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17 내가 음녀 이세벨이며 내가 음녀 바벨론 입니다 마 5:27-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08

마태복음 5장 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저는 지난 시간에 기독교에서의 그 죄의 개념은 단순히 행위화 되어서 이렇게 제품으로 밖으로 터져 나온 부도덕과 비 윤리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그런 어떤 존재론적 측면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신 이유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구원과 유기를 결정짓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생명수를 마셔야만 비로소 하늘 존재가 될 수 있는 성도의 그 존재론의 회복, 오해되어지고 곡해 되어져 있는 성도의 그 존재론의 회복을 위함이라고 말씀 드렸죠. 그러한 존재론의 회복이 바로 생명차원으로의 몰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한 이 존재론의 그 터전이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종교행위와 선해 보이는 행사들은 전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무가치한 것이며 무의미한 일이 되는 거예요. 참된 생명에 대해서 죽어 있는 자, 즉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의 그 진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자를 죄인이라고 하는 거고 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모양의 사유와 행위도 다 죄라고 그랬죠? 성경은 그렇게 과녁을 벗어나서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자들을 ‘실족한 자’ 라 부르면서 주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라고도 불러요. 그렇게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어야 하는 그 나무와 가지의, 그래야 열매가 맺는다고 그랬죠. 


열매는 뭐? 12가지 실과, 생명이란 말이에요. 그래야 생명이 맺혀지는데 이게 끊어지면 열매를 못 맺게 되는 거죠. 이걸 이혼이라고 그러고. 이걸 간음이라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렇게 이혼되어지고 간음되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독립을 위해 달리는 자들, 이게 역사 속 아담들이잖아요. 이렇게 죄라는 건 행위화 되어서 제품으로 만들어져야 비로소 성립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 안에 내재되고 잠재되어져 있는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개념인 거예요.

 

그래서 행위화 되어 나오지 않은 그 마음속의 탐심까지도 죄라고 한 거란 말입니다. 아직 제품으로 안 나왔는데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눈을 하나 뽑는다거나 손목을 하나 잘라낸다고 해서 그 존재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실제로 예전에 아주 그 뭡니까? 그냥 그 아주 철저한 그러한 금욕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은요 실제로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심지어 거세까지 한 사람도 있죠? 이 성경말씀들을 그렇게 곡해를 하면 그렇게 큰일 나는 거예요. 엉뚱한 짓들을 버리는 거죠. 그런다고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 되냐고요. 이거 몇 개 자른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정도를 지적하고 경고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 존재의 본질을 지금 까발리고 계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른 눈과 오른 손을 뽑고 찍어라 라는 권고는 단순히 우리의 죄 된 육의 절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악과라는 그 인본의 에너지, 선악과를 먹으면 힘이 생겨요. 에너지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니까. 제가 인본의 에너지라고 그러는 거예요. 선악과를. 그런 인본의 에너지를 향한 인간 욕망의 눈을 뽑고 그들의 손을 뻗어 잡잖아요. 그 손을 손모가지를 똑 잘라버리겠다. 라는 그런 하나님의 선언이요. 약손인 거예요. 그래야 살거든요. 


그 탐욕의 눈과 탐심의 손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리라.’ 의 세계로 밀려들어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거 잘라야 된단 말이에요. 그거 뽑아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 예수의 눈이 뽑혀지고, 우리 구약에서 찾아 봤죠? 누가 소경이냐? 내 아들이 소경 됐지 않냐?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누가 소경이냐? 내 종이 소경 아니냐~ 이렇게. 예수님의 눈이 뽑혀진 거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이 손이 십자가에 박혀 절단이 된 거란 말입니다. 무용한 게 되어 버린 거란 말이에요.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남과 여, 신랑과 신부 등의 구분은 생물학적인 성의 구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영적 역할을 의미를 담고 있는 구분이란 말이에요. 아들을 가진 자, 그 씨를 가진 자, 말씀을 가진 자, 말씀을 씨라고 하고 아들을 ‘제라’ 후손이라고도 하고 그 씨라는 단어거든요. 같은 단어란 말이에요. 그 말씀, 아들, 씨를 가진 자를 가리켜 남자, 신랑, 아들 이렇게 부르는 거고, 그 아들로부터 씨를 생명을 받아야 생명을 받아야 비로소 존재일 수 있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여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씨를 받으면 씨를 가진 자, 말씀을 가진 자, 아들 제라, 후손을 가진 자 해서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아들로 편입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 탄생의 메카니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씨를 가지기 위해선 나는 여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선행 되어져야 되는 거죠? 그런데 여자는 뭐에요? 남자의 갈비뼈에서 갈비뼈가 없으면 남자의 죽음이 잠듦이 없으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 없었던 자, 나는 여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씨를 받지요? 그죠? 남자의 씨를 받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사랑도 없는 상태에서의 그 여자들의 그 열심과 노력, 여자의 그 아들 흉내 내기. 그래서 교회에서 여자야 잠잠 하라 그러는 거예요. 


여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서 복음도 설명하고 기도도 하고 해야지 왜? 여자는 뭐 집에서 밥만 하고 설거지만 해요. 뭐 여자들은 교회에 와갖고 식당에 가서 밥만 하고 설거지만 하고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보통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는 여자들은 이 위도 못 올라옵니다. 좋은 교회에요. 여기는. 그거 엉터리로 성경을 봐서 그래요. 표피적으로. 남자 여자를 그냥 생물학적인 그 어떤 그런 성의 구분으로만 보니까 성경을 그 따위로 엉터리로 보는 거죠. 그래서 여자들이 그냥 교회에서 찍 소리도 못하고 그렇게 다니는 거죠. 아니요 괜찮아요. 그렇다고 너무 떠들고 다니지는 마세요. 


자 그렇게 그러한 여자들의 자기 ‘의’ 챙기기 있죠? 자기 스스로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씨 필요 없어~ 나도 하나님처럼 살 수 있어~ 이걸 간음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자기 의. 그러니까 성경에서의 간음이나 이혼의 개념은 단순히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 윤리의 범주에서 이해되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에 국한 된 게 아니라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그런 인간 본성의 한계와 내용, 실체 그걸 지적하고 폭로하는 개념이란 말이에요. 그게 이혼과 간음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마. 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과 신부가 하나로 연합된 상태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된 거예요. 이게 혼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이혼하지 마~ 라고 했을 땐 너 나 떠나지마~ 라는 뜻이에요. 너 나 떠나게 되면 그게 간음하게 되는 거고 그게 죽는 거야~ 너 나 떠나지마~ 가 이혼하지 마~ 란 말이에요. 제가 다음 시간에 확실하게 결론을 지어드릴 텐데. 


너희들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나에게 꼭 붙어 있어라 내 갈비뼈가 없었으면 너희들은 존재일 수도 없었어. 그런데 너희들이 무슨 독립을 주장하고 그걸 추구하고 그래 아니야 이혼하지 마~ 떨어져 나가면 죽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요한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 이혼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주세요.



요한복음 15장 4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이게 뭐에요? 예수님 안에 갈비뼈로 함몰되어 들어가 있는 사람이죠. 이게. 성경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그러죠. 사람 단수인데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이 연합이 깨지면 사람도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의 사람,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항상 예수와 신랑과 연합이 되어져 있는 상태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과실은 12가지 실과, 생명수에 의해 맺어진 12가지 실과가 뭐다? 생명이니까. 아들의 생명. 아들을 떠나서는 그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지 않고는 은혜를 부여받지 않고는 생명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과실을 못 맺는다. 그러는 거죠? 착한 일을 못 한다. 라는 말이 아니에요. 불교인들이 훨씬 더 착한 일 많이 합니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보세요. 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이 풍성하게 열리는 거예요. 여러 가지 착한 일이 주렁주렁 열린다는 얘기가 아니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목숨 바쳐 아프리카에서 50년씩 봉사하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뭐에요? 생명을 못 맺는다는 뜻이에요. 생명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무것도 nothing )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당연하죠.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서 나가면 이건 쓰레기란 말이에요. 열매를 못 맺는 거니까. 그러면 불살라 버려야죠. 땔감으로 써야죠 뭐. 집에 각각 뗄감들 있잖아요. 교회에 가면 신경질 내고서 밥 달라고 그냥 평소에 먹지도 않는 거 그냥 막 두 그릇씩 먹으면서 못 가게 하는 뗄감들 있잖아요. 그걸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게 바로 간음하지 마. 이혼하지 마의 그 진의를 풀어서 설명해 주신 부분이란 말이에요.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의 상태가 간음이며 이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를 떠나 나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의지해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그들이 버림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불속이라는 거예요. 불속. ‘게헨나’ 지옥이라는 거죠. 


이러한 내용들은 간음이라는 단어에 그 어원적 본질을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간음이라는 단어 ‘모이코스’는요 행동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불신앙, 불 경건이라는 뜻이에요. 간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성경이 말하는 간음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되실 거예요. 


계시록 2장 20절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자 음녀가 행음을 하게 간음을 하게 하는 음녀가 하나 나오는데 이세벨이에요. 그런데 그가 종들을 가르친다고 그래요. 교사에요. 스승이에요. 설교자에요.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고 그래요.)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간음이라는 게 자기의 행위로 하늘에 올라 보겠다. 라는 게 간음이라고 그랬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의 독자적인 나를 구축하려고 하는 게 간음이니까. 그게 이세벨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음녀 이세벨이 행음케 하는 거잖아요. 그래 해봐라 그러면 내가 네 행위대로 갚아 주마.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에요. 죽여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행위대로 갚아 준다는 건 행위대로 이렇게 계산해서 상주고 벌주고 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왜? 백 개 지키다가 하나 어기면 빵점이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무슨 테트리스도 아니고 올라가면 또 무너지고 올라가면 또 무너지고... 백년을 진짜 완벽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너무너무 죽기 전에 너무너무 아파서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 잠깐 원망이 들었는데 아니지, 아니지 그러면서 막 쥐어뜯었는데 하나님이 빵점! 그러면 어떡할 거예요. 인간은 그런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이 거기라니까요. 


그 동안에 그래도 백년쯤 한 거 이거는 쌓아서 하나님이 상줄 근거로 스팩으로 쌓아 두셨겠지~ 천만의 말씀 그거 다 빵점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뭘 쌓는다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을 쌓아서 내놓을 게 없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이세벨이 뭘 먹게 한다고 그래요. 우상의 제물, 그런데 제물이라는 게 뭐에요? 성전에서 드려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더럽게 만드는 거. 우상의 제물을 먹인다는 거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예수를 먹여야 되는데 엉뚱한 걸 먹여가지고 힘만 좋게 만들어서 인간들이 하는 행위만 쌓아 놓는 거.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 행음은 어디에서 보여 지는 거다? 성전, 교회에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에서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독자는 오로지 성도라니까요. 그러면 여러분은 성전이에요? 아니에요? 성전이죠. 여러분이 교회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뭐 여기저기 있는 교회들에게 뭐 아무개 교회 아무개 교회 아니라 여러분 각자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 음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님이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은유적으로 설명을 하시면서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일어난 일로 봐야지 밖에서 음녀를 찾으려고 하면 안 돼요. 이게 다 내 안에 있는 일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나를 보아야 되는 거지. 말씀을 통해서 너의 나 이외의 그 너의 행태를 지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가 바라보는 그 너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러한 권한이 없어요. 누가 누구를 판단합니까? 피조물이. 누가 긍휼의 대상이고 누가 유기의 대상인지는 하나님만 알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저는 구원 받은 거 같아요? 아닌 거 같아요? 이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되게 곤란해요. 모른다고 그러면 꼭 영성 없는 목사가 되가지고 창피해가지고 그냥 말도 못하겠고, 그런데 몰라요. 어떻게 알아요. 제가. 


그러한 것들은 그들의 표피적 행위로 구분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 라는 존재를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강력한 스승이 어디로부터 나에게 접근합니까? 어디서 그 가르침이 가장 많이 들리고 강력하게 들려요. 내 안에서요. 인간은 어떤 정보나 외부에서 어떤 지식을 습득하면 곧 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내 색깔로 입혀내는 게 인간이라고요. 그러니까 가장 강력한 스승은 나라니까요. 


그 이세벨이 가르쳤다고 그러죠? 내가 나를 가르친다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바꿔주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음녀가 가르치는 대로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게 내 안의 음녀 이세벨이 있는 거고 내 안에 간음하는 여자가 있는 거지 나는 괜찮은데 내 밖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내가 음녀화 되는 게 아니에요. 친구 잘못 만나서 음녀 되는 거 아니고 내가 음녀라고요.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괜찮은 나를 추구하는 걸 성경이 세상과 벗한다. 라고 해요. 


세상과 벗한다는 건 단순히 뭐 세상에 있는 쾌락이나 돈이나 힘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그것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 속에서 나를 구축하는 걸 세상과 관계에 있이 사는 세상과의 벗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과 벗으로 살아야하는, 하나님이 우리보고 벗이라고 그러잖아요. 아브라함 보고 벗이다. 그랬잖아요. 내 벗, 내 친구 그런데 그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 그 하나님의 벗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관계 맺으면서 자꾸 그 세상의 벗이 되려고 하는 거, 이걸 뭐라고 그래요? 이걸 우상 섬김이라고 그러고 이걸 간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성경이. 


야고보서 4장 4절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 간음하는 여자들은 유곽에 있는 어떤 그런 분들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과 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간음하는 여자들아~ 이렇게 부르는 건. 그렇다면 왜 성경이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음녀의 이름을 굳이 이세벨이라고 명명을 하는지 잘 보자는 말이에요. 이세벨은 유다와 아합의 아내죠? 이세벨 왕비는 아합 왕에게 시집 오면서 자기가 섬기던 우상들을 왕창 갖고 왔어요.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이런 풍요와 다산의 신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섬기게 만든 여자에요. 우상에 제물을 먹게 한 여자에요. 간음을 하게 한 여자죠? 맞아요. 그죠? 


하나님과 신랑 신부로 살아야하는 이스라엘에 와서 다른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소개시켜 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이스라엘을 간음케 한 여자고 그 여자가 자체가 간음한 여자란 말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걸 행음케 한다. 간음케 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여러분을 세상의 힘을 얻으세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세요. 이런 뭐 고지론이나 기복사상 이런 유치한 거 말고 그건 물론 간음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말고 여러분 사람다운 사람이 되세요. 신앙인으로서 이 따위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예수와 십자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그들의 행위만을 독려하여 도덕과 윤리로 계속 끝내는 거. 너를 빛내라는 거예요. 그게. 그건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라. 이거 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그거는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렇게 사시라는 거죠. 그러한 음녀 이세벨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가 이러해요. 



열왕기하 9장 36절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음녀 이세벨의 고기를 개들이 뜯어먹도록 저주하죠. 요한계시록에 가면 어떤 여자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장면이 나와요. 한번 가보죠. 



계시록 17장 16절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자 음녀가 나오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열왕기서에서 언급된 그 이세벨이 요한계시록에 이렇게 등장해요. 이렇게 음녀 이세벨은 간음하는 여자는 반드시 죽어야 되요. 철저한 멸망이에요. 그런데 이게 음녀 이세벨이 요한계시록에 어떻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보죠. 



계시록 17장 1절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어디로 가요? 광야로 가죠? 성령이 어떤 인물을 광야로 데리고 간적 있었어요. 지금 그 이야기를 연계시켜서 지금 설명을 하고 있어요. 이 광야는요 이미 계시록 12장에 한번 등장했던 곳이에요. 한번 가볼까요. 



계12장 5절.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열둘은 항상 아들의 숫자라고 그랬어요.)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시편 2편에서 이게 누구다? 예수에요.)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승천입니다.)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천 이백 육십일, 한때 두 때 반 때, 세달 반, 마흔 두 달 똑같은 거죠. 다. 이 역사, 인생을 이제 상징으로 가리키는 숫자란 말이에요. 이 열 둘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아들 안에서 아들로 입양된 편입된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1장 1절에서 뭐라고 그러죠? 교회를 흩어진 열 두 지파에게 편지하노라. 그래요. 열 두 지파가 어디에 있어요? 그때? 그런데 흩어진 열 두 지파에게, 교회에게를, 열 두 지파라고 이야기해요. 


요한계시록에서도 계속해서 열 두 지파, 열 두 사도 이것이 열두 문 위에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죠? 교회란 말이에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열 둘, 이 열 두별, 면류관을 쓴 이 여자는 교회란 말이에요. 그 교회가 도저히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요. 왜 없음이니까. 원래가. 없음이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와, ‘무트타무트’ 죽은 여자니까 잉태 못합니다. 원래 못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는. 선악과 먹고는. 하와, 사라, 또 라헷, 니브가, 마리아 전부 애 못 낳는 여자들이죠? 그런데 이 라인에서 예수님이 와요. 그리고 맨 마지막이 마리아냐면 그 마리아가 쓴 물이라는 뜻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쓴물이 단물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나뭇가지가 던져져야 되는데 그 십자가에 의해 마리아가 단물이 되어 생명수 그 생명수를 부여받고 잉태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도저히 불가능한 여자가 그 어떤 그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인의 후손, 아들, 제라, 예수그리스도를 낳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를 낳고 어디로 가요? 광야로 가요. 스데반에 의하면 그 광야는 광야 교회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 교회생활, 여기가 뭐에요? 양육 받는 곳이에요. 여러분이. 그런데 양육이라는 그 단어 ‘엡투레포’ 라는 단어가 무슨 말이냐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다. 라는 뜻이에요. 이게 양육하다거든요. 그러면 어떤 장성한 분량까지겠어요. 척척 나와야지 이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 교회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러면 또, 속으로 거봐 자라 돼야지 뭐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의 의해 바로 그 광야에서 무엇을 행해 놓으셨는지, 완료해 놓으셨는지를 알아야 그 분량까지 자랄 거 아니에요.

 

그 광야에서 예수님이 어떤 걸 이루셨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거기까지 자라야 되는 게 교회 안에서의 성도, 여자들의 일이란 말이에요. 광야에 가서 예수님이 시험받았어요. 어떤 시험 받았습니까? 돌로 떡 만들어 먹어라~ 예수님은 산돌이라고 그래요. 모퉁이 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분이 원수들의 만나, 떡이 돼서 이 땅에 온 걸 십자가라고 그러죠. 


그러면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라. 라는 건 정확하게 복음,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 먹고 힘내서 말씀이 복음이 나에게 힘이 되어서 너의 생명을 역사 속 생명을 유지하게 하라. 이게 교묘한 거예요. 여러분.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은혜 이야기 다 하는데 그걸 인간의 자존심 혹은 그 존재의 자랑이나 설명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는 이게 마귀의 속삭임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그래요? 아니야 나 돌로 떡 만들어 먹고 그걸로 내 생명 유지할 거 아니야~ 나는 떡 돼서 죽을래. 그래서 떡이 돼서 죽으셨어요. 십자가에서.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러면 천사들이 수종들 거 아니야~ 이것도 역시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성전에서 묵시 속 성전에서 역사 속으로 뛰어내린 분이죠. 그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그래요. 성육신.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뛰어내리셨으면 천사들이 수종들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 되는데 수종을 든 게 아니라 손을 쏙 빼버려 갔어요. 뚝 떨어져 죽었네요. 십자가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에서 뛰어내렸는데 아무도 그분을 수종들어 주지 않았어요. 다 그분을 버리고 죽게 놔뒀단 말입니다. 야 하나님 시험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나 그냥 죽을 거야. 내가 성전에서 뛰어 내린 건, 죽기 위해 온 거야. 두 번째에요. 세 번째는 나에게 경배해 ‘브로스큐네오’ 예배라는 뜻이에요. 연합이란 뜻이에요. 뭘, 뭘 향하여 입 맞추다. 연합인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뱀이 되어 죽으셨죠? 놋 뱀이 되어서 죽으셨어요. 뱀과 예수님이 연합된 거예요. 죄인이 되셔서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 이 부귀영화, 만국, 천하만국을 줄게. 

아니야~ 나 이 천하만국 내 백성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거 아니야. 나 하나님 나라 완성하러 왔어. 그리고는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해야지~ 왜 내가 너에게 경배해. 세 개가 다 뭐에요? 이게? 성경은 우리 이 피조물들의 처음자리를 낱낱이 폭로하고 하나님의 그 창조주 되심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찬송이 터지게 하는 게 성경인데 마귀는 항상 이 음녀들은 어떻게 가르치냐면 

'그래 그게 복음이잖아. 그러니까 그걸 갖고 너희들을 열심히 치장하고 성숙시키고 변화시켜서 다른 이들이 너희들을 존경하게 해. 너희들을 롤 모델 삼게 해.'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걸 잘 가르치는 거 아닌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기 관음사나 이런 데로 가세요. 그건 기독교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자랑하고 증명하는 데 하나님마저도 끌어당겨 사용하려고 하는 이게 행음이며 간음이며 세상과 벗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이라는 신랑과 이혼한 자들의 그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반드시 광야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이 세상에서 복음을 받은 자로서 아들을 가슴에 품은 자로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 지고 부인당하여 죽는 그 자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거예요. 거기가. 그게 예수님이 광야에서 성취한 거니까. 착해지는 것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거. 바꿔 말하면 십자가 뒤로 점점점 작아지고 이렇게 숨어 들어가는 그걸 양육이라고 그래요. 제자 훈련해 갖고 뭐 저기 어디 그냥 군사가 되어서 다른 데 가서 순교하고 죽는 이런 용사들을 만들어내는 게 양육이 아니에요. 광야에서 양육을 받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렇게 수렴되어 들어가게 되요. 몰입되어 들어가게 된다니까요. 그게 여자가 광야에서 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자는 반드시 광야에서 아들이 받으신 시험을 받도록 되어 있어요. 그 양육의 과정에 동원 되는 게 여전히 그 여자 안에 남아 있는 마귀적 속성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구원받고 바로 성자가 되지 않는 이유가 그거에요. 그 안에 있는 그 마귀성으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점점점 잃어가는 거예요. 이게 양육이라니까요. 그래서 여자 안에서는 늘 시험, 즉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야 이 죄의 법이 계속 이기네. 그러잖아요. 어떻게 계속 이리로 끌고 오니? 백대 빵이야.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을 여자가 광야에서 무시무시한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놓은 게 계시록 17장이란 말이에요. 


그 여자가 광야로 가서 양육을 받는데 광야에 가봤더니 성령에 끌려 광야 가봤더니 그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어요. 그런데 결국 그 여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짐승에게 맞아 죽어요. 벌거벗겨져서 누구의 모습이에요. 예수의 모습이에요. 조금아까 봤잖아요. 벌거벗겨서 물어뜯어서 먹어버린다니까요. 짐승이. 그렇게 광야에서 짐승을 타고 있는 그 여자는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절대 타자로서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서 여전히 나를 가르치고 훈계하고 이끌어가려고 하는 마귀적 속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 12장에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 여자가 도망간 광야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13장에 그 유명한 666 짐승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여자가 이 짐승을 타고 앉아서 짐승이 뭐였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 맨 위의 용, 용이 권세와 능력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죽죠? 이 세상의 권세, 이 인간들의 피조 세계의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그런데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죽었다가 살아난 흉내를 낸단 말이에요. 성자 예수를 흉내 내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권세 이 땅의 권세와 가치를 추구하는 가짜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이게 맞아~ 라고 하면서 기적과 이사를 동원하여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죠? 이게 맞는 거야~ 맞는 거야~ 분위기 잡는 거예요. 그러잖아요. 성령집회다 뭐다 하면서 기적과 이사를 막 행하면서 은 이빨, 금이빨을 막 바꿔주면서 이게 맞는 거야~ 그거 다 바꿔주면 어떡할까요. 그거. 이 이빨이 전부 그 누렇게 금으로 바꿔 갖고 어떡할까? 아 그거 걱정 되서도 못가겠는데 나는 거기에.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흉내를 그대로 내는 거죠? 그 모습이에요.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를 내는데 하나님의 자리에는 못 올라가요.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수, 안식의 수, 7과 완전 수 하나님의 수, 삼위의 하나님 3 그래서 777을 하나님으로 표기했단 말이에요. 거기에 못 미치는 흉내만 내는 자 666이에요. 그게 마귀의 세력이란 말이에요. 무슨 베리칩(VeriChip)이니 이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좀. 그런 거 나오면 빨리 받으세요. 그냥. 편안하게. 그거 받아야 마귀가 날 조종해요? 천만에요. 지금 여러분 마귀가 조종해요. 여러분. 솔직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더 많아요? 마귀에게 끌려가는 삶이 더 많아요? 그런데 무슨 베리칩 핑계를 대려고 그렇게. 지금 마귀새끼처럼 살면서 다. 그 이야기하는 거, 그런 유치한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은요. . 


그 짐승. 그거를 여자가 타고 있어요. 이 여자가 지금 추구하는 이 세속적, 이 세상적 욕망이 바로 그 짐승의 실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연합시켜버리는 거예요. 둘을. 그래서 앉혀버리는 거예요. 거기다가 그렇게. 붙여버리는 거죠. 그리고는 결국 이 짐승을 시켜서 얘를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아니지~ 그러니까 너는 신랑에게 붙어야지~ 왜 짐승에게 붙고 그래? 이게 역사란 말이에요. 여러분. 성도가 경험해야 하는 역사. 자 17장에 보면요. 그 음녀 이세벨 간음케 하는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데 그 짐승이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갖고 있고 참람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요. 그건 13장에 나오는 바다짐승과 똑같은 모습이죠? 그 짐승은요. 그걸 타고 있는 거예요. 13장 1절 보세요.



계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똑같잖아요. 17장의 그 짐승,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과 13장의 바다에서 올라온 예수 흉내 내는 그 짐승과 똑같단 말이에요. 참람된 이름이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밑으로 내려가면 그가 어린양과 싸우는 자. 그래요. 십자가를 대항하여 싸우는 거예요. 은혜는 무슨 은혜야 우리도 해야지 이거. 어린양과 싸우는 자 그게 짐승이란 말이에요. 그 열 뿔은 피조물의 권세를 키우고 쌓아서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 마귀의 세력의 욕망의 강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열 뿔이에요. 완전한 열 뿔. 일곱 머리는 그 밑에 보면 일곱 산이다. 그래요. 한번 가보세요. 



계17장 9절.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그 밑에 가면 시방 감추어진 왕은 이걸 이제 일곱 왕이라고 하거든요. 좀 이따가. 그런데 시방 감추어진 왕이 또 하나 있어요. 이 세상이에요. 여러분과 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방 감추어진 왕은 일곱의 속한 여덟 번째 왕이라고 그래요. 그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우리. 그런데 교묘하게 숨어 있는 거예요.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있었는데 시방 없어졌다가 곧 나타날 그거. 그거 우리에요. 교회를 이야기해요. 오늘날 왜곡되어진 교회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절이나 사원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교회 안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요. 성경은. 자 그 여기서 보면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고 그러죠. 그리고 그 아래 보면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자는 지금 짐승 위에 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또 산 위에 앉아 있다고 그러죠. 그러면 일곱 산, 일곱 짐승, 열 뿔, 뭐 일곱 왕 이건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요. 거기다가 자꾸 뭘 대입해갖고 뭐 EC공동체 이런 거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 위에 음녀인 여자가 타고 있다는 건 바로 그 짐승의 속성을 가진 자가 음녀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연합된 형국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으로 가서 그 음녀인 일곱 왕, 일곱 산, 일곱 머리 그것의 정체가 뭔지 한번 보자는 말이에요. 


예레미아 51장 25절.

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하나님의 대적을 산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요한이 그 산이라는 단어를 개념을 갖다 쓰는 거예요.)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그 산이 온 세계를 죽음으로 멸망으로 몰고 간다고 그러죠? 아담들을 사망으로 몰고 가는 죄의 세력 그 뱀, 나하쉬. 뭔 말을 하기는 했는데- 나하쉬가 말이 없음이란 뜻이죠.- 가짜 말을 하는 거. 뱀이란 말이에요. 이게. 멸망으로 몰고 가는 거. 가짜 말, 엉터리 말씀. 그게 음녀래요. 



에스겔서 35장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세일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할찌라 


여기서 산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스가랴서에 가면 조금 더 확실해져요. 4장 6절 보세요.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헨 그레이스 은혜라는 말이에요.)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성전은 피조세계의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신, 성령에 의해 은혜로 지어지는 거야 이걸 부정하는 걸 큰 산이라고 하는 거예요. 큰 산아, 네가 은혜, 헨그레이스를 무시해! 이거에요. 큰 산 그 짐승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짐승, 음녀, 열 뿔, 일곱 머리, 일곱 왕, 일곱 산 등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서 자신들의 힘과 능을 증명하려 하고 자랑하려 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모습이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하나님의 양육을 받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보여지더라는 거예요. 보여지죠? 자기는 알잖아요. 그게 역사 속에서 시험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에스겔서 23장으로 가면 이 요한계시록의 음녀의 모습이 마치 그 데칼코마니처럼 그대로, 그대로 그려져 있어요. 



에스겔서 23장 1-4절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미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바 되었었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남유다. 이스라엘 전체. 뭐라고 그래요. 그걸? 간음하는 여자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이요. 그들이 애굽에서도 간음했다라고 그래요. 에스겔서 23장을 계속 읽어보시면요. 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과 간음을 했다. 앗수르라는 강대국,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어요. 바벨론 역시 마찬가지에요. 그 강대국들을 흠모하며 세상의 힘을 흠모하며 하나님보다 그들을 의지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강대국에 가서 원조를 청하면 하나님 대노하시죠? 그때마다. 그걸 간음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나에게 찾아와야지 어떻게 세상에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가냐~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애굽과도 간음 했다. 뭐에요? 애굽의 문명과 힘을 좋아했다는 거예요. 종살이만 잘 해주면 내가 먹고 싶은 거 부추와 마늘과 고기 이걸 얼마든지 주는, 내가 원하는 걸, 주는 그곳을 좋아한 거예요 그걸 얻기 위해서는 난 종살이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거짓경배, 거짓 섬김, 거짓예배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내가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먹고 싶은 걸 얻어내기 위해서는, 갖고 싶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경배하는 척, 섬기는 척, 찬송하는 척, 기도하는 척, 헌금하는 척하는 거. 이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뒤에 두루치기 집에 가면은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항상 줘서 그 때마다 이 대목을 생각나게 되는데, 조금 아까 그거 먹으면서 부추와 마늘 너무 맛있어~ 아 그걸 종살이하는 시늉만 하면 준다니까요. 그냥.) 거기를 흠모한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걸핏하면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이 만나 웬 말이냐~ 돌아가자. 


성경은 이렇게 그 짐승을요 바벨론이라고 했다가 계시록에서는 그 음녀를 바벨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과 음녀의 속성은 정확히 일치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짐승은 여자의 양육도구로 사용되어진 후에 용도폐기 되어도 되는데 여자는 양육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서 살아야 되요. 그래서 죽어도 못 죽어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여자를 살려내는지 아세요.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살려내는지 아세요. 짐승을 시켜서 이 여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살려내요. 보세요. 



에스겔서 23장 22절

22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의 연애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격동시켜서 그들로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3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소년이며 다 방백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 다 말 타는 자들이라 
(이거 뭐 창세기 뭐 이런 데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때마다 등장하던 인물들이죠. 이거. 유명한 자, 귀인, 준수한 소년 )
24 그들이 병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쌀찌라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 심문권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25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26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찌라 
27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음행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죽이겠다는 거예요. 살리겠다는 거예요? 이 여자들을요. 살리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앗수르와 바벨론 니들이 타고 앉아있는 그 짐승을 시켜서 니들을 공격하게 함으로 그래서 실제로 BC721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한테 망해요. BC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해요. 성경은 정확해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간음하는 자기의 딸들을 살리기 위해 행음하는 걸 그치게 하기 위해 그들이 타고 앉아 있던 짐승을 오히려 동원하여 여자를 쳐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타고 앉아 있는 그것이 여러분을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이 새 생명으로 살려 주세요. 여러분은 그것을 장악하고 정복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들이 여러분을 정복하여 죽인다니까요.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 신랑이여 나 좀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흠모하던 가짜 신랑 앗수르와 바벨론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발가벗겨서 죽이게 하는 거예요. 준수한 소년,- 우리 집에 있는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뭐 박재범 이런 거. 나이가 몇인데 걔만 나오면 그냥 밥도 안 주고. -그 준수한 소년이 여자를 죽인다니까요. 


마치 창녀 고멜이 자신이 간음하던 남자들에게 단물 다 뺏기고 노예시장으로 버려지는 그런 꼴인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때 신랑이 찾아가죠. 그 여자가 어디로 갑니까? 신랑에게 꼭 붙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간음한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는 앗수르와 바벨론은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이게 음녀 바벨론을 묘사하는데 그대로 쓰여요. 이 단어들이요. 다 왕들이 갖고 있던 것들이고, 왕의 옷의 색깔이고, 사람들이 다 흠모하는 것들이에요. 세상 사람들 땅의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들. 그것들이 여자를 죽여요.


계시록 17장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보세요. 짐승이 음녀를 죽이죠? 뭐 자중지란이에요. 이거? 

바로 여자인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신랑의 존재 속에서 갈비뼈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신랑과 한 몸이 되는 그 천국 백성의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기 존재의 독자적 존재성과 독립성을 챙기려 그 신랑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서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그 일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났어요.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됐죠? 그 선악과 사건은 곧 피조물 스스로가 선악의 주체로 서겠다고 하는 율법주의잖아요. 그렇다면 짐승위에 앉아있는 간음녀는 누구다? 선악과 따먹고 율법위에 앉아버린 아담과 하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분과 나. 그런데 그 율법이 자신과 간음을 하려하는 여자를 죽임으로 그 여자가 살아나요. 


이게 바울의 서신서에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어요. 이제 그 여자의 이야기, 신부의 이야기가 대충 감이 잡히세요? 왜 그 여자들이 막 주고 남편이 죽고 막 이러는지. 율법이 여자에 의해 정복이 되는 게 아니라 여자를 죄인으로 폭로시켜 죽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단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이 여자를 제가 조금 풀어서 의역해 드릴게요. 

'나는 이미 율법의 선에 죽어서 율법에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사도가 자신은 율법에게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확히 번역을 하면. 나는 율법에 의해 맞아 죽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율법에 맞아 죽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거래요. 


그런데 사도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자신이 율법에게 맞아 죽은 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그래요. 그 정작 율법에 맞아 죽은 분은 누구에요? 예수. 예수님이 누구에게 죽었어요? 유대주의에게 맞아 죽었잖아요. 바리새인들에게. 그 인본주의, 율법주의를 타고 앉은 음녀는 우리란 말이에요. 지금도 여러분과 저는 그렇게 살아요. 아닌 것 같지만 우리는 그러한 율법지킴이나 나의 행위를 통하여 나를 증명하고 자랑하려고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율법에게, 내가 그 율법에게 이제 맞아죽어야 되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못 지켜요.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나는 이 율법을 장악하고 있다고 내가 이 율법을 파악하고 있고,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걸 지켜낼 수 있다.라고 끊임없이 우리는 우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율법을 시켜서 얘를 죽여야 되는데 얘가 안 죽으니까 예수님이 율법에게 맞아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간음의 그 주홍글씨를 뺏긴 거예요. 그냥. 하나님 가져가버린 거예요. 그 주홍글씨를. 영원히 달고 다녀야 하는 그걸.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주의에 의해 발가벗겨져서 죽으신 거예요. 성경이 경고한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 대속의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뭐겠어요? 아 내가 그 율법을 하나도 일점 일획을 지켜낼 수 없는 자이기에 예수님이 율법에게 맞아 죽으신 거구나. 그게 여러분이 역사 속에서 율법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나는 아니구나. 이렇게. 


그런데 여전히 나는 이거를 포착하고, 이해하고, 장악하여 지킬 수 있는 존재니까 좀 지켜줘~ 지켜봐 줘봐 그리고 말씀을 떡으로 에너지로 줘봐 내가 한번 해보게 이거. 자 돌이 떡이 되는 거 그거 먹고 내가 힘내서 한번 해보게 복음으로 말씀으로 힘내서 진리로 힘내서 해보게 이거. 그걸 엉터리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시도와 노력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리고 그거는 간절하게 우리 속에서 나와야 되는 지향성이기도 해요. 그러나 그 노력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걸 우리의 자랑으로 챙겨갖게 되면 그게 바로 간음이며 실패에요. 그런데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예수의 은혜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 용서, 사랑, 그 안으로 함몰 되어 자꾸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눈에는요 그 예수가 요한계시록의 음녀로 보입니다. 여러분. 포도주와 성도의 피에 취한 자라고 그러죠. 음녀를요. 예수님이 음녀가 되어서 죽었지만 그분은 음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율법주의 관점으로 예수를 보게 되면 그분은 성도에게 끊임없이 피를 요구하는 그 성도의 피에 취해있는 음녀로 보이게 되요. 그걸 잘못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그 다음에 온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 어절을 직역하면 여자의 정욕을 향해 그것으로 여자를 보는 자 마다, 라는 뜻이에요 단순히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흉한 마음이 들었다고 이게 간음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은요. 그러니까 니들 다 간음한 자야~ 이걸 강조하려고 써 놓은 말이 아니라 인간의 그 정욕 그 ‘에피뚜미아’ 라는 단어는요. 성전제사, 희생제사라는 ‘두미에오’ 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성전에서 일어나는 율법의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음욕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건 제가 다음시간에 이제 설명을 자세하게 해드릴 텐데 그런데 그걸 뭐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그냥 힐긋 쳐다보기만 해도 그냥 신랑을 쥐 잡듯 잡으면서 너 간음했지~ 아 그거 좀 쳐다보게 하세요. 뭐 얼마나 볼게 없으면 그렇게 반성을 하던가.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착각들을 하니까 계시록 17장에서 이런 말 하는 거예요. 8절 보세요.



계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시방 없다'는 건 '지금 존재가 소멸됐다'는 게 아니라 그게 어떻게 장차 나와요? 지금 못 알아보더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지금 감추어져 있는 그 음녀를 자기 자존심 챙기고, 의 챙기느라 못 알아보고 속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음녀를 시방 없는 이 왕을 일곱 왕에게 속한 자인데 여덟 번째 왕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속성을 그대로 가진 자. 못 알아봐요.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고 사랑 이야기하고 순교 이야기하고 헌신 이야기한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오해들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오히려 그렇게 인간들의 행함을 독려하여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이렇게 세워주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그래요. 그리고 건강한 기독교, 순결한 기독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죠? 못 알아봐서 그래요. 그래서 시방 없다는 거예요.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뜻이에요. 


음녀가 이렇게 시퍼렇게 내 안에 살아있는데 그걸 감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요. 

여러분 다른 거 다 잊어버리셔도 되요. 그리고 다른 사람 생각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간음한 여인이고 버림받아 마땅한 창녀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정한 창녀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간음의 주홍글씨를 떼어버리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에서 잠깐 힌트 되어지는 거예요. 

도대체 여인의 후손, 제라, 자손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여자가 창녀가 되어 시아버지 앞에서 창녀가 되어 여인의 후손을 이어버리는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떡 하니 올라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율법 앞에서 율법에게 맞아 죽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경험하면서 그래서 자신 때문에 예수가 창녀가 되어서 죽으셨다. 라는 그 진리를 꼭 붙들게 되는 게 양육인 거예요. 그걸 자라남 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걸 진짜 성화라고 그래요.

 

 엉터리 성화같은 거 쫓아다니지 마시고 진짜 성화들 하세요. 여러분. 

예수의 은혜 십자가로 인한 진짜 성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그렇게 저희들의 죄를 책임지고 죽을 수도 없는 그런 가녀린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간음한 여자 창녀가 되셔서 우리 죄를 그렇게 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그 앞에서 우리는 여자입니다. 신랑의 씨를 받지 않으면 그냥 이렇게 잉태치 못하는 없음의 죽은 흙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를 고백하면 되는 것인데 하나님 우리의 자존심이 선악과 먹은 그 하나님처럼의 욕구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 이 음녀가 하루 속히 내가 타고 율법이라는 짐승에 의해 맞아 죽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