눈물 철철 흘리면서 주먹 불끈 쥐고 그래 나가서 착하게 살 거야~ 이렇게 만들어 준 그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믿고 있었잖아요. 여태까지. 그게 거짓말이라니까요. 나에게 또 다른 희생 제사를 하게 만드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요. 성전에서 희생 제사 또 지내~ 율법은 홀이라도 남김없이 다 지켜~ 그래야 착한 사람 되는 거야~ 그래야 성도다운 거야~ 이런 거. 창세기로 가보게요. 최소의 번제가 제물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보세요. 창세기 22장 6절
이게 여호와 이레 에요.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도 하나님이 제물을 잡아 제사를 지내신 거예요.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제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거지,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항상 선악의 주체로 선 자기들의 생각대로 뭐든지 둘로 쪼개요. 이게 제물 맞아~ 이렇게. 그리고는 한 쪽을 택해야 되요. 거기에서 수고가 일어나고 고통이 오고 눈물과 아픔이 생기는 거예요. 계속 선택해야 돼. 갈팡질팡 해야 되. 이건가 저건가. 이거 해 놓고 두려워하고, 이거 해놓고 기뻐하고 또 부끄러워하고 절망하고 인간들의 희로애락이 전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제물을 준비하라~ 그래요. 쪼개라고 안 그랬어요. 그런데 제물을 준비하라~ 그러면 인간들은 습관적으로 둘로 쪼개요. 이게 인간들의 선악구조 속에서 인간이 드리는 제물이에요. 자기가 옳다 생각하는 그걸 드리려고 한다니까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요? 혼자 건너가세요. 그걸 원어로 보면 아브라함의 반대편으로 하나님이 넘어 가시는 거예요. 그럼 너 나랑 하나 아닌데. 이렇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거 쪼개지 마~ 제물은 내가 홀로 내가 친히 나를 위하여 준비하는 거니까. 그거 네가 그렇게 쪼개기 시작하면 네가 언약의 나와 언약의 당사자로 주체로 서려고 하면 너는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거다. 라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의 실수였잖아요. 언약은 쪼개는 게 이게 언약이라는 뜻이거든요. 나 홀로 이루는 거야~ 해서, 홀로 넘어가시는 거예요. 그래야 제물이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인간들이 쪼개는 선악으로 쪼개는 그 제물이 너는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언약의 수혜자라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 수여 사건은 아직 성막이 지어지기 전에도 일어난 사건이죠? 그 후에 성막에 대한 식양 주셨단 말이에요. 그러면 성막이 지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야 도륙하지 마. 라고 했어요. 그래 놓고 성막을 주신다음에 거기서 양으로 희생 제사 해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그거 해~ 라고 하신 건 이미 하나님이 알려 주려고 한 그 열, 그 진리 그걸 가르쳐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게 가치가 있는 게 아니겠죠? 생각해 보세요. 성막이 지어지기 전에 지금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진리로 설명을 해 주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데, 그가 입을 여러 가라사대~ 가 산상수훈이니까. 우리를 살리는 진리의 말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면 그게 사실은 희생 제사 드리지 마. 솨하트였어 라짜흐가 아니었단다. 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성막이 지어지기 전에 그걸 누군가 알아들었다면 그 성막이 지어졌을 때 그 번제단에서 양이 한 마리라도 죽었을까요.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물이 죽어야 할 자리니까.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건 여러분들에게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달라고 준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이 그렇단 말이에요. 그걸로 진리를 알라고 준 거예요. 해 보고 과연 너희 힘으로 그게 되더냐~ 를 묻고 싶은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희생 제사 드리리라고 해 놓고는 하나님이 또 다른 데에서는 야 내가 뭐 그 기름이 구수해서 바치라고 그러는 줄 아냐~ 살 찐 희생의 제물, 아 나 배불러~ 그러시는 거예요. 드리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거기서 진리를 알아먹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희생 제사 드리면서 도륙하지 마. 살인하지 마. 를 어기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진리로 그들에게 그걸 이해시켜주는 거예요. 희생 제사를 드렸어도 상관없고, 지금도 드리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아 이게 예수님이 하지 말라 거였는데, 를 알면 진리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는 점차 안 하려고 하게 되겠죠? 이게 진짜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진짜 헌금이 나오고 진짜 봉사가 나오고 진짜 선교가 나오고 그러는 거예요. 이젠 내가 드리는 게 내 거가 아니라 하나님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더 풍성하게 드린다니까요. 그래서 역사 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거예요. 그리고는 영단번에 드려진 제사, 십자가를 골고다에다가 꽂아 버린 거예요. 이제 살인하지 마. 이렇게 제물이 드려졌단다. 이제 희생 제사 드리려고 하지 마. 자꾸 하나님께 뭐 드리려고 하지 마. 네들 거 하나님이 받을 거 아무것도 없어.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그 분을 찬송하는 거지, 하나님의 흙으로 만들어 낸 너희 것, 그 땅의 것, 흙의 것이 땅의 것이지 뭐에요. 그거 하나님께 바치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뭘 드려서 말씀을 폐해요. 진리를 깬다니까요. 에게 블라스펨(blasphème) 이에요. 이게 훼방이라는 단어에요. 진리를 말을 깨는 거. 구원은 말, 진리를 갖는 거예요. 그래서 그 법을 내 심비에 새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뭘 어떻게 새겨요? 어디다가? 그 내 밖에 수많은 법들이 예수로 사랑으로 이해되어져서 내가 마음에 그걸 갖고 있으면 내 마음에 그게 새겨졌다 그러는 거예요. 그 얘기는 이제 그 어떤 법도 법으로 작용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참소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가 영생을 가졌다. 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진리를 가진 자들의 그 내적 예배,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를 세바조마이 라고 해요. 그 세바조마이 가 된 사람이 모여서 그 진리를 나누는 걸, 외적 예배, 프로스쿠네오 이거. 이 외적 예배에요. 공적 예배라고도 그러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리로 그 푸뉴마나 진리, 알레떼이아가 같은 거예요. 푸뉴마도 내 말이 영이요. 진리라고 그랬잖아요. 생명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진리도 말이요 진리에요. 같은 말이에요. 진리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는 것, 그게 세바조마이 거든요. 그런데 그 진리를 가진 자들이 이런 모형으로서의 예배도 드려야 된다고 그래요. 주님이 프로스쿠네오 라고 한다고요. 그래서 이건 중요한 거예요. 무슨 건방떨고 집구석에 앉아가지고 인터넷으로만 보는 거 이거 안 된다니까요. 지들이 뭔데 거기에 앉아 있냐고 우린 다 나와 갖고 프로스쿠네오 할 때가 온다고 그래요. 그러나 어떻게 알고세바조마이 들이 모여서, 프로스쿠네오 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세바조마이 안 된 이들이 그 세바조마이 로 나누는 그 프로스쿠네오 현장을 와 봤을 때 재미가 없어요.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자기의 자존심만 팍팍 긁는 것 같고, 자기가 여태까지 이루어 놓고 해 놓은 것들을 다 부정하는 것 같고, 아 재미 없어. 그들이 재미있어 하는 건, 여기서 열심히 선동해 주고 주먹 불끈 쥐게 해주고 우리는 나가면서 그래 살아보자. 이렇게 해 주는 걸 좋아하죠. 그리고는 나와서 개뿔이나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뭐 조금 해 놓고 얼마나 그걸 수첩에 적어놓고 자랑을 하는지 안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 모르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나누신 거예요. 요한복음 4장 22절 보세요.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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