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9

사도신경 강해 10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II)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갖고 계십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한 가지씩만 들어 주신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지금 한 번 떠 올려보세요.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다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이 지금 어떤 소원을 떠 올리셨던지 간에 그 소원의 내용을 여러분은 평소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계신 것이며, 그것은 그만큼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 건강, 자식, 비전 등등 여러분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지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오늘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을 비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과 천국을 소원으로 갖고 계신 분 계세요?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개괄적인 공부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시기 위해 당신이 입고 계신 의의 옷을 모두 벗어 우리의 수치를 가리셨고, 우리에게 닥칠 영원한 죽음을 몰아내시기 위해, 죽음을 경험하셨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과 의를 위해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고발된, 우리의 형벌의 현장에서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이며, 부끄러움을 모면하게 된 것이고, 이제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 있게 되었습 있게 되었사실을 믿 믿 다면, 우리에게 그러로운 랑과 되었사실쏟아부어주신 주님이 누구보다 랑스러워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십자가 사경회 때도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목적으로 하여 이 세상에 보내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가장 사랑하고, 당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만한 것들을 우리의 삶에 많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는 믿음을 통하여 그 모든 매력들과 쾌락들을 돼지우리 속의 쥐엄 열매로 여기게 만드시고, 당신과 당신의 나라만을 오롯이 소망하는 천국의 백성들을 완성해 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실제로 돈보다 하나님이 좋고, 인기보다 하나님이 좋으며, 자식보다 하나님이 좋아집니다. 그건 기적입니다. 건강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명예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입니다. 남편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스럽고, 아내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기적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로, 아니 가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생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자로 열심히 지어져 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 같은 존재를 위해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가 자꾸 그리워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따라 시공을 초월하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큰 아들을 낳고 얼마 안 있다가 아이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일을 해야 했고, 아내와 아이는 미국의 친정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아내와 아이가 미국으로 떠나고 텅 빈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비행기가 아내와 아이를 싣고 미국으로 출발을 하는 그 순간 제게 있어서 한국 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길을 오가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두 허깨비처럼 보였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아내도 똑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자기가 자란 미국 땅이 너무 낯설고 외롭다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밤 아이가 두고 간 신발을 품에 품고 잠을 잤습니다. 제 육신은 한국에 있었지만 제 마음은 아이와 아내가 있는 미국에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올바로 배우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 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분이 계신 하늘나라를 매일같이 사모하고 있어야 맞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천국을 별로 사모하지 않는 줄 아세요? 여전히 하나님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에게 해 주신 일이 어떤 것인지, 그 일은 어떠한 사랑과 열정에서 격발된 것인지, 교회에서 진지하게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맨 착하게 잘살자, 그러면 복 주신다, 헌신하여 복 받자, 주일 성수하여 구원받자 등등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낯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소원으로 갖고 있는 사람 찾기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한국에서 저희 교회 설교를 매 편 열다섯 번씩 들으시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연세가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두 번씩 시간을 정해 놓으시고 저와 저희 교회의 사역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어머님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전화를 하신 권사님께서 평소 때처럼 이런 저런 안부를 물으시더니 갑자기 ‘목사님, 저 지금 잔칫날 받아놓은 것처럼 기뻐요’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집안에 무슨 경사가 있는 줄 알고 ‘어머님 축하 합니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권사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슴에 주먹만 한 혹이 만져져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그것이 종양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연세도 있으신데다가 그 종양이 너무 커서 그 권사님은 ‘내가 이제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 행복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권사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제가 졸업학점을 다 채우고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되는 건가요? 하나님, 정말 저 이제 데려가시는 거예요?’하고 뛸 듯이 기쁘셨다고 해요. 그리고는 저에게 ‘저 잔칫날 받아놓은 새색시처럼 기뻐요’하고, 당신의 진심을 전해주시기 위해 전화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의를 잘 배우고,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점점 그 사랑하는 이가 계신 곳으로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며, 심지어 그 나라를 사모하는 향수병까지 앓게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신 후에 하나님을 지금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실 것이며,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소망하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2탄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대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화목과 의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화목과 의는 대속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20:28)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시는데, 당신의 목숨을 대속 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대속 물이라고 번역이 된 ‘뤼트론’은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서 자신의 노예를 삼을 때 들어가는 비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무관하게 살 때에는 누군가의 노예였다는 말이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뤼트론’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를 사셨던 것 아닙니까?

(2:2)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8:33~36)

3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보시다시피 우리는 모두 마귀의 종이요, 죄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피를 값으로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뤼트론’으로 지불이 되어야 할 것이 왜 하필 ‘피’여야 하는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 전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왜 꼭 피가 대속의 값으로 지불이 되어야 하는지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화목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고,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죄인들을 돌이켜 그들과 화목하시기 위해 ‘피’를 요구하십니다.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원리는 레위기의 율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17:11)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 하느니라

육체의 생명이 왜 꼭 ‘피’에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장을 비롯한 내장이나, 살이나, 뼈에 있다고 하면 안 되나요? 우리가 섣불리 과학적 논증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우매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데에, 방법으로 택하신 것이 ‘피’라는 것을 대전제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건 모든 인류에게 해당이 되는 공식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곳에서 행해지는, 신을 달래는 제사에는 대부분 피가 들어간다는 통계자료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밀림의 미개한 부족들에게도 항상 제사에 피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배웠을 리가 만무인데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항상 피를 가지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건 아마도 모든 인간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 인식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속의 방법으로 피를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전 인류가 생래적 지식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화목에 필요한 ‘피’는 죄인 당사자의 피여야 합니다.

(35:33)

33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대속이 될 수 있지요? 거기에서 또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 드린 성경의 대 전제인 ‘대표의 원리’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 자신의 피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여겨 주시다, 로기조마이(reckon)’이라는 개념은 로마서의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로마서 공부를 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화목에는 피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과 연대해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기에 피까지 필요한 것인가? 율법에 보면 피는 살인자들의 형벌에서나 요구되는 것인데 우리가 다 살인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요일3:15)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성경이 정의하는 살인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살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살인입니다. ‘왜 그게 살인입니까?’하고 따지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살인이라고 하시니까 살인인 것입니다. 인간들과 그들의 사회가 합의해 놓은 살인의 정의는 다른 이를 죽이는 것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살인의 정의는 ‘나’만을 사랑하느라 다른 존재를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그 분을 미워한 모든 아담들은 하나님을 살해한 죄인들인 것이며, 자신들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삼아 사는 모든 인간들은 이웃을 살해한 살인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이 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가리켜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지칭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하나님을 살해하고 이웃을 살해한 자들이니까요. 그래서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의 대속에,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피가 필요했던 그 대속의 값으로, 예수의 피가 연대성의 원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대성 아래에서 그 예수의 피를 우리의 피로 여겨주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게 연대성이니까요. 이제 살인자로서의 우리 옛 사람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연대성 아래에서 이미 형벌을 받아 죽어버린 자를 어떻게 또 벌합니까?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이제 저주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할 살인자로서의 우리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1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온갖 준비를 다 갖춘 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원수 됨이 깨끗하게 해결이 된 것입니다.

(27:50~5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시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경이 굳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그 휘장의 파괴의 주체가 하늘임을 재차 확인 시켜주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휘장의 찢어짐이 의미하는 바를 연이어 설명을 합니다. 휘장이 찢어지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이것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땅의 세상은 다 깨어지고 사라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으로 그 현실이 이미 영적으로 실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사는 것만이 망하지 않는 삶이며, 새로운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이 땅에다 미련 두지 마시란 말입니다. 성도는 이미 흔들리고 터져버린 이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사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무덤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죽음이 있는 이상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그들이 그 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가 그렇게 죽음의 무덤에서 해방이 된 사람들을 ‘성도’라고 한정지어 이야기 하지요? 그렇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무덤에서 벗어난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을 시켜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무덤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록들을 보면서 실제로 무덤이 열린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그러한 기록이 우리 독자인 교회에게 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무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일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마태가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갑자기 무덤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적 순서를 앞당겨서 부활 후의 일을 십자가 죽음의 장면에다가 삽입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십자가를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 휘장을 고쳐서 다시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 놓으신 것을 인간들이 굳이 꿰매서 다시 걸어 놓았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다시는 그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AD70년에 로마의 베스파시안과 그의 아들 타이터스를 시켜서 성전 자체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던 휘장, 즉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가 그 저주가 되어 자기 몸을 찢어 버리셨는데, 그 예수의 공로와 은혜를 인정하지 않고 자꾸 휘장을 가져다 걸어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 행위를 하나님은 더 이상 보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마귀와 죄의 종의 자리에서 완전하게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해방된 우리를 그냥 자유롭게 된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고전7:22~23)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우리 성도는 자유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사망이기 때문에(2:3)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삼아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 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고전6:19-20)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을 기억하십니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너의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8) 성도는 이제 예수님의 뜻을 좇아,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제 우리의 비전과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야망을 좇아 우리의 삶을 허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비전을 이루며, 주님의 소원을 이루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 5:10)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사는 자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영적으로 이미 그것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이후로 여러분의 가시적 삶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근거로서의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연대성 아래에서 여러분의 옛 사람의 잔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사시는 예수를 보시고 여러분을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어떤 죄도 죄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기를 쳐도 되고, 거짓말을 해도 되고, 도둑질을 해도 되고, 살인을 해도 됩니다.

(43:25)

25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4:22)

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제 여러분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모든 죄까지 완전히 도말하시고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연대성의 원리 아래에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9~10)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옛 사람을 벗었다, 새사람을 입었다’는 부정 과거분사입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 막 살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안에는 인격과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한 성도의 인격과 양심은 새사람이 된 상태에서의 옛사람의 습관과 집착과 중독의 더러운 행위를 불편해 할 뿐 아니라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죄악의 삶을 몹시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럴 수 없다. ’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됩니던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데 마음대로 살 수가 없고, 성령의 소원을 좇아 살도록 이끌아니가게 됩니다. 아울러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그 복음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함부로 막 살수가 없게 됩니다. 가끔 실수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방종을 행하고 무 율법주의자들처럼 사는 것은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구원을 얻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타락한 죄인의 실존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과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하나님과 십자가 은혜를 아는 지식이 온전하게 완성이 되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받다, 아나카이누메논’이 현재 시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사람을 입어버린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지식, 즉 하나님과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계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배우고 경험하여 결국에는 온전한 지식에 다다르게 되어 완전한 항복과 순종의 삶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6:1-15)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 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 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보시는 것처럼 십자가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를 한 사람들은 이제 죄의 종으로서의 자기들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자신들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자각하고, 점점 죄를 불편해 하게 되며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성경을 통하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자꾸 배우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노력해서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공로로, 자신들이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신분의 자각이, 복음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죄를 벗어 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 복음에 감격하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항복하는 이들에게서 죄와의 분투가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 살자, 사회를 정화하자, 개혁하자’ 아무리 외치고 계몽 운동을 해도 절대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만이 그들을 바꾸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4:21~24)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미 새사람을 입었다고 하면서 왜 또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입니까? 21절부터 24절까지는 한 문장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의 ‘벗어 버려라, 입어라’라는 명령형의 단어가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 단어들은 모두 부정사들입니다. 그런데 부정사가 목적격과 함께 쓰였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사가 목적격과 함께 쓰이게 되면 명령형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부정사들은 설명형 부정사들입니다. 그러니까 벗어 버리고, 입으라는 부정사들은 21절의 ‘가르침을 받다’라는 단어에 모두 걸리는 단어들입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들을 문법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해 보면 ‘너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으니’입니다. ‘벗어라, 입어라’의 명령형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벗었고, 이미 입었다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마음을 늘 새롭게 먹어, 벗어버린 삶에 착념치 말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의 ‘새롭게 되어’만 현재형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속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복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시키시며, 왜 하나님이 십자가를 준비하셔야 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 복음에 대한 지식이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격발해 내고, 그것이 자기 부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에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신 예수의 삶이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를 안 짓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튀어 나오는 죄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죄가 다시는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인가에 감격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감격과 감사가 죄를 점점 몰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근거 구절이 요한 일서에 나옵니다.

(요일3:9, 5:18)

9하나님께로서 난 자 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8하나님께로서 난 자 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잘 보시면 요한 사도가 ‘하나님께 난 자 마다 범죄 하지 못 한다, 범죄 하지 아니 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도가 되는 순간 성자가 되어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자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두 구절 모두 ‘범죄 하지 아니 한다’에 현재 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계속해서 범죄 하는 자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복적이며 계속적인 죄, 그건 타락한 마귀의 자손들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짓되 결국 어느 순간에 그 죄가 중단이 되고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자들로 완성이 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현재 시제가 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같은 죄를 백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하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악의 삶이 끝까지 반복적이고, 계속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죄악의 삶, 실수와 넘어짐의 삶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점점 멀어져 가게 되고, 결국에는 온전한 지식에 의해, 죄를 지으라고 제사를 지내도 지을 수 없는 자들로 완성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만일 요한이 예수를 믿게 되면 곧바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그 구절들을 썼다면 요한은 한 책 안에서 자체 모순을 일으키게 됩니다.

(요일1:8)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렇지요? 사도 바울도 우리 성도가 거듭난 이후에도 무수한 죄를 지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강조하여 일러주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 받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꾸 반복하여 배우고, 확인하고, 감격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가슴 속에 감격스러운 지식으로 쌓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현실로 인식이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실감이 되어 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꾸 발을 떼어 하늘로, 하늘로 옮겨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나’의 행복과 ‘나’의 기쁨과 ‘나’의 쾌락을 위해 행하던 이 세상일들이 참으로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 오직 한 분, 참 진리요, 참 사랑이요, 참 가치요, 참 풍요이시며, 참 능력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생의 삶은 어떻게 되어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버리고, 나는 하나님의 뜻, 즉 예수만을 주로 여기고, 예수만을 믿고 의뢰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온 힘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미야나가 히로시의 세렌디퍼티(serendipity)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세렌디퍼티(serendipity)라는 것은 우연하게 생각지 못한 아주 진귀한 것을 만나게 되는 운이나 능력을 말합니다. 교육학에서는 세렌디퍼티를 신장하고, 유사 세렌디퍼티를 신장하는 방안까지도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세렌디퍼티는 연구하고 계획하고 머리를 짜낸다고 신장되고 촉진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 쿠삭과 케이트 베킨세일이 주연한 ‘세렌디퍼티’라는 영화도 있었지요?

젊은 청춘 남녀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우연과 우연의 중첩 속에서 운명적으로 서로를 만나게 되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세렌디퍼티란, 우연의 모습을 띠고 찾아오는 필연이며,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야나가 히로시는 그러한 세렌디퍼티가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글쎄, 저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성도는 자신들의 일상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의 세렌디퍼티의 영역으로 밀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내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내 인생의 꿈과 비전과 야망을 세워, 그것들을 이루고 성취하는 데에 전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삶은 자신이 이끌어 갈 수 없고, 자신이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띠 띠우고 끌고 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이 자꾸 묵살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뉴우턴이라는 사람이 만류인력을 발견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애를 쓰지 않았음에도,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수식으로 풀어내게 되었지요? 뉴우턴이 만류인력을 발견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열심을 부리던 차에 만류인력을 발견하게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의 일항은 그냥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하라고 하신 물고기 잡는 일에 몰두했더니 거기에 세상의 요구인 세금 ‘한 세겔’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잊지마세요. 그게 바로 세렌디퍼티의 영역으로 내 일상을 밀어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 사랑하는 일과,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일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에 열심을 내겠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모든 필요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책임져 주세요.’이게 바로 우리 성도의, 인생을 대하는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어떻게 발명했는지 아세요? 조수가 실험실 문을 꽉 닫지 않고 퇴근을 해 버리는 바람에 세균 콜로니에 곰팡이가 슬었습니다. 그런데 그 푸른곰팡이가 핀 자리에 세균들이 모두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페니실린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라이소자임 항균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세균 콜로니를 들고 관찰을 하다가 재채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돌아와 보니 재채기를 하면서 침이 튀긴 자리의 세균이 하얗게 죽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플레밍은 동물들의 타액에서 추출이 되는 라이소자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의 자서전은 더 웃깁니다.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인 에어 록필드에서 농사를 짓던 플레밍이라는 농부가 자기의 밭과 멀지않은 늪에서 어떤 소년의 절박한 비명을 듣게 됩니다. 플레밍은 얼른 달려가서 늪에 빠져 죽어가던 소년을 구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따뜻한 밥을 먹여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다음날 그 소년과 그 소년의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굉장한 부자였고 귀족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플레밍이라는 농부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플레밍이라는 사람이 계속해서 거부를 했습니다. 그 때 그 플레밍이라는 농부의 아들이 헛간 앞에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전날에 늪에서 살아난 자신의 아들과 거의 동년배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귀족은 그 아이를 데려다가 공부를 시켜 주기로 했습니다. 그 귀족이 그 농부의 아들을 세인트 메리 병원 의대에 입학을 시켜 의학을 공부시켰습니다. 그가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세렌디퍼티 인생의 전형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늪에서 살아난 소년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폐렴이 걸려 또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플레밍이 그 소년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의대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면 페니실린이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소년은 폐렴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 폐렴에서 살아난 사람이 바로 윈스턴 처칠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정말 우연일까요? 하나님은 우연적이며 우발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철저한 계획 속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하나님께 맡겨 두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계획과 야망을 세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히려 우리의 방해로 자꾸 지연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일에 착념하게 될 때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필요는 세렌디퍼티의 원리 아래에서 우리에게 다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될 것이고,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천국을 소망하게 된 자들의 삶 앞에서 죽음도 힘을 잃고 벌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에게도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 때 여러분도 ‘목사님, 저 잔칫날 받아놓은 새색시처럼 가슴이 뛰어요, 이제 진짜 신랑이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우리 아이와 아내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실제로 뛰었다는 거 아세요? 그러면 더 빨리 도착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우리에게 소망으로 와 있어야 합니다. 아직 아니라면 십자가 복음을 더 열심히 배우시고 공부하세요.

십자가만 바라보세요. 십자가만 붙드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꾸 눈을 돌려 하늘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가 너무나 그리워서 그리움의 눈물과 소망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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