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10 빛과 소금으로 살면 정말 세상이 칭찬해주나 마태복음 5:13~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6

산상수훈 10 빛과 소금으로 살면 정말 세상이 칭찬해주나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은 두 말할 것 없이 신자들의 경건한 삶에 대한 권고요 경고처럼 보이죠

소금으로 살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서 밟힘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죠? 그리고 누가 등불을 발아래에다가 두느냐 등불은 등경위에 두는 것임으로 반드시 주변의 빛을 비추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등경위에 높이 서서 열심히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라. 이거 아닙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이 산상수훈의 빛과 소금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성도들의 본분에 측면에 초점을 두고 해석 하죠


소금은 짠 맛을 내는 것임으로 성도는 세상 속에서 맛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한다느니,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임으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충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느니, 소금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니 반드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을 던지고는 하죠. 여러분 지금까지 배운 거 아닙니까


아울러 빛은 온 세상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힘이 있는 것이니 만큼 성도는 어두움의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데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웅변을 하죠


지금까지 배운 팔복을 쏙 빼고 요것만 보면 그렇게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팔복의 밑에 붙어있다. 라는 걸 여러분이 염두해 두셔야 되는 거예요. 정말 성도가 그렇게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되면 세상이 긍정적 영향을 받던가요? 성도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면 정말 세상이 영향을 받아서 변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오늘 본문 바로 위에 구절하고 충돌이 일어나죠. 예수님은 바로 위에서 성도는 의 때문에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 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전하는 성도는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 말은 세상이 성도의 삶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단 말이에요. 영향은 커녕 핍박을 한다고 했어요. 옳게 안 본다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아래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서 세상에게 영형을 주라는 말씀을 하시겠어요?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성도의 경건한 삶에 대한 교훈으로 곡해를 하는 이유는 본문 16절 때문이에요. 본문 16절을 보시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의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는 내용이 나오죠. 착한 행실. 그러니까 빛과 소금의 삶이 착한 행실인 거고 그 착한 행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표피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여기에서의 착한 행실은 빛과 소금의 행실이 맞아요. 그러나 그 착한 행실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합의하고 결정해 놓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착한 행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착한 행실이라는 걸 그들이 놓치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에요. 그들이 전부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낸다면 한국 전체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까요


세상은 성도가 의로운 삶, 다른 말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되면 미워하고 핍박을 하도록 되어 있지,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지 않는다는 게 성경이 내놓는 공식입니다. 그 말은 천만 명이 빛과 소금의 삶을 진짜 잘 살아낸다 할지라도 그 천만 명이 세상을 변화시켜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천만 명이 그대로 고립되는 거예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공식이에요. 세상은 절대 교회의 삶에 영향 받지 않아요. 변화되지 않아요. 교회만 변해요. 그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거든요


예수님은 지금 빛으로 살아라. 소금으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선포하세요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

이미 완료된 걸 어는 시점에 완료된 걸 그냥 공포하고 선언하는 거예요. 우리가 앞서 공부한 산상수훈의 팔복이 전부 어떤 내용이었어요?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과 현실을 설명하는 거였죠. 그런데 그 내용이 이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거예요.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핍박을 받고 긍휼을 구해야 하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빛과 소금의 삶, 이 여덟 가지를 다 아우르고 있는 게 지금 빛과 소금의 삶이란 말이에요. 그 빛과 소금의 삶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훌륭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세상 복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현실을 다른 언어로 그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팔복의 내용처럼 우리는 예수의 의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잖아요.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거고 그래서 애통하게 되는 거고 예수의 의에 의해서만 화평에 이를 수 있고, 예수의 의가 아닌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전하는 삶이 팔복의 내용이었어요. 그러면 빛과 소금의 삶도 그것을 내용으로 해야 맞는 거란 말이에요


먼저 소금의 삶이 어떤 삶인지 부터 공부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공부해 보고 싶으신 분은 비유 강해에서 제가 이 빛과 소금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곳이 있어요. 그걸 책으로 읽으시던지 테이프로 들으시던지 하세요. 오늘은 제가 조금 다른 쪽으로 접근을 해 들어갈 거예요. 성경에서 소금이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킬 때에요. 그리고 성전의 제물을 묘사하는 곳에 주로 등장을 해요



역대하 13 5

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민수기 18 19절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이렇게 성경은요.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킬 때 소금이라는 단어를 함께 끌어다 쓰고는 해요. 그런데 그 소금이라는 단어가 언약이라는 단어와 붙을 때 항상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오람’ ‘영원’이라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소금언약이라는 건 영원한 언약, 변하지 않는 언약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소금은 여러분 수천 년이 지나도 그냥 소금입니다. 그 본질이 화학적인 일어나지 않아요. 맛도 그대로에요. 소금을 오래 놔두면 싱거워지는 거 봤어요? 소금은 맛이 안 변해요. 영원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절대 변개 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창세전 언약을 가리켜요. 그래서 ‘오람베레트’가 같이 쓰여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 이렇게. 소금언약이라는 거죠. 영원히 맛이 변하거나 본질이 변하지 않는 소금의 특징을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을 수식하는 단어로 끌어다가 쓴 거예요. 바로 그 단어 ‘오람’ 그 ‘영원’이라는 단어가 ‘언약’ ‘베리트’ 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곳을 제가 오늘 하나하나 다 찾아 봤거든요. 그걸 찾아보면서 오늘 본문의 실마리를 제가 풀었어요. 제일 먼저 창세기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창세기 9 12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이게 같은 단어에요.)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시는 무지개 언약이죠. 무지개 언약이 뭐에요. rainbow, bow가 뭐죠? , 활인데 저주의 비에 의해 만들어진 활, 이 활이 하나님께로 당겨지는 게 rainbow ? 무지개. 그래서 하나님이 희생을 당하여 날 때부터 악인인 그들이 살아나는 게 무지개 언약이에요. 성경은 그걸 언약,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라고 해요. 두 번이나 반복해서 ‘오람베레트’ 


그런데 노아 언약의 주된 내용이 뭐였어요? 하나님께서 한 번 혼내 줬는데 이놈들이 정신을 차려갖고 이제 다시는 죄를 안 짓는다고 하니까 내가 다시는 이제 홍수로는 멸하지 않을 거야~ 이거 아니죠? 그렇게 혼을 내줬는데도 또 죄를 짓는 게 니들이다. 이거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가나안에 집어넣으면서 모세가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뭐라고 시키죠? 니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굽이랑 똑같이 살 거야~ 그러잖아요. 그리고는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게 해요


나는 똑같을 거야~ 나는 똑같을 거야~ 이렇게. 나는 변할 거야~ 가 아니라 나는 똑같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 베풀어 주실 거야~ 이게 복음인 거예요

창세기 8 21절 보세요.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이게 홍수 후거든요.)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은 어려서부터 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훈을 준다거나 혼을 내준다거나 하는 방법으로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다는 거죠. 어떤 방법이죠? 이 영원한 소금언약 바로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세요?


창세기 8 20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렇게 노아의 무지개 언약의 배경은 정결한 제물이 부정한 제물들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서 무지개언약을 내리세요.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 그러니까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거저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그 구원의 은혜성에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게 소금언약이에요. 영원한 언약이에요. 두 번째 그 ‘오람베리트’ 영원한 언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이 아브라함 언약 때입니다



창세기 17 7절 보세요.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오람베리트’)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데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과의 사이에서도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그러시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이 후손이 누구라고 그래요? 이거 복수 아니다 그러죠? 단수다 그러잖아요.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인데 예수그리스도다. 그러죠. 가보게요. 3 16절 보세요.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가 세우신 그 언약의 원형, 그 원형을 찾아보면 소금언약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해지겠죠? 그 원형이 어디에 나와요?

히브리서 9장에 나오잖아요. 가보게요. 15



히브리서 9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은(이게 언약이라는 단어에요.)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다른 말로 바꾸면 언약은 언약을 맺은 자가 죽어야 되나니 라는 뜻이에요.)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언약을 맺은)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유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라는 건 하나님과 언약의 당사자인 예수 사이에서 피가 반드시 뿌려져서 내가 너에게 주는 내 백성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절대 사함이 없다. 가 영원한 언약의 핵심인 거죠. 피의 언약이에요. 그 창세전 언약의 핵심 단어 하나만 뽑아라~ 그러면 피에요. . 예수라는 하나님의 후손의 피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어야할 진짜 죄인들이 거저 살아나게 되는 게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라는 후손과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란 말이에요. 그 창세전 언약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죠. 1 3



에베소서 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점 많고 흠 많던 우리가 거저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게 창세전 언약의 핵심이에요. 피에요. 역시. .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찾아 읽었던 민수기 18장에 보면 그 소금언약의 내용이 제사장과 연관이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18 19절 보세요.


민수기 18:19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거제는 들었다 놓는 거. 요제는 흔드는 거. 관제는 붓는 거. 화제는 태우는 거.) 내가 영영한 응식(분깃유산상속물)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여기에서는 모세가 소금언약을 설명하면서 그걸 제사장의 분깃과 연결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제사장에게 영원히 준신다고 약속하신 언약이 소금언약이래요. 영영한 응식으로, 영영한 분깃으로, 영원한 분깃으로 너에게 줄 거다. 이게 소금언약이다. 이런단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소금언약은 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제사장이 먹고 사는 일, 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제사장이 먹고 살죠? 그 일이 변함이 없을 거야~ 영영히, ‘오람’, 영영히 변함없을 거야. 이게 ‘오람베리트’ 소금언약이라는 거예요. 영원한 언약.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바꾸어 말하면 제사장들의 그 봉사와 희생을 백성들이 알아주고 대접하는 게 그들에게 예물을 나누어 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한 일을 그 봉사와 희생을 알아주고 그들을 대접하는 일이 이제 영원히 지속될 거야~ 이게 소금언약이에요


그 일이 언약이 이루어졌나요? 안 이루어졌죠. 사사기 공부했잖아요. 제사장들이 거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빌어먹을 데를 찾아 다녀요. 이스라엘이 대접 안 해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금언약은 도대체 어디서 지켜지는 거예요.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지켜지는 걸까요? 이게. 교회와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이에서 성취되는 언약을 바로 이 소금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는 그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희생과 봉사, 그 십자가의 그 희생 그 공로를 영원히 대접해 주는 자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교회와 예수그리스도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 사이에서 성취될 그 언약을 지금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소금언약에 의해서 당신 자손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해 내신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그 소금언약 성취의 그 공로를 온전히 인정하고 찬송하며 그 앞에서 왜 예수가 소금언약을 성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거를 인정해 드리면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시인할 때에 그 때 소금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거란 뜻이에요


그런데 이건 반드시 될 일이기 때문에 소금이 어떻게 짠맛을 잃겠느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라. 선한 일에 힘써라 이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맛을 내주는 사람이 되라. 사람들의 부패를 막아라. 여러분들의 부패나 막으세요. 누구의 부패를 막아요.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도저히 산 자가 될 수 없는 죽은 흙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반죽이 되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게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인거고 거기에서 탄생이 된 교회가 그 소금언약이 실제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성취가 된 것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희생하시고 거기에 봉사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찬송하게 되는 거. 이게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의 목적이잖아요. 그게 바로 소금언약의 성취란 말이에요. 다른 말로 자기가 온전히 부인되게 되는 상태, 소금언약의 성취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 라는 의미로 그 언약을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성도를 반드시 육적 자아의 죽음의 자리로 몰고 내려가신다. 라는 게 소금언약이에요. 그래서 본문에서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어떻게 그게 소금이냐~ 라고 하는 거예요. 소금은 절대 맛을 잃을 수가 없어요. 천년이 지나고 이천년이 지나도 소금은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한단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야 너희들은 천년이 걸리던 이천년이 걸리던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가야 한다. 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내가 갖고 있는 이 몸이 사망의 몸 맞네요. 이 자리요. 이게 자기부인의 자리잖아요. 그러니까 본문 13절은 소금은 절대 소금의 역할을 못 벗어난다. 에 초점이 있는 거지, 그래서 맛을 잃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거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내면 밖으로 집어 던져서 밟아 버릴 거야~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맛을 잃을 수 있는 소금은 없으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언약을 성취해 내신 예수님의 의만을 자랑하고 찬송하고 전해야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다. 그 소금언약의 성취에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보탬이나 기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예수님의 의를 높이는 곳으로 가야지 그래, 어떻게 해서든지 소금으로 잘 살아내서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지~ 로 가면 안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건 내가 뭔가 지금 할 수 있다. 라고 아직 자기가 부인이 안 된 거기 때문에 그게 바로 부패에요


이렇게 소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예우해 드리는 거예요. 조금 아까 읽었잖아요. 그게 소금언약라고. 그래서 성도가 소금인 거예요. 성경을 보면 소금과 언약을 막 혼용해서 써요. 언약의 소금, 소금언약 이렇게. 막 혼용해서 쓴단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를 몸으로 입으로 살아내고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게 소금으로서의 성도의 삶인 거예요. 내 꼬라지가 이런데 영원한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에 의해 나는 내 구원은 절대 실패될 수 없다. 이게 소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그렇게 예수님의 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죠? 그게 소금인데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 받는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소금의 삶은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는 경건하고 깨끗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소금언약을 홀로 성취해 내신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자랑하느라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삶을 말하는 거예요. 소금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짓밟힌 것처럼 여러분이 예수의 의만을 증거 하는 그 소금언약을 예수가 성취하고 완성해 냈다는 그 소금언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를 증거 하는 소금으로 살게 되면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밟히게 된다는 뜻이에요. ? 인간의 자존심을 뭉개는 거니까. 그래서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바로 밑에 너는 소금이니까. 가 들어가는 거예요. 너는 소금이니까 의를 인하여 반드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문맥 안에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전부 도덕책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라는 제물과 예수라는 제사장에 의해 살아난 자들이지만 우리 자신 역시 제물의 삶과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되어 있죠. 로마서 12 1, 너희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그 제사가 제물이에요. 우리 보고 제물이래요. 그리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서요. 자 예수가 제사장으로 제물로 소금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몸을 자해한 거예요. 그죠? 피를 흘린 거죠.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된다는 뜻이에요. 소금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똑같이 간다는 뜻이에요. 세상에게 핍박 받다가 십자가 지고 죽는 거예요. 육적 자아가 그렇게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와 심판의 삶을 미리 받아내면 영원한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성도의 인생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 동안에 그 영원한 저주와 심판의 요만큼의 맛을 보면서 인생 속에서 그걸 경험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육적 자아에 떨어지게 되면 내가 부인이 되고 삭제가 되는 경험을 해요. 이 세상에서. ~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그게 십자가 지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그 심판의 현실, 저주받은 현실을 묘사할 때에 소금으로 묘사를 하곤 하는 거예요.

스바냐 2 9절 보세요.



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모압과 암몬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딸들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자식들이죠. 영원한 이스라엘의 대적들. 그들을 어떻게 만들겠다고 그래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의 현실이 소금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롯의 아내가 돌아다보고 소금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금은 심판과 저주의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바로 심판과 저주를 경험한다는 뜻이에요. 그걸 핍박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핍박받아 죽게 되면 영원한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공식이란 말입니다. 시편 107 33편 보세요.



33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소금 밭이에요. 이게. 염밭이.)

하나님의 저주로 폐허가 되는 곳을 소금밭이라고 그러죠. 신명기 29 23절 보세요.

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소돔과 고모라 또 나와요. 저주와 심판의 현실 거기를 소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여러분 이걸 잘 이해하셔야 되요. 그래, 소금으로 살자~ 큰일 납니다.

마가복음 9 48절 보세요.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어디에서? 지옥에서요. 지옥의 영원한 심판의 현실을 소금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의 소금은 어떤지 보세요.)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갑자기 지옥 얘기하다가. 지옥불은 소금이다. 이야기하다가 소금은 좋은 거예요.)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출발하는 거죠? 제자들이 서로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이 싸움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의 싸움, 거기에서 하나님이 니들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다 잘라 버려라 그러죠. 그런데 그 잘라 버려라 cut,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제사용어라고 그랬어요. 할례. 니들이 그렇게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들의 그 육적 자아를 다 잘라 버릴 건데 그걸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완료했단다. 그래서 그 완료한 구원의 현실을 역사 속에서 니들이 경험하고 갈텐데, 그게 바로 영원히 잘려야 할 그게 소금 치듯 불로 공격을 받는 지옥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 너희들의 육적 자아가 하나님에 의해 핍박당하고 공격당하는 바로 그 소금을 경험할텐데, 그 소금은 좋은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금을 너희에게 두면 어떻게 되는 거죠? ~ 우리는 뭐가 자격이 있어서 뭐가 내가 어떤 공로를 쌓아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영생을 얻은 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소금으로 쪼개지셔서 소금언약을 성취하므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은 거니까 니나 내나 우리 주님의 그 소금언약 성취가 아니면 다 죽은 흙이었다. 이게 뭐에요? 화평케 하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소금을 두고 화평케 하라는 거예요. 화목 하라


그러니까 그 소금언약 성취, 그걸 알고 그걸 전하는 소금으로서의 삶을 사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걸 화목이라고 그래요. 그게 평화에요. ‘에이레네’ 화평. 그런 연유에서 성경에는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이 부어졌을 때 회복이 일어나는 사건을 반복하여 기록하는 거예요.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이 죽어 있는 것에 확 뿌려지잖아요. 이게 우리에요. 그런데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 우리에게 뿌려지면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를 성경이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열왕기하 2 19절 보세요.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이거는 유산이 된다는 뜻이에요.)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물줄기가 아니라 근원에 가서 소금을 확 뿌려버리는 거죠. 죽이는 거예요.)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생명이 잉태가 안 되는 건 죽음이죠. 그래서 구약에서 사망의 상태를 묘사할 때 자식을 못 갖는 것으로 묘사를 하는 거예요.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 죽음의 현장에 죽음이 가서 심판이 가서 죽음을 죽여 버리니까 육적 자아가 죽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이 죽는 거예요. 죽여 버리니까 토산이 다시는 떨어지는 일이 없다. 잉태가 되더라는 거예요. 생명이 잉태되더라는 얘기에요. 죽음을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이 죽여 버리니까 이게 우리 역사 속 인생이란 말이에요. 이게 지금까지 공부한 팔복의 내용에요. . 그랬더니 죽어있던 자가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소금의 삶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소금이 되라 그러지 않고 너희는 소금이다. 그러는 거예요. 너희는 의 때문에 반드시 핍박받을 건데 왜? 소금이니까. 출애굽기 30 35절 보세요.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거룩하지 않은 것이 소금을 뿌리자 거룩하고 성결하게 바뀌어요. 그게 소금이에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세상과 지금 막 섞여서 살죠. 세상이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그 칼 좌우의 날 선 검이 떨어져서 여러분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걸 거룩이라고 그래요. 그걸 소금이라고 그래요. 그걸 뜯어내는 게 핍박이며 환란이며 고난이에요. 이 세상에 눈 두지 말라고


그래서 레위기에서도 부정한 짐승은 전부 땅을 기어 다녀요. , 지네 이런 거. 정한 짐승은 튀어요. 메뚜기에요. 하늘로 올라가는 하늘을 향하여 땅에서 발을 떼는 자들이 정결한 자들이다. 이걸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흙 지향성이 있어요. 흙이 너무 좋아. 땅이 너무 좋아 그래서 여기서 안 떨어지려고 복지부동. 그러니까 하나님이 배 밑창에다가 칼을 넣어서 끊어내는 걸 거룩하게 한다. 고 해요. 그게 환란이에요. 그걸 소금의 삶이라고 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졌더니 성결해지더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레위기 2 13절 보세요.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여기에 보시면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이 뿌려져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 소제물에 뿌려진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죠. 언약의 소금, 소금언약, 언약의 소금 막 혼용되고 있어요. 언약, 소금 같은 거예요. 언약의 핵은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게 뭐에요? 소금이잖아요. 환란, 심판, 저주 그런데 그 소금이 소제의 뿌려짐으로 온전한 제물이 되어 그것만 하나님이 받으세요. 꿀과 누룩이 들어가면 안돼요. 그거는 변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금만 들어가야 되요. 꿀과 누룩이라는 건 그걸 넣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거예요. 달고 풍성하고 맛 좋은 거. 그건 안돼요. 하나님께 제물로 못 드려요


그런데 소금이 뿌려지면 하나님이 그걸 받으세요. ? 짭짤해서? 제물이 뭐에요?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무죄한 걸 갖다 바쳐야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건 하나님 나라의 것이라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의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되죠. 그런데 이 제물이 자기의 것을 요만큼이라도 갖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하나님의 것으로 완벽하게 채워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져 완전히 죽어야 되요. 그게 심판이에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그 안을 채우는 거예요


여러분 지렁이나 미꾸라지 잡을 때 소금 뿌려 본 적 있어요? 시골에서 우리 할머니가 가끔 미꾸라지 잡아다가 추어탕을 끓어 주시려고 미꾸라지를 양동이에다가 이렇게 한 가득 넣어 놓고 소금을 쫙 뿌리잖아요. 그냥 뻣뻣하게 다 돌아가세요. 그걸 생각하시면 되요. 죽이는 거예요


예수라는 제물이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 줄 아세요.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를 보여 준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의 메카니즘이라고 했잖아요. 존재 양식. 안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존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지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서 자신의 가치와 존재성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챙겨 갖는 이들이 영원 속에서 죽을 자들이에요. 이 땅에서 살자고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 죽어요.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는 자가 살아요. 그게 소금이에요. 저주의 삶, 심판의 삶, 육적 자아가 부인되는 삶, 그래서 아파요. 이 상처투성이인, 하나님에게 맞아서 이 상처투성이, 이사야에서 나오죠. 어딜 더 때릴 데가 있니? 그러잖아요. 그 몸에 하나님이 소금까지 확 뿌려 버리시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이요. 죽으라. 그러니까 재미없어요. 성도의 인생은 그렇게 재미없어요. 하나님이 계속 소금 뿌리는 인생이기 때문에 예전에 시골에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 그 부정한 곳에, 초상집 같은 데 갔다 오면 항상 소금 뿌리죠? 에잇 부정한 것. 잡귀야 물러가라~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 니들은 지금 잡귀야~ 그거 안 죽고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와~ 그래서 계속 소금 뿌려 주고 계신 거예요. 잡귀야 물러가라~ 잡귀도 뭐 잘 대우해 준거죠. 마귀 대장인데 우리가. 그래도 잡귀라고 얘기해 주면 그건 조금 핫바리 마귀잖아요


그 소금의 삶이 없으면 정결케 될 수가 없고 거룩케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라는 말씀 바로 밑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가 이어지는 거라고 그랬어요. 소금이 어떻게 핍박의 삶을 면하겠느냐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잔 말이에요. 원래 빛의 원형은 하나님이죠.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의 첫 머리에 빛이 이르라 하면서 이제 빛이 등장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일은 다 빛이신 하나님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것임을 명시하는 거예요. 자 그 빛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시죠.

요한복음 1장으로 가보세요. 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 나오는 빛과 오늘 본문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가 같은 단어에요.

그런데 5절에 보면 빛의 대척점에 있는 어두움의 특징이 뭐죠

빛이 비취는데 그 빛을 못 알아보는 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어두움은 딴 게 아니에요. 빛이 비췄는데 왜 내가 저 빛의 도움을 받아야 돼~ 라고 빛을 못 알아보는 거. 이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이게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고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빛이 왔는데 '나는 빛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빛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빛의 삶을 조금씩 살고 있기 때문에 쟤가 나를 온전히 안 도와줘도 돼. 쟤가 나를 온전히 도와주면 나는 완전히 내 존재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안 돼.' 라고 하는 그걸 어두움이라고 해요. 빛을 못 알아보는 거



이사야서 42 6절 보세요.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감옥이에요. 간은.)


하나님께서 빛이신 주님을 이 세상에 보냈는데 그 빛의 임무는 백성의 그 언약 즉 소금언약이 되게 하시며 그러죠. 여기에.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한다고. 언약이 뭐에요?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 되게 한 대요. 그건 무슨 말이죠. 가서 죽이라는 뜻이에요. 죽여라~ 네가 십자가 지면 그들이 전부 유죄가 되는 거기 때문에 죽는 거거든요. 언약이 된다는 뜻이에요. 빛이. 소경의 눈을 밝히고 흑암에 처한 자를 그 흑암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래요. 그러니까 빛은 심판의 소금 역할을 하러 오는 거죠


잘 생각해 보세요. 빛은 어두움이 뭔지 악이 뭔지를 이렇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걸 밝혀서 빛이 되게 하는 게 아니라. 빛은 저놈이 어두움이고 저게 악이구나~ 를 이렇게 드러내고 폭로하는 거예요. 그게 소금이 했던 일이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빛이신 그 분이 왔더니 사람들이 그 빛의 도움을 거절해요. 그게 빛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게 어두움이에요. 그로 말미암아 이 빛이 세상은 어둠이다. 를 폭로시키고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거예요


소금도 마찬가지잖아요. 똑같은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어두움이라고도 하지만 소경이라고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어두움을 자주 소경에 비유하시죠. 그게 어두움이에요. 빛의 대척점에 있는 거. 예수를 못 알아보는 거. 예수의 의만을 의지하지 않는 거. 이게 어두움이에요. 빛은 그걸 밝혀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매니언주의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게 되면 알매니언주의가 넌 뭐냐 왜 우리랑 달라~ 라고 할 거 아니에요. ~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지금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데 야~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데 우리도 예수 믿어. 예수를 믿는데 그들이 다른 존재로 확 드러나게 되죠. 이게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빛의 삶이에요


그런데 이 빛을 인간의 가능성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반드시 밟아 끌려고 하는 것이죠. 이게 예수의 삶이었단 말이에요. 빛의 삶이었어요. 이게. 바리새인들 그 착했던 유대인들이 이 빛을 꺼버리더라니까요. 그 착한 알매니언주의 신봉자들이 은혜를, 십자가를, 보혈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그건 역사 내내 있었던 일이에요



요한복음 9 39절 보세요.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심판은 뭐다. 소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는데 보는 자들을 어떻게 한다고 그래요. 소경되게 만들어 버린대요.)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러면 빛이 왔을 때 "저는 소경이 맞네요. 저는 예수님이 비춰 주지 않으면 요만큼도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자네요." 이게 나는 소경입니다. 그 사람을 빛이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구태여 나를 비춰 주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렇게 착하게 잘 살고 있어요. 율법 잘 지키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이 사람을 소경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면 성경을 한 발짝만 더 깊이 들어가서 보세요. 한 발짝만 더


빛에는 "내가 소경이 맞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그 사람을 빛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제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소금으로 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다 본다고 하거든요. ? 다 하나님처럼 되었으니까. "난 괜찮아 야~ 우리끼리 힘 합쳐서 바벨성 쌓아서 올라가자." 그런데 심판하러 오신 그 분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서 그를 심판해 버리시니까 이건 뭐야~ 거기 내려와서 나를 공격을 하는데 그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내가 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자로 내려 와갖고. 이거 뭐야~ 나 이거 소경이네. 이게 심판당한 자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빛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내가 소경입니다. 라고 하는 그 자의 바로 그 소경됨을 예수님이 먹어버리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이사야서 42 18절 보세요.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이사야서의 주제가 뭐에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이 종은 누구죠? 예수에요.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예수보고 소경이라고 그래요. 지금 이 이사야서의 내러티브가 뭐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내려간다. 에요. 그런데 그 종이 내려와서 소경이 되어 버렸어요. ? 이 세상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분은 네, 제가 소경이 맞네요. 라고 하는 그 자들의 그 소경만 먹어 버리세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한 그들은 네, 제가 소경 맞네요. 예수의 의의 십자가를 딱 듣게 되면 말씀이 침공해 들어오면 네, 제가 어두움 맞네요. 소경 맞네요. 이 자리로 간단 뜻이에요. 그들을 빛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2 46절 보세요.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빛이 어두움을 비추어서 빛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빛으로 나온 상태를 뭐라고 그래요. 나를 믿는 자라고 그래요. 예수를 믿는 게 빛이에요. 날 믿으면 안돼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안돼요. 그 신뢰가 깨지고 그 사랑이 박살나야 되요. 나에 대한. 나라는 우상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예수에게로 점점 돌려져야 되는 거예요. 그들을 빛이라고 그래요. 믿는 자라고 그래요. 주님은 그렇게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자들을 흑암이라고 그러고, 그늘진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이라고 그래요.



마태복음 4 16절 보세요.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이게 그늘진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이라는 뜻인데요.)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빛을 못 알아보는 자들은 전부 흑암이며 사망이에요. 죽은 거예요 그게.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썼던 그들을, 그래서 예수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던 그들을 마귀라고 그런 거예요. 죽은 자라고 그런 거예요. 무덤이라고 그런 거예요. 독사의 새끼라고 그런 거예요. 소경, 어두움이라는 뜻이에요. 그들이 바로. 예수의 필연성, 반드시 예수가 내 삶에 필요하다. 라는 걸 모르는 자들. 그걸 소경이라고 그래요


빛이신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잘 지키며 선행에 힘쓰던 바리새인들을 죄인으로 폭로해 버리셨어요. 그 동안에는 그들이 빛이었는데 진짜 빛이 오니까 그들의 실체가 좀비로 확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그 일을 한다. 라는 뜻이에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뜻은 지금 온 교회가 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좋은 교회들을 만들려고 애를 쓰죠. 다 그렇게 추구해 가는데 어떤 놈들이 오더니 "그렇게 해 갖고 교회가 건강해 지는 게 아니라 예수의 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 돼~" 어떻게 하겠어요? 당연히 공격 받아요


그러나 거기에서 구별이 일어나요. 빛이 오면 반드시 구별이 일어나고 갈라짐이 일어나요

창세기 1장 보세요. 빛이 오자 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전부 갈라지죠. 구별이에요. 그걸 거룩이라고 그래요. 나중에 보자고요. 도대체 누가 빛인가. 우리 주님이 그렇게 성도도 빛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의, 예수그리스도의 의 붙들고 그 의를 전하면서 빛인 척 하는 자들의 어두움을 폭로시켜 버려야 돼요. 그게 빛이에요


쉬울 것 같으세요. 그 삶이. 어렵습니다. 괜히 지가 그렇게 못사니까 우리를 욕한다고 욕먹죠. 근사한 외모와 행위로 자신들이야 말로 세상의 빛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게 빛의 삶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를 믿는 게 빛의 삶이다. 라고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 그게 빛이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빛이니까 회개하라. 나를 믿어라 그랬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아니야 착하게 잘 살고 있다니까. 예수님이 계속해서 아니 나를 믿으라니까. 이게 빛이었단 말이에요. 그 삶을 여러분이 살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러한 성도의 빛으로서의 삶을 통해 산 위의 동네가 환히 드러난다. 라고 본문 14절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시 보세요.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산위에 있는 동네 어디에요? 팔레스버드스인가요? 한국의 달동네 이야기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은 누가 일차 수신자죠? 유대인이죠. 다 헛공부 했어요. 유대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구약이 어마어마하게 인용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마태복음을 해석을 못해요. 산 위의 동네가 구약의 어디에 나올까요. 이 산 위의 동네는 그냥 산 꼭대기에 있는 어떤 동네를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아요



이사야서 2 1절 보세요.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어디에요? 이게? 예루살렘이에요.)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냥 유대인들 누구에게나 예루살렘은 산 위의 동네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뭐에요? 율법주의의 핵, 율법주의의 총화. 거기에 성전에 있습니다. 제사 지내는 곳이에요. 율법이 가르쳐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예루살렘은 율법주의의 총화이기 때문에 그런데 빛이 비추게 되면 산 위의 동네가 근사하게 위장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왔는데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우리는 착한 사람이야~ 라고 위장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감추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빛이 와서 확 비춰버렸어요. 산 위의 동네를 그랬더니 그게 악으로 무덤으로 확 드러나 버렸죠


마찬가지인 거예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니들이 진짜 빛이라면 오늘날 교회를 좀 먹고 있는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반드시 너로 말미암아 폭로될 거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거라는 뜻이에요. 등불을 어디다 걸어야 산 위의 동네가 다 비춰줘요? 예루살렘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 1절부터 여기까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하나님은 고속도로처럼 달려가고 있어요. 십자가로

마태복음 23 24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예루살렘의 중심,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보세요.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은혜를 모르고 하는 인간들의 선행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겉만 깨끗하게 번드르르하게 가꾸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26 소경된 바리새인아(보세요. 소경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죠. 어두움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어두움들이 깨끗하게 잘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오시더니 계속 소경이라고 그래요.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니네 빛 아니래요. 겉만 번드르르한 놈들이라고 그래요.)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목숨 걸고 율법 지키던 사람들이에요. 아주 착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소경이라고 그러고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안을 깨끗이 해야지. 그래요. 안을 어떻게 깨끗이 하죠? 에스겔서 36. 하나님이 부정한 유출병 환자인 우리를 그게 에스겔서에 나오죠. 우리가 땅을 피로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월경하는 자들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 자들인데 하나님이 물로 씻어서 성령을 넣어 새 마음으로 바꾸어 준거. 그러죠. 그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안을 깨끗이 하라. 예수 믿으라는 뜻이에요. 니네 진짜 그 예수 믿니? 니들이 아무것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유출병 환자, 부정한 자의 불과한 너희들을 깨끗이 성령으로 씻어서 지금 이렇게 거저 구원해 준 거. 마른 뼈 같았던 자들을 거저 구원한 거 이거 믿니? 그게 안이 깨끗해 진 거거든요. 그게 새 마음이에요. 안이 깨끗해 진 거예요. 그 상태에서 나오는 거 맞어? 를 묻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배워도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은혜를 계속 배워서 아 맞어 나는 깨끗해졌지~ 내 안이 이미 완전히 깨끗해졌지~ 그걸 확인하는 그 과정 속에서 나의 육적 자아가 부인이 되어 지고 거기에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실들이 나오는 거죠. 여러분 도대체 이 바리새인들이 뭘 했길래 하나님이 계속 소경이라고 하고 너희들은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그러고 왜 계속해서 그들의 실체를 이렇게 폭로시키시죠? 빛이 오셔서 왜 자꾸 니네는 어두움이다. 어두움이다. 그래요. 뭘 했어요? 이 사람들이요. 바로 그 위에 나와요. 볼까요.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어두움에 속한 소경된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는데 성전에 바쳐지는 금 혹은 성전에 있는 금으로 맹세를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라고 그래요. 그리고 제단으로 맹세를 하면 아무일도 없는데, 제단은 제물이 태워지는 곳이죠.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성전과 제단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과 제물 되심으로 성취되는 새 언약의 현실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거죠. 그게 성전과 제단이잖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했어요. 성전과 제단에서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성전에 바쳐지는 금과 예물에 더 관심이 있더라는 거예요. 성전과 제단을 금과 예물 아래로 밀어내는 것예요. 은혜 나와는 상관없어요. 지금 안 보이는 거니까.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어떤 유익, 부수적 유익, 이거에 관심이 더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의를 찬송하는 것 보다는 이건 나한테 아무 유익이 없어요. 지금 내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고 종교행위를 잘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어떤 평가를 받아낼까에 더 관심 있는 자들, 이 자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단순히 금과 예물에 재물에 관심이 있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 구원의 현실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유익이 올 것인가를 종교 행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들이 어두움이란 말이에요. 그게 겉만 번드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의 앞에서 그 산위의 예루살렘, 인간들의 의는 낱낱이 폭로 당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잘 감추고 있었는데 어떤 한 분이 오더니 쫓아다니면서 이 도둑놈들아~ 간음한 놈들아~ 어두움들아~ 소경들아~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아무도 몰랐는데, 칭찬만 받고 있었는데, 기도할 때도 길 가운데에서 기도하고 금식할 때도 일부러 수염 길러가지고 초췌하게 나 밥 굶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다 존경해 주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오더니 나는 네 속을 안다. 이 놈아~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여러분에게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더러 예수의 십자가와 피만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 때 겉만 번드르르하게 자기들의 행위로 자기를 위장했던 자들이 여러분들을 굉장히 불편해 할 거에요. 남들 다 존경해 주는데 왜 저 인간만 아니라고 해, 그런데 여러분은 반드시 산 위의 동네를, 감춰진 산 위의 동네를 확 드러내는 자로 사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희는 빛이다. 빛처럼 살아라. 가 아니에요. 빛이 되어라 가 아니라니까요. 너희는 빛이다. 이거 또 어디 붙어 있어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밑에 너희는 빛이다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니네는 핍박받을 거야~ ? 니네는 빛이니까. 산 위의 동네를 드러낼 거니까. 그들이 너희를 얼마나 밟겠니?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15절을 보시면 그 빛이 누구에게 비춰져요? 빛은 집안사람들에게만 비춰져요. 그래서 그들만 나 소경 맞네요. 하고 빛으로 돌아와요. 그래서 집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성도만 알아보는 거예요. 남들은 속으로 욕만 하고 잇을 거예요. 은혜는 무슨 개뿔이나 은혜냐 


마태복음 5 15절 보세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집안, 하나님의 집안, 식솔들은 전부 모두 그 빛을 보고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맞군요. 하고 되게 돼있는 거죠. 나머지는 저 빛은 어떻게 끌 수 없을까? 여자들 그러잖아요. 특히 우리 새벽기도 오는 분들. 불 좀 하나만 킬 수 없어요. 왜 불을 여러 개 켜서 이아침에 그냥 눈꼽이고 뭐고 다 보이게 그거에요. 저 빛 좀 끌 수 없어? 그걸 핍박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여러분은 반드시 그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나는 이렇게 어두움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빛을 나에게 비추어서 내가 거저 빛이 된 거구나. 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거. 그렇게 예수의 의만을 의지하는 거. 예수만을 믿는 거. 그걸 뭐라고 그랬죠?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그게 행실이에요. 그렇게 믿게 되면 그게 뭐죠? 착한 행실, 바로 그 착한 행실로 인하여 그 빛을 본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더라. . 빛과 소금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른 내용 없어요. 어떤 빛으로 사실려고 그랬어요? 남들의 잘못이나 들추어 내는 그런 빛, 아니면 맞으면 죽는 레이저 광선, 빛으로 살랬더니 전부 레이저 광선이 되어 갖고 쏘는 족족 죽어. 너는 왜 이것 밖에 안 돼. 너 왜 이렇게 더러워. 이게 레이저 광선이지 뭐에요. 아니에요. 그냥 우리는 예수의 의만을, 빛이신 그분만을 드러내는 그 빛으로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산 위의 마을을 여러분이 확 폭로시켜서 그 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는 두들겨 맞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님 오시면 얼른 맨발로 뛰어가서 왜 인제 왔냐고, 아가서 계속 진짜 하루에 한 20시간 읽다보니까 모든 언어가 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을 비둘기라고 부를 뻔 했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랑이여 왜 이제 왔냐고, 그렇게 그 신랑과 신랑이 계신 곳이 그리워져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그런 핍박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 그 팔복의 내러티브 바로 밑에 빛과 소금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지 잘 아시겠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