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13 하늘과 땅이 없어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다 이루어진다2 마태복음 5:17~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8

산상수훈 13 하늘과 땅이 없어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다 이루어진다2

마태복음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실 이 본문이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되지 않은 분들은 굉장히 이해가 안 갈 것이고 패러다임 쉬프트가 된 분들은 아주 은혜로운 구절이 될 텐데. 좀 어려울 거예요. 한번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려 함이다. 라는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개혁 신학은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개념을 예수님께서 율법의 세목 하나하나를 다 지켜내심으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이라는데, 초점을 두어 설명을 하죠. 저도 목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율법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늘 그 개혁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초창기에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 설교를 할 때는 저도 똑같이 그 개혁 신학의 울타리 안에서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드렸던 기억이 나실 거예요. 왜냐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나 ‘아브라임 카이퍼’나 ‘조나단 에드워드’ 등의 그 개혁주의 수장들이 전부 그러한 견해를 밝히셨기 때문에 감히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성경을 좀 더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구약의 수많은 율법들을 대할 때에 저는 그 개혁 신학의 율법관이 더욱 더 명확해진 게 아니라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먼저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켜냈다고 했을 때에 그 다 지켜내신 율법의 항목의 문제였어요. 구약의 율법은 비단 십계명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수백 수천 개가 넘어요. 심지어 잠을 자다가 몽정을 한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율법도 있고요. 돈 꿔주고 이자 받으면 안 된다는 율법도 있어요. 그거 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배설을 하러 나갈 때 반드시 삽을 가지고 나가서 돌아올 때는 그 배설물을 땅에 묻어야 된다. 덮어야 된다. 라는 율법도 있어요. 여자가 한 달에 한번 반드시 하게 되는 월경, 그걸 지낸 후에도 정결예식을 행해야 됩니다.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까지 다 지키셨을까요? 뭘 다 지켰다는 걸까요? 여러분? 개혁 신학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켰다. 세목 하나하나를 다 지켰다. 개혁 신앙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다 지켰다는 게 뭐에요? 어떻게 다 지켰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 정말 그런 모든 걸 다 지켜내러 오셨다는 걸까?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imputation 전가해 주러 오신 것일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건 율법뿐만이 아니라 또 선지자도 완전하게 했다. 라고 그러죠. 율법과 선지자 이거를 때로는 그냥 율법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어디서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이야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다 완전하게 하셨다. 완성하셨다. 이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을 완전하게 하셨고 구약을 완성하셨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구약 전체를 뭘 다 지켰다. 다 수행했다. 그게 무슨 의미에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뭐 어떤 의미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셨다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건 단순히 율법의 세목을 하나하나 다 지켜냈다. 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구약 전체를 예수로 결론내고 가셨다. 라는 뜻이에요. 오늘 거기에 대해서 제가 좀 자세히 설명해 드릴 텐데.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은 5장에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7장에서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니라 라고 설명을 해주죠. 같은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러 왔다. 그리고 쭉 율법의 세목을 나열하고 그 다음에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걸 연결해서 봐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7 12절 보세요.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죠?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내가 완전케 하러 왔다. 그러고, 그 이후부터 뭐 살인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뭐는 어떻게 해라~ 쭉 적어 놓은 다음에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에요? 이 전체를 다 내가 완전케 하러 왔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17절에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나열되는 게 뭐냐면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원수사랑, 구제, 기도, 금식, 재물, 염려, 판단, 여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세요. 이건 구약의 십계명에서 하나님에 관한 계명을 쭉 말씀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설명을 해주는데 살인하지 말라~부터는 설명이 없고 그냥 제목만 뚝뚝 들어가 있죠? 예수님이 지금 산상수훈에서 그 다음부터 설명을 해주고 있어요. 살인하지 말라는 건 사실 이런 거고, 간음하지 말라는 건 사실 이런 거란다. 이렇게. 이어지고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앞부분 설명 해주시고, 예수님이 지금 뒷부분을 설명을 해 주시고 있단 말이에요. 이건 표피적인 내용으로만 보면요 절대로 그런 거 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거는 이렇게 해라~ 라는 그런 명령으로만 보여요. 그래서 간디 같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도덕과 윤리 책을 다 뒤져 보았는데도 산상수훈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사람은 산상수훈부터 읽었어요. 죽는 날까지. 그리고 이걸 죽을 때까지 지켰단 말이에요. 지키려고 애를 썼겠죠. 자 그런데 이 모든 규례의 마지막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로 지금 이제 끝난단 말이에요. 마치 율법과 선지자라는 두 개의 빵, 이 샌드위치 안에 그 가운데 게 샌드위치 속으로 들어가 있는 그런 모습인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에 의해 완성이 된다고 그랬잖아요. 17절에서 오늘 본문 17절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규례가 설명이 되고 이게 율법과 선지자다. 라고 해요. 그런데 이 율법과 선지자다. 라는 어절을 수식하는 게 뭐냐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대접을 받기 위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여 먼저 누구를 대접했다. 라는 그런 의미가 되죠?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러 왔다. 그래 놓고 뭘 막 나열한 다음에 내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것은 그대로 남을 대접하여야 한다. 이게 율법과 선지자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고 쭉 설명해 주고 나는 대접했다. 뭐를? 이걸 완전하게 하여 너희를 대접했다. 그러니까 너희도 나를 대접해야 한다. 지금 이 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예수님이 그 안에 가운데 걸 그냥 다 지켰다. 라고 해석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완전케 했다. 라는 말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그걸 한번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완성하셔서 이제 우리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참소되지 않게 된 건 맞아요. 그죠? 하여튼 다 지켰던 아니면 뭐 다른 의미든, 아무튼 그게 완전케 되어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참소되지 않게 된 건 맞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다 지켜내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라고 말을 하면 그건 오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그 사이에 들어 있는 세목 하나 하나를 완전하게 다 지켜내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여러분 율법과 선지자가 완성되는 걸 성경이 뭐라고 그러냐면 의, ‘디카이오수네’ 라고 하거든요. 그걸 의라고 그래요. . 왜 제가 자꾸 그 부분에 시비를 거는가 하면 만일 그 내용을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를 위해 율법 하나하나를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버리면 우리가 주인공이 되고 예수님이 조연이 되요.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수단과 방법으로 쓰이는 게 된단 말이에요. 우리는 여태까지 그게 맞는 거 아닌가. 라는 이런 아담적 발상, 이 사고에 너무 젖어 있어서 이게 왜 잘못된 것인지 고민을 하지 않아요. 거기에서의 주인공은 인간이라니까요. 마치 우리가 같이 고귀하고 훌륭한 존재를 위해서 주님은 방법과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그런 모양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그러한 개혁 신학의 견해에 반박을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20절에 그 ‘페리슈오’라는 단어 때문에 그래요. 헬라어 단어. 20절을 보시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보다 더 낫지 못하면 이란 어구가 나오죠? 거기서 더 낫다. 라는 그 단어가 ‘페리슈오’인데 그 단어는 ‘더 좋으면’ better 이게 아니라 ‘차원이 다른’ 이란 뜻이에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의와는 다른 종류의 의란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실행하는 의와는 차원이 다른 의라는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의의 정의가 뭐였어요? 율법의 세목을 하나하나 다 지켜서 율법의 의를 이루자. 가 바리새인들의 의의 정의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의’가 예수님이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해 준 ‘의’라면 이 ‘페리슈오’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죠. 다른 차원의 ‘의’라는 단어를 쓰면 안 돼요. 같은 차원의 ‘의’잖아요.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서 의를 성취하려고 하고 예수님도 그걸 하나하나 다 지켜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준 거라면 그 의는 다른 차원의 의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 바리새인의 의로는 절대 천국 못 들어간다고 그러고 다른 차원의 의를 준비하라 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 라는 말은 율법의 세목을 하나하나 전부 지켜냈다. 라는 말은 아닌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율법을 다 지켜서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 율법은 이스라엘의 사회법이기도 했어요.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법이 따로 없었어요. 율법이 법이에요. 이스라엘의 법. 이스라엘에는 율법 말고 다른 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이 헌법이요 통치법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인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철떡 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 백성들이 사는 곳이 어디에요?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주는 걸 메시아가 이루는 하나님 나라라고 믿었단 말이에요. ?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나중에 어떤 시점이 되면 우리가 죽어서 갈 다른 곳에 있는 어떤 피안의 세계, 이런 개념이 없었어요. 히브리 사람들의 천국은 그냥 자기들의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보이고 증거 하여야 된다고 믿은 거예요. 그리고 열심히 지킨 거예요. ?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지키기기 위해서. 나쁜 것 같지 않죠? 그런데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처음 받은 율법의 돌판은 깨져 버렸어요. 그게 이스라엘의 최초의 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박살이 났다고요. 그 산 아래에 이스라엘은 도저히 율법을 지켜 낼 수 없었던 자들이었음이 폭로가 됐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율법은 도대체 너희들이 지켜낼 수 없는 거야~ 라고 이렇게 심판을 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법은 깨져 버린 거예요. 그리고는 모세라는 중보자의 목숨 건 중보가 있고 그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한 새로운 돌판이 이스라엘에 주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두 번째 돌판은 법궤 속으로 감추어져요. 밖으로 나오면 안 돼요. 그리고 그 법이 이스라엘을 끌고 다녀요. 법궤로 둘러싸인 법이 이스라엘을 끌고 다녀요. 이스라엘이 법을 장악하여 지키는 게 아니라 법이 이스라엘을 장악하여 끌고 다녀요. 이스라엘이 어디로 갈려면 항상 법궤, 그 법이 그들을 끌고 간단 말이에요. 이스라엘은 매년 대속죄일에 그 율법을 덮고 있는 법궤 위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의 피를 뿌려서 법궤 뚜껑이 피에 완전히 덮이도록 제사를 지내야 됐어요. 그 때에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속해지는 그런 의식이 이스라엘의 대속죄일 행사였죠? 죄가 속해지는 거예요. 어떻게 법 위에 어린양의 피가 뿌려져서 그 위가 흥건히 피로 덮여야 되요. 바로 그 법궤가 이스라엘의 맨 앞에서 이스라엘을 진두지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한마디로 은혜가 그들을 끌고 가는 모양인 거죠. 법이 아니라 법에 의하면 그들은 다 죽어야 되요. ? 첫 번째 돌판에서 증명이 됐으니까. 그런데 은혜가 그걸 덮어 놓고 그 은혜가 그들을 끌고 다니는 형국이란 말이에요. 마치 베드로에게 이제는 네 머리에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너를 끌고 가는 어떤 힘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바로 그 법궤가 요단강을 건널 때도 앞장을 섰고 여리고가 무너질 때에도 그 법궤가 앞장을 서요. 그 때마다 법궤는 대제사장과 연합이 되는 형국으로 대제사장들이 그 법궤를 매야 되요.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야 되요. 제사장은 누구의 모형?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니까. 중보자, 대제사장이니까. 그죠? 예수와 법궤가 항상 연합이 되어 이스라엘을 끌고 간단 말이에요. 여리고가 무너진 거나 요단이 갈라진 거나 다 구원의 모형이잖아요. 그때마다 법궤가 은혜가 앞장을 서서 그들을 끌고 간단 말이에요. 그들이 법을 장악하여 법을 지켜서 갈라지는 게 아니에요. 요단이 갈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은혜가 대제사장이 물에 먼저 빠지면 법궤와 함께 빠지면 그들이 요단을 건너고 제사장이 법궤를 매고 나팔을 불면 나팔 소리에 여리고가 무너지는 거예요. 그들이 뭘 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고 은혜가 끌고 가는 거예요. 법이 지켜서 그게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내야 하는 규례와 법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해서 쉬운 말로 잡아끌어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내는 하나님의 능력인 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영토에서 시행이 되어 그 법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다스려진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법이 조금 이따 보면 그게 뭔지 나오지만 그 법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러분이죠? 하나님의 나라, 영토에서 국민, 주권, 영토가 국가의 3요소이니까. 영토에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게 하나님 나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하나님의 영토가 어디죠? 여러분 자신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처소고 성전이고 나라니까 바로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성경이 이야기해 주는 거뿐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요. 여러분이 하나님 백성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땅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법인 통치가 내려와서 여러분을 장악하고 다스리는 거. 이게 하나님 나라이며 천국이다. 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우리의 쾌락이나 우리의 좋은 것, 우리의 욕심, 욕망을 따라 살 때 이게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역사 속에서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끌고 가 줄 때 마치 군대에서 하라면 그냥 무조건 하는 거. 그러면 나올 때 살 뒤룩뒤룩 쪄서 나오는 거. 마음 편하니까. 이것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쫓아가는 게 우리의 살 길이구나~ 이거를.

갈라디아서 3 11절 보세요.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라고 이렇게 확인 도장을 찍어요. 분명히 안 된다는 그걸로.)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믿음이라는 거 자체가 나에 대한 믿음이 다 삭제되고, 상대, 어떤 대상에게 내 존재를 투신하는 걸 믿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의인은 나를 믿을만한 존재로 바꾸어서 법을 잘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나를 부정당하고 나를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에게 투신하여 의인이 되는 거란 말이죠. 이렇게 율법으로는 의인이 될 수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법칙이에요. 육체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율법을 다 지키면 생명을 준다고 했는데 복을 준다고 했는데 누구라도 한 사람이라도 그걸 지켜내면 십자가가 무용한 게 되기 때문에 누구도 안 돼요. 육신을 입은 예수도 안 돼요. 예수님이 옛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옛 성전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허물어져야 되요. 그리고 사흘 만에 새 성전으로 부활을 해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역사적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여태까지 여러분이 믿고 신뢰했던 우리에게 이런 거 해, 저런 거 해 라고 했던 공생애 사는 역사적 예수를 여러분 마음속에서 죽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진짜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어요. 그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셔져야 할 옛 성전으로서의 예수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십일조 해, 이거 해, 저거 해 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율법 아래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옛 성전이 되셔서 옛 성전들을 전부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파괴되신 거예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한 죽음이라는 뜻인 거예요. 그거는요. 그리고는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 측의 대표로 오신 예수님이 그걸 전부 지켜내어서 우리에게 그걸 전가시켜 주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가, 누가 잘 하나 경쟁을 시켜서 의를 이룬 자들만 하나님 나라로 들이겠다는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아니고는 그 어떤 존재도 존재될 수 없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율법, 그 피조물 측의 그 가능성 추구의 빌미를 줘 본 거예요. 가능성 있다. 라고 믿지. 그럼 한 번 이거 지켜봐. 가능성 추구의 빌미를 율법으로 줘 본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완료를 해서 인간의 대표가 그걸 완료해서 인간들에게 전가를 시켜 주면 인간의 대표가 해냈기 때문에 모든 인간도 그걸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인정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십자가가 설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걸 지켜서 완료시키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 율법에 의해 참소 당하셔서 죽으심으로 육신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확실하게 증명해 내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광으로 오롯하게 드러날 수 있죠. 율법에게 맞아 죽어야 그 맞아 죽은 이 육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조해 내는~ 죽음, 없음의 자리에서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광으로 드러나게 되잖아요.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온 거라니까요. 육을 가진 예수가 죽고 성령에 의해 부활한 새 아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거기에서 드러나는 건 아버지의 능력과 은혜와 영광이에요. 자 그렇게 아버지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란 말이에요. 그러죠?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의해 어~ 육은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네~ 라고 죽고, 모든 인간을 품고 죽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에 의해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만 영광으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만 찬송되는 거죠. 그래야 이 율법을 주신 그 율법의 진의가 증명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살리시는 거야. 하나님이 창조주야~ 이게 드러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부활하는 걸,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 안에서 율법이 완전하게 된다. 라는 게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된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신 건 율법을 다 지켜낸 게 아니라 못 지키네요. 하고 율법에 의해 맞아 죽은 거예요.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인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켜냈으면 그 다 지킨 걸 갖고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돼요. 다 지켰으면 살아서 전가시켜 줘야 되요. 그렇잖아요. 다 지켰는데 왜 죽냐고. 그 이야기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께서 이루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모든 하늘의 백성들을 품어 안으시고 율법에 대해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그 행함의 짐을 벗겨 버렸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완전케 됐다. 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 십자가.

로마서 7 1절 보세요.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율법이 예수가 사는 동안 예수를 주관했습니다. 예수가 율법 아래 세상의 종으로 오셨다니까요.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관할 존재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어떻게? 예수 안에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영과 의문, 율법이라는 게 이렇게 대조를 되는데 한번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우리를 죽여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율법에 대해 자유롭게 됐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삶을 그 전처를 밟아서 산다고 그러잖아요. 성경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켜서 우리에게 주시고 간 거라면 그 전처를 그대로 밟아 살아야 하는 교회, 성도는 예수님이 다 지킨 율법을 죽어라고 쫓아가면서 다 지켜야 되요. 우리가 예수의 흔적을 갖고 예수가 사신 삶을 살게 된다. 며요. 이게 바울이 이야기하는 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켜서 우리에게 주고 간 거라면 우리는 그 삶을 그대로. 정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그걸 다 지키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예수 안에서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해요. 율법이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어요. 우리에게 왜? 율법에 대해 죽었어요. 어디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에게 무슨 명령을 해요. 죽은 사람들에게, 시체한테 가서 뭐 교통법규를 지키라고 그러겠어요. 무슨 뭐 착하게 살라고 도덕, 윤리, 교훈을 하겠어요. 죽었어요.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못 박혔다면서요. 그러니까 성경이 전부 관념으로만 동동 떠다니니까 뭔 얘기를 해도 감동이 없어. 우리 죽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아무 법도 안 지켜도 되나요. 맞아요. 논리적으로 그래요. 아무 법도 안 지켜도 되요. 그런데 성경에 그 법 말고 또 다른 법이 나와요. '노모스', 완성된 법, 새로운 법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드러내면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죠. 그리고 나서 이 완전케 된 법이 새로 제정이 됐단 말이에요.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그 새로운 법에 대해서 많이 나오죠. 생명의 법, 성령의 법, 마음의 법 여러 가지로 이렇게 묘사를 하지만 다 똑같은 말이에요. '노모스', 새로운 법이 있어요. 그런데 그 법이 등장하여 이제는 내가 지켜야 된다. 라는 그 강박에서는 내가 벗어났는데 새로운 법이 들어오더니 지켜라~ 라고 하지 않고 너는 내가 끌고 갈 거야~ 그러고 이 법이 우리를 끌고 가는~ 이런 완전히 다른 거예요. 겉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열심과 변화와 성숙의 모습은 비슷해 보일 지도 몰라요. 그런데 한 쪽은 내 열심을 근거로 하여 지켜야 된다. 로 가는 거고 한 쪽은 우리의 가능성과 뭐 힘과 모든 걸 다 부정해 버리고 너는 율법을 완전케 한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야~ 이걸 인정하게 하는 쪽으로 이 법이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이걸 법 쪽에서 우리를 이렇게 끌고 가는 걸 통치라고 그래요. 우리가 법을 지켜내는 건 통치가 아니에요. 여러분. 통치는 법이 우리를 장악하여 우리를 끌고 가는 걸 통치라고 해요. 그게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생명의 나라의 법이다. 그래서 생명의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법이다. 살리는 법. 생명의 법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 8 2절 보세요.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두 법이 나오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법, 성령의 법 그리고 사망의 법. 이걸 죄라고 그래요.)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율법은 지켜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에요. 그 어떤 육신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성취해 낼 수 없어요.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율법을 부정하여 완성시켜내야 되는 거예요. 이거는 아니다. 이거는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아니야~ 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정을 하는 게 율법을 완성시켜 내는 거란 말이에요. 그 진위를 드러내는 거니까. 그래서 성경이 율법이 패하여진 게 아니라 완성이 되어진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켜서 율법을 완성해 내셨음으로 율법이 완성이 되었다. 라고 이런 의미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4절을 보시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 라는 어구가 나오죠. 거기서 쓰인 단어가 오늘 본문의 쓰인 단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오셨다. 여기에 쓰인 단어와 똑같은 단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전히 부정하고 부인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이 방법으로는 절대 존재가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라고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 르와흐. 성령에 의해 생명으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진의를 드러내면서 율법을 완전케 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와서 뭘 한다고 그래요? 우리 안에서 율법을 또 온전케 이룬다고 그래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그 율법이 온전케 이루어지기 위해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성경을 법으로 지켜내라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게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 성경 전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건 여러분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다. 라는 건, 법으로는 절대 우리가 생명일 수 없다. 라는 걸 자각하게 하고 증명하게 하고 설명하게 한다. 라는 거예요. 우리 삶으로 입으로. 그리고는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는 거야~ 라는 이 고백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게 말씀의 역할이에요. 율법의 역할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역할. 바울이 그 사망의 법으로서의 율법과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어 자유하게 하는 법을 이렇게 묘사를 해요. 로마서 7 23절 보세요.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 안에 두 개의 법이 공존하죠. 하나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이고, 다른 법은 마음의 법이라고 그래요. 마음의 법. 그리고 그 마음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도 부르죠.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표현된 말씀을 대하게 되면 그걸 거듭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먼저 율법과 규례로 인식을 하게 되요. 왜 우리는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이기 때문에 선악구조 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아담적 사고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요. 그러니까 당연히 말씀에서 이거해라, 저거해라, 뭐 해라, 뭐 해라 그러면 예수로 풀어내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그걸 법으로 받아들이게 되요. 율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니까요. 그래 말씀을 들어도 내 안의 율법, 죄의 법이 쌓인다니까요. 그 짐이 되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러한 아담들 중에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예수의 완료하신 또 다른 생명의 법, 그걸 성령의 법이라고 그러죠. 쉬운 말로 성령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고 해도 되요. 성령이 들어가서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인 성령과 믿음과 이 다른 법, 죄의 법, 율법이 서로 투쟁을 하는 거예요. 그래 영적 전쟁은 다른 데 가서 하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안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니까요. 어딜 뭐 다른데 가갖고 무슨 워싱턴의 정치의 영, LA의 뭐 음란의 영, 테리토리얼 스피릿(territorial spirit) 얘기하는 사람들 많죠. 무슨 선교단체 수장들이 그냥 그런 얘기 많이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런 것들하고 싸우는 거 아니에요. 무슨 테리토리얼 스피릿이 있어요? 무슨 마귀들이 지들끼리 영토 싸움 해 갖고 뭐 나눠 갖고 있단 말이에요. 세상을? 그 다 여러분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거. 마귀새끼. 우리란 말이란 말이에요. 그건요. 자 한 법은 지켜라~ 지켜야 돼~ 이렇게 사망에 이르는 법이고 또 다른 법은 넌 하나님의 법에 순복하여야 하는 자지 네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하나님처럼의 삶을 고수해서는 안 되는 거야~ 선악 구조의 의해서 네가 선악 판단하고,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고, 그 네가 판단해 놓은 그 법을 네 스스로 지켜낼 수 있다. 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인간의 가치를 챙기는 그런 아담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이게 성령의 법이잖아요. 이 두 법이 싸우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마음의 법이 죄의 법에게 자주 진다고 그래요. 늘 사로잡혀 간다고 그래요. 예수가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완성해 내신 것처럼 너희도 열심히 해서 예수의 본을 쫓아가라~ 이게 죄의 법이 외치는 거라면, 후자의 법, 마음의 법은 너희의 모든 가능성과 힘을 부정하시고 너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뭐에요? 내 하나님 됨, 왕 됨을 지키려고 하는 게 우리가 원하는 바니까. 그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건 뭐에요? 다 털어낸다는 말이죠. 부정시켜내고 부인시켜낸다는 것이죠. 그 방향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법, 그 성령의 법에 이끌려서 살아라~ 이게 마음의 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전자의 법이 훨씬 매력이 있잖아요. 보람도 느끼고 그 보람을 느끼면서 성취감도 맛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뭐 성실함, 훌륭함 인정도 받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해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예수 믿어야 돼~ 예수님이 완전케 하신 그 의를 우리는 전가 받아야 살 수 있어~ 이 방향으로 끌려가는 사람은 어떻겠어요? 보람도 없어, 사람들에게 저거 참 옛날에 열심히 하더니 왜 갑자기 저렇게 불성실해졌어. 이렇게 평가 받어~ 당연히 전자의 법을 쫓아가요. 우리는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수시로 거기로 끌려간다니까요. 불안하고 쪽팔리고 막 이러니까. 그렇게 그 전자의 법에 의해 우리가 수시로 끌려가는 삶을 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렇게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도 아~ 넌 여태 살았냐~ 죽어~ 매일 죽이는 거예요. 자기를. 스스로 죽였다는 게 아니라 넌 아직도 죽은 자냐~ 이걸 매일 폭로 당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나는 매일 죽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죽은 것 같으면 다음날 또 살아나 있고. 죽은 것 같으면 십분 뒤에 또 살아나 있고. 사도바울이. 그러니까 매일 죽어, 매일 죽는데 하도 지겨워~ 나중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구나, 이 사망의 몸 이 죽은 시체의 몸에서 누가 나 좀 건져줘~ 그러는 거예요. 왜 난, 왜 이렇게 죽은 자의 삶을 반복하여 살아~ 누가 나 좀 건져줘~ 그러는 거예요. 말년에 그것도. 죄인중의 괴수라고 그랬잖아요. 자기를. 말년에.

로마서 8 10절 보세요.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우리 안에 뭐 성령이 있다고도 그러고 여기처럼 그리스도가 있다고도 그러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도 그러고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하죠. 다 같은 말이에요. 그거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걸 그냥 그리스도라고 이야기를 해도 되고 그래요. 율법을 완전케 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으로 드러나고 그러잖아요.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은 죽은 걸로 드러나고 내 안에 성령과 연합한 나만 산 것으로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은 우리 안에 따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객관적 어떤 실체, 이런 것이 아니라 성령과 연합된 성령의 의해 장악된 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악된 나. 그걸 영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인간의 영을 성령, '푸뉴마' 라는 단어로 막 혼용해서 써요. 성령의 의해 끌려가는 장악된 나만 영이에요. 그것만 산거에요. 그걸 새 성전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새로운 법, 성령의 법, 이 생명의 법은 우리를 죽은 자로 폭로 시켜 내고 우리가 법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법으로 우리를 장악하시고 통치하신다. 라는 그런 말인 거예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예레미아 31 27절 보세요.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9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에스겔서 18장 이야기가 또 똑같이 나오죠. 여기.)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 위에 까지는 옛 언약이에요. 그러니까요. 옛 언약은 뭐에요? 네가 신 포도를 먹었으면 너는 네 죄를 갖고 네가 죽어야 돼~ 이게 옛 언약이죠? 그런데 새 언약을 세우겠대요.)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뭘 잘해서 새 언약 주는 게 아니라 네들은 내가 남편이 되어서 끌고 가는데도 불가능하더라.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법을 그들 속에 둔다고 그래요. 그리고 그 마음의 기록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생명의 법, 마음의 법 이런 단어는 사도바울이 이런 거 보고 인용해다 쓴 거예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뭘 했다고 이들의 죄를 사하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이들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둠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그들 안에 둠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다시는 여호와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 받지 않게 된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그들이 뭐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에스겔서 36 24.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여기서 내 신, 내 영 이게 다 '르와흐'에요. 르와 흐자는 원래 발음 않하니까. 르와흐, 성령, 콧김, 생기 똑같은 단어에요. 호흡, 숨 다 똑같은 거예요. 새 언약이 뚝 떨어지는데 그 새 언약이 법으로 심판하지 않고 인제 법을 너희들 안에 넣어버릴 거야~ 이게 새 언약이란 말이에요. 법을 어떻게 육신 안에 집어넣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육신 안에 넣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면 되잖아요. 그걸 시작으로 해서 말씀과 육신이 새 언약의 완료가 이제 이렇게 될 거야~ 라고 설명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들어오시는 거예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육, 안에 들어와서 지금 이렇게 새 사람이 될 거다. 를 보여주는 건데 그 예수의 육이 죽고 그 안에 있는 말씀만 살아나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 이게 예수님이 보여준 거란 말이에요.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율법을 선지자를 완전케 하시고 성령을 여러분에게 부으시죠? 여러분의 마음에 새 마음을 주고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어서 성령의 법이 여러분을 끌고 가게 하신단 말이에요. 지금 이게 역사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에요. 말씀이 육신 안에 들어 온 거예요. 역사 속 옛 성전인 예수님의 모습과 방불한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이 첫 열매로 가신 첫 맏아들로 가신 그 분의 뒤를 따라 이 역사를 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우리가 그 예수가 가신 삶을 그대로 살아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냐면 이 육이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거예요. 아니구나~ 이렇게. 그리고는 우리 안에 부어진 성령, 그 성령이 장악한 살려 낸 나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물로 살게 되는 거. 쉬운 말로 여러분은 죽는다는 뜻이에요. 부정 당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법을 지켜서 우리를 증명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게 아닌 거예요. 여러분. 여기도 보세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니까 내가 신을 주면 너희들이 규례를 명령을 지키게 될 거야~ 그걸 힘 삼아~ 이런 말로 보이죠? 아니에요. 히브리 원어로 보면 내가 너희 안에 내 신을 두면 내 법을 너희 안에 넣게 되면 그것 자체, 그 상황 자체가 율법을 지킨 게 되는 거야~ 라는 뜻이에요. 그것 자체가 율법이 완성되는 거란 말이에요. 은혜의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육의 죽음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한 선지식을 갖고 이제 18절로 한번 넘어가 보자고요.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얼핏 보면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율법의 일점 일획은 다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다 지켜~ 그런 것처럼 보이죠? 여기에서 천지는 '우라노스 카이헤 게' 인데. '우라노스'는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 나라에요. 그리고 ''는 땅의 나라에요. 둘 다 나라에요. 천지. 이렇게 천지를 처소의 개념, 나라의 개념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처소, 땅의 처소, 하늘의 것이면서 땅의 것을 입고 온 예수, 다른 말로 하늘의 원형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의 것을 갖고 그걸 메시지로 담아 이 땅에 존재하는 게 뭐에요? 히브리서에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게 아니라고 그러죠. 이 역사 전체가 이 옛 언약 역사 전체가 구약이라고도 하고 이 역사 전체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그 말씀, 묵시를 설명하기 위해 이걸 메시지로 담아 뭔가 설명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보이는 건 나타난 걸로 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걸 담고 있는 모형이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원형을 설명하기 위해 이모형이 사라져야 원형이 설명되고 그것이 완료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역사와 모든 이 인생은 모형은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 성전이 무너지는 거예요. 옛 성전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그러잖아요. 성경이. 어렵죠? 여러 번 들어보세요. 여태까지 한 설교들을 다 이렇게 적으면서 했던 분들이 그 의미 하나하나가 다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우실 텐데, 그것들이 지금 정리가 안 된 분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그럴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여러분이 이건 꼭 아셔야 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이 천지라는 건 이 옛 하늘과 옛 땅, 새 하늘과 새 땅을 모형하고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지어진 옛 하늘과 옛 땅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 진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인 예수, 하나님이며 인간인 예수 그걸 천지라고 한단 말이에요. 옛 성전이라고 하고. 그거를. 이게 없어져야 원형이 드러나죠. 그래서 이게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진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니까 율법이 바로 그걸 설명하기 위한 거니까. 이 천지는 어떻게 해야 되요?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티헬리' 라는 단어에요. 그거는요. 천지가 없어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완성되는 거다. 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 예수가 죽어야 하나님 나라는 완성 된다. 이런 뜻이에요.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옛 하늘과 옛 땅이 왕창 다 날라 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걸로 그려지는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또 교회라고도 하고 거룩한 성이라고 하고 그건 여러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이 뭐 복잡한 거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결국은 한 이야기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참 것이 오기 전에 사라져야 하는 그 모형으로서의 유한한 이 현상계 이게 천지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그 모습으로 오셨기에 천지가 사라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완성된다.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거란 말이죠. 그렇게 하늘의 처소로 그리고 땅의 처소로 오신 예수를 천지, 하늘과 땅이라고 불러요. 그 모형으로서의 육이 십자가에서 멸해져 사라져야 이제 이 설명하는 모형이 사라지고 원형 실체가 온단 말이에요. 그걸 성경이 천지는 사라진다. 그 때까지 '에오스'에요. 그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은 사라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천지, 첫 것들은 사라진다. 고 그러고 실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율법의 일점 일획이 상징하고 있던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 다 이루어진다. 이렇게 대조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일점 일획은 단순히 그 기표가 담고 있는 그 내용의 완전한 성취. 일점 일획이라도 그냥 다 이루어져야 돼~ 이렇게 그 기표가 담고 있는 그런 내용의 완전한 성취를 말하고자 선택된 단어들이 아니에요. 일점 일획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일점 '이오타' 는 알파벳 중에 히브리 알파벳 중에 가장 작은 '요드' 점이, 이렇게 점 하나 히브리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요드' , 이렇게. 그래서 히브리말은요. 이렇게 원본에다가 파리가 똥만 싸고 가잖아요. 말이 완전히 달라져요. 그래서 오역이 많은 거예요. 그 점 하나에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니까요. 그게 '요드'에요. 그 점이. 그러니까 가장 작은 '요드' 그 단어는 아주 지극히 작은 것,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킬 때도 써요. '요드'라고. '이오타' 히브리 사람들이. 아주 가장 작은 거예요. 최상급의 작은 거예요. 단어 자체가. 그리고 일획이라고 번역이 된 그 '케라이아'는 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요. '', ''이라는 개념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언어에요. '케라이아' 와 같은 어원을 가진 '케라스'가 어디서 쓰였는지 한번 찾아드릴게요. 누가복음 1 69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 뿔, 이게 '케라스'에요. . 일 획. 거기서 쓰인 단어. 일점 일획이라는 건 단순히 기표로서의 율법으로서의 작은 항목을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물론 하나님의 이 율법, 그게 가리키고 있는 그건, 완전하게 완성될 거야~ 라는 의미에서 일점 일획, '요드', '' 이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더 깊은 메시지가 들어 있단 말이에요.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셔서 지극히 작은 자를 놓치지 않고 결국 하나님 선택한 자는 다 구원해 내고야 마는 그래서 일점 일획도 사라지거나 포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뿔, 구원이라는 단어가 일점이라는 단어와 붙어 있는 거예요.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셔서, 가장 작은 자로 오셔서, 가장 작은 자로 보이는 그래서 ‘소자’라고 하잖아요. 성도들을. 성경이. 지극히 작은 자 라는 말, 성경에 많이 나오죠. 그 단어들인 거예요. 그 구원의 이야기 그걸 일점 일획도 사라지지 않고 그 구원은 완료된다. 이런 뜻이에요. 완료된다. 뭐에 의해서? 천지가 사라지는 거에 의해서. 그렇게 유한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옛 성전, 즉 옛 하늘과 옛 땅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옛 하늘과 옛 땅이 손가락을 뻗어 이렇게 가리키고 있던 그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성전의 진의가 완전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 의미에요. 그게 구원인 거고 그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의 완성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로 오셨죠? 일점으로에요. 그리고는 일획의 불가능을 그 일점의 존재의 처음자리죠. 그건. 가장 작은 거니까. 가장 작은 거 없음이에요. 그거는. 그 존재의 그 처음자리를 은혜로 덮으셔서 그 불가능을 은혜로 덮으셔서 구원을 해 내는 것. 이게 천지가 없어지므로 일점 일획이 사라지지 않고 율법이 담고 있던 그 일점 일획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고 완료된다. 이런 뜻이에요. 여기까지 정리해 드릴게요.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려고 했던 건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진의가 밝혀져요. 그건 생명, 그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제공이 되는 것임을 에둘러 표현한 거예요.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이거요. 그러려면 율법이 부정된단 말이에요. 절대로 안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심으로 성도들을 먼저 대접하셨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대접해야 되요. 역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서 예수님이 하셨네요. 이게 대접이에요.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를 내가 완성하러 왔다. 그래 놓고 마지막에 내가 먼저 대접했다. ? 대접받기 위해, 이게 율법과 선지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대접해야 되요.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때려 치고 싶지 않아요? 아 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때려 치고 싶은데. 여러분들은 너무 거룩하셔서. 아니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나는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만 드러나지, 아 잘 믿어야지 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성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세요. 예수님의 대접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죠?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그랬어요. 구약에서는 죄가 뭐에요? 행함에 의해 죄와 악과 선과 의가 갈라지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죄와 선과 악과 의, 이런 게 예수 믿고 안 믿고로 갈라지죠? 완전히 죄가 이제 다른 게 되는 거예요. 율법 아래에서는 뭘 하고 안 하고로 죄가 판별이 되는데 판단이 되는데 성령이 오시고 난 이후에는 예수 믿어~ 안 믿어~ 이걸로 죄다 아니다가 판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건 뭐에요? 넌 죽은 놈이야~ 산 놈이야~ 이거 묻는 거거든요. 저는 예수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이 사람이 죄 안 짓는 거예요. 내가 왜 예수만 믿어야 되요. 저도 열심히 해 보게요. 이 사람이 죄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예수 잘 믿어야 돼요. 여러분. 성령은 결국 예수에 대한 대접을 받아내세요. 십자가에 매달아서 결국 모든 건 예수님의 은혜로 완료가 됩니다. 라는 이 고백을 받아 낸단 말이에요. 이게 육의 부정이요 성도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육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가 되는 거잖아요. 이게 십자가에 매달리는 거예요. 18절은 천지로 오신 예수님의 그 ‘파렐코마임’ ‘파해짐’에요. 사라짐, 천지가 이렇게 파해지는 거. 깨져버리는 거. 깨져버림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의미하는 일점 일획의 완료가 다 이루어진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그랬어요. 일점 일획은 가장 작은 것으로 오신 예수에 의해 완료되는 구원의 현실을 그려내는 소재라고 했습니다. 거기까지 이해가 가지죠? 그 이해를 갖고 19절로 가보잔 말이에요. 끝났어요. 이제 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거 하나를 버리고 그거를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는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그래요. 계명 속에 들어있는 지극히 작은 게 뭐라고 그랬어요? 조금 아까, 일점에서, 예수잖아요. 그걸 버리고 가르치는 자가 누구였어요? 유대인들, 율법주의에요. 그리고는 우리는 큰 자입니다. 그랬죠? 그들이 사실은 작은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을 법으로 받아서 그걸 열심히 행함으로 옮기는 자는 세상에서 볼 때 굉장히 큰 자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는 은혜의 예수이기 때문에 작아 보인단 말이에요. 그게요.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은혜의 예수님을. 은혜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홀대를 받습니다. 누가복음 9 48절 보세요.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누구겠어요? 이 말씀하시는 예수겠지요. 그이가 큰 자다. 가장 작은 자, 예수, 이거에요. 율법 안에 이 예수가 들어 있는데, 이걸 버리고 그걸 명령과 규례로만 설명을 하고 가르치면 바리새인들이 선생이었잖아요. 율법사, 서기관들 다. 그러면 너희들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에는 작은 자가 없거든요. 그런데 큰 자가 나오는데 누가 큰 자라고 그래요. 이걸 행하며 가르치는 자, 그러죠? 이 산상수훈이 지금 예수님이 어디에서 뭘 하는 거죠? 산 위에서 가르치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 율법과 선지자를 완료하러 행하러 오신 분인 누구에요? 예수님이에요. 그걸 행하러 온 내가 그 지극히 작은 자로서 너희들에게 가르치는 데 사람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가리워 있는 이들은 이걸 절대 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귀가, 눈이 열린 성령 받은 자들은 그걸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이 분이 큰 자라는 걸. 그러잖아요? 그걸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나라는 거예요. 내가 큰 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열심히 행하면서 가르쳐야 돼 그냥 말로만 가르치면 안 돼~ 목사들이 한테 잘 써 먹잖아요. 저 새끼는 삶은 저러면서 아주 입만 살아갖고 설교는 잘해~ 이럴 때 써 먹죠? 이거 갖고요. 그런 말 아니란 말이에요. 저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갖고, 생경하지만, 인간은 법에 주체가 되어서는 안 돼요. 법의 주체, 즉 선악의 주체는 하나님이셔야 되는 거예요. 법의 주체라는 건,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지켜내는 것까지, 법으로 통치하는 것까지 다 하는 걸 법의 주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을 먹고 법도 지들이 만들고 지들의 선악구조 안에서. 그리고 그 법도 자기들이 지킬 수 있다. 라고 법의 주체로 서는 거, 이게 역사에요. 이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요. 그런데 이게 우리 안에 있단 말이에요.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법의 주체가 되면요 인간들은 반드시 선과 악, 의와 불의를 지들이 구분해 내는 심판자의 칼을 맹폭적으로 휘두르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법의 주체가 되면요. 그리고는요 그걸 지켜 낸 그 fact를 갖고 자기의 권력으로 삼아요. 그 인간의 힘입니다. 인간이 깨끗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훌륭하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게 힘이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걸로 체제를 구축해요. 나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한단 말이에요. 그걸 에너지 삼아서. 그래서 인간이 법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나라는 부셔져야 되는 건데 그걸로 나라를 곤고히 하고 구축하면 어떡해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살아나야 되는데, 산상수훈은 지금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그 악의 극복, 우리의 힘으로 악을 극복하여, 그 악의 극복을 통한 선의 쟁취, 성취, 다른 말로 인간 행위를 통한 구원과 해방의 도달이라는 이 대전제의 차원을 극복하고 파쇄하기 위해 기록되는 게 산상수훈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이 명령과 규례로 읽어 내서는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 그러면 이 육적 관점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그게 우리가 기다릴 하나님 나라인데 갑자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천국은 마음의 문제로 끌고 나오는 거예요.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새 마음을 하나님 심어 주게 되면 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러한 복과 정 반대의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이게 옳다. 라고 인정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요. 누가복음 16 15절 보세요.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한테 칭찬 받는 건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거라고 그러죠.)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서는 데포넌트동사 (deponent verb 그리스어·라틴어에서 형태는 수동이고 뜻은 능동인 동사)가 아니에요. 마태복음에 보면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라고 했을 때 그거는 데포넌트 동사거든요. 그러니까 수동태의 모양을 갖고 있지만 능동태로 해석을 해야 되는,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중간태란 말이에요.)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똑같은 말이 나오는데 무슨 말이 나오냐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 되는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려고 한다고 그러죠. 선지자의 요한의 때까지는 구약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후로부터 복음이 전해지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천국을 자기들이 침노해 들어가려고 애를 쓰더라는 것이죠. 뭐해서? 율법을 지켜서. 그 때 뭐라고 그래요? 17. 그러나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요. 아무리 시도해 보라는 거예요. 사람마다 모든 인간이라는 뜻이거든요. 모든 인간이 그걸 시도를 하는데 그러나 절대 안 된대요.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에 없어짐이 쉬우리라. 율법의 한 획, 구원의 뿔, 이 구원의 뿔, 이 구원의 일은 절대 그런 식으로 너희들이 추구하는 그런 방법으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의 뿔, 일점 일획은 안 떨어진다는 거예요. 천지가 없어지므로 그 구원의 뿔, 그 일획은 완료되는 거지. 니들이 천국을 침노해 들어간다. 라고 하나님의 그 작정과 계획이 취소되거나 변계 되지 않아~ 라는 뜻이에요. 이게요. 힘들어요. 어렵죠? 그래서 비밀이에요. 성경은 사람들이 못 알아먹게 써 놓은 거예요. 누구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게 써 놓은 책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이 이사야 보내면서 뭐라고 그래요. 가서 말씀 전해~ 못 알아듣게~ 그러잖아요. 못 알아듣게~ 귀 막어~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의 귀가 막혀야지, 하나님의 백성만 알아들어야 돼~ 무슨 소린지~ 그러니까 속으로 저 새끼는 쉬운 말도 어렵게 해~ 그러지 말고요. 다 어려운 거예요. 원래가. 그런데 알아듣는 분은 또 알아듣잖아요. 그러니까 또 다 알아듣는 척을~ 괜히 웃음으로 모면하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현상계로 관입해 들어오신 옛 하늘과 옛 땅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포함한 이 옛 것들의 멸망과 부인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다 이루었다. 같은 단어에요. 그리고 그 율법과 역사와 함께 운명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 이루어짐이라고 그래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안에서 그것들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운명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건 매일 매일 조금씩 두들겨 맞아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들죠.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로마서 8 4절 다시 보세요.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 일어난대요. 언제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서요. 그러면 성령을 받은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우리가 법을 품은 자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성경이 뭐라고 하는 지 보세요. 갈라디아서 3 13. 조금만 힘을 내세요. 다 왔어요.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왜 단두대도 아니고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지는 무슨 뭐 능지처참도 아니고 십자가에 달렸는가? 그 당시에는 십자가에만 달아야만 저주라는 단어를 쓸 수가 있었어요. 저주 받은 자. 그래서 나무에 달리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다고 그래요. 언제까지? 나면서부터 십자가에서 매달리기까지의 전체의 삶이 저주의 삶이었어요. 그러면 그 예수를 그대로 쫓아가며 살아야 하는 여러분의 삶은 복 받는 자의 삶이어야 되요? 저주 받은 자의 삶이어야 되요? 여러분 저주 받은 자의 삶을 우리가 어디에서 공부 했죠? 신명기 28장에서 공부 했죠? 그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내용을 그대로 누가 경험했는지 아세요? 사도바울이 그 신명기 28 15절 이하의 저주의 목록에 나오는 단어들을 끌어다가 자기의 고난을 설명합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11 22절 보세요.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거 예수님이 다 살다 가신 내용인데 여기에 보면요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게 신명기 28 15절 이하에 한번 보세요.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이게 시내, 광야 이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이 신명기 28 16절의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끌어다가 자기의 삶을 설명해요. 무슨 말이에요. 예수님이 저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사야서 53장의 그 내용이 그거잖아요. 채찍에 맞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다~에서 그 저주의 삶, 이게 신명기 28장의 그 저주의 삶이었는데 왜?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거니까. 예수님이요. 저주의 삶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삶이 그대로 내 삶에 나타나더라를 설명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사도바울이 자기의 이력서 쓰는 있는 거예요. 이게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저 놈은 목사도 아니야~ 라고 자꾸 자기의 사도성을 의심하니까. 내 이력서 쓴다. 그래 놓고 쭉 써 놓은 내용 중에 일부에요. 이게요. 그런데 자기의 이력서 내가 진짜 하나님의 사도 맞어~ 내가 성도 맞어~ 라고 이력서를 쓰는데 보통 이런 거는 빼고 써야죠. 왜냐면 이런 내용 때문에 야 사도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그렇게 고생만 하고 맨날 감옥에만 들어가냐~ 왜 남들은 물지도 않는 뱀이 넌 무니? 이랬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건 빼고 얘기해야 이거 말고도 좋은 거 많았잖아요. 스펙이. 사도바울이. 그런데 이걸 굳이 써 놓은 거냐고요. 이거를요. 이게 성도의 증거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성도의 증거가 뭐냐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 그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그 삶을 증거로 내놓더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가 그 삶을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신명기 28장의 그 내용들이 니네 율법 잘 지켜~ 그럼 복 주게~ 이 내용이에요? 그게요? 아니 니들은 이 세상서 율법의 저주, 그 저주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삶을 살게 될 거야~ 그거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냉장고에 그냥 바리바리 붙여 놓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한 길로 들어왔다 일곱 길로 도망가고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될~ 이게 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목록이거든요. 꿈도 야무져~ 하여튼. 그거 여러분 냉장고에 적어 놓는다는 건 나 예수 안 믿고 이 땅에서 복 받고 지옥 갈 테니까. 하나님 나 지옥 보내세요.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그거 지우세요. 가서. 떼어 버리세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이 땅에 육을 살찌우는 삶을 살게 되면 절대 하나님 나라 못 들어가요. 저주 받아 죽어야 들어간다니까요. 여러분 안에서도 율법이 완전케 이루어진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 죽었습니다. 그러고 가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 저주를 몸으로 받아 내면서 육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라는 목적으로 주신 게 맞는 거예요. 은혜 붙들어라~ 예수 믿어라~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어라~ 다른 거 없다. 예수 믿어라~ 말씀 전체가 율법과 선지자 말씀 전체가 다 그 의미로 주어진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에 대해서 기록한 거라면 신약은 더할 나위 없죠.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 육을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그 육을 매다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 말씀이 완료로 침노해 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역시 십자가에 매달리는 삶으로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 법에 의해 끌려가는 삶. 이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열심히 죽으시고 열심히 부정당하세요. 그게 마음의 새로운 법, 성령을 받은 이들의 삶인 거예요. 그 삶 속에서 아 경건하고 싶다. 깨끗하고 싶다. 거룩하고 싶다. 지향성이 나와요. 왜 안 나옵니까? 그게요. 반드시 나와요. ? 예수를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그 분께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 분이 그렇게 미워하신 죄가 우리에게도 지긋지긋해야 되는 거예요. 사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마음도 없고 이젠 망고 땡이다. 맘대로 살아야지. 여기서만 머물 수 있냐고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지향성 그 안에서 또 나는 왜 이러지~ 이렇게 또 절망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살면 불행할 수밖에 없어 아니야 예수가 이끄는 삶을 살 거야~ 또 가보기도 하고, 이렇게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그냥 결국 마지막에 예수 만나서 그냥 하나님과 예수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대단한 걸 기대하지도 마시고 잘 끌려가면서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S>~ <�@n�@ �� span >. 헌금 내역이 이게 뭐야~ 집사가 장로가 십일조도 안 해 뭐 이러면서. 그 사랑, 예수로 완료된 율법 그래서 ‘노모스’ 법이라고 하잖아요. 그거는 자유케 하는 법이에요. 율법, 야고보서에 나오는, 새로운 법, 은혜의 법이란 말이에요. ‘노모스’ 그 법아래 있는 자들은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제 망고땡이네. 막 살아도 되겠네. 이게 아니라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삶을 다 맡겨 놨으면 어떡할 뻔 했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예수가 이렇게 이루어주셨대~ 사랑하시란 말이에요. 그게 말씀이 있는 자들이 삶인 거예요. 선악 구조하에서의 자신의 신분이나 성숙의 정도나 소유의 다소 등에 따라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그 사랑이신 예수 아들이신 예수를 아는 자들의 삶, 그걸 천국이라고 그래요.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자유인 거예요.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자유.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아들로 완성하시러 오신 거예요. 이렇게 유한과 무한의 화해를 위해서 사랑으로의 소통을 위해 예수가 오셨어요. 하나님이시며 인간, 하늘과 땅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 하늘과 땅으로 오신 공생애 사는 예수가 첫째 예수가 죽어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완료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사라질 때까지~ 에요. 하늘과 땅이 사라지면 사라질 때까지 율법과 선지자 일점 일획이 완료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은 다 완성된다. 라고 이제 개역성경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을 해놨지만 그게 그 얘기란 말이에요. 천지, 예수가 죽어야 율법이 완성된다. 그 이야기. 그 일점 일획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기도하겠습니다.

 

sty_�Amo@ �� t-size:10.0pt;line-height:160%;font-family:"바탕","serif"; mso-bidi-font-family:굴림;color:black;mso-font-kerning:0pt'>지금 마음이 청결한 자가 이제 하나님을 볼 것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 그래요. 그런데 그 선의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그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시편 73편이에요. 그런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어요. 어떻게 하나님 모르는 저들은 죽을 때도 때깔이 곱게 죽고, 고통이 없이 죽고 어떻게 돈을 안 벌려고 해도 저렇게 더 많이 벌고 살이 쪄서 눈알이 다 튀어나오나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나는 뭡니까? 아침마다 징책이요. 종일 재앙입니다.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행하는 여호와의 선입니까? 나중에 아삽이 알죠. 이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 행함이 맞네요. 그걸 하나님을 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요동하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현실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들 속에서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되죠? 그게 베드로의 이야기에요. 의심하는 자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전혀 안 흔들린다는 말이 아니에요.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지금 만들어 가고 계시다. 라는 뜻이지 전혀 흔들리시면 안 돼요. 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조금씩 거기에서 요동치 않게 된다고요. 시편 46 1절 보세요.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땅과 바다는, 역사 속의 땅과 바다는 흉흉하고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은 자들은 그것과 함께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뿌리박고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 피난처가 나거든. 이미 너는 방주인 내 속에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그게 너를 절대 못 죽여~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요. 너를 보지 말고 네 현실을 보지 마~ 그거 보면 사망의 물에 빠지게 되어 있어~ 그거 이겨보겠다고 네가 애쓴다. 거기서부터 넌 물에 한발씩 빠지기 시작해~ 일단 나를 붙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안 빠져요. 그게 가만히 있어~에요. 우리가 가만히 있음으로 하나님이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는 거예요. 이게 역사의 목적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애써서 헤엄쳐서 가나안으로 건너가는 거 이거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이 열방과 세계 중에 높임을 받는 그 자리에 쓰임 받으셔야 되요. 여러분은. 그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진짜 마음이 청결했던 분은 누구 하나에요? 예수님이죠. 그 분은 하나님의 뜻만 보고 쫓아가신 분이에요. 두 마음 품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 있으셨어요. 오로지 한 곳만 바라봤어요. 아버지의 영광. 그게 청결한 마음이에요.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조차 아버지의 뜻을 보신 분이에요. ~ 이게 아버지의 뜻이군요. 아버지 이렇게 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자녀 삼으시는 아버지의 그 놀라운 지혜와 언약의 성취와 능력과 영광과 긍휼과 사랑이 이 안에 들어있는 거군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게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4 9절 보세요.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을 보는 건 예수를 알아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거란 말이에요. 그 예수가 우리의 모든 복을 완료하여 수여하셨다. 라는 거. 그게 믿어질 때에 우리의 역사 속 환경이나 현실은 그렇게 큰 무게로 우리를 누르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그 마음.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난 예수 안 믿으면 큰일 날 존재구나. 이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예수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렇잖아요. 안 되죠? . 신앙생활이 뭐 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를 붙드세요.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다 끝났는데 계속 못 알아 듣는 것 같아서 반복을 하는 거예요. 이해가 가시죠? 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