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19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마5장31-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09

마태목음 5:31~32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자 오늘도 지난 주일처럼 강해 위주가 아닌 성경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그 뷰 파인더를 잘 이렇게 닦는 그런 작업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관점의 전환 그 패러다임 쉬프트가 되지 않으면 절대 성경을 진리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틀만 여러분이 갖게 되면 제가 설명을 안 해도 성경 읽으시면 그게 진리로 읽혀지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해서 성경을 강해해도 여러분의 관점이 그 옛 것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 이해가 안 돼요.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불교에는 세 가지 신성한 나무가 있어요. 모수, 보리수, 사라수 그러죠? 석가모니가 모수 아래에서 태어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사라수에서 열반했습니다. 죽었어요. 그 세 나무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지고 있어요. 진짜 있는 나무들입니다. 그래서 그 세 나무는 불교의 핵심 교리를 설명하는 나무로도 쓰여요. 이 땅에 태어난 자가 무수죠. 진리를 깨닫고 보리수입니다. 생명, 열반, 진리가 되는 진리로 브라만으로 합일 되는 것 이게 불교의 핵심 교리에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이 땅에 태어난 자가 진리를 깨닫고 생명으로 회개하는 거 이 불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불교라는 단어의 그 불자있죠? 그 사람 인 변에 이렇게, 이렇게 된 거 그게 아니 불자거든요. 사람 인, 아니 불, 사람이 아닌 걸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런데 그 달러자가 비슷하게 생겨서 그걸 불이라고 읽죠? 우리가. 1불 2불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 불자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거, 사람이어서는 안 되는 거, 사람으로는 못 가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의 그 이야기에요. 불교가 바로 그걸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처 불자니까.


불교가 각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는 거 아시죠? 석가모니만 부처가 아니에요. 모든 불자들이 부처가 되는 그래서 성불하세요. 그러는 거예요. 인사로. 그런데 그 부처는 우리가 브라만이라는 그 우주의 실체, 보이지 않는 그 진리의 투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임을 아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래서 그걸 알게 되면 108 번뇌, 뭐 고해 이런 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는 거예요. 그건 원래 허상이고 없는 건데 우리가 깨달음이 없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에요. 기독교는 육에서 벗어나서 신과 연합하여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어요. 비슷하지만 달라요. 그러나 제가 지금 비슷한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고 있는 겁니다. 


불교 경전 중에 가장 그 불교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에요. 불교를 공부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죠? 그 두 경전에 성경과 흡사한 내용들이 특히나 많습니다. 금강경을 중국의 다섯 고승들이 각자 견해대로 풀어 놓은 게 금강경오가해 라는 주석집이이에요. 600년 700년 전에. 지금으로부터 6, 700년 전에 그 다섯 명이 주해서를 썼는데 거기에 야보 스님이라는 분이 금강경을 제하면서 산시산수시수불제하처 라는 글을 썼죠? 그 시를 성철 스님이 가져다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법어를 함으로 해서 히트 쳤어요. 그 베낀 겁니다. 1980년 종정 취임식에서 이런 말씀 했어요. 원각이 보좌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도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미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진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에게만 진리라는 거예요. 아 시의 대중이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법어는 산과 물이 그 자체로 진리인데 너희는 어디 가서 부처를 찾는가? 라는 노승의 가르침을 담은 거예요. 그게 금강경의 내용들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사물을 처음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갖고 보죠? 본단 말이에요. 이렇게. 뭐가 있으면 내가 이렇게 그걸 봐야 되겠다. 해서 본단 말이죠? 그리고는 이내 그 마음을 갖고 해석을 해요. 우리는 본 것을. 아 저건 산이고 저건 물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요. 그게 산시산 수시수의 일 단계 첫 번째 단계입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단계에 봄, 보다. 라는 그 봄을 나타내는 단어가 따로 있는데 그 단어가 ‘옵타노마이’에요. 안경점에 가보면 ‘옵티컬’이라고 써있죠? 거기에서 나오는 단어에요. 그냥 보는 거예요. ‘옵타노마이’. 아주 초보적인 봄의 단계죠. 거기에서 ‘에이돈’이라는 단어로 헬라어는 발전을 하는데 그 ‘에이돈’이라는 단어의 명사형이 여러분이 잘 아는 ‘에이돌론’, ‘아이돌’,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게 되면 그게 곧 우상이 된다. 란 뜻이에요. 왜? 모든 사물은 진리라는 걸 어떤 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걸 껍데기, 표피로만 그냥 보면 그게 ‘에이돌론’, 우상인 거예요. 진짜를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거. 그게 우상이에요. 우상은 다른 게 아니에요. 어떤 존재나 개념을 원래 내용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표피적으로 곡해하는 게 다 우상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천하 만물에 신성이 깃들여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하 만물은 보이는 그걸로가 다가 아니라 그 내용에 하나님의 어떤 내용이 들어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로마서 1장 20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존재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우상인 거예요. 내가 나의 우상이 되는 거예요. 원래 창조 목적대로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런데 그 산과 물을 이렇게 미분해 가다 보면요. 조목조목 연구를 하다 보면 산은 뭐고 물은 뭐지? 라는 의심을 하게 되요. 그 안에는 풀도 있고, 나무도 있고, 벌레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여러 가지가 담겨 있는데 그걸 그냥 뭉뚱그려 산, 물, 이래도 되는 건가? 산은 뭐고 물은 뭐야? 이런 의심을 갖게 되죠. 데카르트가 딱 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죠. 두 번째 단계. 산은 뭐고 물은 뭐야? 그 때 산과 물을 본 사람이 도달하게 되는 단계가 ‘산물시산 수불시수’ 산은 그저 산이 아니고 물은 그냥 그저 그 물이 아니구나. 이 단계로 가게 되요. 성경이 그 단계에 봄을 ‘블렙보’ 라는 단어로 써요. 성경에도 보다. 라는 단어가 네 가지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볼래? 에요. ‘블렙보’가 어떻게 볼래? 그 후에 조금 더 나가면 아 산은 그저 산이 아니고 그저 물이 아니라 산에 물이 있는 거고, 물에 산이 있는 거구나 그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그게 ‘산시수 수시산’의 단계. 그 단계에서 이제 오도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거든요. 이렇게 이제 같이 묶이죠? 그러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되요. 모든 것이 진리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산시산 수시수’ 이 단계에 보면 성경이 ‘호라오’ 라고 그래요. 그 안의 걸 보니까 모든 게 하나만, 진리만 설명하고 있구나. 를 아는 걸, 네 번째 마지막 단계 산은 산이요 물이 물이다. 의 단계라고 그래요. 따라서 진리를 아는 이들은 어떤 글을 봐도 어떤 자연의 현상을 봐도 어떤 사물을 봐도 전부 그 안에서 진리, 하나님, 그 사랑을 읽어 낼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도통한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호라오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상계에 매이지 않게 되겠죠? 왜? 이거는 껍질이고 그 안에 진짜 진리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거니까. 현상에 매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들이 부처에요. 여러분 다 부처 된 거예요. 지금. 불교식으로 하면. 사람들이 뭐 환상, 꿈, 뭐 이런 거 나는 어제 환상 봤어~ 너 봤어? 나 못 봤는데 나는 봤어. 뭐 이상, 환상, 꿈 이런 얘기들 많이 하죠? 왜 꿈, 환상, 이상 이렇게 이야기해요?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니까 중간에 깨니까 환상, 꿈, 이상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환상, 꿈, 이상이 뭐에요? 여러분의 현실이에요. 이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현실을 환상, 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엉뚱한 거 보고 그러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약 먹어야 되요. 그래서 불교에는 석가성불의 산천초목동시성불 이라는 말이 있어요. 석씨가 석가 석씨가 성불을 하니까 부처가 되니까 산천초목이 다 진리더라. 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은 진짜 진리 못 봤어요. 진리를 알게 되니 모든 자연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우리 성도의 현실을 그냥 문자적으로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우리 얘기에요. 그거는요. 불교의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하나만 더 예를 들어드릴게요. 금강경과 함께 불교 교리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반야심경입니다. 그 반야심경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시작하죠. 많이 들어 보셨죠? 불교 핵심은 마하반야바라밀다에요. 마하라는 건 절대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고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는 극락의 세계로 넘어 감, 건너 감 이런 뜻이에요. 바로 이걸 실행하는 종교가 불교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 불교는 수도정진을 통해서 즉 깨달음을 얻어 마하 절대적 존재로 합일을 함으로 해서 진리가 되어 바라밀다 극락으로 넘어가는 걸 목적으로 하는 종교에요. 사실은. 불교는. 그 반야심경이 그 진리의 도달하는 비결, 방법을 어떻게 알려주는가 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여기서 강수연을 떠올리면은 큰일 나는 거예요. 그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건너가라. 건너가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되면 너희는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방법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에요. 건너가라. 건너가라. 진리와 합일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로 건너가야 된다. 라는 거예요.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진리의 땅, 그 땅이 있다. 라는 그 기독교 교리 핵심을 너무나 닮아 있죠? 거기 건너가지 않으면 진리와 합일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제가 지금 언급한 불경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등 종교의 경전들이 우리가 가진 성경과 아주 높은 싱크로율을 갖고 있어요. 심지어 바벨론 신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고대 신화에 노아의 홍수 등의 그 구약사건들과 흡사한 내용들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어요. 거인 네피림의 이야기나 홍수설화는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성경보다 훨씬 이 전의 쓰였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런 질문이 들어야 되요. 그러면 성경이 그런 것들을 다 종합하여 베낀 거 아니냐~ 이런 질문이 들어야 되요. 당연히. 왜? 그보다 먼저 쓰여진 것들의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여러분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신입니다. 그리고 그분만 신이에요. 그래서 한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뭔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오직 하나님으로만 충만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은 보이지도 않고 설명도 불가해요. 그래서 성경이 그냥 그분은 계시다. 하나님은 계셔~로 그냥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 대해 설명을 안 해 줘요. 그냥 태초의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은 그냥 계셔~ 이렇게. 시작을 한단 말이에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유한에게 무한은 설명되어질 수 없으니까. 그러나 유한의 수준에서 그 분을 어떠한 모형으로 제시하여 주며 설명해 줄 수는 있어요. 그림으로 그려서. 그래서 천지가 창조되고 그 천지의 축약으로 성전이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천지와 그 성전은 하늘에 있는 어떤 것의 모형이다. 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표피와 내용, 모형과 실체 이렇게 그런 형국으로 갈라져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내용까지 보게 되는 거예요. 그게 ‘호라오’ 에요. 그 내용을 보는 거예요. 진리로 보는 거예요. 그거를요. 물론 세상 사람들은 표피적 인식에만 머물러서 그 표피의 묶여 살아요. 그걸 히브서 기자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11장 1절 보세요.



히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게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모르면 절대 산 존재로 살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그게 진리거든요. 그걸 모르는 생명나무 실과를 못 따먹어요. 그게 죽은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걸 모르는 게 죽음의 상태에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상태. 그 보이지 않는 걸 모르는 걸 죄라 하고, 그 보이지 않는 걸 ‘호라오’ 보는 걸 믿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걸 보이는 세계로 설명해 놓았다. 라는 말이 이 말이에요. 지금요. 그래서 3절이 보이는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보이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하여 지어졌다. 라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 보이는 세계는 즉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져 있다.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보이지 않는 실체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없다. 난 몰라. 내가 안 보이기 때문에 없다. 그러는 거예요.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이 그래서 없다. 라고 그러는 거예요. 보여 봐~ 라고 하는 거예요. 보여 봐~ 여러분 한자에 없을 무자는 원래 있을 유자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있을 유자의 반대말은 아니 불자에요. 무자가 아니에요. 원래 한자의 무는 진짜 있는 건데 사람들이 못 알아먹어서 감지할 수 없어서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무라고 그래요. 한자가요. 그건 없는 게 아니에요. 진짜 실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호라오’ 로 감지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지가 안 돼요. 감지가 안 된다는 건 껍데기만 본다. 는 말이란 뜻이라고 그랬어요. 전혀 못 보는 게 아니라 그냥 껍데기만 보는 거예요. 이 천지만물의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담겨 있는데 그냥 껍데기만 보는 거예요. 아 봄이 왔네, 아 덥네. 초록이 됐네~이렇게 껍데기만 보는 거.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말씀, 말이라는 걸 가장 처음 내놓으신 분이 누구겠어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으니까. 하나님이겠죠? 여러분 말이라는 건 마음에서 나와서 그 마음의 뜻을 담고 입을 통하여 소리로 나오는 걸 말이라고 그래요. 말이라고 그래요. 그걸.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는 유한이 감지를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소리 못 들어요. 뭐 아침에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 하셨어. 그런 말하지 마세요. 제발. 그래서 그 소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을 걸 글이라고 그래요. 처음의 글자는 이집트 문자 같은 거. 다 상형 문자 같은 거였어요. 그림이었어요. 그래서 히브리어 알레프 있죠? 이렇게 생긴 거. 첫 번째 글자거든요. 그게 거기에서 알파가 나오고 A가 나온 거죠. 그게 원래 소뿔이에요. 소머리에다 뿔. 이거를.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알레프, 엘, 하나님이라는 뜻을 담아서 우리에게 줬거든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 만들어 봐 그랬더니 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A자 하나.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놓은 글은 소리도 없고 마음도 없죠. 그려놨으니까. 그러면 인간들이 어떻게 그걸 읽어요. 자기의 마음을 통하여 읽어요. 그런데 인간들의 마음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과 악이라는 두 마음이네요. 그래서 모든 글은 하나님의 말을 글로 그려 놨다 할지라도 모든 글은 인간들의 선악구조라는 안경을 통하여 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걸 악한 말, 푸뉴마다이모니온, 귀신 이렇게 이야기해요. 악한 영. 다 똑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 그 두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하나의 새 마음을 준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새 언약이죠. 



에스겔서 36장 26절 보세요.

26 또 새 영을(성령,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영이 말이라고 그랬어요. 생명이라고 그랬어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그래서 예레미아 31장에서는 내가 내 말, 법을 너희 속에 두고 이렇게 또 바꿔서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 같은 말이란 말이에요.)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신, 성령, 호흡, 기식하는 거 뭐 다 똑같은 말이에요. 그 성령을 또 말씀, 말이라고도 하죠? 여러분 호흡을 하지 못하면 소리를 내지 못해요. 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말이 안 된단 말이에요. 호흡이 안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신, 영을 두는 걸 말을 두는 거라고도 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는 거죠. 그걸 새 마음을 준다고 그래요. 성령을 우리 안에 넣어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서 그 말이 되게 하는 거. 진리가 되게 하는 걸 새 언약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걸. 여기에서 새 마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율례들을 지켜 행한다. 라고 하는데 이건 율법을 잘 지킨다. 라는 말이 아니라 법을 새기다. 법을 담다. 라는 뜻이에요. 법을 아예 담고 나온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육에다가 담고 새기고 온 분이 계시죠? 아니 그보다 먼저 말씀과 그럼 이 육신을 하나님이 하나로 이렇게 합쳐둔다고 그랬는데 이걸 한단어로 뭐라고 그러겠어요? 이 존재를 말씀과 육신이 합쳐진 이 존재. 말씀 육신 이렇게 불러요. 말씀 육신. 그 말씀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요한복음 1장 14절 보세요.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호로고스사륵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가 아니라 말씀 육신이라는 뜻이에요. 앞에 관사가 붙어 있잖아요. 호로고스사륵스는 그냥 말씀 육신이라는 어떤 존재, 새 언약에서 이야기한 바로 그 존재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관사가 붙어 있는 거예요. 호로고스사륵스 말씀 육신이 와서 우리 가운데 거하다는 장막, 성막이에요. 그건 장막으로 덮다. 라는 뜻이에요. 그 분이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덮어 버린 거예요. 그 말씀이 육신 속에 새겨져 버린 새 마음을 받은 어떤 존재가 이 역사 속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라는 말이에요. 물론 그건 상징적인 거죠. 구약 때에도 말씀 육신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 말씀 육신이 되어야 구원 받은 거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말씀 육신들만 왜? 그 진리가 그 육신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계나 글과 소리 등을 진리로 감지해 낼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성령 받은 자가 진리를 깨닫는다. 라고도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진리로 주어진 말씀을 글을 하나님의 소리가 되어 전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세례 요한이에요. 그래서 그를 광야에서 광야는 어디? 스데반이 뭐라고 그래요? 광야 교회, 교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별명을 붙이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하면 하나님의 소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말이란 말이에요. 말씀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엉뚱한 다른 얘기하면 안 돼요. 진리 이야기만 해야 되요. 뭐 어떻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건 진리 아니라니까요. 이 세상이 영원할 거면 하나님이 그 방법 가르쳐 줘야 돼요. 그런데 여기는 어떤 모형으로서, 모델 하우스로서 역할이 끝나면 사라질 곳인데 뭐라고 여기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냐고. 여러분 모델 하우스 구경하러 가면 어떻게 살으라고 가르쳐 주던 가요? 아니에요. 보고 나가는 거예요. 아 이런 거구나. 하고 나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내용을 담지 못한 엉터리 소리들이 있어요. 그걸 에코라고 한다고 그랬죠? 성경이. 그거는 공허한 메아리에요. 울림이에요. 앵무새의 소리, 의미 없는 소리, 그걸 악한 말, 다이모니온 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산상수훈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죠? 입을 열어 가라사대 누가? 4장 4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고 그랬으니까 그 살리는 하나님의 입이 열리고 말씀이 나오는 게 산상수훈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말씀도 표피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태반인 거예요. 오늘날. 그래서 이걸 도덕과 윤리로만 보는 거죠. 간음 하지 마. 살인 하지 마. 그러니까 그래 사람 절대 죽이면 안 돼. 이러고 가는 거예요. 다. 소리를 에코로 들어서 그래요. 진리로 못 듣고.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을 진리로 던지셨을 때 물론 로그스라는 그릇에 담아서 던지세요. 진리로 던지셨을 때 그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두 부류가 생기겠죠? 그 하나님의 신, 그 법이 말씀이 그 안에 뚫고 들어간 자들과 아닌 자들은 이 하나님의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된단 말이에요. 


한쪽은 표피적 인식에 머문 산시산수시수의 옵타노마이, 첫 번째 불일일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진리 안에서 모든 걸 보는 진짜 산시산수시수 네 번째 단계의 불일들이에요. 모든 걸 진리로 봐요. 산으로 물로 보는데 그걸 진리로 본다니까요. 


따라서 모든 고등 종교의 경전들이 비슷한 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확정되는 거예요. 그게 달라 버리면 안 돼요. 모든 종교는 한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해한 놈들이 만들어 놓은 거라 비슷한 거예요. 그러나 달라요. 반드시 비슷해야 되요.


원래 말은 말씀은 하나 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의 말. 어떤 자들은 그 말을 선악과로 받아서 먹고 죽고, 어떤 자들은 그 말을 생명나무 실과, 진리로 받아서 사는 거예요. 한 나무에요. 그래서. 그 창세기에 그 두 나무의 이야기는 반복하여 단수로 써요. 그 나무를. 나무, 나무. 그러니까 그걸 이해 못해 갖고 수풀 림 자를 두 나무로 그려 놓은 거예요. 아니에요. 한 나무에요. 그래서 저는 종교의 경전들을 읽으면서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구나. 라는 걸 더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지 혹시 성경이 다른 걸 베낀 게 아닌가. 라는 질문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노자의 도덕경이나 공자의 저서들 도가 사상의 서적들, 8궤나 64궤, 태극 무극, 무극이 감지 안 되니까 태극으로 그려놓은 거 아니에요. 이게 다 묵시와 역사의 관계들이에요. 영원을 설명하기 위해 순간의 연속인 시간을 만들은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게 다. 전부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니까요.

 

불교에 석가모니와 제자가 물 위를 걷는 사건도 나오고 그 제자도 빠져요.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처녀로 잉태해요. 마야 부인이에요.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왕궁의 어린 서광을 보고 멀리에서 아시타의 선인이 찾아오죠? 동방박사 세 사람처럼. 그리고는 이가 장차 부처가 될 것이다. 라고 예언도 해줘요. 어린 석가모니가 브라만 제사장을 어린 나이에 가서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내용이 흡사해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구약의 예언되어 있던 사건들이었어요. 그렇죠? 구약의 다 있는 이야기에요.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성경이 불경을 베낀 거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오히려 하나님의 그 말씀들이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라인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말씀이 내려 왔죠? 그것들이 석가모니에게 영향을 준 거예요. 그래서 그 가르침에 싱크로율이 그렇게 많은 거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브라만족이에요. 브라만족은 그리스, 헬라와 이탈리아 아리안 족과 같은 족이에요. 그들은 유럽에서 흘러 내려 왔다고요. 그전에 이미 모세5경이나 이런 게 있었다니까요. 석가모니가 브라만족인 그가 뭘로 진리를 연구했을까요. 그러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들이나 책을 갖고 연구한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표피적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라니까요. 그걸 나중에 사람들이 제자들이 석가모니가 죽고 한참 있다가 기록을 한 거잖아요. 불경은. 석가모니가 쓴 것도 아니고 그런데 석가모니가 깨달은 부분은 구약까지죠? 태초에 하나 밖에 없던 하나님의 말씀이 석가모니에게는 구약적 관점으로 밖에 안 보여요. 그때까지 내려오던 모든 진리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었어요. 태초의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니까요. 하나님의 말. 그래서 석가모니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에요. 건너가라. 건너가라. 건너가면 진리가 있다. 라고 밖에 말 못한 거예요. 자기가 진리가 되었으면 건너와라. 건너와라. 여기에 진리가 있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도 그냥 저 멀리 어렴풋이 진리가 거기가 있다. 라고 어떤 책에서 봤는데 나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건너가라. 건너가라. 한 번 해봐라. 나는 못했어. 그런데 네들은 한번 해봐라. 라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고 죽은 거예요.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한 설법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라마다경 38장 8절에 하시야소래오도무유자데냐 이게 언젠가 야소가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돈은 기름 없는 등과 같이 쓸모가 없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이 옛날에 예수교를 야소교라고 했던 거 아시죠? 석가모니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을 거라고 저는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 진리를 심어요. 그런데 진리인 그들은 알아먹어요. 그걸. 생각해 보세요. 


구약이 뭐에요? 율법 지키고 제사 열심히 지내고 성경을 공부해서 하늘에 도달하라. 가 구약이에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요. 구약은. 그런데 그들에게는 신약이 없어요. 모든 종교에 신약이 없어요. 모든 종교의 경전은 다 구약에서 끝나요. 유대교에도 신약이 없어요. 그래서 가짜입니다. 이슬람교에도 진짜 신약이 없어요. 예수로 결로되어지는 신약이 없다니까요. 힌두교에도 율법에만 머물러 있죠? 유교, 도교, 천도교, 증산교 다 마찬가지에요. 니들이 해라~에요. 다 구약이에요. 전부 율법의 머물러 있어요. 모든 종교가 구약에 머물러 있어요. 유독 기독교에만 예수라는 신약이 있어요. 


그래서 바울도 그 웨스트민스터사원 클라인 교수 같은 사람도 신약으로 결론되어지지 않는 구약은 죽음의 이르게 하는 책이다. 그러는 거예요. 바울도 그러잖아요. 죽음에 이르는 책,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 구약을,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석가모니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교주들이 여출일구로 건너가라. 건너가라. 건너가면 거기에 진리가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님만 신약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건너가 봐라. 건너가 봐라. 니들이 니들 힘으로 건너갈 수 있나~ 이렇게 말씀 하세요. 그러죠? 그게 물위를 걷는 사건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래서 밤 사경까지 그 베테랑 어부들이 열심히 건너가려고 약속 땅으로 가는 거잖아요. 왜? 에레모스, 광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곳은 광야잖아요. 광야에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간다. 라는 건 광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거니까.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어떤 그런 그림을 그려 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때만 동행을 안 해요. 뒤로 쭉 빠진다니까요. 니들끼리 건너가 봐~ 일부러 설정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밤새도록 못 건너가죠? 언제 건너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시고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자마자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성경이. 그러니까 가나안은 약속의 땅은 진리의 땅은 예수를 영접하여 가는 곳이지 니들이 건너간다. 건너간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백 날 해봐라~ 못 건너간다. 가 신약인 거예요. 그게 기독교라니까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전부 구약의 머물러 있어요. 인간들의 행위로 건너가자. 라는 거예요. 그리고 무수히 많은 건너가는 방법들도 제시해요. 선행, 구제, 참손, 고행, 학습, 봉사, 보시 뭐 이런 것들을 방법으로 제시해 준다니까요. 왜? 건너가야 되거든요. 내가. 그런데 그 방법 중에 예수만 없어요. 신기하죠? 예수만 없어요. 그런데 성도만 모든 것 안에서 예수를 봐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비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지는 않죠?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성경이 그걸 은혜라고도 하고 사랑을 묘사하는 데 쓰잖아요. 은혜의 말씀, 내리 사랑 이런 걸 우리는 비를 보고도 알아요. 아 은혜는 말씀은 저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거구나. 그래서 그 비에 의해 살아나는 거구나. 만물이 소성하는 거구나. 라고 거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읽어낸다니까요. 물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야 유익하지 아래에서 위로 흐르면 쓰나미 되는 거예요. 그거요. 그건 멸망시키는 거예요. 사랑은 오직 내리 사랑일 뿐임을 알게 되는 거죠.

 

암술과 수술이 수정과 수분을 하게 되면 신랑과 신부의 연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가 생겨요? 씨방이 생기죠? 씨방이 생기면 즉시 일어나는 게 뭐죠? 꽃이 떨어져야 되요. 씨방이 생겼다는 증거에요. 꽃이 떨어지는 건. 예수님이 이 땅에 뭐로 오셨어요. 샤론의 꽃으로 오셨다고 그러죠. 샤론이라는 건 광야에요. 광야 교회의 꽃으로 왔어요. 그래서 광야에 생명의 씨가 심어지면 샤론의 꽃은 광야의 꽃은 떨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꽃 이야기는 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우리는 꽃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오히려 더 은혜 받는 거죠. 벚꽃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우울해갖고 우울증 걸린 사람이 있대요. 저 아름다운 것이 왜 일주일밖에 안가 이렇게. 성도는 그게 떨어지는 걸 보면서 예수가 저렇게 떨어졌기에 저기에 버찌가 열리는 구나를 아는 거예요. 열매를 맺히는 구나를 아는 거예요. 자연 속에 진리, 복음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씨가 없는 무화과를 보면서 저렇게 열매인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멸망의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도 알죠? 우리가 즐겨 먹는 무화가 열매는 열매가 아니라 사실은 꽃입니다. 여러분이 사각사각 씹는 그건 수술머리에요. 씨가 아니라. 그래서 그 종자에는 배가 없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는 항상 꺽 꽂이 해야 되요. 삼목을 해야 되요. 그냥 놔두면 지만 커져요. 이렇게. 그러니까 보세요.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얘는 그냥 꽃이에요. 그런데 열매인척 매달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 씨가 없어요. 말씀이라는 씨, 아들이라는 씨, 후손, 제라 그 아들, 생명이 없는 열매는 열매 아니야 그래서 너 아니야 라고 하나님이 저주해 버린 거예요.

 

그게 뭐에요? 하나님이 열매로 인정하지 않는데 자꾸 열매로 내놓는 걸 율법이라고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그걸 저주하여 십자가, 마른 막대기처럼 저주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율법이 죽어야 거기에 씨가 심기고 열매가 맺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사각사각 씹으면서도 이 가짜, 이건 저주받아 마땅한 거. 혹시 나의 모습 속에 이건 있지 않나? 이리로 가는 거예요. 그걸 남물 속에서 진리, 하나님을 호라오 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리 속에서 만물 속에서 그 진리를 보면 여러분이 그게 구원의 확신,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러분이 산거예요. 그게요. 하나님을 보여~ 아니 만물 천지만물에 성경 말씀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없냐고요. 못 보는 거지~ 하나님을 보여 봐라~ 어떻게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나를 본 자는 이렇게 보이는 것으로 온 나를 본 자는 안 보이는 무의 자리에 있는 아버지를 본 건데, 너는 여전히 나를 보여 달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맨 우리의 상식으로 어떻게 볼까? 어떻게 인식할까? 그리고 그걸 갖고 어떻게 확신을 가질까 이러고 있으니까 전부 관념으로만 동동동 떠다니는 거예요. 감동받았다고 하는데 순 다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열매인 척 하나님이 인정하는 열매 아닌데 하나님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그 열매 아닌데 열매인척 하는 걸 우리가 율법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옷을 해 입는 거예요. 그걸로는 부끄러움을 못 가리는 건데 그게 선악과에요. 나무는 거기 하나밖에 없는데 갑자기 무화과가 왜 나오겠느냐고요. 율법으로 가리는 거예요. 그런데 무화과는 부끄러움을 절대 못 가려요. 왜? 풀은 마르거든요. 베드로전서 1장 23절 보세요.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자 씨를 말씀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씨가 없으면 안 돼요. 말씀이 심겨져야 돼요. 하나님이 심는다. 라고 했으니까. 새 언약 속에서. 법을 심는다. 라고 했으니까.)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꽃이 떨어져야 되요. 풀도 말라야 되요. 육은 죽어야 되요. 그래야 말씀 육신 중에 육신이 죽어야 말씀, 진리만 남고 그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명쾌하지 않아요? 복음이래요. 이게. 꽃이 떨어져야 되는 게. 따라서 율법의 예수가 죽지 않으면 복음이 성취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교회는 이미 애굽에서 광야로 나와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광야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애굽에 있는 거 아니에요. 나와 있다니까요. 교회만. 그래서 에클레시아 에요. 에크, 아웃 밖으로 나온 집단이에요. 여러분이. 애굽에서 나와 있는 거예요. 


그 광야에서는 만나라는 말씀이 떨어지죠. 광야에서만 떨어져요. 애굽에서는 안 떨어져요. 거기는 세상이니까. 가나안 왜? 말씀이 진리가 된 자들이 들어가는 곳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더 이상 만나가 없어도 되요. 여기서 진리가 되어서 떠났거든요. 그래서 가나안에서도 안 주는 거예요. 광야에만 말씀이 있어요. 그런데 그 만나라는 인간들이 붙인 이름이에요. 하나님이 만나라고 부른 거 아닙니다. 그 만나는 What, What is this? 이건 뭐야 몰 알아본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이 말씀이 만나가 떨어지면 첫 번째 오는 반응이 What is this? 이건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되는~ 그게 만나라는 뜻이에요. 


성경은 그 만나를 가리켜 진주 같다. 그러죠? 그래서 돼지나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은 귀한 값비싼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 같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다 말씀이에요. 뜻이. 만나, 진짜 만나의 실체를 아는 자들의 것 이라는 뜻이죠. 그들은 그 귀한 진주를 알아봐요. 그래서 천국하나님 나라, 거룩한 나라 라고 부르는 거고요. 그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고. 그러나 개, 돼지 짐승들은 그 진주를 못 알아볼 뿐만 아니라 그 진주 때문에 멸망해요. 엉뚱하게 이해해서 그래서 내 말이 너희들을 심판한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가 광야로 나오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하는 게 뭐죠? 유월절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되요. 안 그러면 못 나오죠? 어린 양 예수를 먹는 거예요. 화목제죠? 제물을 먹는 제사는 화목제란 말이에요. 어린 양 예수를 먹어서 죽이는 거예요. 그 유월절이라는 Moon Passover 를 통과해야 광야 교회로 나올 수 있어요. 십자가입니다. 내가 어린양 잡아먹고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유월절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 내 것이다. 그러죠? 장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가리켜서도 니들이 내 장자다. 그러잖아요. 유월절을 통과하여 그 아들을 먹은 자들을 아들 삼는 거예요. 장자 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하는 거예요. 유월절 십자가는 이미 내가 통과하여 광야로 나온 사건이지 여러분이 두고두고 추억할 사건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이 고난 주간을 그렇게 슬프게 보낸다는 건 그리고 사순절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금식하며 특별히 새벽기도하며 여전히 보낸다는 건 사순절은 캐톨릭이 만들어 놓은 거 없애놨더니 또 개신교가 또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거는요. 그렇게 해 놨더니 또 다시 그 십자가를 돌아다보면서 여전히 그걸 추억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게 내거가 안 돼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건 여전히 내 밖의 것으로 서 있다니까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더 이상 섬김의 대상이 아니에요. 나와 연합한 분이라니까요. 그분이. 나를 품은 그 예수는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반드시 거기서 죽어야 하는 존재이지, 계속해서 섬김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면 그게 율법이 되요. 곧.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추억할 십자가를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어떤 것에 종으로 남아 있으려고 해요. 율법의 종으로 남아 있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계속하여 이미 하나님이 완료해 놨다고 하는데 계속해서 자기의 행위를 내놓고 그 십자가를 섬기려고 해요. 그걸 율법이라고 하잖아요. 그걸 희생제사라고 하죠? 희생제사에는 반드시 예수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기 또 줘~ 그런 거예요. 그 고기는 유월절에 먹었던 양고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를 추억하는 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고기? 니네 그 고기를 또 추억하고 있냐? 그래 니들한테 고기가 주어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하고 메추라기를 고기로 주었더니 그 고기가 잇 사이에 씹히기도 전에 저주가 임해 버리는 거예요. 왜 주고 저주 하냐고요? 그걸 끊임없이 하나님이 가르치는 거예요. 예수라는 고기는 여러분이 계속 먹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성찬식을 조심스럽게 해야 되는 거예요.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성찬식 하지 말아야 되요.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어요. 계속 예수 먹는 거예요. 그거는요.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에게 섬김의 대상이 되면 안 돼요. 그 십자가가 담고 있는 언약과 말씀, 진리, 사랑, 은혜가 남아야 되요. 자꾸 거기에 매어서 나 대신에 죽은 분이라고 나와 그분을 갈라놓으면 그걸 이혼이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간음이란 말입니다. 나 대신에 죽은 분이기 때문에 내가 뭔가를 자꾸 그분에게 해드려야 된다. 라는 이 생각. 그래서 전부 예배당에 오면서 예수를 하나님을 섬기러 온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가끔 진짜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교회 못 오면 일주일이 찝찝한 거예요. 진짜 놀러 가느라고 교회 안온 사람들은 그래도 싸지만,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못 올수 있지요. 그런데 꼭 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교회 안 갔다고 하나님이 이럴 수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건 그냥 관념에 머문 종교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주고 제사를 하라고 한건 그렇게 계속 제사하면 안 되는 거야~ 라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제사하라 한 거예요. 그래서 반복하여 제사하게 만든 거예요. 그 제사가 진짜 효력이 있으면 한번 끝나면 안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계속 하게 했다. 라는 건 이거는 이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란다. 를 오히려 가르쳐주기 위해 하라~ 라는 명령을 주는 거예요. 성경의 모든 내용은 다.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10장 1절 보세요.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런데 계속하지 않니? 이런 말이에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제사는 아무리 지내도 죄는 계속 생각난다.)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이 제사 지내~ 예물 드려~ 라고 한 건 그거 받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거는 정작 내가 원하는 게 아니란다. 를 가르쳐주기 위해 해~ 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제사는 그렇게 율법으로 반복하여 드리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는 그런 말이에요. 하면 안 된다. 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라~ 는 명령을 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요. 그렇게 성경의 하라와 하지 말라~의 명령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악과 먹지 마. 라는 건 그거 먹어야 네가 생명이 뭔지를 알 수 있다. 라는 말이거든요. 그거는 먹어 라는 말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그냥 여러분의 선악구조 안에서 이해를 하게 되면 뭐는 해야 되고 뭐는 하지 말아야 되는 이 두 마음으로 항상 선택을 하게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기서 목사가 그래요~ 이렇게 하세요. 라고 하거나 아니요~ 그거 하지 마세요. 안 해도 되요. 라고 이야기를 하거나, 성도는 그 안에서 진리를 호라오 하게 되요. 하나님 말씀도 그렇게 이중적으로 그려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리를 이야기하는, 소리로 이야기하는 설교자에게 왜 언제는 이런 얘기하고 왜 언제는 이런 얘기해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그 안에서 진리를 호라오 못 했다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난번에 우리 교인들이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줬어요. 어느 정도 목사님 설교를 이렇게 듣고 나니까 하라. 하지 말라. 이건 아무것도 안 들린대요. 그 안에 있는 예수님만 들린다는 거죠.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거예요. 맞아요. 제가 지난번에 이왕이면 가족을 사랑하면서 부부가 뭔지 하나님과 남편과 신랑의 관계가 뭔지 깨달으라고 그랬더니 어떤 놈들이 또다시 저 양반이 율법으로 돌아가서 가정을 사랑하라고 그런다. 이메일이 왔어요. 그럼 목사가 가족을 미워하세요. 그래야 되요? 어린애 수준에 있는 것들이 꼭 그 수준으로밖에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거는 아는 척은 드럽게도 해요. 어디서 몇 권 책읽어갖고 그 베낀 거 내가 어느 몇 페이지에 있는 거 다 아는데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이지 여러분의 윤리 도덕적인 그 행위가 하나님에게 카운트되어서 상급의 단초가 되는 게 아니에요. 착하게 살아야죠. 왜 못되게 살아요. 사랑 해야죠~ 왜 미워해요? 그러나 그걸 갖고 나에게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요.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너희를 하나님처럼 창조하는 게 하나님 나라니까 너희들의 힘으로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런 거 하지 마 그러는 거예요. 왜 자꾸 바벨탑 쌓고 바라승아제 해~ 그런 거 하지 마. 그게 성경이라니까요. 그게 자연이 담고 있는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모든 타종교와 역사는 열심히 노를 저어서 하늘로 건너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참 교회인 성도는 더 이상 예배당에 와서 희생제사식의 예배를 해서는 안 돼요. 십자가 앞에서 명목 없어하고 불안해하면서 혹시 내가 이런 정도의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나에게 어떤 해가 오지 않을까? 뭐 이런 두려움 등이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예배는 누리는 거예요. 자유를 선포하는 거라니까요. 그 말씀 속에서 여러분이 이렇게 풀려나야 예배에요. 그래야 그 하나님이 예배에 대상이 되죠~ 안 그러고 예배시간 끝에 내가 또 뭔가에 묶여서 그래 한주동안 나와서 또 열심히 싸워야지 이러고 나가면 그분은 예배한 게 아니라 여러분은 그분에게 야단맞고 가는 거예요. 거기에는 자유가 없어요. 자유가 없으면 자기를 구속하는 신랑이 부담스럽다니까요. 불편해요. 그게 이혼이에요.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떨어져 나가면. 



마태복음 20장 27절 보세요.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게 하늘왕의 존재 방식이에요. 하늘 왕들은 섬기는 자들이에요. 



마태복음 23장 11절 보세요.)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 육신이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러 오셨죠? 그걸 섬기러 왔다고 그래요. 하늘에서의 큰 자, 으뜸인 자, 왕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악구조 속에서 아담들이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 완전히 다르더라는 거예요. 진리가 되어서 진리를 나를 털어 흘려보내는 걸 사랑이라고 그러고 그걸 섬김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항상 진리를 흘려보내는 자가 종처럼 서서 섬기고 진리를 받는 이들이 그 분을 섬기는 게 아니라 왕처럼 앉아서 받아먹는 거예요. 


보세요. 제가 지금 여기서 진리를 여러분에게 막 전하는데 저는 종처럼 서서 이러고 여러분은 편안하게 앉아서 받아먹는 이게 하나님 나라에요. 이게 예배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섬기기 시작하면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나를 사랑했었고 섬겨주셨구나 라는 걸, 아는 걸 그분을 섬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분을 찬송하는 게 섬기는 거예요. 


다른 거, 우리 거 뭐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섬김을 받느냐고요. 다른 거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 중에 하나님이 가치 있게 받는 거는 단 하나 찬송이에요. 그 분을 알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상이라니까요. 


왜 요한 사도가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얘기했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다. 라고 하는지. 사랑이 그렇게 은혜의 단비처럼 우리에게 위에서 내리 사랑, 내려오는 거예요. 자식들이 부모 사랑해 봐야 얼마 사랑해요? 부모 사랑, 그거 발톱의 때만큼도 못 쫓아가요. 사랑은 항상 내리 사랑이 진짜 하는 거예요. 그 사랑을 깨달아 내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흘려보내는 걸 이웃사랑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이웃사랑을 하는 그 자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거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께 지금 사랑을 흘려보내는 거고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단어의 개념 정의나 상식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면 안 돼요. 그게 표피적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이 간음의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여러 번 그 반복해서 읽은 요한계시록의 붉은 짐승을 탄 음녀의 이야기, 그 잘 기억해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를 타고 있는데 우리가 붉은 짐승이에요. 그런데 붉은 짐승의 눈에는 예수님이 음녀로 보인다니까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계속 부정한 자, 십자가에 계속 매달아 놓는 거예요. 음녀로. 


여러분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랬어요. 저는 목숨 걸고 예수님 지키겠습니다. 사랑하겠습니다. 섬기겠습니다. 제가 섬겨 드릴게요. 그랬어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섬기러 왔다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니까 교회에요. 교회가 내가 섬겨드릴게요. 그 죽음 막아드릴게요. 그랬어요. 예수님이 안 되겠구나 넌 나를 세 번 부인하고 부정해야지 나를 섬기려고 해서 안 돼 라고 해서 베드로만 대제사장의 뜰로 끌어 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저주하여 부정하게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 예수님이 쳐다보잖아요. 그래 내 새끼, 그래야 네가 사는 거야~ 네가 율법인 예수, 두 번째 옛 성전으로 온 나를 부정해야 살지 네가 나를 섬김의 대상으로 삼으면 또다시 넌 율법으로 들어가게 돼. 자 그러면 교회, 베드로는 하나님을 예수를 못 섬긴다. 라는 게 이제 폭로가 됐죠?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똑같이 그 숯불을 펴놓죠? 똑같이 무대장치를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리고 떡과 물고기를 굽죠. 그게 뭐였어요? 인간들이 내 놓을 수 있는 가장 멋진 인간들의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오병이어 현장에서 떡과 물고기 고작 오병이어로 내놓은 거예요. 


이거냐? 이걸로 어떻게 먹니?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걸로 주는 거거든요. 그 물고기라는 것과 떡이라는 건 원래 보리떡은 짐승들만 먹는 거였고 간음한 여자가 부정한 여자가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제물로 드리는 거였잖아요. 물고기 마찬가지에요. 알 많이 낳는 물고기는 부정한 것이었단 말입니다. 니들이 내놓을 수 있는 건 부정한 것밖에 없어. 예수님이 그걸 그대로 펼쳐 놓으세요. 너 나 섬긴다고 그랬잖아. 그게 이거였잖아. 결국 하나님을 부정해 버렸잖아요. 욕만 직사게 하고 나와 버렸잖아요. 하나님이 물으세요. 너 나 사랑해? 다시 묻는 거죠. 아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사랑의 주체를 예수님께로 이양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십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하지 못한다는 거.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사랑으로 내가 하나님 못 사랑한다는 거 하나님이 보셨잖아요. 이 말이에요.


그때 그렇지 그게 복음이야~ 그러니까 가서 이제 내 양을 먹여라~ 그 전에 가면 안 돼요. 내 양을 쳐라. 내양을 먹여라. 내가 너희를 섬기러 온 것이지 네들이 나를 이 세상 모든 종교들처럼 네들이 나를 섬겨서 뭔가가 이루어진다. 라고 생각하는 거 그게 마귀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이제 가라. 라는 거예요. 어디로? 내 증인이 되러, 사랑하러 가라는 거예요. 먹여라. 


여러분 요한 계시록에 그 음녀가 타고 있었던 붉은 짐승, 

먼저 이것부터 여쭤 볼게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짐승을 몇 가지로 정해 주셨는데 뭐죠? 소, 양, 비둘기, 염소, 하나 또 있어요. 나귀에요. 이 나귀는 정말 드릴게 없을 때 제물로 드리되 성전까지 안 와도 되요. 하도 꼴 같지 않아서 그냥 집에서 모가지 꺾어 죽이는 거예요. 나귀만. 집에서 모가지 꺾어서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 대신에 양이 있으면 양이 대신 죽고 나귀는 살려줘라~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이 나귀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파자하면 뭔지 아세요? 붉은빛 짐승이에요. 나귀라는 단어 자체가.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붉은빛 짐승이에요. 예수님이 뭐 타고 가셨어요? 나귀 타고 갔어요. 그것도 새끼 나귀. 붉은빛 짐승을 타고 어린양이 십자가로 향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이 붉은 빛은 항상 죄를 상징하죠? 붉은 빛 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아담이에요. 여러분 히브리어 사전 있는 사람은 한번 찾아보세요. 아담이라는 단어가 붉다. 붉게 물들이다. 라는 뜻이에요. 아담이라는 존재 자체가 죄에요. 하나님의 생기가 가입되기 전에 네페쉬인 아담 자체가 붉음이라니까요. 그게 나귀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하고 그걸 쌓아 라고 그러죠. 그리고 거기다가 날개를 수놓으라고 그러고 그걸 무슨 색으로 칠하라고 그래요? 붉은 색으로 칠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 그러는 거예요.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이거 옛 성전 이야기하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먹었어요. 성전은 하얀 그 새 날개를 수놓아서 덮어버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새가 날라 가는 것처럼 보여서 구약성경에서는 새라고 그래요. 날으는 새, 성전을. 그런데 그 성전을 붉은 색으로 칠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죠? 이사야서에서.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붉을지라도 죄. 내가 내 능력으로 희게 만들어 줄게~ 가 복음인 거예요. 그걸 너희들이 열심히 빨아서 희게 만들어라~ 가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나귀, 그 붉은 짐승은 양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 17장에서 짐승이 음녀를, 음녀로 보이는 그분을 죽이고 기실 짐승인 우리가 살아나는 이야기에요. 그건. 붉은 나귀. 아담이 그 예수를 죽이고 살아나는 거예요. 그 붉은 짐승의 옷을 그 죄의 옷, 더러운 옷이잖아요. 그거는. 피 묻은 거니까. 그거 벗겨버리고 어린양이 자기의 하얀 옷으로 바꿔 입혀주는 거예요.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니까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인 율법의 대표인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무슨 옷 입고 있어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그래요. 사단이 참소하죠. 얘 더러운 옷 입고 있대요. 하나님이 뭐라고 그래요. 거기 여호와의 사자도 있어요. 그래 그럼 벗겨~ 아니 어떻게 저 옷을 입고 여기까지 와~ 안 그랬어요. 그럼 벗겨~ 내가 새 옷 입혀주게~ 그 새 옷은 여호와의 사자가 입고 있던 옷을 그에게 거저 입혀 준거예요. 그 더러운 옷 벗기고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그 더러운 옷을 뭐라고 그러냐면 64장 6절 보세요.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옷이다~ 인간들의 의, 인간들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하면서 열심히 만든 그 의의 옷, 이걸 더러운 옷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그거 벗겨버린다니까요. 그리고 피 뿌린 옷 입은 그 예수가, 하얀 옷을 입은 예수가, 세마포 옷 입은 예수가 피 뿌린 더러운 옷, 죄의 옷이에요. 그거는. 피가 낭자한. 다윗 보고 그러잖아요. 너는 피를 많이 흘려서 안 된다. 성전 못 짓는다. 그러죠? 그건 죄의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 피 뿌린 옷을 예수가 입고 자기의 하얀 세마포를 그에게 대신 입혀주는 거예요. 그걸 복음이라고 그래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은혜라고 그래요. 어떻게 거기서 찬송이 안 나오느냐고요. 어떻게 이 시간이 예배가 안 되겠느냐고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옷을 뭘로 갈아 입혀요. 세마포로 갈아 입혀요. 그건 이제 육의 죽음을 죽은 자들은 흰 옷, 세마포를 입고 하늘의 존재로 살게 된다. 라는 모형이에요. 


재미있는 건 예수님이 무덤 안에다가 그 세마포 벗어 놓고 갑니다. 발가벗고 간 거예요? 내 새끼들 이 옷 입고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발가벗겨져서 죽으신 거예요. 성화같은 거에 최소한의 어떤 거는 그려놓죠? 아니에요. 발가벗긴. 우리의 모습이거든요. 그러나 거기에는 또 한 가지가 의미가 들어가 있어요. 인간들이 만들어서 입혀준 그 섬김의 옷은 내가 안 입어~ 라는 뜻도 같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면 요한계시록에 가 보면 예수님이 그 세마포 입고 있잖아요. 그 두 가지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건요. 그 예수님의 옷이에요. 그게 우리에게 입혀져요. 그랬더니 계시록에 가니까 우리도 세마포 입고 있고, 예수님도 세마포 입고 있어요. 그런데 역사 속의 장면을 묘사할 때는 예수님이 피 뿌린 옷 입고 있어요. 또. 헷갈리죠? 무슨 옷 입은 거예요. 그 얘기에요. 복음의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7절 보세요.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죽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이게 세마포에요.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그리스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 그리스도인이에요. 그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거죠. 그런데 인간의 행위라는 엉뚱한 옷으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면 그게 바로 신랑의 은혜에 먹칠을 하는 음란한 행위, 간음이라는 거예요. 



에스겔서 16장 15절 보세요.

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너 잘났다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16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 후무하니라 (보세요. 네가 네 옷 만들어 입으면 너는 창녀다. 라는 거예요.)
17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18 또 네 수 놓은 옷으로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으로 그 앞에 베풀며 
19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한 내 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22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또 똑같이 행하더라는 거예요.)
23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화 있을찐저 화 있을찐저 네가 모든 악을 행한 후에 
24 너를 위하여 누를 건축하며 모든 거리에 높은 대를 쌓았도다 
25 네가 높은 대를 모든 길 머리에 쌓고 네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여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행음하고 
26 하체가 큰 네 이웃나라 애굽 사람과도 행음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도다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평가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면서 행위의 옷, 의의 옷을 차려 입고 있었는데 신랑이신 하나님은 그 신부의 옷을 벌거벗은 것과 방불하게 표현을 하세요. 그리고 그러한 게 간음이며 행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신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신부는 그리스도라는 옷, 진짜 의의 옷, 하나님의 만드신 의의 옷, 흰 옷 그걸 입고 있어야 하는데 붉은 적신, 피투성이 아담으로 여전히 애처럼 발짓이나 하고 있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행위 멋지죠? 그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애기 발짓을 하면서.


그런데 오늘날 교회, 그 광야로 건너온 자들이 흰옷을 입고 있다. 하는 자들이 여전히 건너가자. 건너가자. 하고 열심히 인생의 노만을 젓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게 벌거벗고 행음하는 것이며 마땅히 죽어야 하는 예수와 예수 안의 나를 자꾸 추억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인 거예요. 여러분은 자꾸 또 다른 유월절을 필요로 해서는 안 돼요. 여러분은 이미 완전히 풀려났어요. 이미 건너갔어요. 


민수기 11장 33절 보세요.

33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이건 만나까지 줬는데 또 고기 달래냐~ 이 나쁜 놈들아~ 그래갖고 재앙을 내린 게 아니에요. 까짓 거 하나님이 메추리 그 정도, 소를 그냥 비처럼 내릴 수도 있는데, 네들이 그 고기 가마 유월절 고기 가마를 또 추억하니? 이게 우리 아담들의 본성이거든요. 율법주의로 살려고 하는 거. 줘 놓고 먹어~ 그래 놓고는 재앙을 내려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네네 또 돌아가고 싶어? 유월절로 애굽에서 나왔는데 또 돌아가고 싶어? 그리로? 또 예수가 죽어야 되니? 그리로 돌아가면 또 재앙이라는 거 몰라? 


그 전에 열 가지 재앙이 내려져 있잖아요. 그게 애굽의 실체에요. 재앙만 있는 곳.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십계명 주는 거예요. 네들 열 가지 재앙이 있는 그곳에 가서 살래? 여기에서 열 가지 말씀으로 나랑 살래? 그래서 십계명이에요. 구 계명도 아니고. 어린양은 자기들이 이미 먹어서 죽여 버렸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십계명을 가지고도 또 유월절로 향해서 가요. 예수라는 고기를 또 필요로 하는 자리로 간다니까요. 애굽의 삶이 익숙해서 그래요. 그렇게 율법의 노예로 사는 게 오히려 편안해서 그래요. 진리로 호라오 못하니까. 그게 선악과 따먹은 율법주의 속 아담의 모습인 거예요. 


붉은 사람, 붉은 색으로 칠해진 자, 죄 덩어리.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너 간 자들이에요. 그 홍해는 다시 안 열려요. 그래서 하나님이 닫아 버린 거예요. 못 돌아가게. 그 건너간 자라는 말의 히브리말이 이브리, 히브리에요. 그래서 히브리인에요. 그건 이스라엘의 이름이죠?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다른 이름이고, 교회는 건너간 자라니까요. 그런데 뭔 바알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요. 건너갔다니까. 여러분이 진리가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건너간 자'라는 단어는 다른 말로도 쓰는데 '저는 자'라고도 쓰여요. 성경에 보면 저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이 수 없이 나오죠? 그건 다리 저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이 아니에요. 건너간 자, 저는 자 하면 생각나는 사람 누구에요? 야곱이죠? 야곱이라는 이름은 뭐에요? 발목을 잡다. 발뒤꿈치를 잡다. 강도죠? 잘 가고 있는 사람 발목 잡으면 어떻게 되요? 실족하여 걸려 넘어지죠? 그걸 강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엉뚱하게 하나님의 말을 율법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강도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리고 그 성전, 옛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야곱의 굴혈. 발목을 잡는 거예요. 강도에요. 넘어뜨리는 자에요. 그러면 자기도 죽어요. 푸뉴마다이모니온으로 자기도 죽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죽여 버려야 되요. 환도 뼈를 치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못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의 발목을 잡아 실족시키는 악한 말. 그걸 하나님이 죽여요. 


그래서 야곱이 지만 살겠다고 안 건너 간 거예요. 얍복강을. 다 건너갔는데 약속의 땅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었잖아요. 거기서 언약 받았으니까. 그런데 지만 안 건너갔어요. 하나님은 걔를 건너가게 해야 돼요. 그래야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간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건너 보내요? 저는 자로 만들어서 보내요. 그래서 그는 죽을 때도 지팡이를 의지하여 죽죠? 성경에서 지팡이는 항상 뭘 상징해요? 나를 이끄는 말씀을 지팡이라고 그래요. 빛이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자로 만들어서 건너가게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환도 뼈.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 여인의 후손, 제라, 예수를 죽여 그를 저는 자 만들어 왜? 예수가 죽어 그가 건너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는 이미 무능력한 자라는 게 폭로된 거니까 저는 자 되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만 의지하여 건너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바로 히브리, 건너간 자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다시 야곱으로 못 돌아가요. 못 고쳤다니까요. 죽는 날까지 지팡이 짚고 가야 되요. 평생 절어야 되요. 그런데 그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진다. 그래요. 가난한 자, 저는 자, 건너간 자. 그런데 그렇게 이미 건너간 자들이 또다시 건너가자. 건너가자. 저기에 진리가 있다. 열심히 행해라. 봉사해라. 섬겨라. 뭐 해라. 뭐 해라 그러면 어디로 건너가요? 건너간 자들이? 애굽으로 다시 건너가는 거예요. 또 다시 유월절 건너가는 거예요. 그게 불교에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가 또 다시 애굽의 유월절로 건너가려 하는 엉터리들인 거예요. 십자가를 추억하고 예수를 추억하면서 또다시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사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분들이에요. 그 옷은 그리스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도 못 벗겨요. 그 연합은 누구도 못 깨요. 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으로 연합시킨 관계이기 때문에 아무도 못 벗겨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그 진리를 아는 자, 그래서 그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 모든 현상계의 것들, 그걸 보는 이들이 산 자에요.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들이에요. 여러분이 지금은 말씀 육신이지만 그 육신을 벗는 그날 진리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거예요. 건너간 자, 그들이 홍해를 건너고 뭐했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기 15장에서 잔치 벌렸어요. 잔치인 거예요. 나가면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각나죠. 그러나 이 말씀, 진리 안에서는 여러분이 여기에서 잔치를 벌이고 계셔야 되요. 아 저도 골치 아픈 일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 속으로 숨어서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이렇게 설교할 때만큼은 진시황이 안 부러워요. 뭐가 부러워 그 사람이. 부러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아 사람들은 뭐 아 젊은 청춘을 20대로 돌아가고 싶다. 아 절대로 안 돌아가고 싶어요. 난 그때 진리를 몰랐거든요. 절대로 안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는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점 진리가 되어가는 거예요. 성도는. 그래서 머리도 검은 색에서 흰 색으로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빨주노초파남보를 다 섞으면 무슨 색인지 아세요? 섞이다. 검은색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순결한 색이 흰색이죠? 그래서 노인이 영광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 집사님처럼 머리가 하얘져야 성숙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행복해져야지 아 이팔청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 사람들은 뭐가 잘못된 거예요. 지금. 왜 돌아가요? 그리로? 이제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진리로 튕겨져 나갈 텐데 그때를 오히려 기다리게 되죠. 우리는.

 

제가 교수님 한분을 모시고 사사를 받는데 요즘 이제 다른 그 글들을 여러 책들을 좀 읽어야 되니까 고서적들을 읽어야 되니까 왜냐면 번역되어 나온 것 중에는 진짜 읽을 게 거의 없어요. 나는 기독교 서점에 가서 그 수 천, 수만의 권의 책이 있는데 한 권을 못 찾았어요. 진짜로. 그런데 그 교수님 한 사람한테 이백만 원씩 줍니다. 여러분. 이 목사의 월급에 그 가당한 일이냐고 그게. 그러나 조금 다른 거 안 먹어도 되요. 왜냐면 이 진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분이 모든 걸 쏟아 부어 투자를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되요. 그게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예요. 그게. 그래서 이 수요일 날 이 더운데 또 여기 이렇게 나와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더 그 진리에 목말라 하셔야 되요. 진리는 알면 알수록 더 달고 더 맛있어요. 그래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이 알고 싶어지는 게 신기해요. 그러니까 설교 한 시간 밖에 안한다고 막 투덜대는 그런 원수들도 있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그래요. 한 시간 반씩 해야 되요? 꼭? 진리의 목말라 하시는 여러분이 되셔서 언젠가 그 진리로 모든 것이 진리로 보이게 되는 그 때에 여러분 진짜 자유가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될 거예요. 엉터리 말에 속지 마세요. 구약에 머물러 있는 이 세상 모든 말들에 속지 마세요. 모든 도덕 강연, 연속극, 교양프로그램, 다 율법에 전부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하나도 볼게 없어요. 차라리 있기. 없기를 보지~하여튼 자유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우리가 단 한 땀도 돕지 못한 세마포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를 반짝 들어 약속의 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된 그러한 하나님 나라, 천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그런데 어떤 율법의 또 묶이겠습니까? 그 자유와 진리를 깨달아 정말 새 사람 안에서 행하는 그 새 삶이 우리에게서 나와 또 다른 진리가 될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전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