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강해 6
혼인잔치의 비유
<마 22:1-14>
오늘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어디서 출발하여 서술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비유 앞의 마태복음21장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시작으로, 성전을 뒤엎으시고, 애꿎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모습,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와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차례로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들과 비유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십니다. 이미 스가랴서와 창세기에서 야곱의 유언으로 언급이 되었던 내용입니다. (창49:9-11)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겸손의 상징인 나귀에 자신을 매시고교회를 상징하는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 가지에 묶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포도주에 빠실 것이라고 합니다.
11절에서 ‘매다’라고번역된 말의 원뜻은 ‘전쟁에 참여하다, 함께 묶이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전쟁에 암나귀 새끼인 교회가 함께 묶여 포도나무 가지로 참여하게 되고, 그 전쟁의 결과로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전쟁은 물론 죄와 세상과의 전쟁을 말하지만 그 죄와 세상은 바로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부인의 전쟁을 말합니다. 그게 포도나무에 묶인 성도가 맺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겸손의 나귀에 묶인 예수의 옷이 피로 물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 63:1-6) 실로의 옷이 붉게 물든 이유가 뭡니까? 죄에 대한 분노로 원수를 밟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자기를 붉게 물들입니다. 실로이신 하나님이 죄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퍼부은 하나님 자해 사건, 십자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맏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부정한 인간의 몸에 당신의 신성을 담으시는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를 짓밟아 교회라는 후사를 기어코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그럼 그 예수님의 동생들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삶을 살까요? 원수를 위해 자신을 밟아 죽인 그 장자의 자리에 동생들인 교회가 암나귀 새끼들로 편입이 됩니다. 역시 그들도 아버지의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장자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완성되는 그 날까지 역사 속에서 장자들의 총회인 교회는 계속 맏아들의 자리로 편입이 되어 자신의 죄인됨과 전쟁을 하며 결국에는 자신을 부인하고 죽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은혜와 긍휼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데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에 가득차서 자신들의 업적과 공로를 내어놓으며 구원을 쟁취하려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 조건, 자격, 열심이 아닌 나귀를 타고 포도주 틀을 밟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복과 저주를 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상징하는 성전을 기각하고 바로 그들이 저주받을 무화과 나무인 것을 가르치십니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허다한 행위들을 열매로 내어 놓지만그건 전부 자기가치 향상과 자아실현의 열매들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열매로 쳐주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무성한 잎사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무화과 나무의 때도 아니었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 무화과 나무에 예수님이 굳이 찾아와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할것이라는 저주를 해버리십니다. 그런데 그게 은혜의 폭력성, 편애의 폭력성, 예정의 폭력성입니다. 무화과나무들의 노력과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편애만이 축복과 저주를 나누는 근거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담 속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의 편애를 불공평하다고 여깁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과 악인, 두 종류로 나누는데 (시1:5-6) 마치 중립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얼마든지 의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화과 잎이 무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는 말입니다.그게 인본주의입니다. 하지만 의인과 악인은 창세 전에 나뉩니다. 그 편가름의 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나귀의 이야기, 예루살렘 입성의 이야기, 옛 성전의 기각, 무화과 나무의 저주 이야기는 모두 은혜의 부각과 행위의 기각으로 꿰어지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내러티브를 좀 더 강화시키는 것이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일을 명령받은 두 아들 모두 실패의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한 쪽은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순종의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 맏이라고 자처하는 힘을 가진 자들은 부재성과 은닉성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감추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부정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헤가 찾아가면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자들은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려 듭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마21:33-41) 악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모두 때려죽이고 아들마저 죽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자기 부인의 열매를 내어놓지 못한 악한 농부로 비유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그런 열매말고 회개를 하라’ 외치는 선지자들과 종들을 무참하게 살해해버립니다. 선지자들과 예수님은 이 비유의 종들과 아들처럼 같은 운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히 1:1-2)
선지자들과 아들은 이 세상에 자기부인의 열매, 십자가의 열매를 요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도저히 스스로 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속 인간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애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진 주님을 모통이돌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 돌에 붙여 성전을 지어가십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마 21:42-46) 예수라는 돌 위에 떨어져 깨어지고 가루가 되는 이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 21장 전체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와 인간이 업적과 공로로 내어놓는 열매를 대조함으로 참 성도의 삶을 심도있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 즉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종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결의 그림입니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풍성한 잔치에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 보면 (눅14:18-20) 일상을 챙기느라 못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일상이라는 소유에 목숨바쳐 집착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아들, 비록 왕의 아들일지라도 그 혼인잔치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자 아들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자들을 왕이 모두 도륙해버리고 다른 이들을 불러들입니다.
(눅 14:21-24)
21.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
22. |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
23. |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
24.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왕에 의해 택함을 받은 세상에서 약하고 무력한 자, 자신의 힘을 자랑할 수 없는 자들 입니다. 왕이 지명하여 데려옵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강권하여 채우라고 합니다. (마22:10) 그렇게 구원은 폭력적으로 강권되는 것입니다. 악한 자, 선한 자가 모두 초청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선함과 악함이 혼인잔치의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오직 왕의 편애를 받은 정해진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주인이 만들어서 선물로 주는 것을 입기만 하면 되는 데 그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행위, 감정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잔치 집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 의지나 열심등에 의해 자신의 구원을 가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내가 갖는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행실을 근거로 구원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잔치집에 들어와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린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의 옷,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을 부인당하고 그 비워진 자리에 예수로 채워진 자들이 우리입니다. 우리를 위해 나귀를 타시고 당신 자신을 짓밟아 뭉개버리신 실로 덕에 무상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 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산, 율법의 산, 공로의 산인 시온산을 저주의 바다에 던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은헤의 옷, 긍휼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계시록에서 말하는 의의 옷이며 요한이 말하는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가 종들을 때려 죽였고 우리가 아들을 때려 죽였는데 왕이 우리를 강권하여 잔치 자리에 앉히시고 무상의 예복을 입혀버리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 아들의 잔치, 은혜의 잔치로 들어 오십시요.
<질문과 토의>
1포도나무이신 예수와 함께 묶여진 교회는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기서 연합을 상징하는 묶임의 뜻과 그 결과로 맺게 되는 열매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이 묶임의 원뜻이 ‘전쟁에 함께 묶이다’입니다. 예수님의 전쟁에 교회가 묶여 자기 부인의 전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성도가 맺는 열매입니다.
2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며 어떤뜻입니까?(사63:1-6)
- 겸손의 나귀에 묶인 예수의 옷이 피로 물들어야 합니다.
- 죄에 대한 분노로 원수를 밟아 자기를 붉게 물들이는 하나님의 자해 사건, 십자가를 뜻합니다.
3 그렇게 이미 십자가로 인해 완결된 전쟁은 역사 속 성도의 삶에서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살게 되는 동생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짓밟아 원수를 살려내는 자기부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애기해 봅시다.
4 하나님 나라의 완결의 그림을 보여주는 혼인 잔치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지도 않고 오히려 초청하러 온 이들을 죽입니다. 왜입니까?
-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의 댓가로 주어지는 일상이라는 소유에 집착하느라 왕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 인간의 가능성에서 촉발된 자신들의 행위를 모두 부인하고 아들의 혼인잔치에 가서 아들의 영광만을 찬양해야 하는 그 상황이 싫어서 초청하러 온 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5 결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은 왕의 편애로 강권하여 초청받은 사람들 입니다. 누구이며 그들이 입고 들어가는 예복은 무슨 뜻입니까?
- 가난한 자, 소경, 저는 자들, 즉 세상에서 약한 자, 무력한 자들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왕에 의해 택함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 예복은 주인이 만들어서 선물로 주는 은혜의 옷으로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린 감사히 그 은혜에 나를 맡겨 잔치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 22:1-14)
1 예수께서다시비유로대답하여가라사대
2 천국은마치자기아들을위하여혼인잔치를베푼어떤임금과같으니
3 그종들을보내어 그 청한사람들을혼인잔치에오라하였더니오기를싫어하거늘
4 다시다른종들을보내며가로되청한사람들에게이르기를내가오찬을준비하되나의소와살진짐승을잡고모든것을갖추었으니혼인잔치에오소서하라하였더니
5저희가 돌아보지도않고하나는자기밭으로, 하나는자기상업차로 가고
6 그남은자들은종들을잡아능욕하고죽이니
7 임금이노하여군대를보내어 그 살인한자들을진멸하고 그 동네를불사르고
8 이에종들에게이르되혼인잔치는예비되었으나청한사람들은합당치아니하니
9 사거리길에가서사람을만나는대로혼인잔치에청하여오너라한대
10종들이 길에나가악한자나선한자나만나는대로모두데려오니혼인자리에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손을보러들어올쌔거기서예복을입지않은 한 사람을보고
12 가로되친구여어찌하여예복을입지않고여기들어왔느냐하니저가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사환들에게말하되 그 수족을결박하여바깥어두움에내어던지라거기서슬피울며이를갊이있으리라하니라
14청함을 받은자는많되택함을입은자는적으니라
(창49:9-11)
9 유다는사자새끼로다내아들아너는움킨것을찢고올라갔도다그의엎드리고웅크림이수사자같고암사자같으니누가그를범할수있으랴
10홀이유다를떠나지아니하며치리자의지팡이가그발사이에서떠나지아니하시기를실로가오시기까지미치리니그에게모든백성이복종하리로다
11그의나귀를포도나무에매며그암나귀새끼를아름다운포도나무에맬것이며또그옷을포도주에빨며그복장을포도즙에빨리로다
(사 63:1-6)
1 에돔에서오며홍의를입고보스라에서오는자가누구뇨그화려한의복큰능력으로걷는자가누구뇨그는내니의를말하는자요구원하기에능한자니라
2 어찌하여네의복이붉으며네옷이포도즙틀을밟는자같으뇨
3 만민중에나와함께한자가없이내가홀로포도즙틀을밟았는데내가노함을인하여무리를밟았고분함을인하여짓밟았으므로그들의선혈이내옷에뛰어내의복을다더럽혔음이니
5내가본즉도와주는자도없고붙들어주는자도없으므로이상히여겨내팔이나를구원하며내분이나를붙들었음이라
6내가노함을인하여만민을밟았으며내가분함을인하여그들을취케하고그들의선혈로땅에쏟아지게하였느니라
(시1:5-6)
5그러므로악인이심판을견디지못하며죄인이의인의회중에들지못하리로다
(마21:33-41)
33 다시한비유를들으라한집주인이포도원을만들고산울로두르고거기즙짜는구유를파고망대를짓고농부들에게세로주고타국에갔더니
34 실과때가가까우매그실과를받으려고자기종들을농부들에게보내니
35농부들이종들을잡아하나는심히때리고하나는죽이고하나는돌로쳤거늘
36 다시다른종들을처음보다많이보내니저희에게도그렇게하였는지라
37 후에자기아들을보내며가로되저희가내아들은공경하리라하였더니
38 농부들이그아들을보고서로말하되이는상속자니자죽이고그의유업을차지하자하고
39 이에잡아포도원밖에내어좇아죽였느니라
40그러면포도원주인이올때에이농부들을어떻게하겠느뇨
41저희가말하되이악한자들을진멸하고포도원은제때에실과를바칠만한다른농부들에게세로줄찌니이다
(히 1:1-2)
1 옛적에선지자들로여러부분과여러모양으로우리조상들에게말씀하신하나님이
2 이모든날마지막에아들로우리에게말씀하셨으니이아들을만유의후사로세우시고또저로말미암아모든세계를지으셨느니라
(마 21:42-46)
42 예수께서가라사대너희가성경에건축자들의버린돌이모퉁이의머릿돌이되었나니이것은주로말미암아된것이요우리눈에기이하도다함을읽어본일이없느냐
43 그러므로내가너희에게이르노니하나님의나라를너희는빼앗기고그나라의열매맺는백성이받으리라
44 이돌위에떨어지는자는깨어지겠고이돌이사람위에떨어지면저를가루로만들어흩으리라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바리새인들이예수의비유를듣고자기들을가리켜말씀하심인줄알고
46잡고자하나무리를무서워하니이는저희가예수를선지자로앎이었더라
(눅14:18-20)
18 다일치하게사양하여하나는가로되나는밭을샀으매불가불나가보아야하겠으니청컨대나를용서하도록하라하고
19 또하나는가로되나는소다섯겨리를샀으매시험하러가니청컨대나를용서하도록하라하고
20또하나는가로되나는장가들었으니그러므로가지못하겠노라하는지라
(눅 14:21-24)
21 종이돌아와주인에게그대로고하니이에집주인이노하여그종에게이르되빨리시내의거리와골목으로나가서가난한자들과병신들과소경들과저는자들을데려오라하니라
22 종이가로되주인이여명하신대로하였으되오히려자리가있나이다
23 주인이종에게이르되길과산울가로나가서사람을강권하여데려다가내집을채우라
24내가너희에게말하노니전에청하였던그사람은하나도내잔치를맛보지못하리라하였다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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