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12 하늘과 땅이 없어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다 이루어진다1 마태복음 5:15~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8

산상수훈 12 하늘과 땅이 없어져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다 이루어진다1





마태복음 5:15~20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이 내용을 다 할 수는 없고요. 두세 번에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오늘은 개괄적인 내용을 좀 설명해 드리고 다음 주부터는 좀 제가 구체적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이렇게 풀어드릴게요


언뜻 보면  '너희들의 착한 행실 그게 바로 빛이고 그렇게 착한 행실로 너희는 아버지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으며 다 이루는 것이니까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쳐야 천국에서 큰 자다.' 

다 우리의 행함을 아주 강요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잖아요. 그러나 전혀 반대의 이야기라는 걸 여러분이 아시게 될 겁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하신 예수님 말씀의 진의에 대해서 긴 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그건 율법주의의 세상, 코스모스라고 그랬죠. 성전, 코스모스, 질서. 그걸 세상에서 예수라는 빛을 증거하고 증명해 내는 삶으로 부름 받은 그런 성도의 필연적 삶, 이게 세상에서 빛이다. 라는 그 어구가 가리키는 거라고 그랬죠


그런데 15절을 보면 '집안 모든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엔테오이키아’,  ‘오이코스’ 가 집이니까. 그 ‘엔테오이키아’ 그 집, '그 성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육인 성전 안에 빛을 갖고 있는데 이 성전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그런 모양을 그리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의 빛은 성전 안에서 우리의 몸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로 비추어지는 빛, 말씀의 삶을 말하는 거죠


16절은 그렇게 우리 몸 안에, 성전 안에 그렇게 빛을 두는 것, 이걸 ‘탑 칼라 에르가’ 그러니까 ‘그 일’이에요. 그 일. 우리 안에 빛을 두는 ‘그 일’, 거기에 그런데 ‘칼로스’ ‘칼라’ 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그게 ‘착한 그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는 착한일이 아니라 그 일, 우리 안에 빛을 두는, 말씀을 두는, 아들을 두는, ‘그 일’, ‘그 일’이 착한, 선한 일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일을 보면 사람들이 그 일을 보게 되면, 아들을 보게 되면, 너희 안에 그 빛, 아들을 둔 것, 그걸 보게 되면 

"와~ 하나님이 저렇게 일을 하시는구나!" 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뭐 꽤나 착한 일을 하면 그걸 보고 사람들이 "야~예수 믿고 사람들이 저렇게 착해지는구나~"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 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일. 그러니까 여기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번역이 된 그 어구는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내용, 지난 시간에 제가 쭉 설명한 그 내용, 우리 안에 빛을 두는 것, 아들을 두는 것, 그걸 가리키는 어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절대적인 선을 가리키는 ‘아가또스’로 쓰이지 않고 ‘선한 일’ 이라고 했는데, ‘아가또스’가 아니고(그게 절대적 선이거든요) ‘칼로스’가 쓰였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빛을 두는 건, 이 빛을 두는 건 절대적인 거지만 이게 이제 비추어질 때 다른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용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는 아들로 빛으로 전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율법으로 전해져서 이게 사망으로 끌고 가는그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걸 바울이 이렇게 묘사를 하죠. 고린도후서 2 14절 보세요.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요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그게 냄새로 이제 퍼진다는 거예요이게요빛이에요냄새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빛인데)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빛이 ‘칼로스’ 상대적으로 다른 부류에게 다른 모양으로 전달이 된단 말이에요그래서 ‘칼로스’ 에요착한 행실절대적인 ‘아가또스’가 안 쓰였단 말이에요.)


그렇게 내 안의 빛을 담고 빛을 증거하고 예수를 이렇게 전이하게 되는 그런 자로 살게 되는 그 상태, 쉬운 말로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아서 그걸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성도의 상태,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인 거예요. 우리가 착한 일 많이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게 아니라. 


구약의 선지서나 시가서나 쭉 나오잖아요

"우리의 선함과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서는 또 착한 일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요. 일관성이 없잖아요. 성경이. 우리의 착함이나 선함에 의해 하나님이 어떤 영향을 안 받으세요. 그 분은 무한의 절대자이고 우리는 유한의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게 성경을 율법으로, 규례로, 규범으로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빛의 이야기는 성도야 착한 일 많이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라는 교훈의 이야기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를 증거 하도록 그 성전안의 빛,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과 그 열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거니까 영광(독사)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착한 행실은 우리 성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열매가 내어 놓는 그 일이 아니라 성도 안에 하나님께서 행해 놓으신 일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바로 그 일, 선한 그 일, 착한 그 일 이라는 그 일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행해 놓으신 일. 그 착한 행실이라는 어구와 본문 19절의 말씀을 연결해서 이해를 해 보세요


착한 행실은 빛이신 예수님을 성전인 우리 안에 담고 그 예수를 빛을 이렇게 낳는 거예요. 아들을 낳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그거를. 그게 착한 행실이라고 그랬어요. 19절은 그러한 착한 행실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 라고 이렇게 풀어주는 거예요. 행하며 가르치는 자 ‘포이에오’ 그게 ‘행하다.’ 라고 이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자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다. 마태복음 5 19절 보세요.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게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릴 건데 이게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명이라는 걸 지킨다고 하면서 지극히 작은 것, 예수로 그걸 해석해 내지 못하고, 그걸 버리고 명령과 규례로만 지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예수가 아닌 그걸 버려버리고 명령과 규례로 가르치는 자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없어요. 천국은 다 큰 자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천국에 합당치 않은 자다. 라는 뜻이에요. 크고 작은 차서를 지금 규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구든지 이를 행하며

(이게 뭐에요? 앞에서 그 안에 빛을 두는 것. 이게 착한 행실, 그 일,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를 행하며가 뭐에요? 그 아들을 마음에 두고 아들로 그 율법, 선지자를 이해하여 그걸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 천국에 합당한 자다. 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방심하면 성경은 전부 율법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죠? 그런데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게요.)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면 이제 오늘의 본론인 본문 17절부터 제가 한절한절 차근차근 살펴 드릴게요. 본문1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당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신 분이라고 그러죠. 17절 보세요.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과 선지자는 모세오경, 율법과 선지서 구약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약

예수님은 지금 그 구약을 ‘플레로’ ‘꼭 채워’ ‘Full Fill’ 이라는 뜻이거든요. 꽉 채워서 완성하러 오셨다. 라는. 꽉 채워서.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을 꽉 채우러 왔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이 구약은 미완료, 미완성인 거죠. 예수님이 거기에 꽝 들어가야 이게 구약이 꽉 채워진다고 그래요. 뭘로 꽉 채워진다고 그러는 거예요. 완성이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가 오지 않으면 거기에 끼어들지 않으면 구약은 말씀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죽이는 것 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을. 구약을. 그리고 바울은 그거를 악한 것이다. 라고까지 이야기해요. 예수로 결론나지 않는 구약은 악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줬다. 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안식일도 잘 지키고 부정한 사람들과 뭐 먹고 친구삼아 이렇게 돌아다니고 이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거 다 율법에서 금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몇 개 어긴 거잖아요. 예수님이. 그게 꽉 채운 거예요? 완성한 거예요? 아니잖아요? 그 얘기는 아닐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완성이라는 게 도대체 뭐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서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게 아니라 율법의 심판, 율법의 그 저주를 다 받아내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더 이상 당신의 백성들을 참수하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다 지키러 온 게 아니라 그 율법에게 맞아 죽으러 온 거라니까요. 심판받으러 온 거예요. 율법한테. 예수님이 뱀이 되 갖고요


만일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셨다면 육신인 우리가 그걸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이게 모독을 당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심판을 받아 죽으심으로 율법과 선지자를 은혜로 완성해 내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와 그 율법과 선지자를 그 구약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견해로 아주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어요. 그 하나는 예수님이 구약에 대해서 특히 구약의 핵심을 구성하는 율법에 대해서 철저한 반역의 의지를 가졌다. 그 율법은 아니야~ 저거는 부셔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이 오히려 율법 아래에 예속되는 정서를 공공연하게 표방했다. 라는 그런 의견이에요. 그래서 십일조를 내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고 또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셨던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한단 말이죠. 이렇게 첨예하게 두 가지로 대립이 되요


오늘날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어떤 견해를 견지하고 있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왔다. 라는 의견을 강조하는데 있어서는 전자 쪽의 의견이 기울어지는 것 같지만 소위 말하는 성화의 차원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약의 율법을 믿음의 잣대로 들이미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마디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라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기독교 교리 자체가 갈팡질팡, 관념으로만 동동 떠다니고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러한 성화주의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그 전가의 보도 같은 구절이 지금 우리가 읽은 바로 이구절인 거예요. 봐라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신 거지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발버둥쳐야만 한다. 그것이 제자 된 삶의 마땅한 규범이다. 아니 딱 꼬집어 그걸 율법이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말씀이라고 이렇게 두루뭉실 이야기를 하죠. 그건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 일획도 이렇게 소홀하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은 다 지켜내야 되는 거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되는 거야~ 채워야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 보면 역시 율법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요. 이러한 논리가 성경을 규범에 대한 강박 같은 걸로 이렇게 변질시켜 내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보면 답답한 거예요. 불안한 거예요. 두려운 거예요. 안 되거든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리고 좋아하시는 신명기 28장으로 가면 그러한 후자적 접근이 얼마나 우매한 접근인지가 잘 나타나 있어요. 신명기 28 1절 보세요.


신명기 28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말씀이 나오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여러분 이 병이 무슨 내용인지 아세요? 이거? 상한은 뭐고 학질은 뭐고? 한재는 뭐고 풍재는 뭐에요?)

 

여기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게 나오고 명령과 규례라는 게 나오죠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은 성경의 진술대로 예수그리스도로 축약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가 말씀이다. 라고 요한복음 1장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예수란 말이에요. 말씀이 나와요


그런데 유한의 이 이성, 현상계의 이성은 그것을 명령과 규례로 밖에 인식을 못해요

? 그 말씀 안에 담긴 예수는 ‘무스테리온’ ‘비밀’이거든요

그래서 이 유한이 말씀을 대하게 되면 그걸 반드시 명령과 규례, 도덕과 윤리 수준으로 밖에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간디 같은 사람, 루소 같은 사람이 이걸 다 명령으로 규례로 규범으로만 본 거예요. 그리고 그걸 지키려고 애를 썼던 거죠. 오죽하면 법정 스님 같은 분도 이 산상수훈을 그렇게 칭찬했겠어요. 정말 훌륭한 경전이라고. 그러니까 유한에 갇힌 인간들이 율법과 선지자, 즉 말씀을, 예수그리스도를 이해를 한다, 라는 건 언어도단이에요. 그러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과 규례로 받아들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과 규례가 되면 반드시 '그것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가지고 상벌이 나누어지게 되요

말씀이 명령과 규례가 되면. 그죠? 그래서 신명기 28장의 상 받는 자, 복 받는 자들의 이야기와 저주받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고 이게 명령과 규례가 되면 너희들은 지켜야 되는데 그래 지켜봐 그럼 복 준다. 당연히 명령과 규례니까 그런데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어~ 15절 이하. 저주 받는 거예요. 명령과 규례가 되면 그래요. 상벌이 있어요


그러니까 상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은혜 아래에 있지 않다. 는 이야기에요. 말씀을 명령과 규례로 그들은 법 아래에 있다. 라는 그런 증거란 말입니다. 20절을 보시면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란 어구가 나오죠? 그건 그를 잊는 것이 악한 행위이다. 라는 말. 직역을 하면 '말씀 속에서 예수를 발견해 내지 못하고, 그는 어디다 빼먹고, 말씀에서 예수가 빠져버리면 뭐해요? 명령과 규례만 남죠. 그게 악이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 명령과 규례에 그냥 묶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가 말씀이 아들이 빠져 버리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마음에 당신의 신을 두겠다고 했잖아요. 새 언약에서. 에스겔서 36. 예레미아 31장에서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 예수그리스도가 아들이 그 안에 있으면 반드시 성경을 아들로 보게 되어 있고, 말씀을 아들로 이해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없을 때에는 명령과 규례로 보게 되고 그 명령과 규례에 묶여 버리는 거예요

그 아들이 주는 은혜에 의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아들이 빠져 버리면 명령과 규례에 그냥 묶여 버린다니까요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심판이 떨어져요. 어떻게 떨어지는지 보세요. 21절 이하를 보세요.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여기서 염병은 단순히 전염병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부수어 버리다. 라는 무서운 심판의 언어에요. 부수어 버려요. 깨버리다. 멸망시켜 버릴 거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그 부수어 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 심판, 지옥 그걸 어떻게 설명하냐면 폐병, 열병, 상한, 학질, 한재, 풍재, 썩는 재앙 이렇게 나와요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가 ‘예라콘’ ‘쉐다파헤레브’ ‘하르후르’ ‘다레케트’ ‘카다하트’에요

이게 다 열과 관계된 단어에요. . 물이 없음과 관계된 단어란 말입니다. 이게 다. 단순히 질병의 목록을 나열해 놓은 게 아니에요. 그 단어들은 전부 물이 없는 곳에 열만 가해짐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가뭄, 열병,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이런 거예요

(이거를 굳이 조선의 질병의 목록으로 해석을 해 놔가지고 뭐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그냥 대충 읽고 있는 건데) 

그게 곧 멸망이요. 지옥이다. 이렇게 지금 말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겠대요. 그렇게 멸망시켜 버리겠다. 라는 거예요


어떻게? 사막으로, 광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기근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죠. 물이 없다. 광야, 사막, 말라비틀어짐 이게 뭐라고 그랬죠?

'말씀이 없음'이라고 그랬잖아요. 말씀의 기근, 기갈 그러죠? 그게 심판이에요. 이게 지옥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그게 망하는 거예요. 그게 내 벌이다. 그랬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말씀, 아들을 두지 않는 게 벌이다. 그러는 거예요. 지금요

그래서 전부 그 열병, 말라비틀어짐, 사막, 광야 이런 단어들을 여기다 지금 쭉 나열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리에서 뛰쳐나와서 선악과 입에 물고 주체의 자리에 앉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에 악이라는 게 생겨났죠? 그리고 고통이라는 게 생겨났어요. 인간이 주인공, 주체가 되면서부터 인간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면 그들이 선악판단을 갖고 법을 만들죠. 선악 판단이 인간에게 있게 되면 인간은 그 선악구조를 갖고 반드시 법을 만들어요. 그 인간의 선악구조에서 나온 게 사회법, 도덕, 윤리, 양심 이런 거예요. 인간의 선악구조로 법이 생긴다고요. 거기에서


그리고 그 법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상들을 판단하고 평가해요. 그 법에 의해. 인간이 주체가 되면 그래요

그게 바로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의 인본주의라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법 평가의 기준에 의해서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를 받기 위해 그 법 아래에서 훌륭한 존재로, 순결한 존재로, 괜찮은 존재로 평가를 받기 위해 그 법에 자기들이 만들어 선악구조로 만들어 놓은 그 법에 종속이 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인간이 주체가 되면 그래요


그렇게 인간들의 판단 기준이 인간들 자신에게서 나온 선악구조가 되어 버리면 인간들은 그 법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분투를 시작하게 돼요.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그 법에 묶여서 그 법 아래에서 자기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이제 달리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인간들이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어 버리면. 


? 인간의 전체의 보편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요. 인간이 주인공이니까.

그렇게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빠지게 되면 인간들은 반드시 발전과 성숙과 번영을 욕망하게 되요. 그게 인간들이 상정해 놓은 선이거든요.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인데. 아무튼 인간들은 그걸 선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정지, 변화 없음, 퇴보 이런 건, 악으로 여기죠.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약한 자, 실패한 자 이렇게 조롱하잖아요. 이게 악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부흥한 자, 번영한 자, 변한 자, 성숙한 자, 이건 선이다. 라고 자기들이 인간들이 그냥 상정해 놓은 거란 말이죠. 그리고 그 구조 아래에서 자기들이 상정한 그 법에 의해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거예요. 혈안이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으로 명령으로 오해되어지면 이렇게 인간들이 지옥을 살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하나님은 분명 인간들에게 생육과 번성을 명령하셨죠? 이게 인간들이 욕망하는 바에요. 생육, 번성 커지는 거예요. 생명이 되는 거예요. 많아지는 거예요. 이게 물고기가 갖고 있는 의미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뭉쳐야 되고 많아져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으로 생명을 삼으려고 하는 게 생육과 번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생육하라. 번성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 이런 명령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욕망하는 게 그거잖아요. 다스리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번성하고 싶고, 부흥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게 우리의 욕망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명령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그 안에 메시지를 담아 놓은 건데 그걸 표피적으로 법으로 명령으로 그냥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그걸 욕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게 옳다. 선이다. 라고 자기들끼리 주장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어디서 그렇게 명령했습니까? 우리가 문화명령이라고 이야기하는 창세기 1장에서, 27절 보세요.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게 배경이에요. 27절이. 그리고 28절에서 명령이 떨어지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복을 주시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라.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말씀하셨죠? 복을 주시며.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 이런 명령이 떨어지고 있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은 어떻게 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요?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그 십자가를 심어 놓은 거란 말이에요. ? 어떻게 알아요? 여기 보시면 이 복으로 이것들이 복으로 주어지고 있는 배경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거기는 남자와 여자가 아직 분류되기 이전이죠?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하나인 남자와 여자가 아직 연합되어 있는 상태 그 사람에게 준 명령이란 말이에요.


창세기 2장부터는 남자 안에서 여자가 분리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제 선악과 죄, 타락, 뱀 이런 것들이 막 등장하는데 창세기 1 1절부터 2 3절까지는 사람이 아직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기 전이에요. 그래서 단수에요. 아담, 사람을 만들자. 그래놓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내용인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남자와 여자가 연합이 되어 있는 이 상태가 뭐죠

예수그리스도가 죽음, 아담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옆구리가 뚫리고 그 여자가 이 아담에 의해 아담의 것으로 이렇게 창조가 된 상태. 이게 다 인정되고 이해되어지는 이 상태가 이 연합이란 말이에요. 나는 당신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존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게 남편 안으로 들어가 연합된 신랑과 신부의 관계란 말이에요. 이게 사람이란 말이에요. 사람. 하나님 나라의 백성,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십자가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사람인 그 상태, 이게 바로 생육이며 번성이며 충만이며 다스림이며 이게 나라라는 의미란 말이에요. 이게요. 그래서 그 배경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십자가가 예수가( 생육, 번성, 제가 생육, 번성은 창세기 때 설명해 드렸잖아요.) 생육, 번성, 충만, 다스림, 정복 이런 거라는 그런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예수를 빼버리고 그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걸 명령으로만 받아드리면 어떻게 되요 그래 열심히 노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분열이 있고, 다툼이 있고,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애씀이 있고 고통이 있고 피곤함이 있고 고단함이 있고 눈물이 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을 짓누르는 짐인 거고 그게 지옥이란 말이에요. 그걸 성취해 내느라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 삶 자체가 지옥이에요. 말이 없음, 말씀이 없음. 보세요. 예수가 빠지니까 뭔가 열심히 추구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 그게 다 무거운 짐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너희들을 저주하고 심판할 건데 사막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말이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릴 거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 받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


뭐 아닌 거 같은데? 살아 보세요. 말씀이 없이 그 어떤 것을 성취해 내도 우리에게 공허와 허무밖에 안 와요. 그걸 지옥이라고 그래요. 그거를요. 그 모든 게 다 인간들이 ‘나’라는 개별적 자아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지옥이 역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거란 말이에요. 자아를 챙기기 시작면서부터. 그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기서 빼내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렇다면 그러한 지옥이라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첫 번째 하실 일이 뭐겠어요? 

지옥이 왜 생겼어요? 심판이 왜 생겼어요? 인간이 주체가 되면서부터 그 심판이 생겼단 말이에요. 지옥이 생겼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거기서 빼내기 위해 해야 될 첫 번째 일이 뭐에요? 그 주체, 자아를 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흐물흐물하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다시 끌어 내리는 게 구원이에요. 그래야 인간들은 자기의 선악구조로 남과 자기를 판단하지 않게 되고 거기에서 자유가 일어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전부 우리 인간들이 상정한 그 법에 의해 조바심 내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고, 쪽팔려 하고 이런다니까요. 명품 백 안 들으면 남들이 우습게보니까 이걸 들어야 되는 부담감. 물건이 많이 들어가요. 뭐 튼튼하기를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합의하여 법으로 상정해 놓은 그거. 선악구조에 의해서 이게 가치야~ 이게 좋은 거야~ 라는 그거에 종속 되어 사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고 그런다니까요. 그걸 얻어내기 위해서 그게 도대체 뭐라고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올인하며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서 그들의 자아를 차압해 버리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아를 차압해 버리세요. 자아가 독립을 하면서 선악구조가 생기고 그 선악구조에 의해 인간들을 묶는 법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자아를 원래의 창조의 자리, 없음의 자리로 부수어 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선악의 주체의 자리에서 해고시켜 버려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하고 있는 생육과 번성과 정복과 충만, 다스림 등이 성공이 아니고 승리가 아니며 복이 아니다. 라는 걸 가르치신단 말이에요

뭐가 복이에요. 그럼? '예수가 복이다'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이 역사를 종횡무진 달리면서 자아라고 하는 이 자아의 울타리로 끌어 들여 자아로 쌓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제 하나하나 이렇게 끊어 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마가복음 10 29절 보세요.



마가복음 10 29-30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나와 복음 때문에~ 이게 위하여가 아니에요. ‘헤네카’가 부사인데 때문에~에요. 나와 및 복음 때문에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 전토가 떠나간 자는, 떠나간 자는 그가 떠나는 게 아니라 이것들이 떠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게 떠나간 자는 금세에서 ‘눈’,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그것들을 다른 종류의 것으로, 이 백배가 ‘eJkatontaplasivwn헤카톤타플라시온’ 백배, 이게 ‘플라소’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그게 빚어내다. 창조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창조의 언어에요. 그러니까 그것들이 떠나가고 지금 창조의 영역의 것으로 백배, 지금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좋은 것. 그런데 어떤 좋은 것? 창조의 영역에 있는 좋은 것. 그걸로 준다. 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면 영생이래요. 여기 보면. 그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아 확장의 재료로 쓰여지는 집, 전토, 형제, 자매, 아비, 어미, 자식이 이렇게 떠나가는 과정을 겪어 내게 되어 있다. 라는 거예요.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 이것도 우리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는 생명을 주는 재료가 되는 게 아니구나~ 를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떠나가는 거예요. 예수로 밖에는 우리에게 생명이 영생이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 거구나~ 를 아는 거, 이게 떠나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다 잘라내서 알거지가 만든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고아 만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뭐에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인간들이 자아의 확장의 재료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 전토, 재산, 형제, 자매, 아비, 자식 이게 다. 그죠? 그러니까 이것들이 오~ 이게 내 생명이 되는 게 아니구나~ 예수가 내 생명인거구나~ 이거를 알게 되는 거, 그래서 예수에게 내 삶을 이렇게 투신하는 걸 자기 부인이라고 그러고 그게 예수와 접붙여지는 영생인 거예요.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유한한 거기 때문에 내가 그걸 생명으로 붙들고 있으면 그게 죽을 때 나도 죽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가 내 생명이 될 때 내 모든 것을 투신한 존재가 예수가 될 땐 그 분이 영원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영생을 갖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요. 그렇게 바꿔내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를.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일취월장, 승승장구 아니에요. 절대로요. 성공번영 부흥, 이런 거 아니에요. 왕창 깨지는 거예요. 부수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육이 살해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보석이 오롯이 그렇게 드러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보석으로 되어 있다는 말 아니라고 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요. 교회, 신부라고 했어요. 보석, 우리가 보석이라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질그릇이라는 육을 역사 속에서 다 박살나는 거예요. 부수어뜨림을 당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살해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 육인 당신이 죽어야 그 안에 있는 예수가 보석으로 드러나는 거라니까요. 그게 기독교에요.


여러분. 자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아확장의 재료를 차압당하고 몰수당하는 삶을 살게 되요. 그래야 자아가 해체되니까. 이게 나였는데 이걸 뺏어 가야 자아가 해체되고 그래야 선악구조, 우리 인간의 선악구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그러면 선한 거고 악이라고 그러면 악이에요. 우리 인간들의 평가나 이런 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이걸 뭐라고 그래요? 천국이라고 그래요. 그걸.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으로 오는 거라고 그러지 우리가 언젠가 가는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오는 곳이면 이미 예수님 때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 라고 했으니까 지금도 와 있잖아요. 어디에? 여러분 안에. 하나님 나라라면서요. 여러분이. 거룩한 나라, 천국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 땅에서 천국을 감지해 낼 수 있어야 된다고, 어떻게? 무슨 천국이 이따위가 있어요? 확 목매달아 죽고 싶은 게 이게 천국이에요? 이게? 그런데 어떨 때 우리가 천국을 잠깐잠깐 맛을 볼 수 있냐면 그렇게 아 이게 바로 이 선악구조에 의해서 내가 지금 부끄럽고 굉장히 쪽팔리고 아프고 분하고 슬프고 이런데, 그게 다 남들의 이목, 그 이목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이 아담들이 만들어 놓은 선악구조에 의한 법이잖아요. 그게.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 자체가 그게 세상의 법이잖아요. 아 이거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평가받는 건 옳지 않는 거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넌 내 백성이야~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 거지. 라고 했을 때, 거기에서 잠깐 몇 초 자유로워질 때, 이걸 천국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이 몸뚱아리가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육적 자아가 몽땅 하나님에 의해 차압이 되고 예수를 머리로 한 그냥 하나의 교회가 될 때 거기는 개별적 자아가 다 몰수당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교회죠. 그죠? 그때에는 거기가 진짜 천국이 되는 거죠. 영원히. 나의 자격이나 됨됨이나 이런 거에 의해 평가 받는 게 아니라 은혜로 아들이 되는 곳이니까. 그걸 배우는 게 신앙생활인데 어떻게 여기에서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고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거기로 그렇게 제한 해 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거의 그 수준에서 다 머물러 있잖아요.


여러분이 지금 자아로 붙들고 있는 걸 여전히 붙들고 있을 때 그게 여러분의 짐이요. 고통의 요인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 자식이 내 자아 나가 되어 있을 때 내 자아의 확장이 되어 있을 때, 그 자식은 반드시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는 자가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그 자식이 골칫거리가 되고 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내 자아가 아니다. 라는 거, 이렇게 끊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자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미워하게 만들겠다. 라는 거지, 실제로 우리가 그냥 보기만 하면 저거 꼴 보기 싫고 이렇게 만들겠다. 는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자식을 사랑해야지, 왜 미워해요?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죠.


그러니까 그런 식의 미움이 아니란 말이에요. 전토, 집 다 마찬가지죠. 그게 우리의 자아구축의 재료가 되면 우리는 조바심을 내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 모으려고 하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게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거예요. 불안함이 되는 거예요. 그게 지옥이라고 그래요. 자아가 살아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이 하나하나 끊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해서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한 평가나 판단에 자유로운 그 상태를 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 ‘천국’ 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


인간들이 결정하고 합의하고 상정한 선악의 틀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나를 투신할 때 우리는 잠깐 잠깐 그런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게 너무 좋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자유를 못 느끼니까. 그 자유를 오매불망 이렇게 바라게 되는 걸 소망이라 그래요.


그럼 보세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곡해하여 그것을 명령과 규례로 받아서 죽어라고 달리는 게 지옥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서 눈물, 고통, 아픔 이런 게 다 오는 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상태는 예수에서 시작하여 예수로 완료되는 하나님 나라와 언약에 대한 몰이해, 말씀에 대한 몰이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주체를 챙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말씀을 이해하면 그 안에 이렇게 객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예수라는 시작이요 끝인 예수라는 말씀을 이해 못하니까 자기가 주체가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지옥이 생긴다고 했잖아요. 경쟁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생기고 그걸 뭐라고 그랬어요. 말씀이 없음. 기근, 기갈이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그걸 지옥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명기 28장이 심판의 상태, 저주의 상태를 에라콘 쉐데파 헤레브 하르흐에르 다레케트 카다하트 등으로 표현한 거라고 그랬죠? 열기, , 가뭄, 바짝 말라비틀어짐 이런 거. 그 상태에 말씀, 예수라는 생수를 부어서 촉촉하게 아들로 살려내는 게 구원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이해하는 거. 예수를 아는 거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교회에서는 다른 거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뭐 청년프로그램 뭐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이런 거 해가지고 좋은 어머니가 되자. 좋은 아버지가 되자. 뭐가 좋은 아버지고 뭐가 좋은 어머니에요? 예수를 흘려주는 게 좋은 아버지이고, 예수를 흘려 내는 게 좋은 어머니에요. 걔를 세상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괴물로 만들어내는 게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아니라.


신명기 28 22절의 그 단어들 열기, 바짝 마름, 사막, 광야 이런 단어들을 다 합쳐서 꽉꽉 짜서 헬라어 한 단어로 만들면 ‘휘레토스’에요. 그게 누가복음 4장에 나와요.



누가복음 4 38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여기 시몬이라는 단어가 뭐라고 그랬어요? 사막, 광야, 말씀이 없음 이런 뜻이라고 그랬어요. 시몬이 베드로 반석이 되어 이제 말씀을 생수를 뿜어내는 자로 바뀌는 게, 이게 시몬 베드로가 갖고 있는 뜻이라고 그랬습니다.)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여러분 여기에 보면요. 병이라는 단어는 안 나와요. 헬라로 원어로 보면. 그냥 열기에요. .

시몬, 광야, 사막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열이라는 게 나와요. 이게 신명기 28 22절에 나오는 그 단어들을 다 축약하면 이 단어에요. 이게. 열이에요. . 열기. 마르게 하고, 바짝 말라 비틀어지게 하고, 푸석푸석하게 하고, 물기를 없애는 거. 이게 열이에요. .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던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 바로 다음에 붙어 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회당안의 귀신 이야기는 단순히 귀신 들려 미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친 사건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서 귀신 들린 자 라고 번역이 된 헬라 어구가 푸뉴마다이모이유아카타르뚜 라고 그랬어요. 푸뉴마는 성령인데 다이모니아아카타르뚜가 뭐에요? 왜곡된 영, 부정한 영, 그런 존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말씀이 영이요 푸뉴마, 생명이다. 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왜곡된 영, 부정한 영, 이건 왜곡된 오해된 말씀 이게 어디에 있어요? 회당, 유대인의 회당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의 회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이모니아 이걸 마귀라고도 이야기하고 하는데, 사실 그 행간에 들어 있는 그 메시지를 catch 를 해야 되는 거죠. 단순히 귀신, 귀신 들린 자, 그걸 고쳤대 그러니까 우리도 예배당에 가서 귀신 들린 자 많이 고쳐야 돼,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왜곡된 말씀, 오해된 말씀, 이걸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이라는 말로도 고쳐서 써요. 다른 복음, 그 왜곡된 말씀이 가득 찬 그 유대의 회당, 그 율법주의의 그 총화 그걸 고쳐내시는 게 회당안의 귀신 들린 자를 고쳐내는 말씀이 가서 그 왜곡된 더러운 말씀을 몰아내는 거예요. 참 성전이 가서 옛 성전을 부숴내는 그 이야기에요. 회당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건, 거기에 붙어 있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갑자기 왜 예수님이 시몬의 장로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여자를 고치냐고요.

자 옛 성전, 회당, 그 집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집에서 나와 그와 똑같은 종류의 집, 시몬의 집으로 가는 거예요. 시몬의 집이 뭐에요? 말씀이 없는 집, 구약, 옛 성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갔더니 거기에 아니나 다를까 열기, 바짝 마른, 사막, 광야가 있는 거예요. 그 집에.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거기에 물을 부어 그를 촉촉한 말씀으로 이렇게 살려 내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엘리야 때에 사르밧 여자, 엘리사 때에 수냅 여인 여러분 이 여자들이 전부 자기가 해놓은 마지막 걸 뺏기죠. 사르밧 과부는 밀가루 한줌 뺏기고, 수냅 여인은 기름 한 병 뺏기죠? 몽창 다 뺏겨서 진짜 주리고 굶주린 자,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니까 밀가루가 퍼도, 퍼도 계속 나오는 풍년, 영생이 오고 기름이 부어도, 부어도 나중에 그릇이 없어서 못 부을 정도로 계속 나오는 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 여자의 이야기.


열로 말미암아 거기에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생수 말씀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냥 이걸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성도에게 반드시 끌어내고 말거든요. 거기에 하나님이 말씀을 붓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여기서. 그 여자들이 둘 다 아들을 뺏기죠? 자기 육의 소산, 나에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였을 때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가 육으로 낳은 것들은 다 뺏기고 새롭게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아들을 다시 받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 이야기하면서 전부 고생했다. 고생했다. 아주 박살났다. 이러면서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라는 어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 여자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 라는 건 뭐냐면 내 육적 아들을 뺏기고 부활의 아들 예수를 받는 거예요. 내 육적 모든 소산, 역사의 모든 열매들을 다 차압당하고 아들로만 내가 사는 거군요. 이 과정을 통과하는 걸, 아들을 뺏기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는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아프다고요. ? 내가 부인되고 내가 나은 것들이 뺏기는 거니까. 그래서 그 고난의 목록 속에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가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아무튼 그 여자, 시몬의 장모는 시몬의 집, 말씀이 곡해된 성전, 옛 성전, 유대인의 회당, 사단의 회, 말씀이 없는 곳, 사망, 광야, 기근, 가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열이에요. .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열을 꾸짖었다고 그러죠. 그 단어가 뭐겠어요?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데를 제가 하나 찾아 드릴게요.



디모데후서 4 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보세요. 말씀을 전파하라~에요. 예수를 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여기 경계하다가 바로 똑같은 단어에요. ‘에피디마오’ 그러니까 말씀과 관계된 단어란 말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그 열을 가뭄을 사막을 가르친 거예요. 던진 거예요. 공격해 버린 거예요. 말씀으로 회당 안에서 귀신을 말씀으로 공격해 버린 거나 똑같은 이야기인 거예요. 이게.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 그 집으로 들어갔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말씀으로 던졌어요. 열기를 공격했어요. 꾸짖었더니 열이 도망갔어요. 떠나버렸어요. 열이 떠났다는 건, 열이 어디로 도망갔다는 게 아니라 열이 그 사막이 광야가 뭘로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 그 여자가 일어났다 그러죠? 이 단어가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 단어에요. 마태복음 20 19절 보세요.



마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 단어란 말이에요. 이게 시몬의 장로가 열기를 뺏기고 일어나다. 라는 뜻이에요. 일어났어요. 부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활. 그리고는 수종들었다고 그러죠. 너무 고마워서 부엌에 가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렇다는 말이 아니라 뭐 발 닦아주고 뭐 수건 갖다 주고 이런 수종이 아니라 이 단어는 ‘디아코네오’ 이 단어가 뭐냐면 ‘디아코노스’라는 단어에서 온 건데 이게 목사, 말씀을 전하는 자의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수종들었다는 건 말씀으로 갑자기 이 여자가 열이었던 사막이었던 광야였던 여자가 부활하여 일어나더니 갑자기 아들로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더라는 뜻인 거예요. 말씀이 나오더라 라는 뜻이에요.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아들과 관계없던 자가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아들만 나와요. 십자가만 나와요. 예수만 나와요. 피만 나와요. 이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셨다. 라는 말이 어떤 말씀이겠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예수라는 후사, 다른 후사는 다 뺏기고 아들, 다 뺏기고 예수라는 후사를 낳게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다는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 구약 다른 말로 옛 성전 또 다른 말로 이 현상계인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육적 후사를 내 놓으면서 그것으로 자아를 증명하고 자아를 확장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오답이고 예수만 정답이다. 라는 걸 예수님이 입증하러 왔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왔다. 에요. 이게요.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12 9절에 우리는 약할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그러죠. 그 말은 내 은혜는 그 정도면 된 거야 임마~ 이 말이 아니라 내 은혜 ‘케리스’라는 건 모든 이에게 그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살고 있고 어떠한 상황과 사건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그게 다 만족이라는 이야기에요. 이 사람에게도 그 은혜가 만족한 상태로 있는 거고 저 사람에게도 이 은혜가 만족한 상태로 있는 거예요. 그 뜻이에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래 놓고는 내 은혜를 바로 그 뒤에서 내 능력이~ 로 바꿔요. 내 능력이 너희들의 약할 때 온전하여 진다고 그래요. ‘테텔레스타’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 단어란 말이에요. 너희들이 약할 때 이게 질병이라는 뜻도 있지만 도덕적 연약함이란 뜻도 있어요. 개차반이라는 뜻이에요. 거기에서 내 능력 내 은혜가 완전해진다. 완성된다. 라는 거예요. 다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훌륭해 졌어요. 말씀으로 이렇게 멋지게 변했답니다. 를 증명해 내는 게 아니라 그 ‘스콜롭스’ 가시, 사단의 가시로 이렇게 푹 찔린 사람처럼 오죽하면 그게 말뚝이란 뜻이거든요. 가시가 아니에요. 몇 미터 되는 쇠꼬챙이인데 말뚝만한 쇠꼬챙이에요. 이걸 갖다가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그냥 폭 뚫어버린 거예요. 포로들을 잡아서 이렇게 뻥 뚫은 거 그게 ‘스콜롭스’란 말이에요. 그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처럼 아프고 쪽팔리고 창피하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런 자가 산 자다. 어떻게요? 내가 살렸으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해 내는 게 역사이며 인생인 거지. 여러분이 말씀을 갖고 뭐 대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건 이미 완료되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만 정답입니다. 이거를 빛으로 이렇게 들어내면서 사는 거예요. 증거하고 설명하고 전이하는 자로 살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빛이다. 에요. 너희는 빛이다. 역사와 인생은 예수라는 자손을 낳아야 사는 거지.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절대 살 수 없대는 거예요.

13:15 5:58

먼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어떻게 요약해 주시는지 한번 보세요.



마태복음 22 36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가 여기에 나오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는 당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셨다. 라고 그랬어요. ‘테텔레스다이’ 다 이루러 왔다. 라는 거예요. 완성하러 오셨다. 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율법과 선지자가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거래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 말은 이게 첫째고 이게 둘째다. 라는 말이 아니라 이게 똑같은 거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이웃을 사랑하는 거다. 라는 뜻이에요. 이건 같은 이야기다. 라는 이야기거든요. 이거 같은 이야기에요? 이거. 이게 더 큰 계명, 이게 작은 계명이 아니라 이게 같은 이야기다. 이런 뜻이에요. 둘째도 이와 같다. 앞의 거와 같다. 라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걸요.


40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두 계명 안에 모든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이 매달린다. 에요. 매달린다. 라는 게 뭐에요? 이 두 계명을 이렇게 쭉 끌어올리면 구약,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렇게 쭉 따라 올라온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는 우리에게 명령과 규례로 준 거에요? 아니면 다른 의도로 준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 구약 전체가 이렇게 매달려 있다는데 이걸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거예요? 아니면 다른 의미로 준거에요. 생각해 보시란 말이에요.


유한인 인간이, 현상계의 유한이 무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영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유한은 무한을 인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인식이 안 되면 사랑을 못해요. 솔직히 하나님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누군데요? 어떤 분이에요? 설명 좀 해주세요. 저한테.


그래서 하나님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창세기 1 1절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요. 그 분은 시작이 어떻게 됐고~ 이렇게 설명을 안 하고, 그냥 하나님이 계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셔~ 그런데 설명이 안 돼. 유한은 무한을 인식할 수도 없고 포착할 수도 없어요. 따라서 해석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어요. 더더군다나. 그런데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에 매달려 있다면 이걸 지키려고 준 거겠냐고요. 아닐 거 아니에요? 이게 이 두 계명에 다 매달려 있는 거라며요.


그런데 이 두 계명이 뭐냐면 유한아 무한을 사랑해 봐라~ 라는 거란 말이에요. 그 무한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역사 속에서 드러나냐면 이웃을 사랑하는 거란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보자고요. 하나님을 유한이 무한을 사랑하는 게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거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한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해요. 사랑이 뭔지를 알면 여러분이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요



요한1 4 9절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의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 앞으로 한번 가보게요. 마태복음 3 16절 보세요. 유한이 무한을 사랑할 수 없고, 이 유한과 무한은 사랑으로 소통이 안 돼요. 그게 유한과 무한의 고랑이란 말이에요. 구렁. 소통이 안 돼요. 이 사랑으로 소통이 안 되는 이 관계를 불의라고 그래요. 이걸 소통되게 만드는 걸 화목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 유한과 무한의 이 사랑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이 관계를 소통으로 화목으로 뚫기 위해서는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되어 들어와야 되요. 이걸 성육신이라고 그러고 십자가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3 16절에 나오는 거예요. 보세요.



마태복음 3 16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는 기쁨 안에 있는 내 아들이다. 내 사랑이다. 에요. 직역을 하면. 내 아들이다. 내 사랑이다. ‘아가페또스’ 라는 형용사에 관사가 붙어서 존재적 개념을 나타내는 거거든요. 사랑하는 아들이다. 가 아니라 내 사랑이여 아가페여 내 아들이다. 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이에요. 아들 안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꽉 차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들을 보면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내 마음이다. 에요. 아들에 내 마음을 담았다는 거예요 아들의 삶을 통해 내 사랑을 알라는 거죠


이가 내 아들이고 이가 내 사랑이야~ 아가페야~ 신적 사랑 아가페야~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 놓고 요한 1 4 9절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됐다. 하나님의 사랑, 아들, 우리에게 나타냈다고 그래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그러죠. 그러면서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 소통이에요. 사랑으로의 소통, 그 아들을 보냈다고 그래요


그러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이게 이해가 되어져요. ~ 우리는 없음인데 하나님의, 하나님의 희생과 능력과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만들어 준 거구나~ 이게 우리가 말씀, 아들을 받는 거잖아요. 그 사랑을 이렇게 받아 말씀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흘러넘치면 이것이 아들로 빛으로 말씀으로 흘러넘치겠죠? 그러면 그 사랑이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아들을 보내어 우리 안에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자, 하나님의 사랑 그걸 가진 자를 ‘모노게네스’ 아들이라고 그래요. 그게 우리에요. 아들

그걸 우리에게 아들을 부어줬을 때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 아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어 있어요. 전이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입으로 설사 못 전한다 하더라도 모세처럼 말이 어눌하여 못 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예수의 삶을 그대로 실제화 하여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아들을 사랑을 전이하는 자가 되요. 그걸 사랑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시란 말이에요. 사랑, 사랑하는데 내가 예수라는 사랑, 그 아들, 말씀을 충만하게 받아서 상대방에게 그 말씀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그리하여 그를 영생과 구원으로 초대하는 이거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딨어요. 그래서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을 몹시도 사랑하는 거죠? 누가 사랑이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가. 무식한 인간들이 말이야. 이거보다 어떻게 더 사랑해요. 예수만, 사랑만 이야기 하는데, 빛만 이야기하는데, 말씀만 이야기하는데, 아니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것밖에 없어요



요한1 4 7절 보세요.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보세요. 하나님을 아는 걸 사랑한다. 라고 그러잖아요. 여기서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하는데 이거 호격이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자들아~ 가 아니라 교회야 너희들은 본질이 사랑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거든. 그래서 그 사랑이 너희들에게 부어져서 그 사랑이 반드시 너희들의 삶으로 나타나게 향기로 나타나게 되고 그게 흐르게 될 거거든.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하는 자들이야~ 그러니 우리 서로 사랑하자. 당연히 사랑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으니까요. 왜 예수로 부어지게 되어 있어요. 말씀으로 부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예수를 서로 살고 이야기 하는 걸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다. 이렇게 쉽잖아요. 사랑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되먹지 못한 인간들의 그 사랑, 이걸로 이해를 하면 요한1서는 하나도 이해가 안가요. 왜냐면 우리 전체는 그 사랑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요한1서 읽으면서 전부 불안한 거죠. 내 안에 하나님이 없나~ 이렇게. 여러분 사랑이라는 건 지속적이어야 되고 변개되면 안 돼요. 그런데 그냥 조변석개하잖아요. 우리의 사랑은. 그런데 이 사랑을 예수로 바꿔 보세요. 그러면 요한1서는 너무 쉽죠? 하나님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이신 예수를 그 말씀을 하나님의 그 마음을 뜻을 우리가 살아내며 주고받는 거예요. 그걸 알아듣는 이가 그렇죠~ 그 말씀, 그 예수, 그 아들 땜에 내가 산거죠. 이게 사랑하는 관계에요.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이런 사람들 보고 넌 어떻게 예수를 믿고 아직도 그렇게 사랑이 없니? 이런 얘기 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그 뱀이 되어 죽으신 예수, 말씀, 아들이 드러날 때 그래~ 그래도 저 웬수가 아들을 사랑을 빛을 드러내며 사는 거야~ 이렇게 얘기해 주시면 되는 거예요. 뭘 대단한 사랑을 그렇게 원하세요.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안다. 이게 사랑이다. 분명하게 이야기 해 주고 계세요.

요한1 4 11절 보세요.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확실하죠. 이제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아들을 말씀을 부어주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당연하지 않니~ 에요. 그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아들로 소통이 안 되니~ 그 예수 사랑으로 소통이 안 되니~ 이런 이야기란 말이에요.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보세요. 감지가 안 돼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로 예수를 내놓는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거다. 라는 거예요.)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랑이 ‘테텔레스다이’ 완성하다. 라는 거예요. 사랑이. 그러니까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사랑하는 이들이고 여러분이 예수가 완성해 놓은 율법과 선지자 그 사랑을 받은 분이란 말이에요. 11절에서 마땅하다.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이 말이 ‘헤일로’ 빚을 지다. 라는 뜻이거든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러죠.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라고 그러는 거예요. 빚진 자라는 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내가 빚을 졌으니까 딴 사람을 사랑해야지 꼭 이렇게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흘려 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서로 서로 그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사랑으로 소통하게 되어 있다. 이게 빚진 자인 거예요. 내 놓으라는 거예요. 받았으면 내 놓으라는 거예요.

로마서 13 8절 보세요.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어떠세요. 하나로 다 통하죠. 그죠? 이거 남들에게 돈 꾸지 말라는 얘기 아니에요. 돈 없으면 필요하면 꾸기도 해야지 뭐 그게 아니라 사랑의 빚진 자들아 사랑 내놔~ 서로 서로 사랑 내놔~ 남을 사랑하는 자, 그 예수를 내 놓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그러죠.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왔다. ‘테텔레스다이’ 이루러 왔다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사랑을 내 놓은 자는 율법이 이루어진 자죠.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율법을 쫙 나열한 다음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게 그 사랑으로 완료됐다. 라는 뜻이잖아요.)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하냐고요. 그러면 그렇게 완성이 됐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그 이웃사랑으로 증명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아들, 사랑을 아는 자들 아~ 하나님이 그 율법을 완료하시고 그리고 율법의 참소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구나~ 그래서 우리는 그 법 아래에서 남들의 이목이나 평가나 나의 됨됨이나 성숙 이런 걸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 때 뭐가 없어져요. 두려움이 없어지죠. 그걸 천국이라고 그래요. 하나님 나라라고 그래요. 요한1 4 17절 보세요.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왜 예배당 안에서 자꾸 어떤 성숙의 공식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냐고요. 넌 아직도 예수를 믿는다고 그 모양이야~ 이러면서. 헌신의 정도가 그게 뭐니~ 이러고. 헌금 내역이 이게 뭐야~ 집사가 장로가 십일조도 안 해 뭐 이러면서. 그 사랑, 예수로 완료된 율법 그래서 ‘노모스’ 법이라고 하잖아요. 그거는 자유케 하는 법이에요. 율법, 야고보서에 나오는, 새로운 법, 은혜의 법이란 말이에요. ‘노모스’ 그 법아래 있는 자들은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제 망고땡이네. 막 살아도 되겠네. 이게 아니라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삶을 다 맡겨 놨으면 어떡할 뻔 했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예수가 이렇게 이루어주셨대~ 사랑하시란 말이에요. 그게 말씀이 있는 자들이 삶인 거예요. 선악 구조하에서의 자신의 신분이나 성숙의 정도나 소유의 다소 등에 따라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그 사랑이신 예수 아들이신 예수를 아는 자들의 삶, 그걸 천국이라고 그래요.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자유인 거예요.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자유.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아들로 완성하시러 오신 거예요. 이렇게 유한과 무한의 화해를 위해서 사랑으로의 소통을 위해 예수가 오셨어요. 하나님이시며 인간, 하늘과 땅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 하늘과 땅으로 오신 공생애 사는 예수가 첫째 예수가 죽어야 율법의 일점 일획이 완료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사라질 때까지~ 에요. 하늘과 땅이 사라지면 사라질 때까지 율법과 선지자 일점 일획이 완료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은 다 완성된다. 라고 이제 개역성경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을 해놨지만 그게 그 얘기란 말이에요. 천지, 예수가 죽어야 율법이 완성된다. 그 이야기. 그 일점 일획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기도하겠습니다.

 

sty_�Amo@ �� t-size:10.0pt;line-height:160%;font-family:"바탕","serif"; mso-bidi-font-family:굴림;color:black;mso-font-kerning:0pt'>지금 마음이 청결한 자가 이제 하나님을 볼 것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 그래요. 그런데 그 선의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그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시편 73편이에요. 그런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어요. 어떻게 하나님 모르는 저들은 죽을 때도 때깔이 곱게 죽고, 고통이 없이 죽고 어떻게 돈을 안 벌려고 해도 저렇게 더 많이 벌고 살이 쪄서 눈알이 다 튀어나오나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나는 뭡니까? 아침마다 징책이요. 종일 재앙입니다.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행하는 여호와의 선입니까? 나중에 아삽이 알죠. 이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 행함이 맞네요. 그걸 하나님을 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요동하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현실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들 속에서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되죠? 그게 베드로의 이야기에요. 의심하는 자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전혀 안 흔들린다는 말이 아니에요.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지금 만들어 가고 계시다. 라는 뜻이지 전혀 흔들리시면 안 돼요. 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조금씩 거기에서 요동치 않게 된다고요. 시편 46 1절 보세요.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땅과 바다는, 역사 속의 땅과 바다는 흉흉하고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은 자들은 그것과 함께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뿌리박고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 피난처가 나거든. 이미 너는 방주인 내 속에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그게 너를 절대 못 죽여~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요. 너를 보지 말고 네 현실을 보지 마~ 그거 보면 사망의 물에 빠지게 되어 있어~ 그거 이겨보겠다고 네가 애쓴다. 거기서부터 넌 물에 한발씩 빠지기 시작해~ 일단 나를 붙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안 빠져요. 그게 가만히 있어~에요. 우리가 가만히 있음으로 하나님이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는 거예요. 이게 역사의 목적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애써서 헤엄쳐서 가나안으로 건너가는 거 이거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이 열방과 세계 중에 높임을 받는 그 자리에 쓰임 받으셔야 되요. 여러분은. 그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진짜 마음이 청결했던 분은 누구 하나에요? 예수님이죠. 그 분은 하나님의 뜻만 보고 쫓아가신 분이에요. 두 마음 품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 있으셨어요. 오로지 한 곳만 바라봤어요. 아버지의 영광. 그게 청결한 마음이에요.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조차 아버지의 뜻을 보신 분이에요. ~ 이게 아버지의 뜻이군요. 아버지 이렇게 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자녀 삼으시는 아버지의 그 놀라운 지혜와 언약의 성취와 능력과 영광과 긍휼과 사랑이 이 안에 들어있는 거군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게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4 9절 보세요.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을 보는 건 예수를 알아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거란 말이에요. 그 예수가 우리의 모든 복을 완료하여 수여하셨다. 라는 거. 그게 믿어질 때에 우리의 역사 속 환경이나 현실은 그렇게 큰 무게로 우리를 누르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그 마음.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난 예수 안 믿으면 큰일 날 존재구나. 이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예수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렇잖아요. 안 되죠? . 신앙생활이 뭐 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를 붙드세요.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다 끝났는데 계속 못 알아 듣는 것 같아서 반복을 하는 거예요. 이해가 가시죠? 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