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18 옛성전에 머물러있는기독교,그대가음녀다 마5장27-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09

옛 성전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그대가 간음하는 여자이다.




마태목음 5:27~32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아 제가 오늘 그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없이 원고를 쓰다보니까 다섯 시까지 출발을 못했어요. 그래도 두 시간이면 오겠다 싶어가지고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잘 쫓아왔는데 세상에 예배시간에 못 올 뻔 했습니다. 뭐 워낙 그냥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쫓아가는 게 버릇이 되서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만 쫓아왔더니 그 만큼 오늘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원고를 만드는 작성하는데 아 여러분 그 사람이 머리를 쓰면 그 몸의 기력이 이렇게 쭉 빠지는 거 아시죠. 에너지가 칼로리가 머리를 쓸 때 가장 많이 소비가 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탈고를 딱 하고서 이제 프린트를 하는데 아 그냥 이렇게 푹 주저앉아서 자고 싶더라고요. 내가 꼭 가야되나~ 마음 한켠에서 울려오는 '그러고도 네가 담임목사냐?' 그 만큼 중요하지만 조금 어려울 수도 있어요. 


여러분 한번 잘 들어보세요. 오늘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은 하산해도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 간음의 이야기는 성전의 이야기 율법의 이야기라는 걸 잠시 언급해 드렸죠? 오늘은 본격적으로 이 간음의 이야기를 성전의 이야기와 접목을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우 모이큐세이스’ 라는 그 어구를 히브리어로 바꾸어 보면 ‘로 티니어푸’ 에요. 구약의 십계명에 나온 이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가져다가 헬라어로 바꾸시는 거예요. 이 단어의 기본 동사는 ‘나푸’ 인데 그 ‘나푸’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음 ‘눈 알레프 페’ 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그 문자들의 각자의 의미는 아래, 하나님, 입이에요. 아래에서 하나님의 입으로 전해는 말. 그러니까 곡해되어 전해지는 말. 아래 성전에서 통용되는 말 이런 뜻이거든요.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혼인을 파괴하다. 우상을 숭배하다. 간음하다. 가 맞아요. 그러나 그건 히브리어라는 문자가 생겨난 이후에 사람들이 합의하여 정의한 내용이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담아 주셨던 의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잘 알아야 두셔야 할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을 나올 때가 애굽의 18 왕조 때였어요. 그때에는 애굽에도 문자가 없었고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문자가 없었어요. 문자라는 게 없었어요. 말만 있었어요. 


당시에 사용되는 문자라는 건 고작 해 봐야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써서 올려 드리는 거룩한 예식에서의 글뿐이었어요. 그것도 애굽에만 있었어요. 애굽 문자가 최초잖아요. 애굽에만 있었어요. 그건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그런 언어가 아니었어요. 일반인들에게서 통용되던 문자는 그로부터 한참 후인 페니키아 때에 생겼죠? 문자가. 페니키아 때에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물교환이 아니라. 그때에 무역을 하기 위해 글자가 필요해서 그때 비로소 문자가 생겼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통용하는 문자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끌고 애굽에서 나올 때는 문자가 없었단 말이에요.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애굽 문자가 이집트 문자가 시나이 문자로 시나이 문자에서 페니키아 문자로 페니키아 문자에서 가나인 문자로 발전했다 그러죠? 그건 언어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거예요. 히브리어는 그 한참 뒤에 생겨난 거예요. 그 어원을 따져 들어가 보면 이집트 문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다니까요. 그렇게 모세 당시에는 사람들이 신에게 문자를 올려드리는 제례용 문자가 전부였는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더니 거꾸로 신이 인간에게 글을 써서 내려 준거예요. 이게 기독교인 거예요.

 

그건 경천동지할만한 일이었어요. 당시 글이라는 건 신에게만 올려지는 거였는데 신이 글을 써서 인간에게 줬다니까요.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 측에서 신에게로 올라가는 거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거예요. 인카네이션(incarnation 성육신) 모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애굽의 글을 알았겠죠? 제례문자지만 하나님은 그 언어로 십계명을 주신 거란 말이에요. 글자가 그거 밖에 없었어요. 히브리 언어는 아직 있지도 않았던 때이니까. 


그런데 그건 사람 사이에서 통용될 수 없었던 문자라고 그랬잖아요. 신전에서만 쓰이던 문자니까. 그러면 모세에게 그 글을 줬을 때 모세가 그걸 읽을 수 있다? 없다?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아기가 엄마라는 말을 한 번 내 놓을 때까지 육천 번 이상을 들어야 된다고 그래요. 육천 번을 듣고 엄마라고 했을 때 그 아기가 그 엄마의 의미가 뭔지를 알아요? 몰라요. 모세는 그 글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십일을 잡아놓고 가르쳐주신 거예요. 복음을 설명해 주신 거예요. 그 위에서 모세하고 장기 두고 노신 거 아니에요. 뭘 사십일 동안이나 그걸 새기셨나? 뭐 이러는 거예요. 설명해 준 거예요. 사십일을 


사십일은 우리의 인생 역사를 상징하는 숫자죠? 우리 이 역사, 인생동안에 하나님은 그 복음, 하늘의 비밀, ‘무스테리온’을 설명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모세가 자기가 아는 문자로 이제 기록을 했겠죠? 그죠?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당시에 히브리 언어는 자음만 있었고요. 띄어쓰기도 없었어요. 그걸 어떻게 읽어요. 못 읽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게 읽으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성경을 보다 보면 반드시 곡해를 하게 되요. 하늘의 비밀은 묵시는 이 역사, 인간에게 파악되지 않아요. 이해되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그걸 설명하려고 할 때 이게 내 안에는 있는데 인간의 언어로 또 다시 엉뚱하게 나오는 걸 왕왕 경험하는 거예요. 내 안에는 있는데 이게 내 안에 있는 말로 나오자마자 그건 또 간음하는 말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말씀 안에 은혜와 능력을 담아서- 그것 자체가 능력이에요. 그걸 이해하고 내가 사유해서 능력화 시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 자체가 능력이라니까요. 은혜와 능력을 담아서 -살려내는 힘으로 준 거지 우리가 읽고 해석해서 하나님께 뭔가 그 보답을 해라. 그에 상응하는 어떤 행위를 올려야 된다. 라는 그런 의미로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주둥이만 나불나불 거리지 말고 행동을 좀 해라. 이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히브리어 알파벳 한자 한자에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걸, 그걸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과 그걸 모르고 읽는 건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초에 인간들의 언어로 읽고 이해하라고 준 것이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안경을 통하지 않고는 모든 성경이 로고스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게 되요. 여러분이 잘 아셔야 할 것이 헬라어의 로고스는 진리의 말씀, 그걸 가리키는 게 맞아요. 


그래서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경, 대학 많죠? 그죠? 그러나 그 로고스 자체는 진리를 담은 말일 뿐이에요. 진리를 가리키기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닌 것. 이걸 로고스라고 그래요. 마치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러 왔다. 라는 그런 개념과 흡사한 거예요.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러 왔다는 건 빛에 의해 어두움이 설명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이 빛의 실체는 뭐에요? 뭘로 보여야 되요? 이게? 어두움을 설명하려면 빛이. 어두움으로 나타나요. 역사 속에서는요.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러 밝히러 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빛은 어두움을 내용으로 하여 우리에게 보여지게 된다니까요. 그게 빛이 어두움을 밝힌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 속의 빛은 어두움의 빛,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런 이중성 그건 제가 나중에 다시 설명해 드릴 텐데.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헬라어에서는 ‘레고’ 로고스에서 나온 거죠. ‘레고’와 ‘그레오 레마’를 달리 써요. 레마 선교회 이런 사람들 혹시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달라요. 트레스티아스 그 사람들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이 아니라 로고스는 그릇의 의미가 강하고 ‘그레오 레마’는 진리를 자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고스라는 건 레마를 담은 그릇이에요. 그러니까 문자를 여러분이 이걸 진리인양 그대로 여러분이 해석하여 읽게 되면 로고스에 머무는 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행간 진리를 알아야 여러분은 그거를 레마로 읽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로고스를 읽거나 들으면서 그걸 레마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고 같은 로고스를 읽으면서도 그걸 그냥 표피적인 그릇인 덧 문자 이렇게 로고스로만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에요. 대부분이 그런데 후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이 땅에 내려왔다. 이게 다 로고스에요. 그 분은 레마에요. 진리잖아요. 그분이. 


그런데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이신 예수님은 로고스로만 보여요. 그릇으로만 보인다니까요. 표피밖에 못 봐요. 빛이신 그분이 어두움들에게는 어두움으로만 보여요. 그래서 죽여 버린 거예요. 왜 어두움인 우리의 정체를 폭로시키느냐~ 는 거죠. 성도는 말씀을 예수를 그렇게 표피적으로는 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성도는 말씀 안에서 예수라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거란 말이에요. 


차치하고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한 마디로 예수였어요. 열 가지 항목을 하나하나 잘 지켜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라고 주신 아니란 말입니다. 말씀은 그 어느 곳 그 어느 곳을 뒤져도 다 예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십계명도 예수에요. 그 열 가지가 담고 있는 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그 연합의 현실, 그 한 몸의 현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말씀이 이룰 것이다. 라는 언약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게 계명이고 모세 오경이고 성경 66권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언약이라는 건, 위로 솟은 기둥으로 설명되기도 했어요. 그 기둥이라는 단어가 ‘스타우로스’ 인데 그 단어를 십자가로 번역한 거예요. 그 십자가는 언약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둥이에요. 열, 십자로 된 십자가라는 의미는 성경에 안 나와요. 기둥 ‘스타우로스’ 십자가 언약이라는 말만 나온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26:23


하나님을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의 하늘 존재를 완성해 내실 것이다. 가 계명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입에 문 상태에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문자를 읽게 되면 반드시 그 내용을 곡해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행위로 열매를 맺으려고 해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간음하다. ‘나하프’라는 단어가 아래에서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의 입, 즉 아래의 성전, 옛 성전 이렇게 표현되는 거예요. 그게 간음이에요. ‘나하프’에요. 예수께서 옛 성전에 앉으셔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소재로 해서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유대주의 모두를 간음한 자로 폭로해내신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목숨 걸고 지키려했던 유대인들이 기실은 간음하는 자들이었다. 라는 걸 폭로하신 거예요.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옛 성전이잖아요.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현행범을 앞에 놓고 니들 중에 나는 이 여자와 다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그랬던 거예요. 아무도 못 들었죠? 그 말은 뭐에요? 니들이 바로 간음하는 자들이다. 라고 하나님이 그냥 폭로시켜버린 거란 말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 문자 수준에서 이해를 했고 그 수준에서 행동에 옮겼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간음이다. 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들의 손에 이웃을 살해할 돌이 들려 있었죠? 그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간음이 곧 살인이라는 걸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 준거예요. 간음하는 자들을 항상 이웃을 살해할 돌을 들고 있는 위험한 자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이 살인하지 마. 라고 했을 때 그럼 이제 앞으로는 절대 사람 죽이지 말아야지. 라고 결단하는 게 곧 살인인 거예요. 여러분이 이걸 잘 이해하셔야 되요.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명령은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선악 체계 속에서의 의무사항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전자를 살인이라고 했잖아요. 제가 설명해 드렸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할 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자로 오신 예수를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반복하여 도륙, 제물로 드리지 마, 인자를 죽이지 마라는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단어자체가.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단회성과 영단번, 단회성과 완료성을 무시하고 자꾸 자기가 뭔가를 해보려고 나서는 게 인자를 계속 살해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자꾸 뭐 회개한다. 회개한다. 하는데 회개를 할 때마다 필요한 게 뭔지를 아세요. 제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예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할 때마다 예수가 죽는 거죠. 그 말이에요. 그렇게 예수 죽이지 마. 이 뜻이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구원파가 이야기하는 나는 이젠 죄인 아니니까 의인이이니까 죄 짓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이런 말 아닙니다.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혼돈하지 마세요. 


그 회개라는 건 ‘메타노이아’ 회개라는 건 기특한 일이 아니라 예수 잡아 죽이는 행위인 거예요. 그럼에도 말씀을 번번이 법으로만 이해를 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냐? 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라는 거예요. 나무는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그러면 열매마다 나무가 있죠?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고 배는 배나무에서 열려요. 그러면 여러분은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는 어떤 나무에서 열려요?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와 관계없는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놓은 그런 열매는 하나님이 절대 안 받는다니까요. 그건 크리스마스 트리에요. 살아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생명과 관계없는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의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예수에게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그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의 장소, 불타는 흙들의 감옥,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사람들이 성령을 법으로만 이해를 해서 엉뚱한 운동이나 시위를 하고 있는 거죠. 사형도 살인이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데모를 하고 기독교인이. 군대 가서 총을 잡는 건 살인에 참여하는 것임으로 군대를 안 간다 하는 집단이 있죠? 감옥 가요. 그 사람들은요. 군대 안가고. 총 절대 안 잡습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도 절대 적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건 뭐 신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서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아니에요. 만일 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들까지 싹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만 머쓱해지는 거예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만도 못한 일을 행한 하나님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어떨 때는 이렇게 어떨 때는 저렇게 말하고 그러니까 제 말을 레마로 듣는 게 아니라 로고스의 수준으로만 듣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적용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걸 얘기해줘~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거의 


여러분이 감동받는 개혁주의 목사들의 설교는 다 어플리케이션으로 끝나요. 적용으로 끝나요. 그러면 전부 눈물 흘리고 주먹 불끈 쥐고 나간다니까요. 간음을 해도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이혼을 해야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여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 아담안의 선악과족이라는 족속들인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를 하여 법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초라한 인자, 그 초라한 예수님,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 부정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는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율법주의자의 눈에 그렇게 초라하고 창녀들하고 걸핏하면 포도주나 마시는 그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음녀로 보여요. 그래서 죽인 거예요. 니까짓게 무슨 메시아냐 이렇게 



계시록 17장 1절 다시 보겠습니다.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그 밑에도 쭉 있지만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제가 지난주에 그 율법, 세상의 힘, 바벨론, 앗수르 그 율법이라는 짐승 위에 탄 여자가 바로 음녀로서의 나라고 그랬죠? 그런데 결국 율법에게 맞아 죽게 되는 거죠. 내가. 그렇게 해서 사는 거예요. 그걸 양육이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광야에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그 앞에서 뭐였어요? 철장을 든 예수, 아들을 낳은 여자가 간 곳이 광야였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양육이라는 단어가 나왔잖아요. 


성경은 비 진리의 세상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마귀의 세상에 실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해서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거나 권고를 하는 그런 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만 기록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와 함께 죽고 그 예수와 함께 사는 예수와 동행하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존재, 벗이잖아요. 우리가. 따라서 성경은 예수의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예수 안 누구 있다? 나 있다.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 이야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지난주에는 우리가 이 대목을 율법과 인본이라는 짐승 위에 타고 있는 그 성도의 관점으로 보았으니까 그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그 예수가 성도가 살아갈 길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가신 거죠? 그러니까 이번 주에는 교회라는 짐승을 타고 앉은 예수의 관점으로 이해를 해보자는 말이에요. 예수가 바로 죄인중의 괴수인 내가 되셔서 죽은 거니까 내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둥에 매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을 때 뭐 타고 오셨어요? 붉은 나귀에요. 나귀 새끼는 이스라엘의 왕 즉위식 때 사용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솔로몬 평강의 왕, 평강이라는 이름의 그 솔로몬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 새끼 나귀를 탄 이스라엘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로 향하실 예수님을 모형 하는 거였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던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타신 붉은 짐승, 나귀는 바로 없음의 자리에서 마귀의 행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아담들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타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정말 보잘 것 없는 거예요. 나귀 새끼는. 생각해 보세요. 어른이 그 조그만 나귀 새끼를 타고 가면 발이 땅에 닿는다니까요. 그리고 어정쩡하게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고요. 왜 하필 그걸 타냐고. 조랑말이라도 타시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무용한 것. 바로 그 없음의 자리에서 마귀의 행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아담들, 나에요. 그가 짐승이 위에 타고 있는 여자, 짐승들을 예수를 보면 아들로 안 보고 반드시 여자 로고스로 보게 되요. 그 여자를 죽이고 결국 살아나는 이야기. 


짐승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 예수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여러분? 음녀로 보여요. 그게 율법주의가 보는 예수관이란 말이에요. 선악체계 속에 그 짐승들. 전도서, 잠언에도 나오잖아요. 인생의 목적이 뭐에요? 니들이 짐승이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잖아요. 성경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짐승이라니까요. 그 선악체계속의 짐승들 즉 겸손한 하는 척 새끼 나귀들에게 예수는 음녀로 보인다니까요. 


자기들은 열심히 율법 지키며 선행을 행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어떤 이가 오더니 죄인들과 어울리고 안식일도 번번이 어기고 창녀들과 포도주를 나누고 성전을 무시하고 심지어 성전을 때려 부수기도 해요. 이게 뭐 음녀죠? 이건 당연히. 바리새인들에게 이거는 음녀라니까요. 창녀란 말이에요. 이거는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 분의 역사 속, 행함으로 예수로 메시아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그 분의 존재 자체가 메시아이고 예수그리스도에요. 무얼 해서 메시아가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예수되심은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셔도 예수님이에요. 그 분이 창녀와 포도주를 마셔도 예수님이고 존재가 예수이기 때문에 doing의 문제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being의 문제라니까요. 안식일에 밀을 비벼먹어도 예수님이에요. 남의 장사 터에 가셔서 그 때려 엎어도 예수님이고 불쌍한 여자에게 차마 바리새인들은 못하는 너도 개야~ 그랬잖아요. 그 여자한테 너 개야 그랬잖아요. 그래도 예수님이라니까요. 


그런데 율법주의 안경으로 예수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 존재로 인식을 하게 되요. 기독교를. 그들의 눈에 예수의 행함은 온유의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이 세상에 도덕과 윤리의 눈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면 그 분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못난 분이죠. 그래서 때려죽인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예수를 음녀로 여자로 보게 되는 마귀적 그 행사는요 성도의 삶에 필연적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 나쁜 놈들 로 가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예수 죽인자입니다. 라는 고백 없이 묵시 속 교회로 회개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사람도 없어요. 그러한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2장 44절 보세요.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인지 진짜 아세요? 나를 믿는 건 나를 믿는 게 아니래요.)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내 말을 듣고 안 지켜도 심판 안한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게 아니다. 그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건 현상계의 나타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예수는 본 받아야할 롤 모델도 아니라는 거고 아울러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오히려 파괴되어야 할 두 번째 성전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라 라고 하신 거예요. 


거기에서 사흘이라고 번역이 된 ‘투이신 헤마라스’ 에서의 그 ‘헤메라’는 보좌에 앉다. 성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구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킬 것이다. 라고 번역을 해도 되는 거예요. 두 번째 성전으로 온 (33:59 56:39) 내가 파괴될 거야~ 니들이 나를 파괴할 거야~ 그러나 나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그래서 사흘 만에 살아나셔야 되요.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의 성전이신 예수가 옛 성전이 되셔서 파괴되시고 성도를 품은 사흘 동안 세 번째 성전으로 완성이 된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우리가 바로 예수를 품은 성전이잖아요. 세 번째 성전.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누가 밖이에요? 예수가 나고 내가 예수라는 얘기에요. 그 정도로 여러분을 대우해 주시는 게 구원이라니까요. 그게 창조란 말이에요. 


따라서 성도는 역사 속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되요. 그 예수는 파괴되기 위해서 오신 예수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를 본받아 살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요. 도대체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여야지,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그리스도라 하는 아들을 낳을 거다. 이름이 그리스도에요. 원래 예수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여서는 안 돼요.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 그리스도의 예수라는 뜻이에요. 그게요. 예수그리스도라는 단어는 한 군데도 없어요. 그냥 우리가 개역성경에 그렇게 써 놓은 거지. 그리스도의 예수에요.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예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게 아니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거예요. 그 예수 안에 진리로 담겨 있는 레마, 말씀 그 언약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보내신 일을 믿는 것. 이라고 말씀한 거예요. 


그러면 나를 보내신 이가 뭐에요? 48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내신 세상을 심판할 이가 등장하죠? 그런데 그게 뭐라고 그래요? 내 말이라고 그러잖아요. 내 말. 내 말이 세상을 심판한다. 그 말이 말씀이 예수를 보내셨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건 그 말씀을 가진다. 그 말씀을 믿는다. 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성경에서 말씀을 지킨다. 라는 뜻은 말씀을 가지다. 라는 뜻이에요. 다 가지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를 보내신 참 진리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인데 47절을 보면 사람이 내 말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다고 할찌라도 내가 심판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에서 로고스와 레마가 정확하게 구별되어 쓰이고 있어요.

 

47절에 그 내 말은 레마에요. 진리의 말씀 그 자체. 그 레마를 듣고 진짜 아들로 들은 말씀으로 들은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걸 어떤 행위로 내어 놓지 않아도 심판 안 당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레마가 쓰인 거예요. 거기에요. 레마는 지키는 게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48절을 보면 내 말을 받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그러죠. 여기서 받다. 라고 번역이 된 이 람바노는 주어지다. 에요. 말씀을 던졌는데 야구글러브 같은 거로 이렇게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지다는 말이에요. 레마가 하나님에 의해 이렇게 주어지지 그건 은혜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무슨 행위를 내어놓는다 할찌라도 심판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레마로 주어지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건데 그 심판을 누가 하냐면 '내가 한 말'이에요. 여기에서 말은 또 로고스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말, 레마가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예수가 로고스로만 이해되어져요. 법으로만 이해되어진다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걸 행위로 어떻게든 내어 놓으려고 그래요. 왜? 불안하거든요. 레마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는 거예요. 이걸 레마를 내가 주지 않은 자들은 내가 한 그 말, 레마를 로고스로 담아 준 그 말을 근거로 하여 심판받게 된다. 라는 뜻이에요. 


죽어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의 행위로 그걸 갚으려고 할 거니까. 그래서 내 말이 너희를 로고스가 심판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정확히 이해가 가시죠? 이제? 그 때 그들이 표피적으로 이해한 그 로고스가 그릇이 그들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열심히 법으로 지켜서 나중에 그것으로 심판 받는다. 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로고스로 오셨다고 그러죠? 레마로 오셨다. 라고 안 그래요. 똑같이 말씀인데, 하나님은 예수를 레마로 보지 못하는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이 레마로 선물을 주지 않은 자들을 전부 죽여 버리기 위해 예수를 로고스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성경을 로고스로만 봐요. 그러나 그들은 그 로고스에 의해 심판 받아요. 내 말에 의해 심판받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복음이라는 건 우리의 행위를 열매로 요구하지 않아요. 막 살라는 말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선해지기 위해 애를 쓰는 건 인간 보편이 모두 지향하는 거예요. 복음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도 그러한 인간 보편의 목적지를 선으로 정의하고 추구해요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상도 주고 박수도 보내줘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제발 그렇게들 사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서 상 받은 자는 하늘의 상 안준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인간 보편이 모두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하게 되는 목적지인 반면에 인간보편이 이해할 수도 없고 추구할 수도 없는 그래서 칭찬하거나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행함이 있어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인간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분만을 높이는 신앙. 이게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착한 일이에요. 그건 세상사람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죠? 예수를 모르는 이들은 예수 믿는 자들이 예수만 의존하여 살잖아요. 저거 저렇게 꿈도 없이 비전도 없이 저렇게 비리비리하게 살아~ 왜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게을러졌어? 불성실해졌어? 오히려 이러지. 절대 예수 믿는다고 칭찬 안 해 준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상하나 못 받고 간 그들에게 하늘에서 상주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심판할 수 있는 죄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이 땅에서도 똑같이 인간들로부터 벌을 받으면 안 돼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뭐에요? 한번 기소된 건 또다시 기소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보상을 받으면 하나님이 보상을 안 해주신다는 말씀과 똑같이 이 땅에서 인간들에게 판단 받고 정죄 받아서 체벌을 받거나 형을 살게 되면 하늘에서도 벌이 없어요. 앞뒤 잘라가지고 또 어디 가서 이것만 얘기하면 안 돼요. 그런데 살인하면 감옥 가죠? 도둑질하면 이슬람 나라에서는 손모가지를 잘라 버립니다. 거짓말 하다 들통 나면 사람들에게 욕먹죠? 이게 다 벌이에요. 체벌이에요. 이거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벌을 받지 않는 진짜 죄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진짜 살인, 진짜 간음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삶과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인간 세상,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나, 아름다운 아담 이거 구축하려고 하는 그러한 행위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아요. 일간지에서도 대서특필하죠. 교회다운 교회가 나왔다. 목사다운 목사가 나왔다. 세상 부귀 다 뿌리치고 농촌에 가갔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섬기며 그렇게 목회를 하더라. 박사학위 다섯 개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갔고 평생을 선교했다. 박수쳐 주죠. 여러분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데 그 칭찬 받기 위해 그가 한 일이 예수를 신앙하고 예수만 의존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라면 그걸로 벌 받아요. 하늘에서요. 그들은 하늘에서만 벌 받아요. 이 세상에서 벌 안 받아요. 칭찬만 받아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에요. 그것이요. 다른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경찰이나 검사나 판사나 여론이나 평가, 이웃, 마누라, 남편이 벌주잖아요. 그건 이 세상에서 해결되는 거라니까요. 하늘에서 해결할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해결할 죄는 그거랑 다른 거란 말입니다. 이 간단한 것도 이해를 못해요.

 

그러니까 제가 뭐 우리 그 서울서머나 까페에도 이렇게 들어가 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글 쓰는 걸 보면 아 이 사람들이 진짜 내 설교를 아직 못 알아듣고 있구나. 대부분 그렇게 절망해요. 그리고 자기들이 좋아한다는 그 목사들 이렇게 올려놓은 거 보면 어 아닌데, 나랑 가는 길이 다른데, 그런데 되게 좋아한대요. 그런데 여기 와서도 되게 좋아해요. 그건 뭐냔 말이에요. 도대체 못 알아 듣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를 말씀을 인간의 선악구조 하에서 인위적으로 해석을 해서 인간보편의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게 인본주의이며 율법주의이에요.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음녀로밖에 안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 살리는 입이에요. 4장 4절에서 말한 것처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여자를 직역하면 그 여자의 정욕을 향해 ‘프로스 프로스큐오네’의 그 ‘프로스’ 라는 전치사가 들어가 있거든요. 그 여자의 정욕을 향해 여자를 보는 모든 사람마다 간음한 자다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마음을 품은 놈은 다 간음한 자다. 이런 정도의 수준의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고서 생물학적인 여자를 보고 음흉하게 침을 흘리는 남자를 떠올리신다면 그건 성경을 표피적 문자로만 읽는 거란 말입니다. 너무 억울하잖아. 지나가는 남자 보고 음흉 품는 여자 얘기는 왜 안 나오냐고요. 여기에 그런 얘기 아니에요. 여기에서 정욕이라고 번역이 되는 ‘에피뚜미아’ 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 이건 강조죠? 에피와 두메오의 합성어에요. 이 두메오라는 단어는 희생제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란 말이에요. 그 단어의 명사형이 뚜미아 희생제사에요. 거기에서 나온 단어가 두모스 탐심, 욕망입니다. 이러한 단어를 연계해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음욕, ‘에피뚜미아’ 의 의미가 정리가 되겠죠?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희생 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게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탐심이요 욕망이라는 거예요. 그게 음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제사라는 단어를 끌어다가 그걸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한 여자의 욕망을 따라서 여자의 욕망을 향해 그 여자를 보는 자는 모두 간음한 자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 여자는 나이기도 하고 음녀가 나니까. 예수이기도 해요. 율법주의의 눈으로 나를 평가하고 예수를 평가하는 자들이 바로 간음한 자들이다. 라는 이런 말이에요. 보세요. 이건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의 지저분한 관계를 지적하는 내용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역사 속의 인간들의 생래적 내재 본성인 그 하나님처럼 되기, 하나님처럼 살기, 나 우상 만들기. 라는 그 죄의 본질을 지적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거 하지 말아라. 라는 거예요. 예수를 그 여자가 가진 욕망, 그 희생제사 열심히 드려서 인간보편의 자존심 챙기겠다고 하는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예수를 보면 예수가 음녀로 보이고 그게 간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여자를 향하여 프로스, 여자의 욕망, 음욕을 향하여 음욕을 따라서 그 여자를 보는 자는 간음한 자다. 라는 그 어구의 진의란 말입니다. 이것이요.

 

아 생각해 보세요. 성경이 무슨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아니고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욕 품는 거 그거 간음하니까 너네 조심해 이런 얘기나 하겠냐고요. 그렇게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인간보편의 자존심의 향상을 꿈꾸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마귀 새끼, 음녀라고 욕을 하셨던 거고 자기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목매달았던 유다에게도 마귀라고 했던 거예요. 이놈 마귀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베드로 때에요. 예수님이 죽어야 그 자가 예수의 신부로 함몰되어 아들이 되는 건데, 죽지 마세요. 그랬다니까요. 심지어 내가 목숨 걸고 죽을지라도 나는 당신의 죽음을 막겠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사탄아! 마귀 새끼야 내 뒤로 물러가라. 이랬다니까요. 예수가 죽고 교회로 세 번째 성전으로 탄생하는 게 복음이에요. 그가 자신의 열심 으로 주님의 죽음을 막아섰던 것은 간음이고 살인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음녀야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계시록에 가면 그 마귀가 음녀잖아요. 간음하는 자야 이렇게 부른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선악구조로 율법의 안경으로 아들이 되지 못한 그 여자의 정욕으로 씨를 받지 못하면 여자란 말이에요. 그게 아들이 되지 못한 게 여자란 말이에요. 여자의 정욕으로 예수를 보게 되면 예수가 짐승을 타고 앉은 음녀로 보이게 된단 말이에요. 예수의 본질은 레마 인데 로고스의 그 껍질, 음녀의 모습만을 보고 근사하게 위장하고 있는 자신들의 그 실체를 드러내 이렇게 폭로시켜 버리는 그 예수를 죽여 버리는 거. 이게 율법주의란 말입니다.

 

사실 인간들이 자기 밖의 타자들에게서 어떤 실수나 오점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요. 목숨을 걸고 그걸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유는 아주 잡아 죽이려고 그러죠? 자기는 마치 절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일을 안 할 것처럼. 그렇게 어떤 것이 발견되었을 때 아주 그냥 온 힘을 다해 그걸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건 지 안에 그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내가 감추어 두고 있는 어떤 것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걸 아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심리학자들에 의해서도 검증된 인간보편의 속성이에요. 따라서 자기들의 정욕대로 예수를 음녀로 보고 그 예수를 때려죽인 인본주의는 자기들의 눈에 비친 그 음녀의 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죽여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네가 뭔데 근사한 회칠한 무덤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드러내~ 왜 내 안에 있는 시체 썩는 냄새, 시체 썩는 물을 네가 왜 까발려~ 저거만 죽이면 되는 거예요. 마치 아프리카의 거울을 갖고 간 선교사님이 그 추장 와이프한테 거울을 줬더니 깜짝 놀래갖고 그 안에 웬 이상한 여자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 동안에는 어렴풋이 봤는데 거울로 보니까 진짜 못 봐주겠는 거라. 그러니까 이것만 깨버리면 자기의 추악함이 감춰지는 줄 알고 그걸 박살을 내더래요. 그 앞에서. 자 그래서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그 바벨론이라는 짐승이 그 위에 타고 있는 그 여자,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본 표피적 예수를 죽여 버리는 그림이 계시록 17장에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내가 예수를 음녀로 보아서 때려죽였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그 율법, 짐승에 의해 법, 계명, 말씀에 의해, 짐승에 의해 맞아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인 거예요.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성경을 이렇게 표피적으로 이해를 해서 법으로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이 뭐가 되는 겁니까? 여러분? 신랑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간음을 하게 하는 책이 되는 거잖아요. 이 성경이 표피적으로만 보이게 되면 이건 내가 해야 할 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어떤 것, 도덕책으로만 보인단 말이에요. 행동강령으로만 보이게 되면 그게 예수를 의존하지 않고 예수라는 신랑을 떠나서 간음을 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따라서 이걸 로고스로만 보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성경책이 뭐가 되냐고요.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너는 확실하게 나랑 갈라섰구나. 이걸 증명하는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마태복음 5장 31절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이건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한 거죠? 하나님이. 여기에서 이혼증서라고 번역이 된 ‘세페르케르투드’는 이혼하는 책이에요. 이혼하는 책. 단순한 이혼 서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혼하는 책, 갈라서게 만드는 책이거든요. 이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그리고 모세 오경, 더 나아가 성경 66권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갈라지게 하는 책, 이혼하게 하는 책,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간음하게 만드는 책. 그러나 그 이혼증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혼인 언약이 되는 증서이기도 해요. 그 혼인 증서는 생명책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로고스로만 읽혀지게 되면 인간들은 그것을 근거로 바벨탑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내어 놓으면서 예수의 십자가라는 나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지만, 이혼이란 말이에요. 그게. 선악과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악과로 먹어버리는 인간들이 있다니까요. 그 말씀이 레마로 아들로 진리로 오게 되면 그 신부를 아들 안으로 죽여서 함몰시켜 내는 혼인증서가 되는 거예요. 너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쓰레기구나. 없음이구나. 흙이구나. dust 구나. 아파르 구나. 그래서 예수를 내가 보냈다. 이게 성경이니까. 그 성경은 나를 죽이는 책이라니까요. 그래서 그게 뱃속에 들어가면 쓰다고 그러는 거예요. 성경책에는 예수라는 이름만 명명되어 있다고 그랬죠?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살으심~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예수 안에 나있잖아요. 그 성경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 사람이 생명책에 명명되지 못한 자에요. 이름이 뭐 쭉 적혀 있어 가지고 거기에 내 이름 있나 없나? 이게 생명책이 아니라 성경이 생명책이란 말이에요. 그걸 내 이야기로 읽는 자가 내 이름이 거기에 명명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에게 일어난 그 죽음과 부활이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그냥 언제 한번 일어난 거고 나는 이제 성경에 적힌 수많은 계명을 지켜야하는 자로 이렇게 이해하는 거, 이게 성경을 잘 못 보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생명책의 명명되지 않은 자에요. 내 이야기가 아니거든.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아 32절 먼저 보고 가죠.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한 여자랑 결혼하면 안 된다는 얘기에요. 이거? 지옥 갑니까? 간음하게 한거라며요. 그리고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한 사람들 큰일 난 거죠? 성경이 그 따위 이야기 하겠냐고요.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그런 얘기. 여기서 음행한 연고 없이. 라고 번역이 된 어구는 로고포르네이야스 에요. 로고는 로고스의 형용사에요. 여기에 로고스가 나온다니까요. 말이 나와요. 또. 포르네이야스는 간음과 근친상간을 포함한 매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포르네이야스 많이 들어봤죠? 포르노, 포르노그래피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간음하게 하다. 매음하게 하다. 그렇게 행음케 하는 말을 제외하고 여기에 로고스가 등장하는 걸, 주의 깊게 보세요. 여자, 이게 ‘귀이네’ 라는 말을 쓰거든요. 이거는 히브리어 네케바에요. 이 네케바는 자칼이라는 단어와 창세기 1절 27절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는데 쎄렘, 그의 형상 안에서 자칼과 네케바를 만들어서 하나로 만들었다. 에서 자칼과 네케바에요. 그런데 이 네케바가 뭐냐면 남편의 아내란 뜻이에요. 그걸 헬라어로 옮기면 ‘귀이네’ 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지금 예수님의 아내로서의 어떤 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음행한 연고 없이 간음케 하는 그 말, 그걸 곡해하여 성경을 곡해하여 그걸 가지고 열심히 무언가를 이 땅에서 하는 게 간음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를 전달하는 거 자체가 또 간음케 하는 거죠. 그 자들은 절대 신랑과 혼인 상태가 되지 않는다. 는 뜻이에요. 그래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나는 절대로 너희와 이혼하지 않아. 라는 말이에요. 이거는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내 말을 로고스로 이 포르네이야스 포르노 내 말, 이렇게 더럽게 읽고 인간들의 행함으로 해석하는 자라는 이혼하겠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이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가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성경이 이혼증서입니까? 혼인 언약 증서입니까? 자 행음하게 하는 말, 즉 말씀을 곡해하여 예수라는 레마가 아닌 인간 중심의 그 법이라는 로고스로만 이해해서 이리저리 날뛰는 것이 간음인데, 그러한 행음케 하는 말을 제외하고 남자, 자칼의 그 여자, 네케바는 절대 버려질 수 없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그 어떤 무서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신랑이 여러분 안 버린다. 라는 뜻이에요. 예수만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러니까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최고의 죄는 간음케 하는 말, 말씀의 곡해인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이렇게 말하는 거죠. 3장 2절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아나운서들은 다 온전한 사람들이겠네요. 무슨 말이겠어요. 여기 로고스가 나와요. 또. 말에 실수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발 뿌리가 걸려 넘어지다. 에요. 그러니까 직역하면 로고스에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준 이 로고스에 대부분 걸려 넘어지는 데 이걸 실수라고 번역했어요.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아들로 그걸 받는 자가 온전한 사람, 자칼과 연합된 네케바, 귀이네 성도라는 뜻이에요. 말 잘하라. 라는 말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의 자칼, 신랑께서 음행의 말 이외에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이렇게 약속을 해 놓으시고는 우리가 음행의 말에 넘어지는 과정을 겪게 하신다니까요. 왜요? 남편이 버린 상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추구하는 게 고작 어떤 수준인지를 경험해 보래는 거예요. 고작 우리가 아들이라는 이 진리라는 성경을 갖고 불교인들이나 이스람교인들이나 아니 사탄교 걔네들도 착하게 살자. 에요. 하나님 도움 없이 착하게 살자. 걔들까지 주장하는 그런 거. 그런 걸로 이용해 버리는 너희들의 수준을 한번 경험해 보래는 거예요. 그리고는 걔들보다 잘 살지도 못하고 걔들이 더 착해. 그리고는 그렇게 버려진 자들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다. 라는 말은 우리 신랑은 절대 간음할 수 없는 분이잖아요. 그런 자들하고는 절대 연합, 혼인 안 해 라는 뜻이에요. 산상수훈은 율법주의를 때려 부수는 거예요. 구약의 시내 산을 신약의 시온 산이 때려 부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전부 이걸 간디나 법정처럼 읽어요. 법정 스님이나 간디도 매일매일 읽었어요. 산상수훈을. 뭘로? 로고스로. 우리가 열심히 지켜야 할 것으로. 간디보다 산상수훈을 행위로 더 잘 지켜낸 사람이 없어요. 뒤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는. 예수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로고스로 법으로 이해를 하여 그걸 열심히 행하는 걸 간음이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건 그렇게 신랑의 은혜 안에 자유롭게 머물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서 발출되어 나오는 행위로 근거로 해서 자신을 칭찬하거나 지나치게 체벌을 가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어려운 일이에요. 물론. 오래 걸리는 거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우매함이나 그 우매함에 의한 공격에 의연해질 수 있어요. 저도 조금씩 되는 거 같아요. 이거는. 어차피 하나님의 로고스를 레마로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이 뭐라고 그랬죠? 거의 없다. 라고 그랬어요. a few 가 아니라 few 라고 그랬다니까요. 거의 없음. 그런데 그 거의 없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이 모르고 까부는 걸 뭘 그렇게 대단하게. 그러니까 인터넷 까페 여기저기 논쟁하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내가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게 정말 진리이여야 할 텐데 불안하고 두려운데 뭘 그렇게 할 말들이 많아요? 얼마나 많이 아시길래. 고작해서 개혁주의 서적 네 다섯 권 읽은 게 그게 다면서 어디에 가서 사람들 그렇게 가르치려고 하냐고요. 그 자존심 그 자부심이 먼저 깨져야 되요. 이 서머나 교회는. 나에 대한 자부심, 교회에 대한 자부심. 아 이 십자가 지고 부정당하고 죽어가는 게 신앙생활이라며 무슨 그게 자부심을 가질 일이냐고요. 부끄러워서 십자가 뒤로 자꾸 숨어야 될 일이지. 말이 많아지면 안 돼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로고스에 걸려 넘어져서 성화주의에 머물러 열심히 나의 열심과 간음하는 자로 살았을 거예요. 그냥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면서 침묵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정말 그 레마, 진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게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가 로고스 되요. 대부분. 그래서 설교하기가 그렇게 싫어지는 거예요. 점점. 하나님 왜 나입니까? 라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게 진리를 알면 알수록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보자 스스로 입을 지져버리는 거예요. 올드보이처럼 가위로 혓바닥을 잘라 버리는 거지. 마음속으로. 아 말하기 싫어. 말하기 싫어.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다 로고스야 그리고 혹시 레마를 담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듣는 이들이 다 로고스로 들으니까 대화 자체가 싫어지는 거예요. 점점. 어찌 보면 그렇게 신앙생활이라는 건 나하나 구원하고 가는 거예요. 뭘 누굴 가르쳐서 누굴 구원하냐고 나하나 구원받고 가는 거예요. 눈물 철철 흘리면서. 그런데 그 길에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뭘 할 말들이 그렇게 많아요? 이사야가 왜 하나님을 만나고 숯으로 자기의 입을 지졌는지 왜 욥이 하나님을 보자 나 이제 입 닫겠습니다. 라고 말을 했는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은혜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 져야 되요. 교회 자랑할 필요도 없고 더 더욱이 나 자랑할 거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만 자랑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위해 아들 보내주시고 그렇게 간음하는 자, 이혼당해 마땅한 자에 불과했던 우리를 위해 그 신랑의 목숨을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영단번에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 백성으로 존재화 된 것이고 그렇게 창조된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걸 자유롭게 누리면 되는 것인데 여전히 이렇게 법에 묶여 오늘도 예수를 도륙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과 귀를 더욱 더 활짝 열어 주셔서 그들의 귀에 비록 인간의 우매한 로고스로 레마가 던져진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레마로 쌓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