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2

사도신경15

하늘에 오르사(승천)

 

(1:6~11)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혹시 이런 노래 가사가 기억나십니까?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 가리 외로운 길 삼만 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 리‘

제가 어렸을 적에 단 한주도 빼먹지 않고 52편 모두를 챙겨보았던 ‘엄마 찾아 삼만 리’라는 만화 영화의 주제가입니다. 기억나는 분들 계시지요?

유럽 여러 나라 중 유독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 살던 마르코라는 소년이, 당시 기회의 땅이라 불리던 남미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엄마를 찾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긴 여정을 담은 그런 만화영화입니다. 아메데오라는 브라질 산 흰 원숭이를 어깨에 얹고서 열심히 엄마를 찾아가던 소년 마르코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엄마는 매주 아르헨티나에서 마르코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병이 걸려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끝으로 엄마의 편지가 끊긴 것입니다. 마르코는 어디에선가 홀로 병들어 누워 있을 엄마를 찾아 떠납니다. 마르코는 천신만고 끝에 결국 엄마를 찾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엄마를 향한 어린 소년 마르코의 그 열정적인 사랑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후 오래도록 그 감동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개봉된 멕시코 영화 ‘Under the same Moon’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엄마 찾아 삼만 리’의 마르코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근자에 제가 본 영화중에 가장 감명 깊은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 영화를 좀 아신다는 분들은 마음속으로 ‘아니 영화 깨나 안다는 목사님이 겨우 그런 식상하고 진부하고 낡아빠진 스토리의 로드 무비를 보고 가장 감명 깊은 영화라고 하나?’하고 생각을 하실 텐데, 사실 이제는 점점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영화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영화들이나 크리넥스를 쥐게 만드는 낡은 멜로의 공식으로 불성실하게 진행되는 로드무비 같은 것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건 아마도 지식인들의 인문학적, 철학적 고민과 사고들의 한계와 결론이 결국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고민들에는 절대 동참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치하고, 멕시코 영화 ‘Under the same Moon’은 LA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엄마와 떨어져, 늙으신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아홉 살 소년 까를리토스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매주 일요일 아침 열시에 LA에 있는 도미노스 피자집 근처 버스정류장 옆의 공중전화에서 까를리토스에게 안부전화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까를리토스는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1,500km의 긴 여행을 결심합니다. 엄마는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멕시코로 돌아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홉 살 소년 까를리토스는 정말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찾습니다. 까를리토스는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 길달을 쳐다봅니다. 엄마가 미국으로 돈을 벌러 떠나면서 말씀하시길,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달을 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도 까를리토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 달을 보고 있을 거니까, 우리는 그 달을 보며 서로를 보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달을 바라보고 있는 까를리토스와 엄마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 되었을 때, 바로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을 그 화면에 오버랩시킬 수 있었습니다.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들은 3년이 넘는 시간을 예수와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입니다. 직업도, 가족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모든 마음을 한 번에 쏟아 부었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기들이 서 있는 공간에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떡하나?’ 화려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여 자신들에게도 한 자리씩 내어 줄 것이라 믿었던 그 분이,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만 남기시고는 하늘로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40일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수시로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1:3)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것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 제자들 중 대부분은 자기들 살아생전에 그 주님이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사랑하여 확실하게 다시 오실 주님이 올라가신 그 곳을 제자들이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자세히 쳐다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테니조’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뚫어지게 주시하다‘라는 강조의 합성어입니다.

저는 바로 그 모습이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코가 아들의 생계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난 엄마를 그리며 엄마가 타고 떠나간 배의 선착장에서 늘 그 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까를리토스가 사랑하는 엄마를 찾기 위해 떠난 기나긴 여행길에서 수시로 엄마를 그리며 엄마가 보고 계신 달을 쳐다보았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그 분이 올라가신 하늘을 뚫어지게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서, 나를 위해 다른 곳으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사랑하는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신랑이 혼인잔치를 앞두고, 신부로서의 우리의 성숙과 완성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올라가셔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자신을 그렇게 목숨 걸고 사랑해 주는 신랑이 계신 곳을 그리워하지 않고, 그 신랑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온갖 고생과 고초를 감내하며 삼만 리를 떠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맞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신랑이 나의 모든 마음을 송두리째 안고서 다른 곳에 가 있는데 그 신랑이 가 있는 곳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신랑이 매달 또박또박 보내주는 돈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을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신부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마르코나 까를리토스처럼 밀항을 해서라도, 아님 한 밤중에 국경의 철조망을 끊고라도 사랑하는 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살아야지요. 그게 신부 아닙니까?

 

그럼에도 자기가 사랑한다고 하는 그 대상이 가 있는 곳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신랑이 비운 그 자리를 다른 남자로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걸 성경이 간음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랑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모두 훔쳐서 떠나가 계신 곳, 지금도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 그 곳을 마르코나 까를리토스처럼, 아니 승천하신 예수님을 품은 하늘을 뚫어지게 ‘아테니조’하고 있는 제자들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바람을 피우는 중입니다. 그 신랑의 자리를 돈으로, 명예로, 자식으로, 건강으로, 취미 생활로, 쾌락으로 채우고 있는 간음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신랑 예수가 계신 그곳이 정말 그리우세요? 국경의 철조망을 끊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정말 그곳이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 조금 더 원색적으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랑이 지금 어디에 가 계신지는 아세요? 그리고 그 신랑이 지내고 계신 그곳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어요?

우리가 주님을 정말 신랑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신랑이 가 계신 곳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까요? 그 신랑이 가 계신 곳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을 살게 될 텐데 그 분이 어디로 올라가 계신지, 거기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 하신 적이 있냐 말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님도 장남이시고, 저도 장남이고, 제 큰 아들도 장남입니다. 저희 집안의 종손이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정말 남달라요.

저희 아버님은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에 대해 참 특별한 애정이 있으십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손자들이 놀러왔는데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이 ‘독도’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배를 띄우고 우비를 입혀서 기어코 독도에 데리고 들어 가셨어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 앞에서 연신 ‘홀로 아리랑’을 부르십니다. ‘저 멀리 동해 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그런데 한국이 사대주의적 소인배처럼 늘 미국에 굽실거리는 것이 싫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님은 미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셨고, TV에서 미국 이야기가 나오면 이내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시곤 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떠실 것 같으세요? 아마 아버님 손에 성조기 들려드리면 마치 독립만세 부르듯 미국 만세를 부르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그들이 미국정부의 보호와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미국이 너무나 고마운 나라가 되신 거예요. 저는 모든 미국 소식을 저희 아버님께 듣습니다. 얼마 전 저희 동네에서 산불이 난 것도 인터넷 뉴스를 보시고는 놀라서 황급히 전화를 하신 아버님한테 들었고, 미국의 부동산 시세나, 내일의 날씨 등 이곳 LA의 모든 정보를 아버님께 듣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이가 가 있는 곳의 소식은 그곳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를 그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호흡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를리토스가 멕시코의 달을 보며 LA의 어머니를 보는 것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LA를 달 속에서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라는 집단은 사랑하는 신랑이 가 계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우리 신랑은 그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며, 그리워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엄마가 삼만 리 밖에서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엄마와 엄마가 계신 곳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엄마가 보내주는 생활비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이 시대의 철없는 마르코들이 예배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성도라 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의 신랑이신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죽도록 사랑하세요? 예수님은 사랑하시는데 그 분이 계신 곳이 어디인지를 잘 몰라서, 누가 가르쳐 준적이 없어서 그동안 그렇게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지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신랑이 가 계신 곳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셔서 그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오르신 하늘이 어디인지를 규명해 보지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지금 저 물리적 우주 공간 어디쯤에 마련되어 있는 그런 곳에서 토끼와 함께 방아를 찧고 계실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요. 19세기 프랑스의 물리학자 라플라스가 별들의 위치를 그린 성좌도를 나폴레옹에게 보여주자 나폴레옹이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쯤이냐?’고 물었다지요?

소련의 인공위성 보스타코 1호를 타고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 올라가보니 하나님은 없더라’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아니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천국이라는 곳을 지어 놓고 토끼들과 방아를 찧으며 사실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을 합니다.

분명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간 이동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신 곳은 지금 이 지구와는 다른 어떤 공간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다음번에 공부할 부분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올라가신 곳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한 육신이 거할 수 있는 곳은 공간이어야 하며, 그곳에는 영이신 하나님이 함께 존재하실 수 있는 곳입니다.

제가 간혹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나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건 천국이라는 장소가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에 물들어서 이 세상의 삶을 가치 없는 쓰레기 취급을 하는 영지주의 적 발상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맞아요. 그리고 또한 그곳은 육신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맞습니다.

 

육신이 존재하고 공간이 존재하며, 자연이 회복되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우주의 어디쯤엔가 천국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우주는 인간이 타락을 한 이래로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습니다. 그 속에 천국이 숨어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이 3차원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 그 완성된 천국에 들어가 계신 것입니다. 그걸 ‘하늘로 올라가셨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하나님 나라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는 곳’이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천국의 방향과 위치를 ‘여기, 저기’라는 3차원 세계의 언어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저기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입니다.

그 상위 차원에서는 이 3차원의 세상으로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도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신 것이고, 또 벽을 뚫고 나타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그 아내에게도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셨잖아요? 그 때 예수님이 그 주막집 화장실에 숨어 계셨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지금 현재에도 다른 차원에서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올라갔다’라는 표현 때문에 천국이 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북극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면 남극에서 보았을 때에는 북쪽으로 내려가고 계신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문자적 해석을 갖고 막연한 상상을 하며 성경을 보기 보다는 그 진의를 읽어내는 데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지금 우리 곁에서 다른 차원의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3차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며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 순간 차원을 뛰어 넘어 우리를 침노해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간태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 부분은 수동태로 해석할 수도 있고, 능동태로도 해석을 할 수 있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은 수동태로 번역을 해야 맞아요. 천국이 성도를 침노하는 것이지 인간은 천국을 침노할 능력이 없어요. 이제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중요한 것은 지금 그곳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숨을 쉬고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사실인 것처럼 그곳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사실로 믿고 있다면 당연히 우리도 부활의 새로운 몸을 입고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가 거기 살고 계신단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승천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살고 계신 그곳이 지금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그곳에 새로운 육신을 입고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신랑을 사랑하고 계신 것이 맞아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있는 곳이 아니면 절대 실감을 할 수없는 그런 존재거든요. 사실과 현실은 다른 것이니까요. 미국에 LA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저희 아버지에게는 현실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그곳에 사랑하는 이가 가 있으니까 사실이 현실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승천 사실을 진짜로 믿으시고,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올라가 계신 그곳의 실재를 믿으시며, 여러분 또한 그 사랑하는 신랑이 계신 곳이 너무나 가고 싶어서 국경의 철조망이라도 끊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분을 정말 사랑하고 계신 것이고 여러분은 수시로 3차원의 일상에서 천국을 현실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겨 주었을 때,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을 때, 진정으로 용서를 해 주었을 때에 말도 못할 희열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천국이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를 침노해 들어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른 질문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 천국의 거처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누누이 확인을 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랑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그 천국의 땅 한 평을 사기 위해 이 세상의 땅이나 돈이나, 보석들을 얼마나 지불을 하면 될까요? 하나님께 경상도만한 땅을 값으로 지불하면 천국의 땅을 한 평정도 주실까요? 아니면 빌게이츠의 재산 정도 되는 돈을 일시불로, 그것도 현찰로 지불을 하면 그 천국의 땅을 한 두 평정도 살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희 시골에 있는 땅을 다 팔아도 서울 명동의 땅 한 평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지구를 다 내 놓아도 그 천국의 땅 한 뼘도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천국이 모두 여러분 거예요. 여러분이 이 땅에서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못 배워도, 아무리 못 생겨도, 아무리 건강하지 못해도 여러분은 하늘 땅 부자들입니다. 이 우주를 다 주고도 못 살 천국을, 육신으로 누리며 영원히 사실 분들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왕입니다.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존재들이,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섬겨주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왕인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의 현실이 마음에 안 드세요? 그래도 지금의 현실이 여러분을 의기소침하게 합니까? 그래도 지금의 현실이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세요?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왜 예수님은 꼭 승천을 하셔야 했으며, 그 승천의 모습을 왜 성경에 굳이 기록을 해 놓으셨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윗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1:3)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도대체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40일 간이나 제자들 곁에 유하시면서 그것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일까요? 무슨 일을 그렇게 시키시려고 무려 40일 간이나 그 일에 대해 설명을 하셨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6:28~29)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나 열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하는 구원의 믿음에 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은 이제 믿음의 시대가 올 것이니까 당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11:1)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의 일인 믿음은 바라는 것,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소망하고 있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실체로 보는 힘을 말합니다. 증거라는 단어,‘ 엘렝코’는 ‘밝히 드러내다’라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이제 육신을 입은 예수가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적을 막아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고, 풍랑도 잠잠케 해주고, 병도 고쳐주고, 오병이어로 먹이시고 하는 그런 시대가 가고,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그 천국의 현실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교회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승천 뒤에 일어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육신을 입으시고 누구에게도 나타나신 적이 없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도 육신을 입으신 주님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고 믿음을 선물로 얻어 교회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예수님의 기적적인 도움이나, 신비한 체험, 오병이어와 같은 풍성한 공급이나, 기적적인 질병의 치유 등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승천하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내려 오셨단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의 장사되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생애와 약속을 믿음으로 믿으며, 천국의 현실을 올곧은 마음으로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도의 삶 속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살림을 늘려주는 예수, 혈루병을 낫게 하는 예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가 나타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성도는 오히려 굶주림 속에서 믿음으로 하늘의 오병이어를 보아야 하며, 질병 속에서도 완성된 하늘나라를 보아야 하며,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 그 속에서 세상의 폭풍을 밟고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를 형제로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당신의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땅에서 잠시 경험케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삶을, 보고 들은 자들처럼 그 삶을 그대로 살게 된다는 뜻이며, 또한 그들의 그러한 삶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꼭 다시 오실 것이라는 그 약속이, 그것을 마치 그 당시 그 자리에서 직접 본 자들처럼 사는 이들에 의해, 증언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삶이며 증인의 삶인 것입니다.

(1:6-8)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제 부활하셨으니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세요’하고 이야기를 하자 그건 아버지의 권한이니 너희가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하시는 말씀이 ‘그러한 세상의 왕국 기대하지 말고 어디에서든 내 증인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살게 될 곳이 예루살렘이든, 유대든, 사마리아든, 땅 끝이든, 그곳이 어디든 간에 너희는 예수의 삶을 증언해야 하고, 예수의 다시 오심을 필연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증인들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단지 선교나 전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0절과 11절의 천사들의 말을 잘 보면 그게 더 확실해 집니다.

(1:10-11)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사랑하는 스승이 올라가신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서두에 그 모습이야말로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사들의 말을 통하여 올바른 성도의 삶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가 가신 곳을 그리워하며, 소망하며 사는 이들은 그렇게 육신을 입으신 예수, 권능으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신들의 소원을 풀어주셨던 예수의 승천을 아쉬워하며 하늘을 보고 가슴만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러한 기대에서 눈을 돌려 이 땅에서 믿음으로 바로 그 예수의 삶을 증인으로 살아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예수가 계신 하늘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사는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성도들의 올바른 영적 자세와 이 땅에서 나타나게 되는 그들의 삶을 동시에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과 권능은 바로 그 십자가의 삶을 가능케 하는 권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권능을 받은 사도 바울이 그 권능을 어디에 썼는지 보세요.

(4:11~13)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 이 말씀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가 하늘로 가시고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하자 가난이 불편하지 않고 풍요가 자랑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옥이 고통스럽지 않았고,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승천하신 예수를 보았고, 그 분이 올라가 계신 삼층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계신 하늘이 바로 자신의 처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에 힘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권능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를 낙담케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입니다. 자기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힘인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병이나 고치고, 이상한 체험이나 하게 해주며, 소원이나 들어주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감내할 수 있는 권능,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바로 그 권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가 때때로 세상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처지에 던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지요? 어떠세요? 지금 여러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 권능에 의해 예수의 십자가 삶이 밖으로 보여지고 있나요? 그게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받은 증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권능을 받아 믿음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를 보는 이들은 위엣 것을 찾습니다. 땅의 것에서 점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감옥도, 가난도, 질병도 별거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3:1-4)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승천하여 좌정하고 계신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곳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기적의 예수, 능력의 예수, 나의 필요를 채우는 예수를 바라보던 눈을 끌어 내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 십자가의 삶, 자기부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천하신 예수와 함께 이 땅에서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의 영광에 그대로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예수의 삶에 연합되지 못한 자들은 절대 영광중에 예수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으며, 예수와 함께 영광중에 하늘로 입성할 것입니다. 그 예수의 삶과 인생이 우리의 인생에 나타날 때 영광스러운 천국입성의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잘 이겨내십시오. 이 세상 것들로 다른 이들과 경쟁하느라 귀한 시간 헛되게 보내지 마시고 하늘의 경주를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멀리 있지만 살아계신 엄마를 그리며, 그리고 그 엄마를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내었던 이 시대의 마르코와 까를리토스처럼 이제 곧 만나게 될 천국의 예수를 확신하며 이겨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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