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11 산 위에 잇는 동네를 밝히는 세상에 빛 마태복음 5:14~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7

산상수훈 11 산 위에 잇는 동네를 밝히는 세상에 빛




마태복음 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치 표피적으로만 보면 빛으로 사는 것이 착한 행실을 많이 하는 것 이렇게 보이죠? 우리는 산상수훈 10번째 강의 때 소금과 빛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성도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내야 한다. 라는 그런 식의 권고나 교훈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말씀은 언약 속에 함몰되어 이렇게 끌려가고 있는 성도의 그 필연적 삶, 그 삶이 바로 소금이며 빛인 것이지 소금이 되자. 빛이 되자.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소금언약을 갖고 제가 이제 설명을 해드렸죠. 오늘은 그 빛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드리고 다음 주에 이 빛과 소금의 이야기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지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진술에 의하면 빛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에서 그 빛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죠. 그죠? 예수님이 빛이다. 중요한 구절이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갑니다. 요한복음 1 1절 보세요.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면서 이렇게 뭐 빛, 소금 이런 게 나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빛, 그런 종류의 소금을 이런 걸 떠올리시면 안 돼요. 히브리 사람들이 이걸 들었을 때 일차 수신자가 그들이니까.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를 여러분 알고서 그렇게 하셔야지 그냥, 빛이다. 뭐 소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소금, 썩지 않게 하는 거 뭐 녹아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거, 밝게 비추는 거 뭐 이렇게만 이해하고 계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자 보시다시피 빛은 창조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고, 그 창조주 예수님은 말씀이시래요. 그죠? 그분이 다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말씀이래요. 그리고 생명이래요. ‘죠에’ 생명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말씀, 그 예수는 그 무한의 하나님 그 창조주의 신비를 온전히 대표하는 거예요. 그게 말씀이에요. 그게 예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한이, 유한이 무한을 이해하거나 학습할 수 없어요. 유한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 무한을 이해하거나 감지하거나 보거나 학습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한과 이 무한의 그 간격, 그 담을 거기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 담을 허물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유한이 무한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오신 거예요. 그래서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된 게 성육신이란 말입니다. incarnation’이란 말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무한이 유한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무한과 유한의 그 소통의 문이 열린 거예요. 연합의 문이 열린 거예요.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이고,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렇게 유한의 그 이 현상계에 무한이 내려오게 됐을 때, 그건 빛으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눈에 보이는 이런 빛이 아니라 이 유한의 현상계에 무한의 것이 이렇게 들어왔을 때 그걸 표현 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가 빛밖에 없다. 라는 거예요. , 그래서 그냥 빛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한을 향한 그 깨달음이 이렇게 부재하는, 아니 그 깨달음에 접근조차 불가능한 이 유한의 영역에서 그 무한의 신비가 이렇게 발출이 되는 빛처럼 이렇게 발출이 된다고 그러죠. 빛이 여기서 이렇게 비춰 나가는 걸 발출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이 유한의 영역에서 그 무한의 신비가 이 발출 되는 이 자체가 곧 하나님의 그 신비로서의 이 빛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빛이라고 하는 거지. 이렇게 밝히 비치는 이런 종류의 빛, 레이저 광선 같은 그런 빛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그 무한의 그 신비는 그 묵시의 무한의 신비는 이 창조의 영역을 담보하고 있죠. 담보한다. 라는 건 '반드시 창조를 이루어낸다.'라는 걸 담보한다. 라고 해요. 담보를 잡는다. 라는 말도 있지만 그 담보한다. 라는 말이 확실하게 이 창조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라는 거예요. 그 무한의 신비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그래서 이 무한의 신비는 창조의 영역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죠에’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을 빛이라고도 하고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 빛은 어두움의 영역, 이 땅의 영역인 이 현상계에서 이해 불가의 비밀 ‘무스테리온’ 이죠. 그래서 그 빛이 왔는데 어두움이 이해 못하더라. 받아들이지 않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현상계에서 그 무한의 신비는 이해 불가란 말이에요. 그래서 빛이 무한의 신비가 왔는데 이 어두움, 이 현상계가 육의 세계가 그걸 못 알아먹는 거예요. 이해를 못한다는 거예요. 빛이신 예수, 그 무한의 묵시를 이해할 수 없는 유한의 어두움, 뱀이죠. 그죠? 이 세상은 뼈 속 깊숙이 그 실존의 한계에 이렇게 사로잡혀 버린, 눈에 보이는 거에 이렇게 사로잡혀 버린, 자신의 그 내부의 의지로 그 무한의 생명을 쟁취해 보겠다는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코스모스, 세상인 거예요. 여기는


그래서 빛이 무한의 신비가 오면 이 현상계의 묶인 자들은 그걸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당연히 못 알아 봐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이걸 어떻게 이해하실 거냐는 말이에요. 여러분 성경이 그냥 여러분이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 읽는 수준이라면 그건 아무나 다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세상에게 이렇게 가리워져 있단 말이에요. 아무나 못 알아먹게 만들어 놨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래서 이렇게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 도올 김용옥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문자적인 이해 이게 성경의 이해가 아니란 말이에요. 성도만 이해할 수 있어요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빛이에요? 우린 여전히 현상계에 갇혀 있고 어두움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너희가 세상의 빛이래요. 그 빛은 우리가 본 것처럼 무한의 신비요. 예수그리스도요. 말씀이요. 생명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바로 그 단어를 써서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 이걸 잘 이해하셔야 돼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어구에서 세상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코스모스에요. 이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질서죠? 원래가. 질서 혹은 이 질서 있는 장식, 기구 이런 걸 가리키는 거예요. 질서 있는 기명, 장식.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코스모스는 그냥 세상, 우주 이런 개념이 아니라 순서적이며 체계적이며 체계적인 그 어떤 질서 체계에요. 코스모스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코스모스는 단순한 우주, 세상이 아니고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 세상이 단순히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는 그런 영역과 존재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 코스모스는. 잘 보세요. 지금 산상수훈이 떨어지고 있는 장소가 어디죠? 산이죠? 그러니까 산상수훈이지. 산이란 말이에요. 마태복음 5 1절을 보면 그 산이 어떤 산인지가 나와요. 한 번 보세요.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서 산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호로스’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요. ‘토’ 라고. 그러니까 그 산 아무 산이 아니라 그 산이에요. 어떤 특정한 산이란 말이에요. 왜 마태가 그 산이라고 정관사를 붙여서 표현했을까? 마태는 지금 그 산이 지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이라는 걸 암시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앉아 계신 산은 시온산이란 말이죠. 그 시온산은 뭘 의미하냐면 그 영적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역사 속에서 이해될 때에는 그 시온산 위에 뭐가 있었어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단 말이에요


율법의 시내산으로 이해가 되요. 이게요. 인간들에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에게 묵시의 신비가 내려가면 항상 현상계의 수준으로 이해를 하게 되요. 그래서 시온 산,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세상에서 이해되어질 땐 이 세상의 시온산, 예루살렘, 시내산으로 이해가 되어지는 거예요. 성경에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제가 차차 찾아드릴게요. 그런데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품고 있는 이 은혜의 산, 시온산이 이 율법의 세상에서는 시내산으로 오해되어 진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늘의 은혜를 설명해 주면 전부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 성경을 이 은혜가 가득 적힌 성경을 인간들에게, 현상계의 인간들에게 주니까 전부 도덕과 윤리와 규례와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그 산, 두 가지를 공히 상징하고 있는 지금 그 산이 나오는 거예요. 그 산. 시편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라는 시편 121편인가요? 그런 말이 있죠? 우리의 도움은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는 바로 그 산, 성전이 있는 그 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거기에서 우리의 도움이 오는데 우리는 이 우리의 도움을 그 율법적인 예루살렘이라는 그 산, 시내산으로 이해를 하여 거기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를 진짜 하나님의 백성, 교회가 읽으면 하늘의 예루살렘을 떠 올리지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걸 현상계에 있는 세상이 읽게 되면은 아 저 예루살렘, 저 시온산, 그걸 지켜서 내가 그걸 지킨 보상으로 얻는 유익을 생각하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조금 어렵지만 한번 끝까지 한번 잘 들어 보세요. 갈라디아서 4장으로 가보면 그 내용이 조금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갈라디아서 4 21절 보세요.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어요? 시온산에 있는데, 바울은 시내산이 예루살렘이래요. 그죠? 시온산 위에 있는 거란 말이에요. 예루살렘은. 그런데 사도바울은 시내산이 지금 예루살렘과 같은 데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밑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게 또 나와요. 그러니까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설명하기 위해 땅의 예루살렘을 줬더니, 성전을 줬더니 그걸 현상계 속에서 육적 예루살렘으로 끌어당기는 게 이 인간들의 어두움이란 말이에요. 자 빛이라는 게 뭔지 이제 조금씩, 조금씩 벗겨지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산이 어떤 산인지를 알 수 있는 아주 분명한 키워드가 나오는데 14절 본문 14절로 다시 가보세요.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여기 보시면 ‘산위에 있는 동네’가 나오는데 바로 ‘그 산위에 있는 동네’죠? 그 산, 시온산 위에 있는 동네, 여기서 산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호로스’ 는 그냥 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적 성숙의 의미를 포함함과 동시에 이 드러낸, 발출을 의미하는 그 수직적인 그 내부 세계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해요. 이것은 무한의 신비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호로스’ 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육적인 깨달음, 왜곡된 깨달음, 율법으로 오해된 깨달음을 함께 가리키고 있어요.


이 산, ‘호로스’ 라는 단어가.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의 산과 동네 등은 이 역사 속의 율법적 성전을 가리키기기도 하면서 묵시 속의 완료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이중적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 동네라는 단어를 조금 자세히 보면 더욱 선명해지는데 그 동네라는 단어는 성, 혹은 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라는 단어에요. 영어에도 폴리스 있죠? 그죠? 폴리스에요. 그냥 작은 마을 정도가 아니에요. 산 위에 있는 동네, 산 꼭대기에 있는 뭐 인가 몇 개가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라 도시에요. 성이란 뜻이에요


폴리스. 그 단어가 주격 여성 단수로 쓰여 있는데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격 여성 단수로 쓰여지는 산 위의 폴리스는 예루살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그 산 위의 동네, 폴리스라는 ‘호로스’, ‘토호로스’ 그 폴리스라는 이 어구를 딱 들으면 아 예루살렘 이렇게 알았단 말이에요. 그 단어가 똑같이 나오는 데가 있는데 거기를 보면 더욱 더 확실해지죠?



요한계시록 21 2절 보세요.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이게 폴리스에요. 동네에요. 산 위의 동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묵시 속에 있는 거룩한 성, 산 위의 동네, 새 예루살렘이 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모형으로 그려졌는데 그걸 사람들은 그 산위에 묵시 속의 새 예루살렘으로 못 알아먹는 거예요. 못 알아먹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산 위의 예루살렘이에요. 거기는 그런데 그 성전은 박살나야 되는 거죠. 깨져야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러니까 그 산은 바로 예루살렘이 건설된 시온산을 말하는 거고, 그 시온산 위에 세워진 그 산위의 동네는 예루살렘인 거예요. 그런데 그 히브리서로 가보면요. 그 산위의 동네가 시내산과 이렇게 대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어요



히브리서 12 21.

21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시온산, 하나님의 도성, 새 예루살렘 이런 단어가 같이 나와요. 그런데 그거와 대조되는 게 그 윗 절에서 모세가 이른 산은 어디죠? 시내산이죠? 대조가 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시온산, 하늘의 새 예루살렘, 거기와 시내산이 대조되고 있는데 이 땅의 시온산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알아먹으라고 줬는데,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성을 줬는데, 시내산으로 인식이 되더라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은혜를 설명하면, 예수를 설명하면 항상 율법으로 끌어당기는 이 인간들의 어두움. 제가 이걸 지금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지금 복잡하게 가는 건데, 오랜만에 하려니까 참~ 이거 복잡하네. 이 시간이 익숙치가 않아~ 자 그건 어두움은 절대 빛을 못 알아본다는 걸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 위에 있는 도성이 율법주의의 총화인 예루살렘 성전이에요. 그러니까 산 위의 동네는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이 역사 속 예루살렘, 성전, 옛 성전인 것이며 그 위에서 진짜 하늘의 참 성전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을 설파하고 있는 게 산상수훈인 거예요. 분명히 시온산, 예루살렘인데 인간들은 그걸 시내산, 율법으로 끌어당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진짜 성전이 내려와서 참 답답하다. 참 성전인 나를 설명하려고 새 예루살렘 성전을 줬는데 니들은 여기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구나~ 내가 성전이야 내가 내려왔으니까 이제 확실하게 설명해 주게. 그리고 그 성전, 예루살렘에 앉아서 시온산에 그 산에 앉아서 참 성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그 산, 우리의 인간들에게 피조물들에게 도움을 내려 뿜는 그 산의 참 성전이 옛 성전을 두들겨 부수고 있는 게 산상수훈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야 살인하지 말래 아니 살인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야 형제 보고 라가라고 하는 것까지도 살인이래. 그러니까 우리 형제들에게 이 밥통아 이런 말도 하지 말자. 이렇게 읽으면 이 산상수훈을 완전히 거꾸로 읽는 거예요. 율법을 부수는 게 산상수훈이라니까요. 은혜의 십자가가 율법의 성전을 부수고 있는 형국, 이게 산상수훈이이에요. 성도가 품은 빛에 의해 그 산 위의 동네가 감추어짐이 없이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된다. 라고 이렇게 말씀 하시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 빛에 의해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거기에는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우’ 라는 단어가 쓰였거든요. 그러니까 반드시 들어난다. 는 거예요. 절대로 숨기지 못하는 거예요. 뭐가요? 역사 속 그 산위의 동네, 살짝 감추고 있는 이 하늘의 예루살렘인 척, 진짜 성전인척 하고 있는 산 위의 동네가 확 드러남과 동시에 진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새 예루살렘, 그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실체가 우리의 안에 있는 빛에 의해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 빛에 의해 너희 안에 들어있는 그 빛에 의해 이 율법주의의 예루살렘의 실체가 폭로되고 그 안에 감추어 둔 진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 되게 될 것이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 안에 있는 빛이 무엇인가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옛 성전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 세상은 코스모스라고 했죠. 그 코스모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코스모스는 순서적이며 체계적인 질서를 이야기 한다고 그랬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 옛 성전에 앉아서 율법주의의 총화 그 자리에 앉아서 질서, 코스모스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서, 코스모스가 체계적이며 차서적이며 질서의 것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뭐에요? 차서가 있고, 질서가 있고 규격이 있고 한 율법인 거예요. 코스모스. 그래서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에서 코스모스의 빛이라고 한 것은 뭐냐면 너희가 바로 이 율법주의 안에 어떤 빛의 역할로 살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이 육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 안의 빛이신 새 생명이 들어오죠? 그것처럼, 이게 옛 성전이란 말이에요. 사실은. 우리의 육이. 어떤 말씀을 받아도 항상 인간 중심이며 인본주의이며 그리고 규례와 명령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는 이 몸뚱아리. 지금도 그렇잖아요. 이거. 괜히 두려워지고 불안하고 그 안에 ‘빛을 가진 자’ 라는 말도 되지만 온 세상이 전부 율법으로 흘러가죠? 그죠? 인본주의이며 율법주의잖아요.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이 구축해 가는 게 역사이며 인생이니까 그 속에서 빛이 뭔가를 드러내는 자로 택함 받은 자가 우리라는 뜻이에요. . 그러니까 내 안에서 먼저 이 옛 성전 안에서의 빛을 가진 자로 나는 뭔가를 체율하고 경험하게 되고 또 이 역사 속에서 온 세상이 다 율법으로 흘러가잖아요. 그죠? 이게 코스모스에요. 그러니까 코스모스 이 세상은 율법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되요. 그 안에서 어떤 빛으로 존재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빛이 뭐였냐면 예수, 생명, 무한의 신비 이런 거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이 세상 속에서 육을 입고 있으면서 바로 그 예수가 누구인지, 왜 이 세상은 그 빛에 의해서만 창조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 빛 안에만 생명이 있는지를 들어내고 교훈하고 전이하고 하는 이런 삶을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코스모스, 율법 안에 빛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너무 쉽게만 공부를 했었는데 세상의 빛 그러면 그냥 그래 빛이 되어서, 등불 되어서 훤히 비추어 주자. 이렇게만 배웠는데 이렇게 설명해 주니까 너무 어렵죠? 그런데 이런 거 몇 개만 여러분이 이렇게 제대로 숙지를 해 놓으면은 또 다른 성경들의 여러 부분이 명쾌하게 잘 풀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렵다고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잘 들어보시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코스모스 안에, 율법 안에, 세상 안에 빛을 품게 되는 성도가 어떻게 그 가짜 산 위에 동네를 폭로해 내고 진짜 산 위의 동네를 증명해지는지 한번 보자는 말이에요. 여러분 구약의 옛 성전을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뭐 남자의 뜰, 이렇게 뜰을 지나요. 마당을 지나면 번제단, 물두멍, 성소 그 안에 등대, 향단, 떡상, 휘장, 그 안에 들어가면 법궤, 증거궤 이렇게 차서와 순서가 있어요. 이게 다 예수그리스도를 순서적으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예수로 못 이해하고, 못 알아먹는 거, 못 풀어내는 거, 이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이걸 세상, 코스모스라고 한단 말이죠. 자 이게 다 예수를 설명하는 건데 무한의 신비가 하늘의 묵시, 말씀이 이 땅에 내려왔는데 사람들이 그걸 그냥 질서, 규범, 코스모스로 이해하고 있을 때 그 안에 이걸 반드시 이렇게 폭로시키고 증명해내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게 빛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막, 성전 안에 빛이 있죠? 뭐에요? 그게. 등대잖아요. 성소 안의 등대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제가 지금 그 빛을 이 등대와 연결을 시켜서 계시록까지 끌고 갈 거예요. 한번 보세요. 성전 안에 절대 꺼져서는 안 되는 빛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이걸 꺼뜨리면 큰일 나는 거예요. 그게 등대에요. 우리가 바로 그 옛 성전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로 활활 타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세상의 빛이 의미하는 바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으로 가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세상의 빛, 그 성전, 코스모스, 율법 안의 등대가 무엇인지 잘 나타냈어요. 한번 보세요



계시록 1 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러분 성전 안에 있는 촛대가 일곱 촛대에요. 금 한 달란트로 쳐서 일곱 개로 만들어요. 그래서 등경 위에다가 이렇게 둔단 말이에요. 등잔을. 대접에다가 기름을 놓고 심지를 놓고 등경위에 이렇게 올려놓는 게 성소, 성전 안의 촛대란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지금 이렇게 하는데 뭐라고 그러냐면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뭐라고요? 일곱 교회다. 일곱 교회라는 건 일곱 개의 교회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완전한 묵시 속의 교회, 완성되어 있는 교회라고 해서 칠(7)을 써서 일곱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등불, 촛대가 교회에요. 그렇다면 그 산 위의 그 동네 즉 예루살렘 성전 그 코스모스의 빛으로 살아가게 되는 그 성도의 실존 어떻게 우리는 이 율법주의 안에서 빛으로 독야청청, 온 세상의 교회가 전부 인본과 율법으로 손에 손을 잡고 흘러가고 있죠? 지금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속에서 코스모스 속에 빛으로 존재할 수 있죠? 스스로 안 돼요. 은혜로 되는 거예요. 그것이요. 그래서 지금 산상수훈, 은혜의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율법적 강박이나 강요를 요구하는 것처럼 너희는 세상의 빛이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살인하지 말어~ 간음하지 말어~ 뭐 이런 게 나오는 거거든요. 그걸 그 문자 그대로 이해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게 은혜로 가능해 진다라는 걸 보여주는 게 산상수훈이란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성전 안의 등대가 일곱 등대고 그게 일곱 교회라고 하면서 또 그걸 뭐라고 그러냐면 일곱 영, 이게 뭐에요? 완전한, 온전한 성령, 성령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 보세요. 계시록 4 5.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성령이죠? 분명히.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율법 안에서 독야청청, , 예수, 생명을 증거하고 그 생명을 흥하게 하기 위해 쇠하는 그 일곱 등대가 교회라매, 또 그걸 성령이라고 그러죠. 그러면 성령과 교회는 반드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성령이 없이 교회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교회를 위해 성령이 내려오는 거란 말입니다.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거는요. 계시록 5 6절 보세요.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누구에요? 예수죠?)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점점 명쾌해지고 있어요. 성령이래요. 그런데 그 성령이 뭐냐면 예수그리스도의 영이래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영은 반드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나타내고 설명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 일곱 교회, 천상의 교회가 존재하고 유지되는 거고요. 지금 그렇게 연결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일곱 등대, 즉 성전안의 빛은 말씀의 본체이시며 빛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이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품은 교회란 말이에요. 왜 교회라는 자체가 예수를 머리로 한 예수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개별적 자아를 차압당하는 거예요. 예수가 머리이기 때문에 예수란 말이에요. 여러분도 예수에요. 뭐 이만희나 이런 사람처럼 내가 메시아다. 이게 아니라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놓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예수만 하나님이 받아요. 그 예수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나무가 서 있죠? 나중에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까 나무가 서 있는데 그 나무가 뭐라고 그래요. 생명나무에요. 선악과나무는 없어졌어요. 생명나무,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를 식양대로 이 모형으로 만든 게 성전이었으니까 그러면 그 성전 안에 나무 모양이 촛대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잎사귀, 뭐 나무, 줄기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일곱 줄기 이렇게. 그러면 그 등대는 뭐에요? 등잔은? 생명나무, 예수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예수그리스도가 지성소 밖으로 나와 있는 건 그 예수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바로 우리 역사 속, 현상계 속의 우리를 구원하는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무가 밖에 나와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그 예수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를 가리켜 일곱 등잔은 일곱 교회다.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란 말이에요. 예수가 되어, 장자가 되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제가 그거는 다음주에 열 두 아들의 이름을 갖고 어떻게 우리가 아들이 되는지를 설명할 거예요. 오늘 할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다음 주로 미룰게요. 그리스도를 머리를 하여 연합된 교회의 모습, 이게 일곱 등잔, 일곱 등대, 일곱 촛대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일곱 영이 일곱 눈이라고 그래요. 일곱 눈은 어디서 봤어요. 여러분. 스가랴서에 나오잖아요. 스가랴서 4 2절 보세요.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또 나와요.)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이게 대접이에요.)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대접)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등대가 환상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그 등대가 뭡니까? 라고 물어 봤더니 천사가 대답은 안 해주고 이는 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시는 거래요. 등대를요. 등대의 불, 그 빛은 너희들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의해 붙는 거라는 거예요. 빛이 난다. 라는 거예요.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여호와의 눈, 요한계시록에도 여호와의 눈 나와요. 그리고 일곱 등대, 일곱 영 막 나온단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읽으신 스가랴서의 4장 내용은 스가랴가 본 환상이죠. 스가랴에는 총 7개의 환상이 나오죠? 일곱 하면 무조건 하나님 나라, 창조의 수, 떠올리시면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완성 되는지를 일곱 환상으로 보여준 게 스가랴란 말입니다. 그 중에 다섯 번째 환상이란 말입니다. 그 환상은 천상의 하나님 나라, 성전을 그려내면서 그 참 성전이 지어져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거룩한 나라로 부름을 받은 우리를 가리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이 일곱 환상이며 그게 하나님 나라의 완료에요.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어요. 등대에 일곱 촛대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감람나무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 들어서 불이 안 꺼지는 거예요. 등대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밖에서 기름이 계속 공급이 되는 거예요. 그 스가랴가 이게 뭡니까? 이게 교회라고 그랬잖아요. 이게 하나님 나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나라가 어떻게 유지가 되냐면 성령에 의해 기름이 계속 공급이 되므로 말미암아 이 빛이 계속 살아 있는 거죠. 기름이 차단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거는 안 되는 거예요. 교회 존재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기름이 계속 공급이 되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현상계, 역사 속에서의 힘, 가치, 능력으로 그게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의해 계속 공급이 된다. 라는 그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는 성전은 이렇게 완성이 되는 거다. 를 보여주는 게 이 환상이란 말입니다.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이 나오는데 이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이번 주 주일날 이제 에스겔서 살펴 볼텐데 거기에 보면은 여호야긴, 히드기야, 이런 이제 유대의 마지막 왕들이 나와요. 그 여호야긴의 손자에요. 스룹바벨이. 왕족이에요. 그러니까. 이 스룹바벨이 이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같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때 당시에는 굉장히 힘들었을 때였어요. 그래갖고 여기저기서 그 성전을 재건하는 데 굉장히 방해가 있었고 심지어 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성전을 짓는데 와갖고 막 시체를 뿌려놓고 방해를 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 이 상황에서 이 성전이 재건이 될까? 스가랴가 그랬겠죠? BC520년부터 활동했던 선지자이니까. BC515, BC516 뭐 그 때에 성전이 완성됐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이 성전이 완성 될까? 그 때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보여 준 거예요. 성전은 너희의 능과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신, 하나님이 하시는 거야. 어떻게? 성령을 부어서. 기름으로 부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무튼 이렇게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참 성전인 교회를 완성해 내시는 예수의 모형으로 서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이 스룹바벨이. 그렇게 성령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성령으로 완성이 되는 교회에 대한 묘사가 이 스가랴서 4장의 다섯 번째 환상인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 이야기란 말이에요.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거야. 그렇게 그 일곱 촛대의 불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모든 역사 속 교회 여러분을 상징하는 건데 그래서 빛이라는 거예요. . 그러한 구원의 사역이 끝나고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서 모든 건 그리스도로 시작되어 그리스도로 끝나는 거야. 이게 이제 교회에게 성령의 기름이 막 공급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어느 시점에 이 역사에 종국이 와요. 결말이 온다고요. 그러면 그때는 이제 더 이상 이 성령의 기름이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막 들어내고 이럴 필요가 없어요. 이제 끝이니까.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되요? 일곱 주발, 일곱 대접의 기름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재앙이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끝인 거예요. 계시록 16 1절 보세요.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이 기름 쏟아 버리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역사는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늘의 참 빛인 예수 안에서 정말 그 묵시, 무한의 그 신비로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그냥 영원히 빛으로. 이 역사 속에서는 성령과 함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증거하고 드러내고 전이하는 그런 빛으로 존재하게 됐지만 이제는 그게 필요 없고 진짜 빛으로 연합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우리는요. 묵시 안에서.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곱 대접이 쏟아지므로 모든 재앙이 다 끝나버리고 이제 끝나는 거예요. 역사는 두루마리처럼 휙 말려 올라간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갔다는 건 그 묵시가 쭉 펴지면 역사 속에서 그 두루마리가 쭉 펴진 게 역사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중에 이게 두루마리처럼 휙 말려 올라간다는 건 이 역사는 묵시를 펼친 거라는 뜻이잖아요. 그죠? 그럼 보자고요.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탄생시키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보냈어요. 그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은 이 땅에 내려와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설명하고 교훈해요. 그죠? 그 성령은. 요한복음 15 26절 보세요.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이게 일곱 영, 일곱 촛대죠.)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그러니까 일곱 촛대, 그 성령의 기름을 부음 받아 성령과 함께 일곱 촛대로 등대로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뭘 해야 된다? 예수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하고 나의 어떤 가치와 자존심을 챙기는 게 아니라 예수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 코스모스의 빛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데 빛으로 살기 싫잖아요. 우리. 우리는 나를 증거하고 나를 자랑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을 해 놨기 때문에 그 우리의 뜻이 관철이 안 돼요.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은 니네는 죽었다. 라는 뜻이지 빛으로 잘 살아 내면은 내가 상 주게.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의 빛은 예수라는 말씀, 그 은혜의 복음을 간직한 채, 율법 아래의 그 아담들 열 두 지파 모두를 그렇게 심판해 버리는 이 성도의 실존, 여러분이 지금 빛으로 살고 계시는 거예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빛을 비추어서 뭐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이게 빛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예수 없으면 우리는 쓰레기네요. 이렇게 증명해 내는 게 빛으로 사는 거예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이라 그랬어요. 그죠? 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성령이요. 생명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으로 이렇게 공급을 받아서 아~ 맞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맞아~ 이렇게. , 말씀에 의해 그걸 깨달아 알게 되고 그래야 그게 빛을 가진 자에요. 그리고 그렇게 내가 그걸 증명하고 전이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요. 온 세상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두움의 영역의 관점으로 규례와 법도 정도로 표피적 해석을 하고 있는 반면에 진짜 교회는 참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서 독야청청 그 말씀을 예수로 비추게 되는 거예요. 그 등대의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다고 그랬어요. 그걸 성령이라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기름. 교회는 성령이 오심으로 탄생이 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와 충만을 받아 존재하게 된다는 걸 묘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름이 어떻게 공급된다고요? 말씀,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랬으니까 말씀. 어떤 말씀? 예수와 은혜로 결론 나는 말씀. 다른 말씀 아니에요. 그거는 가짜 휘발유에요. 등대 다 버리는 거. 그리고 그 성령은 곧 말씀인 거고. 그러니까 올바른 성경의 이해, 올바른 말씀의 선포가 없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교회에요. 기름이 안부어지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거는 가짜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사이비 교회. 그런데 말씀이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로 결론 나는 생명의 말씀, 그러니까 예수와 은혜, 십자가로 결론이 나지 않는 그 어떤 듣기 좋은 화려하고 유창한 설교도 다 허황된 꾕과리 소리 같은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했던 그 슬기로운 다섯 처녀 그들의 기름은 누가 공급해 준 거예요. 하나님이 공급해 준 거예요. 그래서 그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꼴이 같이 졸고 있는 모습으로. 그들의 됨됨이나 자격을 근거로 그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기름을 마련한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이 같이 자고 있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성경이 기름을 부어서 그 기름 부은 자만 문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 닫아 버리는 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가 되자. 기름을 준비하자. 또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보세요. 하늘의 새 예루살렘, 참 성전의 내용을 메시지를 던졌더니 그거 갖고 또 율법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기름을 준비하자. 잠을 자지 말자. 깨어 있자. 이렇게. 성령의 기름이 차단이 되면 그냥 그걸로 사망이에요. 그래서 기름이 있는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 바로 밑에 어떤 비유가 붙어 있어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비유 밑에 한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붙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 안의 등대는 금 한 달란트로 만드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달란트에 비유에서 그 달란트가 뭐에요? 금 한 달란트가 나오잖아요. 거기서. 그렇게 이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등불, 등대가 나오고 그리고 그건 하나님이 은혜로 부어준 거다. 라는 결론을 지은 다음에 달란트의 비유를 붙여서 더욱 더 강화시켜 주는 거예요. 그 내용을요. 출애굽기 25장을 보면 그 등대를 만드는 식양이 나오는데 그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로 쳐서 만들어야 되요. 그 정금은 당시에 빛을 상징하는 거였기 때문에 정금으로 만드는 거예요. 빛인 등대를 금으로 만든 거예요. 이게 빛이다. 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그런데 이 촛대에는 1 365일 하루 24시간 항상 기름이 공급이 되어야 되고 불이 꺼지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레위기 24 1절 보세요.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찌며

(기름은 감람나무를 찧어서 낸 기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로 예수로 찧어져 죽어서 공급되는 기름이에요. 성령의 기름이란 말이죠.)

3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찌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찌니라

옛날에는 제사장들이 계속 기름을 갖다가 부어야 됐는데 이제는 예수가 죽고 그 예수의 기름이 성령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계속 공급이 되는 그런 시대가 된 거, 은혜의 시대가 된 거란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시온산의 위의 동네, 그 육적 예루살렘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했을 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요. 아 우리의 성전 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된 게 아니라 성령,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으로 거저 우리에게 주어진 거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이 찬양 받으셔야 되지 그 앞에서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어떤 가치라든지 개별적 자아는 이렇게 부정당해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되겠죠. 그게 세상의 빛으로 사는 거예요. 율법주의자들은 인본주의자들은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우리가 기여를 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그 코스모스 안의 빛들은 아니야~ 빛이신 예수가 그 말씀이 그 묵시의 신비가 우리에게 거저 뚫고 들어와 관입되어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가 살아난 거지, 절대로 우리의 힘과 우리의 가능성과 열심과 노력과 자격과 조건, 됨됨이가 거기에 어떤 기여를 한 게 아니다. 이거를 우리는 고백하게 되고 먼저 내가 고백하게 되고 그걸 다른 이들에게 말로 또 삶으로 또 전이시키게 되요. 약할 때 강함 되는 그 원리로. 그러니까 그렇게 살기 싫어요. 그래서 그 촛대가 이 역사 속에서 볼 때는 활활 타오르는 게 아니라 이 코스모스 안에서 꺼지는 밟혀 죽는 모양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계시록에. 계시록 11 3절 보세요.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그러니까 일곱 교회는 일곱 등잔은 이제 천상의 완료된 묵시속의 하나님 나라,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여기서 두 촛대라는 건 이 역사 속에서 증인으로서의 복음의 전이자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에는 증인은 항상 둘이어야 되니까. 그 촛대에요. 그냥. 그 촛대. 두 촛대인데)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가 이 코스모스 세상, 율법, 그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 거기에 골고다가 있잖아요. 율법주의에게 맞아 죽었죠. 빛이 꺼진 거예요. 역사 속에서 봤을 때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 육적 예루살렘, 옛 성전에서 너희도 똑같이 그렇게 꺼질 거고, 맞아 죽는다는 뜻이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내 안에서 일을 하신 예수가 드러난다. 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이에요.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이게 좋은 말이 아니에요. 무서운 말이라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게. 그러면 이제 그 한 달란트의 비유가 쉽게 이해가 가겠죠? 주님이 떠나면서 다섯 달란트, 모세오경 율법인 거죠. 주고 가고 두 달란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계실 때,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그 때까지 아직도 구약입니다. 그 때에 그 모세오경 율법을 두 가지로 줄여주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라고 줄여주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조차도 완료가 되고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하나로 주어지죠. 한 달란트인 것이에요. 이것이. 그러니까 한 달란트의 등대로 우리를 만들어 버리는 게 이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22 36절 보세요.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여러분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온 율법이 여기에 매달려 있다. 에요. 원어로 보면은. 그래서 이 둘을 쭉 끌어 올리면 모든 율법이 여기 다 달려 있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그 수많은 613가지, 아니 그거보다 더 세분화된 그 어마어마한 율법, 그 모세오경은 우리는 못 지키죠? 그죠? 당연히 못 지키는 거예요. 그거는. 성경에서도 너희는 못 지킨다고 그랬으니까. 그러면 그 율법을 누가 완성해요.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할 건데, 예수가 완성하죠? 그래서 다섯 달란트는 반드시 다섯 달란트의 수확을 남겨야 되요. ? 성취가 돼야 되요. 누군가가 지켜야 되요. 완성을 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 이 세상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단 하나도 없어요. 예수만 착하고 충성된 종이에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나타나서 다섯 달란트를 갖고 다섯 개를 성취하여 남겨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율법을 쭉 끌어 올렸더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매달려 있네요. 이것도 당연히 지켜야 되는 거죠. 구약이니까.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얘들아 십일조 해라 그런 거예요. 십일조는 십자가에서 자기가 완성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자기가 율법에 오셨기 때문에 그 옛 성전으로 예수가 죽는 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십자기 지시기 전의 예수님은 아직 우리의 신랑의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 옛 성전이 되어서 죽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이 다섯 있었다. 모세오경인 거죠. 이게요. 다섯 있었는데 그것도 네 신랑 아니고 나도 하나도 나도 아직 네 신랑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추수할 때가 오는데 내가 죽고 나서 너에게 생수가 됐을 때 그 때 너는 내 신부가 될 수 있다. 라는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공생애 그 기간 동안에 율법을 두 가지 강령으로 줄여 주셨다고요. 이건 우리가 못 지키는 거예요. 유한이 무한을 못 사랑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유한의 현상계에 있는 우리가 피조물이 무한의 하나님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 할 거예요. 가능해요? 이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오냐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라고 하는 그 이야기인데 이건 제가 다음 주 자세히 설명해 드릴텐데 이걸 누가 지켰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 땅에 ‘모노게네스’ 독생자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그 사랑 하나를 가진 자로 이 땅으로 오신 예수가 내 자기의 이웃을 그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봤잖아요. 누가 내 예수입니까? 내가 사랑해 버릴게요. 그랬을 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 강도만난 이웃을 사랑한 진짜 이웃은 예수밖에 없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예수가 두 번째, 이 두 달란트도 성취해 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두 달란트를 남긴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는 한 달란트로 우리 안에 온 거예요. 빛으로 온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육을 갖고 있어요. 어떤 빛이냐면 코스모스 안의 빛이란 말이에요. 세상의 빛이란 말이에요. 육을 갖고 있는 이 안의 빛을 가진 그런 불완전한 존재에요. 아직. 묵시 속에서는 완료가 되어 있지만 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 빛을 증거를 해야 되는데 이게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이 육이 이 코스모스가 자꾸 이 어두움으로에의 퇴행으로 나를 끌고 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게 잘 이해도 안 돼, . 그러니까 자꾸 그 빛, 한 달란트를 감추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잖아요. 오죽하면 저 같은 사람이 자꾸 지리산에 들어가려고 그러겠어요. 감추려고 하는 거예요. 인터넷을 다 끊어버리든지 뭐 이거~ 이것만 없으면 나 편안하게 할 수 있어요. 진짜. 인터넷만 없으면. 싹 없애버려야 되는데 이거. 이 착한 사람들, 이 사람들 하고만 이렇게 아~ 왜 인터넷까지 열어놔 갖고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 욕을 먹어야 되냐고. 감추고 싶어요. 숨겨 두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야~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못 감추게 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감춰둔 놈은 나중에 쫓아내 버려서 이를 갈게 하겠다. 라는 건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쫓겨날 일이 없어요. 못 감추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그 빛, 내안에 들어온 성령, 예수, 그 생명 이걸 전이하고 증거 해야 되요. 이 사랑이신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 예수가 나에게서 내 입이나 삶을 통해 이렇게 다른 이에게 전이 되는 게 사랑하는 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살짝 숨어서 감추고 조금 세상 속에 스며들어 편안하게 살고 싶은데 자꾸 하나님이 들춰내시는 거예요. 못 감추게. 주님이 뭐라고 그래요. ~ 그렇게 감춰둘 거면 별리라도 좀 갖고 와라 네가 못 전할 거면 데리고 와서 듣게라도 좀 해라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빛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이렇게 죽고 있는 거예요. 매 순간, 매 순간 죽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확 뒈져버렸으면 좋겠는데 성령이 기름을 계속 공급해 주네. 꺼뜨리지도 않아~ 그러면 어떡해요. 계속 비춰야 되는데 비추는 건 죽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날이 있어요. 그게 이 땅과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현상계가 사라져 버리는 그 때에요. 그 때는 여러분도 완성되는 거거든요. 그 때까지는 계속 예수만 증거 해야 되요. 여러분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게 가는 게 맞는 거예요. 여러분. 열심히 가세요. 저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 있잖아요. 열심히 가지 않습니까. 살아 계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