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20 돌은 이미 던져졌다 마 5:31-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10



마태목음 5:31~32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자 간음이라는 한 주제 갖고 일 년 내내 할 수도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그냥 하나로 다 뚫려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주제로 십년 할 수도 있어요. 다 똑같은 얘기거든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라는 그런 소설을 보면서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배우자의 기억에서 나라는 존재가 삭제되었을 때 기분이 어떨까? 


실제로 뉴멕시코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사랑했던 부부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아내의 기억에서 이제 남편이 지워지는 사건이 발생을 했어요. 그 아내의 기억에는 남편을 만나기 이전과 병실에서 깨어나 이후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아내는 자신의 침상을 지키고 있던 남자에게 누구세요? 질문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극진한 사랑을 퍼부음으로 해서 다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이제 애 둘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남편이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와중에 이미 기억에 없을 뿐이지 결혼을 한 여자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와중에 아내는 전에 만나서 결혼까지 할 뻔했던 다른 남자와 만나기도 해요. 간음인 거죠. 그거는요. 그럼에도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서 다시 혼인을 하고 맙니다.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거죠. 킨카펜터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나 그 킨카펜터 부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참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한 몸이었던 신부가 세상으로 내려가서 신랑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실해 버렸어요. 그리고는 세상과 열심히 간음을 하면서 삽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면서 살아요. 그런데 신랑은 집요하리마치 신부에게 집착을 해요. 결국 신랑은 신부를 돌이켜서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버려요.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미움이라는 건 고작해야 두 사람이 보낸 시간과 사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각적인 어떤 것에 불과해요. 그 시간과 사건이 없으면 그 둘은 그냥 남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시간과 사건들이 쑥 빠져버리게 되면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면 둘은 서먹한 타인이 되는 거예요. 


지금 곁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한번 바라보세요. 보기도 싫어요? 딱 두 사람 보네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과 사건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처음 본 그 사람을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지금 그 사람과 보낸 시간과 사건이 하나도 없어졌어요. 그 사람을 지금 처음 봤어요. 그 배나온 그 사람, 쭈글쭈글한 그 여자. 사랑하겠느냐고요? 아니 첫 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뭐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누군가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는 건 자기 탐심에서 나오는 거지, 사랑은 아니에요. 내가 나의 욕심으로 그리고 있던 어떤 그림과 싱크로율이 높은 어떤 이를 만났을 때 우리는 첫 눈에 반했다고 말을 해요. 그러나 그렇게 나와 첫 눈에 반한 사람과의 사이에 시간과 사건이 채워지면 그 첫 감정은 얼마든지 변하게 되요. 그 인간들의 사랑이에요.

 

그런데 그런 인간들의 사랑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아가페의 사랑이었어요. 아가파오의 사랑. 그게 바로 우리 신랑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사랑은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쏟아 부어진 사랑이에요. 우리와 그 신랑과의 어떤 시간과 사건이 채워지지 않아도 그냥 그 홀로 완전한 사랑.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신랑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죠? 그게 바로 교회의 창조잖아요. 우리는 그러한 신랑의 지체들이에요. 없음이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버린 그래서 신부가 되어버린 신랑과 신부는 하나라고 그랬어요. 한 몸.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버린 말도 안 되는 사랑의 사건이 이미 묵시 속에 일어나 버린 거예요. 사랑은 이미 완료의 상태로 묵시 속에 벌어진 사건이에요. 


그리고는 그 유한의 신부들에게 그 무한의 신랑과 그 사랑, 그게 창조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자기의 신부로 만들어낸 게 사랑이라니까요. 그게 창조잖아요. 그 창조, 신랑과 그 창조를 설명하고 소개하기 위해 그들 수준의 설명용 모형인 하늘과 땅 즉 천지만물이 창조된 거고 이렇게 하늘에는 있지도 않은 부부관계라는 게 이 세상에 잠시 존재하는 거예요. 하늘에 가면 여러분은 부부 아니에요. 신랑은 한분, 하나님밖에 없고 우리는 다 신부라니까요. 다행이요. 되게. 그리고 신랑은 열심히 그 유한인 신부들의 기억 속에 당신의 사랑을 새기는 거예요. 그게 역사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에 그 신부로 하여금 신랑의 사랑 앞에 항복하게 만들어 버리시고 다시 자신의 갈비뼈로 그 신부를 끌어당겨서 영원한 한 몸으로 존재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에요.

 

신랑을 떠난 신부는 절대로 자의로 신랑에게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유한은 유한만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유한이 유한의 울타리 안에 있는 걸, 사랑하는 걸, 성경이 간음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유한은 간음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무한인 하나님, 신랑을 사랑할 수 있는 실력이 없기 때문에. 유한 세계에 그 어떤 것도 신부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오직 신랑만이 신부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되요. 우리는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그걸 배우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그 과정은 성도의 인생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 아니라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 맞지만, 이 역사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필수 과정인 거예요. 그래야 신랑의 소중함을 알 수 있거든요. 마음껏 신랑 말고 유한의 것들을 마음껏 사랑해 보라는 거예요. 너 자신부터 시작해서 네가 사랑할 수 있는 거 전부 다 사랑해 보라는 것이죠. 이게 역사에요. 그리고는 그게 뭔지 배우라는 거예요. 그리고 내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수시로 세상과 간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유인 거예요. 마치 빛이 무엇인지를 더 오롯하게 드러내기 위해 어두움이 존재하고 반대로 빛은 어두움을 설명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거는.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참, 거짓 것들이 존재하죠? 거짓 것이 뭐에요? 참을 그대로 모형하고 있는 참이 아닌 거, 그게 가짜에요. 이 세상 전체가 다 보이는 모든 게 다 가짜에요. 여러분은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자꾸 이해하시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그게 가짜에요. 이게 실체가 아니라니까요. 여기가. 이 안에 하나님이 내용으로 들어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참을 설명하기 위해 가짜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가짜가 나쁜 게 아니라고요. 물론 참이 실체를 올 때 사라져야 할 것이지만 그걸 그 속에서 참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게 왜 나쁘냐고요? 


그리고 진짜를 설명하기 위해 모형으로서의 가짜가 있어야 하듯 신랑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신부의 간음, 신랑의 사랑, 세상의 사랑 이건 다른 거거든요. 그 신랑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세상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우리를 붙들고 있는 가짜 그 남편이 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면서 산다니까요. 이 세상을. 어두움과 거짓, 가짜가 옳다는 게 아니에요. 그 안에 들어 있는 그것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빛과 참, 참은 알레떼이아 진리에요. 빛과 참, 진짜가 옳다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있는 게.

 

생각해 보세요. 성도가 말씀을 통하여 진리가 되면요 어두움과 거짓과 가짜 속에서 빛과 참 진리와 진짜를 볼 수 있어요. 제가 지난 주일날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성경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로고스라는 글 안에 하나님이 들어 있죠? 그러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수를 십자가를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건 가짜에요. 그런데 그 가짜를 통해 하나님,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게 진짜란 말이에요.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선과 악의 그 분리구조로 보이는 게 아니라 진리라는 하나가 된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추함과 아름다움도 하나고, 부와 가난도 결국에는 하나에요. 그러니까 부자라고 죄책감 느낄 필요 없고, 가난하다고 비굴할 필요 없다니까요.


아 성경에 뭐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그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에는 돈 많은 부자 얘기를 단 한 번도 안 해요. 그 부자 아니에요. 그러니까 돈 많이 벌어서 잘 쓰세요. 괜찮으니까. 그 부자 얘기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부와 가난은 진리 안에서 하나에요. 결국은 하나를 설명하는 거예요. 뭐를~ 만남과 이별도 하나고, 죄와 의도 하나고, 사랑과 미움도 하나에요. 그 모든 건 진리인 하나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란 말이에요. 그렇게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을 가진 상태, 어떤 걸 인식하고 판단할 때 이 두 마음으로 이건 선악 것, 이건 악한 것 이렇게 두 마음이 아닌 진리 안에서 그걸 하나로 볼 때 그게 자유잖아요. 


하나로 볼 때 그걸 성경이 모노게네스 라고 써요. 그 모노게네스 라는 단어를 우리말 개역성경은 독생자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건 하나인 외아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유니크 두마음을 가진 온통 세상에 두마음을 가진 자들밖에 없어요. 왜? 여기는 아담의 후손들 밖에 없으니까 거기에 모노게네스 한 마음을 가진 진리가 유니크 하게 왔다. 그래서 모노게네스 지~ 외아들이란 말 아니에요. 그거요.

 

아버지란 말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아버지 아니에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막연히 믿고 있는 척 하고 앉아 있는~ 물어보면 하나도 모르면서~ 그 아버지 아니라니까요. 그 모노게네스가 자신의 신부들에게 하나로 진리로 다가가서 그 신부들을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자로 만들어내는 게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에요. 그래야 그들이 천국을 살아요. 안 그러면 두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지옥 산다니까요. 아니 영원히 지옥 살아요. 


그걸 인생에서 하나로 만들어 버려야 돼요. 하나만 가진다는 건 이 현상계에서 빠져나온다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선악구조에서 탈출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새 언약에서는 빠짐없이 새 마음, 한 마음에 관한 약속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새 마음이 왜 한 마음이에요. 선지자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두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잖아요. 그게 헌 마음이에요. 옛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걸 바꿔주는 게 새 마음이니까 한마음이란 말이에요. 그거는. 그런데 그 새 마음을 가진 자, 즉 그 모네게네스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마음이 뭔가를 자각해야 되요. 우리가. 그래서 선악과가 먼저 있고 이래서 두 마음으로 갈라지잖아요. 선악과. 그리고 그다음에 생명나무 실과가 하나로 오는 거예요. 생명, 진리. 


그 이야기를 설명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두 아들의 비유에요.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그걸 그 탕자도 아니에요. 사실은요. 원어는. 자기 걸 갖고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살다가 결국 아버지 집의 아버지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그거.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잃어버렸다 찾은 그 아들, 그리고 집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그 자기가 한 일로 아버지를 탄핵하는 그 두 아들로 보여주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 17절 보세요.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건 시편에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거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걸 달라고 해서 그 자기 걸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요. 그건 아버지의 아버지 것이 아니라 아들이 달라고 한 그 인간의 그 자기 거, 인간들이 지금 갖고 있는 그 자원 있죠? 그거 자기 거예요. 그거 갖고 이 세상에 온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거. 그거 갖고 한번 살아보라는 거예요. 자기 거 갖고. 성경에 보면 네 것. 이라고 그래요. 그 아들이 자기 걸 가지고 나간 곳을 성경이 돼지우리라고 그래요. 돼지는 개와 더불어서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짐승이에요. 그 맛있는 걸.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주, 말씀을, 만나가 진주잖아요? 그러죠? 말씀을 개와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너무 가치 있는 거기 때문에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던지기가 너무 아까워요. 이게.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다 보면 이 말씀에 쭉 빨려오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목숨 걸고 전하고 싶은데, 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런 사람들한테는 말하기 싫어요. 가끔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죄가 뭐에요? 목욕하다가 막 물어보고 그러는~ 거기서 어떻게 설명 하냐고. 그거를. 그거는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목사인데도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러고 말아요. 당신은 얘기해줘도 몰라요.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러고 말아요. 진짜 그게 궁금하면 쫓아오면서까지 물어봐요. 그러면 내가 밤새워서 얘기해 줘요. 돼지와 개한테는 이 진리가 너무 귀한 거라 던지고 싶지가 않아요. 


그렇게 아버지의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자기 것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열심히 살다가 보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돼지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거예요. 그걸 다 날려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게 돼지우리에서 사는 거구나. 를 알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망해서 정신 차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망해서 정신 차린 사람도 있지만 잘 나가는 데도 정신 차리는 사람 있어요. 그런데 막 우울하고 이게 아닌 것 같고, 하나님은 그렇게도 이해하신다니까요. 그러니까 부자들 너무 질투하지 마세요. 그건 진짜 질투에요. 그거는. 그리고 자기는 부정한 돼지들과 양식 싸움을 하고 있는 참으로 참담한 삶을 살고 있는 거라는 것도 알게 되요. 내 것으로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게 내 쾌락을 쫓아 저 부정한 돼지들과 그 먹을 양식을 이전투구로 싸우는 그런 삶이구나. 를 알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17절에 보면 세상이 돼지우리라는 것을 자각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품 군들을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품 군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미스디오스가 양식을 관장하는 종을 말해요. 양식을 가진 종. 드디어 아버지의 아들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양식을 갖고 사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삶인지를 깨닫고 있는 거예요. 돼지우리에서. 이 세상에서요. 거기서 양식이라고 번역이 된 알토스가 떡이에요. 떡. 성소안의 진솔병을 가리키는 떡, 알토스에요. 그게 뭐에요. 만나. 하늘의 만나. 떡. 말씀. 우리의 진짜 양식. 아버지의 떡. 아버지의 양식이에요. 그게. 그 떡이 풍족한 일꾼들이 아버지 집의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아 그게 진짜 행복한 거고 걱정할 게 없는 삶이구나. 그 품 군들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거예요. 이제. 지금. 


그런데 자신은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서 돼지가 되어서 돼지들과 경쟁하면서 돼지처럼 살고 있어요. 그걸 자각하고 알아가는 걸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 내 육이 옛 사람이 죽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돼지구나. 부정한 자구나. 이거 아는 거예요. 그게 죽는 거예요. 자신의 행위와 소유와 업적들이 전부 돼지 똥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때 그 돼지우리 안에 돼지 똥밖에 뭐가 있어요.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하고 돼지 똥, 이부자리가 있겠어요? 가구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부 돼지 똥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똥이라는 단어에요. 우리는 그걸 알게 될 때 우리가 입고 있는 아담이라는 옷을 조금씩 벗게 되는 거예요. 어 이건 신뢰할 게 아니네. 사랑할 게 아니네. 이렇게. 


그래서 17절이 아폴로미 라는 단어로 끝나는 거예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그러잖아요. 그 단어가 완전히 파괴하다. 멸망하다. 라는 뜻이에요. 아들이 자신의 실체와 세상의 실체를 깨닫게 되자 그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는 뜻이에요. 죽음인 거죠. 자기 부정인 것이에요. 그것이. 18절이 어떻게 시작하죠? 내가 일어나. 라고 한글 개역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아니스테미 라는 단어에요. 그 단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다. 라고 할 때, 부활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란 말이에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곳만 찾아드릴게요. 



마가복음 12장 25절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 이 단어가 똑같은 단어에요. 내가 이제 죽었으니 살아나서 아버지의 양식으로 가야지~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그 아들은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세상과 간음을 하며 부정한 돼지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다가 그 세상에서 죽고 아버지 집에 대해 다시 살아나게 된 거예요. 잘 보시면 둘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라는 말이에요. 내가 인생의 과녁을 잘못 잡았다. 하마르티아 거든요. 정말 자기를 살리는 참 양식은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는 없다. 라는 것을 안 거예요. 세상에는 모든 게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더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물론 진리가 들어있지만, 그걸 표피적으로 보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추구하며 살 때 그게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소유, 관계, 선, 악, 모든 게 다 돼지들의 자기 자존심 살리기의 쟁탈전에 쓰이는 돼지 먹이에 불과하더라는 거죠. 


그 아들이 그렇게 자기를 살리는 양식은 아버지 집의 그 양식, 알토스, 생명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를 그 양식 맡은 품 군으로 써 달라고 애원을 해요. 자기 것 갖고 나가서 세상에서 돼지처럼 사는 아들보다 아버지의 것인 생명의 떡으로 진짜 풍성한 아버지의 집 삶, 그 삶을 동경하게 된 거예요. 시편 기자 말로 바꾸면 아버지의 떡이 있는 곳이라면 성전 마당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습니다. 라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반가이 맞으시고 잔치를 벌이시는데 소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죠. 소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형으로서의 존재라고 그랬습니다. 알레프라는 단어가 엘이라는 단어 맨 앞 자가 알레프고 아담도 알레프로 시작해요. 소도~ 이 세 단어가 다 알레프라는 단어 안에 들어가 있거든요.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되자 가짜 하나님으로서의 소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거예요. 율법으로서의 예수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죽지 않으면 소가 죽지 않으면 진짜 진리 하나님이 여러분과 연합할 수가 없어요. 그냥 타자로 존재하면서 섬김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그러면 나는 거기에 구속되어 있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구속이 아니라 꽁꽁 묶여 있는 구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 잔치는 소의 모양으로 오시는 예수의 제물 되심으로 완료가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가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율법은 껍데기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담겨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큰 아들을 한번 보죠. 



누가복음 15장 27절 보세요.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간음이에요.)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큰 아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어요? 29절을 보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는 자로 자기를 인식하고 있어요. 나는 아버지의 명을 율법을 어긴 적이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이 전부 이 얘기 하죠? 나 다 지켰는데요. 그러잖아요. 아버지 집인 예루살렘도 떠난 적이 없어요. 성전. 아버지 집이잖아요. 그게. 성전이란 말이에요. 아버지 집이란 말이에요. 그게. 누구 이야기죠? 하나님이 장자라고 부르셨던 구약의 묶여 있는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큰 아들이에요. 장자에요. 그러한 율법주의자들은 반드시 보상을 바라고 행위를 내어 놓습니다. 아버지가 좋아서 아버지가 사랑스러워서 아버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왜? 은혜가 뭔지를 몰라요. 나가 본적이 없어요. 나의 유익을 위해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아버지로부터 어떤 걸 받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의 수고와 노력이 자기에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그 자들은 아버지를 탄핵해요. 당신이 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큰 아들이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뭘 근거로. 내가 한 옳은 행위로. 나는 아버지 말을 한 번도 어긴 적도 없고 집도 떠난 적이 없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그런다니까요. 이게 율법주의란 말이에요. 그가 한 행위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잘한 거죠? 율법 잘 지켰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는데 그걸로 자기 의를 쌓고 있단 말이에요. 아버지는 그걸 악하다. 라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을 우습게보지 마세요. 로마 황제가 이제 자기의 속국들이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봤어요. 그런데 로마에도 없는 멋있는 금으로 싸인 성전이 서있는 거예요. 당시에는 세로보다 가로가 높은 빌딩이 없었어요. 그런데 성전이 그렇게 지어져 있는 거예요. 그 황제가 그랬어요. 내가 세상에서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본적이 없다. 로마에서 그 예루살렘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그래요. 오는데. 그래서 갔어요. 6개월 걸려서. 자기의 얼굴을 동판에다 새겨서 그 성전, 그 아름다운 곳에 이거 걸어라. 그랬어요. 그래서 6개월 그 동판 갖고 군사들이 갔어요. 걸으려고 했더니 바리새인들하고 제사장들이 성전마당에 전부 무릎 끓고 앉았어요. 그거 여기다가 걸으려거든 우리를 다 죽이고 가라. 여러분 그럴 자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다니까요. 우리를 다 죽이고 가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 하지 마라라.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6개월 걸려서 또 갔어요. 짊어지고. 걔는 뭐냐고 도대체. 로마 황제가 그 소리를 듣고 놔둬라. 그랬다니까요. 놔둬라. 건드리지 마. 그랬어요. 


그러나 인간들의 그런 행위들은 결국 자기의 의 쌓기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것임을 이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는 거예요. 폭로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28절에 그 장자가 노했다. 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 단어가 올기조 인데요. 산상수훈에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면치 못한다. 의 그 노하다 랑 똑같은 단어에요. 지금 큰 아들이 심판을 면치 못하는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형제에게 노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 놈은 간음하고 온 놈인데 부정한 돼지우리에서 가서 창기들과 간음하고 온 놈인데 어떻게 그 놈에게는 이렇게 잘 해 주고, 나에게 어떤 보상도 안 해줍니까? 노했단 말이에요. 올기조. 하나님은 형제에 대하여 그렇게 노하는 자는 심판 받는다. 그랬다니까요. 


그건 세리와 창기를 향해서 난 저들과 같이 더럽게 살지 않은 깨끗한 자입니다. 참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했던 자기 의를 자랑했던 그런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부정한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 하시고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죽어야할 형제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저런 놈이 거저 용서를 받아야 되냐는 거예요. 안 된다는. 이건 십자가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게 형제에게 노하는 거예요. 올기조. 둘은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가 자기 동생을 뭐라고 부르면서 뭐를 말해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자. 그런데 그 간음한 자를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하는 게 가당합니까? 그런단 말이에요.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그래요? 네가 진짜 나와 함께 있는 자라면 내 것이 다 네 건데, 품 군들은 종들은 그 내 것으로 저렇게 풍요롭게 사는데 종들은. 너는 진짜 네가 나를 섬기려고 여기 붙어있던 거라면 그 내 것이 다 네 거고 저 종들이 누리는 그걸로 너도 풍요로울 텐데. 너는 그걸 지금 누리지 못하고 네 동생이 가지고 나간 그거,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구나. 


그러니까 이 큰 아들은 진짜 하늘의 풍요, 하늘의 양식이 뭔지도 모르고, 말씀이 뭔지도 모르고,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무엇이 자기를 살리는지도 모르고, 뭔가 얻어내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죽어라고 일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속으로 아버지가 미웠던 거라니까요. 왜 나만 일을 해야 돼. 그러니까 팡 터져 버리니까 아버지를 막 탄핵하는 거예요.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하나님은 그 따위 행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세요. 정말 아버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 곁에 붙어서 그걸 풍성히 누리고 있었다면 그까짓 동생이 갖고 나간 거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니까. 돼지나라 돼지먹이니까 돼지 똥에 불과한 거니까 넌 관심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가 그렇게 그걸 갖고 나가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건 세상과의 간음밖에 없는데 그걸 갖고 왜 네가 분개를 하니? 그거에요. 율법주의자들에게 그거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장남은 자기 행위 속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가리켜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그래요. 예수죠?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가 이 돼지우리의 세상에 부정한 자로 오셔서 부정한 자가 되어 죽으셨다니까요. 그리고 아버지에 대하여 살았단 말이에요.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6장의 초입 부분이 다 이 얘기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말을 억지로 듣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서 돼지우리 같은 세상을 살아보며 역시 아버지 집의 양식이 최고의 양식이며, 거기에만 풍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아버지에 대해 다시 사는 아들을 보는 것이다. 라는 그 말이에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살았음으로 내가 기쁘다. 그랬잖아요. 아버지가. 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거 알아달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들을 창조해 내었는지를 아는 아들,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아는 아들, 그게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이지 아버지의 말을 율법적으로 잘 듣고 겉만 번드르르한 행위를 내어 놓으면서 그 옳은 행위로 아버지를 탄핵하는 그런 아들은 심판에 합당할 자일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심판의 근거인 올기조 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제가 살던 LA에 헐리웃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 가면요 유대인들이 굉장히 많아요. 토요일 날만 되면 이렇게 빵떡모자 쓴 랍비들이 까만 양복들을 입고 그 회당 시나고그으로 막 예배드리러 가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녀요 고행을 해요. 그런 사람도 있고, 한 여름인데 밍크코트 같은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은 두 가지 옷감으로 된 옷을 안 입어요. 그거를 검사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이거는 어 이거 두 가지 천인데 몰랐어요? 바꿔줘요. 먹는 것도 그래서 유대인들이 먹는 그거를 쫓아다니면서 사먹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건강에 좋다고. 지금도 그렇게 산다니까요. 하나님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거요. 나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라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돼지우리 같은 간음의 세상 속에서 현행범으로 붙들리는 경험을 해야 되요. 아 내가 맞구나. 내가 돼지 맞구나. 부정한자 맞구나. 세상과 간음한자 맞구나. 창기와 함께 여태 먹고 살던 놈 맞구나. 이거. 우리가 이 간음의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그 단초로 삼아 공부했던 간음한 여자 이야기에서 그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라는 어구가 나오죠? 거기에 간음하다. 모이큐오 라는 단어 앞에 에파오토포로 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 그 단어가 현행범이라는 뜻이에요. 진짜 현장에서 잡힌 거예요. 억울하게 끌려온 게 아니라. 그러니까 찍 소리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만 신랑 곁에 남아요. 나머지는 안 들켰어요. 안 들켰어요. 안 한게 아니에요. 안 들켰어요. 나머지는 전부 신랑을 떠나서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간음이죠? 신랑을 떠나 간음하러 나갔어요. 율법주의에요. 그것이. 


그렇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현행범을 잡아서 옛 성전으로 와 율법으로 고소하죠? 율법의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그랬습니다. 죽이자 그러는 거죠. 참소하는 거예요. 마귀라고 그러잖아요. 참소하고 있어요.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어요. 그 말씀은 그 옛 성전에서 돌을 들어 간음한 여자를 치려했던 모든 고소 자들을 죄인으로 일괄 선고해 버리는 말이고 그랬죠? 그러나 그 말씀은 또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그곳으로 다시 한 번 가보죠. 



요한복음 8장 7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이 된 플로토스는 이전에 라는 뜻이에요. 이중에 제일 죄가 없는 자가 제일 먼저 때려~ 이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알아요. 그거를요. 이전에~ 이런 뜻이에요. 이전에. 그리고 돌로 치라. 라는 단어, 발로는 단순과거명령법이에요. 과거명령법이에요. 헬라어에서 단순과거명령은 단 회적 사건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라고 하실 때도 단순과거명령형으로 말씀하세요. 성령은 한번 받는 거예요. 뭐 성령 받아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다 웃기는 소리에요. 이거는요. 거듭난 사람이 무슨 성령을 또 받아요. 


그러니까 무슨 성령을 이렇게 혼령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귀신처럼 여기는 거예요.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거. 그 단순과거명령은 두 번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예요. 한번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영단번. 지금 여기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이전에 이 간음에 대해서 돌이 한번 던져졌는데 이런 뜻이에요. 이미 이전에 이 간음이라는 죄에 대해서 돌이 한번 던져졌는데 이런 뜻이에요. 그걸로 끝인데 네들이 돌을 또 들고 있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누가 그 간음의 대해서 돌을 던졌다고 그래요. 이 중에 죄가 없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전혀 없는, 티끌도 만큼도 없는 이런 뜻이에요. 죄가 전혀 없는 자가 돌로 쳤는데, 죄가 전혀 없는 자 누구에요? 그 중에서? 예수에요. 내가 벌써 과거에 한번 쳤는데 이런 뜻이에요. 성경에서 간음을 논할 때 마다 등장하는 사건이 광야의 금소 사건입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독립선언을 했던 그 때가 최초의 간음이 일어난 때라면 왜 최초로 남편을 떠나는 거니까. 금소 사건은 그 선악과 사건의 내용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 놓은 그림이에요. 고린도전서 10장 7절 가보세요.



고린도전서 10장 7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거 모합에서의 일이죠.)
9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게 다 같은 이야기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거든요. 성경은 우상숭배를 이방 여자들과 모합 여자들과의 간음과 연결을 시키고 있고, 그게 곧 뱀에 물려 죽는 일이다. 뱀이 뭐라고 그랬어요? 이름이? 나하쉬, 말이 없음, 비 진리, 잘못된 말, 나하쉬. 뱀이라는 단어의 뜻이 그거에요. 그 뱀에게 물려 죽는 거예요. 뱀에게 속아서 인간의 능력과 지혜와 가치를 의존하게 되고 이게 에덴동산에서의 뱀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 인간들이 건축하는 세상에 묶여버리면 그게 곧 우상숭배요 간음인 것이며 그게 곧 뱀의 혀에 물려 죽는 사망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불의 혀는 Tongue(혀) 글로싸 하나지만 뱀의 혀는 두 가닥인 거예요. 두 마음. 항상 선악으로 가르게 되어 있어요. 뱀의 혀는. 율법주의로 가게 돼 있단 말이에요. 그러한 우상숭배 이야기, 간음의 이야기 맨 앞에 등장하는 게 시내 산 아래에서의 금소 이야기에요.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애굽 18왕조 때에 주시는 하돌의(Hathor)암소, 아피스(Apis)의 황소라고 그랬습니다. 그 소라는 건 하나님께서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가짜로 주신 것이기도 하다. 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절에 가도 심우도 라는 그림인 거고 그게 열 단계로 그려져 있어서 십우도에요. 십계명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애굽의 소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거예요. 계명, 진리를 내 힘으로 찾아가려고 하면 십우도가 되는 거예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풍요의 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의 신, 그 부자는 내가 하나님의 진짜 양식, 그게 있어야 부자거든요. 그런데 그거가 하나도 없이 엉뚱한 세상 것들, 비 진리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그 자들, 그 자들의 신이 소란 말이에요. 


애굽에는 라하 라는 신이 있었어요. 그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신이에요. 그래서 애굽사람들은 멤피스라는 도시에다가 소를 갖다 놓고요 살아있는 소. 그걸 금으로 입혔어요. 치장을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제물 드리고 거기에서 제사지내고 소원 빌었어요. 그 소, 그 소에게 제사 드리는 걸 400년 동안 했던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서 하나님을 뭘로 그리겠느냐고요? 당연히 소로 그리죠. 그런데 하나님은 뭘 얘기하시냐면, 네들이 생각하는 그 소가 바로 나야~ 를 이야기하는 게 성경이란 말이에요. 네들은 껍데기만 보면서 그 소를 자꾸 찾고 있는데, 그게 네들이 소로 알고 있는 게 그게 나야~ 를 이야기하는 게 성경이며 이 역사라니까요. 


그런데 그 소를 금으로 치장을 하는데요. 그 금이 어디서 온 금이에요? 물론 애굽에서 나온 금이고 귀고리에요. 귀고리는 뭐의 상징? 순종의 상징이죠. 희년이 되어도 나 주인이 좋아서 안 나갈래요. 하는 종들은 주인이 데려다가 귀를 뚫었다고요. 나는 주인께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상징이 귀고리에요. 그래서 귀고리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묶여 있는 거라고요. 그런데 소에게 귀고리를 던진다는 건, 나는 이 소, 율법, 껍데기, 가짜에게 내 목숨 걸겠다는 뜻이에요. 순종하겠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 소 안에 들어 있는 진짜 하나님, 진리를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이 소에게 순종할래요. 올인 할래요. 그래서 귀고리를 다 던진 거예요. 


금이 그거밖에 없었겠느냐 고요. 그런데 굳이 성경이 귀고리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척 들으면 척 알아먹었겠죠? 귀고리가 뭔지. 껍데기인 소에게 순종을 맹세한다는 건 껍데기는 율법이죠? 내가 당신 말 잘 들을 테니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답해 달라는 그 거래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라고 하면서 그 소를 만들어요. 그죠? 나를 위한 종교, 거기에 머무르는 게 가짜란 말이에요 그게 우상 섬김이란 말입니다. 이게 율법주의죠. 내가 허벅지를 찔러 가면서라도 열심히 법을 지켜낼 테니까. 하나님 당신은 내가 원하는 구원, 내가 원하는 천국, 내가 원하는 행복을 달라는 거예요. 그게 가짜 하나님인 소에게 순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리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좋다. 라고 하는 이야기하는 그것들로 그려져요. 


여러분 가서 실망할지도 몰라요. 그거 아닐지도 모른다니까요. 여러분이 원하는 인테리어가 안 돼 있을지도 몰라요. 그거 어떡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지가 생각하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관념 속에서의 기독교를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런 거고. 전부 금이야~ 구원도 금, 천국도 금, 생명도 금 그러죠?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런 거에 대한 사랑이 싹 가시고 그 진리인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진리가 된 거예요. 자 그 자리에 뭐가 던져졌어요. 그 간음의 자리에. 돌, 돌비 하나님이 법을 써서 준 돌이 거기에 던져졌다니까요. 심판인 거예요. 율법의 현장에 율법이 떨어져 심판이 일어나요. 법의 세상에 예수가 법으로 오셔서 깨짐으로 해서 심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돌의 심판으로 인해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그 시내 산 아래의 사건이 오순절,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과 연결이 되어서 여기서 이렇게 죽어야 되는 자들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삼천, 삼천인 거예요. 율법 즉 로고스 방언이 예언, 레마가 되어서 던져지자 삼천 명이 살아서 올라온단 말입니다. 


율법, 껍데기인 법이 레마, 진리인 하나님으로 전해지니까 죽어야 되는 자들이 살아올라 오는 거. 그러니까 진리라는 건, 언제나 법에 묶여 간음하는 자일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그게 유한의 한계잖아요. 그게. 나를 위해 죄 없으신 예수가 법이 되어 던지심으로 깨져서 심판을 받으시고, 그 간음이라는 죄 자체를 없애 버리셨다. 라는 걸 그 내용으로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진리의 현실을 깨닫지 못 한체 여전히 율법이 정한 육체적 간음만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자들이 뭐에요? 그게 진짜 간음인 거예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용서, 그 은혜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이 세상이 위법으로 규정해 놓은 껍데기인 계명이 규정해 놓은 그걸 치려고 돌 들고 서 있는 거. 그러면 이미 돌로 던져진 예수의 십자가가 이 돌로 부정이 되는 거예요. 이걸 율법주의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이걸 하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해서 이미 예전에 단 한번 돌이 던져진 적이 있어. 그게 이제 십자가를 예표 하던 거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돌이 던져졌잖아.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율법주의 속 아담들은 그 말도 법으로 알아들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더니 이게 전혀 없다. 라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전혀 없는 자는 없잖아요? 이 세상에. 자기는 자기를 알거든요. 진짜 너 죄 하나도 없어? 이렇게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도 법으로 알아듣고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흩어져 버렸어요. 


마치 바벨탑에서 내려와 흩어져 버린 것처럼 흩어져 도망가 버렸어요. 성전이신 신랑 밖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또다시 간음하러 간 거예요. 신랑을 떠난 거니까. 그렇게 법을 통하여 스스로를 보고 그 신랑이 그 앞에서 면목 없어서 스스로 도망가게 되는 걸 지옥이라고 해요. 지옥은 누가 보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가게 되어 있어요. 거기가 법의 세계거든요. 흙들의 세상. 주님께서 거기에 남은 현행범에게 말씀하세요.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대답하죠. 없네요. 이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로마서 8장 그런즉 구하려든 자, 얻은 자들에게 결코 무엇으로도 정죄할 수 없다. 라고 그러잖아요. 결코. 내가 나를 바로 볼 때 나는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힌 현행범이 맞아요. 나는 하나님, 신랑보다 나를 더 사랑해요. 이 내 안에 코스모스, 세상이 다 들어 있어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세상을 사랑해요.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래서 우울한 거고, 그래서 이렇게 슬픈 거고, 고통스러운 거고, 다 나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그게 나쁘다는 거 아니에요. 당연해요 그건. 그러니까 내가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힌 현행범 맞아요. 


그런데 자기가 맞을 돌을 어떤 이가 대신 맞고 이미 심판을 받아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모든 참소자들을 다 물리쳤죠? 참소자들을 다 물리친 거를 계시록에서 구원이라고 그런다니까요. 승리라고 그래요. 그거를. 얘가 깨끗해서가 그런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법, 참소자들을 물리쳐 버린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용서가 일어난 거예요. 자 그걸 믿지 않는 걸 뭐라고 그래요? 그게 하나님의 창조인데 이 없음, 부정한 걸 그냥 있음, 정한 것으로 하나님이 바꿔 버리는 게 창조잖아요. 죽여 버리고 새로 살리는 거니까 이걸 안 믿는 걸 죄라고 그러죠? 


그래서 주님이 여자에게 너 다시 나가서는 죄 짓지 마~ 그런 거예요. 너 창녀 고멜 맞아~ 그러나 너는 호세아의 아내란다. 호세아는 헬라어로 예수에요. 너 창녀 고멜 맞아~ 그런데 너는 호세아의 아내란다. 그런데 네가 호세아의 아내라는 걸 잊으면 또 나가서 간음하게 돼 있어~ 죄 짓지 마 그게 그 말이에요. 저 놈들처럼 법으로 너를 보고 슬금슬금 나 피해서 도망가지 마~ 이런 뜻이에요. 그게 죄에요. 그게 간음이란 말이에요. 진짜 간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베드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4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렇게 정해 놓은 사람들이 있어요. 진리를 던져도 그걸 로고스로만 받으면 그게 법이 되어 버리면 그 돌에 맞아 죽는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돌을 믿으면 그러죠? 돌이 한 어떤 걸 믿는 거죠. 그 돌이 이미 나의 간음의 현장에 던져져서 심판이 일어났다. 라는 걸 믿으면 산다. 라고 그러는 거예요. 



누가복음 20장 18절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이 율법주의자들, 그들은 돌에 맞아 죽는다는~ 가루가 되어서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라는 돌, 이건 곧 말씀이에요. 돌은요. 그러니까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라고 마귀가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이 떡은 말씀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돌이 말씀이란 말이에요. 자 그 말씀을 진리로 믿지 않고 여러분이 소로 율법으로 받아들여버리면 여러분은 그 말씀에 의해 심판받아요. 죽어라고 지키고. 그래서 계시록에 가면 생명책이 있고 행위의 책들이 있어요. 복수에요. 


여러분 성경을 진리로 보면 이게 다 십자가, 하나님, 예수로 진리로 하나, 한 책이에요. 그런데 이걸 법으로 보면 66권이 되는 거예요. 책들이 되요. 율법이 된다니까요. 세목이 되어버려요. 지켜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이게 행위로 심판받을 자들의 책이라고 그래요. 요한계시록에. 그런데 생명책은 단수에요. 또. 한 책이에요. 진리.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들이 심판받을 너희들이 나중에는 내 말로 심판받을 거야~ 그러잖아요. 내가 한 로고스, 그 말이 너희들을 심판할 거다. 그래요. 열심히 지켜~ 열심히 행해봐~ 그 말이 너희를 심판하는 도구가 될 거야~ 그런다니까요. 자 그렇다면 성전 마당에서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누군 거예요? 율법의 근거해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그 사람이 예수라는 돌에 맞아 산산이 흩어진 거예요. 그 말이에요. 


내가 그들 위에 떨어지면 그들이 산산이 부서지리라. 그러죠. 원래 율법에 기록된 돌로 쳐라. 라는 말은요 큰 돌, 한 돌로 이렇게 한 방에 찍어서 죽이라는 거예요. 안 죽으면 한 번 더 찍을 수 있지만 요만한 돌 갖고 수백 명이 모여서 하나씩 던져서 죽이라는 말 아니에요. 원어로 보면 그 하나로 돌로 찍어 죽이라는, 그게 무슨 말이냐면 뜨인 돌인 예수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신상을 부수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한 돌이 한방에 부수는 거예요. 그게 심판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그 돌에 의해서 자기 안의 모든 죄가 신상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을 아는 자는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죽어서 산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1장 25절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게 죽어도 살겠고~가 죽어서 살겠고~에요. 죽어도 산다가 아니라 죽어서 살겠고~에요. 죽어야 사는 거예요. 그 둘째 아들처럼 죽어야 살겠고, 죽어서 살겠고)
26 무릇 (그렇게)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믿는 자가 영생에 간다. 이런 뜻이에요. 어려울 거 없어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니까 그냥 죽는 사람들은 다 뭐야~ 뭘 모르면서도 대충 믿는 거지 뭐~ 그런데 성경이 그 돌을 가리켜서 모퉁이 돌, 머릿돌 이라고 그러죠. 그건 히브리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가장 처음 놓는 돌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돌을 똑같이 쌓아서 집을 지어요. 히브리사람들은. 처음 놓는 돌, 머릿돌. 뭐 우리 한국의 건물에 보면 그 앞에 머릿돌이라고 이렇게 그 머릿돌 아니에요. 머릿돌은 그 빌딩을 처음 지을 때 이런 돌로 이 빌딩 세우자~ 그래서 처음 놓는 기준이 되는 그 돌, 그게 모퉁이돌이에요. 그게 예수란 말이죠. 


그런데 모퉁이 돌은 세상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이라고 그래요. 버림받은 돌. 그러면 그 모퉁이돌과 똑같은 돌이 되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이 돌들은 어떤 돌이겠어요? 똑같이 세상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돼야 되요. 여러분들이 그 세상에게 받아들여지면 안 돼요. 튕겨져 나가야 된다니까요. 똑같은 돌이어야 되요. 


세상은 그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왜? 진리는 세상이 나쁘다. 나쁘다. 하는 것을 그 안에도 진리가 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세상이 옳다. 옳다. 하는 걸 그거 율법으로 지키면 죄다. 이러니까 저것들은 도대체 뭐야? 왜 말만하면 저렇게~ 자기들이 못 알아듣는 건데, 우리를 이상한 변태취급을 한다니까요. 그래서 쫓겨나는 거예요. 던져버린단 말입니다. 그게 산돌의 인생이에요. 여러분 선악의 구조 속에서 선과 악이라는 분리된 마음으로 사는 모든 인생들이 다 고통스럽게 살아요.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선악 속에서.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선이 되어 있어요. 추함은 악이 되어 있다니까요. 


누가 결정했냐고요. 이거를. 그리고 예쁜 게 뭐냐고요. 인간, 아담들이 자기가 합의한 거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귀신이 씌웠는지 그걸 다 따라가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이 정해놓은 선과 그 악, 추하다 버림받은 자들이, 악한 자로 몰린 자들이 아름다움이라는 그 선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절망하며 고통 받아요. 심지어 저는 쌍까풀 수술 잘못됐다고 자살한 사람 봤어요. 아무도 그 눈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만 거기에 관심 있어요. 그거 죽어버려요. 뭐 대단하다고 말이죠. 세상이 규정한 부라는 선과 가난이라는 악 사이에서 부라는 선에 근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고통 받아요. 스스로 고통 받아요. 


착함이라는 선과 착하지 않음이라는 악 사이에서 억지로 착해지려 노력하며 고통 받아요. 이러한 분리가 바로 율법이고 거기가 죽음의 현장이며 그 죽음의 현장이 지옥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이것과 저 것이 없는 곳이에요.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규정해 놓은 모든 것이 진리라는 하나로 모아져야 거기에 자유가 있어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모형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야지, 그 모형의 묶여서 질질 끌려 다니다가 정작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는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만 쌓다가, 고통스럽게 쌓다가 지옥 가는 거예요. 그거 자체에 가치를 두게 되면 인간들의 선악체계는 아주 매력적이에요. 그래서 소도 금으로 쌌던 거고, 옛 성전과 옛 성전 안의 모든 기명을 전부 금으로 싸요. 이건 상징적인 거예요. 전부 금이에요. 옛 것들. 다 모형이요 가짜들이에요. 율법은 그렇게 근사하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 금속에 들어있는 참 성전의 의미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소경된 인도자들이 진짜 성전을 무시하고 그 성전을 싸고 있는 금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 성전에 두고 맹세해야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는 게 더 가치 있느냐~ 너희들은 그 금에만 관심이 있지, 성전 하나님이라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구나. 그게 옛 성전이잖아요. 율법이라니까요. 그것이. 세상의 모든 도덕, 윤리, 선행 등은 전부 하나님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 자체 가치를 두게 되면 그게 바로 우상이 되요. 그리고 그렇게 산 나가 영광을 받아요. 기독교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막 살자 우리 안에서 뭐 죄밖에 안 나오는데 대충 그냥 막 살아~ 이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를 내 밖에 두고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두고 우상시 해버리는 거예요. 이것도 우상 숭배에요. 그러니까 잘 분별하셔야 되요. 나는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는 타자로만 보고 그저 죽은 자로, 죄인으로만 살겠다고 하는 거, 십자가가 다 해 냈다. 그게 우상이지 뭐에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나와 상관없는 십자가 그건 우상이에요. 성경은 분명 죽음과 삶을 동시에 일어나는 걸로 설명을 해요. 내가 예수라는 산돌에 맞아 죽는 것이 그것이 곧 삶이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아난 자들에게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없다. 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지향성이 달라져요. 그래서 고민하는 거고 그래서 괴로워하는 거고, 그래서 진리의 목말라 하는 거고, 이게 다 변화지 뭐에요? His change me 어떤 분들이 아까 이제 그 찬양할 때 저 양반 미쳤나 갑자기 His change me가 뭐야~ 맞아요. His change us 그 분은 우리를 바꾸고 계시다니까요. 진리로. 그런데 뭐 죽을 때까지 죄만 짓고 간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요. 도대체가. 역시 그것도 죄와 선을 이분법으로 보는 거 아닙니까? 그건 진리가 안 된 거라니까요. 물론 우리의 행동이 완벽하게 바뀐다. 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진리 안에서는 분명 감격이 있고 기쁨도 있고 안식도 있고, 지향성과 방향성의 변화라는 게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평생의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아예 평생 듣던 걸 또 듣느냐고, 그런데 유독 성경 말씀만 들어도, 들어도 새롭죠? 맨 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 때마다 새로운 게 그게 매스터피스(masterpiece) 라는 거예요. 걸작. 여러분 세계적인 걸작들은 지금 봐도 오늘 만든 것 같아요. 말씀이 그렇다니까요.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는데 늘 새로운 거, 이게 진리란 말이에요. 그런 목마름과 굶주림을 우리는 토로해야 되요. 부르짖어야 된단 말입니다.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왜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선생을 주신다고 하셨겠어요? 하나님이 그러죠. 내가 말씀과 함께 선생을 준다고 그래요. 가르치는 선생을. 인간들은 이 말씀을 반드시 소로만 읽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말을 주어 가르치는 자들을 보내는 거예요. 계속. 그리고 그걸 받은 자들이 계속 가르치는 자로 나가는 거예요.

 

신라 때 이스라엘의 유리병이 실크로드,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통해서 신라로 들어왔어요. 신라가 BC57년에 세워진 나라니까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의 유리병이 신라에 들어왔다니까요. 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천년 전이면 예수님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입니다. 그때 신라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타고 거길 갔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봤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경주 석굴암에 보면 원래 동양의 그 부처상은 벽에다가 이렇게 도장처럼 도들 새김으로 새기는 거거든요. 그런데 석굴암에 있는 부처상처럼 그렇게 만든 건 그리스 로마 양식이에요. 이미 신라 때 그게 들어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석굴암에서 돌 십자가 발견됐잖아요. 여러분 중국의 경교가 당나라 때 들어갔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축출당한 네스토리우스 인가요?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라는 단장을 앞세우고 당나라 때 중국에 들어갔다니까요 그래서 그걸 경교라고 했는데 그 교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비석도 남아 있는데 성경 교리에요. 그리고 그것들이 대승불교의 영향을 주어서 뭐 마야부인이니, 뭐 독생자를 낳은~ 마리아, 이름이 다 비슷비슷한 게 성경의 영향을 대승불교가 받은 거예요. 그래서 대승불교에는 나무아미타불 이 타력 종교화 된다니까요. 대승불교가. 하나님은 끊임없이 진리를 던지고 계셨어요. 역사 속에. 뭘 이 백년 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그전에 우리 조상들은 뭘 어떻게 해요. 그걸 여러분이 왜 신경 쓰냐고요? 그래 기독교가 이렇게 들어와서 오늘날은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그 때 이전보다 많던가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진리를 깨다는 사람은 비슷해요. 거의 없어요. 성경이 없어요. 거의 없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러죠? 나가서 막 말씀 전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와서 하나님 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세요. 이거 도대체 뭔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래요. 알아듣던지 못 듣던지 그대로 가서 전해라. 듣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려운 게 맞는 거예요. 어느 날 딱 뚫리면 그처럼 쉬운 게 없어요. 어려운 게 맞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주세요. 어떻게 해야 알아듣기 쉬운 말이에요? 뭐 국민 학교 5학년 국어책에 나오는 수준으로 얘기하면 진짜 알아들을까요? 천만에요. 못 알아들어요. 아무리 쉬운 말로 해서 못 알아요. 마태복음 7장 13절 보세요.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22장 14절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게 올리고스 라는 단어인데 적으니라, 적으니라~ 거의 없다. few 라는 단어에요. a few는 조금 있는 거죠? few 거의 없음. 거의 없다. 그 거의 없는 와중에 이 만큼 모이면 이건 대단한 거죠. 그러니 그 거의 없는 그곳에서 진리를 외치면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처럼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진리 안에서는 풍성하고 기쁘고 자유롭지만 세상 속에서는 외로워요. 고립되어 있어요. 할 얘기가 없어요. 그렇게 진리는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걸 그르다고 지적하고 그들이 그르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걸 옳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뺨이나 맞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수염이나 뽑히고 그러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전부 그랬잖아요. 세상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이 껍데기인 세상, 옛 성전, 율법을 맞고 서서 너희는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게 진리를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들이 굳게 믿고 있는 기독교를 가리고서 야 이거 가짜야~ 라고 이야기하는 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에요. 절에 가서 이거 가짜야 이거는 봐줄 수 있어요. 그런데 교회 강대성에서 이게 가짜야 이게 뭐냐고요.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일을 했어요. 다른 종교인들한테 가갖고 네들 회개해라 안 했다니까요. 꼭 성전에 가서 그걸 하라고 그래요. 그러면 맞아 죽으라는 얘기에요. 그거. 그렇게 말씀에 물을 타는 거, 그걸 섞였다. 라고 하죠.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잖아요. 그걸 술이라는 단어로 써요. 그래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러면서 항상 같이 오는 게 뭐에요? 성령이죠? 영은 내 말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했으니까 섞인 말이 술이라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건 뭐에요? 올바른 진리를 말을 따라 행하라. 에요. 디도서에도 나오죠? 날 먹은 여자들아 너무 술에 종이 되어 살지 말고 순절한 말을 하라. 그러잖아요. 술과 말이 무슨, 술 취하면 엉뚱한 소리해서 그러는 건가. 섞인 말, 거기에 취하면 약도 없다는 얘기에요. 단순히 술 마시지 말라는 말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술을 한모금도 안 마셨어야 되요. 다들 오늘 나가면서 또 그럼 한잔씩 할까~ 이러지 말고요. 요 악당들이 말야~ 꼭 그런 거는 그냥~ 들키지 말고 먹어요. 예레미아 8장 8절 보세요.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서기관이 뭐하는 사람이죠? 성경 필사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게 거짓 붓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거기다 뭘 더하거나 고치는 거죠? 그게 말씀을 거짓되게 한다고 그래요.)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간음이래요. 거짓말이래요. 그건 다. 조금이라도 고친 건. 왜? 이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다 보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 세상의 상식으로는. 그러면 고치려고 하는 마음이 들겠죠? 자꾸. 자기 생각을 섞어서. 히브리어 같은 거는 파리 똥 하나만 떨어져도 다른 글씨가 되요. 그러니까 얼마나 이게 오도되기 쉽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걸 거짓말이라고 그래요. 네들의 거짓 붓으로 고친 거. 진리만 말해~ 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만 말해~ 고친 말에 무슨 지혜가 있겠니? 그게 간음이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게 하는 거잖아요. 그게. 그죠? 고치는 게. 그런데 말씀은 뭐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설명하는 게 말씀이니까 이걸 더럽히는 건 하나님을 욕 되게 하는 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건 죽어야 되요. 심판받아야 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겁도 없이 그 짓들을 하고 있어요. 교회 키우려고. 덩치 키우려고.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자기 말로 위로해 줘서 보내려고 그래요. 그 다음 주에 또 오게 하려고. 아니에요. 무서워서 못 와야 되요. 진짜 여러분이 진리를 들었으면 그건 간음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사도바울도 로마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야단 친 거예요. 로마서 2장 17절.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훈장선생님)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렇게 율법을 성경을 가르치면)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이거는 앞에서 설교는 도적질 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뒤로는 네가 도둑질을 한다. 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목숨 걸고 자기 일을 정결하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니까요. 도둑질 하지 말라. 라고 가르치는 그게 말씀을 법으로만 가르치는 그게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하는 거란 뜻이에요. 간음하지 마라라. 라고 이렇게 표피로 가르치는 그게 간음이다. 라는 뜻이에요.)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이제요? 여러분이 제발 이 말씀을 갈급함을 좀 가지셔야 되요. 뭐 너무 부담스럽게 공부하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을 좀 하시면서 사시라고요.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나누는 이 만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가치 있게 여기라는 거예요. 수십억 인구 중에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과 진리를 듣겠다고 하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정자 수십억 개가 난자에게 달려가서 하나 딱 붙는 그 확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정자를 받는지 아세요? 제일 빨리 달려 간 거. 아니에요. 와글와글 붙어 있어도 그 난자가 원하는 거 하나만 딱 끌어당겨요. 들어가면서 꼬리가 잘리고 머리가 되어 들어가요. 모든 것 안에 진리가 들어가 있다니까요. 그러면 이게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 여러분은 아셔야 되요. 골프 치러 간다고 안와, 기분 나쁘다고 안와, 코에 여드름 났다고 안와 그러면 할 맛이 없어요. 진짜로. 이 사람들이 이걸 뭘로 알고 이렇게 가치 없이 여기나 이 생각밖에 안 든다니까요. 그렇게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아버지의 것, 진리의 것, 좋은 것, 이걸로 함께 누리며 이렇게 있는 걸 코이노니아 그걸 교제라고 그래요. 같이 뭐 밥 먹고, 우스개 소리나 하고 노는 거가 교제가 아니에요. 교회의 교제는. 갈라디아서 6장 6절 보세요.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하 좋은 말이죠. 이건 가르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거 다 갖다 바쳐서 같이 쓰라는 말 아니에요. 물론 그건 좋은 행위에요. 잘하는 거죠. 그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무얼 갖고 교제해요? 그 진리, 좋은 것으로 함께 하는 거예요. 그걸 코이노니아 라고 해~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요. 그러면 이 교제가 정말 좋다면 여러분 사랑할 때 서로 아내와 남편, 애인끼리 그 교제하는 그 시간, 그 시간이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하고 그럽니까? 그런데 이 진리로 교제하는 이 시간이 그렇게 가치 없다면 저는 그거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냥 친한 사람 거기 있다고 거기 계속 있으면서 오지도 않아. 삼십년을 있었는데 정이 있지 어떻게~ 그러세요. 그러면. 그 친목계지 뭐에요. 그게. 중국 선종의 추부조가 달마대사죠. 다르마에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라는 뜻이에요. 달마가 중국의 포교를 하러 가기 위해 양무지 한테 갑니다. 그런데 양무지가 이미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달마는 인도사람이에요. 이미 불교 관심이 있어서 절도 여러 개 짓고, 서책도 많이 발간을 해서 많이 이미 나누어주고 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달마를 다르마를 보자마자 양무지가 그러죠. 황제잖아요. 중국의 황제,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 내가 이미 불교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절도 짓고 뭐 자랑을 한 거죠. 너스레를 떤 거지. 그랬더니 달마가 그랬어요. 황제한테. 그렇게 해서 진리를 알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진리를 알 것이다. 그랬어요. 그 양무지가 쫓아 버렸어요. 그래갖고 그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가서 이제 수행을 하기 시작했어요.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진리를 좀 알려달라고 계속 노크를 하는데 안 열어줘요. 그러면 물러가고, 물러가고, 물러가고, 계속 물러가요. 안 열어 줬어요. 진리의 진짜 갈급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였어요. 그런데 며칠 못 견디고 다 떠나더라는 거예요. 네들이 진짜 죽기 살기로 그걸 원한다면 네들이 이렇게 떠나겠어. 그런 거죠. 실제로 어떤 사람이 그 문 앞에 끓어 앉아서 눈이 소복이 그 몸에 쌓였는데도 꽁꽁 얼었는데도 계속 앉아 있어요. 그런데 문 안 열어 줬어요. 그러자 이 사람이 내가 그 진리를 알지 못 할바에는 차라리 신체를 포기 하겠다 그래서 칼을 꺼내서 팔 하나를 잘라 버렸어요. 그때 달마가 뛰어나온 거죠. 너다. 그 둘이 부처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부처들이 된다고요. 그래서 소림사에서는 합장을 한 손으로 하는 거예요. 무술 하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소림사에서 최초를 한 사람이 한 팔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절에서도 그 진리는 물론 우리 진리와 다른 거지만, 그렇게 말할 것도 아닌 거예요. 우리 기독교에 진짜 참 진리 있는 이곳에 그 정도의 열정도 없으면 되겠어요. 그 정도의 열정도 없다면 이게 진짜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그게 진심이겠느냐고요.

 

여러분 더 진지해지셔야 되요.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의 관한 문제잖아요. 이게 진짜 양식이라면서요. 우리가 간음한 자 맞아요. 현행범 맞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나만 사랑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다 현행범으로 지금 폭로당한 거예요. 그러나 돌은 이미 던져졌어요. 그걸 믿자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라고 그런 거예요. 여러분이 용서해야 여러분이 진리를 안 거예요. 그러나 율법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를 조롱하죠. 우리를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버려졌고 모퉁이돌이 되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가는 게 맞는 거예요. 너희들도 나와 똑같이 이렇게 버려져서 성전이 되어가자. 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은 그 진리를 외치셔야 되요. 그리고 세상에게 버림받으셔야 되요. 예수님은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버림받으셔야 되요. 예수로 사세요. 그러나 당당하십시오. 너무 그냥 죽을 것 같은 글 같은 거 쓰지 마세요. 당당하게 야 그 진리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나. 그런 말 좀 이제 들어보자고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이렇게 세상은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마음의 신비에 새길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저희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돌비는 이미 던져져서 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신비의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돌비를 붙들고 있는 그들의 그 돌비를 예수라는 돌로 깨 주옵소서. 그리하여 진리가 그들을 자유케 하는 그 기적이 이곳 서머나 교회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