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15 간음한 이들이여 오른 눈을 뽑고 오른 손을 찍어라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07


간음한 이들이여 오른 눈을 뽑고 오른 손을 찍어라


마태복음 5장 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위험한 방법을 크게 둘만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자면,

그 하나가 문자적 해석, 성경을 그냥 피상적으로만 보는 문자적 해석이고 그 두 번째가 초월적 태도입니다.

전자는 세대주의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모든 성경 말씀을 이 역사와 인생에 대입하고 적용하려 하는 그런 방법이고요.

 

두 번째는 아예 성경의 내용을 전부 신성시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역사 속 그 일상과 단절시켜버리는 태도에요. 전자의 해석 방법을 지지하는 이들의 그 공통분모는 성경 안에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 그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그 경우의 수를 찾아 헤매는 이기성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끌어 들이게 되요. 반드시.

 

예를 들어서 나치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타났던 전쟁의 신학 슬로건이 그랬고 국가나 회사가 국민이나 노조 측의 집단적 행동을 범법으로 몰아 부치는 데에도 상위 권세에 복종하라. 라는 이런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을 봐도 인간들의 문자적 성경적용은 다분히 이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인 거예요. 그렇게 문자주의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어요.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신성화 시켜버림으로 해서 그것이 신성한 초월자의 가르침이라는 그 터부를 씌워서 그것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제정하신 그 신성의 그 그늘 아래서 숨어,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결말로 마무리 지으려 하는 거예요. 그게 후자의 태도에요.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우리의 일상과 일상 속의 행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려 하지도 않고 미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그런 체념으로 위장된 불성실함의 방법이에요. 다른 말로 영지주의적 해석이죠.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마치 지옥의 야차처럼 무시무시한 채찍을 들고 내 말 안 들으면 다 지옥 보내 버릴 거야~ 이렇게 우리에게 던져놓은 것이 성경일까요? 이거 다 안 지키면 너네 다 죽여 버릴 거야~ 지옥 보낼 거야~ 이게 성경일까요? 아니면 신성의 터부로 철저하게 인간과는 단절되어 주어진 것이 성경이겠습니까? 그럼 지금 예수님은 산위에서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산 위에서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또 뭐냐고요? 

 

산 위로 하나님 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따라 나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이 도저히 지킬 수도 없으며 접근할 수도 없는 그런 신성의 울타리를 치고 단지 자신의 초월적인 신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금 이와 같은 말씀을 산상수훈의 말씀을 이렇게 남발하고 계시는 건가요? 약 오르지~ 이렇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 해석 혹은 알레고리(Allegory)한 해석 정도로 분화될 수 없는 차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예수께서 지금 산 위에서 그런 종류의 해석학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계명의 완성이요. 그 성취의 중심인 생명으로서의 자신의 그 정체성, 생명으로서의 예수,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힘과 동시에 이제 새로운 그 창조의 시점에서 다시금 생명의 그 외부, 울타리 밖, 생명의 울타리 밖, 그 외부를 기웃거리지 않게 만드는 그러한 참된 영성의 성장을 위한 메시지를 화두로 던지고 계시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은 여러분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를 하게 되어 있어요.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고 그냥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만 짓다 간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행한 것이 완전히 무효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오해 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말씀의 영향력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 되기의 촉매제 정도로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정도의 영향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알아가면서 그 앎에서 나오는 세계관의 변화, 그 세계관이 변하면 당연히 가치관이 변하겠죠?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나의 행동양식이 결정된단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지향성,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간음과 이혼의 문제를 공부해 보자는 말입니다. 오늘은 제가 개괄적 접근을 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드리고 다음시간에 한 절 한 절 자세하게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중심으로 읽고 계신 분들은 금방 이 구절들이 단순한 간음과 이혼 등의 그러한 사회문제에 관한 금언이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아니 예수님이 그 귀한 시간에 고작 그러한 사회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금언으로 던지고 가셨겠냐는 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이미 나와 있는 거를.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은 지금 산 위에서 십계명의 뒷부분을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일 계명부터 오 계명까지는 하나님이 그걸 주시면서 설명을 붙이시죠? 십계명을 읽어보면 그런데 여섯째 계명부터는 제목만 이야기하고 끝난단 말입니다. 그걸 지금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가서, 역시 산위죠? 시내 산, 예수님이 지금 말씀을 산상수훈을 설파하는 그 산, 예수님이 산 위에서 지금 그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부터 제목만 붙어 있는 그것들을 설명을 붙이고 계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그 십계명, 계명, 율법은 예수님이 완성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고 그걸 완성해 내시는 예수그리스도 성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걸 완료시켜서 설명해 내시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십자가에서 완료시키고 계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그걸 보시란 말이에요.

 

십계명에 모든 항목은 한 가지 내용으로 수렴이 되요. 뭐겠어요? 

인간들아 너희들이 하나님 아니야~ 내가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우상 섬기지 말아~ 이거에요. 그 열 가지 내용이 다. 인간들아 니네들 하나님 아니야~ 니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됐다고 착각하고 있지? 니들 하나님 아니야~ 십계명에서 말하는 우상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나에요. 나. 있지도 않은 바알 아세라 이런 거 아니라고요. 


인간들아 니네들 하나님 아니야~ 정신차려~ 이게 십계명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상섬기지 말아~ 내 이름 망령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내가 너희 아버지니까 나를 공경해라. 이거. 이게 오 계명까지의 내용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섬김의 관한 내용이 앞서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찬송해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게 살인하지 말라~ 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설명해드린 살인에 관한 말씀을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거. 이런 정도가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 인자를 죽인 나에서 출발해서 풀어봤던 거고, 그렇게 나에 의해 살해당하신 예수라는 인자가 나를 품어 안고 온전한 생명으로 오직 은혜로 나를 살려 내셨다. 라는 것을 믿어서 이제 다시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독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그걸 믿지 않고 또다시 그 죄에 허우적거리면서 죄책감이나 느끼고 이러면 또 예수를 죽이는 거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뭐겠어요? 살인하지 마~ 나 죽었잖아 벌써~ 이 얘기란 말이에요. 도륙하지 마~ 라는 단어거든요. 그 단어가.

 

그게 살인하지 말아라.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라. 형제는 예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 율법주의, 이 인간 세상이 예수를 욕했다니까요. 십자가까지 쫓아가가지고 라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 밥통아~ 그리고 형제와 그 형제와 화해하라. 이 내용들이 전부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어지는 내용이란 말이에요. 단순히 형제보고 밥통이라고 그러지마~ 그러면 지옥 보낼 거야~ 진짜 그래요? 여러분? 이 중에서 형제한테 욕먹고 고소해 본적 있어요? 누가? 그러면 경찰한테 가서 욕먹어요. 바뻐 죽겠는데 그런 것 갖고 와가지고 고소한다고요. 그런데 성경이 그런 얘기 하겠냐고요. 


단순히 형제에게 욕하는 것도 살인이니까 욕마저도 삼가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욕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막 꿈틀거리면서 용솟음치는 그 욕은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도 보신다니까요. 성경은 행위화 되어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죄라고 규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산상수훈을 보면 전부 마음을 후벼 파는 거예요. 그것도 죄라고. 행위화 되어 나타난 거와 그 마음에 있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신다니까요. 아~지금 속으로,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게 여기 있어요. 그게 성경이라니까요. 


그런데 인간들은 절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기들이 수고하고 노력해서 해 낼 수 있는 거, 그거는 절대 놓치려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왜 예수께서 자꾸 인간의 마음속까지 후벼 파서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저것도 죄다. 이렇게 지적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죄를 지적하시는 거예요. 존재자체가 그 죄인 자들이, 아주 죄의 결정체인 자들이 죄 아닌 걸 내어 놓겠다고 열심을 부리면서 나 잘하고 있지요? 하고 이렇게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찌 그냥 그걸 두고 보시겠냐고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서 아주 그냥 집요하게 죄가 무언지, 심판이 무언지, 의가 무언지를 끝까지 가르쳐내고 마는 거예요. 진짜 죄가 뭔지를 알아?~ 이렇게.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만 그 죄 때문에 아주 지긋지긋한 그 죄 때문에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니까요. 다른 이들은 죄가 뭔지를 몰라요. 그냥 단순히 그러한 어떤 사회법 도덕 윤리 이런 거. 어긴 것, 이런 것만 죄인 줄 안다니까요.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은 율법까지도 동원하셔서 인간들이 간과하고 있고 감추어 두고 있는 죄까지도 폭로해 내시는 분이에요. 그래야 은혜 앞에 항복을 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 윗부분만 벌초를 하면 그 자리에 잡초가 다시 납니까? 안 납니까? 또 나죠? 저는 위에만 자르면 되는 줄 알고 군대에서 그것만 뜯었다가 뒈지게 맞았어요. 뿌리 안 뽑았다고. 그런데 가보니까 진짜 또 나와 있어요. 그래서 잡초인가 봐요. 뿌리가 살아있는 잡초는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또 싹을 틔워요. 


그런데 인간들이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퍼런 부분만 열심히 베어내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게 율법주의에요. 그렇게 윗부분을 잘라내고 십년동안 파란 잡초가 안 났다고 쳐봐요. 그런데 십일 년째 되는 해에 파란 잡초가 잠깐 싹을 틔웠어요. 그런데 가갖고 얼른 또 잘라버렸어요. 그렇다고 그 뿌리가 죽은 겁니까? 성경은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십년동안 잘 참았다. 라고 그 인내의 기간을 칭찬해 주시는 게 아니라 잠깐 싹이 올라 왔다가 제거가 되었어도, 거봐~ 너 아직도 네 안에 뿌리 있잖아~ 이걸 지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잘난 찬한 행위, 위에 퍼런 잎사귀만 계속 잘라내면서 이 정도면 되겠지~ 뭐 이러고 앉아 있는 거라니까요. 성경은 그 뿌리를 파내는 거예요. 그래서 던지면 아파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그래서 행위의 단도리만이 율법지킴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부분까지를 예수님이 계속해서 지적해 내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볼게요. 재물을 탐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근본이다. 성경의 진술이죠.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침에 그 구절로 QT를 한 후에 그래 절대 돈을 사랑하지 말자. 결심을 하고 밭에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한참을 밭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쟁기에 뭐가 걸렸어요. 그래서 보따리를 끌어내 보니까 돈이에요. 100억이 넘어요. 실제로 전북 김제인가요? 거기에서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던 어떤 사람이 그 돈을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갖고 마늘 밭에다가 감춰놨었죠? 110억 오만원짜리로 빳빳한 거로. 밭을 갈다가 그게 나왔어요. 그런데 아침에 QT했거든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근본이다. 그래서 경운기에 싣고 경찰서로 갔어요. 왜냐면 나는 그리스도인이거든요. 아무리 내 눈앞에 백억이 있고 주인이 없는 돈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늘 아침에 QT를 해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경찰서에 갖다 줘야 된다. 그러고 가는 거예요. 가는 도중에 인건비가 없어서 갈아엎은 배추밭이 생각이 나요. 올해 대학에 들어가서 아주 그냥 가문의 영광이 된 아들의 대학 등록금, 지금 그거 구하러 전전긍긍하며 아르바이트하는 아들이 생각나네요. 병원으로 병원 가셔야 되는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그때 뒤 돌아보면서 아 저거의 백분의 일만 있어도 내 문제는 다 해결될 텐데, 하고 저거의 백분의 일이 내 돈이었으면 하고 잠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이 아니지, 그래도 내거 아니니까 경찰서에 갖다 줘야지. 갖다 줬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인이라고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욕심, 그게 행위로 나왔던 안 나왔던 하나님은 그걸 따지시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뿌리로 남아있는 뭔가가 지금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욕심이 생긴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걸 끄집어내시는 분이라니까요. 백억을 여러분이 가져도 되요. 솔직히 아무도 안 보고 마늘밭에서 백억이 나왔는데 그걸 누가 경찰서에 다 갖다 주냐고, 이런 말하면 꼭 나만 나쁜 놈 되는데, 그 욕심 안 나요? 그러면 그게 그 백억을 다 먹은 거나 똑같은 거라는 거예요. 


성경의 진술은. 일원 한 장 손 안 댔어도 뒤돌아 보서면 잠깐, 아고 저거 내 돈이었으면 하는 그 마음이 백억을 다 먹은 거와 똑같은 죄라는 거예요. 이게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게는 이해가 안 가는 항목이에요. 그죠? 그런데 성경의 진술은 정확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묻는 거예요. 그거 어떻게 해결할 거야~ 이렇게 하나님이요.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거야~ 그 때 우리는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거짓말을 잘 하던 사람이 20년 동안 거짓말 안 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20년 만에 딱 한번 거짓말 하고 또 한 20년 안 했어요. 하나님은 거짓말 안한 그 세월을 칭찬하시는 게 아니라 거봐~ 네 안에는 아직도 뿌리가 남아 있잖아~ 를 지적하시는 거예요. 성도는 그 소리를 들어요. 성도만. 자기가 살아낸 나머지 시간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래서 성도가 괴로운 거예요. 


사도바울이 거짓말을 뭐 그렇게 많이 했겠습니까? 뭐 간음을 했겠습니까? 도둑질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왜 죄인중의 괴수라고 그래요?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라는 건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거거든요. 내가 마귀새끼라는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 뭔 죄를 그렇게 졌길래~ 성도의 자인식이 결국은 그리로 가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내게 예수가 필요하구나.'로 가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간음하지 말라. 마음의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다. 라는 이 말이 단순히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간음을 하는 거니까 마음까지도 다스려라. 라고 채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죠? 마음까지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하늘아래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우리의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너희는 간음한 자들이고 간음하고 있는 자들이다. 라는 걸 선언하시는 거예요. 만일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간음에 관한 경고라면 우리는 유곽이나 사창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혼한 사람은 교회 오면 완 되죠?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이토록 철저하게 금하는 걸 마음으로라도 지으면 안 된다. 라고 한 그것을 저질러 버린 그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려요?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이게 문자적으로 그 이야기라면. 그러나 당신들은 반드시 지옥 갈 거니까. 대충 살다가 지옥 가~ 그래야죠. 그러면. 그런데 어떡합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그러셨어요. 나는 의인 부르러 오지 않았다. 난 죄인 부르러 왔다. 라고 말씀 하셨단 말입니다. 이 딜레마를 한번 차근차근 해결해 보자는 말이에요. 우리가 간음이나 이혼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정의하는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되겠죠? 


성경이 이야기하는 혼인이 뭔지를 알아야 성경이 금하는 간음이나 이혼이 뭔지를 알거 아니에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혼인 장면이 창세기에 나오죠. 창세기 2장으로 한번 가보게요. 21절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이게 혼인에요.)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구약 성경에서 잠이라는 건 종종 죽음을 메타포 하는 개념이라고 그랬죠? 죽음을 비유하는 거란 말이에요. 열왕기서 같은 책 보면 왕들이 죽었을 때 왕들이 잠들었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 단어가 똑같은 단어에요. 죽음을 잠이, 잠이 죽음을 이렇게 메타포한단 말이죠. 그게 창세기 2장의 그 아담의 잠이 갖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죽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그랬죠? 거기서 잠이 죽음이잖아요. 히브리 사람들의 잠이라는 건 죽음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죠. 


이렇게 남자의 죽음을 통해 남자의 것을 재료로 하여, 여자의 것은 아예 없죠? 없음이에요. 남자가 잠들기 전에 여자는 없음이에요. 그죠? 남자의 것을 재료로 하여 거저 탄생하게 되는 게 신부죠? 그래서 남자가 ‘이쉬’고 여자가 ‘이솨’에요. ‘이솨’는 이쉬, 남자에게 나온 자라는 뜻이에요. 그러한 신랑이 신부를 어떻게 인식하죠?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그러죠? 너는 나다. 라는 뜻이에요. 너는 나다. 그 말은 신부의 존재를 신랑 안으로 몰입시키는 차압의 선언이에요. 너는 나다. 라는 건 나 없으면 너는 존재일 수도 없는 자였다. 라고 그 존재를 몰수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고 내 뼈 중의 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랑의 신부 인식이 그래요. 그건 너는 나 없이는 절대 존재일 수 없다. 는 창조주의 말이에요. 그 신랑의 말은.

 

그 둘 사이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요. 그렇죠? 신부가 아무리 부끄러운 짓을 해도 신랑이 다 품어요. 왜? 신랑이 창조해 낸 게 신부거든요. 그래서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벗었으나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더라. 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이어야 되는 거예요. 원래가. 전적인 의존이요 신뢰에요. 그래서 부끄러움이 없어요. 여러분이 혹시 예수를 믿고 죄를 지었어요. 그 때 여러분이 물론 죄책감 같은 거 안 드는 거 그건 인간도 아니지만 금방 복음으로 돌아와서 그래도 하나님이 이걸 내 부끄러움으로 안 봐 주신다면서요. 이리로 가야 되는 거예요. 


머리 쥐어뜯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계속 그러다 보면 유다 되는 거예요. 그래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 그러고 목매다는 거죠. 그게 마귀라니까요. 그게.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내 신랑의 사랑은 나의 그 어떤 약점과 허점도 다 품어 안는 엄청난 사랑이라는 걸, 아는 거. 이걸 화목이라고 그래요. 그게 전적인 의존이요 신뢰인 거예요.

 

그런데 이 창세기의 신부 탄생의 이야기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예시가 되어 있어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일, 그 일을 통해 혼인잔치가 완성될 것이다. 라는 언약이 그 안에 지금 들어가 있죠? 창세기 2장에. 여기에서 남자는 아담이고 여자는 하와에요.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죠. 부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모라는 단어가 나온단 말이에요. 뭘 지금 여기서 그려내고 있는 거죠? 아버지, 부모인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신부를 창조하러 내려오신 예수의 이야기를 지금 담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그리고 이거를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그대로 인용 해다가 예수와 교회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죠? 창세기 2장부터 예수와 교회의 이야기가 진행 되어져 가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한 혼인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신부들의 그 신랑관과 결혼관이 어떻겠어요. 나는 신랑이 없었으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였다. 신부인 나는 신랑이라는 몸의 지체이므로 신부는 신랑이라는 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된다. 이게 신랑관이고 결혼관이어야 되요. 


그런데 신랑의 죽음에 의해 창조된 신부가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챙기기 시작하고 개별적인 업적과 공로를 추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창세기 2장에서 봤잖아요. 우리가. 남자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게 결혼인데, 이게 혼인이에요. 하나님의 백성과 어린양 예수의 연합의 형국이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이걸 혼인이라고 지금 설명해 내는 거예요. 천국에도 없는 혼인이라는 개념을 갖고서 우리에게 지금 설명해 주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신부가 왜 내가 당신에게만 의존해서 살아야 돼. 나도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될래. 하고 자기의 이 독자적, 독립적, 개별적 자아를 챙기려고 할 때 이 한 몸의 관계가 깨지겠죠? 그게 분리에요. 이걸 성경이 이혼, 간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단순히 어떤 육체적인 지저분한 일 이런 것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랑과 분리되는 거, 신랑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는 거, 신랑 없이도 나는 개별적 자아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거.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이걸 분리, 이혼이라고 그러고, 한 몸으로부터 분리되니까. 이걸 간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건.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되요. 죽습니다. 가지가 내가 스스로 열매 한번 맺어보게, 그리고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죽는 거예요. 다 쓸어 모아서 어디다 던진다고 그래요? 불태워 버린다고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게 기특한 건줄 안다니까요. 그러면서 열심히 해보자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게 오늘날 건강한 교회들의 외침 아닙니까?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간음이나 이혼은 은혜의 복음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추구하며 신부들의 독립을 증명하려 하는 모든 시도와 행위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간음이에요. 그게 이혼입니다. 그러한 지체들의 독립선언,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나도 독립적인 존재가 될 거야 라는 이 지체들의 독립선언, 몸에 붙어 있어야 되는데 그리고 그 몸을 위해 존재해야 되는 지체들이 자기의 독립성을 쟁취해 보겠다고 하는 그거.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의 그 분리시도를 예수님이 알기 쉬운 그림으로 설명해 주는 데가 요한복음 15장에요. 4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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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안에 거하라(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야 내 안에 거하라 그래야 너희들은 존재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혼이요. 간음의 현실인 거예요. 분리, 예수로부터 떨어져 나오고자 하는 그러한 추구. 한 몸으로 존재해야하는 신랑과의 관계에서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고 독립선언을 하는 것.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한 짓인지를 잘 배우라는 거예요. 바로 그게 우리 인생과 역사를 통해서 체휼해 내야할 중요한 내용인 거죠.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가 이 인생과 이 역사를 통해서 체험해 내야할 중요한 내용인데 그걸 체험하면서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내려 가냐면 야 진짜 지독히도 내 존재의 가치와 이 내 존재의 만족과 기쁨만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정말 너덜너덜한 걸레구나~ 내가 창녀 고멜이구나~를 아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가지고도 나만을 위해서 살아요. 숨도 나만을 위해서 쉬고 밥도 나만을 위해 먹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 마시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잠자는 사람 계세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나만을 위해 살아요.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간음. 이혼. 그러니까 내가 누구다. 내가 창녀 고멜이에요. 그 고백이 터져 나오면 그리고 너덜너덜 시장에 가서 걸려 있으면 예수님이 보리 한 호멜 반, 은 열다섯 합이 얼마? 은 삽 십으로 사러가는 거예요. 이게 호세아서인 거예요. 호세아 다른 이름은? 헬라어 이름은? 예수. 


그런데 여러분이 그 자각을 하냐고요. 성경을 배우면서 여러분이 그리로 내려가셨어요? 아니면은 여러분의 가치를 더욱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에 참여하셨습니까? 말씀 잘 지켜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 되자고 했지,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폭로해 내는 건 내가 견딜 수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그 반대의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역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그 끝을 맺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음녀, 바벨론으로 폭로 되어 버리고 예수께서 신랑이 세마포 갖고 그 걸레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혼인잔치로 시작된 성경이, 창세기 2장부터 혼인잔치로 끝나는 거예요. 이 역사는 어떻게 이 걸레 같은 역사를 하나님이 신부 삼는가. 이 역사와 인생 아담들을 어떻게 신부를 삼는가를 증명하는 도구지 여기에서 여러분이 신부다워지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계시록 19장 7절 보세요.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창세기부터 이 요한계시록까지의 이 혼인잔치 기간, 그 안의 그 기간을 뭐라고 그래요? 7절에서. 신부의 예비기간이라고 그러죠? 그 아내가 예비하는 기간이 이 역사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예비 하냐고요? 8절에 뭐라고 그래요? 신부가 뭐 입습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스스로 입어요? 입혀져요. 수동태죠? 입혀주세요. 누가? 신랑이 입혀줘요. 그리고 신랑이 그 세마포를 옳은 행실이라고 불러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선악과 먹은 선악과의 지식으로 이렇게 규정하고 판별해 놓은 그 옳은 행실이 아니라 신랑이 인정하는 옳은 행실이 있다니까요. 그걸 예수님이 뭐라고 그래요. 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 6장: 28절.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하여야 옳은 일을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여야 옳은 일 해서 영생을 얻습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러면 아내, 신부가 이 인생과 역사 동안에 해야 할 옳은 행실이 뭐에요? 딱 한 가지. 예수 믿는 거예요. 신랑이 나 창조해 주셨어요. 이거 믿고 가는 거예요. 신부다운 자가 되어서 남들보다 더 괜찮은 존재로 성숙되어서 가는 게 아니라 신랑 없으면 나는 존재도 아니에요. 걸레에요. 이거. 이 고백하고 가는 거예요. 바로 그 신부들이 입어야 할 세마포, 옳은 행실, 믿음 , 그거 없으면 혼인잔치 못 들어가요. 


이렇게 성경은 맨 앞과 맨 뒤가 혼인잔치라는 사건으로 막혀 있고 그 안에 혼인잔치를 강화하고 설명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이걸 인클루즈(includes) 구조라고 그랬죠? 양쪽에 빵이 이렇게 앞뒤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속, 이 속이 양쪽을 빵을 강화하고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혼인잔치에 관한 이야기에요. 이것이요.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가장 처음 내리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였던 거예요. 생육하고 번성하는 건 혼자는 안 되죠? 달팽이 같은 건 되요. 자웅동체는. 사람은 안 돼요. 그래서 부부에게 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로마서 강해 때 생육과 번성이 뭔지를 설명해 드렸어요. 자세하게. 생육과 번성은 누가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세요.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러잖아요.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이게 생육, 번성이거든요. 그걸 예수가 완료하시고 이들에게 선물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생육하고 번성해라 남자, 여자 만들어 놓고, 혼인시켜 놓고 생육하고 번성해라~ 이건 하나님이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청혼, 프로포즈하는 거예요. 


나는 반드시 너희들에게서 아들, 예수를 낳고 말거야~ 이거에요. 이 이야기에요. 생육하고 번성해라. 자식 많이 나아라. 이런 얘기 아니에요. 하나님의 청혼, 나는 반드시 너와 결혼할 거야~ 그리고 반드시 예수를 나을 거란다. 그 호세아서에 나와요.


 

호세아서 2장 19절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러죠. 내가 너에게 장가 들면 네가 여호와를 알거야~ 여호와는 구혼자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죠? 네가 여호와를 알거야~ 제가 지난 주일날 그 알다. ‘야다’라는 단어가 뭐라고 그랬죠? 동침, 아담과 하와가 동침함에 이 단어에요. ‘알다’에요. ‘야다’에요. 똑같은 단어거든요. 동침은 뭐라고 그랬어요? 연합이에요. 연합. 부부간의 연합처럼. 연합. 나는 너에게 장가들어서 너를 내 신부로 연합시켜 버리겠다는 거죠. 그죠? 그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자기의 처음자리를 잊어버리고, -그래야 진짜 하늘의 신부가 되는 건데, 하나님 안으로 연합되어서 하나님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생명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게 성도의 구원인데- 지가 거기에서 나와서 독자적인 독립적인 개체성을 자기가 수고하겠다고 그리고 구축해 가겠다고 하는 게 이혼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게 간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혼인하여 하나님과 연합시켜 내시기 위해 이 역사를 창조한 거고 우리는 이 역사 동안에 아~ 하나님이 나를 끌어당기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떠나 간음하고 하나님과 이혼하여 불살라질 수밖에 없는 지옥의 땔감일 수밖에 없는 자구나~ 이렇게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만 붙드는 거예요. 그걸 기독교라고 그래요. 


그렇게 한 몸이었던 하나님으로부터 신랑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불화가 생기고 이혼하고 간음을 하게 되어 불화가 생기게 되면 부끄러워지죠?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이 신부가 내가 독립적인 이 내 자아, 이 개별적 자아를 챙기겠다고 선악과 따먹자마자 신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숨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부부관계에서도 뭐 부부끼리 같이 샤워하고 다 하다가 싸움이라도 한번 하면 옷 갈아입을 때 들어오면 뭐라고 그래요? 집어던지죠? 어딜 들어 오냐고, 우리 집 얘기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불화가 되어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뭘 해요? 자기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무화과나무 이파리로 이건 예수님이 율법적 행위라고 나중에 설명을 해주시는데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열심히 가리는 거죠. 하나님은 그 신부에게 찾아 가서 그 신부의 치마 찢어발기고 당신의 세마포 입혀주시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당신의 의로, 세마포로 감싸 주시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자 그렇게 부부간의 한 몸 됨에 그 화목, 어린양과 교회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여기까지만 딱 읽고, 그 아내를 그냥 닦달하는 사람들 있죠? 그 밑에도 읽어야 되요.)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이게 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이 그대로 다 나오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게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혼인의 내용이었잖아요. 뭐라고 그래요?)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해 놓고 이게 바로 교회와 어린양 예수의 이야기였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는 있지도 않은 부부라는 관계를 이 땅에 허락하신 이유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신랑이 교회라는 신부를 어떻게 창조했고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교훈하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남편들은 열심히 아내를 사랑하며 육적 신랑의 그 한계와 영적 신랑의 위대함을 배우면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봐야 되요. 죽도록, 안 되도 죽도록. 그리고 아내들은 허벅지를 찔러가며 남편에게 복종을 하면서 이 육적 아내의 불가능함. 야~ 이런 거를 이혼시키지 않고 데리고 살아주는 우리 남편이 정말 감사 하구나~ 이렇게 자기 한계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원히 꼭 붙들어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예수의 은혜를 배우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양쪽이 쌍방이 최선을 다해야 되요. 상대방에게. 그렇게 해 봐야 진짜 그 예수를 찬송할 수 있게 되요. 그게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 힘드시죠? 사는 거. 그래야 예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요. 잘 가고 계시는 거예요. 복도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저런 걸 만나가지고~ 그러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은혜를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라는 걸 잊지 마시고.

 

성경이 말하는 간음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차원을 땅의 차원에 배설하거나 혼합하는 영적 불경건의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가 영적 간음의 상태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차원으로의 몰입이 선행되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 말씀이 율법이 되고 규범이 되고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되어 버리면 그 말씀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가 구원의 필수요건이 된다. 라는 그런 잘못된 인식으로 빠져 들게 되요. 그러면 내가 또 나의 독자성을 쟁취하려고 하고 증명하려고 하고 구축하려고 해요. 


성경이 그렇게 내가 해내야 할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되면 여러분은 그 성경을 통해 간음하게 된다니까요. 그리고는 이혼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그 말씀을 잘 지키려고 했던 그  신부 예루살렘에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아~예루살렘아~ 내 신부야~내 신부야~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셨던 거예요. 예루살렘아~예루살렘아~ 그거 아니야~ 그렇게.


따라서 성도에게는 성경 말씀을 더 이상 지켜내야 할 규범이나 심판과 정죄의 근거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론적 그 완료의 현실을 읽어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투신을 하는 그런 성경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되면 이걸 율법 삼아 막 지키려고 하는 사람보다 더 불성실하게 살 것 같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은혜의 왕 노릇이 여러분을 그렇게 불성실하게 놔두지 않으세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간음한 여인의 그 이야기가 마치 시내 산에서의 그 율법 수여 장면 있죠? 그거에 이렇게 데칼코마니처럼- 뭔지 아세요? 딱 접으면 여기다 물감 묻혀서 이렇게 반 접어서 딱 접으면 똑같은 그림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 어디에 나오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가 볼까요. 요한복음 7장 53절 마지막 절부터 읽어보게요. 거기부터 괄호가 쳐 있거든요. 간음한 여인 끝까지가.



요7:53-8:11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장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그 옛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옛 성전이 대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절개를 부수시는 내용이 7장이에요. 그리고 이다음에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이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에서의 간음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간음과 같은 단어거든요.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에요. 이것이. 이걸 잘 이해하면 간음하지 말라. 가 뭔지가 분명해 진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7장에서 안식일을 부수시고 할례의 진의를 설파하시면서 초막절을 부정해 버리세요. 이스라엘의 율법, 절기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초막절의 유대인들이 행하던 예식을 부정하시면서 내가 생수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그게 7장이에요. 내가 생수다. 


초막절에는 거대한 초 두 개를 성전에다가 세워 놓고 이렇게 빛이에요. 빛. 인공으로 지들이 만드는 빛, 그리고 물을 열심히 길어다가 계속 제단에 부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빛이야~ 내가 물이야~ 내가 생수야~ 그렇게 율법으로 니들이 아무리 인공적인 빛, 인공적인 생수 만든다 할지라도 너희들 그걸로 절대로 구원 못 받아~ 이 얘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생수야~ 그래서 초막절에 올라가서 내가 물이다. 그러는 거예요. 내가 생수다. 내가 너희들 살릴 수 있는 거야~ 율법이 너희들 살리지 못해~ 이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율법을 옛 성전을 부정해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자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율법과 성전, 그리고 그들의 행위만을 의지하고 있었죠? 이걸 뭐라고 그래요. 신랑이신 예수를 떠나 지들이 자기의 독자적인 개별적 자아를 챙기는 걸 간음, 이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이혼, 간음하고 있고 지금 이혼한 상태에 있는 게 7장에 이 유대인들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이제 거기에 붙어 있는 게 이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7장의 이야기가 성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율법주의 행태와 그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요? 7장 마지막에 그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죠. 여기에서 각각이라는 단어가 '헤카스토스'는 everyone이에요. '오이코스' 이 단어는 집이라는 단어로 많이 알고 계시지만, 사람의 집, 우상의 집, 우상의 신전이라는 뜻이죠. 


자 열심히 안식일을 지키고 열심히 옛 성전에 올라가서 종교행위를 했고 절기를 지켰어요. 율법을 지켰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각각 돌아가는데 어디로 돌아가요? 우상의 신전으로 각각 돌아가더라는 거예요. everyone. 그들이 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 섬김이었다는 거예요. 그걸 십계명이 뭐라고 해요? 간음이라고 해요. 그걸.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자들이 우상을 섬기고 우상의 신전으로 결국 돌아가 버리는 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에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에피소드로. 각각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데 우상의 신전으로 옛 성전의 실체에요. 그게.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어디로 가세요. 감람산으로 가신데요. 감람산은 성읍 동편 산. 


어디서 봤어요? 에스겔서에서 봤죠? 하나님의 영광이 옛 성전에서 떠나 어디로 가요? 성읍 동편 산으로 가서 다시 43장에서 동쪽으로 다시 돌아와요. 새 성전으로. 그리고 그 사이에 성전 척량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요 이게.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이 각각 우상의 신전, ‘오이코스’ everyone 갔는데 예수님이, 예수님이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옛 성전을 떠나서 감람산으로 성읍 동편 산으로 가셨다가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에스겔서의 그 이야기, 


새 성전을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시고 이걸 천명하여 야~ 보기 참 좋구나~ 하신 다음에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시는 그 사건을 내가 지금 설명해 주게. 내가 옛 성전에서 참 성전인 내가 어떻게 그 옛 성전이 부수어져야 하는 지를 내가 설명해 주게. 그리고 너희들은 어떻게 내 신부가 되는 건지 설명해 줄게, 이게 간음한 여자의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한번 읽어보죠. 1절부터 보세요.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제가 왜 이걸 두 번씩 읽었냐면 바로 이 이야기가 이 이야기 안에 구원의 이야기 전체가 녹아 들어가 있어요. 이 이야기만 여러분이 잘 이해하시면은 절대 어디 가서 다른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요. 자 맨 위의 1절 2절의 이야기를 에스겔서에서 한번 찾아보자고요. 



에스겔서 11장 23절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옛 성전이에요.)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감람산입니다.) 
24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에스겔서 43장)
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자 여호와의 영광, 여러분 안에 그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죠.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시니까 가득한 거예요. 너무 쫄지 마세요. 성령이 여러분에게 계시면 성령이 무슨 10%만 들어가 있고 20%만 들어가 있고 안 그래요. 온전한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시다니까요. 그러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찬 게 여러분이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새 성전이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여러분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들어가 있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거를 신앙생활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호와와 하나님과 지금 혼인 관계, 한 몸이 되어 있는 거잖아요. 연합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이 혼인 관계가 성립이 되었는지 완성이 되었는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고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경험을 통하여 배우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할만한 처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옛 성전에서 그 율법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이제 새 성전이 건축이 되요.


그런데 새 성전이 건축이 되는데 성전을 척량하는 어떤 이가 나타나요. 그러더니 성전을 자세하게 척량을 해요. 진짜 하나님이 지으라는 치수대로 그 재료대로 지어졌나? 이렇게 하나하나 척량을 해요. 그리고는 어~ 완벽하게 지어졌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 척량, 도대체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척량은 어떻게 일어나겠냐는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에 가면 그 에스겔서의 성전 척량 사건이 조금 더 우리가 알기 쉬운 단어들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반복되어. 거기 한번 가볼까요. 



계시록 21장 9절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에스겔서에서는 성읍, 성전, 측량이었는데 여기서 그 성을 뭐라고 그러죠? 내 신부라고 그러죠? 그러면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렵습니까? 여러분? 안 어렵죠? 빨리빨리 잘 생각하셔서 그냥 원래 교회에 계시든가 딴 데 가시든가 그러세요. 신부라고 그래요. 여기서는. 내 신부야 그래놓고 그게 거룩한 성 예수살렘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어떤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이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측량을 하는데 전부 12 12 12 144 1000 이런 숫자에요. 보세요.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지성소죠?)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보다시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당신의 영광으로 덮어버리는 새 성전은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우리의 이 육적 아담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못 들어와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상태의 삶을 여러분이 구원받은 상태에서도 경험해야 되요. 그래서 가끔 왜 하나님은 이렇게 버려두시지. 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나? 침묵하시나? 이런 경험을 해야 맞아요.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의 역사 속 인생을 돕는 게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의 인격을 도야하고 여러분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는 상태를 그렇게 성숙되어지는데 하나님이 돕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니들은 어떤 지경에 처해지게 되는지를 한번 경험하고 그 영광이 돌아왔을 때 너희들이 어떤 존재로 높여지는 지를 경험하여 내 은혜를 의지하라. 내 이 생명 속으로 함몰 되어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 신부가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서 연합되어질 하나님의 그 신부의 자격이 있는 지를 이렇게 판별하는 게 성전 척량이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성전을 척량했더니 전부 뭐에요? 12x12x12x10x1000 뭐 그것이 12x12에서 144, 계시록 7장 14장 이런 데 가면은 그래서 그 신부를 뭐라고 그래요? 144,000이라고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뭐 이런 얘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144,000명만 이렇게 구원받고, 이 이야기 아니라니까요. 어디서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 12가 뭐에요? 하나님의 아들의 수라고 그랬잖아요. 야곱의 12아들 그래서 예수님이 12살에 아들로 옛 성전을 참 성전인 그 하나님의 아들이 12살에 그 성전에서 그 옛 성전을 부수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11살도 아니고 13살도 아니고 12에. 그러면 척량을 했더니 12, 12, 12.. 


12사도 12지파 이게 다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그 분의 공로에 의해 그 아들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 된 성도들의 모습, 은혜에요. 따라서 그 신부를 척량해서 어디를 재도 은혜가 안 나오고 은혜에다가 요만큼이라도 한 1mm라도 뭐가 붙어있으면 걔는 탈락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은혜를 붙드는 자가 되는 거지, 거기에다가 뭘 보태는 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그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그렇게 오직 은혜로만 지어진다. 라는 건 아담 안에서 은혜로 거저 탄생된 하와가 아~ 남편이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라고 했을 때, 맞습니다. 당신 없으면 저는 생겨나지도 못한 존재입니다. 라는 이 관계, 이걸 의의 관계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걸 알아먹지 못하고 율법, 도덕, 윤리, 이런 걸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해서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자인지를 증명해 내려고 하는 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 이걸 간음이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이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게요.

 

새 성전으로 돌아오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그렇게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난 후에 예수님이 성전마당에 앉으시죠. 성전이라고 그래요. 거기를. 바로 그 앞장에서 옛 성전의 그 간음하는 모습, 그 더러운 창녀들의 혼인잔치, 간음잔치 이게 그려졌잖아요. 7장에서. 그게 율법주의 모습이었잖아요. 예수님이 그 성전을 깔고 앉으시는 거예요. 이제 부수겠다는 거죠. 


그랬더니 그 율법주의자들이 간음한 여자를 하나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 7계명으로 들이 대죠.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죽여야 됩니까? 라고 묻습니다. 율법으로 예수께 나오는 거죠. 그게 7장에서의 유대인의 모습이었잖아요. 그걸 그대로 그리는 거예요. 그래,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 그 여자와 똑같은 영적 간음 자들, 그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을 직시하신 분이에요. 보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율법주의 안에 들어있는 인본주의 안에 들어있는 이들은 자기가 지금 간음을 하고 있는 자라는 걸 절대 못 알아먹어요.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간음한 여자 하나를 때려죽이면서 나는 아니다. 라는 걸 지금 증명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 율법주의가 간음이에요. 진짜 하나님이 금하는 간음이에요. 이게. 그런데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땅에다 흙에다가 친히 뭘 쓰시죠. 성경에는 하나님이 직접 친필로 흙에다가 뭘 쓰신 게 세 번 나오죠? 시내 산에서, 돌판에다 율법 쓰신 거, 그리고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그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요? 죄가 폭로되잖아요.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친필로 뭘 쓰시자 아래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인간들이 뭘 섬기고 있었는지가 확 폭로되죠. 우상이었죠.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간음이에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야~ 네가 왕인 줄 아냐~ 네가 아무리 왕 노릇하려고 이 세상에서 왕 되려고 애를 써 봐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너는 그냥 죽어야할 자야~ 죄가 폭로됩니다. 그리고 심판이 일어나요.


첫 번째 십계명 돌판에서도 심판이 일어났잖아요. 마찬가지거든요. 하나님이신 그 분이 흙에다 뭘 쓰시죠? 그리고는 죄 없는 놈 있으면 손들어~ 아무도 안 들어요. 첫 번째 돌판이 내려오는 거죠. 죄 없는 놈 손들어~ 아무도 안 들어요. 그런데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인간들은요. 자기의 죄가 폭로되면 그 은혜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은혜를 피해서 도망가게 되어있어요. 나를 감춰야 되거든요. 그게 은혜 받지 못한 자들이에요. 다 도망가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이 내려오죠. 그렇게 출애굽기에 보면 그 두 번째 돌판이 내려오기 전에 모세의 중보의 모습이 딱 들어가 있어요. 바로 그 앞에 사이에 그죠? 첫 번째 돌판이 딱 내려왔더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은 자기들에게 풍요를 약속해 주는 나를 위한 금송아지였어요. 그걸 우상으로 그러고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때 심판이 일어나고 3000명이 도륙당하는 거예요. 다 죽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하나님 나를 죽이세요. 차라리. 재들 살려 주세요. 이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인 예수의 모형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서 속하여, in Moses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 받았다. 구원받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가 예수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그 모세가 중보를 자처하는 거예요. 네 날 죽이세요.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이 내려오죠. 그러면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그 두 번째 돌판, 율법을 말씀을 볼 때마다 뭘 생각해야 되요. 잘 지켜야지. 아니요. 못 지켜서 다 죽었다니까요. 모세가 중보자가 그 앞을 가로 막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가로막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도 또 죽었을 거야. 아 감사하다. 이리로 가야되는 게 두 번째 돌판 말씀의 진의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걸 먼저 배워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요.

 

예수님께서 두 번째 땅에다가 뭘 쓰세요.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내가 너 대신 죽겠다는 거예요. 내가 간음한 자 되어 너 대신 죽겠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의 그녀의 부정함, 간음함, 이걸 쭉 빨아들이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죄인이 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이중에 죄 없는 놈 손들어, 죄 없는 놈이 정죄해 봐라! 그랬더니 다 도망갔어요. 예수님이 나중에 뭐라고 그래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하죠. 그 말은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버리신 거예요. 그 여자 때문에. 


그리고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 그러죠. 그 죄가 뭐겠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간음일거 아니에요. 그 무슨 죄를 짓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너를 정죄한다고 해서 네가 신랑인 내 앞에서 부끄러워 한다면 내가 한일 십자가 진 일이 뭐가 되겠니? 그러면 너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간음하는 거야~ 내가 너를 이렇게 용서했으니 가서 이제 죄 짓지 마. 가서 다른 남자랑 또 자면 죽여 버릴 거야. 이 얘기가 아니라니까요. 오늘 산상수훈에서 간음하지 말라. 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산상수훈 내용 전체가 뭐였어요. 예수의 은혜에요. 십자가라니까요. 도덕과 윤리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어떤 사회적 규범 이런 거 교훈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그렇게 첫 번째 돌판 앞에서 죄인으로 폭로 되었을 때에 모세가 그들에게 뭐 먹이죠? 금송아지를 가루로 갈아서 그걸 물에다 타서 먹이죠? 그랬더니 그들이 죄인으로 폭로가 되고 도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와요? 민수기에 나와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라니까요. 한번 가보죠. 먼저 예레미아 17장 12절 보고 민수기로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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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 17장 12절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이거 이혼이고 간음이라고 그랬어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 내내 생수 이야기를 하고 그 생수이신 예수가 흙에 이겨지는 거죠? 내가 생수다. 그래놓고 흙에다 뭘 쓰고 있잖아요? 그 생수가. 그런데 그게 어떤 행위냐면 여호와를 떠난 자들을 하나님이 저주의 돌판에다가 쓰는 행위인데, 예수님께서 두 번째 거기다가 뭘 썼어요? 자기 이름을 쓰시는 게 바로 이 이야기인 거예요. 너는 살려내고 내가 대신 죽어~ 


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예수님을 가지처럼 뚝 잘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잖아요. 이혼당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정한 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의 간음을 먹어버리시는 거라고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정결한 신부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민수기로 가보세요. 5장 11절



민수기. 5장 11절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13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보세요. 인간들의 자기 죄 감추기에 아주 철저한 이런 걸 이게 지금 비유로 설명하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안 들켰어요. 그런데 그걸 폭로해 내는 방법이 있다니까요.)
14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든지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거든 
15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16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17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거룩한 물, 이 거룩한 물을 요한복음 7장에서 뭐라고 그러죠? 생수, 이것은 곧 성령이니라. 그러잖아요. 그죠?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18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19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20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21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찌라 
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찌니라 
23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고 
24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찌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 가서 쓰리라 
25 제사장이 먼저 그 여인의 손에서 의심의 소제물을 취하여 그 소제물을 여호와 앞에 흔들고 가지고 단으로 가서 
26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에 소화하고 그 후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울찌라 
27 그 물을 마시운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 배가 부으며 그 넓적다리가 떨어지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에게 거룩한 물과 성전 바닥의 티끌을 섞어서 마시우게 하면 그 여인이 간음한 여자면 티가 나요. 몸이 부어요. 그죠? 아니면.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생수이신 거룩한 물이신 예수가 흙에 이겨져서 그 여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남아서 예수의 신부가 된 여자는 딱 한 여자에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었죠? 어디 갈 데가 없어요. 예수님의 그 은혜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서 일탈을 하면 돌에 맞아 죽어요. 그걸 아는 여자니까 어디로 못가는 거예요. 내가 죄인인데 나는 나가면 맞아 죽을 그런 더러운 걸레인데 내가 예수님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여러분, 그 예수라는 거룩한 예수, 그 예수가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셨다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던지면 나는 그래도 살만 해~그래도 열심히 노력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그런 자리에 갈 수 있을지 몰라 하고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감추고 도망가는 자들은 죽는 거예요. 


그걸 마시고, "맞아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 저주의 티끌 같은 이 흙 같은 없음인 나에게 부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냥 그 흙에 머물지, (흙에 물이 부어져야 존재가 되고 조형물이 되잖아요.) 예수라는 생수가 없이 내가 어떻게 있음의 자리에서 언감생심 어떻게 신부가 되겠습니까?" 하는 이 사람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던져보면 여기 민수기에 보면 말씀을 그 물에 빨아서 넣는다고 그러죠? 그게 복음이란 말이에요. 말씀이란 말이에요. 던져서 주면 내가 간음한 자가 맞습니다. 라는 그 자만 살아올라 오는 거예요. 


우리도 지금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역시 그 예수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잖아요. 내 몸뚱아리 뿐만 아니라 내 자식, 내 부모, 내 가족 그건 인지상정이거든요. 내 마음에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걸 간음이라고 해요. 그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 속에서 예수의 은혜 그게 없었으면 나는 큰일날뻔 했었구나. 이거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네 눈이 범죄 하면 오른 눈을 뽑아라. 네 손이 범죄 하면 오른 손을 찍어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서 나오는 거죠? 선악과 사건에서 보고 손으로 만지려고 했잖아요. 우리에게 간음하고 있는 우리에게 너희들 이걸 알았으면 인제 아담과 하와 같은 그런 죄는 짓지 말아야 되지 않겠니? 니들이 어딜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독립성을 주장하려고 그래~ 찍어! 그러는 거예요. 뽑아! 그러는 거예요. 


어저께 밤에 포르노 봤으니까 오늘 양쪽 눈 다 뽑아야지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다음 주에 그 창세기에서부터 다시 재미나게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서 그 간음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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