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14 예수 죽인 자들아 더 이상의 도륙은 필요 없다 마태복음 5:21~2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9

산상수훈 14 예수 죽인 자들아 더 이상의 도륙은 필요 없다




마태복음 5: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자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완전하게 하셨다. 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공부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내내 그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던 그 복음의 실체요. 원형이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 완성에 있어서에 그 율법의 무용함과 율법 앞에서의 그 인간들의 불가능함을 손수, 몸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그 하나님의 아들들의 실존을 밝히 보여 주셨죠? 그게 완전케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율법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는 그림이 역사 속에 그려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이스라엘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율법 앞에 맞아 죽는 거죠. 그건 율법의 죽음이기도 했어요. 예수님의 의해서 율법이 부정된 거잖아요. 율법이 열심을 부려서 결국은 하나님을 죽이더라. 그러니까 그게 율법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에요. 그것도.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하늘의 완료되어 있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 탄생 원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거예요.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가 그 십자가에서 완전케 되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맨 마지막에 무슨 말 하셨어요? 다 이루었다. 그랬죠? 완료했다. '테텔레스타히' 다 이루었다. 라고 그랬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율법과 선지자의 진의를 밝히신 것, 그게 율법을 완전케 하신 거예요. 히브리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걸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심으로 완료하셨다. 라는 그런 대목이 나오잖아요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게 뭐에요? 선지자들이 무슨 말을 했죠

"메시아가 온다. 메시아가 온다. 회개해라. 메시아가 온다." 

율법주의 안에 복음의 폭탄을 던진 거죠. 은혜의 폭탄을 던진 거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 잘 지내고 있던 그곳에 들어가서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회개해라. 메시아가 온다. 를 외쳤습니다. 그 말은 니들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 거란 말입니다


열심히 제사지내고 율법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유대주의의 한복판에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 메시아를 의존해야 산다. 라면서 그들의 율법지킴과 제사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 율법과 선지자를 아들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완료해 버리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그 완전케 된 율법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그 강박으로서의 어떤 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완전케 했다. 라는 말 바로 밑에 왜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가 등장할까요. 여러분. 앞뒤가 안 맞잖아요. 바로 위에서는 율법은 예수께서 완전케 했어. 라고 해 놓고 바로 그 밑에 그 것도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 가 떡하니 나온다니까요. 완성했다며요. 위에서는. 성도에게 강박으로 요구되던 율법은 예수님에게서 완전하게 됐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 라는 그 말은 율법 안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러한 살인에 대한 금지의 명령은 아닐 거란 말입니다. 그 무슨 말일까요


그러면. 먼저 출애굽기로 가서 이 대목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한번 찾아보죠. 십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 1절 보세요.



출애굽기 20 1-16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찌니라

14 간음하지 말찌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자 율법입니다. 십계명. 그런데 잘 보시면 다섯 번째 계명까지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째 계명부터는 설명이 붙어 있지 않고 명령만 나와요. 제목만 나온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앞부분의 다섯 계명 즉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에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라 도 하나님 사랑에 대한 거예요. 제가 나중에 그건 설명해 드릴게요. 이웃 사랑의 내용인 그 뒤의 다섯 계명에는 설명이 붙어 있지 않죠


그리고 그 나머지 다섯 계명을 지금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설명해 내고 계시는 거예요. ? 앞에 거는 하나님이 설명했거든요. 출애굽기에서.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산 위에서 뒤에 부분을 설명하시고 계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을 설명하시고 예수님은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산 위에서. 율법은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어 그걸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태복음 22 36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둘째는 그것과 같으니, 그와 같으니~ 이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그 말은 첫 째와 둘째가 똑같이 같은 것이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이 이 땅에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 사랑이 이 땅에서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보여지게 된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건 둘 다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이에요. 하나님 사랑, 이 사랑은


그런데 이웃사랑의 그 내용이 살인하지 말라. 로 시작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율법사에게 뭐라고 그랬어요. 어떤 비유를 말씀하셨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죠? 그러면서 뭐라고 물으시냐면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냐? 그랬어요. 그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가 바로 너를 이웃삼아 너를 사랑하는 분이지 네가 이웃을 사랑해서 영생을 얻는 게 아니다. 를 비유로 설명해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웃사랑은 예수님이 해 내신 거란 말입니다


그냥 우리는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에요.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선한 사마리인의 도움을 절대 안 받는단 말이에요. 유대인들은요. 그러니까 거반 죽어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 예수의 은혜를 도움을 받은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결국 그 자리로 내려가서 하나님 나 좀 도와주세요. 그래서 예수의 은혜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라는 것을 이제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 성도의 하나님 사랑은 예수가 완료하여 세우시는 것이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니네는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을 받아 영생을 얻어라~ 그랬으니까 우리가 할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말씀 하신 그 이웃사랑의 부분은 예수님이 일차적으로 완료해 내신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 거란 말이죠


율법의 그 십, 완전 수, 그래서 십계명이에요. 그 완전수는 예수의 의해 완성된다. 를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이 설명해 내시고 나중에 이걸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이 산 위에서 그걸 완성하시는 분으로서 나머지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심으로 내가 이거 십을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온 거다. 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지금요. 그래서 여섯 번째부터 지금 예수님이 설명을 한단 말입니다


첫 번째 돌판이 십계명이었다면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두 번째 돌판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 두 번째 돌판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단 말이에요. 첫 번째 돌판은 심판을 하는데, 그 율법이란 말이죠. 그것이. 첫 번째 돌판은 인간 세상에 내려오자마자 깨져버렸어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에게 내려오게 되면 인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심판을 당하는 존재지, 지켜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 거란 말이에요. 그 전에 피까지 뿌리면서 맹세했는데 애시당초 내려오기도 전에 그들의 불가능함이 폭로됐잖아요. 금송아지 사건으로. 아니다. 라는 거예요


첫 번째 돌판, 율법, 구약의 율법은 심판이에요. 심판. 그리고는 두 번째 돌판이 내려오는데 그 두 번째 돌판은 이스라엘에게 장악이 되어서 실천의 강령으로 자경이 되는 게 아니라 사용이 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율법이 돌판이 두 번째 돌판이 장악을 해서 법궤가 장악을 해서 그들을 끌고 가요. 그 두 번째 돌판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그 법궤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 번째 돌판은 법궤 속에 감추어져서 그 위에 피를 뒤집어 써 이스라엘을 용서하는 은혜의 법이에요. '노모스' 새로운 법이란 말이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예요. 모형 하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은 두 번째 것이 완성하고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차자들, 장자가 아닌 차자들이 항상 하나님의 그 장자권을 이렇게 받는 모습이 나타나죠? 두 번째 것이 세운다. 라는 의미인 거예요. 그것이요. 두 번째 것이 세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웃사랑의 부분을 이제 산상수훈에서 풀어내시는 거예요. 내가 완료하여 십을 완성한다. 율법의 완성자가 여기 있다. 를 보여주는 거죠.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이 율법의 계명은 무슨 뜻을 진의로 담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이라면 하나님도 거기에 걸리죠.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기까지 다 죽여 버리라고 그랬거든요. 그건 하나님도 죄인 되는 거예요. 율법 어긴 분이 되는 거예요. 어디서는 들어가서 다 죽여~ 안 죽이면 죄다. 그래 놓고 어디서는 살인하지 말라.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살인하지 말라가 그 뜻이었다면 그 뿐만이 아니라 아니 형제가 보고 라가라고 하는 것도 살인인야~ 이걸 강조하는 거라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살인을 명령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거 구약의 율법이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에도 나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계명을 줄때는 하지 말라고 그러고 또 이스라엘에게 따로 와서는 살인해 다 죽여~ 말이 되냐고요. 이게요. 그러니까 그 말은 아닐 거 아니에요. 적어도. 하나님이 일구이언하시는 분이에요?


출애굽기 20장에 살인하지 말라. 라는 그 계명에 쓰인 단어는 히브리어 '라짜흐' 인데요. 죽이다. 도륙하다. 라는 의미에요. 예수님은 그 '라짜흐' 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받아서 '포뉴어' 라고 설명을 하세요. 그 단어는 원래 제사 용어에요. 동물을 살육하거나 도륙할 때 쓰는 말이에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일만을 금지하는 그런 단어가 아니란 말이에요. 짐승을 도륙하고 죽이는 거. 그런데 그 '우포뉴세이스'는 사람을 포함한 짐승의 그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살해, 도륙을 의미하는 거예요.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살해. 그거 하지 말라. 라는 거거든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왜 반복적이며 습관적인 도륙을 금하고 있는 걸까요. 그게 살인하지 말라거든요. 제사는 완전한 제물에 한 번 죽음으로 한 번 도륙됨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제사의 도륙을 금하는 거예요.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 '우포뉴세이스' 에요. '우포뉴세이스' 도륙하지 말아라.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도륙하지 말아라. 이런 뜻이에요. 그 인자를 계속 죽이지 말아라. 이게 살인하지 말라. 에요. 그 사람의 그 아들, 계속 죽이지 말아~ 이런 뜻입니다. 호세아서로 가면요 이스라엘의 그 살륙죄를 살인죄를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살륙죄가 무엇인지 성경이 잘 그려줍니다.



호세아서 5 1절 보세요.

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제사장 이스라엘이 나와요. 율법주의의 총화)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2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뭐가? 살륙이 저희의 행위가 하나님께 못 돌아가게 한다는 거예요.)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여호와를 모르니까 그 살육을 계속 한다는 거예요.)

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6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그 살육죄가 뭐라는 거예요?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가서 성전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제사 지내는 그 행위로 그들은 하나님 못 만날 거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난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살육죄를 호세아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성경이 그걸 음란, 간음, 행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계명의 진의를 잘 공부하면 그 밑에 간음문제나 이혼문제가 수월하게 풀릴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류,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야~ 이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율법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구원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그 법은 다. 하나님은 그러한 율법적 살육을 반복적으로 계속 하는 자들이 결국 자기들도 그렇게 살육을 당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세요. 그 제사의 행위, 율법의 행위가 결국 그들을 죽일 거라는 그런 말씀 하신다니까요. 에스겔서 6 3절 보세요.



에스겔서 6 3-5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4 너희 제단이(번제단이에요.)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륙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5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제단에 와서 이스라엘이 계속 뭔가 제사를 지내는데 하나님이 보기에는 우상 섬기더라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그리고 자기들의 자존심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종교행위. 그러한 살육, 그러한 반복적이며 습관적인 도륙은 너희를 죽게 하는 거다. 라고 하는 거. 그게 살육죄다. 그러는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 를 어기는 게 바로 이것이다. 라고 살육죄를 이렇게 선지자들이 설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제사라는 건 영단번에 도륙, 살육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살육 당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신 어린양의 그 제사, 그 예수그리스도의 제사를 알라고 주신 게 제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그리스도로 이해되지 않은 율법의 그 반복적인 제사, 그건 예수님의 살육 당하심, 즉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잖아요. 영단번에 죽어주셨는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러, 상번제 드리러 오고 속죄일에 제사 드리러 오고 화목제 드리러 오고 속건제 드리러 오고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뭐가 되냐고요. 그거를 알아먹으라고 제사를 지내라고 줬더니 이 예수는 잊어버리고 제사에만 열을 올리는 거. 이것이 바로 반복적이며 습관적인 살육인 거예요. 도륙인 거란 말입니다


그거 하지 마. 그러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마. ? 그게 예수님이 하신 일 자체를 부정하는 거고 그 예수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율법을 붙들고 은혜의 예수를 죽이는 거. 나 좀 그만 잡아. 얘들아 이 뜻이에요. 나 좀 그만 잡아


오늘 말로 바꿔 볼게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여러분을 완성하셨대요. 창세전에. 그런데 여러분이 와서 교회에 와서 계속해서 뉘우치고 반성하고 회개를 하면 그 때마다 어떻게 되는 거죠? 예수님이 제물로 바쳐지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게 하면서 이렇게 예수를 못 믿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아 반성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게 왜 나빠요? 안 나빠요. 그런데 그 것 자체가 예수를 모독하는 거라는 거 잊지 마시란 말이에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거 하게 되요. 그런데 그게 불신앙이라니까요. 사실은


예수가 완전케 했다는데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회개를 좀 해야 눈물, 콧물 흘리면서 반성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고 그게 진짜 하나님이 용서가 떨어지는 자리인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예수를 못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분 그게 예수 계속해서 죽이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도륙 사건은 창세기에서부터 꾸준하게 설명이 되고 있어요.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이 일어나죠. 선악과의 그 지식, 그 지식은 율법을 말하는 거예요.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이니까. 그게 율법이란 말이죠.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땅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서 그 말씀을 장악해 보려는 지켜보려는 시도를 하는 걸, 선악과를 말씀을 먹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먹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 선악과를 장악할 수 있다. 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게 먹는 거예요. 율법을 먹는 거예요. 말씀을 먹는 거예요


그들이 그렇게 말씀을 대할 때 그게 율법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그 율법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 율법을 먹어 버리고 그 말씀이 인간들의 육 안에서 소화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먹어서 이걸 에너지 삼아 나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할 수 있고 지켜낼 수 있어. 이거. 이게 먹은 거예요.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버린 사건이 말씀이신 예수를 먹는 도륙하는 사건인 거예요. 그것이요. 창조주 하나님을 살해한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는 자들인데 내가 그거 먹고 내가 내 창조에 기여를 하겠다. 라고 하는 게 창조주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거니까 창조주 살해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게요


그 때 하나님께서 무죄한 짐승을 도륙하셔서 인간들의 그 하나님 도륙을 용서해 주시죠.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원시 모형이었던 거예요. 그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나죠. 거기서 동산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 이라는 단어는 울타리 두른 곳. 성전을 의미하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거기서 모형으로, 그림으로 설명해 준거란 말이에요. 율법을 먹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도륙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무죄한 제물의 도륙에 의해 살아나는 거예요. 어디에서. '', 성전에서. 그걸 알려 주시기 위해 성전에서 제물을 드려 제사를 드리게 한 거예요.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인 가인과 아벨 때에 벌써 제사를 준 거예요. ?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살아났어. 를 알아먹으라고 준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담 때에 벌써 제사를 지낸다니까요. 예수를 계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매한 인간들은 절대로 그 하늘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해요. 그래서 반복적이며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제물을 도륙하는 율법의 행위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 때 주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륙하지 마. 더 이상 살인하지 마. 인자 죽이지 마. 나 죽이지 마. 그러는 거예요. 그게 살인하지 마. 에요내가 이미 죽어서 완료했는데 왜 자꾸 죽여~ 그러는 거예요. 왜 자꾸 죽여


두 번째로 성자의 도륙사건이 그려진 곳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요.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에요? 들이라고 그러죠. . 이게 '사데'거든요. 그것도 성전 뜰, 성전 마당이에요. 성전 마당에 뭐 있어요. 번제단이 있는 곳이에요. 들에서 번제단 위에 어떤 제물이 바쳐지는 거예요. 가인에 의해 제물이 죽고 가인이라는 존재가 셋이라는 사람으로 부활하는 이야기. 가인이 누구를 살해하죠. 동생. 형제를 살해하죠. 여러분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살인하지 마. 그러면서 갑자기 형제 이야기를 왜 끌어 오는지 아시겠어요. 이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미 내가 그려 놨다는 거예요



창세기 4 1절과 2절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이걸 제가 히브리 원어대로 직역을 해드릴게요. 그리고 아담이 그의 음란한 여자를, '이수아'가 음란한 여자거든요. 음란한 여자, 죄 지은 여자, 선악과 먹은 여자에요.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 지금 음란한 여자, 고멜, 우리 이야기에요. 음란한 여자를 생명을 낳는 자로 알게 되었다. 아니 음란한 여자가 어떻게 생명을 낳지? 그런데 하나님이 알게 해줬다는 거예요. ~ 이 여자가 생명을 낳는구나. 그래서 산 자의 어미에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 했다. 그리고 가인으로 낳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호와로 '이쒸' 남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녀가 낳기 위하여 더하게 했다


그의 형제로 '헤벨로' 하나를 더 낳았는데 '헤벨' 형제를 낳았다. 에요. 형제를 낳았다. 그리고 헤벨은 양의 목자로 가인은 땅을 섬기는 자로 있었다. 제가 직역한 거예요. 음란한 여자, '이수아' 이 죄인이 씨를 낳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그 생명이 가인으로 나와요. 먼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아벨이라는 형제가 등장해요. 형제가. 거기서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nothing이라고 했죠. 없음. 안개, 호흡해 봤자 소용없음.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파자를 해 보면. 마땅히 죽을 자. 이게 아벨이에요. 마땅히 죽기 위해 nothingness 없음으로 이 땅에 온 형제가 등장을 하고 음란한 여인이 낳은 가인이라는 자가 그 형제 아벨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로운 셋이라는 존재로 부활을 하는데 셋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보세요



창세기 4 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태어난 다른 씨, 이게 셋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에요. 우리가 예수를 죽이자 예수가 우리를 품어 안고 성령과 연합하여 교회로 탄생한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셋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죠? 가인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거잖아요. 가인의 제사는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사였다고 그러죠? 그런데 그 바로 앞에 3장에서 땅의 소산은 저주의 산물이다. 라고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창세기 3 17-18절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누구 대신에 저주 받아요? 선악과 아담 대신에 저주 받죠. 그러면 선악과 먹은 아담이 내어 놓는 열매, 저주 받은 열매는 뭐겠어요? 율법의 행위겠죠. 그러면 아담 대신에 저주받은 땅이 내어 놓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뭐라는 거예요. 율법의 행위를 모형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란 말입니다. 선악과 먹은 아담 대신에 땅이 저주 받고 그 땅에서 뭔가가 나온다. 그래 놓고 그걸로 제사를 드리는 가인이 나온단 말이에요. 바로 연결이 되어서 


그러니까 선악과 먹은 아담이 내어 놓는 열매는 행위의 열매겠죠? 선악과 먹고 나는 할 수 있어. 하나님처럼 됐어. 선악 판단의 주체는 나야. 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대신에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데 그 땅의 소산으로 저주의 소산으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제사한단 말이에요. 가인이. 하나님은 그거 안 받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주한 건데 가인은 그걸 그대로 갖다 드린 거예요. 뭘로? 제사의 행위로. 제사만 드리면 됐지. 뭐 뭘 드리면 어때 이런 식이었던 거죠


우리가 예배하러 와서도 우리는 예배를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게 예배에요. 헌금도 내 안에 있는 예수를 드리는 거고. 왜? 예수님이 나 대신에 십일조, 헌금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그걸 아는 내가 예수를 헌금으로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헌금 통에 넣는 건 다 예수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냥 여기 와서 이렇게 주일 성수하고 열심 부리고 봉사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 받으시겠지. 이게 가인의 제사에요. 여러분. 행위의 제사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하나님은 그거 안 받는단 말입니다


이미 무죄한 제물이 제물로 바쳐졌어요. 그리고 그 껍데기로 아비와 어미의 부끄러움이 가려졌단 말이에요. 이거를 기념하고 이걸 이해하라고 제사를 지내라고 줬더니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의 행위를 드리면서 하나님 잘 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갔다니까요. 하나님은 그걸로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아내게 되는, 산 자가 되게 되는 성도의 현실을 알으라고 줬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인은 몰랐고 아벨은 알았어요. 그래서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렸어요

어떻게 아냐고요.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잖아요



히브리서 11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라는 건 가인과 다른 제사라는 뜻이에요. 진짜 하늘의 제사를 드렸다는 거예요아벨이.)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그 제물, 네가 드리는 예물이 뭔지를 아벨에게 증거 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벨이 알았다는 거예요. 어떻게? 믿음으로, 은혜로. 그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은 거란 말이에요. 예수를 받은 거예요. 아벨이 드리는 예수. 나는 그 예수에 의해 내 밖의 어떤 존재의 희생에 의해서 산거구나. 를 아벨이 알고 그걸 하나님께 고백한 걸 아벨의 제사라고 그래요. 그걸 하나님이 받으신 거란 말입니다. 가인은 그걸 몰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행위는 땅의 소산으로 반복적인 종교행위를 하는 거예요. 율법은 항상 반복과 습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안 받은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요. 여전히 우리는 반복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이미 돌아가셨다는데 또 와서 불안해하고 또 와서 두려워하고 또 와서 슬퍼하고 그러니까 제사를 안 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제사 드리고 금식하고 그랬어요. 불안해서 그랬어요. 두려워서 그랬다니까요. 안 하고 있으면 구원의 확신이 막 흔들리잖아요. 친구들이랑 소주 한잔 할 때 그냥 마실 때는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아 어저께 예수님이 왔으면 어떡할 뻔 했어~ 이렇게 되는 거죠. 그죠? 그 때 와도 괜찮아요. 예수님도 창기들하고 포도주 마시고 그랬다니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오셔서 어린양의 영단번의 제사로 완성되는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했더니 그렇게 나 제사 드리러 왔어. 라고 그 예수가 왔단 말이에요. 하벨이 왔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어요. 아벨을 가인이 때려죽이듯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때려 죽였잖아요.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게. 그런데 그 아벨이 누구에요? 형제란 말이에요. 어떤 형제.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온 형제. 가인이 그 형제 아벨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지 보세요.


창세기 4 5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라는 말은 직역을 하면 심히 분노하여 대적의 자리에 섬으로 해서 실패했다. 그런 뜻이에요. 실패했다. 가인은 실패했다. 어떻게? 그에게 심히 분노하여 그의 대척점에 대적에 자리에 섬으로. 이런 뜻이에요. 이것이. 내 제사가 부정 되는 거. 그건 내가 부정되는 거거든요. 이거를 인간들은 못 견뎌요. 그러니까 심히 분노하고 그 은혜의 반대의 자리로 가서 대적하는 것. 그걸 실패라고 그래요. 성경은.



마태복음 5 22절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오늘 본문의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라는 말이 형제에게 화내는 사람은 무조건 심판 받는다.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형제에게 노하여 형제를 죽여 버린 가인, 이스라엘, 바리새인, 나 이야기 하는 거예요. . 그게 형제에게 노하여 그를 살인하는 심판 받을 자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단순히 다른 이웃들, 형제들에게 분노하거나 화내거나 그러지 말어~ 라는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 예수에게 분노하여 예수를 때려죽인 우리의 이야기에요. 왜 우리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돼~ 나도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됐는데 왜 나를 부정해. 이거


그런데 그렇게 분노하여 우리가 대적자의 그 반대편에 섰다. 라는 말은 원수란 뜻이죠? 대적자가 되어 대척점에 서서 그에게 분노하여 우리가 그 원수를 때려 죽였죠? 그런데 그 원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셋으로 부활한 거잖아요. 그걸 아는 이들이 어떻게 우리가 때려죽인 그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게 원수를 사랑하라. 에요. 나에게 헷고지하는 놈들을 무조건 용서해라. 이런 말 아니에요. 그런 거는 성경이 우리에게 요만큼도 요구하지 않아요.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해요. 원수를 어떻게 용서 합니까? 되요 그게? 정신 분열자 환자가 아닌 이상.


그런데 이게 다 어디서 일어난다고요. 성전 안에서. '' '사데' 이게 다 성전이란 말이에요. 성전. 그 성전 안에서 무죄한 자의 살육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디서 돌아가셨어요? 예루살렘, 거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전에서 대제사장에게 율법에게 심판받아 죽는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성전에서 율법이 어린양 예수를 죽이고 그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거. 구원의 이야기에요. 바로 이 일들이 하늘 성전에서 완료된 하나님 백성 만들기에 관한 내용인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 성도를 하나하나 다 성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거. 음란한 여자, 우리잖아요. 그죠


여자, 신부가 자격 없는 신부가 가인도 낳았고 아벨도 낳아요. 한 뱃속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로마서 이야기처럼 두 아이가 싸우는 거예요. 은혜와 율법이 싸운다니까요. 그런데 번번이 아벨 은혜가 맞아 죽어요. ? 우리는 선악과 먹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은혜가 맞아 죽는 그 경험을 하면서 성도만 알아요. 아 이렇게 우리는 불가능하기에 이렇게 아벨이 죽어 내가 산거구나. 를 알게 되는 게 여러분의 인생인 거예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짓 한다니까요


그러면서 성도는 깨닫는 거예요. 나는 불가능한 존재구나. 점점점 이렇게 나아지고 성숙되어지고 발전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끝까지 그렇게 하면서 결국 믿음이 내 안에 들어와 이건 아닌데 그래서 예수가 오실 수밖에 없었구나. 깨닫게 해 준다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런 음성을 듣겠죠. ~ 살육하지 마. 그만 죽여. 이거를 살인하지 마. 그만 죽여. 이미 내가 완료했어. 그만 죽여. 그걸 사도바울이 신부와 남편의 이야기로 이렇게 풀어내요



로마서 7 1절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잘 보세요. 1절에서는 율법과 사람, 성도를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 법, 율법 이걸 남편이라고 그러고 우리가 죽어야 남편에게서 해방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2절부터는 남편의 죽음이 설명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이해가 안 가잖아요. 2절 다시요.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신부의 죽음이 설명이 되어야 되는데 갑자기 남편의 죽음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신부를 죽이기 위해 남편이 죽었다. 라는 걸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 1절에서는 신부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법의 그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다. 라는 건데 그렇게 신부를 죽이기 위해 남편이 먼저 죽었다. 를 지금 이야기 한단 말이죠.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영의 새로운 것, 의문의 묵은 것, 옛 법, 새 법, 옛 언약, 새 언약이 등장해요. 남편과 신부가 등장하죠? 보세요. 1절에서는 아내가 죽어야 된다고 그러고 2절부터는 남편이 죽는다. 그래요. 그리고 다시 4절에는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런단 말이에요. 남편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래요. 어떻게? 남편 안에서. 그러면 그 남편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율법을 죽이는 존재죠? 그게 누구에요? 율법 아래, 율법으로 와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셔서 율법을 무력화시키는 분이 누구죠? 예수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예수에 의해 예수가 그 율법 자체를 이렇게 무용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무용한 것으로 증명해 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율법에 대하여 자유로워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예수가 율법을 죽인 거고, 그 예수 안에서 우리도 그 율법을 죽인 거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남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죠? 새 언약을 주시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너희들을 출애굽 시킬 때 내가 니들의 남편이 됐다. 고 그러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갖고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면서 그 율법으로 끌고 가신단 말이에요. 지켜봐~ 못 지켰죠? 다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남편으로 너희들에게 임하면 니네는 다 죽어~ 이런 뜻이에요. 이 남편이 죽어야 니들이 사는 거죠? 그죠



예레미아 31 31절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법을 그들 안에 둔다. 말씀을 그들 안에 둔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어 이제는 그들이 말씀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예수의 모양으로 그들을 살려 내겠다. 라는 그 뜻이에요. 은혜로 살려내겠다.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남편으로 계시면 안 되는 거죠? 남편이 율법으로서의 남편이 죽고 그가 그리스도를 예수그리스도를 자손으로 씨로 낳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를 낳는 그림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이 그림이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마리아, 마리아는 '마라'에요. '쓴물' '구원받아야할 자'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라의 쓴물에 나뭇가지가 던져짐으로 그게 단물이 되는 건 십자가로 말미암아 쓴물들이 단물, 엉터리 말이 생명의 말, 단물이 되는 거예요. 말씀,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합일 되는 거.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다 마리아밖에 없어요. 다른 여자들은 이름을 기록 안 해요. 그런데 마리아의 이름만 기록해요. 마리아가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 마리아들의 이름만 기록해요. ? 마라, 이 마라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받는 거거든요


그 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뭐라고 그러냐면, 여자여~ 라고 부르죠. 이게 일반적인 숙녀들을 부르는 그런 말이기도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쓰는 말이에요. 여자여~ 라고 부르는 거예요. 지금 아들이 예수가 남편이 율법이 마리아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지금요. 예수님이 놋뱀으로 율법으로 죽는 거라니까요. 이건 죽어야 되는 거라고 죽는 거예요. 여자여~ 라고 하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새로운 아들을 주죠.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게 십자가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예레미아서나 로마서 7장의 이야기나 이런 것들이 이렇게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거예요. 십자가 아래서의 그 이야기나. 에덴동산에서 율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게 뱀과 여자였죠? 뱀이 유혹해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그래서 놋뱀이 십자가에 달리는 거란 말이죠. 예수님이 율법이 되어서 죽는 거란 말이에요. 놋뱀이 되어서. 선악과 먹어. 그 먹어 버린 자. 이 놋뱀이란 말이에요. 죽는 거죠


창세기 3장에서 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나하쉬'라고 했죠? 그 말은 말이 없음. 혹은 아래의 것으로 왜곡하여 분석하여 전함. 뭐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왜곡된 말씀. 그래서 그걸 그건 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데. 그게 '나하쉬'에요. 그게 뱀이에요. 말씀이 없다. 가짜 말씀. 그걸 마귀라고 했잖아요. . 디아블로 왜곡된 영. 그러니까 귀신은 여러분이 그냥 허약할 때 다이어트 하는 라고 심신이 허약하여 환상으로 보고 그러는 게 귀신이 아니에요. 그건 속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허상이에요. 진짜 귀신은 예수를 못 알아보는 게 진짜 귀신이에요. 그게 '데몬프로제션' 악한 영이 예수를 못 알아듣게 한다. 그러잖아요사도바울이


그래서 그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달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이 죽는다고 그러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지혜롭게 된다. 왜곡된 말씀. 이 성경말씀 잘 지키면 하나님이 상 준다. 너희들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이 된다. 이거. 왜곡된 말이에요. 그런데 하와도 똑같아요. 하나님이 만지지도 말라. 고 그랬어요. 말이 자꾸 바뀌잖아요. 그건 성경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존재들을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게 말이에요. 여러분. 그게 뱀이란 말입니다. 말씀의 진의를 왜곡해서 인본주의 율법주의로 끌어당기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뱀이 되어서 죽으시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여러분 성전의 번제단이 뭘로 지어지는지 아세요? 청동이죠? 그 청동이라는 단어가' 네흐세트'에요. 그게 '나하쉬 타오' 뱀이에요. 그게. 번제단. 그러니까 뱀이 되어 죽으시는 예수그리스도 그 제물이 드려지는 곳. 그래서 청동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놋뱀이 되어서 예수가 달리는 거예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요. 성경은.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대부분이 풀렸죠? 형제에게 노하는 자, 아벨에게 노하여 아벨이라는 형제를 죽이는 자, 바로 나란 말이에요. . 그런데 그 형제가 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셋이라는 자손으로 나를 살려내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라는 그 메시지가 거기에 담겨 있는 거죠.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랑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5 12절 보세요.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지금 이 이야기하고 있죠? 산상수훈에서. 여섯 번째 계명부터. 그래 놓고 뭐라고 그래요?)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내가 그 사랑한 거야~ 라고 한 거예요. 친구를 위해 내가 목숨 버렸잖아~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구라는 개념은 정말 자기 것을 다 내어 줘도 아깝지 않은 그런 관계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자기 것을 다 내 보이는 거. 그래서 밤에 친구가 찾아와서 야~ 떡 내놔~ 그러면 일어나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 비유가 나온 거거든요. 안 주면 안 돼요. 그런 친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주신 거예요. 그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밝히 다 드러내야 되요. 그래서 그 집에 뭐가 있는 줄 아니까 가서 떡 내놔~ 그러는 거거든요


그래서 누가복음이 또 사도행전이 '데오빌로' 로 시작하는 거예요. '데오빌로' '테오필로스' 하나님은 내 친구 라는 뜻이에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 드러내어 가르쳐 주게. 그래서 '테오빌로각하'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다 드러내어 설명해 준 거예요. 그래서 그분을 친구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뭐라고 그래요? 벗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벗은 친구는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게 친구에요. 그런데 우리는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게 형제에요.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는 형제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원수로 여긴다고요. ? 내 행위, 내 제사, 내 자존심 내 가치 지키려고. 그런데 그 분이 죽음으로 내가 원수 취급하여 죽인 그 죽음으로 나를 살린다고 하니 이게 어찌 복음이 아니며 내가 그 원수를 어떻게 안 사랑 하냐고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형제는 다른 형제를 구렁텅이에서 죄에서 꺼낼 자, 끄집어 낼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형제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형제는 남을 그 자리에서 죄악의 자리에서 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에의 형제에요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예수님만 우리의 형제에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의 복음을 갖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전해질 때 그들의 귀가 열리고 그들이 돌아오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형제에요. 그렇다면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라는 말은 뭐겠어요? 형제는 나를 위해 죽어주는 아벨이에요여기에서 '라가' 라고 번역이 된 '크라카'가 텅 빈 놈, 골빈 놈,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는 뜻이죠. 밥통. '크라카' '라가'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이카'를 헬라어로 음역해 놓은 거예요. 텅 빈 자에요


어디에 잡힌다고 그래요. 형제를 가리켜 '라가'~ 라고 한 놈은. 공회에 잡힌다고 그러죠. 이 공회가 '쉬네드리온' ''는 함께에요. 그리고 '에드가이오스'가 한번 굳어지면 이렇게 움직일 수 없는 그런 거. 율법으로 굳어진 그런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함께 율법으로 굳어져 버린 그런 곳. 공회. 이게 율법주의 산헤드린 공회에요. 이것이요. 바리새인들의 모임, 이스라엘 이걸 공회라고 그래요칼케돈 회의, 니케아회의, 이게 공회가 아니라. 


그러니까 율법주의에 붙들려 있는 자들은 형제애, 은혜를 이야기하는 그 형제, 그 예수를 저런 골빈 놈이라고 이야기한단 뜻이에요. 그래서 죽였잖아요. 그게 공회에 붙들린다는 뜻이에요. 형제에게 '이 라가. 이 밥통아'하면 공회에서 잡아다가 뭐 족친다는 이런 뜻이 아니에요. 감옥에 쳐 넣는다.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함께 율법에 꼭 붙들린 자들은 그 형제를 자기들을 위해 죽으러 온 형제를 골빈 놈, 멍청이, 라가,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란 말이에요.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우리도 능력이 있고 행할 힘이 있고 이렇게 열심을 부리는데 왜 안 된다고 그러냐고 저 골빈 놈 이렇게 이야기한단 뜻이죠. 그리고 그 형제를 가리켜 미련한 놈 이라고 이야기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이걸 그냥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형제한테 이 미련한 놈 그러면 다 지옥 간다면 이중에서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 욕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딨어요? 미련한 놈은 존칭어죠.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 말도 여러분이 그냥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그 무간지옥 이런 거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지옥 불에 들어간다. 지옥이 어디라고 그랬어요? '게헨나' 라는 단어에요. 지옥이. '게헨나' 라는 단어는 힌놈의 골짜기(Hinnom valley)라고 그랬죠


힌놈의 골짜기는 뭐하는 데에요? 웃시아 왕이 우상들을 전부 때려 부수고, 종교개혁 해 갖고 그 힌놈의 골짜기에다 다 갖다 버리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들 다 갖다 놓고 짐승의 배설물들 있죠? 제물의 배설물들, 거기서 다 태우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가 매일 있으니까 일 년 365 24시간 내내 불이 타요. 그러니까 구데기도 죽지 않죠.


배설물이 타는 것. 사도바울이 뭐가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내가 그 동안 열심으로 내어 놓았던 내 모든 자기 의, 행위가 배설물이다. 그랬죠? 여러분 그건 나거든요. 그게 타는 게 지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그걸 불태움을 받아요. 그래서 역사 속에서 지옥의 백신을 맞는다고 그러는 거고 그렇게 열심히 끌어 모아서 야~ 이제 됐어 하고 갔는데 영원히 그걸 태워버리는 그곳에서 사는 걸 지옥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게헨나' 를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힌놈의 골짜기를



예레미아 7 31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여기서는 예수라는 아들이 들여지지 않고 자기의 아들들을 바친 거예요. 몰렉(Molech) 에게 뭐하기 위해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 가치 챙기기 위해 아들까지 내 놓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걸 살육이라고 해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고는 그걸 지옥이라고 그래요. 자기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거예요. 지 목숨까지 끊을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거죠. 거기가 힌놈의 골짜기 지옥이다. 라고 그래요


그리고 예레미아 7장에서 지금 말하는 여기는 힌놈의 골짜기 거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드려지는 제사를 가리켜 살육이라고 하고 그게 몰렉에게 아들 바치는 거랑 아무 차이가 없다. 라고 이야기해 놓고, 거기가 지옥이다. 라고 그래요. 성경이요. 그 불에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는 놈은. 은혜 받아들이지 않고 은혜 거부하는 자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행위를 제물로 내 놓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새벽기도 열심히 하면은 하나님이 상 준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냥 몇 만 명이 매일아침 모여 새벽기도하고 복주세요. 복주세요. 하는 게 뭐에요? 지옥이에요. 제자훈련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성숙시켜주고 또 이런 열심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서 상 주신대요. 거기를 지옥이라고 그래요


본문 22절에 그 심판이라는 단어가 여격으로 쓰였거든요. 그러니까 심판은 나중에 오는 게 아니라 이미 그 형제를 못 알아보고 형제에게 분노하고 그걸 원수 취급하고 라가라 부르고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는 그 자들은 이미 심판을 안에 갖고 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격이거든요. 이미 심판을 갖고 있는 자는 예수를 못 받아 들여요. 다 그런 말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지옥처럼 사는 이유가 뭐에요? 남의 이목, 다른 사람들의 평가, 상대적 박탈감, 뭐 이런 거 아니에요. 그게 지옥이잖아요. 그게 극대화되어서 영원히 지속되는 곳. 지옥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와서 쉬라~ 라고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 그러냐면 내 멍에는 가볍다. 그래요. 쉽다고 그래요. 예수님이 진 멍에가 어떻게 가볍고 쉬워요. 십자가인데. 그런데 왜 가볍고 쉬워요. 이스라엘의 소들이 매던 멍에는 항상 두 쌍이 같이 매는 멍에에요. 그러니까 내게 와서 내 멍에를 지라는 건 내가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벳세메쉬(Beit shemesh)로 법궤를 매고 올라갔던 두 마리 암소처럼. 젖 나는 암소, 새끼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새끼를 끊어내고 하나님이 법궤, 말씀을 실어서 제사장의 뜰로 보내는 거예요. 이게 벳세메쉬로 가는 두 소잖아요. 그런데 그 소가 쌍으로 간다고요.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거.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십자가로 함께 끌려가는 거예요. 한 멍에지고 가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그게 쉬움이라는 거예요. 이 역사를 이것이 이해가 가야 되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진짜 돈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고 진짜 자식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고 진짜 남의 평판에 대해서 자유로워졌을 때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우리가 걱정거리들은 다 그거잖아요. 그거. 그런데 알면서도 그게 내 안에 내 살과 피로 뼈로 녹아져 있어서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 끊어내겠다는 거죠. 내게로 와서 쉬라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 자유롭게 만들을 거야~ 그럼에도 우리는 뭐가 그렇게 힘든지 예수께로 가기를 거부하고 열심히 반복하여 제물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살인하지 마. 살육하지 마. 그래서 본문 23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거는 예배드리기 전에 싸운 사람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드리라는 이런 말 아니라고요. 여기서 예물, '도로'는 선물, 혹은 제물이라는 뜻이거든요. 예수죠? 제단, 그러니까 '두와 두시아스 테리온' 이게 번제단이에요. 번제단에는 예수만 올려 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제물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를 하러 오는데 예수를 갖고 와야 되요. 그런데 형제와 화목하지 못해요. 여전히 그 형제와 원수이고 형제에게 노해 있어요. 우리의 행위만을 의지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에는 이 제물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예배나 행위나 모두 그 어떤 종교행위도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 없으니까 그 예수의 은혜를 알고 와라. 라는 뜻이에요. 가서 화해하고 와~ 이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열심 있는 종교행위나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아들의 행위를 의지하고 그걸 믿으라고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더 이상 살육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안 그러면 계속 예배당에서 예수가 죽는 거예요. 여러분의 그 두려움, 불안함 이런 거 때문에 그 예수를 믿으세요. 그 예수가 영단번에 제물로 드려졌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워서 주여~ 주여 그렇게 그냥 부르짖으세요


예수님이 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그러는지 아세요? 내 안에 예수가 있는데 이거 모르고 밖에서 주여~ 주여~ 부르니까 그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 안에 있는 거 모르니까. 그런데 그냥 맨날 주여 삼창. 여기 있는데 주여~ 주여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못 들어간다고 그러죠. 여러분 안에 그 제물이 이미 그 말씀이 뚫고 들어와 있어요. 새 마음으로. 성령으로 그러니까 그렇게 주여~ 주여 안 불러도 되요. 그 예수 의지 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1장의 일부를 제가 결론으로 읽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해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1 10절 보세요.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엉뚱한 제물 갖고 오지 마~ 그러잖아요. ? 내가 니들의 죄가 진홍 같이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해준다는데 왜 니들이 자꾸 그걸 또 죽여서 갖고 오고 또 죽여서 갖고 오고 그래~ 그러는 거예요. 더 죽이지 마~ 살육하지 마~ 여섯 번째 계명인 거예요


숙제. 그 밑에 간음하지 말아라~ 이혼하지 말아라~ 이걸 한번 오늘 제가 풀어드린 것처럼 집에서 한번 풀어보세요. 해석을 한번 해보세요. 그거 해봐야 늘어요. 계속 듣기만 하면은 그냥 저 사람이 다음 주에 또 해주겠지. 언제까지 제가 여러분 옆에서 그걸 해드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숙제 아셨죠? 가서 한번 이렇게 찾아보세요. 몇 번 들으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