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강해 2 –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눅 15:11-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3:03

비유강해 2 –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 15:11-32>

 

흔히 탕자의 비유로 익숙한 본문입니다. 어떻게 이해들을 하고 계십니까?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왔더니 반갑게맞아주셨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하고 돌아가자로이해하면 주인공은 탕자가 되고 맙니다. 그런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집을 떠난 두 아들을 아버지가 어떤 사랑과 인내로 받아주시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이 비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먼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상황을 그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살펴 봅시다. 자식은 부모가 죽기 전엔 유산의 소유권과 처분권을 감히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 자식간에 지켜야할 예의와 규범도 상당히 엄격했습니다. 그러니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떠나 모든 것을 허비한 둘째는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혐오하며 저주하는 돼지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개 취급도 하지않았던 이방인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께 어떻게 돌아옵니까? ( 15:17-18) 기특하게도스스로 죄를 뉘우쳐 아버지를 찾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어구를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이 어구를 직역하면 자신에게로 왔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았다,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어떠한 지경인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누가 개입을 합니까? 누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러 오십니까? 성령하나님 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주체는 흔히들 말하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는 세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15장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지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3)

잃은 양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 비유가 나온 다음 결론 부분에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심장이라고 얘기할만큼 이 비유들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이 비유가 단수를 뜻합니다. 그러니 15장에 기록된 모든 비유가 하나의 비유임을 암시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여행 중입니다. 유대인도 아닌 사마리아의 세리와 창기, 그리고 거기까지 자기들의 열심으로 예수님을 좇아간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율법과 관습으론 죽이고 싶을 만큼 둘째에 대해 분노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참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보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선 100마리 중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두번째 비유에선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비유인 오늘 본문에선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짐승, , 사람, 그리고 백, , 둘 이렇게 점층적 개념과 숫자를 동원하여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7절과 10절에서  이 비유를 회개와 연결시킵니다. ( 15:7, 10)

 

잃어버린 양이나 드라크마가 스스로 주인을 찾아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란 찾아지는 쪽에서발휘되는게 아니라 찾는 쪽에서의 열심에 관한 것임을 앞의 두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분문에서 똑같이 찾아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둘째가 한 것이라곤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쾌락을 좇아 산 것 뿐입니다. 거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임하자 자신이  추구한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는 참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 속에 십자가는 어떻게 숨어 있습니까? (15:32)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둘째를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죽었다가 산 자로 선언을 해버리십니다. 그가 언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까? 아버지는 상거가 아직 먼데 아들을 반기러 나갑니다. 아들이 맞아 죽기 전에 달려나가 그를 품음으로 아들의 죽음을 대신 당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스스로 율법을 파기하고 아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 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큰 아들이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큰 아들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방탕했던 둘째에 비해 열심으로 아버지를 섬겼는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큰 아들 역시 하나님 백성이지만 패역한 자임을 모형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비유의 서두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베풀어지는 집에서 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5:28-30)

 

큰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노하며 잔치에 참여하길 거부합니다. 그 때 아버지는 작은 아들 때와 같이 또 문밖으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잔치에 참여하길 권합니다. 28절의 권하다라고 번역된파라칼레오는 보헤사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와 뿌리가 같은 단어입니다. ‘초청하다, 위로하다의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갑자기 이 단어를 쓰심으로 큰 아들에 대한 초청을 성령의 초청과 위로로 연결시킵니다. 아버지는 둘째같은 한량도 첫째같은 교만한 자도 다 품으시고 부르시는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삶을 한 번 돌아봅시다. 정확하게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삶이 적절하게 섞여 있진 않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쌓은 세상의 유토피아에 도달하려 할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열심으로 세상의 것을 좇지만 참 만족이 없는 공허 속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둘째의 삶으로 보여지는 돼지우리 속의 탕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힘을 부인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뢰를 쌓으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 종교심이 가입되면 위장된 성실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버지를 따랐을 뿐인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성경은 이라고 부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도덕적 행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하십시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윤리는 이 두 아들을 극명하게 대척점으로 몰아 완전히 반대의 평가를 내릴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선 둘 다 죽일 놈이면서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종이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처음 소유된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창세 전에 택함받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된 자들입니다.이렇게 가장 악한 큰 아들까지도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짜 큰 아들인 예수님이 동생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의 삶의 실체를 바로 보이시고 죽어 마땅한 그들의 죽음을 십자가에 대신 죽어 그들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시는 하늘 장자의 역할을 잘 해내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의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불리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죽은 흙에 불과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실체를 보이시고 성령님의 초청으로 하늘 나라 잔치에 부릅니다. 백에서 십으로, 십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결국 가장 악한 그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안에 있다는 복음을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질문과 토의>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근거로 둘째의 패역이 어느 정도였으며 그 처벌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말해보십시오.

 

-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유산의 소유권을 먼저 요구한 것, 심지어 처분권까지 행사해 몰래 이방 나라로 가서 탕진한 살인자와 방불한 죄인)

-     (21:18-21)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적 유토피아에 도달하려 할 떄 나타나는 현상을 두 아들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     하나님없이는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공허 속의 삶으로 보여진 완전히 파산한 둘째 아들의 모습

-     큰 아들처럼 종교심과 위장된 성실을 내어놓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인 포장된 악의 모습

 

두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숨어 있나요?

 

-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둘째를 집 밖으로 뛰어 나가 먼저 품어 안으심으로 아들의 죽음을 대신하는 모습

-     아버지 잔치에 불응하는 큰 아들의 태도 역시 마을 사람과 가족 앞에 아버지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집 밖으로 나와 아들을 청하며 스스로 율법을 파기하고 아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

 

오늘 본문은 결론이 없습니다. ( 15:31-32)  큰 아들이 잔치에 들어갔는지 안들어갔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독자인 교회에게 결론을 넘깁니다. 무엇입니까?

 

-     15장은 전체가 잃었다가 찾아진 존재들의 이야기입니다성령의 초청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써서 그들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그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넓고 큰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에는 두 아들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상징적으로 표현됐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살아보려는 공허한 애씀의 돼지우리 같은 삶도 있고  ‘자기의라는 경건병에 걸린 큰 아들의 모습도 있습니다내 삶에서 수시로 드러나는 두 모습들에 대해 고백하고 그런 불가능한 존재인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15:11-32)

 

11 또가라사대어떤사람이두아들이있는데

12 그둘째가아비에게말하되아버지여재산중에서내게돌아올분깃을내게주소서하는지라아비가그살림을각각나눠주었더니

13 그후며칠이못되어둘째아들이재물을다모아가지고먼나라에가거기서허랑방탕하여그재산을허비하더니

14 다없이한후그나라에크게흉년이들어저가비로소궁핍한지라

15가서그나라백성중하나에게붙여사니그가저를들로보내어돼지를치게하였는데

16 저가돼지먹는쥐엄열매로배를채우고자하되주는자가없는지라

17 이에스스로돌이켜가로되내아버지에게는양식이풍족한품군이얼마나많은고나는여기서주려죽는구나

18 내가일어나아버지께가서이르기를아버지여내가하늘아버지께죄를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치못하겠나이다나를품군의하나로보소서하리라하고

20 이에일어나서아버지께로돌아가니라아직도상거가먼데아버지가저를보고측은히여겨달려가목을안고입을맞추니

21 아들이가로되아버지여내가아버지께죄를얻었사오니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치못하겠나이다하나

22 아버지는종들에게이르되제일좋은옷을내어다가입히고손에가락지를끼우고발에신을신기라

23 그리고살진송아지를끌어다가잡으라우리가먹고즐기자

24 이내아들은죽었다가다시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다시얻었노라하니저희가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밭에있다가돌아와집에가까왔을때에풍류와춤추는소리를듣고

26 한종을불러이무슨일인가물은대

27 대답하되당신의동생이돌아왔으매당신의아버지가그의건강한몸을다시맞아들이게됨을인하여살진송아지를잡았나이다하니

28 저가노하여들어가기를즐겨아니하거늘아버지가나와서권한대

29 아버지께대답하여가로되내가여러해아버지를섬겨명을어김이없거늘내게는염소새끼라도주어나와내벗으로즐기게하신일이없더니

30아버지의살림을창기와함께먹어버린이아들이돌아오매이를위하여살진송아지를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이르되얘너는항상나와함께있으니내것이다네것이로되

32이네동생은죽었다가살았으며내가잃었다가얻었기로우리가즐거워하고기뻐하는것이마땅하다하니라

 

 

 

 

(15:3)

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15:7, 10)

7내가너희에게이르노니이와같이죄인하나가회개하면하늘에서는회개할것없는의인아흔아홉을인하여기뻐하는것보다더하리라

 

10내가너희에게이르노니이와같이죄인하나가회개하면하나님의사자들앞에기쁨이되느니라

 

 

span �O,gEp�P�ref="javascript:openDict('1263',%20'%EB%AA%A8%EC%84%B8')">모세에게이르되애굽에매장지가없으므로당신이우리를이끌어내어이광야에서죽게하느뇨어찌하여당신이우리를애굽에서이끌어내어이같이우리에게하느뇨

12 우리가애굽에서당신에게고한말이이것이아니뇨이르기를우리를버려두라우리가사람을섬길것이라하지아니하더뇨애굽사람을섬기는것이광야에서죽는것보다낫겠노라

13 모세가백성에게이르되너희는두려워말고가만히서서여호와께서오늘날너희를위하여행하시는구원을보라너희가오늘본애굽사람을또다시는영원히보지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너희를위하여싸우시리니너희는가만히있을지니라

 

( 14:14)

14여호와께서너희를위하여싸우시리니너희는가만히있을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