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06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마태복음 5:7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51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마태복음 5: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복이 있도다 긍휼이 여기는 자요.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그렇게 되죠. 감탄문이에요. 복이 있도다. 복이 있는 자요.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는 자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게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인데요. 기독교 성화론은 이러한 구절들이 나올 때마다 아주 단순하게 그것을 인간들의 행위와 결부시켜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하곤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거죠.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주장을 알매니언주의라고 그래요. 만약 그렇다면 로마서의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됩니까? 로마서 9 15절 보세요.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어떠세요.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 예수님 말씀이 문자 그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라는 내용이라면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거죠?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라면 지금 사도는 달음박질을 하는 것으로도 안 되고 원하는 것으로도 안 되고 그냥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과 정확하게 지금 상반이 되는 내용이잖아요. 그러나 이 둘은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화해가 되는지 잘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엘레이모네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라함과 헷세데에요. 그 단어들이 70인 역에서 헬라어엘레오스로 번역이 되는데 그 단어들은 원래 슬픔, 애통, 자비, 은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건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를 하고 그 상태를 함께 슬퍼해주며 애통해 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것. 이게 긍휼이에요. 아브라함카이퍼는 그엘레오스긍휼이라는 게 하나님의 가장 요소적인 성격, essential character 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긍휼이 단순히 우리가 국어사전에 갖고 있는 그런 불쌍히 여김. 이런 의만 갖고 있는 단어가 아니에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구약의 여러 곳에 등장을 합니다만 한 곳만 찾아보고 가죠. 시편 62 12절 보세요.

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서 인자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헷세데에요. 긍휼이에요. 자비, 긍휼, 은혜 이게 70인 역에서엘레오스긍휼로 번역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주께 속하였다. 그러죠? 그거를 직역을 하면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 에요. 이게요.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 주님을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가 긍휼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긍휼이신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데로 갚으신다. 라는 게 조금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앞에서는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 그래놓고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데로 갚으심이다. 이게 뭐에요? 앞뒤가 안 맞죠? 이 말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데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공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시에는 살아날 수 있는 자가 단 한사람도 없다. 라는 뜻이에요. 차치하고 긍휼은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에게서 보여 지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인 거예요. 긍휼은요. 긍휼은 인간들이 생산해 내어서 발휘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보여 지는 거예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거, 노력해서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발휘 되는 거.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에 의해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인간이 칭찬을 받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어서는 안 돼요. ~ 저 사람 참 긍휼한 사람이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이 칭찬 받는 긍휼이 아니에요. 긍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그 긍휼이 나왔을 때 하나님이 찬송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긍휼이에요. 성도에게서 나와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폭로가 되는 그런 긍휼이어야 되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 에요. 인간들이 정의하고 합의한 그런 종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고 성도가 되어서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늘의 복은 받은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긍휼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의 행함으로 보게 되면 이 구절은 다른 이들도 행할 수 있는 선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거죠. 그런 식으로 본다면 자기는 월세에 살면서 100억이 넘는 돈을 기부를 하는 어떤 가수가 진짜 긍휼의 왕초죠? 여러분 그런데 그런 건 불교인들도 열심히 하는 거거든요. 게다가 그건 예수님을 때려 죽였던 바리새인들의 특기였어요. 그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기 자산을 다 팔아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긍휼을 행한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들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일부러 일회에 두 번씩 금식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 자기가 도와줄 여력이 없으면 밥을 굶어서 남을 도왔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긍휼이냐는 말이에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긍휼의 행위를 쓰레기라고 하셨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약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을 하는 그런 긍휼을 베푼다 할지라도 예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나온 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죠. nothing 이래요. nothing. 그거보다 더 큰 긍휼이 어디에 있어요? 재산을 다 팔아서 남을 돕고 자기 몸을 불살라서 남을 위해서 내어주는 그런 긍휼보다 더 큰 긍휼이 어디에 있냐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nothing 이래요. 헛것이에요. 헛것.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게 죄다. 그러죠. 죄라는 거예요.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도 그게 믿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면 다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긍휼이라는 선한 행위를 독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닌 거란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있는데 그게 호세아서에요. 거기에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라는 배우와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을 맡은 고멜이라는 창녀의 이야기에요.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을 하라고 그러죠. 그리고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에게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져요.

호세아서 1 6절 보세요.

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창녀 고멜과 호세아의 사이에서 딸이 출생이 되는데 그 이름이로루하마에요. 이 단어는요. ‘아니다.’ 라는 뜻의 불변사, 그리고 긍휼이라는 의미의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라함히브리어. 그 라함이 부정사 불변사와 붙어서 조합하여 생겨진 단어에요. 이게요. 그러니까 내가 절대 너희는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야~ 이걸 호세와 고멜의 아이의 이름에다가 붙여 버린 거예요. 난 절대 너희들 긍휼히 여기지 않을 거야~ ? 너희들 꼴을 봐라~ 그게 긍휼히 여김을 받을 모습이냐? 이거에요. 창녀 고멜의 자손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요. 그건 곧, 그 창녀의 고멜의 운명이기도 한 거예요. 심지어 아들의 이름은요. ‘로암미에요. 그건 역시아니다.’ 라는 그 부정사와 백성이라는 뜻의암미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죠. 내 백성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니네는 내 백성 아니야~ 내 백성일 수가 없어~ 그런 거죠. 호세아서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조금 더 확실하게 그려져 있어요. 호세아서 2 2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또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여기 고멜의 이야기인데 저희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세요. 누구라는 이야기에요. 이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저희. 저희.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그 더러운 정부의 것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준 걸 내 정부가 준거야~ 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우상이 준거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 패역한 창녀와 그의 자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절대 내 긍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존재다. 라고 지금 이야기 하시는 거거든요. 그게 바로 죽은 흙의 상태인 우리의 처음 자리의 현실인 거예요. 도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 그게 흙이니까. dust 죽은 흙이니까. 그것이요.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 존재일 수도 없는 상태, 당장 이혼을 하고 죽여 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음탕한 신부, 그게 바로 이스라엘, 우리의 처음 자리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해서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창녀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걸 구원이라고 하고 거기에 부어진 게라함긍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에 이러한 회복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호세아서 2 23절 보세요.

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대주제에요. 호세아서 11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essential character 로서의 긍휼이 아주 잘 표사가 되어 있어요. 호세아서 11 7절 보세요.

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게 이스라엘이요. 이게 고멜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창녀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상태에서 긍휼을 부으시는 거예요. 그들이 뭘 잘해서가 아니라 이 상태에서.)

8 에브라임이여(이게 이스라엘이죠.)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이게 하나님의 긍휼이에요.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거, 이게 긍휼이에요. 이걸 성경이 사랑이라고도 하고 인자, 자비, 자애, 인애 여러 가지 말로 번역을 하는데 그게라함’ ‘헷세데에요. 그게 다 긍휼이에요. 그런데 그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일차적으로. 고멜이 뭘 잘해서 호세아 예수의 신부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고멜은 끝까지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단물 다 빨리고 노예 시장에 팔렸어요. 죽는 거예요. 이제는요. 고깃덩어리처럼, 돼지 시체처럼, 푸줏간의 돼지 시체처럼 노예 시장에 매달려 있었어요. 그런데 호세아, 예수가 은 15과 보리 한 호멜 반, 30을 갖고 가서 기어코 그걸 사오는 거예요. 이걸 긍휼이라고 해요. 그 푸줏간의 돼지고기가 무슨 긍휼을 베풀어요. 그런데 그 돼지고기에게, 자꾸 돼지고기가 나오네~ 소고기에게~ 그것도 이상한데~ 하여튼, 그 시체에게 긍휼이 거저 그냥 부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긍휼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긍휼히 행하지 않으면 너는 긍휼히 여김 못 받는다. 이 얘기를 하겠냐고요.

하박국 3 2절 보세요. 하박국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와 있어요.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진노가 가시는 일을 한 어떤 자들에게 긍휼이 부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여전히 진노하고 계신데 그 진노가 돌아 긍휼로 바뀌는 거예요. 여기에 부흥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완전하게 살려내다.’ 라는 의미라고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살아요?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만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서 그들이 부흥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흥이라는 건 여러분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 때 그것과 함께 탈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역사 속에서 잘려져 나가는 걸 부흥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부흥케 해주세요.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나 죽여주세요.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부흥회 이런 거 함부로 하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부흥회 강사로 간 교회는 다 깨졌어요. 잘 한 거예요. 그거는요. 부흥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이 기특한 일을 행해서 부어지는 게 아니라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게 되는 것게 긍휼인 거예요. 미가 선지자는 그 긍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미가서 7 18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여기서 인애가 긍휼이에요.)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인애, 긍휼 이게 다 같은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죄를 발로 밟고 은혜로 부으시는 거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해서 반대급부로 부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긍휼의 조건으로 인간 측에서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의 행위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신다는 게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런데 성화론은 이 대목을 그렇게 가르친단 말입니다. 긍휼을 내놓아라. 오늘 본문의 긍휼이 여기다. 라는 말은 긍휼을 베풀다. 라는 의미보다는 긍휼이 있는 자, 긍휼을 아는 자. 라는 그런 의미의 형용사로 구성된 어구에요. 그러니까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그대들은 긍휼을 알고 긍휼이 있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므로. 이렇게 번역하시면 되요. 그렇다면 긍휼을 안다는 거 뭐고, 긍휼이 있다. 는 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한번 공부해 보자는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그대로 쓰인 곳이 있어요. 가보까요. 마태복음 9 27

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이 단어에요. 이게 똑같은 단어에요.)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이 에피소드를 보시면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죠? 그런데 그들에게 긍휼이 부어졌어요? 안 부어졌어요? 부어졌잖아요. 그런데 뭘 근거로 부어졌어요? 이 사람들이 뭘 했다고, 여전히 소경이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믿음이 있었어요. 뭐라고 그러면서 긍휼을 베푸시냐면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잖아요. 이게 전제에요. 한 군데 더 보게요. 마태복음 15장으로 가 보세요. 21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이것도 똑같은 단어에요.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죠.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는 뜻이에요.)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너 개다. 라는 뜻이에요.)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긍휼이 베풀어지고 있죠? 주여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그랬는데 마지막에 긍휼이 부어지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믿음을 근거로 부어진단 말입니다.)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방 여인인 이 여자 가나안 여자에요.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가능성은 Zero에요. 0%. 그런데 그녀가 긍휼을 입는단 말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이걸 근거로 긍휼이 부어져요.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전제되었을 때 긍휼이 부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서 이러한 믿음이 나오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의 주체도 하나님이니까요. 결론부터 서둘러 말씀 드리면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긍휼히 여김이라는 건 예수그리스도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그 믿음인 거예요. 그래서 위의 두 경우 다 그들의 믿음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을 좀 베풀어주세요. 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생각해 보세요.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죠?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라고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마찬가지에요. 이방의 가나안 여인이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긍휼을 입을 방법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인이 자기가 개라는 걸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어요.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어먹을 만한 자격이 요만큼도 없는 개라는 걸 자기가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걸 믿음이라고 하시더니 그에게 긍휼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긍휼을 베풀다. 라는 건 긍휼이 여긴다. 라는 건 나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면 그냥 죽은 개의 불과한 거군요. 이게 전제가 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성도에게서 나오는 긍휼히 여김은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그 긍휼히 여김의 대상은 나를 포함한 전 세계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다. 라는 것을 아는 게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큰일 날 존재인 것처럼 저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큰일 날 존재다. 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그렇게 대해 주는 걸 긍휼히 여기다. 라고 하는 거예요. 집 팔아서 불쌍한 사람들 돕고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전부 그런 걸 억지로 해 내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지 이러고 앉아 있는 거죠.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서 발휘되어야 하는 긍휼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거고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존재일 수 없다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함유하는 거예요. 그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나부터 긍휼히 여겨야 되요. 그게 뭐냐면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큰일 날 존재였구나. 이게 나를 긍휼히 여기는 거잖아요. 이렇게 남을 대해주는 거 그래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한 긍휼의 실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잘 설명해 놓으신 곳이 누가복음 10장이에요. 한번 가보죠. 33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이게 긍휼이에요.)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이 단어가 똑같은 단어에요. 긍휼을 베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뭐하라는 거예요?) 하시니라

자비를 베풀어~ 너 네 입으로 그랬지? 긍휼을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그래, 그러면 가서 너 긍휼을 베풀어~ 그랬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사마리아인의 비유, 배워서 아시지만 그가 그 말대로 행할 수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는 오히려 강도 만난 자였죠? 그가. 그래서 그가 긍휼을 베푸는 게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할 자였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네가 누구를 사랑해서 이걸 나중에 자비, 긍휼이라고 바꾼단 말이에요. 네가 누구를 사랑하거나 은혜를 베풀거나 긍휼을 베풀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라 너는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 그러니까 이 세상에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 땅에 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개 취급했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와서 바로 그 취급 받았잖아요. 진짜 죽였잖아요. 개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 영생에 이르는 거야 그러니까 가서 이와 같이 해~ 라는 거예요. 긍휼히 여김을 받아~ 라는 뜻이에요. 긍휼을 베풀어~가 아니라~ 그러니까 긍휼은 우리가 강도 만난 자, 그래서 죄와 허물로 거반 죽은 자라는 걸 깨닫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이 자리에 내려간 자들에게 부어지는 거예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긍휼이 베풀어진 자에게서 바로 그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강도 만나 죽은 자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나부터 긍휼히 여기고 그러한 자처럼 댁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의 외모를 갖고 당신들이 선하다. 악하다. 이렇게 판단을 할 수가 없네요. 아무리 당신들이 많은 가치를 그리고 행위를 쌓고 가지고 사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당신들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으면 그냥 푸줏간의 돼지고기일 뿐이니까 나는 당신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성경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가 없다. 고 그랬어요. 로마서 3 20절 보세요.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율법사가 와서 나는 율법 다 지킵니다. 이야기 한 거예요. 왜냐면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그래, 그럼 너 지금 나에게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는데 그러면 율법 다 지켜~ 율법이 뭐라고 이야기 하대? 그랬더니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율법사가.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게 율법의 진의입니다. 율법사가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613가지의 그 율법의 조항이 사실은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걸 율법사가 알고 있더라니까요. 예수님에게 대답을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거 다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그래 가서 그러면 해~ 그랬어요. 그랬더니 율법사가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율법사니까. 그리고 선민이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거는 이미 하고 있는 거고 그러면 누가 내 이웃인지를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확 사랑해 버리게요. 이런 거죠. 그때 예수님이 이 비유 주신 거란 말이에요. 율법사가 지식으로는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그 진의는 몰랐던 거죠. 율법사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이웃을 가르쳐 주세요. 그런 거예요. 예수님한테.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사랑할테니까. 긍휼을 베풀게요. 그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네가 강도 만난 자라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라는 걸 폭로하시는 거예요. 너네들은 강도 만난 자이기 때문에 그 죽은 몸으로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긍휼을 베풀거나 섬겨 줄 수가 없어~ 왜냐면 강도 만나서 죽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 그게 바로 너희의 실체인데 너희들이 누구를 긍휼이 여기니? 그 몸으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몸으로 누구를 긍휼히 여겨~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먼저 받아야 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서 중요하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져야 나는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지 내가 그런 것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절대 못된다. 그걸 배우시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서 영생에 이르는 자들인 거예요. 성도가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은 이렇게 난 강도 만나서 거반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이에요. 그러한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자 긍휼이 나오는 거죠. 이거는 과정이며 지향성이지 여러분이 시간이 흘러가므로 해서 이렇게 쌓아서 가질 수 있는 사유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에요. 이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라함은 원래 내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요. 내장. 갑자기 곱창이 먹고 싶어져요. ㅎ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내장이라는 단어를 긍휼, 인애, 자비, 사랑 이런 단어로 쓴 거예요. 내장이라는 단어를. 그래서 그 단어가 그렇게 여러 가지 좋은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쓰인 거죠. 히브리 사람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장부 안에서는 내장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믿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내장, 우리의 내장을 가리키는 단어를 그렇게 좋은 단어를 지칭하는 아우르는 단어로 쓴 거죠.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요. 잠언 12 10절 보세요.

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말이 좀 이상하죠. 긍휼과 잔인이 어떻게 조화가 되요? 악인에게 긍휼이 있어요? ? 여기서 이 단어가라함이거든요. 여기서는내장이라고 번역해야 맞는 거예요. 악인의 장부는 잔인이니라~ 너희들은 지금 여기서 긍휼이 나온다. 라고 이 단어를 긍휼로 쓰고 있는데 악인의 내장, 장부는 잔인이다. 라고 하나님이 확실하게 그냥 확인 도장을 찍어 버리는 거예요.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 놓는 것들의 실체는 다 잔인인 거예요. 그런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단어였어요. 성경이 여자의 자궁에서 뭐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그러죠? 아주 반복해서 나오죠? 죄가. 시편 7 14절 보세요.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이렇게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와요. 인간 안에서는 죄만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긍휼은 잔인인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궁에서는 진자 긍휼이 흘러 나와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이 연결 되지 못하면 그냥 죽은 거예요. 죽은 고깃덩어리죠. 그런데 어머니의 탯줄이 그에게 연결이 되어 그가 산자가 되는 거죠. 이걸 긍휼이라고 그래요. 어머니의 생명선이 끊어지면 그 태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러한 자들에게 긍휼히 여겨~ 안 그러면 죽일거야~ 이게 말이 되냐고요. 안 된단 말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에요. 로마서 11 30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잘 들어 보세요.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아서 끊어졌어요. 그리고 이방인들이 로마 교회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교회로 들어 왔다고요. 그런데 그들이 지금 여전히 순종치 않은데 그들도 너희처럼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끌어 들일 거라는 거예요. 교회로.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는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인이고 다 순종치 않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로 교회로 끌어 들인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여기 모든 사람은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인, 로마인 다 아우르는 모든 사람이죠. 그들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에요. 너희들이 순종을 해서 내가 긍휼을 베푸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인간들의 의가 드러나게 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순종치 않는데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자로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나고 나타나잖아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순종치 않아야 긍휼이 부어진다. 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런데 순종하여 긍휼을 입자. 라는 게 오늘날 개혁주의의 주장 아닙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의 인정 위로 부어지는 거예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긍휼하심을 입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난 누구를 긍휼히 여길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가 긍휼하심을 입는 거예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거꾸로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그러한 긍휼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는 거예요. 야고보서 2 12절 보세요.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구절을 보시면 마치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 받아 지옥 가니까 반드시 긍휼을 행하도록 하라는 그런 말로 보이죠?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떠한 문맥 속에 있는 것인지를 잘 보시면 이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요. 바로 윗 구절 보세요.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게 지금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른 말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그 말을, 율법을 네가 다 지키면 아주 잘 하는 것인데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그래 놓고 뭐라고 그래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거 지킬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이말 다음에 긍휼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니까 사랑과 긍휼이 막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거죠. 지금. 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라. 라는 그걸 네가 제대로 잘 지키면 너는 잘 하는 거야~ 그게 최고의 법이니까. 잘 하는 거야~ 그런데 얘들아 잘 지키다가 하나만 어기면 다 어긴 게 되는 거란다. 그런데 그거 할 수 있겠어? 물으시는 거예요.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부연 설명까지 해 주죠. 그리고는 이어지는 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야 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를 잘 풀어야 그 다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다.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뭐에요? 율법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겁니까? 구속하는 거죠? 그러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뭐에요? 야고보 사도가 1장에서 이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번 더 썼는데 거기 한번 가보세요. 1 22.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나오죠? 여러분이 야고보서를 그냥 표피적으로만 읽으면 이렇게 도를 행하는 자가 돼야 돼~ 듣기만 하면 안 돼~ 율법을 행하는 자가 돼야 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거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야~ 이렇게 표피적으로만 읽으시면 여러분은 야고보서를 완전히 거꾸로 읽는 거예요. 야고보서는 로마서하고 똑같은 내용이에요. 여기에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야고보 사도가 뭐라고 그래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그러죠. 이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은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누군가가 완전히 지켜서 이제 더 이상 참소의 근거로 쓰여 질 수 없는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을 누가 완전하게 했어요. 예수가. 마태복음 5 17. 이거 산상수훈의 일부분이에요.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기는 게 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걸 완전히 지켜야 되는데 내가 그거 완전하게 하러 왔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완전하게 하러 왔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위에서 오늘 본문이 5 7절이고 이게 지금 5 17절이잖아요. 바로 위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 놓고 그 율법은 내가 다 지키러 왔다.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눈치를 챌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전하게 된, 자유하게 된 율법이라는 건 예수께서 그걸 완전하게 했다. 라는 것을 아는 복음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에요. 복음이에요.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가보세요. 야고보는 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고 그래요. 개역성경이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번역을 해 놔 가지고 여러분이 이런 거는 꼭 배우셔야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는 바로 윗 구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야고보서 1 23절 보세요.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여기에서라고 번역된 말이로고스에요.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그 말씀, 이게로고스거든요. 그 단어에요. 똑같은 단어인데 이때에는 동양사상을 열심히 공부했던 그런 분들이 이걸 번역을 했기 때문에 유가나 도가에 나오는 그라는 단어를 써서 이렇게 번역을 한 거예요.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 고 그래요. 그런데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 뭐냐면 보고 금방 돌아서서 자기가 본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게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에요. 이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건로고스를 듣고 행하지 않는다. 라는 건 말씀에 적혀 있는 데로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 ‘로고스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뭐에요? 너희들은 다 죽은 흙이기 때문에 내가 내려가서 너희들을 살려 놓을 수밖에 없어~ 내가 십자가를 져서 너희들을 살리는 수밖에 없어~ 이게로고스잖아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아~ 그렇군요. 라고 인정을 한다. 라는 건 예~ 저는 죄인 중의 괴수고 저는 죽은 자입니다. 라는 걸 인정한다는 거죠. 그런데 말씀을 듣고서 그 때 당시에는 인정을 하는데 금방 돌아서서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죄인이야~ 이렇게 잊어버리는 거, 이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히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건, 말씀에서 하라~ 라고 한 것들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씀에서 너는 죄인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돌아서서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죄인 죄인이야~ 라고 오히려 자기 의를 쌓는 거, 이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거예요. 이걸 누가 이해하겠어요. 자세히 보세요. 성경을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지금.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게 뭐냐면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건데 왜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하냐면 사람들은 거울로 지 얼굴을 보고 가서 금방 지 모습을 잊어버린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1 23, 24절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행한다. 라는 건 나는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죄인 중에 괴수답게 사는 걸 말하는 거예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잊지 않고 사는 거. 죄 막 지으라는 게 아니라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존재일 수도 없는 사람이에요. 영생은 무슨 영생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걸 잊지 않고 사는 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 계속 가는 거예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왜 돌아서면 잊잖아요. 우리는요. 돌아서면 잊어버리잖아요. 그 내용이 25절로 이어지는 거예요.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이게? ‘로고스. 이게. 말씀, 복음이잖아요. 이게. 자유하게 하는 율법.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보세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그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게. 실행하는 자니 그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 라는 뜻이에요. 복 받은 자는 바로 그러한 실행을 한다는 거예요. 말씀 속에서 계시된 아~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산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구나~ 이걸 아는 게 행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야고보서에서 나오는 행함, 행함, 행함 그 단어에요. 이게. 그렇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걸 잊지 않는 것이, 복음의 말씀을 실행하는 거예요. 이 내용을 2장과 연결을 시켜보란 말이에요. 다시 2 12절로 갑니다.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2절의 자유의 율법이 뭐라고 그랬어요? 복음입니다. 그럼 복음의 말씀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고 하라는 건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즉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존재일 수도 없을뿐더러 심판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말하며 행동하라는 거예요. 그게 너희는 자유의 율법에 의해서 자유의 율법을 따라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저희는 그 복음의 명시된 대로,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긍휼이 없으면 심판 받아 마땅한 자네요. 이렇게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13절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엄중히 경고를 하는 거예요.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 게 정상인데, 바로 그 위에 뭐라고 써있었어요?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거다. 그랬잖아요. 너희는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는 그러한 엄격한 하늘의 율법 아래 있는 거야~ 그런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그게 율법의 전부인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너희는 긍휼을 받을 수 없어~ 그래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거야~ 알았어? 묻는 거죠. 맞죠? 그거는요. 그거 인정하라는 거예요. 그러나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 번역, 번역 보면 여기에 그러나가 들어 있어요. 대 반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바로 그 심판을 이긴단다. 라는 이야기에요. 그 위에서부터 야고보서 2 1절이 어디서부터 출발 하냐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라~ ? 너희들도 거저 얻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 아니야~ 그런데 너희들이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 판단 하니~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거예요. 너희들도 니들이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은 자라는 걸 안다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다 긍휼을 입어 구원을 얻어야 된다. 라는 것을 알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니들이 남을 외모로 판단 할 수가 있어~ 그런데 봐라~ 그 긍휼이 어떻게 주어지게 된 거니? 하나님의 긍휼, 이 긍휼은 하나님의 essential character 고 우리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다 함유하고 있는 단어다. 그게. 그런데 율법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니까. 너희들은 이걸 도저히 지켜낼 수 없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긍휼 없는 심판으로 들어가야지~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그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단다. 이거에요. 긍휼 베풀지 않으면 다 심판해 버릴 거야~ 이 이야기 아니란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표피적으로 읽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래야 야고보서 2 1절부터의 내러티브가 매끈하게 연결이 되죠. 안 그러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어~ 니네 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거야~ 그래 놓고 나중에 니네 긍휼 안 베풀면 다 죽일 거야~ 이게 이 내러티브가 매끈럽게 연결이 되요? 야고보서 1 1절부터 쭉 하나의 일관성을 갖고 지금 가는 거예요. 끝까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게 진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던 거예요. 마태복음 9 12절로 가보세요.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와 함께 그의 집에서 식사하는 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렸죠? 왜 죄인과 함께 밥 먹느냐는 거예요. 그 때는 죄인과 함께 밥 먹으면 안됐어요. 율법이에요. 그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는 자신이 병든 자임을 아는 자에게만 메시아가 될 수 있는 거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 의원을 찾지 않듯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 죄를 사해 주러 온 메시아를 찾을 리가 없다.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는 호세아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라는 걸 배우라~ 라고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 제사는 율법이죠? 그러면 긍휼은 사랑은 뭐에요? 그 율법의 총화잖아요. 율법을 함축하고 있는 거.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율법을 원치 않고 율법의 총화인 긍휼을 원한다. 이게 이해가 가세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세요. 그 율법사가 자기가 강도 만난 자인데 마치 자기가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는 자로 착각하고 있었죠? 그러면 강도 만난 자를 부정한 자를 율법사가 만지면 안 되거든요. 그러면 율법을 어기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은 사랑하라고 그랬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겨야 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지 말아야 되요. 그건 인간은 율법과 관계없는 자란 뜻이에요. 그건 하나님 거란 뜻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그렇게 행위를 가지고 그런 긍휼히 여김이라든지 제사를 하는 그 행위를 갖고 나에게 와서 자꾸 나 잘했죠? 라고 하는데 나는 그거 원하지 않아~ 나는 긍휼을 원해 그게 뭔지 알아? 너희들은 긍휼을 받아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드러내며 살아라~ 라는 뜻이에요.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율법 지키는 거 원치 않아. 그래 놓고 니네 율법 지켜~ 긍휼 행해~ 이런 말 할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자신의 처음 자리 인식과 인정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성을 아는 것이며 그렇게 구원을 받아야 할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그러한 삶의 지향성. 니나 나나 똑같은 죄인지 뭘, 나도 잘난 거 없고 너도 별로 대단치 않어~ 그러니까 그냥 우리 하나님의 십자가만 꼭 붙들자.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나부터 긍휼히 여기세요. 자신부터 긍휼히 여기세요. 그러면 다른 이들이 긍휼을 받아야 할 자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우리 신앙 생활은 그 일로 점철되는 거예요. 그래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까지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뭐라고 그랬어요. 내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재료나 요소가 요만큼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채워 주셔야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게 심령이 가난한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나는 죄인이네요. 내 안에는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요소가 요만큼도 없네요. 거기서 애통이 나오는 거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구하는 의의 주리고 목마름을 내어 놓는 거고,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심령이 가난한 자가 긍휼히 여기는 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이 연결이 되요? 이게? 아니죠.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부각시키고 있고 인간 측의 무력함을 폭로하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다 죽일 거야~ 이거 안 되잖아요. 역시 너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거야~ 이리로 가야 맞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성경을 조금 잘못 해석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게 되는 거예요. 긍휼히 여긴다는 건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긍휼은 손톱만큼도 없음으로 아버지의 긍휼이 제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도 아버지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내가 뭘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세요. 이게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내가 뭘 주는 건 긍휼히 여기는 거 아니에요. 내 자랑하는 거예요. 또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구제나 자선, 선행 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는 거니까. 그냥 인간의 예의 차원에서 하세요. 사람이면 하는 거니까. 그냥 하시라고요. 그러나 그걸 갖고 하나님 앞에 자랑으로 갖고 갈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 속에서 진짜 하늘의 긍휼을 드러내는 자로 사는 거예요. 그게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긍휼을 입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하는 하나님의 긍휼인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