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16 간음하는이들이여, 오른눈을뽑고오른손을찍어라2 마5장27-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08

마태복음 5장 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자 다음 주까지 이 부분에서 이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혼이 무엇인지 관해서 개괄적인 공부를 했습니다. 혼인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출발 했으니까요. 여러분이 충분히 확인하셨다시피 성경이 말하는 혼인, 이혼, 간음 등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의 연합에 관한 이야기죠? 


그런데 하나님과 피조물의 연합은 양쪽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내어 놓아서 하나를 이루는 그러한 연합이 아니라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음의 피조물 안으로 관입되어 들어가서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만들어내는 그런 십자가의 메카니즘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이 연합이에요. 유니언 크라이스트(Union Christ)


그래서 신랑이신 하나님과 혼인을 하게 될 교회는 반드시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창조주의 은혜만으로 다시 건축되어야 하는 거죠? 그 과정이 성도의 역사 속 인생 즉, 신앙여정동안에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은혜 안으로의 함몰 그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이혼한자, 한 몸에서 떨어진 자 이혼한자, 그래서 하나님과 한 몸이어야 되는 자가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걸 간음이라고 한다고 그랬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자가 떨어져서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 다른 존재가 결국은 나지만요. 그렇게 하나님과 교회의 혼인은 하나님 측에서 시작되어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완료가 되는 거예요.

 

신부 측에서 그 혼인잔치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뭐 굳이 따지자면 신부 측 준비물은 신부가 혼인잔치에서 입을 예복과 그 예복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예복과 빙패물, 그 빙패물을 보고 신랑이 와서 아 저 여자가 내 신부구나 옛날에는 얼굴을 못보고 그냥 이렇게 혼인 그 조약, 그 뭐라고 그래요. 혼인을 약속하는 거. 그거 하여튼. 그렇게 약속을 하고 나서 어떻게 가서 신부를 찾아요. 보통 한 10명씩 나와서 등불을 들고 기다린단 말이에요. 내가 보낸 빙패물을 갖고 있는 그 여자가 내 여자인 거죠. 그래서 빙패물, 그리고 신랑을 맞이할 등불, 이 정도라 할 수 있는데 그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믿음으로 거저 부어주는 거죠. 거저 먼저 보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부가 마련해서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격 없는 신부에게 토털 디프라비티(Total Depravity) 라고 그러죠. 전적 타락, 자격 없는 신부에요. 자격 없는 신부에게 하나님이 프로포즈하시죠? 언컨디셔널 일렉션(Unconditional Election) 이에요.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선택이에요. 자격 없는 신부에게 하나님이 프로포즈하는 거예요. 프로포즈에서 모든 혼수도 하나님이 준비하시죠? 이레지스터블 그레이스 모든 혼수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누구나 다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신부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프로포즈 하세요. 리미티드 어톤먼트(Limited Atonement) 이죠. 이것이. 그리고 그 프로포즈는 반드시 혼인으로 결론 나게 되어있어요. 중도에 파혼을 하거나 혼인 후에 이혼 같은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Perserverance of the Saints 견인이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전체를 튤립(TULIP)이라고 하죠?

 

이 혼인은 묵시 속에 이미 완료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묵시 속 신부들이 역사 속으로 내려와서 여러분은 천상의 교회로 이미 완료되어 있잖아요. 모세도 올라가서 봤고, 요한도 올라가서 봤고, 사도바울도 올라가서 봤죠? 어 저기에 내가 있네. 그리고 내려오니까 죽음도 두렵지 않은 바로 그 천상의 교회가 완료가 되어 있단 말이에요. 차원이 다른 곳에. 그런데 그 묵시 속 신부들이 역사 속으로 내려와서 그 혼인의 의미와 내용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그 사람이 말씀을 가진 자가 되는 거고 성경말씀이 뭔지를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우리 이해하게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구나 이걸 말씀을 가진 자라고 하는 거고 그 말씀의 내용이 아들이니까 그를 가리켜 아들을 가진 자라고 하는 거고 그 아들이 ‘제라’ ‘후손’ ‘씨’니까 그 씨를 가진 자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씨를 가진 자라는 말은 성경에 또 있어요. 뭐에요? 환도 뼈라는 단어가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야곱의 환도 뼈가 부러지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살아나죠? 그러면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이 뭐겠어요? 예수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아들, 남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아~ 내가 예수 아니면 그 남자, 아들 아니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이구나. 를 이 신부의 처음자리로 올바로 알게 되면 그게 말씀, 씨를 가지고 아들을 가지는 게 되는 것이고 그가 바로 남자답게 강건한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남자답게 강건 하라. 아들로 택함을 받았다. 이런 말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 기분 나빴잖아요. 그거 읽으면서. 남자답게 강건 하라니 이게 그게 그 말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남자다워지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 역사라는 건 엄밀히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그 창조 과정을 이러저러한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부들이 이 역사 속에 이혼한 자, 간음한 자 즉, 하나님과의 한 몸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자로 오는 거예요. 역사 속에. 하나님의 그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간 자는 뭐에요? 존재 없음.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모든 인류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도 성령을 받기 전의 죽은 자로 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은 창세전에 구원받았다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존재 없음, 죽은 자, 이혼한 자, 간음한 자, 떨어진 자로 내려오는 거예요. 이 땅에. 그리고는 어떻게 이렇게 떨어진 자, 생명으로부터, 생기로부터 떨어진 자 는 그냥 없음 ‘네페쉬’니까 ‘아파르’ ‘아다마’ 없는 거예요. 흙이에요. 티끌, dust 란 말이죠. 그 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신부가 되는가를 역사 속에서 여러분은 성경 말씀과 또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배우는 거예요. 여러분. 


그 이외에 성도의 삶의 본질, 구구절절이 여기저기서 이야기하지만 그런 건 다 아니에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 그걸 그냥 잘 깨닫고 인식하고 배우고 그걸 찬송하고 가면 되는 거예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 그렇게 우리는 존재 없음. 이혼한 자, 간음한 자로 이 땅에 오게 되게 때문에 성경이 그 상태를 죄 아래 가둔 상태, 불순종의 가둔 상태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우리가 죄 아래 갇혀 있다고 그러죠. 하나님이 가뒀다고 그래요. 


그리고 불순종에 가두었다고 그래요. 하나님이 가두신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순종을 내어 놓으려고 해도 순종이 안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순종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순종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더 많이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도들이 그러한 상태로 떨어진 자기들의 그 처음자리인 없음의 자리를 자각하게 되고 수긍하게 되며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생기가 안부어지면 이건 그냥 죽은 쓰레기에 불과하구나. 이 경험을 반드시 먼저 하셔야 되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프로포즈를 받지 못하면 신랑이 세마포 예복을 입혀주지 않으면 이렇게 먼지일수밖에 자임을 분명하게 경험해요. 그걸 죄인 됨의 자각, 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게 뭐라고 그랬어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죄에 대한 책망이 가장 먼저 오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아 이것도 죄였는데 내가 그동안 이거는 죄가 아님 줄 알았구나. 그런데 내 몸에서 나오는 걸 하나하나 이렇게 따져보니까 나는 숨 쉬는 것도 죄구나 이거부터 알게 되요. 우리는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부들이 먼저 신랑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 간음한 자, 이혼하자가 되어 이 땅에 오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1절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러죠?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둬놨다는데 순종을 할 수 있다. 라는 사람들은 뭐냐고요. 분명히 순종이 나오는데 그거는 내 안에 사시는 예수의 순종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순종을 하고 이게 내 순종이다. 라고 이야기 한 건 전부 가짜인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을 불순종 아래에 가두어서 이 역사 속에 내려 보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다른 말로 은혜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에요. 


여러분 히브리어에 그 순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종이 상전의 말을 잘 듣는 거, 뭐 이런 정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래의 것이 위의 권위에 완전하게 장악이 되어 종속된 상태를 순종이라고 그래요. 몇 가지 순종하고 몇 가지 순종하지 않고 그걸 이렇게 띄어서 순종이라고 하지 않아요. 순종은 위의 것에게 완전히 장악되어서 내 존재를 몰수당하는 걸 순종이라고 그래요. 그걸 다른 말로 연합이라고 그래요. 


그 순종을 누가 할 수 있냐고요.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거예요. 사람들은 제사를 순종으로 일환으로 드리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제사 드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거기서 낫다는 better가 아니에요. 이건 아니다. 라는 뜻이라니까요. 제사는 아니다. 에요. 거기서.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안으로 들어와서 완전히 함몰되어 나에게 장악되어야 하는 존재지. 내가 시키는 것 몇 개 잘해 놓고 상 주세요. 하고 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따라서 불순종이라는 건 뭐에요? 한 몸 된 그 연합에서 떨어져 나간 객체의 상태를 불순종의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한 몸에서 떨어져 나간 걸. 이혼, 간음 그게 불순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순종에 가두었다는 건 뭐에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한시적으로 이혼녀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를요. 끊어내 버렸다니까요. 왜? 영원히 이혼 안하시려고. 창녀 고멜보다 더 더러운 그런 걸레 같은 우리와 하나님이신 신랑이 이혼을 안 해 주신다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고멜이라는 걸 반드시 여러분이 인정하고 가야 되요.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걸. 


그런데 이 인간들이 그걸 감추는데 급급하지. 절대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 오면 다 그냥 오늘 하루 너무너무 거룩하게 산 것처럼 쇼하는 거예요. 성경책 항상 여기다가 이렇게 끼고 다니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신부들의 일차적 자 인식은 내가 하나님과 이혼한 자이며 내가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자입니다. 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간음하는 사람보고 야 저렇게 사니~가 아니라 나를 보라는 거예요. 성경은. 나. 내가 이혼한자이고 내가 간음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혼한 사람, 간음한 사람보고 마치 바리새인처럼 야 나는 저렇게 안 살아서 참 다행이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점점 할 말이 없어진다니까요. 그리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죠. 그걸 뭐라고 그래요? 용서라고 그래요. 자 그러한 자인식이 없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어떻게 찬송합니까? 거짓말이에요. 그러한 자 인식 없이 찬송한다. 라는 건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하나님이 넣어서 거기서부터 꺼내시는 구원의 과정을 역사와 성경 안에 담아 두신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갔나요? 아니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후손들은 애굽에다가 넣을 거야. 그랬다고요. 창세기로 한번 가보세요.



 창세기 15장 13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들을 섬긴다는 건 뭐에요? 종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사도바울이 이걸 뭐라고 그래요? 죄의 종이라고 그러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죄의 아래 가두어 버린다니까요. 역사 속에 보내서)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보세요. 하나님이 시나리오 다 쓰신 거예요. 그리고는 애굽에 보냈단 말이에요. 그리고는 거기서 구원을 해 내시는데 어떻게 구원해 내세요?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 내신다니까요. 그 말은 이스라엘 전체를 무력한 자로 그냥 폭로해 내시는 거예요. 니들의 힘으로는 절대 여기서 못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양의 피의 힘으로 그 피의 도움으로만 나오는 그 그림을 그려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때에 기근을 내려 보내셔서 거지 만들어서 애굽으로 보내세요.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중에 거기서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애굽에서. 


그걸 구원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그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을 간음한 자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누가 간음한 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었다니까요. 왜? 진짜 신랑, 그 신랑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가르쳐 주려고요. 여러분이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서 400년을 보냈다는 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화 시켰다는 거예요.


미국에서 2세 3세들이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올림픽 때 누구 응원하는 줄 아세요. 미국 응원합니다. 부모들이 야 이놈아 어떻게 미국을 응원하니? 한국을 응원해야지 그러면 I'm American 그런다니까요. 내가 거기서 태어났어요. 미국학교 다니고 있고 미국공부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미국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그리고 또 citizen 이에요. 신분도. 그런데 왜 내가 한국을 응원해야 되냐고 그런다고요. 5대만 내려가면 서류상으로 그가 흑인 혈통인데 얼굴이 백인인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그런데 400년이면 몇 대냐고요 도대체가요. 애굽 사람 된 거예요. 그들이 히브리어 다 잊어버렸다니까요. 거기서. 그러니까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어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어느 나라말로 십계명 줬을 거 같으세요. 애굽 말로 줬다니까요. 그들이 광야 교회에서 광야를 스데반이 광야 교회라고 하잖아요. 광야 교회에서 그들이 먹고 살고 천막치고 텐트치고 한 거 그거 다 애굽에서 갖고 나온 거로 살았어요. 여러분이 그 이 교회라는 데에서 이 세상 것을 가지고 하늘을 배우는 거라니까요.


하나님은 일부러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 사람으로 만들어서 애굽의 익숙한 자로 살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을 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애굽이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열 번 당신을 거역했다. 그러시죠? 열 번만 거역했습니까? 아니에요. 열 번 하나님을 거역한 자가 누구에요. 바로에요. 애굽 왕은 애굽의 대표죠? 그 애굽 왕 바로와 이스라엘이 똑같은 자였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너희들은 광야교회에서 애굽의 일을 그대로 행사하고 있구나. 그래서 열 번 나를 거역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교회에서도 애굽처럼 살았다는 뜻이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산다니까요. 간음한 자로 살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 이용해서 나를 사랑하는데 사용해요.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 간음한 자지 뭐에요? 내가 하나님이 아닌 신랑이 아닌 또 다른 우상인 나를 사랑하는 거. 그걸 간음이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애굽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인본의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신랑만을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인본주의 세상에서는 내가 나를 의지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는 천수답 농사에요. 거기는. 애굽은. 삼각주 땅이에요. 물을 열 바가지 부으면 쌀 열 가마 수확할 수 있는 곳에서 천수답 비가 오면 먹고 안 오면 못 먹는 곳. 하나님의 은혜에 나의 존재를 투신하는 곳. 그리고 끌려가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니까. 이 신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여러분의 오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이라니까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이 세상 사람들은 오체투지 머리, 팔, 다리 땅에다가 붙이고 히말라야까지 넘어가죠. 인간들의 그 자기 자존심 지키기의 행위는 그렇게 무서워요. 왜 그렇게 하죠? 온 인류를 복 되게 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복 받으려고 그거 한다니까요. 인간들이요. 오체투지. 바벨탑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그것이. 그런데 성도만 십자가에서 머리에 가시면류관, 양쪽 팔 오체를 꽁꽁 묶이는 거예요. 절단 당하는 거예요. 사지절단. 머리까지. 


에덴에서 여러분 뱀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기어 다녔다고 그러죠. 배로. 그 전에 어떻게 다녔다는 거예요. 서서 걸어 다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덴은 마귀의 사지절단 장소였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냐면 그렇게 자기 힘으로 하늘의 올라가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의지와 능력과 모든 시도들을 절단당하는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해체되는 거라니까요. 여기서. 그래서 우리의 삶을 십자가의 삶. 자기부인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에요? 오체투지. 오체를 절단당하는 삶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신랑 예수를 떠나 세상과 간음하고 신랑과 이혼한 상태에 있는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자각하고 신랑의 갈비뼈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가는 자기부정의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과정인 거예요. 신랑과의 분리는 곧 죽음으로에 행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해야 되는 거예요. 



에스겔서 23장 27절 

27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음행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애굽살이를 뭐라고 그래요? 음란, 음행, 간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누가 보냈냐고요. 여기로. 하나님이 보내셨다니까요. 그래 놓고는 끄집어내시는 거예요. 어떻게? 자기 사랑의 자리에서 절대 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실망하게 만들고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야~ 너 같은 거 신뢰하고 너 같은 거 사랑했다가는 큰일 날 뻔 했구나. 이거를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이 나를 육적자아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까에 착념하고 있다니까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이거는. 자 그렇게 신랑이 은혜로 품어주지 않으면 너희들의 실존은 그토록 더럽고 추악할 뿐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우리를 이 역사 속에 그렇게 고멜로 내려 보내시는 거예요. 호세아 앞에 고멜. 호세아는 예수라고 그랬죠? 헬라어로.


그리고는 거기서 빼내는 거죠. 어떻게 빼내요? 애굽에서 어떻게 빼냈다고 그랬어요? 어린양의 보혈. 십자가로만 빼내는 거예요. 그게 유월절이잖아요. 애굽에서 나온 게. 그죠? 이스라엘이 애굽의 자리, 간음의 자리, 음행의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린양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길 밖에 없었어요. 믿는 길 밖에 없었어요. 


그 어린양 예수의 피가 발려진 그 사람들 집 안에 착한 사람만 있었을까요? 그 피 바르면서 쌈박질한 사람도 있었을 거고, 금방 도둑질하고 들어와서 그 안에 들어간 놈도 있었을 거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피만 보면 그냥 넘을 유, 넘을 월, pass over, 죽음의 신이 넘어가 버리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심으로 말미암아 토털 디프라비티(Total Depravity) 그들의 전적 무력함을 확증해 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너희들의 애굽 탈출에 요만큼도 기여할 수 없다. 라고 보여준 거죠.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자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되죠?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행음했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가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안 죽고 엄한 어린 양이 죽었단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들의 피가 흘러야 할 곳에 어린양의 피가 대신 발라진 거예요. 음행한 신부들 대신에 신랑이 돌에 맞아 죽은 거예요.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신랑이 음녀가 돼 버린 거예요. 간음한 여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음녀가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와요. 성경을 표피적으로 보는 자들은 그 예수를 음녀로 밖에 인식 못하는 거예요.


 피조물의 죽음이라는 건 존재의 소멸이죠? 없음이에요. 피조물의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자신의 선악 지식과 선악 체계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의 독립을 추구하고 확인하려하는 모든 자들은 죽은 자, 없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간음한 자들은 돌에 맞아 죽는 거예요. 그게 곧 죽음의 상태니까. 죽일 필요도 없어요. 그게 죽음의 상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돌로 때려죽이는 거예요.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는 자를 돌로 때려죽이는 것처럼 간음한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살면서도 이게 죽음이다. 를 모르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돌로 때려죽이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거세당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그 죽었음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들의 살아 있음에 그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는 행위를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감추기 위해서. 


선악과 먹은 자의 자존심이 자신의 죽었음을 절대 인정하게 하지 않거든요. 마치 생명이 거세된 장미들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면서 향기와 자태를 안쓰럽게 뿜어내는 생명이 거세된 장미가 더 화려하게 잠깐 피는 거 아세요? 여러분?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그 밑에 뿌리들은 서로 엉켜갖고 엉망이 되어 있어요. 유리병에 꽂아 놓고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애써 밑에 부분은 안봅니다. 이게 죄인들의 속성인 거예요. 그리고는 위에 부분만 보면서 야~ 아름다운 장미라 하자. 그러는 거예요. 밑에만 보면 어떻게, 그건 지옥이에요. 인간들의 자기 존재 위장은 그렇게 교묘하다니까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이 세상에 내려와서 자신의 버려짐의 상태를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간음한 자들로 이혼한 자들로 불순종의 종으로 죽은 자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열심히 산 자인 척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산 자인 척 하는 그게 죽음이에요. 여러분. 그걸 사망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망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요? 그 산 자인 척하는 그 행위를 죽여 버린다니까요. 그런데 다들 거꾸로 알고 있어요. 누가 더 산 자인 척 그 흉내를 잘 내느냐를 가지고 신앙의 성숙을 잰다니까요. 그리고는 그러한 행위에 근사한 이름을 붙이죠. santification 성화(聖化)라고요.

 

그렇게 죽은 자들의 산 자인 척의 흉내가 결국 죽음이에요. 하나님은 그 성도의 죽음을 죽여 버리세요.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은 죽음. 죽여 버리세요. 그래서 그들에게 반드시 항복의 고백을 받아내세요. 제가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찌 살겠습니까? 이리로 가는 거예요. 


그러한 혼인잔치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서 먼저 신부들이 신랑을 떠나 애굽으로 들어가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초의 신부들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저주의 땅 동쪽으로. 그리고는 거기에서부터 다시 하나님과 연합되는 서쪽의 지성소로 들어오는 거.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창세기 2장까지는 그 인간들이 무슨 죄를 졌다. 죄를 지을 기미도 안 보이는데 3장부터 선악과가 나오고 죄의 개념이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역사를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겠다. 를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아담과 하와, 신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부터 이제 역사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우리도요. 그런데 그들이 신랑으로부터 분리가 된 표면적 이유가 뭐였어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의 삶을 추구하는 거였죠? 그게 율법주의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에요. 하나님을 의존하여 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하자. 피조물이 자기존재의 독립을 추구하는 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간음이라고 그랬죠? 선악과 먹고 내가 하나님처럼 내 삶에 주인이 되어, 주체가 되어 살 거야~ 이거.

 

어떤 심리학자 TV에 나와서 네 인생의 주체 자가 되라. 베스트셀러 작가가. 그렇게 해 보세요. 했는데,

성도는 그렇게 못 살아요. 이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 주에 대통령 했다가 욕바가지로 먹고, 여기는 한국이라고. 또 나오네요. 이게 버릇인가 봐요. 그런데 아닌 걸 어떻게 해요. 다 거기서 속고 그냥 박수치고 있는데 무슨 삶의 주체자가 되어서 뭘 하자는 거예요. 도대체가. 


자 그렇다면 결국 간음이라는 게 뭐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존해야하는 신부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선악과 먹은 자의 삶을 사는 것. 율법주의, 인본주의 이게 간음인 거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나를 주인삼아 사는 걸 우상 숭배라고 그래요. 성경이요. 그래서 성경이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우상숭배가 뭐냐면 다른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나를 신뢰하는 거예요. 


조엘오스틴이 그러잖아요? 너를 신뢰해. 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까 긍정적 사고를 해서 네가 원하는 걸 다 이루어라.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그게 우상숭배이고 간음이라니까요.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설명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선한 행위만을 독려하는 그것만을 끄집어 내려하는 왜곡된 개혁주의는 성도들을 간음케 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왜 나빠요?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 이게 진짜 개혁주의잖아요. 왜 나빠요? 이게? 그런데 어느새 이게 율법주의와 섞여 버려가지고 그게 아닌 인간들의 행위와 행함만을 독려하는 왜곡된 개혁주의가 되었잖아요. 다는 아니고 일부만. 이중에 누구 원수가 왔을지 몰라서~^^ 


차치하고 이렇게 간음은 한마디로 나, 인간, 아담을 신뢰하고 섬기는 자아숭배의 삶, 애굽의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자기 사랑의 삶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그게 간음이에요. 


여러분. 요즘 뭐 뉴스를 막 뜨겁게 달구고 있는 어떤 조선족 아저씨 사람을 데려다가 강간하고 128조각으로 토막을 내서 죽였더만요. 성도가 그걸 보면서 야~ 어떻게 저런 나쁜 놈이 있나. 라고 하시면 안 돼요. 거기다가 여러분의 이름을 넣으셔야 되요. 하나님이 그러잖아요.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그랬으면, 그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이. 


그러면 지금 이 중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간음과 무관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되요? 안 돼요? 모두가 간음한 자죠? 아니 이 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간음,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신뢰하는 게 간음이라면 이 중에 그 간음과 관계없는 사람 있기? 없기? 없기. 한국에 와서 많이 배웠어요. 없는 거죠? 우리는 모두가 간음한 자들이고 간음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신랑이신 예수님보다 하나님처럼 살고 싶어 하는 나를 더 사랑하는 게 우리니까요. 



에스겔서 23장 48절 

48 이와 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경성하여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49 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찌라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니라


모든 우상을 위하던 우상을 사랑하던 죄를 음란, 간음이라고 그러죠? 그 우상은 누구? 나란 말이에요. 결국은 나에요. 뭐 돈, 발, 아세라 이거 다 결국 나란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그게 우상 섬김이고 그게 간음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이중에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요. 없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나쁜 놈, 조선족 아저씨 나쁜 사람 이런 게 아니라 그게 내 이야기이구나. 라고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러한 음란을 뿌리뽑아버리겠다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겠는가?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육적 자아를 죽이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온전히 어린양의 피만 높이시겠다는 말씀인 겁니다. 난 너희의 땀과 피 같은 거에 관심 없다는 말이에요. 그거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 지향성이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나와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갖고 이게 생명의 근거 아닌가요? 갖고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 거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런데 우리는 설교를 하면요. 오늘은 목사님이 열심히 하라고 했어? 말라고 그랬어? 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랬지? 이런 거만 관심이 있어요. 그거는 아무런, 여러분은 그런 거에 관심두시면 안 돼요.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삶을 독려하면서 죄인임을 드러낼 수 있고,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또 여러분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전에 설명한 예수와 십자가는 하나도 안 듣고 오늘은 뭐 하라고 했어? 말라고 그랬어? 이 이야기만 갖고 온통 인터넷에서 그냥, 어제는 하라고 그랬어요. 오늘은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이러고. 거기다가 쓰세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세요. 제가 시키는 대로 살지도 않을 거면서 꼭. 

자 하나님은 오직 내 아들의 피만이 생명의 근거가 되게 하시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레미아 5장 7절 

7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하나님을 버리고 분리죠? 나 아닌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했다. 그걸 사랑했다는 거예요. 그걸 섬겼다는 거죠. 이걸 간음이라고 그러잖아요. 창기의 집에 가서 행한 간음. 


호세아 2장 4절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보세요.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건데 엉뚱한 신에게 가서 치하를 하고 있는 거죠? 그 엉뚱한 신이 누구? 나란 말이에요. 우리는 뭘 하고도 늘 나를 칭찬해요. 그리고 이게 전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라고 기도는 해도 그래도 내가 밤 잠 안자고 열심히 나와서 일했으니까 이정도 버는 거지 뭐~ 그런다니까요. 우리는요. 그거 전체를 다 창기라고 그래요. 간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홀딱 벗겨서 그를 그의 부끄러움을 다 드러내 버리신다고 그래요. 우리의 그 위장, 변장 이걸 다 벗겨버리는 거예요.


여기 지금 화장하고 변장하고 오셨잖아요. 민낯으로 다 벗겨 버리는 거예요. 부끄러워서. 새벽기도 때 제가 이렇게 얼굴을 좀 보려고 그러면 다들 도망가요. 민낯으로. 벗겨 버리는 거예요. 위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래야 그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고멜이 어떤 상태로 호세아에게 돌아오게 되죠? 걸레가 돼서 돌아옵니다. 단물 다 빨아먹고 세상이. 필요 없으니까 노예시장에다 팔아버렸어요. 죽은 고기처럼 매달려 있었다니까요. 애 낳고 나가고, 애 낳고 나가고 계속 창녀 짓하다가 결국 걸레 돼갖고 죽은 고기처럼 턱 매달리니까 신랑이 은 삼십, 보리 한 호멜 반 은 열다섯 은 삼십이거든요. 사람의 목숨 값이에요. 그게요. 그거 들고 찾아가는 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내가 고멜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조금 낫죠? 이걸 증명하려고 신앙생활 전체를 그냥 일로 매진하는 거죠.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선순위가 바뀐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신부들은 이 땅에서 발가벗겨져서 남편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자신들의 실존을 먼저 자각해야 되는데 그건 뒤로 미뤄 놓고 여전히 애굽에서 죽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그곳에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기에는 죽은 자에요. 왜? 죽은 자로 내려 보냈기 때문에 그런데 걔네들이 강시 되서 통통 일어나더니 뭐 온 몸에 막 치장을 하는 거예요. 좀비들이. 하나님은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죽은 자인지 그걸 알라는 거예요. 알면 내가 새 거로 살려 준다는데 왜 거기다가 치장하려고 하느냐~ 그게 성경이잖아요. 


새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걸 입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그러지 새 사람이 되라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계시록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입혀준다고 그런단 말이에요. 수동태로. 그걸 아는 사람이 새 사람의 삶을 지향하는 거예요. 진짜 변해하는 거예요. 그때는요. 그런데 그걸 알기 전에 먼저 새 사람이 되겠다고 하니까 그리고는 그까짓 술 담배 하나 끊어 놓고 그냥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거 그거. 금연홍보영화 보고도 다들 끊더고만요. 그거. 뭐 뻥 뚫려가지고 이리로 연기 나오고 이런 거 보여주니까 무서워서 끊더고만. 성경이 그 정도의 권위밖에 안 돼요. 그리고 그까짓 거 안 하는 게 무슨 새 사람이냐고요. 그게요.


더 더러운 거는 계속 하고 있으면서 그래도 건강에 안 좋으니까 끊으세요. 그래도. 그렇게 생수이신 신랑이 티끌에 불과한 신부에게 부어져서 비로소 참 성전이 탄생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간음한 여인 앞에서 생수이신 예수가 흙에 이겨지는 그런 그림이 나오는 거고 두 번째 돌판을 상징하는 은혜의 기록에 의해 간음한 여자가 살아나게 되는 거라고 그랬죠?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이며 복음인 거예요. 


그렇게 그 십자가 복음이 죄인들에게 부어지게 되면 죄인들의 죄인 됨이 폭로가 되는 거고,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자신들의 죄인 됨을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간음한 여자,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앞에 남아있었던 거예요. 나머지는 전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랬더니 어이고 나 죄인이네. 그러더니 도망갔어요. 화장하러요. 위장하러 도망갔단 말이에요. 이제 산 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간음의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제 잘 아시겠죠? 그렇다면 최초의 간음 현장은 에덴동산이었어요. 그죠? 창세기 3장 5절로 가서 그들이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전환을 해 버렸는지 한번 보자고요.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어떻게?)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선악과도 손을 들어 따먹었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눈과 손이 선악과 사건에 등장하죠. 그게 인류 최초의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의 이야기에 눈과 손 이야기를 하신단 말이에요. 찍어버려라. 뽑아버려라.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 이런 이야기는 세대주의자들 한번 보세요. 모든 성경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런 거는 또 알레고리로 해석을 하려고 그래요. 일관성이 없어요. 뽑아야죠. 찍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 보셨어요? 자 본문 29절과 30절로 가보세요. 



마태복음 5장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건 단순히 몸을 범죄 하게 하는 지체를 찍어버리라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만일 그런 정도의 경고라면 우리 몸은 장기까지 하나 남김없이 바로 즉시 다 찍혀 버려야 되는 거예요. 죄 덩어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고 주장하는 이게 선악과 사건이었죠? 그 간음의 눈과 손을 하나님이 찍어서 없애버리겠다. 라는 하나님의 약속 인 거예요. 왜? 이거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고 그러잖아요. 천국에.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찍어 버리겠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눈과 손이 어떻게 찍혔어요? 여러분 안에는 이미 성령이 들어와 계신데 그러면 성전이 된 거예요. 성전은 곧 하나님 나라죠? 천국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어떻게 그 눈과 손이 찍히고 뽑혀야 하나님 나라가 되는데 어떻게 거기 들어가 계신 거냐고요. 지금. 



이사야서 42장의 18절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구 눈이 뽑힌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의 눈이 뽑힌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소경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소경이 맞습니다. 라는 고백이 당연히 나와야 되는데. 본다고 하는 자는 뭐라는 거예요? 진짜 소경이라는 거죠? 예수님의 말씀 그 말씀 하시는 거예요. 본다고 하는 자는 눈갈 뽑아 버리겠다는 거예요. 진짜로. 지옥이에요. 그게.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의 손이 찍혀 버리는 거예요. 무용지물이 되 버린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어버린 인간들은 그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해요. 예수의 눈이 뽑히고 예수의 손이 찍혀 우리가 예수의 신부가 되는 거거든요. 그 분이 간음한 여자 음란한 자가 되어 눈알 뽑히고 손목 찍힌 거란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잖아요. 음녀가 되셔서 죽으셨어요. 예수님이.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모독한다니까요. 사람들이요. 마귀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서 할 유일한 일이 뭐겠어요? 그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헛된 거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마귀가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은 그거 하나라니까요. 


그러면 마귀가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부추기겠습니까? 네 눈을 뽑아 네 죄는 네가 책임져야지~ 어딜 누구한테 전가하니~ 그런다니까요. 네 손목 찍어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전부 죄책감에 정죄감에 눈알 뽑히고 손목 찍혀갖고 너덜너덜해져서 오는 거예요. 이렇게. 여러분은 그 예수를 또 죽이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자기 죄는 자기가 책임진다고 그러고 지 모가지 자른 놈 있었잖아요. 유다.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 그게 마귀라니까요. 


예수님이 왜 유다보고 너는 마귀다. 그랬겠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걸 다 덮어버린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신부가 된 거라고요. 그거를 이해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이거든요. 이게. 그게 마귀적 속성인 거예요. 난 선악과 먹었거든요. 뭐가 잘못 가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오늘날 기독교가요? 


그래서 마귀의 행사를 예수님이 양의 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의 흉내 내는 거. 십자가는 예수가 지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뭔데 이 인간 세상에 십자가를 우리의 죄의 그 보응으로 우리가 만들어서, 십자가를 만들어서 스스로 지냐고요. 그게 예수 흉내 내는 거거든요. 예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지 흉내내야할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른 눈이고 오른 손일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른쪽의 개념은 인도자, 선생, 스승의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오른쪽이에요. 인간의 그 하나님처럼의 그 욕망이 택하고 세운 스승, 선생은 전부 간음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라는 거예요. 그걸 찍어버려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기독교 이천년 역사 내내 그렇게 양의 탈을 쓰고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건강한 기독교, 건전한 기독교 만들자. 그래 놓고 사람들 전부 지옥으로 끌고 간 사람들 많아요. 진짜 오른 손은 하나님의 오른 손이어야 되요. 예수님을 번쩍 들어 올린 하나님의 오른 손. 그런데 이 세상의 가짜 오른 손들이 그 양의 탈을 쓰고 엉뚱한 거를 가르쳐서 지옥으로 끌고 간다니까요. 하나님이 그 가짜 오른손 찍어 버리라는 거예요. 그 가짜 눈 찍어 버리라는 거예요. 니들을 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눈 뽑아 버리라는 거예요. 니들을 이 역사 속에서 올려 줄려고 하는 그 가짜 오른 손 찍어버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오른 손은 여러분을 묵시 속에서 들어 올려 주는 거라니까요. 승리는 거기서 경험하는 거예요. 



하박국 2장 18절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우상은 거짓스승이에요.)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인간들의 세게 만든 우상 즉 나를 높이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숭앙하게 만드는 가르침은 거짓 스승이라는 거예요. 이게 오른 눈, 오른 손이에요. 찍어라. 왜? 간음케 하는 거예요. 그게. 간음케 하는 거. 참 선생은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는 거예요.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참 선생은 예수를 보여줘야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되는지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선생 아니에요. 그거는 성령이 이끌어가는 삶이고 선생은 예수를 보여주고 예수를 설명하고 예수를 가르치는 자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을 독려하고 높여주는 그런 설교를 좋아해요. 은혜 받았다. 그래요. 그리고 예배 끝나고 두 주먹 불끈 쥐고 그래 세상에 나와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야지. 이러고 나간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예배는 이렇게 살았단다. 강시들이 콩콩 뛰어 나가면서 살았단다. 그게 죽은 건데. 그리고는 영락없이 다음 주에 또 와가지고 주여 제가 나가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는데 이 꼴로 또 왔습니다. 맨날 이거 반복이지 그게 뭐에요? 대표 기도하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다 그거야~ 나와서 싸우겠습니다. 


다음 주에 보면 일주일동안 싸웠는데 뭐~ 그게 옳은 줄을 알아요. 그러죠? 여러분은 올바른 설교를 듣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나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 어찌 나 같은 걸 위해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는 거예요. 이 고백, 이 항복의 고백이 여러분을 이기게 하는 삶으로 끌고 가는 거지. 두 주먹 불끈 쥐고 나가면서 주차장에서 싸우잖아요. 뭘 싸워요 싸우기는. 마귀랑 싸우라니까. 그냥. 교인들하고 내가 먼저 왔는데 왜 네가 먼저 나가냐고. 나오면서 신발 좋은 거 새 거로 바꿔 신고 가고 말이에요. 



디모데후서 4장 3절 보세요.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게 인간 보편의 지향성이에요. 그래서 사람 많이 모이는 교회가 진짜 제대로 가는 교회일 것 같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른 눈과 오른 손을 찍어라. 그들은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이 땅에서는 그들이 너희들의 자존심 지켜주고 독려해 주고 너희들의 감정에 호소하여 너희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지만 그들을 조심해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심해라.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말해서 그러한 노력을 열심히 합니까? 우리 자신을 우상삼아 사는 삶을 그 우리자신의 영광과 가치 상승을 위해 사는 그 삶을 그 열심과 노력을 진짜 어떻게 해서든지 이건 끊어내 버려야 하는 건데 하고 목숨 걸고 한번 그것과 싸워본 적 있어요. 우리가. 아니 싸워보기는 싸워보는데 싸우면서도 야 어떻게 다른 사람 못하는 그걸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니? 그리고 그걸 하면서 또 간음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애써 보기도 한다니까요. 그런데 그걸로 자기를 칭찬해 준다니까요. 그게 간음이라면서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찍혀 나가야죠. 나같이 불가능하고 더러운 게 지체로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전쟁영화 보셨잖아요. 다리 같은 게 하나가 이제 썩어 들어가요. 상처를 입어서 그러면 어떻게 해요? 6.25때 톱으로 그거 막 자르죠? 잘라야 산다고요. 팔 이만큼씩 뚝뚝 잘라 버리잖아요. 이거 붙여놓으면 얘 때문에 죽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볼 때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더러워요. 나로 말미암아 예수라는 그 교회 지체가 죽을 거 같아. 이 자각과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야 나는 구원받아 마땅해~ 가 아니라 주여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 고백을 할 수 있어야하는 자에요.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님, 하나님 저 지옥 보낸다 할지라도 저는 진짜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자입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 저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저는 구원받아야 될 자격이 자라고 이런 말을 요만큼도 할 수가 없는 자네요. 여기까지 내려가야 되거든요. 


내가 잘려나가야 교회가 살아요. 그게 진짜 성화된 사람 아닙니까. 나 때문에 남들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성화를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 진짜 이 고백하는 사람 몇 명이 있냐고요? 전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걸 증명하고자 그냥 혈안이 되어 잇잖아요. 내가 잘려 나가야죠. 내가 찍혀 나가야죠. 그런데 예수가 그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찍혀 나간 거예요. 내가 찍혀 나가야 되는데. 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라는 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는 거예요. 이 모양인데. 그리고는 예수가 내 안에서 생명으로 열매를 맺어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생명이 들어가 있죠? 그게 열매에요. 그걸 아는 이들의 삶속에서 진심으로 나 이외에 다른 이를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그러한 행위들과 지향성이 조금씩 보여 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나 그들은 그럴 때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뭐 우리가 뭐 대단하게 꾀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런 자격이 있는 자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내가 건강한 교회의 그 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먼저 잘려 나가야 할 존재.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어린양으로부터 이혼당해야 할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그런 이들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일차로 이혼당해야 마땅한 자입니다." 왜? "지금도 이렇게 나를 사랑하며 간음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제일먼저 이혼당해야 할 사람이 맞습니다." 


이고백이 있는 사람이 "그런데 나는 죽어도 너랑 이혼 안한다." 이 신랑의 고백을 성도의 견인 교리를 성경에서 들었을 때에 그에게서 어떤 고백이 나오겠냐고요? 찬송이에요. 그게요. 그런데 우리가 그 고백이 없으니까 신랑이 나를 끝까지 붙들고 이혼시키지 않는다고 그래도 그렇지 뭐 나 이쁘니까 나 괜찮으니까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찬송이 나와요. 나에 대한 찬송만 나오지. 그 상태,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이혼당해 마땅한 자가 나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있는 자에게 복음이 떨어질 때 그에게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그거를 독사, 영광 돌린다.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뭐 축구 골대에 뭐 골 한골 넣고 그냥 기도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찬송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란 말이에요. 



예레미아 3장 6절 

6 요시야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 패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북이스라엘, 남유대 다 간음한 여자라는 얘기죠. 그렇다고 이들을 다 죽여 버렸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신부들이에요. 이들이요. 그들의 실체를 이렇게 확 폭로시키죠. 이혼증서까지 주셨대요.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이 이혼증서 얘기하시죠?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해도 된다.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혼증서가 뭐에요? 너희들은 하나님과 이혼당해 마땅한 자다. 너희들은 없음이다. 그래서 신랑이 죽고 그의 것으로 너희들은 신부로 탄생되어야 된다. 이게 뭐에요? 너희들은 신랑으로부터 그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단절된 자고 이혼당한 자다는 거. 그렇기 때문에 없음이기 때문에 신랑의 은혜가 생명력이 생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너희들은 존재 아니다. 이게 뭐에요? 성경이죠. 이게 이혼증서에요. 


그런데 이혼증서를 우리에게 줘요. 그러면 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혼당하면 절대 안 되는 거구나. 하고 남편에게 돌아가야 되는데, 그걸 가지고 간음을 하더라는 거예요. 또. 그래 훌륭한 신부가 되어야지 이렇게.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죠? 찍혀 던지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혼을 경험하시는 거예요. 그 연합이 깨지는 거예요. 한 번도 그 연합이 깨진 적이 없었는데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끊어낸 거라니까요. 이혼을 경험케 하시는 거예요. 왜? 간음한 우리 때문에 없음인 우리 때문에 예수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신부가 된 걸 구원이라고 그러고 그걸 복음이라고 그래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어딜 함부로 사람들에게 너 언제 구원받았어? 나는 몇 월 몇일날 구원 받았어. 야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신앙생활이 연륜이 깊어갈수록 구원의 확신이 더 강해져야지. 아니에요. 점점점 그 연륜이 깊어 가면 깊어갈수록 하나님 하나님이 저 지금 지옥 보내도 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어디 무슨 확신이 확신은 우리가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갖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너 내 신부로 만들 거야.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게 확신이어야지. 그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뢰하는 게 확신이어야지. 


보통 우리 인간들의 구원의 확신은 어디서부터 얻어져요. 내 행위를 보고 나의 상태를 보고 야 나는 구원받을만해 이렇게 판단한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조변석개하는 거예요. 아홉시에는 구원받은 거 같았다가 십오 분에 싸움 박질하고 또 아니 것 같았다가. 그런데 누가 누구한테 너 언제 구원 받았어~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그렇게 없어~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하냐고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이혼당해 싼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혼하지 말아라. 라는 건 나는 너희들하고 절대 이혼안할거야 이걸 가르쳐 주려고 우리에게 그런 율법들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갖고 그냥 이혼한 사람들 정죄하고 또 조금 실수한 사람들 그냥 떼거리로 몰려들어 가가지고 두들겨 패고 그런 거죠.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점점점 가면 갈수록 내가 제일 나쁜 놈이 돼야 되요. 그렇게 나쁘게 변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자 인식으로 깊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다음 주에 요한계시록으로 가서 이제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맞습니다. 저희가 없음입니다. 저희가 티끌입니다. 저희가 간음한 자고 저희가 하나님과 그렇게 이혼상태에 있던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내 안의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게 믿겨 집니다. 아버지 그 구원의 현실을 찬송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존심 챙기느라 예수의 십자가 모독하게 하지 마시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더욱더 낮아지게 하옵시고 그러한 낮아짐 속에서 나오는 진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심히 격발되게 하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