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 강해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3:03

(13:1~9)

1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요예배를 통하여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고 이러저러한 여타의 설교에서도 사 복음서의 내용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와 기적 사건들, 그리고 산상수훈을 심도 있게 공부를 하게 되면 사 복음서의 내용을 거의 모두 다루는 것이 되기에 우선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 이야기들을 공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예수님의 비유 사건들을 다 배우시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되겠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이 예수님의 비유를 강해하기 위해 비유에 관한 책과 논문만 30여권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너무나 유아기 적 해석을 해 놓은 것도 있고, 판에 박힌 도덕 강해로 결론을 맺는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성도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용도로 해석이 된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너무 아까울 때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그러한 잘못된 해석들을 두루두루 섭렵을 해 놓아야 올바른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그러한 해석들은 성도가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성공적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해석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해석들이 그러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유 강해를 하는 동안 여러분이 그동안 배워 오셨던 그러한 종류의 해석들을 성경으로 반격을 하며 올바른 해석을 전달하려 노력을 할 테니까 잘 들어 주세요.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공부할 비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실망하셨나요? 너무나 잘 아는 비유라서? 신앙생활의 연륜이 좀 쌓이신 분들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교를 너무나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들어오셨던 그 설교들의 대강의 줄거리들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 대부분 결론이 뭐였지요? ‘설교시간에 졸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여 돌 짝 밭을 갈아엎고 가시떨기를 제거하여 열매를 풍성히 맺는 좋은 밭이 되자’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비유의 제목을 ‘밭의 비유’로 바꾸어야지요?

오늘도 역시 제가 디스푸타치오 방식으로 설교를 풀어가 보도록 할 테니까 제가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이 마음속에 얼른 대답을 하시며 따라오셔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 밭이 스스로 돌이나 가시덤불을 제거할 힘이 있습니까? 이 중에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날 농부가 씨를 뿌리러 밭에 나가보니 밭에 돌과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서 씨를 뿌려봐야 도저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고 해 보자고요. 그 때 농부가 돌아서면서 ‘너 이 상태로는 절대 열매를 못 맺으니까 내일까지 돌들과 가시덤불들을 다 치워 놓아라, 그러면 내가 내일 와서 다시 씨를 뿌려줄게’ 그렇게 말했다면 여러분은 배꼽을 잡고 웃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강대상에서 목사가 그런 말을 하면 ‘아멘’으로 받습니다. 밭들에게 스스로 밭을 갈아엎어 옥토가 되라고 하는 데도 그저 아멘입니다.

성경은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3:10~18)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길가 밭, 돌 짝 밭, 가시떨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상태. 그런데 그 불가능과 무력함의 밭에 생명의 씨가 떨어져 돌과 가시떨기를 부수고 찢어 그 밭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3:23~24)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열매를 맺지 못하더니 돌 짝 밭, 길가 밭, 가시떨기)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렇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5:10) 영원 전에 준비된 하늘의 씨가 그 원수의 밭에 심기워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담긴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씨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3 15절부터 씨, 자손, 후손 등의 이름으로 질리도록 반복되어 성경에 등장하지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3 16절이 그 씨가 바로 예수라고 확실하게 확인도장을 찍습니다



(갈3:16)

  1.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

그러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불가능의 밭에 예수라는 씨가 떨어져 새로운 창조가 풍성하게 열매 맺어 완성이 되는 구속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좋은 밭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알매니언주의적 해석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4:13)

13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보세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옳게 이해를 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인데, 지금 이 쉬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담고 있는 그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분명 다른 비유들도 엉뚱한 도덕적 윤리적 교훈으로 오해를 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제가 첫 번째 비유 강해 본문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오늘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올바로 잘 이해를 하시게 되면 나머지 모든 비유들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올바로 이해를 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 결론으로 왔는데요, 지금부터 어떻게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으로 연결이 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문맥상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공히 등장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골육이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나오고, 우리가 본문으로 채택을 한 마태복음에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골육이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누가 예수님의 진짜 가족이냐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가 된 비유라는 것을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배경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하는 장면에 세 복음서 공히 수많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8: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교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의 내용을 제자들에게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왜 비유로 말씀을 하시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을 해 주십니다.



(13:10~15)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이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올바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인용문이 발췌가 된 이사야서 6장으로 가서 이 이야기의 진의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6:8~13)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 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 하게 되며

12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그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던 이사야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해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래놓고는 백성들에게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못 알아듣게 하라는 엉뚱한 지시를 하십니다. 바로 그 임무를 예수님이 맡아가지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의 삶을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뜨이게 되는 날이 오고 황폐해졌던 성읍이 회복이 되는 날이 온다는 희망의 약속도 함께 주어집니다


13절을 보시면 거룩한 씨가 오실 때에 성읍이 회복이 되고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뚫린다고 합니다. 그 거룩한 씨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그 수많은 무리들 속에 거룩한 씨가 오셨는데 왜 그 거룩한 씨의 말씀을 아무도 못 알아들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유효적 부르심, 효과적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사도가 그 교회의 모형으로 그 비밀을 알아듣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게 다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교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대에 예수를 좇겠다고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큰 손해를 감수하고 예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해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다 가짜라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좀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 중에 정말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나 해결받기 위해 앉아있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니라고오직 당신이 뚫고 들어가 눈과 귀를 열어놓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이 당신의 가족이요, 참 성도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부터 약속이 된, 아니 영원 전부터 약속이 된 그 거룩한 씨가 은혜로 침공해 들어오기 전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두 돌짝밭이요, 길가밭이요, 가시 떨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역 성경에서 가시떨기와 돌짝밭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의 상태를 가리키던 것들이었고 광야의 상태를 가리키던 소품들이었습니다.



(3:17~18)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는 데 그 저주의 산물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저주받은 이후로 이 세상이 내어놓는 모든 소산, 과학, 문명, 번영, 재화 등은 모두 가시덤불이며 엉겅퀴에 불과한 것들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힘은 하나님의 저주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밖에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세상은 마치 거지 동냥에 불과한 이 세상 금과 은이 인생 최고의 목표인 줄 알고 하염없이 동냥 그릇만 바라보고 있던 사도행전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불과한 이 세상의 힘을 더 달라고 극성들입니다. 그러한 힘에 대한 갈망은 뽑아버려야 할 가시덤불이지 여러분의 밭에 채워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어려운 말로 질려와 형극이라고도 번역을 하지요?



(7:23~25)

23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24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가시떨기와 황량한 돌로 가득 찬 바로 이 상태가 저주받은 인간의 땅의 모습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4:3~4)

3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4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 백성의 모형으로 등장한 이스라엘, 예루살렘 거민이 모두 가시덤불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그 어떤 씨를 파종해도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8:14~15)

14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 이니라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돌이 예수님이라고 하지요? 재미있습니다

죄인들이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할 곳, 도피성이신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며, 함정과 올무가 된다고 합니다. 이게 가시떨기요 돌짝밭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예수가 가시떨기가 되고, 돌짝이 되는 그런 무리들의 사고의 중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을 하자면 가시덤불과 돌들로 인해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죄인들의 마음밭은 생명나무 실과를 지키는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인해 생명나무로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인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 실과를 숨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 실과,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누구라 했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떨기와 돌짝은 엄밀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떨기와 돌짝으로 죄인들에게 오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도달과 획득이 불가능한 위대한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배우는 선악과라는 probation 기간을 거치지 않은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씨가 은혜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죽습니다. 그 말은 절대로 죄를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 즉 가시덤불과 돌짝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죽어 버리고, 그 밭이 옥토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요한복음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12:23~24)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밭이 옥토가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게 아니라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의 죽음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인간 측의 그 어떤 공로나 노력이나 자격이나 열심도 거기에 단 1%도 기여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씨에 의해, 열매 맺는 하나님 백성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시덤불과 돌짝들을 제거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가족이며 골육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해도 ‘난 절대 너희에게 내 몸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어머니, 육적 형제들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앞에서 부정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조건과 자격을 단호하게 규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혈통이나, 업적이나, 열심이나 ,노력이나, 재산이나, 지위나, 훌륭한 인품, 도덕적 성취, 학식이나, 깨달음,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 됨에 손톱만큼도 기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사도 바울이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동시에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9:25~29)

25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의 그림과 너무나 흡사하지요? 예수를 좋겠다고 수많은 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남은 자들에게만 복음의 비밀이 전해집니다. 나머지는요? 전부 길가밭, 돌짝밭이요, 가시떨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열심, 자격, 조건을 근거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원래 내 백성이 아닌 자, 사랑치 아니한 자, 즉 죽은 흙에 불과한 자들이었는데, 죽은 땅에 불과한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남기시니 거룩한 ‘씨’에 의해 옥토가 되어 ‘내 백성, 내가 사랑하는 자’로 남겨진 것입니다. 정리가 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심겨지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예수라는 가시덤불과 돌 짝에 의해 멸망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이 세상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에녹성과 바벨탑 건설에 열심들인 이 세상의 건축자들은 진짜 모퉁이 돌이신 예수를 자꾸 내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들어오셔야 예수가 막아놓은 화염검과 그룹, 즉 가시떨기와 돌짝이 제거가 됩니다. 휘장이 제거가 되고 얼굴을 가린 수건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 예수를 내다 버리고, 올무와 거치는 돌에 여전히 눌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흙들은 도무지 은혜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처럼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었는데 왜 우리가 바보같이 은혜만 의지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9:30~33)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 예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반석이신 예수에 의해 오히려 부딪힘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거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은혜로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고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세상이, 예수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되고 심판에 이른 것처럼, 예수만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존재들은 다 열매 하나 없는 저주의 무화과나무가 되어 결국에는 말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의 은혜에 맡기는 것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정말 미련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는 진짜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고전1:18, 23~24)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게 예수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가시덤불과 돌짝밭과 길가밭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비유 뒤에 붙어 있는 예수님의 비유 해설에 나와 있습니다.



(13:18~23)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길가 밭, 가시떨기, 돌 짝 밭의 상태를 설명해 주시는데 먼저 길가 밭은 천국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얼른 빼앗아 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떤 부흥사는 길가 밭을 설명하시면서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말씀이 떨어지는데 마귀가 졸음을 주어 말씀이 하나도 귀에 못 들어가도록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졸지 말라는 것이지요. 피곤하면 졸수도 있는 겁니다. 고작 예수님이 설교시간에 졸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드셨겠어요?

길가 밭의 상태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에피소드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19:12~14)

12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13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이제 곧 불타 없어질 소돔에서 나가야 한다고 사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왜요? 소돔이 좋았거든요. 소돔이 주는 쾌락과 소돔이 주는 편안함과 소돔이 주는 세상적 행복이 복음의 필요성을 잡아먹어 버린 것입니다.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또 다른 복음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은 데 왜 자꾸 여기서 나가라고 하냐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길가 밭들이 처한 상태인 것입니다


아울러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해서도 자족하며 사는 자들 또한 길가밭의 상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창기들을 보면서 ‘하나님 저는 저들과 같은 죄인으로 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릴 정도로 자신들의 삶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씨인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그러자 그들은 그 거룩한 씨를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제사도 잘 지내고 있고, 율법도 잘 지키고 있고, 착한 일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또 회개를 해야 하고, 왜 예수라는 이름을 믿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떨어지는데 마귀가 얼른 집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길가 밭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 자신의 건강, 재산, 명예, 인기 등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전부 길가 밭입니다. 거기에는 성도라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두 번째로 돌 짝 밭입니다. 돌 짝 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는 하는데 환난과 핍박이 닥치면 곧 넘어지는 자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 그림은 출애굽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4:10~12)

10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기뻐 찬양하며 애굽을 나섰더랬습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라는 환난과 핍박이 뒤를 쫓아오자 금방 원망과 불평을 해 대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현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가시 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 유혹을 못 이기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죄인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그런 이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제단은 두 개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맘몬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 즉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해서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님을 확고히 밝혀 주셨습니다. 역시 영원한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위의 세 가지 밭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떨기와 돌 짝은 구원을 받은 우리 안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심지어 재산이 조금 늘어나거나 삶이 조금 편안해 지면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도 무용한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라는 사람들 안에도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 짝이 가득 차 있는 지경이라면 이 세상에 좋은 밭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누가 그러한 환난과 핍박과 유혹과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애써 좋은 밭이 되어도 그 좋은 밭에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간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것을 허락하십니다. ‘뽑을까요?’ 하니까 놔두라고 하시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 좋은 밭일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따라서 이 세상에 좋은 밭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완전한 좋은 밭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좋은 밭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여전히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 짝 밭의 모습을 그냥 놔두시고 지켜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밭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심겨지는 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드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 돌 짝 밭 같고, 길가 밭 같고, 가시떨기 같은 내 속에 새 생명의 씨가 오직 은혜로 심겨졌다는 것을 깨달아 여전히 길가 밭이요, 가시떨기 밭이요, 돌 짝 밭인 자신의 모습을 폭로 당함에도 거기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그 새 생명의 씨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옥토입니다. 그들이 마지막 날에 반드시 옥토로 완성이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서 이 세상의 풍랑 위를 걷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면서도 이 세상의 풍랑 속에 그대로 놔두시며, 믿음으로 ‘난 이 풍랑을 벌써 이긴 자야’라는 은혜의 인식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 안의 가시떨기와 길가의 상태와 돌 짝 밭의 모습은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절감하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가시떨기와 돌 짝으로 인해 멸망에 처하게 되지만 우리 성도는 우리 안에서 폭로되는 가시떨기와 돌 짝의 모습을 통하여 한 발짝 더 예수님의 은혜 뒤로 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남은 자이며, 바로 그 모습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옥토들에게 길가 밭의 상태와 돌 짝 밭의 상태와 가시떨기의 상태를 계속 경험하게 해 주시는 이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 메시지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두 비유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 2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가라지 들을 그냥 놔두라고 하십니다.



(13:29)

29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여기에서 ‘가만 두어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쉴레고’라는 단어는 ‘허락하다, 용납하다, 용서하다’라는 뜻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는 나중에 뽑혀서 지옥 불에 들어갈 때까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용납하고 용서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필요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거룩 훈련에 소품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가시떨기와 돌 짝 같은 가라지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과 티끌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배우는 데에 필요한 자기부인의 도구로 우리 안에 ‘쉴레고’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시로 길가 밭의 모습으로 폭로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고, 수시로 돌 짝 밭의 모습으로 폭로되기도 하는 것이며, 수시로 가시떨기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박힌 거룩한 씨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합력시켜 선으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폭로되고 부인될 때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 내 안에 사시는 예수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가 맺는 진짜 열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옥토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밭일뿐입니다. 밭은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생명을 가진 씨가 밭에 떨어지게 되면 그 밭이 어떠한 상태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생명이 열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에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 밭을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어 버리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우리가 이 인생 속에서 실제화하여 살게 되는 데 거기에 쓰이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그 가라지는 바로 우리 안에서 문득문득 발견되는 길가밭의 모습이요, 돌짝밭의 모습이요, 가시떨기의 모습인 것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들인 것이며, 이 세상 전체가 다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손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가라지들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그러한 가라지가 뽑혀지면 알곡이 함께 뽑히게 됩니다. 그 말은 가라지 같은 삶이 없이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이 성공적으로 완성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은 비와 바람과 서리와 폭풍과 타는 듯한 뙤약볕을 잘 받아 그것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없는 죽은 흙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그냥 그것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뙤약볕이 내리쬐고, 서리가 내리고 있습니까? 잘 된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니까요? 잘 참고 잘 견디세요. 여러분 안의 거룩한 씨가 반드시 찬란한 열매를 맺어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도 밀알의 삶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밀알로 죽어 열매를 맺은 것처럼 너희도 밀알로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가라지가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12:24~26)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왜 나는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 모양인가? 때로는 그러한 미성숙함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시지요? , 여러분 안에 있는 길가밭, 돌짝밭, 가시떨기가 가라지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죽어 버리세요.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한 줌 또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예수의 은혜로 한 발 더 가까이 가세요.


왜 예수를 믿는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가? 그러한 고난이 여러분을 죽고 싶게 만들지 않나요? , 그 때 죽으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던 세상에 대해 죽으세요. 지금 세상의 공격이라는 가라지가 여러분의 성숙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여러분 자신과 이 세상을 부인하시면 됩니다. 그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산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좋은 밭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드세요.

홍해 앞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의 마음을 고쳐먹어라’고 했나요?



(14:14)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지는 삶의 과정 속에서 경험하세요. 그런 사람이 바로 옥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일한 열매인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해가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