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09 핍박도 복인가 마태복음 5:10~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5

산상수훈 09 핍박도 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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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0~12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이제 산상수훈 중 팔복이라 일컬어지는 부분의 마지막 대목에 당도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에서 시작 된 예수님의 말씀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로 끝나요


샌드위치로 싸여 있죠? 그죠? 이러한 샌드위치식 문학 기법은 히브리 사람들의 대표적인 수사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국 개역 성경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 부분이 헬라어로 ‘에스틴 헤 바실레아 톤 우라논’ 인데요. 거기에 쓰인 동사 ‘에스틴’이 ‘is’ 거든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너희가 천국이다’ 에요. 이게 너희 것이다. 가 아니라 원래 직역을 하면 ‘너희가 천국이다’ 에요. is’ 에요


천국,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너희가 천국이다. 라는 그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데 어떤 통치를 받아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 했죠. 일곱 개가 다 뭐였어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복 갖지 않은 그런 복. 역사 속 성도의 현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의 모습이다. 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천국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한 역사 속 성도들의 현실이 너희가 천국이다. 라는 어구로 샌드위치처럼 싸여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안의 것들이 다 그 안에 녹아 들어가는 거란 말이죠. 그 말은 하늘나라 백성은 하늘의 계획과 통치에 의해서 탄생하여 하늘의 통치로 살아가는 자들로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이 되어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런 역사 속 현실, 인간들이 도저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러한 역사 속 현실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라는 걸 그 단락의 구조로 먼저 보여 주는 거예요


너희들이 천국이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완전하게 장악된 자들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게 나는 줄 아냐?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한 자로,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로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이 팔복 강화는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들의 역사 속 현실에 대한 친절한 지침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도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그러지 않을 거 아니에요. 거기에서는 완료된 상태니까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선물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도 천국을 살아야 되는데 그 천국의 삶의 원리가 이 세상의 삶의 원리와 완전히 다른 그런 원리이기 때문에 복을 받은 성도들이 자칫 실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오해할 수 있는 그들이 역사 속, 삶의 양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이 이 산상수훈의 팔복 강화란 말이에요


묵시 속 천국과 역사 속 세상이 오버랩 되어 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런 이상한 세상이 온 거죠 지금. 묵시 속 천국과 이 역사 속 세상이 오버랩이 되어 있는 이 신비한 세상을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깨달아서 자기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선이 전혀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심령의 가난이라는 현실을 경험하게 되고 그게 심령의 가난이었죠


그로 말미암아 애통하게 되며. 왜? 

내가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애통하게 되면 거기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그 과정 속에서의 그 온유라는 그 지향성을 갖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나는 절대 가망이 없는 존재라는 그런 주림과 목마름이 현상으로 나타나고 점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가치들에게서 마음이 돌려지게 되어서 청결하게 한 곳으로 수렴이 되는 새 마음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며, (지금 제가 요약해 드리는 거예요. 그 동안 한 거.) 그렇게 내 안의 우상들이 하나하나 허상들로 인식이 되고 고백이 되어 지면서 하나님과의 이제 화목이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이거는 마치 구원의 서정처럼 역사 속에서 순서와 차례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겪게 되는 천국 백성의 세상 속 천국살이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전체의 내용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으로 묶어 내시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그렇게 팔복의 결론이면서 전체의 요약이기도 해요. 그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내가 부정되고 부인되는 현상이잖아요. 그 여덟 개가 전부 그런 거였죠? 그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모습이에요. 역사 속에서. 여기에서 


핍박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오코’ 는요. 두들겨 맞거나 욕을 먹거나 해를 입는 핍박이라기보다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밀려가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에요. '쫓겨 가다. 밀려가다이런 뜻이에요. 그 단어의 수동태란 말이에요. 이거요. 여기에서 쓰인 수동태 동사 ‘데디오그메노이’ 는 추적을 당한다. 쫓겨 가다. 라는 의미가 더 강한 거예요.

따라서 여기에서 쓰인 핍박이라는 단어는 성도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나 욕설이나 위해 행위에 초점이 있다기 보다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 아담들이 추구하는 반대 방향으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더욱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을 모는 목자의 추격을 떠올리시면은 정확하게 그 그림이에요. 그게 ‘디오코’ 에요


물론 박해를 당하다. 라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의미까지 포함을 해서 핍박이라는 것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의를 내리게 되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목적지로 밀려 내려가는 성도의 삶에 나타나게 되는 박해와 미움 받음의 현실, 이 정도가 되겠죠


이 여덟 개의 항목을 성도의 역사 속 현실이라는 그 앞부분과 묵시 현실을 가리키는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이렇게 대조를 해보면요. 성도의 역사 속 현실은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의 여러분의 현실, 천국을 사는 사람들의 현실은 앞부분이죠? 전부. 심령이 가난함,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이에요. 이게 역사 속 현실이죠


그리고 묵시 속 현실은 천국, 위로, 땅, 의로 가득 채워진 배부름, 긍휼,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다시 천국이에요. 그런데 그 천국은 누구? 나죠? 거룩한 성 자체, 하나님의 처소가 바로 ‘나’ 니까 우리 성도니까. 땅도 누구에요? 우리였죠? 제가 설명해 드렸잖아요. 그 땅이 뭔지? 왜 땅을 준다고 그랬는지? 의로 가득 채워진 배부름, 긍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보는 자, 다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완료된 교회의 이야기에요. 그 뒤의 거는 전부 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앞부분은 세상 속 아담 군상들의 존재성이나 주체성이나 욕망이나 이기심을 다 빼앗긴 모습이죠. 빼앗겼을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잖아요. 기고만장하여 살던 사람들이 그런 자기의 자율성이나 주체성, 존재성을 빼앗겼을 때 심령이 가난함으로 내려가게 되잖아요. 어 나는 아니네~ 이렇게


'나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네~' 의에 주리고 목마름

'아~ 내 안에서 왜 죄만 나오지?' 애통

그리고 뒷부분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완료지점 묘사란 말이에요. 그 앞부분 전체를 한 단어로 축약을 했을 때 그걸 핍박이라고 그래요. ‘디오코’ 하나님의 추격, 하나님의 몰고 가심.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 아담 군상들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지리멸렬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 핍박의 현실은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요.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가치 챙기기를 생전의 목적으로 삼아 살게 되죠. 창세전에 복을 받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삽니다. 하늘나라 백성들도 일단은 육을 가진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아담 군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기의 삶을 살게 되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창세전에 복을 받은 이들은 나면서부터 창세전에 받은 그 복을 갖고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복이 어떤 복이냐 하면 천국, 즉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복이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복 있는 자여 너희들은 핍박을 받는 자들인데 너희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그래요. 그런데 어떤 상? 천국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상, , 천국 이게 다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조금만 비워지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꽉 찰 수 있게 비워져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육적 자아 안에 들어 있는 옛 자아가 죽어야 할 자아임을 자각하게 되고 그것이 진심으로 이해되어지는 만큼 그 속에서의 하나님의 자리가 넓어지게 되는 것. 이게 성도의 역사 속, 삶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새 언약에 의하면요. 우리 성도들에게 새 마음이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성령도 함께 주어지죠. 예레미아 31, 에스겔서 36장 그 새 마음이라는 게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하나님만을 찾아가게 되는 그리로 지향되어지게 되는 선한 양심이죠. 그게 새 마음이에요. 선악과 따먹은 그 마음이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이고


그 선한 양심은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임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라고 칭해도 무방해요. 성령이 개입하지 않으면 선한 양심이 있을 수 없으니까. 그 새 마음은 우리 자신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온전히 시행되어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임을 알아요. 성령은 알아요. 당연히. 그래서 그 새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과녁을 돌리려고 그래요. 이 마음의 과녁을 돌리려고 한다고요. 새 마음이


그런데 그 속에 또 다른 법이 바울의 말로 표현하면 또 다른 법이 존재를 해서 기승을 부려요. 그 옛 사람이라는 게 과녁의 이동을 허락하지 않아요. 끝없이 이 육적 자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여서 자아확장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 향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옛 자아가. 그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요. 사도 바울이 그 전쟁을 이렇게 묘사를 해요. 거기서 핍박이 있고 핍박을 당하는 게 뚜렷이 구분이 되요. 내 안에서요. 보세요



로마서 7 22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분명히 이건 창세전에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만 일어나는 전쟁이에요. 그죠? 그런데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새 마음이 헌 마음을 이기도록 돕지 않으세요. 그러죠? 새 마음이 들어와 있다. 라는 건 그 안에 성령이 들어와 있다. 라는 뜻인데 그 성령이 헌 마음이 새 마음이 이기도록 놔두신다니까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어허~ 하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탄식하는 거예요. 지금.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옛 사람이 속사람을 핍박하도록 놔두신단 말이에요.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한탄이 바로 밑에 구절이에요.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게 뭡니까? 이게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이잖아요. 이게. 그리고 뭐에요? 애통이죠. 이것이.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잖아요. 그리고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것. ~ 나에게는 긍휼이 없으면 안 되는구나. 이게 긍휼히 여기는 자잖아요. 자기의 몸이 의에 대하여 죽어 있음을 아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 외부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 그런데 그것이 옛 사람의 속사람 핍박에서 자각이 되더라는 거예요


옛 사람이 내 속사람을 핍박하는 그 와중에 어허~ 나는 곤고한 자가 맞구나~ 이 사망의 몸을 갖고 있는 자가 맞구나~ 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핍박에서. 그러한 자각 속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그것이 뭐라고 그랬어요? 화평이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그리고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라고 그랬죠?


잘 보세요. 자신이 사망의 몸임을 자각하여 탄식을 하던 바울이 다른 말로 옛 사람이 속사람을 막 핍박해서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걸 끊임없이 경험하던 핍박을 받던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심령의 가난을, 애통함을 토로한 다음 어디로 가는지 보세요.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예수께로 간단 말이에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게 마음의 청결이고 하나님과의 화평이에요

그러니까 팔복의 모든 역사 속 현실은 핍박에서 기인하게 되는 거고 

그 핍박은 성도의 내부에서 일차적으로 시작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그 핍박은 성도의 올바른 자아인식에 꼭 필요한 도구인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거고, 

내가 쇠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거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의존으로 오~ 나는 곤고한 몸인데 어떡하지~ 아 예수께서 가야지~ 그러더니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리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에요. 유일한 열매. 예수께로 가라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의 역사 속, 삶에서의 핍박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으로 가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와요



행14 22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천국이에요. 오늘 본문의 그 천국과 똑같은 단어에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에 쓰인 ‘데이’ 라는 동사가 ‘must’ 에요영어의 must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가진 헬라어에요. 데이 must 반드시. 성도가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란, 여기서는 ‘뜰립씨스’ 라고 더 엄청난 단어가 쓰였는데 그 ‘뜰립씨스’ 라는 단어는 쇠판으로 밀어서 곡식의 원형을 깨버리는 으깨 버리는 그런, 그런 쇠판이에요. 요철이 있는 쇠판. 그걸 환란이라고 번역을 하는 거죠. 아예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성도가 그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고 그래요. 하나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 '하나님 나라가 된다.'라는 건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히 장악된다. 라는 건데, 내가 요만큼이라도 살아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밀어버리는 거예요. 곡식을 놓고, 쇠판 위에다 곡식을 놓고 요철이 있는 쇠판으로 위에서 꽉 눌러서 밀어버리는 거. 이걸 핍박이고 그래요. 이걸 ‘뜰립씨스’ 환란이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must 반드시 우리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신명기 31 16절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하나님의 백성이 출애굽하여 지금 홍해를 건넌 상태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하나님이 예언해 주는데, 옛날하고 똑같을 거야~ 그러는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랑 똑같을 거야~ 그러는 거예요.)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다


실제로 들어가서 어떻게 했어요? 똑같았어요. 그게 사사기였잖아요. 열심히 공부했잖아요. 우리. 똑같았어요. 더 엉터리 같았어요. 본질이 안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본성이 안 변하더라는 거예요. 그 엄청난 구원을 경험하고도 가나안은 이미 묵시 속에서 완료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묵시를 함께 살아내야 하는 바로 그 모습을 상징하는 땅이죠.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못산 거잖아요


그러니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지금 이 역사 속에서의 우리의 모습인 거예요. 묵시 속에서 완료 되어 있는 이들이 이 역사 속 땅에서 살면서 여기서 천국을 살잖아요. 가나안도 약속의 땅이었는데 온전한 약속의 땅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그 가나안, 약속의 땅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이방신을 쫓고 새 언약을 어기더라는 거예요. 새 언약을 어기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가치 있게 취급하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게 새 언약이잖아요. 옛 언약은 잘 지켰어요. 거기서도 율법 잘 지키고 제사 열심히 지냈으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몰고 가세요. 그들의 실체를 폭로시킨 후에 재앙과 환락 즉 핍박으로 그들을 부인시켜 가신다는 거예요. 니들의 모습이 이거야~ 라고 그들에게 인식하게 만들어 준다는 거예요. 그렇게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폭로가 되면 성령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만을 붙들게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백성들은, ~ 이거 어떻게 하지~ 아니네. 큰일 났네. 어떤 조처가 있어야 되겠는데. 그런데 말씀 속에서 들려와요. 성령이 내 안에서 말씀하세요. 예수가 너 때문에 죽었어~ 그거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래서 성도의 삶에 내부적 갈등으로서의 핍박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수시로 져요. 안심이 되시죠? 맨날 지고 있었는데 이기는 척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한 성도안의 핍박의 현실은 외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게 되요. 이제 성도의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핍박은 어떤 양태를 갖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 다시 보시면 그 핍박이 왜 하나님 나라의 성도들에게 닥치게 되는 것인지 잘 나타나 있어요. 10절 다시 보세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0절 앞에는 ‘의를 위하여’ 라고 되어 있고 11절 앞에는 ‘나를 인하여’ 라고 되어 있죠? 10절의 ‘의를 위하여’ 라는 어구는 ‘의 때문에’ 에요. ‘의 때문에’ 정확하게 번역하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11절에 의하면 그 의가 누구에요? ‘나를 인하여’ 라고 하니까 그 의는 예수죠? 예수 때문에 핍박 받는 자, 예수가 혼자 성취하고 완료한 그 의 때문에 핍박 받는 자란 뜻이죠. 그러니까. 그런데 그 예수의 의 때문에 왜 핍박이 오냐는 말이에요. 우리에게. 로마서로 가면 그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무엇과 대조가 되어 있는지가 분명히 나와요. 이제 우리가 거의 외우는 부분인데 로마서 3 21절 가보세요.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의에요. 똑같은 단어에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의에요.)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의. 똑같은 의에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 의. 그 의의 대척점에 뭐가 있어요? 율법이 있죠? 지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관계된 이들은 율법으로 인간의 의를 구축해 보겠다고 하는 이들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죠? 율법과 의가 대척점에 있는 거니까. 21절을 보시면 예수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대척점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서 증거를 받은 거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율법의 진위와 선지자들의 전한 바가 전부 예수그리스도였다. 라는 말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그 구원을 찬송하는 이들이 성도들인데 그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수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한다는 거예요. 그게 어떤 형국인지 제가 쉽게 설명을 해드리게요. 여러분 마더 테레사를 아시죠? 평생을 인도의 빈민들과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서 헌신을 하신 분이에요. 그분에 관한 책만, 제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30권이 넘으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산 게요. 어마어마하죠. 그죠? 온 세상이 본받고 싶어 하는 분이잖아요. 의인이죠?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마더 테레사를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마더 테레사에 관한 책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보다 10배를 더 샀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좋아해요. 심지어 그분을 의롭다 칭하고 칭송하죠. 우리는. 칭찬한단 말이에요. 본받아 살자 그렇게 살자. 세상이 칭송하고 세상이 쫓으려고 그래요. 그렇다면 마더 테레사의 의는 성경이 말하는 의가 맞아요? 성경은 분명, 예수님은 분명 의 때문에 의라는 원인이 있으면 너희는 반드시 박해, 핍박이라는 결론을 거두게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마더 테레사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그 의, 우리가 의라고 칭해 주는 그 의는 세상의 칭찬을 받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그 의는 마더 테레사의 의는 아니에요. 그죠? 김수환 추기경은 어때요?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40만 명이 추모를 했는데 그 중에 대부분이 무신론자였고 불교 승려들도 꽤 많았습니다. 온 세상이 칭찬한 거죠. 그 분의 삶을. 청렴하고 가난하고 정직하고 의를 위해서 자기 한 몸을 불사르고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투쟁한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온 세상이 그 분을 칭찬하고 스님들까지도 목탁을 들고 성당 앞에 서서 그 수모를 부끄러움을 감수하며 참배를 한 거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칭찬한 거 아니에요. 무슨 핍박을 받았어요. 누가 핍박했습니까? 그분을. 그렇다면 그 분이 평생 해 오셨던 민주화 운동이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한 헌신은 성경이 말하고 요구하는 의가 아닌 거죠. 성경은 분명 의가 원인이 되면 결과로 핍박이 온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의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의여야 되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의를 인하여, 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러니까. 그 의는 예수와 관계있는 의여야 되요.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거에요. 다른 의는 없어요. 성경에는요. 누가복음으로 가서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보면서 조금 더 제가 부연설명을 해드릴게요. 누가복음 6 26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어떠세요.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세상의 의는 하나님 앞에 화가 있대요. 그러면 누가 그런 칭찬을 받았다고 하세요?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은 자들이 있어요. 누구에요? 거짓 선지자라잖아요. 26절에.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했길래~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을까 한번 보세요. 오죽하면 사도바울도 야~ 내가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을 그렇게 금방 쫓아가니~ 그랬으니까. 초대 교회 때에도 그렇게 쉽게 넘어갔단 말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했길래~ 예레미아 14 12절 보세요.

12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 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13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보시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금식, 기도, 번제, 소제 이게 뭐에요? 율법의 행위에요. 제사, 이것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신다. 라고 가르쳤다. 라는 거예요. 율법주의죠.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식에 엉터리 신앙을 가르쳤다. 는 거예요. 인간이 열심히 한 만큼 하나님은 감동할 거다. 라는 거죠. 다른 말로 거짓 선지자들은 인간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고 인간도 감동시킬 수 있으며 평강까지도 얻어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거라고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추겨 준 거예요. 이게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인간들의 기특하고 선한 행위가 인간들이 원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을 쟁취하는 조건과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칭찬을 해주더라는 거예요. ?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있는 상태거든요. 그런데 누가 하나님 대접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한 행위를 칭찬해 주면서 야~ 이정도면 된 거야~ 이 정도면 평강할 거야~ 라고 거짓 선지자들이 부추겨 주니까 그들의 자존심을 북돋아 주니까 그래 네가 맞아~ 라고 칭찬을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해서 그 행위를 내어 놓는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율법주의를 모든 아담들은 좋아해요. 마치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된 인간의 실존을 확증해 주는 것 같잖아요. 그래 너 하나님처럼 된 거 맞네~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그런 행위가 나와~ 이런 식으로. 그런데 예수님은요.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해서 높아지는 걸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그래요. 보세요. 누가복음 16 15절 보세요.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왜 이런 말들이 붙어 있는지를 생각을 하시면서 읽으셔야 되요. 15절에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라는 어구에서 스스로 옳다하다. 라는 어구를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여기에 의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요. ‘디카이오쑤네’ 인간이 스스로에게 의를 주다. 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자기가 의를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의를 주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의 말고 인간들이 생산해내는 의를 이간 스스로에게 주는 거. 이게 스스로 옳다한다. 라는 뜻이에요.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들에게 의를 주게 되면요. 그들은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 등의 칭호를 받으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의로 높아진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은 요한의 때에 끝났다. 라고 명확하게 거기다가 붙여 주는 거예요. 그건 구약에서 높아지는 방법이었잖아요. 율법 지켜~ 제사 잘 지내~ 착하게 살아~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상 주게~ 이게 구약이었죠.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구약식으로 스스로에게 의를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주게 되면 그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거야~ ? 구약은 요한의 때에 끝났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뭐라고 그러냐면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천국 복음이 전파된다고 그래요. 그 천국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 의로 말미암아 성취된 복음이잖아요. 예수의 의가 중심이 된 복음. 그 후부터는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에 구약의 그런 방법으로는 의를 쟁취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도 그런 모양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 복음, 하나님 나라로 침입해 들어갈려고 하더라~ 가 마지막 부분이에요. 사람이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침입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의 끝없는 자기 자율성 발휘와 집요한 자존심 챙기기를 지적하는 어절이에요. 16절 마지막이. 사람들이 그 하나님 나라 복음도 자신들의 의를 동원하여 침입하려 한다. 라는 거예요. 이게 알매니언주의지 뭐에요? 그러니까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자신들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에 매어 있는 아담들은 항상 사람의 힘으로 자신들을 높이려 하고 자신들의 가치 향상에 의한 그 타인의 칭찬 거기에 목을 매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진짜 가치 있는 삶인 줄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얻어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들까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은 사랑이 없이도 자기 몸을 불사르는 자가 있더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요.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은 그 양심으로, 선악과 따먹은 그 양심으로 의라고 합의해 놓은 것들을 자신의 주관으로 삼아서 거기에 목숨까지 걸면서 투쟁을 하고 헌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람들이에요. 온 세상이 칭찬해 주는 거예요. 그게 아담들의 본성이거든요. 보편적 인간의 가치 평균을 그들이 올려 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개혁과 혁신을 도모하고 있지 않나요? 사회정의와 만민 평등에 기여하는 그리하여 온 세상이 다 칭찬해주는 건강하고 건전한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수선들을 떨죠. 교회가 세상에게 칭찬을 받는 일을 열심히 해서 세상으로부터 야~ 저런 교회라면 나도 다니고 싶다. 라는 평가를 받아내는 게 일견 옳은 전도 방법인 거 같죠. 그게 올바른 교회 만들기인 같죠. 그러면 오늘 본문 같은 구절은 다 찢어버려야 되는 거예요. 당연하잖아요. 하나님은 교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예수의 의를 붙든 교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세상이 다 핍박한다고 그랬는데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은 세상 사람이 다 박수쳐 주고 일간지까지도 칭찬해 주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자는 거죠. 그게 맞습니까? 예수님이 정신이 나가셔서 지금 잘못 이야기 하신 건가요. 예수님은 교회가 진짜 하늘의 의를 추구하면 세상이 전부 짱돌 들고 달려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교회는 온 세상이 다 칭찬해 주는 그런 의를 구축해서 자기들의 천국을 건설하고 있는 거예요. 이청준 선생의 ‘그들만의 천국’ 보셨어요? 천국을 만든다고 하는데 다 자기가 주인공인 거예요. 요한복음 15 18절 보세요.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내 말을 지켰은즉 이 어구는 내 말을 지켰다면 니들 말도 지켰을 것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내말 안 지켰다는 뜻이에요. 지켰은즉 그러니까 뭐 지켰다. 라는 뜻으로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 돼요.)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세상의 성도를 미워하고 핍박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거기 어디에 교회가 교회답게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온 세상이 다 너희를 칭찬할거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의 칭찬 좀 받아내라~ 이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그냥 미워할 것이다. 그게 끝이에요. 열심히 잘 하면 사랑도 해줄 거야~ 가 아니라 미워할 것이다. . 그냥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탄생한 진짜 교회는 무조건 세상이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 하고 끝이에요. 그건 모든 보편적 교회에게 공히 떨어진 견고한 약속이에요. 기독교인들에게 확실하게 약속이 된 단 한 가지 그게 고난이에요. 핍박이에요. 착하게 잘 살면 세상이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면죄부는 어딜 찾아봐도 없어요.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 살수록 핍박이 심해진다고 그래요. 오해하지 마세요. 디모데후서 3 12절 보세요.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게 더 경건해지고자 하는 자는 이란 말이거든요. 더 경건해지면 질수록 세상은 핍박을 하지 칭찬 안 해준다는 뜻이에요. 일반 일간지도 그런 훌륭한 교회들을 칭찬하고 자랑해 줘요. 오늘날 건전한 교회, 건강한 교회라는 곳이 추구하는 그 목적지. 거기에 비스무리하게 가는 교회들은 일간지도 칭찬해 주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세상은 그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핍박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바울이 이야기하는 경건도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경건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지죠. 교회의 경건은 예수의 의만을 높이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걸 성경이 경건이라고 그래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국어사전의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예수의 의만을 높이고 그것만을 붙드는 걸 경건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살수록 세상이 더 핍박한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마태복음 10 22절 보세요.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못하면 세상이 욕을 하고 비난을 한다고 하신 게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이 보내신 역할을 잘 수행해내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교회를 핍박한다고 그래요. 바로 윗 구절 보에요. 2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니들이 내 말대로 잘 살면 그러한 일이 일어난대요. 도대체 성도가 붙들고 살아야 하는 예수님의 의가 무엇이기에 성도는 이렇게 예수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아야 되죠? 아니 정 그러면 12제자 이 12제자는 교회의 모형이에요. 지금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12제자를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으로서 그들이 세상의 핍박에 응전할 수 있도록 어떤 힘이라도 줘서 보내는 게 맞지 않아요? 니들 내 말대로 지금 세상으로 나가면 니들이 어떻게 살던 내 말대로 살면 살수록 핍박을 받게 될텐데 그러니까 이 힘을 주게~ 이래야 맞는 거 아니에요. 보내는 분으로서. 그런데 안줘요. 오히려 이리 같은 세상에 양으로 보내세요. 그리고는 뱀같이 지혜로워라 그래요. 16절 보세요.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아시잖아요.)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건 뱀의 지혜의 다시 넘어가지 않는 자가 되라는 뜻이거든요. 뱀의 지혜가 뭐였어요? ~ 니 자리 벗어나서 하나님처럼 되~였잖아요. 그런데 양으로 이리한테 보내면서 뱀 같이 지혜로워라~ 뱀에게 속지 말아라~ 라는 게 뭐에요? 뱀이 분명 너희에게 니들이 왜 양처럼 이렇게 핍박받고 당해야 돼~ 야 이리가 뭐야 사자가 돼서 물어뜯어 분명히 그럴텐데 거기에 속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지금 양으로 보내면서 하나님이 니들 절대 그 핍박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어 라고 꽉 묶어서 보내는 거예요. 힘을 주는 게 아니라 가서 죽어~ 그렇게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안준 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 능력을 갖고 핍박을 받았을까 한번 고민해 보세요. 마태복음 10 5절 보세요.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능력을 안준 게 아니죠. 병든 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문둥이 깨끗하게 하고 ,귀신 쫓아내는 능력 주셨어요. 그리고 공짜로 다 고쳐주라고 그랬어요. 실제로 했어요. 이 사람들이. 갔다 와가지고 예수님께 막 너스레를 떨잖아요. ~ 진짜 나가대요. 이렇게. 그러면 그들이 칭찬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죠. 죽은 자 살려 줘~ 병 고쳐줘~ 귀신 쫓아내줘~ 문둥이 다 낫게 해줘~ 그런데 왜 핍박을 받냐고요. 왜 핍박을 약속하냐고요. 왜 핍박으로 꽁꽁 묶어서 보내냐고요. 예수님이요. 그건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도 똑같이 일하셨어요. 죽은 자 살리셨고, 문둥이 고치셨고, 병든 자 낫게 했고, 귀신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예수님을 핍박하더니 급기야 가족들까지도 저런 미친놈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가족들이요. 미쳤나보다. 그랬다니까요. 그러더니 온 세상이 합심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어요. 그거 해줬는데 그러니까 제자들이 지금 그 길을 똑같이 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했던 그 능력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준 거예요. 그리고는 가서 핍박받아 죽어라. 이리에게 물려 죽는 양되라~ 그러는 거거든요. 예수의 고난에 그대로 동참하란 뜻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교회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1 24절에 나오죠.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건 예수님이 무슨 고난을 100% 당해야 되는데 95%만 당하고 와서 우리가 나누어서 당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똑같은 고난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남은 고난이에요. 그렇다면 왜 세상이 죽은 자를 살려주고, 귀신을 쫓아내주고, 병든 자를 살려주고 하는데 성도를 미워할까? 왜 예수님을 미워했을까? 여러분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살리는 게 무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던 거죠? 이사야서에 나오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모형 하는 거죠. 그게. 그때 사망의 증상이 다 사라지게 된다. 라는 걸 모형으로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그랬을 때 예수님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이 나간다. 하더라~ 이렇게 가서 얘기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메시아다. 내가 하나님 나라다. 그 이야기 해준 거거든요. 한마디로 죄의 싹인 사망의 증상들이 물러가고 있는 형국인 거예요. 그렇게 사망으로부터 구원이 된다는 건 죄로부터 행방이 된다는 거고, 죄로부터 행방이 된다는 건 ‘나’ 라는 우상으로부터 풀려나는 거죠. 그게 죄의 본질이니까 그런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게 구원이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 상징이며 본산인 유대인들의 집으로만 가라고 한 거예요. 일단은. 유대인들의 집으로 가서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라는 거예요. 니들 죽일 거라는 뜻이에요. 율법주의, 인본주의는 니들 반드시 죽인다는 거예요. ‘예수의 의’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라는 니들이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하여 천국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하나님의 선물로 와 버렸다. 라는 걸 이걸 다 부정해 버리는 거니까. 그들은 반드시 이기지 못하고 니네 죽일 거야~ 그래서 유대인들의 집으로만 가라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절대 이리에게 응전하지 말아라. 그러는 것이죠. 죽으라는 거죠. 복음이 인간들 중심의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깨부수는 그림인 거예요. 그것은 곧 인간의 의가 부정되는 거고 인간들의 자존심이 땅에 처박히는 꼴이에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똑똑하고, 성실한 민족인 줄 알고 그렇게 노력하며 살았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회개라는 단어 ‘메타노이아’ 라는 단어는 네들이 지금 가는 그 길은 잘못 된 길이니까 반대 방향으로 가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메타노이아’ 가.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걸 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삭제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네가 뭔데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려~ 하고, 죽이려고 드는 거예요. 핍박을 하는 거예요. 아담 속의 인간들은요.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는 현상만을 대할 때에는 그 현상에 열광하고 그 현상을 일으킨 사람들을 경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에는 환대를 받은 거예요. 옷까지 벗어서 깔아주잖아요. 그러나 그러한 현상들이 결국 자기 자신들의 존재성과 주체성 그리고 자존심을 부수는 것임을 알 때에 그러한 팩트들을 다 잊어요. 기적, 다 소용없어요. 인간은 나의 존재감 나의 자존감을 치고 들어오면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아요. 그 상대방을 죽이려고 대들게 되요. 인간들의 그 자기 자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무서워요. 그걸 오늘날의 현실 상황을 대입해서 제가 이해를 시켜드리죠. 마더 테레사는 온 세상이 칭찬하고 존경하고 높이는 의의 어머니입니다. 왜냐면 인간가치의 평균치를 높이 올려놓은 인물 중에 대표적 예표니까요. ~ 인간은 저렇게 훌륭해~ 라는 하나의 표상을 제시하고 간 사람이거든요. 인간들이 당연히 존경하죠. 사람들은 자기들이 칭찬받고 싶은 일을 누군가가 해줄 때 그를 칭송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예수님의 의를 설교하면서 마더 테레사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은 참으로 착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일로 카운트가 안 될 뿐만이 아니라 왜? 하나님 앞에서 의로 카운트 될 수 있는 건 예수의 의밖에 없거든요. 그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 카운트가 안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도 아닙니다. ?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인간됨, 인간의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거니까.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도 아닙니다. 혹 이 세상에서 마더 테레사 보다 천배나 더 착하고 헌신적인 삶을 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그 행위가 그의 구원과 영생에 단 1%도 기여가 안 됩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의 의를 의지해서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거고 그 사람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해서 나의 가치를 올리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 이전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라는 걸 먼저 깨닫고 예수의 의만을 꼭 붙드는 자가 되세요. 라고 누군가 설교를 했다고 해보자고요. 그게 유대주의 속으로 들어가서 그렇게 착하게 열심히 살던 유대주의 속으로 들어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선물로 왔다.’ 라고 이야기 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잖아요. 그 모습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될까요? 마더 테레사를 표상을 딱 선정해 놓고 저게 우리의 인간이야~ 라고 으쓱해 하던 인간들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게 되는 겁니다. 네가 뭔데 그러한 의인을 함부로 폄하 하냐고. 어떻게 그런 의로운 모습을 폄훼 하냐고. 다 들고 일어나겠죠.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은 양심으로 의인으로 합의해 놓은 대단한 사람을 폄훼 했다는 혐의가 곧 씌워지게 되요. 인간들의 합의하여 의인으로 세워 놓은 사람이 의인 아님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면요. 인간들의 판단 자체가 엉터리로 부정되는 거예요. 니들이 잘못 본거야~ 라고 인간 전체, 보편적 인간 전체가 부정당하게 되요. 그러면요.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도 핍박을 받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 거예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의가 전해지면 교회가 핍박을 받아요? 칭찬을 받아요? 핍박을 받아요.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건 예수를 믿는다고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하고 손해를 보는 등의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의만을 외치면서 그러한 인간들의 행위를 부정하고 부인해 버림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멸시당하는 성도의 삶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거예요. 예수의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에 23절 보세요.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유대인과 이방인, 온 세상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다 싫어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했더니 다 싫어하더라는 거예요. 다 싫어하더라~)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 예수그리스도만을 전해요. 그 예수그리스도가 능력이고 지혜인 것이지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공로도 능력이 될 수 없고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들을 미워하더라는 거예요. 그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 모든 아담들이 자존심 상해하고 기분 나빠하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디오코’, ‘디오코’ 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추격과 밀어 내심에 의해 발생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의 산물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핍박을 당한다는 건 싸움의 승패의 관점으로 봤을 때 지는 거죠. 이기는 사람이 핍박당해요? 지는 사람이 핍박당해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을 전하는 당신 백성들을 이 세상에게 지도록 만드실까요? 아까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내면적 전쟁에서 우리가 수시로 핍박을 당하면서 어떤 열매가 맺힌다고 그랬죠?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노라 이 열매, 그리스도 없었으면 큰일날뻔 했구나~ 이 열매요. 예수의 의가 없으면 우리는 정말 쓰레기에 불과한 자들이라는 게 드러나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이 찬송을 받게 되는 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핍박의 열매였어요.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고 그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 땅에서 핍박을 당하도록 놔두세요? 세상은 절대로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다는 걸 폭로하시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의 의가 없으면 이 세상은 전부 멸망으로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와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고 전하는 자들이 오히려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의를 의지하고 내세우는 자들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멋집니다.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인간의 자존심을 멋지게 세워줘요. 반면에 예수의 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의만을 십자가만을 먼저 붙들고 전하기 때문에 행동 없는 양심이라느니 열심이 부족한 게으른 성도니 하는 평가를 받게 되요. 그리고 그러한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누가 봐도 인본주의자들의 승리입니다. 더 멋지잖아요. 그리고 세상적 관점에서 우리를 핍박할 근거를 얼마든지 붙들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는 거예요. 우리는요. 어느 면으로 봐서도 져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천국이다. ? 하나님의 통치에 완벽하게 장악이 되어서 인간들 스스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자기부인의 자리, 육적 죽음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이 되는 곳. 그게 바로 너다. 그게 복 받은 자다. 라고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걸 기억시란 말이에요. 예수님의 피 복음 전하느라 이 세상에서 조금 면박당해도 괜찮아요. 행위로 자신을 자랑하는 이들 앞에서 좀 작아 보여도 괜찮습니다. 먼저 예수의 의가 무엇인지를 배우세요. 그리고 그 앞에 항복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셔야 되요. 그걸 알았던 제자들이 예수의 의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 핍박을 기쁘고 즐겁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 40절 보세요. 53:38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베드로전서 4 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여러분이 예수님의 의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은 보시다시피 그리스도의 고난이에요. 그건 영광스러운 거예요. 그렇게 지는 게 맞는 거예요. 그래야 세상이 구제불능인 곳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죠. 예수님이 세상에게 맞아 죽음으로 온 세상이 죄인으로 정죄 됐잖아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세상에게 맞아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 심판의 근거를 마련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죽음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도 같이 하셔야 되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지는 게 어떻게 쉬워요. 그거는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거예요. 힘이 있는데 지는 거. 그래서 기도하는 거예요. 최근에 한국에서 복음을 잘 전하고 계시는 존경하는 제 선배 목사님이 새파란 젊은 아이들한테 웹상에서 공격을 당하는 일이 있었어요. 제 선배 목사님은 예순이 넘으신 분인데 그 분이 전하는 복음에 시비를 걸고 들어온 아이들은 30대를 갓 넘긴 이이들이에요. 그런데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친구들이에요. 제가 글을 보니까 쓰는 어휘나 논리가 너무나 탁월해요. 신학에 대해서 굉장히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인 것 같아요. 이 목사님은 선배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 이외에 다른 건, 전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 분의 웹사이트에는 우리 교회만 링크로 걸려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그 아이들이 달려들어서 욕을, 욕을 하고 하는데 그 목사님의 응전의 태도를 제가 보면서 참 많이 배웠어요. 분명히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목사님인데요. 한 마디 딱 쓰셨더라고요. 이게 그만들 합시다. 은혜 받은 대로 사세요. 왜냐면 논쟁을 통하여 그들이 설득 되지 않는다는 걸 이분은 알아요. 그러니까 웹사이트에서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거기서 멋지게 반박을 해 주면 뜰 수 있는데 완전히 죽어 버렸어요. 거기에 지수 아빠라고 이렇게 앞에 또 축구공까지 있어서 나는 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고요. 차씨더라고요. 성이. 그렇게 그 분이 확 죽어버리니까요. 그 이리떼처럼 물려고 달려들었던 얘들이 슬금슬금 하나씩 빠지더니 다 없어져 버렸어요.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어는 틈에 그 분은 아무것도 안하고 한 마디 하고 죽어 버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분에게로 확 쏠리고 있다는 걸, 이들이 아는 거예요. 그거에요. 여러분. 그게 승리에요. 하나님이 이리들 앞에 그냥 양으로 죽으라고 했더니 그 분이 그냥 죽어 버리셨어요. 그랬더니 이리들이 슬금슬금 사라져 버리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다 양으로 이리들의 세상에 보내졌어요. 누가 보냈어요? 하나님이 보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을 해도 못 이기는 싸움을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뭐 명쾌한 논리와 현란한 어휘들을 동원하여 아무리 이겨봐야 거기서 예수가 지는 거예요. 우리는 핍박을 받도록 되어 있다니까요. 복 있는 자여 너희들은 의 때문에 핍박 받으리라 이게 예수의 선언인데, 왜 우리는 자꾸 이기려고 하냐고요. 아니에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요. 거룩한 나라잖아요. 천국이잖아요. 얘들아 너희들은 복 받은 자들이야~ 너희들이 천국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는 그 천국은 세상에게 핍박 받아~ 그런데 그거 내가 양떼 모는 목자처럼 내가 몰고 가는 거야~ 누구도 못 말려~ 이게 산상수훈 팔복의 결론이에요. 벗어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핍박 받아 주시는 게 이기는 겁니다. 그게 진짜 성숙이에요. 착한일 선한일 정당한일 정직한일 좋은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거에 열심 내시기 전에 먼저 핍박받아 죽는 일부터 시작하세요. 그게 선행되지 않고 추구되는 정직, 성실함, 착함, 선함 다 하나님이 놓아 분노로 쓸어버릴 것들이에요. 핍박받아 죽으십시오. 여러분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