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 01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마태복음 5:1~12 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3:18

산상수훈 01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마태복음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여러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오늘부터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산상수훈을 공부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 보편적인 것이 꼭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산상수훈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거죠. 제가 이 산상수훈을 강의하기 위해서 사전작업으로 어제까지 한 30여권의 논문들과 강해서들과 주석서들을 샅샅이 읽어봤는데 정확히 27권인데 3권은 안 읽었어요. 지겨워가지고. 그 속에서 산상수훈의 보편적 이해의 흐름을 정리를 할 수가 있었어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 산상수훈을 구원받은 자들의 행동강령에 무게를 두어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특히 청교도 신앙의 전승자라고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 있죠? 존 오웬 이나 리처드 백스터 같은 이런 사람들이 특히 그런 경향을 아주 짙게 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게 과연 그럴까. 심지어 헤르만 뤼데보스 비롯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이르기 까지 이 산상수훈을 구약과 연결을 해서 명쾌하게 예수로 연결해 해 내는데 있어서는 좀 미흡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오늘날 보편적 산상수훈의 이해인데, 저는 제 방식대로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이 산상수훈을 강해를 해 볼 작정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이 산상수훈은 타 종교인들까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할 정도로 아주 보편적이며 인기가 있는 보편적 윤리 강령이죠. 물론 그들의 평가입니다. 윤리강령이라고 하죠. 그리고 서두에 팔복강화의 부분에 마치 후렴구처럼 따라 나오는 복이라는 단어가 아주 매력이죠. 복, 복, 복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복, 그래서 타 종교인들까지도 광분하면서 이 산상수훈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복 받을까봐.


마하트마 간디가 죽는날까지 제일 열심히 읽었던 책이 바로 이 산상수훈이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법화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주 비슷해요. 노자의 도덕경에도 거의 흡사한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산상수훈을 도덕과 윤리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지켜야할 행동강령 정도로 이해를 한다면 성경과 타 종교인들의 경전과 다른게 뭐예요? 과연 산상수훈이라는 것과 그러한 타 종교인들이 타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경전이 목적하는 바가 같은걸까요? 그러면 뭐 하러 꼭 성경을 공부합니까? 불경도 같이 공부할까요? 정말 이 산상수훈이 인간들의 자존심과 가치와 유익을 챙겨주는 윤리강령의 나열이나 그런 윤리강령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선언에 불과 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저와 함께 공부를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산상수훈은 오히려 오히려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의 쌓기를 부수는 강화예요. 구약의 의가 신약의 새 언약에 의해서 박살이 나는 곳이 바로 이 산상수훈의 현장입니다. 완전히 반대 이야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약의 산이 이 산상수훈이 강화되는 산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라고 붙인 거예요. 신약의 산은 바로 이 산상수훈이 뿌려지는 산을 말하는 거고, 구약의 산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율법의 산, 시내산을 가리키는 거예요.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부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내시는지를 보여 주는 게 성경이란 말예요. 다 이 얘기예요. 


이 산상수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강화가 어느 에피소드 뒤에 이어지는 지를 눈 여겨 봐야 돼요. 이 산상수훈이 5장이죠? 그 앞에 뭐가 있어요? 4장, 4장 말미에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부분이 나오죠? 거기에 붙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어떤 오해가 발생하고 예수님이 거기에 대한 설명으로 붙여 주는 게 산상수훈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신들린 자들이 노임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 화려하게 시작이 되요. 그야말로 화려하게, 그런 단순한 기적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선포였죠? 선악과 따 먹은 아담 군상들이 배태하고 출산해 놓은 이런 역사의 실체는 병들고 썩어지고 귀신들리고 왜곡된 상태예요. 지금 이상태가 바로 그 상태입니다. 그건 모두 사망이라는 것의 가시적 증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메시아로 보내셔서 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병들고 썩어지고 귀신들리고 왜곡된 것들을 새롭게 완성해 내시겠다는 완벽한 설계도를 작성하셨어요. 그게 바로 창세전 언약이죠? 그 설계도에 의해서 옛 성전 즉, 구약이 무너지고 은혜를 재료로 한 새로운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 구원인거고, 하나님 나라 건설인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사망의 증상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하신 거예요. ‘내가 이 일하러 왔다‘  보여주는 거예요. 단순히 거기에 목적이 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취하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그 부분을 한 번 보고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4:23~25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 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이거 경사난거 아니예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 왔는데 다 물리치고 제자 12명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런 거란다 라고 다시 설명하신다 말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이란 말예요.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천국 복음이란 단어예요. 천국 복음,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쳤다 그러죠? 그러니까 병과 약한 것을 고친, 그러한 모든 기적 행함이 모두 천국 복음에 관한 일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이런 것이다’  보여 주기 위해 행한 기적이 그건데, 뭔가 거기에 모인 허다한 무리들이 오해를 하고 있던 거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든 거라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기뻐하셔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국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거란 말예요. 그게 산상수훈이에요. 


5장부터 7장 마지막까지, 8장 1절에서 산에서 내려오니까.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해요. 산에서 내려온 그 이후부터는 산상수훈 아니에요. 그건 그때 예수님께 나온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과 그 분이 가져오신 그 천국, 하나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인 거예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세요? 천국이 왔다면서요?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 왔다면서요? 언제? 십자가에서, 그럼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시잖아요행복하시냐구요? 평안하십니까? 보세요.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오해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분명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거야? 아냐 아닐꺼야 이리로 자꾸 가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거냐고 물어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거냐고 물어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침노해 들어와서 그냥 아예 그자를 장악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를 사는 거거든요.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게 뭔지 분명히 아실 거예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기초와 근간을 다시 설명해 주시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산상수훈의 맨 마지막이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의 그 비유, 그 기초의 문제로 끝나는 거예요. 산상수훈의 끝이에요. 그게. 


그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세요. 구약을 기초로 한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나면 완전히 무너지는 거니까,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잘 새겨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에게만 가르쳐 주세요? 12제자, 12제자는 요한계시록에서 누구를 상징하는 거죠? 교회, 교회에게만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이나 천국관은 구약적 패러다임 속에서 단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그런 거였어요. 


민속 메시아 사상, 구약적 민속 메시아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는 힘 있고 강하며 일상에 유익하게 관계하고, 종말적 낙원까지 한꺼번에 들고 와야 하는 그런 분이었죠. 인간들이 원하고 그리는 건 다 갖고 와야 되는 게 메시아였어요. 그리고 구약적 패러다임 속의 천국은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우리가 원하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을 우리가 똑같이 원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면서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거기에 자기들의 율법적 행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게 구약의 천국관이요구원관이었잖아요. 구원도 인간들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와야 하고, 천국도 인간들의 설계도대로 만들어져야 돼요. 이게 민속 메시아 사상이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어떤 분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일으키고 약한 자들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런 기적들의 진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적 필요를 채워 주는 엄청난 힘을 소유한 예수님에게 엉뚱한 천국을 기대하며 몰려들었던 거예요. 나중에는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도망가시죠?


똑같이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을 힘으로 갖고 있는 사람을 쫓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잘못된 메시아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들의 그러한 그릇된 천국관과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산상수훈이에요. 따라서 산상수훈은 도덕적 윤리적 처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복 받는 비결 또한 더더욱 아닌 거예요.


인간들의 행위와 자격에 상관없이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치고 들어오는지에 관한 설명이 산상수훈이에요. 이렇게 산상수훈은 모형과 예표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줬던 그 구약의 산, 시내산을 부수는 신약의 산인 거예요. 이건 제가 추론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구조와 흐름을 잘 보시면 이 산상수훈이 위치하는 자리가 구약의 어떤 산과 같은 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죠? 그리고는 헤롯의 칼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을 하세요. 성경은 그 사건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죠?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애굽으로 선언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셨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그런단 말예요졸지애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걸 부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는 일이 발생해요. 지금 제가 여기서 끌고 산상수훈까지 갈 거예요. 그러니까 그 흐름을 보시란 말예요. 이 산상수훈이 어떤 부분의 모형인지를~



마태목음 2:15~18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분명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전언을 하셨죠?

그러면 그때에 다른 어미들에게도 전갈을 보내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왜 다른 얘들은 다 죽게 놔두세요? 예수님만 살짝 들어서 애굽으로 보내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뭔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롯에게 데리고 간 거예요. 죽이라고요. 아니 그 별이 미쳤지, 바로 그냥 예수님 태어나신 구유로 갔으면 될 걸, 왜 헤롯에게로 동방박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게하냐구요? 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 이라는 예레미아의예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주의 하여 보셔야 되요.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그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그 애굽으로 규정을 해 버리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엑소더스를 하고 그 뒤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정작 뭐였냐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율법주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죽으시는 거예요. 애굽은 바로 교회 안에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모형으로 등장했던 거지, 애굽이 쳐 죽일 놈들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옛 자아’ 그 모습이란 말예요


그렇게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애굽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자들은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 주지시키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애굽이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서 내어 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원죄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할 존재예요. 죽은 흙이니까.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건 거기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선언이란 말입니다. 마태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 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 예레미아의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언이죠? 라마라는 곳은 남유대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갈 때 집결된 곳이예요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죠?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나오죠. 그 라마는 라헬의무덤이 있는 샐사 부근이에요. 예라미아 선지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유대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걸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거예요. 


라헬의 두 아들이 누구죠? 요셉과 베냐민, 요셉의 큰 아들은 애브라힘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애브라힘이죠? 망했잖아요? 남유대는 베냐민, 라마가 또 베냐민의 땅이고,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을 다 잃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이스라엘 전체가 다 멸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예요?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된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진 그자들도 원래 다 죽어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다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는데,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죠? 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절대 위로가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러 왔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란 말입니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할 하나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 내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렇게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복을 주어서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2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예수의 이름의 뜻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 모든 백성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만, 어디에서? 죄에서, 그게 메시아란 말예요. 그렇게 구약적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폭로한 성경은 역사적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 내시죠? 예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대로 밟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애굽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의 흐름이에요. 세례라는 건, 애굽의이스라엘이 죽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거죠. 그것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해 성취될 새 창조의 모형이에요. 


첫 창조 때 무대 배경이 어땠죠?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시고 빛이 있으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창조가 시작됐잖아요? 예수님의 세례 현장은요? 저주 받을 구약이 빠져 죽을 물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시고 직접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또 떨어져요.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창조라는 거예요. 새 창조, 첫 창조에서 모형 되었던, 


그리고는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시험을 받으세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12제자를 모으시죠. 그건 교횝니다. 12제자,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는 어떤 산으로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지금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입니다. 이건 정확하게 출애굽 이스라엘의 삶을 회복시키고 완성 시키며 가는 모습이에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살아 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죠? 그걸 사도 바울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그래요.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그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다 빠져 죽죠? 그 애굽 군대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져내면서 이스라엘을 자주 군대라고 부르시죠? 애굽 군대가 빠져 죽었다라는건애굽화된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여러분 미국이 역사가 200년 밖에 안됐는데 여기 미국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요. 그런데 400년간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 있었을 때, 그들의 그 정체성이 어떻게 확보가 됐을 것 같으세요? 확립이 됐을 것 같으세요? 애굽사람이예요. 그거는요. 애굽에서 태어났고,애굽의 학문을 배웠고, 애굽의 것 먹고, 애굽에서 생활했어요. 애굽의 것을 배웠고, 애굽사람이예요. 그걸 저주의 바다 홍해에 빠뜨려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는 가나안 쪽에서 봤을 때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 올라오는 걸, 세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걸 나중에 이스라엘의 할례를 통하여 다시 확인 시켜주죠? 할례와 세례는 그 정신과 내용이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할례를 길갈에서 행하게 하면서 뭐라고 그래요?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홍해 사건은 애굽의 수치, 이스라엘의 애굽화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게 홍해예요. 그게 세례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홍해로 몰고 가신 건, 이스라엘 속에 있는 애굽을 죽여 버리기 위함 이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40년 광야를 살게 하세요.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죽어야 할 자로 폭로가 되죠.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죽어야 할 자로 폭로가 되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는 개뿔이나 하나도 못 지키고, 이건 다 죽어야 될 자구나, 폭로되고 죽어요. 거기서 다. 그리고 새로운 2세대가 여호수아, 예수라는 인물을 앞세워서 은혜로 다시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 과정이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 들어 있는 이 산상수훈의 이야기는 출애굽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에 어디쯤 해당 될까요? 광야 40년을 가면서 60만 명이 다 죽고,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이 되어 가나안에 가는 거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어디 산으로 데리고 갔잖아요. 무슨 산? 시내산이죠.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은 바로 출애굽 그 여정 속에서의 시내산을 지금 그리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시내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구약의 시내산이 어떻게 신약에서 회복되고 성취되는가의 측면에서 보아야 되는 거죠? 신약에서 구약의 시내산을 다시 그려내고 있는 산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 하나가 이 산상수훈의 산이고, 나머지 하나가 변화산의 그 산이에요.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하늘의 법이 공포가 되고 수여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는 거고, 변화산은 그러한 새로운 법이 통치하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음과 동시에 두 산에, 산상수훈의 산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가 올라가 있고, 변화산에는 두 증인, 두 증인으로 모형 되었던, 교회, 그 두 증인이 누구예요? 모세와 엘리아였죠? 계시록에서 봤잖아요 우리가, 그 모세와 엘리아, 교회가 예수님과 또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다른 거란 말입니다. 두 증인과 12사도는 똑같은 거예요. 교회란 말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엘리야와 모세로 대표되는 두 증인 즉, 교회가 그 변화산위에 나타나는건데, 이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산에 올라갔던 사람이에요? 모세는 시내산엘리야는 호렙산, 두 산은 같은 산입니다. 그래서 변화산 위에 바로 그 시내산에 올라 갔던 두 사람이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변화산과 이 산상수훈의 그 산은 구약의 시내산의 신약적 성취를 보여주는 그러한 산이란 말이에요.



누가복음 9:30~31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여기서 이 별세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엑소더스에요엑소더스는 출애굽기의 제목이죠. '예수님의 엑소더스가 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라는 거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내산에 올라갔던 세 분이 그 예수님의 엑소더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별세라고 하죠. 그러니까 산상수훈이 전해진 그 산이나 변화산의 그 산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수어진 구약의 율법과 그렇게 해서 완성이 된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자명한 거예요. 


그래서 변화산 아래에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들어나는, 마치 금송아지 사건 같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제 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구약의 시내산이 갖는 메시지를 잘 정리를 해야 신약의 시내산인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 할 수 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50일째 되는 날,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죠. 그리고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19:5~12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게 구약의 율법이에요. 잘 지키면 복 준다. 이거에요. 이게 시내산입니다. 구약의 시내산)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 들로 옷을 빨고 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이게 셋째 달, 셋째 달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의 유월절 아빕월이죠. 이스라엘은 달력이 세 개가 있어요. 애굽에서 쓰던 민간력,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 그 히브리력이 있어요. 성력이라고 해요 그것을. 그리고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썼던 양력. 이 그 아빕월 첫째 달 그 아빕월, 유월절이 있는 그 첫째, 그 아빕월을 첫째 달로 하라고 그러죠. 그 아빕월 14일이 유월절이잖아요. 그날 애굽의 장자가 사그리 다 죽고 그날 나온거죠그러면 한달을 30일로 쳤을때 첫째 달에 17일 남죠. 둘째 달, 한 달, 30일이에요. 셋째 달, 세 번째 날까지 기다리라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시내산에 임하는 그날이 몇 일째? 오십일 째, 


이 때 하나님이 임해서 그들에게 법을 줬더니 3000명이 죽죠? 그런데 신약에 그 똑같은 오순절 날에는 똑같은 인간들이 하나님 임재 앞에 있는데 베드로가 설교를 했더니 3000명이 똑같이 살아나요. 그 가운데에 뭐가 있었던 거죠? 십자가가 있었던 거예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될 신약의 산, 신약의 새 언약의 성취가 구약의 이 시내산을 부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산상수훈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출애굽기 19:5~12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내면,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거라는 약속을 주세요. 그리고는 또 다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그래요. 왜?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켜내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 부정함이 거죽에 닿으면 하나님의 돌격으로 죽게 되요. 그러니까 못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구동성으로 다 지킬게요. 지킬게요. 그랬대니까요. 다 지킬게요. 걱정 하지 마세요. 그랬어요. 이게 구약의 시내산이에요. 다 지킬게요. 걱정 하지 마세요. 상이나 준비해 두세요. 그랬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 말을 듣고 확인 도장을 딱 찍으세요. 분명히 너희들 그렇게 말했어~



출애굽기 24:6~8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라는 말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피를 뿌렸다는 건, 너희들 그 약속 안 지키면 다 죽인다 라는 뜻이에요. 다 죽인다. 지키면 복 주고, 하나님 백성 되는 거지만, 못 지키면 다 죽어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피를 뿌리는 거예요. 언약이에요. 피의 언약.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죠? 모세가 그 법을 받는 그 시간에 금송아지 만들고 있었어요. 뒤 돌아서서 바로, 피 닦기도 전에, 인감도장에 인주 마르기도 전에 계약을 위반한 거죠. 어떻게 해야 되요. 죽어야 되요. 그래서 3000명이 거기서 죽습니다. 다 죽어야 되요.


그런데 모세가 그 앞을 가로막죠. 하나님 저 사람들 다 죽이려고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겁니까?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세요.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세요. 그래요. 이게 누구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의 모형이에요. 그리고는 두 번째 돌판이 주어지는 거죠. 그 돌판이 법궤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두 번째 돌판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 돌판을 볼 때 마다 뭘 생각해야 되요. 우리는 벌써 그때 죽었어야 되는데, 모세의 중보로 덤으로 산거구나 라고 모세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법을 대할 때 이걸 지켜야지 하면 구약사람 되는 거예요. 나는 벌써 죽었어야 될 자인데, 이걸 못지키니까. 벌써 죽었어야 될 자인데, 예수님이 가로 막고 아버지 차라리 날 죽이세요. 그래서 내가 산거야. 이렇게 은혜를 붙들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그 산상수훈을 가지고 지키겠다 라고 그래요. 그리고 지켜야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이라고 그러고, 그걸 지켜야 복 받는다고 그래요. 지켜야 하나님 나라 들어 간다고 그래요. 여러분, 이게 청교도 신앙이었어요. 조심하세요. 산상수훈은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서, 구약의 옛 성전은 그 자체 안에 자체 부정과 자체 충돌을 내포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이라는 거 자체가 율법의 표상이죠. 물론 그 안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다 못 지켰을 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준 거예요. 그러나 그 안에서 율법에 정해진 규례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그 제사는 무효에요. 그러니까 그것 또한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의 표상인 성전 안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인간들의 그 죄가 십계명 돌판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이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염소의 피로 덮힘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는 은혜의 현실이 그 안에 숨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그 지성소가 나중에는 이 성전 전체를 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그 요한계시록에 가면은 성전을 측량하는데 정사각형이 되는 거예요. 성전 안에서 정사각형은 지성소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성전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가 있는게 아니었어요. 지성소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 거예요. 


그 지성소가 뭐냐면, 신약의 새 언약이라니까요. 예수의 피, 제물의 피에 의해 인간들의 죄가 그냥 거저 덮히는 것. 그 은혜가 바로 이 율법의 성전을 부술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성전이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신약에 와서 그 성전이 부숴지는거란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그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볼 때마다 나는 벌써 죽어야 할 사람인데 모세의 중보로 살아난 자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해야 됐어요. 


따라서 우리도 성경의 법을 대할 때, 하라, 하지말라의 명령을 대할 때, 먼저 머리 싸매고 지켜야지~그리로 가기보다, 지키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그걸 지켜야 되겠다 라는 지향성을 갖게 만들어요. 그러나 이걸 먼저 지켜야 되겠다 라는 그 의지를 발동하는게 아니라 나는 벌써 이 법 때문에 죽었어야 할 자인데 예수 때문에 산 자라는 그 은혜의 현실을 먼저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성전의 의미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또 다시 출애굽기 19장의 그 허탈한 맹세를 하고 있었던 게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어요. 다 지킬 게요. 다 지킬 게요. 그러다가 다 죽을 뻔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어땠어요? 다 지키고 있어요, 그랬다구요. 또~ 지금은 어때요? 그거 잘 지키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에요. 또 이러고 있잖아요. 계속해서 에덴의 아담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행일치니 뭐니 이런 소리들을 하는 거죠. 

"왜 훌륭한 신앙인이 언행일치가 안돼! 그게 돼야 되는데,"

그게 된다고 우기는 게 바리새인들이었다니까요. 그래놓고 굉장히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이 역사는 그러한 아담들의 하나님처럼의 그 행위가 즉, 구약이 부인되고 깨지는 곳이에요. 그래서 미가서에 보면요. 한 산이 부수어 지고 다른 산이 새롭게 서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미가서 3:9~12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삸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갈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성전, 율법의 모형인 그 성전이 서 있는 그 곳을 산이라고 그러죠. 이 시내산이라는 말이에요. 그것 다 부수어질거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등장하는 거거든요. 구약의 산, 율법의 산은 부수어질 거래요. 그런데 똑같이 그런 산이 다시 등장할 거라고 이야기해요. 그 다음 장으로 가보세요.



미가서 4:1~4

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옛날에는 어땠어요? 그리로 몰려가면 다 죽어요. 그런데 민족들이 새로 세워지는 그 산에는 올라간대요. 예전에 그 시온산이 무너진 그곳에 선 그 산이에요 근데. 그 산에는 모여 올라간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산상수훈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12사도가 그 예수가 이끄는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아무런 제지 없이~ 이 미가서의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거라니까요.



미가서 4:2~4

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보세요. 이스라엘 정도가 아니라 많은 이방이 함께 산에 올라 간다구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산과 성전을 같은 것으로 보죠. 동격으로 묘사를 한다구요.)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수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있잖아요. 산상수훈에서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의 율법은 그들을 죽이는 율법이었는데 지금 새로 선 그 산에서 나오는 율법이 이들을 지금 살려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법이에요. 그거는요.)

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 내용은 이사야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 똑같이 또 기록되어 있어요. 두 선지자가 똑같이 토씨 하 안 틀리고 똑같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부분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시면 '여호와의 전과 여호와의 산이 다른 산들의 꼭대기에 선다'고 그래요. 

다른 산들이 부정되고 이 새로운 산이 그들을 점령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아닌 많은 이방이 그 산 즉, 성전에 올라가서 새 성전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도를 받아 그 길로 행하게 되는 거예요. 산상수훈에서는 어떤 성전이 있었어요? 예수라는 성전,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지을 거야~그건 예수님의 성전 됨을 이야기 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미 부수어진 그 율법의 산, 여호와의 말씀의 산, 시내산이 다시 나타나서 또 다시 율법과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지게 된다는 거예요. 물론 그 율법과 말씀은 이미 부수어진 구약의 산, 옛 성전에서 전해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겠죠? 그게 바로 산상수훈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때에는 근처에만 가도 다 돌격하여 죽이시던 하나님이 그 말일의 산, 그 말일의 성전에서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거예요.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지금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떨어지면 여러분은 다 죽어야 되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어요. 제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말게 해줘~모세에게 부탁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듣고 있다니까요. 바로 이 현실을 12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표현해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건 바벨탑이라는 옛 성전을 부수시고, 그 자리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도 나타난 거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느무갓네살의 그 금신상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의 그 용사들을 상징하는 거죠? 세상의 용사들, 그 금신상이 다른 산에서 뜨인 돌, 뜨인 돌이 둥둥 떠 있는 돌이 아니라 산에서 삽으로 이렇게 뜨여진 돌이라는 뜻이에요. 다른 산에서 뜨여진 어떤 돌에 의해 박살이 나는 거죠. 그 이야기에요. 이 산상수훈의 그 산 위에 있는 예수라는 뜨인 돌이 구약의 그 시내산, 그 산을 박살을 내버리는 거예요.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 새로운 산, 율법의 산이 무너진 곳에 새로운 산, 새로선 산, 새로선 새 성전의 모습이 산상수훈의 산인 거예요. 그리고 그 새로운 산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하늘의 법과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의 내용인 거구요. 물론 그런 구약의 산과 신약의 산 사이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바로 이곳 산상수훈의 이 현실을 구약의 시내산과 비교해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한 번 보세요



히브리서 12:18~24

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여기가 어느 산이에요? 시내산이잖아요. 첫 번째 율법이 전해 졌던~ 그런데 지금 교회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뭐라고 그래요? 너희는 그 산에 당도한거 아니라고 그러죠. 율법 지킬게요 하다가 다 맞아 죽는 그런 산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산? )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미가서의 그 산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미가서에 나온 그 단어들이 그대로 등장하죠.)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의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바로 이 산인 거예요. 그런데 그 산을 가리켜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이 산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새 언약의 산이며, 어린 양 예수의 피, 뿌린 피로 말미암게 된 은혜의 산인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 그곳에서 율법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돌격으로부터 해방이 된 자들이 된 거야~ 이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선포되어지는 곳이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이에요. 

시내산, 그 율법의 산은 모세도 못 들어가던 산이에요. 여기 나오잖아요. 모세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많은 이방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산이 섰단 말이에요. 


그게 산상수훈이란 말입니다. 그 입구에 뭐가 서 있다고요?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산상수훈을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나 윤리나 행동강령으로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완전히 거꾸로,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존경하는 그 분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게 옳다고 그래요. 이 설교가 나가면 또 아마 난리들 칠거에요. 그건 성경의 전체의 맥을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다른 종교인들까지 쫓기를 원하는 기독교 윤리나 실천 강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성도를 어떻게 구별하여 드러내시고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명쾌한 선포인 거예요. 


본문 2절을 보면 '입을 열어 가라사대' 라는 어구가 나오죠. 이거 마태가 일부러 끼어 넣은 거예요. 

그럼 입을 열어 가라사대 이지 코를 열어 가라사대 합니까? 그런데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이 떨어질 때 마다 하나님의 입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오죠. 

여기서 마태가 지금 예수를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죽었어요. 벌벌 떨어다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제자들이 턱을 괴고 이렇게 듣고 있는 거예요. 재미나게~ 이게 신약인거에요


어떻게 그렇게 됐다고요? 어린양의 피 때문에~그게 중점이라니까요. 

산상수훈의 핵심은 어린양의 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그런 행동강령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그 자체가 뭔가 해결되어 있는 모습이잖아요. 하나님이 입을 열어 가라사대, 뭔가 말씀을 하시고 하늘의 도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아무런 제지나 방해 없이 그것을 듣고 있어요. 즐겁게~ 그게 지금 뭔가 해결된 거 아니에요? 그게 어린양의 피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의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그건 너희들의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기초로 끝나는 거라고 그랬어요. 

7장 마지막이, 모래위에 세운 집, 반석 위에 세운 집. 그렇게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구약의 율법을 부수며 새 언약의 성취를 확고하게 세우는 그런 내용이란 말입니다. 


산상수훈의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을 샌드위치 빵처럼 감싸고 있는 게 뭔지 아세요? 감싸고 있는 단어, 천국이에요. 하나님 나라, 바로 그 앞에서는 천국 복음을 전했는데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그랬다 라고 천국이 나오는데, 그 천국이 오해되니까 하나님이 천국을 다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이 천국이고 마지막이 천국이에요.



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니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대잖아요. 그건 하나의 질문이에요. 그건 제가 풀어드리게요. 조금 이따가, 천국은 대접을 받고자 해서 먼저 남을 대접한 예수에 의해 완료가 되어서 이미 교회에게 주어진 곳이라는 거예요. 이게 7장 서두에 나오죠? 


'너희들이 대접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 줘라.' 

이거는 불경에도 나오는 얘기에요. 너희들이 대접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 줘라. 이거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올 거요 아마? 그 이야기겠어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대접받기 위해 우리를 먼저 대접한 게 십자가거든요. 그런데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했어요? 예수님이 왕이네요. 당신이 구원 않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네요~ 라는 그 대접! 믿음! 그 대접 받기 위해 예수가 대접하여 이룬 게 하나님 나라다~를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인간들의 선악 구조로 행하는 자들은 절대 못 들어간다. 이게 산상수훈의 요지란 말이에요. 7장의 결론 부분을 보시면 인간의 선악 구조의 판단에 의해서 열심을 부린 사람들이 지옥 문 앞에 서서 막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죠.



마태복음 7:22~23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거 나쁜 일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하고 선지자 노릇했대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 주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왜 예수님이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러냐구요. 지금 이게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인데 산상수훈이 붙어있는 부분이 똑같은 부분이었죠. 예수님이 병 고치고,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고 그런 일 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진의가 숨어 있던 건데, 사람들이 그걸 이게 진짜 하나님 나라로구나 라고 표피적으로 이해를 했잖아요. 그게 오해죠? 


그걸 그대로 갖고 와서 이게 하나님 나라 겠거니 하고 이 세상에서 그대로 행한 거란 말입니다. 착하게 산거예요. 귀신 쫓아내주면서 다른 사람들 위해서 이 한 몸 불살라 산 거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나님 나라 들어간다 라고 생각한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 행위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걸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게 바로 지옥갈 일이다~를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요. 그래서 앞뒤가 인클루지오 구조로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이렇게 붙어 있는 거예요. 샌드위치 빵처럼~


그러니까 산상수훈은 적어도 그렇게 해석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니까요. 구약식으로 표피적으로만, 문자적으로만. 그 중에서도 팔복은 오늘 우리가 읽은 팔복은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은 이들에 이 역사 속 현실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팔복은 전부 '마카리오스'로 시작이 되요. 그건 감탄문의 형식이거든요. 복 있는 자요~라고 선언하는 거예요. 뭐뭐 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니가 아니라 복 있는 자요~복 받은 자여~너희는 이렇게 될 거야~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희의 현실은 이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에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희들에게 복 주셨다 그러죠. 복 주시되 과거 시제거든요. 복을 이미 받았단 말이에요. 그러면 복을 받기 위해 산상수훈을 실천하는게 옳아요~아니면 복 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옳아요? 복을 받았다 면서요. 그런데 무슨 복을 또 받아요? 뭘 해서 복을 또 받냐구요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우리에게 신령한 복으로 복 다 주셨다는데 산상수훈은 지켜서 복 받는 비결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이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 만들어 가실 것인지에 대해서 선포해 주시는 거예요. 그게 팔복이에요. 안 그러면 탈락 한다~아니요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라니까요. 안 그러면 탈락한다가 아니라~ 


그런데 복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의 개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구약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부자 되는 게 복이고, 애통이 없는 삶을 사는 게 복이고, 핍박을 할지언정 핍박을 당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 복이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복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복 있는 자여~너희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르게 될 거고, 긍휼히 여기게 될 거고, 마음이 청결하게 될 거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거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로 인해 욕먹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으로 모함을 당하는 자 이게 너희의 복이다. 복의 현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구요. 완전히 다르잖아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면 부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세상이 저희 것임이어죠? 바꿔 말하면, 


그러면 뭐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부자라는 것이 단순히 돈이 많은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서 인간의 자존심을 챙겨 갖는 그 부자, 그들의 영역은 세상이다 라는 거예요.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인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복의 개념과 신약의 복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요. 구약의 복은 실제로 그런 거였어요. 왜냐하면 복의 실체이신 예수가 오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가장 좋은 거라고 여기는 것으로 복을 설명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복의 실체가 온 이후에 신약 어디에 복 받은 자는 이렇게 부자로 살 거고 자식들 많이 낳을 거고 땅이 많이 생길 거고 이런 얘기가 어디에 있어요?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본이다' 이렇게 초를 치잖아요. 그런데 그게 복이라잖아요. 그걸 안 사랑하게 되는 것이 복이라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친구나 사랑하는 이웃의 개업식에 갈 때 뭘 들고 가야 돼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걸 들고 가야 돼요~돈을 사랑하면 일만하게 근본이니~ 이걸 들고 가야 돼요? 후자를 들고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걸 안 들고 가냐구요? 여러분도 그게 복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삶을 일차적으로 누가 살다 가셨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셨죠.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이 역사 속에서 누구의 삶에 연합이 된다는 말이죠? 

예수의 삶에 연합이 된다는 뜻이에요.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게 된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예수의 삶이 어떤 삶이었어요?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이었잖아요. 그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밀고 내려 갈 때 남들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고 아무리 남들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려도 내가 원래 그런 존재인데 뭐~ 나중에 소금 먹인 배추처럼 흐물흐물해져 가지고 온유해 지는 거죠. 


여기에서 동사의 시제를 보면 3절과 10절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현재형이에요. 그런데 나머지는 전부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하나님 나란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고 그러잖아요. 새 성전, 성전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그러니까 천국이 제자들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에게 천국이 임한거죠. 지금, 천국은 너희 것이다. 현재로 이야기하는데 이 천국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는 천국에 의해 침공 당한 그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이거는 어느 시점에 이렇게 완료가 되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미래의 어떤 점을 향하여 지향되어지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이렇게 밀려간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이요. 


그런데 이 삶이 쉽냐구요? 어렵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여러분이 이렇게 힘든 거예요. 내가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어요? 이렇게 불행한데~이렇게 늘 우울한데~외로운데~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내가 지금 부정되고 있고, 부인되고 있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힘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내가 기대하고 내가 그려 놓은 그 하나님 나라가 나한테 안 온 줄로 아는 거예요. 왜? 그거 하나님 나라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역사 속에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절대 경험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그려 놓은 그 하나님 나라는, 그건 불교의 극락이라니까요. 


하나님 나라가 뭐예요? 바실레이야 통치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시행되어 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예요. 예수님의 삶이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다스린 삶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현실, 모든 존재의 현실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없음이라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가 임해 버리면 들어가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나는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죽여 버리려고,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까~그래서 힘든 거예요. 어려운 거란 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뭔지 아세요 여러분? 많이 가진 자가 뭐 멋지게 성화된 자가 그리고 많이 배운자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못 배운 사람처럼 이렇게 겸양을 떠는게 겸손이 아니라 겸손(아나와)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뜻은 ‘하나님 앞에 서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겸손이에요. 그러니까 엉뚱한 겸손 떨려고 하지 마세요. 겸손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엄청난 권세와 그 영광 앞에서 깨갱거리고 나는 죽은 자네요~ 이 상태가 되는 것을 겸손이라고 그래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이 역사 속에서 임했을 때 지금 여러분이 그 자리로 밀려가야 되잖아요. 그게 지금 팔복에서 나오는 내용들이란 말입니다. 그걸 해야 복 받는다 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은 그리로 밀려가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팔복의 내용은 전부 인간의 육적 자아가 존재성과 주체성이 점점 부인되어지고 부정되었을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것 말고 더 좋은 인간의 덕목들 많잖아요 왜 이것만 해야 해요. 인간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런 대표적인 것들 몇 개만 적어 놓은 거예요. 요것만 하도 딴 건 안 해도 된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사도 바울이 그러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침공으로 인한 이 자체 충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로마서 7:21~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자 두 법이 싸우죠? 구약과 신약의 산이 싸우는 거예요.)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 구약의 법이 자꾸 이겨요. 그때에 신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구나. 나는 죽은 자구나. 절대로 내 힘으로 뭔가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구나. 내가 어떻게 법을 지켜~' 그랬을 때에 어디로 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러잖아요. 그리로 가는 거예요.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이 법 때문에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이 중보자로 서서 내가 산 거야~ 이리로 가야 되요. 그 때에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요만큼씩 요만큼씩 나타는 것일 뿐입니다. 무슨 언행일치는 얼어 죽을 언행일치에요. 됩니까? 그게~그래서 내가 말을 안하는거에요. 행동이 따라 주질 않아요. 


여러분 한 번 솔직하게 얘기 해 보자구요. 정말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그런 천국이 여러분이 원하시는 천국 맞습니까?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즐겁게 대주는 곳이 천국이라는데 여러분 그런데 가고 싶으세요? 진짜로? 여러분 오른손 잡이가 오른편 뺨을 때릴려면 손등으로 때리는 거거든요. 그건 모욕이에요. 아프라고 때리는게아니라 그런데 그 상태에서 왼편 뺨 한 대 더 때려서 마음을 더 풀어~ 이게 돼요? 그런 천국 가고 싶으세요? 가끔은 할 수 있죠. 그러면 내가 상 줄게 그러면 내가 이를 악물어서~ 천국이 그렇게 벼르는 곳입니까? 오리를 가자 그랬을 때 십리를 함께 가줘야 되는 그런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 이게 뭐예요. 에게 우리가 원하는 천국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곳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 자체가 나를 비우고 털어서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가 천국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안가고 싶잖아요. 저도 안 가고 싶어요. 여기에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야 되냐구요? 이건 내가 원하는 천국이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도저히 우리는 이 법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이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 하나님처럼을 지향하고 있는 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도저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지켜내야 할 그 법을 다 지켜낼 수 없다니까요. 안 가고 싶단 말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되요? 천국이 나를 뚫고 들어와야 돼요. 장악해야 되요. 그래서 역사 속에서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는 게 산상수훈의 팔복이에요. 여러분 이 세상 속에서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자꾸 우울해지는 거예요. 그러한 하나님 나라는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훤한 빛이 나를 비추고 비둘기 다섯 마리가 저기서 푸득거리며 내려와서 아침 식사를 대령해 주고~그런 천국 없어요. 이 땅에서 그런 천국이 체감되어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접촉점을 형성한 그 잠깐 동안에 그 순간에 소망으로 내가 잠깐 땡겨서얻을 수 있는 그 기쁨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전부 이 육이 그 하나님의 법과 충돌을 하여 내 속에서 전쟁밖에 안 일어나요. 


그러니까 수시로 내가 구원 받은 자가 맞나? 이런 고민에 휩싸이게 되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에이~ 삶이 그러니까 자꾸 그런 의심이 들지, 언행일치를 해봐라 왜 그런 마음이 드나~ 그것들이 마귀에요. 여러분은 그런 고민 하셔야 되요. 그래서 저는 가끔 우리 교인들이 그런 질문하며 눈물지을 때 아주 기특해요. 그리고 참 잘 가고 있구나. 정말이에요. 여러분 그런 고민을 하셔야 돼요.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도덕과 윤리를 실천해서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욱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해요. 그래서 언행일치니 뭐니 하면서 인간들의 삶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진단하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설 자리가 어딥니까?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 구조로 판단하고 정의한 착함과 악함이 정말 모두 참인 명제가 맞아요? 


여러분, 성탄절 날, 크리스마스 때 선물 못 받는 애들은 누구죠? 따른 건 다 몰라도 우는 애들은 못 받아요. 그죠? 울면 안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안 주신대요. 거기에서 우는 건 악이죠? 그러니까 선물 안준대잖아요. 상 안준대잖아요. 울지 않는 게 선이죠? 그런데 아이들이 우는 게 진짜 악입니까? 그건 아이들의 의사 표현이에요. 의사 전달 방법인데 내 의사 전달 능력이 미력할 때 처절하게 절규하는 게 울음이라구요. 그런데 우는 애들에게 선물 안준다는 건 누가 결정한거죠? 어른들이 아이가 울면 귀찮거든~ 싫다구요. 그러니까 이 이기적인 어른들의 이 선악구조가 '우는 건 악'이라고 이렇게 해 놓은거죠. 그래서 울면 선물 못 받는거로 알아요. 이 노래를 부르고 자란 아이들은요. 


인간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라는 건 전부 인간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한 합리화의 수단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것 몇 가지를 정해 놓고 그걸 잘 하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건 아직 유치원 수준도 못 올라 간 거예요. 막대 사탕 쭉쭉 빨면서 울면 안돼~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거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지금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잘 지키고 수행하는 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그 가르침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라는 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그랬죠?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여러 가지 능력 행했는데 왜 날 모른다고 하십니까?" 그랬을 때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라고 그러죠? 예수님이 나중에 진짜 성전을 박살내시면서 똑같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거기서 그게 무언지~지금 여기서 모형적으로 구약의 성전이 구약의 산이 신약의 성전, 예수에 의해 신약의 산에 의해 박살내는 것으로 이렇게 그려지는 게 산상수훈이라면 진짜 옛 성전이 박살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이야기 해주신다니까요. 보세요.



마태복음 21:28~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성전을 막 뒤집어 엎으시자, 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당신 무슨 권세로 그런 일 하냐고 막 따졌어요. 그때 예수님이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너희는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건지 땅으로부터 온 건지 아니? 대답 좀 해봐~대답 안 하죠. 그럼 나도 대답 안 할거야. 그리고서는 이 이야기 해 주시는 거예요. 첫 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이에요. 그죠? 하겠습니다 라고 한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안하더라는 거예요. 안한게 되더라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서 근데, 안하겠습니다 세리, 창녀처럼 그랬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더니 그들이 뭘 한게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구요. 그랬더니 그들을 둘째 아들에게 확 집어 넣어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다 그래요. 그죠? 그래 놓고는 그들이 세리와 창기이고 그들이 예수를 믿었다라고 한다구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지 그 주여 주여 했던 그 사람들처럼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저것도 했는데요. 왜 나를 천국에 안 넣어 주세요? 이 일 아니다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행한 자가 누구냐? 그러는 거예요. 둘째다 그러는 거죠. 뉘우치고 갔다 라는 게 회개하고 예수 믿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거예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시면서 금지 명령을 내리셨는지 아세요? 선악과 먹지 말라가 율법이죠? 구약의 산이죠? 이게요. 그리고 생명과는 허용이죠? 먹어도 돼~그러니까 금지명령과 허용명령이 떨어지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가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제시가 되는 거죠. 


그런데요. 하나님처럼 되겠다 라는 그런 존재는 금지명령이라는 걸 받게 되면 명령한 자와 명령을 받은 자를 구별해 내구요. 별도의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되요. 왜? 나는 명령을 받았고 저 존재는 나에게 명령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구별이 일어나죠. 그리고는 내 존재성을 챙길려고 하는 욕구가 어떻게 표출이 되죠? 위반으로 표시가 되는 거죠. 내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서는 내가 저에게 굴복하면 안되잖아요. 그 위반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위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벌이 떨어지는데 그 벌이 뭐냐면 정령 죽으리라 예요. 사망이란 말입니다. 


재밌는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장 보기 쉬운 곳에 배치를 했고 아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뭐 하라는 거예요. 따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정녕 죽음이 뭔지를 경험하라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계속 매일같이 12개씩 따 먹고 있잖아요. 선악과. 그것 먹으면서 여러분이 고통스러워야 된대니까요이런식으로 살아야 되나 진짜! 이렇게 살려면 확 죽고 싶다. 일이 안되서가 아니라 이 내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게 되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게 정녕 죽음이에요. 


한 번 네가 내 앞에서 별도의 너를 한 번 챙겨봐. 별도의 너를 한번 내 앞에서 챙겨 가져봐라. 그때 정녕 죽음이 뭔지 알게 될거야. 그때 너에게 허용되었던 은혜로 허용되었던 너라는 존재를 별도로 챙겨 가지 않을 수 있는, 그 허용 되었던 생명나무 실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건 그냥 덥석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은혜로 뭘 해서 다리를 놓아 가는 게 아니라~


그런데 이것들이 자기의 존재 주체성을 챙길려고 하다 보니까 나라는 존재를 별도로 확립을 할려고 보니까 이 위반이라는 걸 통해서 나의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죠. 이게 죽음이라니까요. 이 나의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시도를 얼른 버리고 쪽팔리더라도 주는 걸 그냥 먹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때 어 이거 내가 내 존재를 별도로 구축하여 챙겨 가질려고 하면 이게죽는거구나 라고 했을 때 그때 생명나무 실과에 그 위대함이 나에게 자각이 되고 그들에게 생명나무 실과가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구약을 부수고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생명나무가.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생명나무만 있는 거예요. 선악과가 없는 거예요. 구약은 부수어지는 거니까. 그게 산상수훈이에요. 산상수훈을 이거 지켜라~저거 지켜라~ 그럼 복 줄게 안 돼도 오른편 뺨 때리면 왼편 뺨 대줘~ 그렇게 연습하면은 나중에는 된단다. 되긴 뭐가 되요. 어금니 다 빠져요.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막 꿈속에서 그냥 난도질하고 그 뭐냐구요하나님이 그 정도의 선을 우리에게 원하시겠어요?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별도의 자아를 주체로 확보하려고 하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공격 당해서 결국 자기 부인의 자리,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애통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산상 수훈입니다. 다음주부터 구체적인 세목을 하나 하나 제가 강의를 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