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03 애통하는 자에게만 약속된 위로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8:46

애통하는 자에게만 약속된 위로

 

 

마태복음 5: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한창 치기로 물불을 가리질 않던 대학시절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여자의 책이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이며 사회주의자며 혁명가였죠.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면서도 레닌의 그 독단적 행보를 강렬하게 비판을 했고 또 진정한 사회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서 베를린 혁명을 기도했던 여장부입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독일 공산당이 출범하게 된 것이죠. 저는 그때까지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주일 성수 하여 구원받고 십일조 하여 복 받자 이게 신앙의 진수인줄 알았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심지어 칼 막스처럼 착하게 사는 게 그리고 민중과 타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인 줄 알았어요. 그래야 또 복도 받고 천국도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처럼 행동하고 그녀처럼 죽는 게 신앙인의 올바른 삶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사실 저는 진지하게 칼 막스를 읽어보기 전까지는 막시즘이 그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던 김일성이 주장했던 이상향의 그냥 원본쯤이나 되는 것으로 추측을 했었고 또 러시아 미술사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스탈린과 레닌은 그냥 똑같은 아류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상과 행보를 잘 공부해 보니까 뭔가 다른 게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막스를 내가 닮아야 할 사람 영순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책을 열심히 읽어 치웠어요. 칼 막스가 여러분 신학교 출신입니다. 그 때의 제 꿈을 책상위 벽에다가 크게 써 놓았었는데 그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행동하고 케테 콜비치처럼 쓰자 였어요. 케테 콜비치는 제가 좋아하는 독일의 여류 작가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글을 쓰는 게 성도의 가야할 길임을 한 번도 의심을 해 본적이 없어요.

세상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마치 4급수에 사는 거머리 취급을 하죠. 그들은 세상을 오염시키는 오염의 주범이라고 혐의를 씌워버려요. 세상은요. 그래서 굉장히 지저분하게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거머리가 4급수 더러운 물에 산다고 해서 그 더러운 물의 오염을 거머리가 만들어 낸 겁니까? 4급수 똥물은 사람이 만들어 낸 거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거머리는 피해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거머리를 더럽다고 하고 왜? 그들이 4급수 오염수를 만들었다고 생각을 해요. 오늘날 4급수 안의 거머리 취급을 받는 힘없고 약한 이들을 한번 보십시오. 대중에는 한없이 게으르고 무책임한 삶의 자세로 인해서 가난과 약함을 자처한 이들도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빈익빈 부익부로 지향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 사회구조와 경제구조에 의해서 정말 지문이 없어지도록 죽어라고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4급수의 더러운 시궁창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시궁창 취급을 받는 거예요. 넌 아직도 그 모양이야~ 이렇게. 저는 기독교가 해결해야할 일이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나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정한 사회구현 정도로 정의를 내렸던 것 같아요. 당시에. 그래서 정말 열심히 투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나이외의 다른 이들의 권익을 위한 절절한 휴머니즘도 아니었고 공평한 사회 구현에 목숨을 걸어 보겠다는 대단한 투사적 의지의 발현도 아니었어요. 그냥 마땅하다고 하는 종교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서 영원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내 미래를 확보하고자 하는 그릇된 열심이었습니다. 제가 한동안 그런 삶을 살면서 스스로 엄청난 핍박에 노출이 되곤 했는데 저는 그때마다 오히려 짜릿한 성취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여기저기 쫓겨 다니면서도 야~내가 정말 올바른 일을 하니까 이런 핍박을 받는구나~ 나는 지금 건강한 사회, 건전한 사회 구현을 위해서 뭔가 기여를 하고 있는 거구나~ 라는 자찬의 감동 같은 거였습니다.

그 무렵 누가복음 6장과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열심히 읽게 되었는데 이게 도무지 동의가 안 되는 거예요. 당시 제가 생각하고 추구하던 삶과 복 받은 자의 삶, 성경이 말하는 복 받은 자의 삶이 정확하게 반대로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민중이 가난에서 해방이 되어서 골고루 부자가 되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교육을 전공을 하면서 그중에서도 농촌사회 교육에 집중을 해서 농촌계몽운동을 도모하려고 했었고요. 야학을 하면서도 사회의 부조리를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거기서 그들을 건질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거예요. 마태복음에는 심령의 가난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 단어는 사회 경제적 가난을 가리키는 용어에요. 그러니까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소유의 다소로 이렇게 갈라지고 분류되는 그런 가난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의 그 박탈감과 자격 없음과 부끄러움, 면목 없음 등의 그 종합적인 감정과 상태를 총칭하는 거예요. 그걸 가난이라고 표현을 한 거거든요. 성도는 이 땅에서 나의 행복이나 나의 안전, 나의 부유함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 라는 걸 에둘러 표현하는 거죠. 심지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라는 어거지 같은 말씀도 하시는 거예요. 그 애통에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게 기독교인 줄 알았는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때 굉장히 큰 딜레마에 빠졌어요. 그럼 내가 여태까지 한 건 뭔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여태까지 목숨 걸고 한 게 뭔가~ 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소원을 성취하며 일취월장, 승승장구, 전도양양, 만사형통의 삶을 살게 되는 게 기독교의 목적지 아닌가요? 그런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그 딜레마에서 확실하게 빠져 나오셨나요.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이 바로 그 애통함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지난주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을 받은 자인지에 관해서 긴 시간 고찰을 해 봤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심령의 가난은 누가복음의 그것과는 달리 사회경제적 결핍이나 궁핍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영적인 파산을 지칭하는 거라고 그랬죠? 결국 내용은 같은 것이지만 마태복음의 심령의 가난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가난이라는 것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이 되어 있는 거라 생각하시면 되요. 나의 영적인 상태는 누구의 도움을 바랄 필요가 없을 만큼 괜찮은 상태다. 라는 그런자만그걸 라오디기아주의 라고 그래요. 라오시아니즘 그러나요? 아무튼 그거 라오디시아니즘이죠. 아이 이거 참~ 그것과 정 반대로 제가 바로 죄인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라는 그런 자각과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자다. 이렇게 한다고 그랬어요. 자기 심령의 영적 파산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게 바로 심령의 가난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진 않았을 때 내 심령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겁니다. 라는 이런자각’, 시편 40 12절 한번 보세요.

시편 40:12

12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이거에요. 내 마음이 멀리 떠나가 버렸어요. 심령이 아주 파산돼버린 상태, 죄 때문에요. 이 머리털만큼 아니 이 머리털이 뭐에요? 그러한 자각, 자아인식 이게 바로 심령의 가난이죠. 이러한 심령의 가난이라는 상태는 어떤 한 시점에 순간적으로 완성이 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경향성의 문제요. 방향성의 문제라고 그랬어요. 사도바울의 자아인식 변화과정을 잘 보시면 그 방향성이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요. 사도바울이 AD48년경에 쓴 갈라디아서에 그의 자아인식은 자랑스러운 사도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사도가 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한번 볼까요. 갈라디아서 1 1

갈라디아서 1: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람에 의해 세워진 사도도 아니고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도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AD48년이에요. 이것이. 그런데 그로부터 7년 후인 AD55년에 고린도전서를 쓰는데 그때는 자아인식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세요. 15 9

고린도전서 15:9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정확히 7년 후에 바울이 자신은 사도직을 감당치 못할 자다. 라고 이렇게 자아인식을 해요. 그로부터 8년 후에 AD63년에 에베소서를 쓰는데 그때는 어떻게 바뀌는지 보세요. 3 8

에베소서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성도 중에서 이건 교인이라는 뜻이거든요. 일반교인, 교인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 교인자격 없음. 을 표현하는 거예요. 나 교인자격 없음. 점점 바뀌죠?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에서 죽기 1년 전에 쓴 디모데전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디모데전서 1 15

디모데전서 1:15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의 자아인식이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죠. 사도에서, 하나님이 세운 사도라는 자아인식에서 점점점 내려가요. 자신은 교인이라 불릴 자격도 없고 더군다나 사도라 불릴 자격은 더더욱 없으며 심지어 죄인 중에 제일 나쁜 자취에프라는 뜻이거든요. 괴수, 대장이라는 뜻이에요. 죄인의 대장, 마귀 새끼라는 뜻이에요. 자기가요. 내가 마귀 새끼지 무슨 사도입니까? 죽기 일 년 전에 그런 거예요. 이러한 방향성과 경향을 심령의 가난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예수를 진짜 믿게 되었을 때 우리의 자아인식 판단기준이 다른 사람에게서부터 예수로 바뀌게 된다는 걸 아세요. 성도가 어줍지 않은 열심 으로 자기의 종교성을 발휘할 때 그의 자아인식 그 판단 기준은 자기가 비교할 수 있는 옆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들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하고 그들보다 착한 삶, 종교적 열심 이 있는 삶을 추구하죠? 그들과 비교하여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게 되요. 그런데 이 사람의 신앙이 성숙되어지면서 그 기준이 옆 사람에서 예수로 바뀌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도저히 예수와 함께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각하고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마치 시골동네 논두렁에서 축구를 제일 잘 하던 그런 아이가 이제 그 곳만 점령하면 자기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될 것처럼 착각을 하고 매일 논두렁을 열심히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 앞에 어느 날 박지성이 나타난 거예요. 진짜 축구가 나타난 거죠. 오현이 앞에 호날두가 나타난 거예요. 저 축구광 앞에. 그러면 오현이 자기의 자아인식을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차는 건 이건 축구가 아니구나~ 나는 저 사람의 발톱의 때만큼도 축구를 모르는 사람이었구나~를 알게 되는 거예요. 성도의 자아인식 판단 기준은 예수에요. 하나님은 예수와 같은 이만 하나님 나라로 들이세요. 비슷해도 안돼요. 예수와 같은 이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요.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처럼 되라는 거 아니에요. 그건 불가능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만 믿음으로 꼭 붙들어야 되요. 마치 멀리 있던 예수라는 횃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나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 버리는 것처럼, 예수가 빛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를 알아간다. 라는 건 그 빛이 점점점 나에게 가까이 온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될수록 내가 누구인지가 밝히 드러나게 된다고요.(요일1:6-7) 그 때에 그 예수라는 빛 앞에서의 나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공자 할아비처럼 살았다 할지라도 죄인 중에 괴수일 수밖에 없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성화를 이루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도대체가. 그렇게 예수라는 횃불이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 자신의 진면목을 바라볼 때 하나님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는 고백이 튀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걸 심령의 가난이라고 그러고 그 심령의 가난과 함께 격발되는 감정이 애통이에요. 그건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더 핑크 목사님이 제일 존경했던 닥터 피어슨이 그 애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애통함이라 함은 우리 영혼의 궁핍함에 대한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불의에 대한 애통함이며 우리가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던 도덕에 대한 애통함이며 우리가 그토록 믿어왔던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애통함이며 하나님에게 반역하던 것에 대한 애통함이며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 적대시 해왔건 것에 대한 애통함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애통함은 심령의 가난함과 항상 동행한다.” 그런데 그 애통이라는 단어펜떼오라는 단어는요. 성경에서 슬픔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아홉 개의 단어 중에 가장 처절하고 통렬하고 강한 슬픔과 비애와 탄식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게 애통이에요.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그 장면에서 마리아가 찾아가죠? 그때 애통 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거기서 쓰인 단어에요. 내가 믿고 의지하고 붙들고 있던 예수님이 죽었다. 그 앞에서 터지는 애통, 그 단어를 지금 예수님이 여기서 쓰고 계시는 거예요. 계시록 18 15, 19절에서는 이 세상 삶의 터전이던 큰 성 바벨론이 불타고 무너지며 그 안에 있던 모든 상품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걸 보면서 장사꾼들이 울고 부르짖었을 때 이 말이 사용 되요. 그건 그 사람들의 전부거든요. 생명이에요. 생명. 그게 사라질 때 터지는 걸 애통이라고 그래요. ‘펜떼오그러니까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쓰인 애통이라는 단어는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극한의 슬픔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말이에요. 그것처럼 여러분이 죄인임이 여러분에게 자각된 적이 있냐고요? 거기서 터지는 게 애통인데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가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요? 당신들은 당신들의 생명이 빼앗겼을 때처럼 애통해야할 만큼 당신들은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라는 그런 폭로 그런 걸 들어 보셨냐구요. 잘 될거야~ 잘 될거야~ 기도해~ 만사형통, 소원성취 하나님은 다 이루어 주셔~ 집 팔아 헌금해봐~ 몇 배로 보상이 된단다~ 이런 설교만 들었죠? 성경은 애통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 심령의 가난과 연결된 그 애통함을 맛본 이들이 몇 명이나 되냐고요. 건강한 교회, 건전한 교회도 고작 추구한 게 뭐냐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뭘 해서 아니면 내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가 되자. 로 가지 내가 얼마나 내 자아인식을 통해 애통한 자인지를 모른다니까요. 이건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아서 받는 애통이 아니에요. 그런 종류의 애통이 아니라니까요. 예수 안 믿는 시어머니가 구박해서 우는 울음 이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고작 애통을 그 딴 거로 알고 있는 거예요. 누가 예수 믿어서 구박합니까? 못 되서 구박하지~ 자기가 못된 건 쏙 빼먹고 내가 예수 믿어서 핍박 받는다고 그래요. 순 사기꾼들. 그러니까 성도의 올바른 자아인식에서 나오는 슬픔과 비애는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부수고 창자를 끊는 것 같은 슬픔인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렇게 슬퍼할 수 있는 자만 복 받은 자라는 거예요. 누가는 그 현실을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6 21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마태는 애통이라는 단어펜떼오라는 단어를 썼는데 누가는 우는 자, 우는 자,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게 이게 이해가 가세요?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잘못 기록한 거 아니거든요. 누가와 마태가 지금 집중하고자 하는 바가 틀릴 뿐이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우는 자가 복이 있다. 고 그래요. 클라이오라는 울음은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터지는 울음이에요.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셨을 때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통곡 하죠? 그 때 그걸클라이오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을 해요. 성도는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속에서 그토록 신뢰하고 자랑하던, 우리는 나만 믿잖아요. 그런데 그토록 신뢰하고 자랑하던 자신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맛보게 되어, ~ 이거 아니네~ 이 인간 이거 괜찮은 존재인줄 알았더니 아니네~ 이게 육적 자아의 죽음이거든요. 거기에서 터지는 슬픔과 비통 이게 애통이에요. 그러니까 성도의 애통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한테 물어요.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보니까 심지어 성도가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예수 믿고 이렇게 여전히 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아니 내가 착한 일을 하겠다고 했던 그 일까지도 지금 보니까 죄던데 그럼 나는 뭐에요? 여러분 이게 애통이거든요. 제가 교만할까봐 그 앞에서 당신이 복이 있어요. 말은 못했지만 그 분들이 복 받은 자에요. 그런 고민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종교인일 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은 해가 되는 눈물이 아니라 유익이 되는 눈물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 때문에 많이 우셔야 되요. 왜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날 띄엄띄엄 보지~ 잘 본 거예요. 띄엄띄엄 본 게 아니라. 왜 날 이렇게 취급하지? 아니 여러분이 그런 사람 맞아요. 거기서 눈물 흘리면 되는 거예요. 애통하다. 나는 이런 존재밖에 안 되는 거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도움이 필요한 거구나~ 이리로 가는 거예요. 시편 126 5절 보세요.

시편 126:5~6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만 기쁨으로 거두게 된대요. 무얼 거두게 된다는 말일까요? 고린도후서로 가보세요. 고린도후서 7 6, 제가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드릴게요.

고린도후서 7:7

7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

이게 지금 고린도 교회에 사도바울이 디도를 보내서 디도가 돌아와서 한 이야기를 듣고 쓴 편지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큰 오해를 받았죠? 헌금을 착복한다고 그러고 또 사도도 아닌 게 사도 짓을 한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막 핍박을 했는데 편지를 한 장 써서 보냈어요. 욕을 바가지로 해서, 그랬더니 변한 거예요. 디도가 와서 전하는 겁니다. 나를 그리워하고, 나에 대해서 잘못한 걸 여러분이 뉘우치고, 심지어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 그것으로 내가 기쁘다. 이런 뜻이에요. 욕을 바가지로 했더니, 충분히 이해가 가요. 가끔 인터넷에 어떤 분들이 제 설교를 평을 해 놓는데 솔직히 제가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 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웬 얼치기들이 평을 잘 해 놓더라고요. 아주 개 박살을 내고 싶은데 똑같은 사람 될까봐 그냥 놔두거든요.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그 아이디나 그 아이피 뜨는 아이피 한 사람이 맞아요. 한 사람이 쫓아 다니면서 거기에 당신이 우리 목사님에 대해서 어떻게 안다고 그러냐고 변호를 이렇게 해 놔요. 그건 이렇고 그건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거고 옛날에는 이렇게 설교를 하셨고 지금은 그 설교에서 어떤 걸 강조하느라 그런 말씀하신 건데 그 한편 설교 듣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냐 말이지~ 당신의 가치관이 잘못된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어우 그러면 가슴이 이렇게 울렁대며 기쁜 거 있죠. 내가 할 말을 누군가 계속 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막 욕하고 있는데 어떤 한 무리가 자기를 열심히 변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무엇 때문에 일어난 거냐면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로 말미암아 그들이 슬픔, 애통을 겪고 나서 변한 거예요. 8절 보세요.

고린도후서 7:8~11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9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게 개역성격에서 근심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슬픔이 맞아요. 애통이 맞는 거예요.)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징계하는 정신을 보십시오. 이게 다 무엇에서 기인한 거라고요? 슬픔, 고린도후서 2 14절에 가면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들을 슬프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는 게 아니다. 이렇게 굳이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렇게 토를 달아야 할 정도로 아주 적나라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한 거예요. 그랬더니 그 편지를 받고 이들이 애통해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그 애통함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함한다. 라는 건 나는 적어도 그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라는 위치에서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애통을 겪고 나자 전혀 그런 말을 안 하더라는 거예요. 함부로 남의 이야기 안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거에요. 그래서 슬픔, 애통이 성도의 삶에 유익하다. 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총 4편의 편지를 썼는데 두 편만 지금 남아 있죠. 고린도 전, 후서 여기서 말하는 사도가 말하는 편지는 고린도전서, 후서 사이에 썼던 편지를 이야기해요. 그건 없어졌어요. 그 편지에서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의 죄를 아주 눈물이 쏙 빠지게 나무란 거예요. 그래서 몇 번에 걸쳐서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편지 쓴 거 사실 미안한데 그러함에도 미안하지 않다. 이런 말을 계속 쓰는 거예요. 얼마나 나무랐으면 말이죠. 그들이 그렇게 편지를 받고 슬픔과 애통을 겪게 되자 그게 걱정이 되어서 고린도후서라는 세 번째 편지를 쓴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죄에 대한 통한의 자각이 회개케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을 주더라. 라고 이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에 의해 구원을 얻은 하나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올바로 직시하며 그것으로 애통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 대해서 확인을 하고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애통은 하나님이 복으로 주는 거지 성도가 벗어나야 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애통함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애통함 속으로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시편 80 5절 보세요.

시편 80:5

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누가? 주께서요. 저희는 누구에요? 하나님의 백성들 눈물로 먹는 거예요. 눈물이 양식이에요. 성도에게 있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지지리도 복도 없어~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양식 주시는 거예요. 눈물로. 그거 먹어야 사는 겁니다. 성도 안에 성령을 부으셔서 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게 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발생이 되는 슬픔, 자연적 관음 그게 애통이에요. 그래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애통한 삶을 살았던 겁니다. 스가랴서 12 10절 보세요.



스가랴 12:10~14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은혜에요.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니까)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스가랴서에 이미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니까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부으시니까 어떤 반응이 일어 나냐면 내가 예수 찌른 자 맞습니다. 라는 반응이 터지는 거예요. 내가 예수 찌른 자 맞습니다. 다윗이 죄의 생산 공장인 그 자신의 실체를 자각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시편 6 6절 보세요.



시편6:6~8

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8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다윗뿐만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밖에 생산해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직시했을 때 혹은 세상의 죄를 인지했을 때 성도만 이 세상이 무덤인 걸 안다고 그랬어요. 죄인들의 세상임을 안다고 그랬습니다. 그들이 세상과 자기 안의 죄를 직시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세요. 시편 38 16

시편38:16~18

16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이게 후한서에 나오는 글인데 개역성경에 망자존대가. 나를 향하여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기도했다. 이런 뜻이에요.)

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가 혹시 죄를 지고 넘어지더라도 다른 이들이 나를 업신여겨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기도했는데 내가 넘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넘어지고 나니까 내가 어떻게요? 내 죄를 슬퍼하는 애통함이 나에게서 격발되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 136절 보세요.

시편 119:136

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세상의 죄를 보니까 아~ 여기는 정말 살 곳이 못 되는 곳이구나~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대장 되려고 그토록 애를 썼나~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나는 괜찮은데 제들은 왜 저렇게 죄인인가요? 이렇게 눈물 흘리는 거 아니에요. 예레미아 13 17절 보세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 13:17

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신약으로 가보죠. 누가복음 7 37

누가복음 7:37~39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마리아죠? 창녀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 운거 아니에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고 예수님의 발밑으로 내 가장 소중한 머리털을 갖고 내려가는 거죠. 울음이에요. 애통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한 자의 애통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야~ 왜 저런 여자하고 같이 저렇게 상종을 하여 앉아 계실까? 욕을 했죠? 그러한 죄인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보세요. 누가복음 7 47

누가복음 7:47~48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눈물로 닦으며 애통해 하는 마리아에게 무죄를 선언해 버리세요. 무죄. 창녀에게 무죄를 선언해 버리신단 말입니다. 그건 마리아가 자신의 죄로 인해 통곡을 하면서 예수님의 발아래로 내려간 게 구원의 근거가 됐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무죄 선언을 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그렇게 자기의 죄인 됨에 자각을 갖고 예수의 발밑에 엎드려 애통하는 자리로 내려간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이런 애통함이 있냐고요. 아버지에 의해서 세상으로 보내졌던 탕자의 경우는 어땠어요. 누가복음 15장으로 가보세요. 18.

누가복음 15:18~19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사는 곳이 돼지우리였고 자신이 이전투구로 싸우던 것이 돼지 먹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건 아버지의 은혜라고 그랬죠. 이 비유가 어디에 이어지는 거라고 그랬어요? 회개의 비유에 이어지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양, 그리고 이 비유가 붙어 있죠? 그러니까 이건 전체가 회개에 대한 비유인데 회개는 잃어버린 이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회개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기 위해 돼지우리로 보낸 거죠. 그리고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만드는 거란 말이에요. 아버지가 그를 세상으로 돼지우리로 보냈더니 그가 거기에서 허랑방탕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있는 곳이 돼지우리인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열심히 추구하던 게 추구하여 쟁취하려고 했던 게 돼지 먹이라는 걸, 쥐염 열매라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애통하는 거죠. 그거에요. 그걸 애통이라고 그래요. 세리와 창기들은 어땠나 보세요. 누가복음 18 13

누가복음 18:13~14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세리를 보면서 하나님 쟤같이 안 살아서 참 다행이네요. 저 감사해요. 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착한 사람, 종교적 열심 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잖아요. 열심히 착하고 잘 살아서 주님 저 오늘 이렇게 살았습니다. QT에도 그렇게 잘 쓰시잖아요. ~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았다. 어제 하루 그냥 기똥차게 한번 살아 봤는데 오늘도 한번 그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봐야지~ 굉장히 훌륭한 결심인 것 같죠? 그리고는 야~ 아무개 이 집사 너는 날 보고 배워야 돼, 넌 날 쫓아오려면 한참 멀었어~ 쓰진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다 갖고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착한 사람, 열심 이 있는 사람 이렇게 부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제가 죄인 맞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이 세리, 창기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어떤 행위가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냥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걸 애통이라고 그래요. 그랬더니 주님이 저가 의인이다. 그러신단 말이에요. 사도행전에도 애통하는 자들이 나와요. 사도행전 2 36

사도행전 2:36~37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혀를 받아서 예수를 설교했어요. ‘성령의 혀’, ‘글로싸이게방언이라고 했죠? 똑같은 단어에요. ‘성령의 혀’, ‘그들이 방언했다에서 단어가. 성령의 혀가 내려와서 성도들에, 교회의 입에 딱 임하니까 성령이 증거 하는 예수가 그들의 입에서 성령의 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터져 나온 거예요. 그랬더니 그들이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내가 예수 죽인자 맞네~ 그랬어요. 베드로가 그러잖아요. 너희들이 예수님 찔렀잖아~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맞다. 그러면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이게 애통하는 거예요. 내가 뭘 해야 되지?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예수를 죽인 자는 자기 힘으로 예수를 살려내기 전에는 그 죄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뭘 하겠다고들 너스레를 떠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애통이 없는 자들은 성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하지 않는 자들은 다 죽여라~ 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에스겔서 9 4절 보세요.

에스겔 9:4~6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 세상의 가증함과 그 세상을 그대로 축약하여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애통해 하지 않는 자들은 긍휼도 베풀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통은 성도의 이마에 찍힌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설명이 될 만큼 필연적인 거예요. 하나님의 표라고 그러잖아요. 애통을. 그거 있냐고요? 나는 예수 믿고 이렇게 변했습니다. 라는 자랑 말고 사도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맞습니다. 이 자백이 여러분들 입에서 나오냔 말이에요. 그들에게만 구원이 임한다고 그래요. 이사야서 61 1절 보세요.

이사야 61:1~3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나오죠. 애통과 위로가 나와요.)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근심, 슬픔 다 같은 단어에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그 애통은요 현재형으로 성도에게 계속 붙어 있는 거 아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애통하다. ‘펜떼오의 시제가 현재형이에요.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그랬죠. 그건 복 받은 자들의 애통이 어느 한 순간에 왔다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속에 현재형으로 계속 붙어 있는 거라는 말이에요. 성도의 인생 자체가 자신의 죄인 됨을 올바로 알아 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인생의 목적이 그거 하나에요. 나의 처음 자리 확인,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그냥 흙 맞구나~ 그래서 애통이 현재형이에요. 계속해서 애통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랬듯이 그게 방향성과 지향성을 갖고 그 경향성을 가지고 그 완료의 자리로 계속 가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의 자아인식 자가 진단은 점점 형편없는 게 되어야 맞아요. 여러분의 행위가 점점 못돼진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흙이 맞구나 라는 이 자각이 확고해지는 거예요. 점점점 분명하네~ 확실하네~ 말씀이 맞네~ 그래서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네~ 이거.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올바로 직시해 가는 게 성도의 인생이라면 성도의 인생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고통으로만 일관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위로라는 말이 붙어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은 애통과 함께 위로를 같이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어떤 종류의 위로인지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야 되요. 위로는 개뿔이나 계속 애통하기만 하지 난 위로를 받아 본적이 없어 그런 분들 계실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그 위로가 있었다는 걸 제가 증명해 드릴게요. 여기서 위로라고 번역이 된 헬러어는파라칼레오에요. 파라클레토스가 뭐죠? 보혜사죠? 성령, 위로자잖아요. 그게. 그런데 여기서 위로가파라칼레오에요. 어근이 같아요.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나함인데요. 히브리 말은 칼, 피엘, 푸알, 히필, 호팔, 니팔, 히트파엘이라는 형을 자꾸 만들어 가거든요. 그런데 그 형을 변화시키면요 이 위로, 위로를 준다. 라는 이 나함이라는 단어가 애통하다로 바뀌어요. 그러니까 나함이라는 단어 하나에 위로와, 애통이 같이 얹혀있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에요. 그것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의 슬픔 현실을 직면했을 때에 야~ 다 잘 될거야~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랬죠. 그게 위로가 되요? 안되잖아요. 그 슬픔에 위로가 될려면 그 슬픔을 본 자가 그 슬픔의 자리로 함께 내려가야 되요. 그래서 애통해 보지 않은 자는 다른 이들의 애통에 참여할 수가 없어요. 배반을 당해 보지 않은 자는 배반당한 친구의 아픔에 동참할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위로는 애통함을 본 자가 그 애통의 자리로 함께 내려가야 비로소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나함이라는 단어 하나에 위로와 애통, 그 슬픔이라는 단어가 같이 얹혀 있어요. 성경에 여러 번 반복이 되어 나오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슬픈 자들과 함께 슬퍼하라 라는 말이 히브리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게 잘 안되잖아요. 누가 정말 타인의 슬픔과 동일한 슬픔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 사람의 위로가 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나 자신 안의 죄와 세상의 죄를 바라보면서 애통해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위로가 임할까요. 누군가가 그 애통의 자리로 내려와서 함께 애통해야 되요. 그리고 그는 자격이 있어야 되요.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예레미아 14 17절 보세요.

예레미아 14:17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처절하게 멸망의 자리로 내려갔을 때 하나님이 우시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밤낮으로. 그런데 하나님의 눈물은 회복의 약속이기도 한 거예요. 멸망시켜 버릴 자들의 타락을 하나님이 보고 울지 않으세요. 원래 죽을 흙인데 왜 울어요. 그걸 보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물은 곧 회복의 약속이에요. 그게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눈물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애통에서 십자가가 출발하는 거예요. 그걸 위로라고 그래요. 누가복음 19 41절 보세요.

누가복음 19:41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이 우셨어요. 어느 성을 보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요.)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해 하셨죠? 그랬더니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자들이 내려와요?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너희들이 내 말 안 들었으니까 다 부셔버릴 거야~ 멸망시켜버릴 거야~ 여기에서 결론지어지는 말 아니에요. 너희들을 내가 살려야 되는데 너희들이 죽은 흙이라 내 뜻에 맞게 도저히 살 수 없는 걸 내가 안다. 그러니 내가 애통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대적에게 넘겨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게 사그리 부셔버릴 거야~ 그러면 거기에서 애통이 터져 나올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거라니까요. 이런 걸 단순히 종말론적 계시로만 이해하시면 안돼요. 하나님이 우셨다는 건 반드시 거기에 회복의 약속이 들어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걸 잊으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또 우셨죠? 성경에서 제일 짧은 구절이 들어가 있는 Jesus wept 예수님이 우셨다. 거기에서 쓰인 헬라어는 갑자기 우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서 우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사로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 가신 분이에요. 그런데 왜 나사로가 죽었다고 우시겠어요. 조금 있다가 살릴 건데 죄를 보고 우신 거예요. 그랬더니 무덤이 파괴되는 거예요. 그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 파괴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애통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1 32절 보세요.

요한복음 11:32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지금 예수님이 사망의 파괴자로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망은 죄의 생산 공장인 육신이 죽어야 비로소 해결이 되는 건데 나사로의 육신이 죽은 걸 갖고 나사로의 동생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이 다 울고 있는 거예요. 그걸로 애통하면 안 되는데 그 육의 죽음을 갖고 애통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그걸 보고 예수님이 애통 하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무덤이 열린 거예요.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는 그 앞에 있는 동생들과 거기서 울고 있던 모든 이스라엘을 총칭하고 있는 거예요. 포함하고 있는 모델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무덤이 죄가 해결되는 거예요. 뭘로? 예수님의 애통으로. 그건 이미 이사야서에서 이미 예언이 되었던 거예요. 이사야서 53 4절 보세요.



이사야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누구의 슬픔? 우리의 애통이요. 우리의 애통을 그 분이 가져가셨다. 그래요. 이사야서 53장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현실을 아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복음의 현실 우리의 애통을, 이 애통함을 예수님이 다 가져가셨다. 라는 이 위로를 우리가 어디서 배울 수 있어요? 말씀에서 배울 수 있어요. 그래서 성경이 말씀이 위로자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로마서 15:4~6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전이라는 건 경전이에요. before가 아니라~)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이게 위로에요. 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말씀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교회가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이곳이 참으로 소중한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위로 받을 수 있어요. 지금 인터넷 생방송이 되면서 참석 인원이 많이 줄었어요. 지금 집에서 사과 깎아 먹으면서 보는 사람들과 전화 오는 거 다 받고 와이프 옆에서 TV 보면 그거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보는 그 사람들과 이곳에서 앉아서 집중하여 말씀을 듣는 사람들과 누구에게 임하는 위로가 더 클까요. 저 멀리 타주나 한국에 계신 분들 그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근처에 있는 인간들이 왜 TV보고 앉아 있냐고요. 안 오고.

그렇게 성도는 말씀에 의해서 애통하게 되고 말씀에 의해서 위로에 이르게 되요. 말씀이 좌우의 시퍼런 날로 성도의 죄를 낱낱이 까발리고 성도를 애통의 자리로 몰고 가요. 그리고 그 말씀이 예수의 대속, 대신 애통을 알게 해요. 거기에서 성도는 위로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 말의 애통과 위로가 같은 단어에 얹혀 있는 거예요. 애통이 있어야 위로가 있어요. 애통과 위로는 전혀 화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개념이지만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그게 이해가 갑니다. 나는 내 죄로 말미암아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애통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거 다 해결 하셨다네~ 위로가 함께 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애통이 사라지지 않아요. 끝없이 가는데, 애통해요. 미치겠어요. 허벅지를 찔러도 안돼~ 그런데 거기에 위로가 계속 같이 떨어져요. 말씀 속에서. 그게 역사가 묵시로 수렴이 되어 연합이 되는 필연적 과정인 거예요. 나는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애통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를 나의 모든 애통을 다 가져가셨다. 라는 그 복음의 현실을 굳게 믿는 자에게 위로가 있어요. 그건 평생 과업이에요. 어느 한순간에 완료되는 거 아니에요. 평생 가는 거예요. 평생. 그 애통이 현재형으로 여러분에게 붙어 있다. 라는 거 절대 잊지 마세요. 따라서 옳은 설교는 일차적으로 성도를 애통하게 만드는 설교여야 되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자기 방어 기제로 내어 놓았던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이 그 말씀에 의해서 전부 벗겨지고 자존심이 무너지며 자신의 무가치함의 발견으로 가슴이 찢어져야 되요. 심지어 그 설교를 하는 자가 미워져야 맞아요. 그래서 제가 설교 끝나면 바로 도망가는 거예요. 짱돌로 찍을 가봐~ 그래야 그가 진짜 애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애통의 현장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셔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설교는 죄의 폭로와 십자가 이야기 이외에 다른 게 섞이면 안돼요. 설교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끝까지 끊임없이 발가벗기고 그리고 그 위에 임한 하나님의 위로, 십자가 그거 이외에 다른 이야기가 섞이면 안돼요. 그거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부 인간의 감언이설일 뿐이에요. 그런 애통과 위로가 한 곳에 잘 그려져 있는 곳이 있죠? 우리가 산상수훈 첫째 시간에 찾아본 구절인데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사도바울의 애통함이죠.)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대목을 구원 받기 전의 사도바울이라고 단정을 하셨어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화를 아주 중요시 하는 분이에요. 그 분에게 있어서 성화는 성도에게 사유될 수 있고 쌓일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이라는 대사도가 여전히 이 자기의 죄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게 이 분한테 이해가 안간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의 로마서 강해를 보면 이 부분에 가서 책 한 두 권이 아주 불편해요. 여기 22절에 보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한다고 그랬는데 구원받기 전의 사람이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이건 사도의 자기 사도직 수행중의 자기 실체 자각의 묘사인 거예요. 내 속에 예수가 들어와 계셔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데 그건 내가 알아요. 우리도 알죠. 그런데 안 되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심지어 여기서는 자기를 시체라고 그래요. 사망의 몸. 살인자가 죽인 시체를 살인자에게 꽁꽁 묶어 놓은 걸 사망의 몸이라고 그런다고 했죠. 나는 사망의 몸이라는 거예요. 나는 시체라는 거예요. 시체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뭐 가치가 있는 게 있겠어요. 이 애통함, 그런데 이게 어떤 위로로 이어져요? 내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라는 위로로 이어진다니까요. 다른 위로 없어요. 이 애통함. 이거 어떻게 해결해 보기 위해서 내가 죄 몇 가지라도 해결해야지~ 이게 아니에요. 그건 위로가 아니에요. 예수가 위로라니까요. 십자가가 위로라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내려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애통이라는 필수과목을 이수케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복 받은 현실을 그들로 누리게 하는 데 있지 않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받은 복, 그 구원, 그 천국의 현실을 여러분이 누리게 해 주는 데에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거예요. 자존심 상하시겠지만 우리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한 행위를 갖고 하나님의 찬송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의 처음 자리 확인,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그 분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자구나 라는 처음 자리 확인 그게 필연적인 거고 필수적인 거예요. 자신의 처음자리가 어머니 자궁 속의 그 핏덩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산 존재로 부름을 받은 자신의 현실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현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거예요. 어머니 자궁 속의 핏덩이는 어머니 자궁에서 연결된 태가 끊어지면 그냥 고기에요. 살덩이. 죽은 거예요. 그거는요. 그래서 자궁과 긍휼이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인 거예요. 우리의 처음 자리, 죽은, 죽은 흙의 자리, 고깃덩어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생명이 탄생이 되는 거예요. 그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어떤 자인가? 어떤 지경에 있는 자인가? 이게 우리의 처음 자리 확인이란 말입니다.

시편 30:5

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여러분은 지금 저녁이라는 역사를 사시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료된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시적으로 반드시 임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위로죠.)

시편 30:8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이건 하나님 나를 무덤에 보내시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도움을 드리겠어요. 내가 진흙이 되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런 말이 아니에요. 죄에 대한 자각, 자신의 죄인 됨의 자각이 있는 자가, 하나님 제가 무덤에 있는 자인데, 하나님 제 피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며 유익이 되겠습니까? 진토인 내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말 하는 거예요. 그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게 뭐에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거죠. 도와주세요. 이게 애통이라니까요. 10절 보세요.)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이거 끌어내시는 거예요. 역사와 인생동안 하나님은 이거 끌어내시는 거라니까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께 박수 받는 자 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목숨이 하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자기 목숨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대요. 이 웬수들이요. 이 목숨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된다고요. 여러분의 목숨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요. 아 콘서트도 해야 되는데 이거 목이 쉬어서~ 아니 여러분의 목숨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된다고 주먹 불끈 쥐고 맨날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친다고 그래요. 누가 그거 달라고 그래요. 그거 하나님이 여러분 코 잠깐만 막으면 사라질 거거든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께 드린대요. 그거 하나님이 준 거예요. 혼신, 마찬가지에요. 누가 그 죽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뚱아리 받는다고 그랬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써 주시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쓰시나~ 라고 감사하게 쓰임 받으면 되요. 여러분 주를 위해 고난 받겠다고요? 여러분이 받는 고난이 주님께 무슨 도움이 되요? 그런 말 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주를 위해 우리가 무슨 고난을 받아요. 그냥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면 제자들처럼 어떻게 나 같은 거를 주를 위해 고난까지 주세요. 이 자리로 가는 게 성도라니까요. 이게 애통함이에요. 이게 마음이 가난한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나오면서 아~ 어떻게 나를 주를 위해 고난 받기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미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올바른 성도의 자아인식이 있으니까 주를 위해서 나에게 고난이 오는 것도 기쁜 거예요. 내가 감히 어떻게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아요? 그런데 무슨 목숨까지 바친다고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여전히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목숨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데에서 나오는 오만이에요. 그거는요. 그냥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쫓아가면서 사세요. 살아 있으면 되요. 거기에서 여러분에게 열심 이 나온다면 그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격발시키는 열심이에요. 그때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열심을 최선을 다해서 하라고요. 여러분의 의로 쌓일 열심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어 행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요. 제가 말씀 드렸죠? 아무것도 안 해야지~ 이것도 행위라고. 자기의 행위가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해야지~ 하면 뭐? 안 하나 하나 뭐가 달라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해야지~ 이게 뭐에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료가 된 하늘의 현실이 어떠한 건지 제가 성경 몇 군데에서 찾아 드리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35:10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거는 지금 하나님 나라가 완료되는 시점이거든요. 가시적으로. 그 전까지는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어야 되요. 이걸 51장에서 그대로 또 반복해요.)

이사야 51:11

11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12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다른데서 위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너희들의 위로는 나야 나~ 그러잖아요. , 난데 왜 딴 사람들 너희들에게서 떠나간다고 슬퍼하고 애통하고 왜 그래? 버려~ 그런 거. 그리고 나만 봐~ 내가 위로야~ 걔네들 위로 아니야~ 걱정 하지마. 세상 것들 다 위로 안 되는 거야~ 나만 봐~ 내만 위로야~ 그러는 거예요. 나만 위로야~ 그런데 우리는 너무 걱정해요. 저거 내 위로였는데 저거 떠나가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끊어 내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1:3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묵시 속 현실은 여러분에게 이미 닥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처음 자리 확인이라는 이 역사와 인생을 사시면서 이 묵시의 현실이 얼마나 면목 없고 감사한 것인지를 애통 속에서 배우시면 되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하세요. 감사 하세요. 그러면 되요. 딴 거 없어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세요. 다른 거 없어요. 여러분이 찬송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제발. 여러분의 실체를 자꾸 위장하거나 감추지 마세요. 애통하세요. 슬퍼하세요. 그러나 이미 십자가에서 그 애통이 다 해결되었음으로 위로를 받으세요. 하나님은 구약, 즉 율법으로 성도를 애통케 하신 후에 신약, 은혜로 성도를 위로하시는 거예요. 이게 역사에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라니까요. 그것만 잘 사시면 되요. 그러한 이들의 삶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고 애통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지향성이 또 함께 격발이 되요. 생각해 보세요. 애통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너희를 애통케 만든다. 내가 복 준 자는 애통케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애통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이죠? 분명히 구별된 어떤 게 있어요. 변화가 있단 말입니다. 애통한다. 라는 자체가 구별이니까. 성도는 절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어요. 애통은 분투로 이어지게 되고 그 분투는 다시 애통이 될지언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위로의 현실이 성도를 계속 덮쳐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이 있는 거예요. 이걸 결론으로 읽고 마치죠.

에베소서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이 단어가 애통케 하다. 슬프게 하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성령을 애통케 하지 말라~ 이미 하나님이 애통케 하여 우리가 태어난 거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겠니? 라고 묻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을 애통케 하지 말라~ )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이미) 받았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