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07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2

마태복음 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본다. 이게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입니다. 반복하여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산상수훈의 내용은 이미 창세전에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은 이들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증상과 반응과 현실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습니다. 절대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 에 관한 내용이 아니에요. 히브리어에서 복이라는 단어는 언약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아요. 복이라는 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무상의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전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이미 모두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맞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이신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마음이 청결하신 분이 맞죠? 복 있는 자는 마음이 청결하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찔리죠? 정말 여러분의 마음이 청결하십니까?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고 그랬는데 그 하나님이 보이세요? 무슨 의미일까요. 이게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겠죠? 성경은 마음이라는 단어를 심장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써요. 그러니까 마음은 생명과 직결된 어떤 것이다. 라는 거예요. 잠언 4 23절 보세요.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디에서 난다고 그래요?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난대요. 그러니까 마음이 잘못되면 죽는 거예요. 예레미아 11 20절 보세요.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여기서 심장이 마음이에요.)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는 인간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래요. 요한계시록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시록 2 23절 보세요.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살피시는 분이에요. 그 마음이 생명과 맞닿아 있으면 산 존재이고 그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있으면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란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다 포함한 인간의 전인격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게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이 청결할 수 도 있고 더러울 수도 있다는 거예요.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세요. 복 받은 자는 마음이 청결하다. 그 복 받은 자 마음이 청결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성경은 모든 보편적 인간들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거라고도 이야기를 해요. 예레미아 17 9절 보세요.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세상에서 모든 걸 다 통틀어서 제일 더러운 거 하나 고르라고 하면 사람의 마음이래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거라는 뜻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모든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먼저 청결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정확하게 규명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청결이 뭐에요? 청결의 사전적 의미는 티 없이 맑아서 정직하고 사특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상태에요. 정말 성경이 말하는 청결이 그런 것일까요? 그러면 저는 자신이 없어요. 속에 더럽고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선하고 착한 생각만 하는 것을 청결이라고 그럴까요? 보통 여러분은 이 대목을 배우면서 그렇게 마음을 청결하게 가꿔라 그래야 복 받는다. 그래야 하나님 볼 수 있다. 그래서 열심히 청결히 가꿨잖아요. 닦아지던 가요? 그 마음. 청결한 마음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마음이 맞아요? 그렇다면 중세 때의 수도원 운동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쿤난 공동체나 에센에파의 그 성결 운동, 이런 기독교 역사 내내 기독교의 암적인 존재로 기생해 오던 신비주의자들의 그 열심, 그 사람들도 깨끗이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심산유혹에서 수도와 정진을 하는 스님들의 열정, 이런 걸 다 청결의 법주 안으로 끌어 들여서 묶을 수 있습니까? 적어도 그분들은 우리보다는 청결하잖아요. 이 청결이 그 사전적 의미의 청결이라면, 그들은 과연 그들의 열심을 바탕으로 청결을 성취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본대잖아요. 성경이 말하는 청결은 인간들이 수도와 정진과 열심을 통하여 만들어 낼 수 그런 종류의 청결이 아니에요. 성경은 인간들을 스스로 그들의 마음을 청결하게 지켜낼 수 없다는 걸 여기저기에서 반복하여 단호하게 선언해요. 로마서 7 15절 보세요.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 마음, 내 생각을 내 마음대로 못 움직이겠다. 라는 거예요. 바울이 말년에 쓴 글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바울은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어요. 청결하게 못 만들었단 말입니다. 오히려 어떤 법이 내 마음을 계속 더럽히고 있는 그런 것만 체감하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그래서 결국 이런 한탄 뒤에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나를 좀 건져 다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복을 부어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산상수훈은 복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상이고 반응이고 현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청결은 성도에게서만 나타나는 청결이여야 해요. 여러분 청결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서 한번 정리를 해보세요. 청결이라는 게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건가요? 지금 각자 자기 집을 떠올리시고 계신가요? 우리 방? 화장실? 어떤 게 청결이에요? 청결하면 떠오르는 게 뭐에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게요. 화장실 바닥에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오물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불결이라고 하죠. 그게 청결이 되게 위해서는 그게 치워져야 청결이에요. 그런데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더러운 것이 아닌 아주 맛있게 잘 비벼진 청결하기 그지없는 비빔밥이에요. 그건 그 바닥에만 놓이지 않고 그릇에 담기면 청결이에요. 그리고 그게 그릇에 담겨서 따로 떨어지면 화장실 바닥도 청결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자리에서 만나면 불결이 되는 거예요. 그걸 색깔로 한번 이해해 보자고요. 화장실 바닥이 하얀색이고 비빔밥이 검은색이라고 가정을 해 보세요. 그렇게 하얀 바탕에 검은 게 떨어져 있는 게 불결입니다. 그러면 청결은 뭐에요? 거기에서 검은색이 사라지면 청결이죠? 따라서 청결이라는 건 있어야 할 것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임과 동시에 여러 가지 색깔이 한 색으로 통일이 되는 걸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단어가 청결, ‘카따로스’에요. 영어로는 pure에요. clean이 아니에요. pure, 그러니까 마음의 청결이라는 건 마음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서 하나의 색을 갖게 되는 걸 이야기해요. 그게 마음의 청결이에요. 그러면 마음이 불결하고 더럽다는 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러 색깔로 존재하는 걸 불결이라고 해요. 그걸 성경이 어떻게 표현 하냐면 두마음을 품는 것 이라고 이야기해요. 야고보서 4 6절 보세요.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뭐 해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 (청결케 해라~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기보시면 야고보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권고를 하는데 마음을 성결케 하라. 마음을 청결케 하라. 라고 권고를 해요. 그러니까 깨끗한 마음의 반대말은, 청결한 마음의 반대말은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진 마음, 방향을 잘 못 잡은 마음인 거예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야고보는 그런 두 마음을 가진 자를 가리켜서 주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자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그들에게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그래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숭배하면서 기뻐하며 유쾌해하며 행복하려고 하는데 야고보가 너희들은 낮아져서 슬퍼하며 애통해야 된다고 그래요. 왜 그게 두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거기 때문에. 산상수훈의 맥과 상통하죠. 애통해라. 슬퍼해라. 낮아져라. 그게 복 받은 자다. 그러는 거예요. 그 두 마음이란 하나님을 향해서만 집중되어야 하는 마음이 나라는 육적 자아에게 분산이 되어 있을 때 그걸 두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걸 교만이라고 그러죠. ‘휘브리스’ 피조물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 신의 영역을 침범한 걸 ‘휘브리스’라고 그러잖아요. 그걸 굳이 한글이 교만이라고 번역을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교만이고 그게 자신을 높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산상수훈에서 두 마음을 품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두 주인을 맘몬과 하나님으로 제시를 하죠. 맘몬은 재물로 번역이 됐지만 신의 이름입니다. 맘몬과 하나님. 그런데 그 맘몬의 중심, 주인공은 누구에요? 나에요. 그러니까 나와 하나님 두 주인을 못 섬기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이라고 하는 이들은 내가 주인 되서 하나님을 부리려고 하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데 내가 쓰이는 걸 절대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두 주인은 못 섬긴다. 라고 그랬거든요. 그게 두 마음으로 갈라지는 거고, 그게 부정한 마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죄인의 실체란 말이에요. 마태복음 6 24절 보세요.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에 맘몬과 하나님을 두 주인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사람을 붙들어서 가두어서 종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는 딱 두 존재에요. 하나는 죄, 마귀죠? 그래서 죄의 종 그러잖아요. 너희들의 마귀의 세간이었다. 라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러죠? 그리고 하나는 하나님이에요. 주의 종, 하나님의 종 이렇게 쓴단 말이죠. 그러니까 두 주인은 하나님의 이외에 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숭배하는 거, 거기에 초점이 더 가 있는 거, 이게 마귀에요. 이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거, 이게 마귀의 실체이고, 여기에 종이 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나를 삭제당하고 부정당하는 그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어요. 그게 두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어요.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그 분에게만 마음을 두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끌러 가게 된다. 라는 뜻이에요. 그건 다른 말로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 향하던 모든 신뢰와 사랑을 박탈당하고 해체 당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로마서 1 28절 보세요.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산 자에요. 그게 마음이 정결한 거거든요. 내 마음은 하나님이 장악해야 산 자에요.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말고 나라는 존재의 확장으로 인간들이 규정하고 정의하고 합의해 놓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관심이 그걸 상실한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걸 더러운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그대로 놔두면 죽는 거예요. 지금 그러잖아요. 그렇게 너희들이 하고 싶은 데로 그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끌어 당겨 가득 채우고 있는 거를 하나님이 놔두면 저주다. 그러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요. 하나님 이외의 인간들이 붙들고 있는 거, 그들의 마음이 가 있는 대상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하나 끊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죠. 이게 마음의 청결이에요.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여러분 인생 속에서 행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힘들어요. 그래서 애통, 심령이 가난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이런 것과 연결이 되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나오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데 그게 우리의 삶 속에서 청결로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는 상태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지향성으로요. 그런데 야고보는 1장에서 그렇게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가리켜서 의심하는 자라고 부르고요. 한 마음으로 정결케 된 사람들을 믿는 자라고 불러요. 조금씩, 조금씩 이제 의미가 확실해지고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 1 5절 보세요.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주일날 제가 이 지혜가 뭔지 설명해 드렸죠? 성경에 나오는 지혜는 모두 다 성전 짓는 지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을 단순히 의심하면서 구하는 건 절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 기도하면서 진짜 한 번도 의심해 본적 없어요? 나는 할 때마다 의심이 가요. 안 들어 주면 어떡하지. 이거 의심이잖아요. 그런데 언제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해 본적 있어요. 의심하면 안 돼. 의심하지 말아야지. 그럴수록 더욱 의심이 들잖아요. 안될 것 같고. 그런데도 그러한 기도가 응답되는 경우가 왕왕 있죠? 뭐에요? 하나님이 일구이언 하시는 거예요?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이게 될까 안 될까 하면서 조급해 하면서 촐랑대는 걸 의심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성경에서는요. 그건 국어사전에 나오는 개념이고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걸 의심이라고 그래요. 성경은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거, 이걸 의심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믿는 자와 의심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로 가보세요. 4 18.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사도바울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진짜 의심 안했습니까? 의심 했을 뿐만 아니라 킥킥 거리면서 비웃기까지 했어요. 저 노인네가 노망들었나 보다. 이렇게. 그런데 도대체 바울은 뭘 근거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걸까요? 여러분 믿음의 주체는 누구죠?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사라를 이게 히브리서 11장이잖아요. 히브리서 11장의 주어는 믿음이에요. 믿음이 그렇게 만들어 낸 거거든요.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과정 속에 있는 이가 한 모든 행위는 의심치 않음이에요. 그게. 왜냐면 믿음에 의해 끌려가면서 믿음을 향하여 가는 이이기 때문에 그게 의심치 않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가 의심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러한 정의들은 다 내려놓고 다시 쌓으면서 성경을 이해하셔야 되요. 그렇게 그냥 국어사전의 개념대로만 성경을 보시게 되면 이런 내용들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됩니다. 청결하지 못한 불결한 마음은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두 마음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두 마음은 의심하는 마음이고 의심하는 마음은 믿음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시죠? 그렇다면 반대로 청결한 마음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영생이라는 목적지로 끌려가면서 자기 자신을 향한 숭배의 마음을 하나님께 뺏겨가는 그 모든 과정과 결국을 마음의 청결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음이 한곳으로 모아지는 상태. 그래서 야고보가 지혜 없는 자들에게 지혜를 구하라 라고 하면서 그 지혜는 나를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는 완전히 깨끗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는 지혜잖아요. 그러니까 지혜를 구하라 라고 하면서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까, 안주실까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고 한 게 아니라 의심하지 않는 자,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믿음이 있는 자, 그게 마음이 청결한 자로 부름을 받은 자잖아요. 그러한 자들. 그러한 자들은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지혜를 구하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은 그 구하는 것을 반드시 받게 된다. 라는 뜻이에요. 왜냐면 하나님이 원래의 목적지가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는 성전으로 지어내는 거죠? 그러면은 결국은 그 존재의 주체성이 완전히 이제 삭제되고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래야 하나님이 들어가서 온전한 처소로 그를 장악하죠. 그러니까 그렇게 창세전 언약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자들은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 저 하나님의 성전으로 온전히 지어지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를 하게 되고 그건 반드시 준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의심하지 않고 구해야 준다. 라고 하는 거지. 의심하지 않고 구하는 건 다 받을 수 있으니까 뭐 마인드 컨트롤을 해서라도 의심하지 마~ 이건 아닌 거죠. 아무리 의심하지 않고 구해 보세요. 주시나. 안 줘요. 성경은 그러한 처세나 삶을 살아가는 방법론에 관한 그런 내용이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지어져 가게 되는데 필요한 은혜와 능력과 긍휼, 그 지혜 그건 반드시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였죠? 제가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쭉 설명해 드렸는데 뭐에요? 성령이었잖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지혜가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해 내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1 13

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다른 데서는 좋은 것이라고 했지만, 여기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는 거예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주실 것이다. 그래 놓고 구하는 자에게 왜 좋은 거 안 주시겠니?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좋은 게 성령이었단 말이에요. 이게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은 성령을 당신의 백성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를 마음이 청결한 자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렇게 깨끗이 비워져야 하나님이 들어가니까 청결한 거예요. 청결. 그리로 우리를 끌고 가시는 거란 말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여 수년 내에 나를 부흥케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반드시 토해내게 만드신단 말이에요. 하박국의 기도였잖아요. 그 부흥이 뭐라고 그랬어요?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잘려져 나가야 할 것들은 빨리 오셔서 좀 잘라 주세요. 라는 뜻이에요. 잘라 주세요. 나를 주인공으로 한 세상에 성전 쌓기. 그리고 세상의 가치와 힘에서 점점 눈을 돌리는 자로 밀려 내겨간다. 는 뜻이에요. 이게 마음의 청결입니다. 야고보서 1 6절에 보면 이렇게 두 마음을 품은 자 의심하는 자는 요동하는 풍랑과 같다. 그러죠? 부정한 마음을 가진 자는 요동하는 풍랑과 같대요. 그 대목을 읽으시면 어떤 에피소드가 생각나세요? 동하는 풍랑, 거기에서 의심이 많은 자여~ 믿음이 적은 자여~ 라는 욕을 먹은 사람, 베드로잖아요. 마태복음 14 28절 보세요.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29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0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1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어떤 의심을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냥 막 걸어가다가 이거 혹시 내가 이거 잘못 걸어가는 거 아닌가~ 꿈꾸는 거 아닌가~ 이런 의심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요동하는 풍랑 위에서 예수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였어요. 28절에 보면 거기에 명하사 라는 단어가 있죠.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말씀 앞에 요동하는 풍랑도 중력이라는 자연법칙도 다 복종을 할 것이다. 라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요. 예수님께서 오라~ 라고 말씀을 하세요. 말씀이 드디어 권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죠. 그랬더니 정말 그 말씀 앞에 자연이 순복을 해요. 자연의 법칙이 말씀에 딱 가로 막혀서 지 일을 못하는 거예요. 만유인력도 다 없어져 버려요. 그 순간에. 그걸 깨닫고 인정하는 거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요. 모든 게 하나님의 뜻 아래에 복종되어지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나가 중심이 된 역사라는 상황과 현실에서 자유하게 되는 그런 게 믿음인 거고 그렇게 만들어 내시는 게 또한 믿음이에요.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현실과 이 상황은 내가 이렇게 휘둘릴만한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을 발휘하는 자로 하나님의 믿음이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그게 믿음이거든요. 물론 그 역사라는 상황과 현실 속에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과 공로와 업적과 능력도 모두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필요할 도구일 뿐이지 나에게 닥치는 사건, 현실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다 필요한 도구일 뿐이며 자기 자신에게 사유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 때 성도는 자유하게 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러한 믿음으로 요동하는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이건 믿음과 의심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연출을 하시는 거지 베드로가 어떤 놈이다. 를 여러분이 거기에서 분석 하실려고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믿음을 갖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그 분의 말씀의 능력이 이 풍랑을 잠잠케 할 것이고 이 풍랑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게 할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 이게 정결한 마음이잖아요. 청결한 마음이잖아요. 그 상태에서는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갑자기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바라볼 때 내가 이거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맞나? 그리고 그를 덮치고 있는 풍랑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걸 해석하지 않고 그걸 바라보게 될 때 그는 저주의 물에 빠지게 되는 거죠. 사실 그가 요동하던 풍랑 위를 걸었을 때 그 요동하던 풍랑은 그의 능력과 자격과 조건에 의해 정복된 게 아니었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믿고 가면 되는 건데 갑자기 나는 뭐야 그럼, 내 가치는 어떻게 챙겨 가질 거야~ 이렇게 되다 보면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그 풍랑을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그 풍랑이 진짜 나를 잡아먹는 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풍랑이라는 현실과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바라보느라 말씀의 능력을 까맣게 잊게 된 베드로가 당연히 풍랑에 빠지게 된 거예요. 그걸 믿음 없음. 의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왜 의심했니? 라고 하는 거지. 거기에서 베드로가 어떤 의심을 했을까? 그거는 우리가 궁금해 할 사항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뜻과 능력만을 바라봐야 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걸 믿음 없음. 의심이라고 하는 거고, 그걸 재물이라고도 표현하는 거고, 그걸 두 마음이라 하는 거고, 그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마음인 거예요.

여러분 전에 창세기 강해 때 노아의 방주 사건을 공부하면서 이 에피소드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이미 다 공부를 하셨습니다. 베테랑 어부들이 광야 동편에서 서편의 가나안으로 노를 저어 가는데, 어떻게 알아요? 이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에서 반대편으로 가는 거니까.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은 광야 ‘에레모스’ 잖아요. 그러니까 요단 동편, 갈릴리 동편이란 말이에요. 거기가 광야죠. 그 요단을 건너야 가나안이잖아요. 지금 광야에서 갈릴리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그 그림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베테랑 어부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라는 풍랑을 이기고 스스로 노력하여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를 보여주기 위해 베테랑 어부들이 노를 젓는 거예요. 그런데 새벽까지 못 건너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최고의 선행체계, 지식체계를 다 동원해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의 실력자들이 등장을 하는 거죠. 그 때에 이들이 다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상황인데 물위에 홀로 둥둥 뜬 분이 이게 노아의 방주잖아요. 기식하는 것들이 다 빠져 죽는 그 상황에서 물위에 동동 떠 있는 단 하나, 방주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였죠.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가 여기 왔다. 라고 그랬잖아요. 방주, 예수님이 둥둥 떠서 오는 거죠. 그리고는 내 안으로 들어오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산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더니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달했다. 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는 방법, 영접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가 나를 바라보고 내 조건과 자격과 됨됨이를 챙기려 할 때 우리는 빠지게 되는 거고 그게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물에 빠지는 게 뭐였어요?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요. 사망이었잖아요. 그게 사망이다. 를 보여주는 게 바로 베드로가 물에 빠진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게 의심이며 그게 두 마음을 품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만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 하는 게 믿음이고, 의심하지 않는 거고,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란 말예요.

전혀 안 믿으시는 표정인데, 제가 성경구절들 다 찾아 드릴게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틀을 한번 다 부수고 들어보세요. 어차피 깨끗하지도 않은 그런 마음들을 지금 나는 청결하게 되어 있다. 라고 지금 속이고들 앉아 있으니까. 그렇게 뻔뻔스러운 얼굴로 저를 쳐다보면서 무슨 얘기하는 건가~ 아니잖아요. 그 더러운 마음으로 자꾸 청결하다고 사기를 치고 계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관심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그 사람의 육적 자아를 쳐가시는 거예요. 그래야 그가 살아요. 나는 믿을 존재가 못되네요. 아니 풍랑 속에서 그냥 예수만 붙들면 되는데 왜 자꾸 내가 나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과 노력을 챙기려고 했죠? 그게 물에 빠져 죽는 건데 제가 몰랐네요. 이렇게 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나에 대한 집착을 하나님이 자꾸 끊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우리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게 만들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줄을 나에게 자꾸 들키게 하고 세상에게 들키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잘 가는 거예요. 따라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건 하나님께서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삶 속에 찾아가셔서 나를 향한 그 마음을 쳐내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만드시는 그 작업 속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현실들이 자신이 감당해 내고 이겨내야 할 저주의 풍랑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서서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행 되어지는 은혜의 현실로 보이기 시작해요. 나는 견디기 힘들어도, 그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라고 하는 거예요.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본다. 가 그 말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아주 상세하게 예언이 되어 있는 곳이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서 읽어 보았던 에스겔서의 새 언약의 선포 장면이에요. 중요한 부분이니까 다시 한 번 읽고 가겠습니다. 에스겔서 36 17.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 보시면 마음을 정결케 하겠다는 말씀도 나오고 내 영과 내 신을 그 속에 두겠다. 라는 말씀도 나오죠.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1장에 의심하지 않는 자들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자들이 지혜를 구하면 반드시 받게 된다. 성령을 구하면 반드시 받게 된다. 라는 그 말씀과 누가복음 11장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에요. 성령이 여호와의 영이 들어와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새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마음이 정결케 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 즉 성령이 부어진 자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거. 이 새 창조의 이야기가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나는 너희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는 거예요. 뭘로? 예수의 피로요. 그래서 너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청결한 자, 나를 하나님 취급해 주는 자, 네가 하나님처럼 살려고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나를 하나님 대우해 주는 자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까여 간다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인 거예요.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는 주체가 누구에요? 누가 닦아 준다고 그래요? 니들 보고 닦어라~ 안 그러잖아요. 내가 닦아준다. 라고 그래요. 청결하게 해 주는 이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청결하게 할까? 그 고민 하시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신다는 건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나를 향해 뻗어 있는 마음을 끊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청결하게 되어 가는 성도의 삶이 애통인 거고, 심령의 가난으로 나타나는 거고, 주리고 목마른 걸로 나타나는 거예요. 잘려 가니까. 부수어져 가니까. 잠언 20 9절 보세요.

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니들 중에 니들 마음을 청결하게 만들 수 있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이 물으시는 거예요. 지혜가 묻는 거예요. 내가 해주는 거야~ 그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을 정결케 하는 걸, 죄를 깨끗하게 씻는 것과 지금 동일시하고 있죠.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게 죄를 씻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을 청결하는 건 단순히 욕심을 버리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만 향해야 하는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는 그 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성취해 내셨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9장으로 가보세요. 13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마음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뭐가 마음을 정결하게 해요?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피가요. 이렇게 마음이 청결하다는 건 바로 그 예수의 피만 의지하게 되는 부인되어져 가는 성도의 현실 그걸 말하는 거예요. 오직 예수의 피만이 나를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그것만 의지하는 거. 그래야 내가 나의 가능성이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의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을 수 있고 이 세상의 다른 선행체계, 지식체계 같은 것들에, 이 세상의 어떤 가치나 힘 같은 것들에 나를 부탁하지 않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게 마음의 청결이란 말입니다. 출애굽기 19 10절 보세요.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14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옷만 빨으면 성결하게 되나요? 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너희들은 정결케 되어야 돼, 정결케 되어야 돼~ 왜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 하셨죠? 그리고 왜 옷을 빨게 하실까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계시록 7 14절에 보면요. 큰 환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데 흰 새마포 옷을 입고 있어요. 그런데 그 옷을 어디에 빨았다고 그래요? 어린양의 피에 빨았다고 그러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19장에서 이 이야기를 장치로 끼워 넣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정결케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피에요. 그거를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피 공로 이외에 거기다가 다른 걸 섞어 버리는 행위를 통틀어서 청결하지 않은 거,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그걸 바로 의심이라고 하는 거고, 믿음 없음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두 마음을 품은 게 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피 공로 그 이외의 다른 걸 섞는 거. 그래서 사도바울도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를 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 2절 보세요.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어떤 게 마음이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는 건지 보세요.)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마음이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고 더럽게 될까 두려워 해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 정결함에서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되는 게 뭐에요?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그리스도 피 복음, 십자가 복음 이외에 거기 율법주의, 유대주의 등에 영지주의 등에 이런 잡티가 막 붙어 버리는 거, 이게 마음이 청결치 않은 거예요. 그런데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뭐에요? 성공주의, 신비주의가 뭐에요?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과 힘을 여전히 의지하는 거예요. 그들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는 거, 이게 유대주의, 율법주의잖아요. 이게 마음이 더러운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이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계속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체감하게 되요. 히브리서로 가면요. 마음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고 굳게 할 수 있는지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 9.

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또 나오죠.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거에 끌리지 말아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식물은 뭐냐면 먹는 거, 절기 이런 것 갖고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초대 교회 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고요.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이. 그런 걸로 마음이 정케 되는 게 아니야~ 마음은 은혜로만 정케 되는 거니까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0장으로 한번 가보세요. 22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마음의 청결은 우리 마음에 예수의 피가 뿌려짐으로 성취되는 거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가 맑은 물로 씻은 참 마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부르죠. 온전한 믿음, 예수만 꽉 의지하는 온전한 믿음이 물로 씻은 참 마음, 청결한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바울은 어떻게 청결한 마음을 설명하는지 보세요. 디모데후서 3 8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진리는 예수그리스도에요.)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마음이 부패하고 더러운 자들이 뭐에요? 믿음에서 떨어진 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진리를 불의로 막는 자들이란 뜻이에요. 그게 마음이 더러운 자들이에요. 예수그리스도 그 진리를 인간의 의로 덕지덕지 가려 버리는 거. 이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 거였잖아요. 로마서에서 저희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강해를 했잖아요. 그게 믿음 없음이죠. 예수만 믿어야 되는데 인간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자꾸 의지하는 거. 그게 마음이 부패한 거예요. 더러운 거란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사도행전 15 9.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뭘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다고요? 믿음으로. 그 믿음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이고 우리의 믿음인 거예요. 믿음으로만 마음이 청결하게 되요. 그 말은 예수만 믿는 자, 하나님 저는 안 되네요. 왜 여전히 제 마음이 이렇게 더럽죠? 오히려 마음을 깨끗하게 먹으려고 애 쓰다가 어떻게 한번 딱 됐을 때 야~ 이 정말 이렇게 깨끗한 마음 보셨어요? 이거 보다 지저분한 자기 마음 때문에 고민 고민하면서 하나님 저 예수의 은혜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이 마음 이거 갖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뻔 했어요. 하는 그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되요. 그러니까 복음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 는 건 무슨 말일까요? 시편 24편으로 가서 다윗의 시를 한번 보겠습니다. 24 3.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마음이 청결한 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거룩한 곳에 선다. 고 그래요. 그런데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고 여호와께 의를 받은 사람이래요. 그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그래요. 중요한 건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는 자다. 그러죠. 6절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여호와의 복을 받은 마음이 청결하고 하나님께 의를 얻은 자들이라는 뜻이죠. 바로 그 아래로 내려가면 여호와를 보게 되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어떠한 자들인지가 명확하게 나오는데 시편 24 7절 보세요.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여러분이 많이 부르는 찬양이잖아요. 여러분이 이렇게 찬양 부를 때 이 분들이 알고 부르시는 건가? 가끔 그래요. 그래서 머리를 제가 가끔 긁적거리고 있는 거예요. 전쟁에 능하신 승리의 여호와가 문 안으로 들어가죠. 이건 레위인들이 외치던 소리에요. 이게. 문들아 들어라~ 이게 문 열어라~ 라는 뜻이에요. 성소의 문을 열어라~ 라는 뜻이에요. 마음이 깨끗하고 정결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성소의 문을 열어라~ ? 여호와,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가 이겼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성소는 어디에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좌소에요. 성전. 그 문 열어라~ 그 말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 마음을 자기가 죄인이 되어서 아주 철옹성처럼 꼭꼭 닫고 있다가 하나님이 그를 이기시고 그 성전을 열고 전쟁에 이기신 하나님이 들어가서 거기를 꽉 채우는 거. 이게 마음이 청결한 거고, 그가 하나님을 보는 자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나를 이기신 하나님이 성소의 문을 열고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꽉 채우게 됐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는 부정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그렇게 내가 부정되어지는 자리에서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다. 를 알아먹는 게 여호와를 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봐요. 우리의 일상, 보이는 일상과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이끌어 가시는 게 맞구나~ 라고 인정해 내는 걸 여호와를 본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시편 73편으로 가시면 하나님을 본다.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어요. 시편 73 1.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지금 마음이 청결한 자가 이제 하나님을 볼 것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 그래요. 그런데 그 선의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그 내용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시편 73편이에요. 그런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어요. 어떻게 하나님 모르는 저들은 죽을 때도 때깔이 곱게 죽고, 고통이 없이 죽고 어떻게 돈을 안 벌려고 해도 저렇게 더 많이 벌고 살이 쪄서 눈알이 다 튀어나오나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나는 뭡니까? 아침마다 징책이요. 종일 재앙입니다.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행하는 여호와의 선입니까? 나중에 아삽이 알죠. 이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 행함이 맞네요. 그걸 하나님을 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요동하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이나 현실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들 속에서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되죠? 그게 베드로의 이야기에요. 의심하는 자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전혀 안 흔들린다는 말이 아니에요.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지금 만들어 가고 계시다. 라는 뜻이지 전혀 흔들리시면 안 돼요. 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조금씩 거기에서 요동치 않게 된다고요. 시편 46 1절 보세요.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땅과 바다는, 역사 속의 땅과 바다는 흉흉하고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은 자들은 그것과 함께 요동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뿌리박고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 피난처가 나거든. 이미 너는 방주인 내 속에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그게 너를 절대 못 죽여~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이게 마음이 청결한 자에요. 너를 보지 말고 네 현실을 보지 마~ 그거 보면 사망의 물에 빠지게 되어 있어~ 그거 이겨보겠다고 네가 애쓴다. 거기서부터 넌 물에 한발씩 빠지기 시작해~ 일단 나를 붙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안 빠져요. 그게 가만히 있어~에요. 우리가 가만히 있음으로 하나님이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는 거예요. 이게 역사의 목적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애써서 헤엄쳐서 가나안으로 건너가는 거 이거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이 열방과 세계 중에 높임을 받는 그 자리에 쓰임 받으셔야 되요. 여러분은. 그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진짜 마음이 청결했던 분은 누구 하나에요? 예수님이죠. 그 분은 하나님의 뜻만 보고 쫓아가신 분이에요. 두 마음 품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 있으셨어요. 오로지 한 곳만 바라봤어요. 아버지의 영광. 그게 청결한 마음이에요.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조차 아버지의 뜻을 보신 분이에요. ~ 이게 아버지의 뜻이군요. 아버지 이렇게 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자녀 삼으시는 아버지의 그 놀라운 지혜와 언약의 성취와 능력과 영광과 긍휼과 사랑이 이 안에 들어있는 거군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게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4 9절 보세요.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을 보는 건 예수를 알아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거란 말이에요. 그 예수가 우리의 모든 복을 완료하여 수여하셨다. 라는 거. 그게 믿어질 때에 우리의 역사 속 환경이나 현실은 그렇게 큰 무게로 우리를 누르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그 마음.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거예요. 난 예수 안 믿으면 큰일 날 존재구나. 이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예수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렇잖아요. 안 되죠? . 신앙생활이 뭐 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를 붙드세요. 그게 마음이 청결한 거예요. 다 끝났는데 계속 못 알아 듣는 것 같아서 반복을 하는 거예요. 이해가 가시죠? 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