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1

사도신경 강해 13

음부에 내려가사

 

(벧전3:18~22)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4세기 이후부터 확정이 된 사도신경의 원문에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장사지낸바 되시고’라는 말 다음에 ‘음부에 내려가사’(descendit in inferna, 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신자들의 오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그 내용이 삭제가 되었습니다만 영어, 헬라어, 라틴어 등 모든 사도신경에 다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Hades라는 단어 대신에 Hell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번역을 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만 그건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Hades입니다. Hades Hell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물론 구어에서 Hades는 지옥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Hades, 음부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아우르는, 망자들이 가는 곳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Hades, 음부라는 단어는 그렇게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기보다는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안토니 후크마의 ‘The Bible and the Future’를 보십시오.) 반면에 지옥은 심판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들이 가는 곳을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문자적으로 그 부분을 해석을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Hades Hell 둘 중 한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요즘 한국 장로교 통합 측에서 뜨거운 감자로 회자되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한국 개혁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분인, 기독교 백주년 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님이 지금 총회에 이단으로 고소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미 공론화되어 일간지에까지 기사화된 내용이기 때문에 교회와 인물의 실명을 밝히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이단으로 고소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그 부분에 대한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 분의 책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자마자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통합 측에서 그 부분을 문제 삼아 이단으로 고소를 하자, 이재철 목사님은 ‘사도신경 원문을 봐라, 거기에도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해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채택한 베드로전서 3 18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대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오늘 공부할 ‘He descended into Hades’가 예수님의 지옥행 전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사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과 사도신경의 ‘He descended into Hades’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설명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 속에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라고 오해할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 구절을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설명하는 근거 구절로 쓰는 것입니다. 그건 베드로전서 3장의 앞 뒤 문맥만 보아도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내용만 딱 떼어서 엉뚱한 곳에 적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목회자들의 성경연구가 얼마나 일천한지 그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 제가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부분을 설명하는 오늘 설교에 베드로전서 3장의 본문을 의도적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는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사도신경의 고백과 베드로전서 3 18절 이하를 연결하여 그 부분을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둘이 무관한 것인지를 밝히고 그 양쪽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명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먼저 우리와 똑같은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는, 개혁파 전통에 속하지 않는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의 잘못된 해석들을 짚어서 설명을 해드리고, 개혁교회에서 지지하고 있는 올바른 해석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전서 318절 이하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해석이 엉터리인지를 밝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로만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부분을 연옥의 교리와 연관시켜 이해를 합니다. 천주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공로적 구원관을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로만 가톨릭의 구원의 이해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의 원죄만을 해결하는 것일 뿐이고, 그 뒤로 인간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여 성화를 이루어 내었느냐에 따라 낙원행과 연옥행, 그리고 지옥행이 결정이 됩니다. 따라서 로만 가톨릭의 구원의 서정은 성화, 칭의, 영화의 순서로 진행이 됩니다.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어떻습니까? 칭의, 성화, 영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 후에 우리의 삶이 성숙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은 은혜가 가장 먼저이며,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무튼 천주교인들은 그들이 곧바로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공로가 모자라게 되면 연옥이라는 곳에 가서 영혼의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산 자들이 연옥에 들어가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면죄부를 사서라도 사랑하는 이들의 연옥 생활을 줄이려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께서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은 아마도 천주교의 이런 주장을 일부 수용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는 이러한 연옥의 교리뿐만 아니라 림보(Limbus)의 교리가 있습니다. 림보(Limbus)는 말 그대로 지옥의 가장자리를 말합니다. 지옥의 가장자리에는 지옥과 방불한, 그러나 일정량의 행복이 존재하는 그런 두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유아 림보(Limbus infantum)입니다. 유아 림보는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있으나 개인적 죄책은 없는 유아들이 있는 곳입니다.

또 하나는 구약 시대의 신자들이 죽어 그 영혼이 구속의 계시와 적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사는 곳입니다. 로만 가톨릭은 그곳을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 합니다. 그러니까 유아 림보는 영원한 것인데, 그곳에는 종국적 지복의 삶의 소망이 없으나 자연적 행복을 누리고 있는 좋은 상태로 있는 곳이고, 선조 림보는 구약의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기다리는 한시적인 곳으로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내려가신 음부가 바로 그 선조 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그곳에 있는 구약의 신자들이 그 복음을 듣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일관성도 없고, 논리적 근거나, 성경적 근거도 없는 그런 이야기 들입니다. 천주교의 주장을 입증할 성경의 근거 구절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전집을 읽으면서 그 림보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이런 걸출한 신학자도 이런 실수를 하나?’하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책 systematic theology에서 그러한 아퀴나스의 주장과 천주교의 연옥, 림보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을 합니다. 연옥이나 림보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더 나은 본향, 즉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살다 갔습니다. 그들에게 연옥이나 림보의 공포가 있었다면 절대 히브리서의 그 신앙의 선진들은 그렇게 소망스럽게 이 땅에서 고난을 감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1:16)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보시다시피 구약의 신자들도 본향을 사모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림보나 연옥이 아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하는 이들 중에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부분을 ‘제 2의 기회 설’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어구를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과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그곳에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심으로 해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C. Bigg의 ‘Epistles of St. Peter and St. Jude’라는 책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건 더 이상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얼토당토한 주장이라는 걸 여러분도 아시지요?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째 기뭐 하러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합니까? 지옥에 가면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해 주시는데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세 번째로 루터 교의 주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루터 교는 개혁교회 교리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성립된 종파이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루터 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단에게 승리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명백한 유죄선언을 하시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렌스키(Lenski)의 책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 파의 그러한 해석은 정경이 아닌 외경, 에녹서를 근거로 한 해석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이외에 다른 모든 기록들은 그냥 참고 도서라고 하지, 절대 그것을 절대적 진리의 잣대로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루터 교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이 에녹서와 함께 근거 구절로 쓰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의 ‘전파하시니라’라는 단어가 공중에 뜨게 됩니다. 그 ‘전파하시니라, 케루소’라는 단어는 심판의 선언이나 승리의 선포에 사용되던 단어가 아니라 복음의 적극적 전파에 쓰이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지 절대 마귀에게 승리를 선포하시거나 심판을 선언하시기 위해 음부로 내려가신 것이 아닙니다.

 

네 번째로 성공회의 해석은 더 허술합니다. 성공회는 음부를 지옥이 아닌,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예수님의 낙원 행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영으로 낙원에 가셔서 그곳에 있는 천국 백성들에게 복음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역시 근거 구절로 삼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의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부분이 이해가 안 되지요? 천국을 ‘옥’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도널드 거쓰리(Donald Guthrie)의 ‘New Testament Theology’를 보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게 다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어구를 베드로전서 3 18절 이후와 억지로 연결시켜 설명하려 하는 데에서 나온 오류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 대한 개혁교회의 올바른 해석은 어떠한 것인가?

저는 초대교부인 루피누스와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과 벌코프, 게할더스 보스 등이 해석한 것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봅니다. 음부라는 단어가 원래 장소의 개념보다는 상태의 개념으로 쓰인 단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가신 곳은 지옥이나 음부가 아닌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를 낙원에 데려다 주고 다시 지옥으로 가신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자체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는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고, 수난의 삶을 사셨으며, 심지어 피조물들에게 잡혀 죽는 수모를 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분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 성자 예수님이 성부이신 하나님과, 잠시이지만, 단절의 경험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아니 그 단절의 상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지옥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 세 시간 동안 흑암이 온 천지를 덮었었지요? 흑암은 언제나 지옥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골고다에 섰을 때 천지가 흑암으로 덮였다는 것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지옥의 절정을 경험하고 계신다는 상징적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어구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는, 지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부인과 자기비하의 삶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자기비하의 자리, 그 절정인 십자가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우리의 지옥을 다 겪고 가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겪을 지옥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삽입이 된 어구인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답을 보면 좀 더 쉽게 정리가 되실 것입니다.

44.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왜 신조에 덧붙여 있는 것입니까?

‘개인적인 위기와 유혹의 때에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십자가에서, 또한 그 이전에도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하심으로써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에서 구원하셨음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내용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죽은 뒤 도달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영원히 살아야 할 음부를 예수께서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감격 속에 찬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사단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것도 아닙니다. 만일 십자가 이후에도 그러한 잔일이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이후에도을 하시면 안 됩니다. ‘조금 덜 이루었으니 내가 죽은 뒤에 지옥에 내려가서 완성 하겠다 이후하셨어야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이루고 가셨습니다. 야지요한 번후에도드리지만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은 우리가 가야할 지옥의 모든 고통을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다 경험하고 가심으로 우리를 그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4:15)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 18절 이하의 그 내용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읽어 보겠습니다.

(벧전3:18~22)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18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 부분은 ‘관련의 여격’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육 안에서 죽고, 영 안에서 살았다’라는 그 대조는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대조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대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육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은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분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으로서 만의 부활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은 영육 단일체로서의 부활입니다. 따라서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영적인 영역, 즉 하나님의 영이 최고로 그리고 가장 뚜렷이 작용하는 하나님의 존재영역에서의 부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영의 영역이 실제 한다는 것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 영의 영역에 존재하는 이는 영원과 시간을 넘나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낙원과 이 시간을 오가며 존재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그러한 영의 영역 안에서 영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차치하고 영의 영역에서 영으로 존재하시던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시간 속으로 내려오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시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 하늘의 비밀을 땅에다 내리 꽂는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은 시대와 역사를 뛰어 넘어 선지자 등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처사 아니냐?’라는 등의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 역사를 아우르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당신의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430년경에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후 시리아, 인도, 당나라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는 것을 교회사를 공부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중국의 경교(景敎)비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에 대한 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경교가 신라 때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금강산에 있던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교비와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경주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 등이 그 증거입니다. 그 신라의 돌 십자가는 지금도 숭실대 박물관에 잘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전도를 받지 못해 모두 다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은 접어 넣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네스토리우스 같은 사람 속에서도 역사를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노아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노아는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을 하던, 그러나 지금은 지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은 노아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노아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인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19절의 ‘옥’이라는 단어 앞에 ‘now’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사실 이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삶에 대해 설명을 하는 부분입니다. 앞 뒤 문맥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예수의 고난이 영의 영역에서의 부활로 결론이 난 것처럼, 이 땅에서 고난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부활의 영역이라는, 소망의 결론을 바라보며 육의 영역 안에서의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권고의 일부로 주어진 것입니다. 영의 영역 안에서의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은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 6절을 보시면 거기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벧전4:6)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도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가 가진 개념을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 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자기들의 살아생전에 일어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잘 나와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수명이 다 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사도들이 성도의 죽음을 가리켜 ‘잠을 자는 것’으로 설명을 해 준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절대 죽음으로 결론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신자들’이라는 뜻을 함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 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심판의 근거로 신자들에게 복음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한 구절들을 전체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문자적으로만 보고 해석을 하다보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 가셨다느니,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느니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이제 그 무시무시한 지옥과는 영원히 이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시는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지옥을 가져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고백 속에 ‘음부에 내려가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옥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 되었는데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끔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지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자기 자신이 최고라는 자아숭배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만들어 놓은 곳이 이 세상입니다. 지금 속으로 ‘이게 지옥이라면 지옥도 살만한 곳이네’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지금 이 세상은 성도의 성숙과 완성을 위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가입해 있는 지옥이기 때문에 살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회법으로, 윤리와 도덕으로, 양심으로, 상위 권위자의 권세 등으로 그나마 이 세상에 질서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어주신 그 일반 은총을 거두어 버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거기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가끔 이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지옥과 같은 삶의 경험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종국에 가서 어떠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지에 관한, 코스코(Cosco)의 시식대 같은 것이라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작은 지옥들은, 영원한 지옥을 시식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그러한 작은 지옥의 경험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거기에다 억만 배를 곱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예수에게 그 지옥을 퍼부어 버리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더 감격하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경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에게 닥쳐오는 고난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오롯이 각인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보재 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예수가 나를 위해 어떤 고통을 감수하시고, 어떤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셨는가를 조금이라도 배우시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작은 십자가를 이 땅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옥에서 벗어난 성도들은 반드시 이 땅에서 작은 지옥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세요.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악당이 자기의 심장을 메두사가 지키는 동굴에 감추어 놓고서 마음 놓고 싸움을 하는 장면 기억나세요? 누구도 그 악당을 죽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악당의 심장은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지키고 있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가 지키고 계세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그 어떤 지옥 같은 경험을 하신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영생은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러한 경험들을 통과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의 역사성을 배우고 그 분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참으시고 잘 견디세요. 이하면여러분의 삶에서는 음부로 내려가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파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계단을 부수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러우세요? 그래도 여러분의 사정이 부끄러우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이제 찬란한 천국의 영광만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삶에 찾아와 있는 그 작은 지옥들은 이제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입니다.

잘 달래서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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