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8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7

사도신경 강해 8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27:23~31)

23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여러분께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지금 마음속으로 ‘예수 믿음’의 정의를 한 번 내려 보세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떤 유익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정의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이단들의 출현을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이단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명쾌하게 정리를 해 줍니다. 초대교회 때는 믿음에다 율법주의를 보탠 ‘다른 복음’이 있었고, 그 이후로 수많은 다른 복음을 가진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하나님 교회의 벽을 뚫고 들어 왔습니다. 믿음에 안식일 준수를 보탠 안식교가 출현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집단은 안식일뿐만이 아니라 유월절까지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원파에서는 믿음과 거듭남을 구별하여, 믿음에 거듭남을 보태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다락방에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거기에 예수 영접이 보태져야 한다고도 하고, 박옥수 파에서는 믿음에다가 ‘의인됨’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이단들이 전부 ‘예수 믿는 믿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자신들의 왜곡된 교리를 목숨 바쳐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런 연유로 자꾸 믿음에다가 뭔가를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통이라고 하는 우리는 과연 ‘예수 믿는 믿음’을 제대로 정의를 하고 있습니까? 정말 자신 있으세요? 만일 우리는 옳게 가고 있다고 하는, 이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섰는데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 불법을 행하던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1)고 쫓아내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성경은 분명 참 믿음이 무엇이며, 잘못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8:28)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거라사 광인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이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 그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건 귀신이 괜히 한번 해 본 말이 아닙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귀신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보다는 나은 것이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로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2:19)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적어도 기독교 내의 삼신론자 들이나 다신론자 들보다 훨씬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은 이러한 지식적인 믿음에, 감정적인 믿음까지 갖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떤다고 하지요? 떤다는 것은 감정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도 믿고,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으며, 그것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떨기도 한다는 것인데, 그만하면 훌륭한 믿음 아닌가요? 그러면 이제 그러한 훌륭한 믿음을 가진 귀신들에게 교회가 세례를 주어야 하나요?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갖고도 다 세례 받고, 직분도 받고, 예배도 하고 하지 않습니까?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오늘날 교회가 귀신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까? 적어도 성도는 그러한 귀신들보다는 명확하고 명료하게 ‘예수 믿는 믿음’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 분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한 지식은 기본으로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귀신들도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는 제사를, 영단번에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냥 십자가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에 율법지킴이나 절기지킴, 거듭남이나 예수 영접, 혹은 의인됨 등이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이 된다는 그런 이단 사설들에 절대 속지 마세요.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모두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너무 쉽지요?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수난까지 받으셔야 했습니까? 어느 날 성인으로 오셔서 십자가 높이 들고 ‘애들아, 나 너희들의 죄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는다, 잘 봐라’하고 죽으시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아기로 오셔서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수난을 당하다 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오늘 설교의 키포인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전 생애는 고난의 생애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앞 어구가 뭐였지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 뒤 어구가 뭡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 가운데는 예수님의 생애가 전부 축약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전체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전 생애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당한 고난으로 축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신경 속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와 고난의 개념은 한 개인이나 그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죽이려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찾을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을 좀 고쳐야 하지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은 ‘온 세상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고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빌라도는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 황제의 대리인으로 선 사람으로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 사도신경이나 영어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를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under Pontius Philatus)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정확히 해석을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수난의 주체가 아니라, 그 예수님 수난의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그 중간에 본디오 빌라도가 대리인으로 서있었을 뿐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본디오 빌라도는 당시에 법정에서의 최종 선고 자, 즉 판사로서의 자격과 기능을 가진 총독이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죄를 선고하는 세상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수난에 등장하는 인물인 것이지, 그가 독립적으로 예수님 수난의 주체자의 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 본디오 빌라도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괜히 그 때 총독으로 있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이 천년이 넘게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오명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대목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그 실재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예수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역사성을 확증하는 용도로, 신앙고백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할 때에 ‘예수를 죽인 천인공노할 나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유죄인으로 선고를 해 버린 이 세상 권세의 총 대표로 보아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라는 존재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던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죄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정말 행복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해주러 오신 예수님에게 유죄 선고를 내려 버린 것입니다. ‘예수야, 네가 틀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유죄 선고를 받아 마땅한 그 죄인들을 대신해 예수님이 유죄 선고를 받아 버리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구원의 대하드라마를 아주 작은 그림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인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거기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8. 왜 예수님께서 심판자인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그에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고후5:21) 세상의 심판자 아래서 저주를 받게 된 것은, 우리에게 선고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요? 빌라도는 최종 선고자의 자격으로 예수님 앞에 서서, 우리에게 내려질 유죄 선고를 예수님에게 내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그림을 통하여 마귀의 참소를 받아 유죄 선고를 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이를 갈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빌라도로 대표되는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에 의해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그 분의 생애가 단 한 줄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주님은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데 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고난을 받다 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까지, 그 분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굳이 넣어서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로 이어져도 별로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왜 그 짧은 신앙 고백 속에 그 분의 고난의 삶이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오늘 여러분은 그 질문들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고백을 할 때 그 고백이 ‘주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해답과 더불어 왜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기도 하며,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 두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사건이 어떻게 나에게 현실이 되어야 하는가에 까지 가셔야 오늘 공부가 가치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사실 확인만이 목적이 된다면 그건 정말 가치 없는 공부로 끝이 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그 예수의 고난을 우리에게로까지 연결시켜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시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이리처럼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따라서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신앙고백을 할 때 그 속에 예수의 본을 좇아,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 성도의 고난의 필연성까지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이 고난의 삶이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인 만큼 우리에게 약속된 고난 또한 확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당황스럽지 않으세요? 우리의 믿음의 내용에, 우리의 신앙고백에 우리의 고난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고백을 하면서 ‘맞습니다. 저는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권세에게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 결론으로 건너뛰었는데, 지금부터 어떻게 우리의 ‘예수 믿는 믿음’ 안에 우리의 고난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왜 꼭 십자가여야 하는가? 그것은 당시 십자가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받는 참형이라는, 율법에 근거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확증하고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빌라도가 선고용 엑스트라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대리인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입니다.

(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물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모든 고난의 절정이요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삶은 십자가와 채찍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1:16) 그런데 그 분이 인간의 제한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성육신 사건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인 것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자들, 심지어 타락까지 해 버린 벌레만도 못한 자들과 함께 33년을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벌레들이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걸핏하면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고, 걸핏하면 모함을 하며, 밥 먹듯 배신을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게다가 예수님은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셨습니다.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는데 변변한 사관 하나 구하지 못해 짐승이 사는 헛간에서 잠을 잘 정도였습니다. 그리고는 인생의 시작을 구유에서 시작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일 년 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고 비둘기를 속죄제(12:6-7)로 드릴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 어린 반구 둘로 정결 예식을 감당할 정도로(12:8, 2:22-24) 가난했습니다. 그 분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자기 소유의 집이나 재산을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가족들에게도 미친 사람 취급게도 미셨고(3:21), 3년간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에 의해 팔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당신을 끝까지 좇겠다던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배신을 하고 도망을 갔으며, 아무 죄도 없번도뤠를 맞미셨고,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벌거벗기고 홍포를 입힌 상태에서, 빛게도 미면 금관의 색을 낸다는 가시관을 씌웠으며, 손에다가는 황제의 홀을 빗댄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그 분의 눈을 가린 후 뺨게도때린 후 누가 때렸 금관알아 맞춰보 좇겠조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속죄에서 대신 짊어지실 우리 죄인들의 죄에 대한 중보적 죄의식(a meditorial consciousness of the sin of humanity)또한 평생 가지좇겠사셨다는 것입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systematic theology’라는 책에 보면 거기에 대해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성육신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 가서야 겨우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그 전체가 고난으로 점철이 된 생애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대로 ‘전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전체적인 고난이었음과 동시에, 그가 취하신 인간성 전체에서 수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총체적 고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의 최대의 수난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영적인 수난이었습니다.

영원 속에서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끊어짐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성경도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그리 세밀하게 묘사를 하지 않습니다.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모진 고문과 채찍으로 맞는 태형에 처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피가 튀고 살이 튀지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훌쩍거리며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을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놓고 두고두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고난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채찍으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 주니라’ 그게 끝입니다. ‘채찍에 살이 찢기고, 피가 튀고, 창자가 다 보일 정도로 맞았더라’ 이런 세밀한 묘사가 없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그걸 굳이 그 부분만 극화를 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맞으셨는지, 얼마나 많이 아프셨는지를 밝혀 그것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은 그 정도의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과의 끊어짐에 집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를 보면서 평생 들은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은 오늘 날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되고 있다는 것이 처절하게 증명이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난은 사람들도 너끈히 참아내었던 고난이었습니다. 채찍에 맞는 것과 기름에 튀기는 것, 어떤 게 더 아플까요?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독사 굴에 넣어서 수많은 뱀들에게 물어 뜯겨 서서히 공포 속에서 죽는 것, 어떤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으세요? 예수님 이후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잘 견뎌내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지키다 갔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집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구엘(M. Goguel)이나 로버트 스타인은 그들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신 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나 죽음이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평생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난과 수난의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그 예수님의 수난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소극적 수난’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수동적 수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지우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대속의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겪으신 두 번째 의미의 수난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두 번째 의미의 수난을 헤르만 바빙크는 ‘적극적 수난, 능동적 수난’이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의 삶을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드림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수난을 당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을 크게 둘로 나누면 수동적 수난과 적극적 수난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십자가와 순종으로 표현을 해도 무방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십자가와 순종에서 비롯된 예수님의 고난은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7번을 봅니다.

37.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하여, 특별히 삶의 마지막에, 하나님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육체와 영혼에 짊어지셔서, 그의 고난을 통하여 유일한 속죄 제물로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와 순종’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서 격발이 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수난의 삶은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 단정 지어 말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수난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의 삶으로 표출이 된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대단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당시에 율법에 나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형벌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소품이지, 만일 율법에 ‘단두대에 목이 잘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라고 쓰여 있었다면 예수님은 단두대에서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어디에서 격발이 된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죽기까지의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순종은 불순종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요? 불순종 하면 생각나는 것이 어떤 사건입니까? 선악과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상태로 태어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에덴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조건을 하나 두셨지요? 그게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에야 비로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의’의 상태라 합니다. 그렇게 무죄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을 했을 때, 영생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무죄의 상태에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었고, 의의 상태에서 불의의 상태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아담이 망가뜨려 놓은 죄의 문제와 불의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두 번째 아담(고전15:45),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무죄한 상태였습니다. 첫 번째 아담과 동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심으로 ‘의’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을 해 주신 것입니다.

(2:6~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21)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 즉 거룩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전가가 된 것입니다.

(고전1:30)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룩한 자가 되었고, 의로운 자가 되었고, 구속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순종의 삶이 꼭 고난으로 나타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의 원리 속으로 들어오게 될 때 둘 사이에 반드시 충돌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나그네요 이방인(11:13, 벧전 2:11)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세상의 주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이면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는 자리에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소수이고,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모함을 당하시고, 배반을 당하시며, 수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어, 의로운 자, 거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부족하고, 여리고, 연약한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순종이 자라나게 되는데, 그 순종의 삶이 깊어지면 깊어 질 수록 이 세상은 억지와 폭력과 죄악을 동원하여 강력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이 땅에서 고난으로 공격을 당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순종의 삶, 자기부인의 삶은 반드시 고난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지고 계신 고난의 결정체,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의 공격을 막아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이 세상의 죄악상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폭로해 낸 것처럼, 세상에서 당하는 성도의 고난이 세상의 죄악상을,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낱낱이 폭로를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도는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다가 가신 것처럼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도의 고난을 안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과 십자가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표출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사랑이란, 대상의 자격과 조건에 상관없이 무작정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건과 자격을 보지 않으시고 무작정 사랑을 해 주신 것, 그것이 자유로운 사랑이며, 자신이 손해를 보고 상함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을 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사랑은 사랑을 받는 대상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사랑을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 그 고난을 허락하고 계신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순종은 자유로운 사랑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이 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손양원 목사님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주기철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 한상동 목사님과 함께 1940925일부터 1945817일까지 옥중생활을 하셨습니다. 나머지 세 분은 옥중에서 순교를 하셨고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출옥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옥중에 계셨을 때 나환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당신이 시무하시던 애양원 교회 교인들에게 옥중에서 쓰신 편지를 조금 발췌를 해 보았습니다.

 

옥종면 북방리에 사는 신도들에게

(1944 6 24)

 

"기간에 각양 파란곡절은 너희들을 연단시켰구나. 파도는 지혜 있는 사공을 만들겠고, 한설(寒雪)이 아니었더라면 송죽지절(松竹之節)을 누가 알리요. 한설을 감인(堪忍)하니 매화는 아름답고, 추상(秋霜)을 거쳤으니 국화는 향기롭다. 신고를 감수(甘受)하니 내심이 낙원이요 만난을 극복하니 용사보다 강 하구나. 옳다! 이때에 더구나 너희들은 솔선하여 인내에 모본 자가 되라.

수곡(收穀)을 적게 받게 된다니 일변은 섭섭하나 손해 본 자가 있는 것 보아, 확실히 덕을 보는 자가 있겠구나. 내 유익이 부하고 남이 억울하여 호소함보다는 얼마나 나으랴! 범사에 감사하라."

 

옥종면 북방리에 사는 신도들에게

(1944 9 9)

"백로(白露)는 기강(旣降)하여 대지는 시원하다만 심중고열(心中苦熱)의 한로(寒露)는 언제 일까? 뒷간에 앉아 있으면서 어찌 악취를 피할 수 있으며, 세상에 처하여 있으면서 어찌 고난을 면할 수 있으랴! 금세에서 안락을 도모하는 자 마치 연목구어지격(椽木求魚之格)이로구나. 이것이 죄악 결과의 현상이로구나. 옛날 바울 같은 성자도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하였거니와, 세상에 있는 자 누구나 다 아이고(我而苦) 아이구(我而救)함은 이구동성의 비탄이요 인개호천(人皆呼天)의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록 너는 병고중이나 주안에 있는 너의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것을 나도 믿고 이로써 안심하노라.

'육체는 고난으로 단련함이 좋고 마음은 항상 기뻐함이 좋으니라'

'피죽을 먹고도 웃는 자가 있고 비단 옷을 입고도 근심하는 자가 있나니라' 고로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비관 자와 낙관 자가 있나니라. 육고심락(肉苦心樂)이 종교자의 실생활이니라. "

 

옥종면 북방리에 사는 양희에게 준 글

네 앞에 부딪치는 모든 파란곡절을 피하려고도 두려워도 고민도 할 것 없이 도리어 기뻐 감수하는 것이 나으리라. 두려워하며 피할수록 더욱 더 고통을 사게 되나, 오히려 기뻐 감수하게 되면 도리어 악마는 패하여 물러가게 되느니라. 아니 그보다도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위대한 자식과 종을 만드시기 위하사 일부러 주시는 위대한 선물의 갖은 파란곡절들이니라.

송죽(松竹)의 명성은 북풍이 연단시켰고, 황금의 진보(眞寶)는 불의 연단으로 인함이니 그러므로 파란곡절은 위인(偉人)의 뒤에 따르는 법이니라. 넓은 바다에는 파도의 쉴 날이 없겠고, 큰 나무에는 바람도 많이 맞게 되리라. 행여나 네게도 고난이 많거든 이를 생각하고 기뻐하라. 고난을 꿀같이 달게 먹는 자가 되라!

어떠세요?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에 버금가는 옥중 서신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마치 우리 서머나 교회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런 훌륭한 목회자가 우리의 선배라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갖 고생 끝에 출옥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지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시던 목사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좌익 빨치산들에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좌익 빨치산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경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했음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 때 큰 아들은 순천 사범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중학생이었습니다. 큰 형이 잡혀가자 둘째가 달려가, 형님은 우리 집 맏아들이니 자기를 대신 죽이라고 애걸하다가 함께 변을 당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침착하게 부흥 사경회를 다 마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들들의 장례식 때 이런 감사의 편지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동인, 동신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이런 보배들을 내게 맡겨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셋째, 3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인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을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살해한 뒤 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된 안재선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8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조금 너무 하다 싶지 않으세요? 나병환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시골 성도 천 여명을 목숨 걸고 섬기던 목회자입니다.

애양원 교회

그 분은 나병환자들의 환부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를 해 주던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느라 지옥 같은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 옥중 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함께 투옥되었던 주기철 목사님이 일본 순사들 앞에서 집 기둥을 붙들고 안 가겠다고 어린 아이처럼 울부짖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고난을 겪고 나온 목사님에게 아들 둘의 죽음이라는 가슴 찢어지는 고난을 또 허락하셨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목사님은 1950 9, 북한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종교 행위를 금하던 공산당들 앞에서 버젓이 매일 세 번씩 교회 종을 치시고 ‘잘 죽자’라는 내용의 설교를 매일 하셨답니다. 그래서 끌려가 총살당하신 것입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 아닐까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총살 직전까지 복음을 전하시다가 시끄럽다고 때리는, 공산당 병사의 총 개머리판에 맞아 입까지 찢어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가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성도에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게 당신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상황이나 현실로 보았을 때,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요? 무엇하나 도와 준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끝까지 하나님 편을 들다가, 입이 찢어지면서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바로 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손양원 목사님은 뭔가 특별한 사명을 받아 이 땅에 파견된 하늘나라 특공대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그 분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성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역사하셔서 그 분을 그렇게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내 이웃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기 위해, 우리는 순종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시고 잘 참으세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배려이며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선물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하셨을 때를 기억해 보세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돈 때문이었나요? 명예 때문이었습니까? 인기나 건강 때문이었나요? 아니지요? 사랑하고 사랑 받았을 때 아니었습니까? 누군가에게 지독한 사랑을 베풀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나의 자격과 조건에 무관한 과분한 사랑을 받았을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했지요? 그 때는 가난해도 행복하고, 못 생겨도 행복하고, 못 배워도 행복하고, 아파도 행복했잖아요? 그게 바로 자유로운 사랑의 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겪고 계신 고난은 행복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달게, 기쁘게, 행복하게 그 고난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천국 백성의 자유로운 사랑을 세상에게 보여주세요. 잘 죽으십시다.

이게 바로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도 예수 믿으시겠어요? 여기에 아멘 할 수 있는 이들을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 사도신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신경 강해 10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 9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7)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6)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 (5)  (0) 201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