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5

사도신경 강해(6)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외아들)

 

(10:30~39)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 이로라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사진은 한 때 일본을 오가며 왕성한 가수 활동을 하던 한미옥씨의 사진입니다. 왼쪽에 있는 사진이 성형 수술에 중독되기 전의 한미옥씨 사진이고 오른쪽의 사진이 성형 중독에 빠져 선풍기처럼 커져버린 얼굴을 갖게 된 한미옥씨입니다. 한미옥씨는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가수, 그 가수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큰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더 예뻐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좀 더 오똑한 코, 좀 더 아름다운 눈, 좀 더 부드러운 턱 선, 좀 더 팽팽한 볼 등등 그녀의 자기 외모에 대한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성형수술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성형 수술을 하게 되자 점점 욕심이 커져가게 되었습니다. 성형수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나올 때마다 항상 지금보다 더 예뻐질 수 있다는 기대와 욕심이 그녀를 다시 병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돈이 떨어지자 한미옥씨는 공업용 기름이나, 콩기름 등을 직접 자신의 얼굴에 주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눈에는 그러한 자가 시술 후에 자신의 얼굴이 점점 예뻐지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귀에는 수시로 누군가가 ‘수술을 해, 더 예뻐져야지, 콩기름이라도 더 넣어봐’라고 속삭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미옥씨의 얼굴은 저렇게 처참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한미옥씨의 변한 얼굴을 인터넷을 통해 처음 접한 순간, 바로 그 모습이,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 기준의 잣대에 맞춰 자신을 자랑하고, 인기를 추구하며, 세상 적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 뒤의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 적 인기나, 쾌락이나, 가치나, 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사는 이들의 실체는 사실 저렇게 추하고 일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얼굴에, 욕심과 야망의 콩기름과 공업용 유지가 들어가게 되면 그 얼굴은 곧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만 연합하여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덕지덕지 이 세상의 힘들을 주사하여 이렇게 죄악으로 비만한 추악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죄인들은 인기나, 쾌락이나, 자랑이나, 재미나, 환호 등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마치 자신인양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뒤의 선풍기 아줌마의 얼굴은 못 본체 지나쳐 버리면서.

 

하나님은 바로 그 가면을 벗겨내고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며 그들의 마음에 이미 살이 되어 붙어 버린 그 죄악과 교만이라는 오물 덩어리를 잘라내어 원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회귀시켜 내는 것을 목적으로 이 구속사를 경륜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가 보호 장치 속의 선풍기 아줌마의 얼굴을 폭로당하며 괴로움에 가슴을 찢기도 하고, ‘내가 이러고도 그리스도인이 맞단 말인가?’하는 자괴감에 잠 못 이루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들에게 폭로시킨 그 더러운 오염된 살들을 하나하나 잘라내십니다. 마치 선풍기 아줌마의 살이 되어버린 그 더러운 공업용 유지와 콩기름이 수술대 위에서 잘려나가 버린 것처럼.

그 더러운 오물들이 하나님이 쥐고 계신 은혜라는 메스에 의해 하나하나 잘려 나갈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메스를 절대 놓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업용 기름, 콩기름 같은 오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그 자녀의 마음은 곧 또다시 썩어 문드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더러운 찌끼와 오물들을 완전히 제거해 내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완성시켜 내셔서,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당신의 친 아들,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풍기 아줌마의 예쁜 얼굴에 들어가 망측한 살덩어리가 되어버린 그 공업용 유지나 콩기름처럼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죄의 살이 되어버린 것들, 반드시 하나님의 메스에 의해 잘려나가야 할 그 더러운 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4:26-27)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명처럼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몸, 우리의 자랑, 이 세상의 힘, 부모, 자식,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의 순결함을 부식시키는 공업용 유지, 콩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족도 사랑하지 말고, 직장도 버리고, 건강에도 신경 쓰지 말며 막 살라는 말인가?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라하신 주님께서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식의 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건강, 잘 지키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대변하고 대표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그 모든 관계와 소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고 그것으로 ‘나’라는 존재의 존재 기반으로 삼아,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쓰여 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관계와 소유가 나의 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잘라내어 결국에는 금보다 귀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아들을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가족 관계나, 돈이나, 명예나, 인기, 건강, 일 등은 우리의 행복의 재료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귀한 것들을 나보다 덜 사랑할 수 있느냐?’는 하나님의 시험의 도구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처로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이 되지요? 어려서부터 너무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돈에 대해 상당한 집착을 보입니다. 왜 나만 가난해야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를 그렇게 가난하게 만든 부모의 무능력함을 평생 상처로 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이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복음을 알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장으로 뒤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스스로 끊어낼 수 없는 ‘돈’이라는 공업용 유지를 미리 잘라내 주신 것이니까요. 패러다임이 바뀌지요?

어려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들, 많이 있지요? ‘낳기만 하면 다냐? 키우지도 못할 거 왜 낳아서 이 고생을 시켜?’ 십자가 복음 속에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내가 집착하여 내 마음 속에 살로 담아둘 부모라는 공업용 유지를 미리 끊어내 주셨구나’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건강해 보지 못한 사람,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함으로 인해 찾아올 수 있는 타락의 여지를 미리 잘라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상처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니까요. 그러니까 내적치유니 뭐니 하면서 너무 호들갑들 떨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치유의 대상에 올려놓는,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 어서 중단하세요. 그렇게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오염된 살 수술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간혹 그렇게 아픈 거예요. 그러나 그 시간을 잘 견뎌내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들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은 최근에 한미옥씨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그 공업용 유지와 콩기름 등으로 범벅이 된 얼굴 살을 상당부분 제거한 뒤 화장을 한 모습입니다.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이 정도쯤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많이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죄와 악의 잔재들로 인해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것들을 여전히 마음속에 덕지덕지 품은 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상태, 그래서 수시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그 추악함을 내어놓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나님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이 더러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떼어 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성숙과 완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런 어정쩡한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자가 보호 장치라는 가면 뒤에 숨은 우리의 모습을 수시로 직시하며 그것에 치를 떨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을 진심으로 토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맞습니까? 언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지요?

(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렇다면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잠시 내려와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배우고 익혀 다시 하나님 나라로 복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내려올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악의 살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첫 번째 아담의 모습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인생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죄악의 살덩이들을 떨구어 낼 수 없다는 늃다.경험으로 배우로 그고, 피조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다.오롯이 의지하며 살아야 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말다.어기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자신을 자랑하고, 인기를 추구하며,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늃다.낙으로 삼아 사는먬습으로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설명용 교보재로 주어지는 것이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이며,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소유인 것입니다. , 명예, 자식, 건강, 인기 등등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것이 바로 ‘은혜 설명용 교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살이 되고, 심지어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잘라내시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신과 하나로 연합이 된 아들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 혹은 여자 친구나 남자친구가 여러분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평가해 주기를 원하세요? 예를 들어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여보, 난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아, 당신이 나에게는 첫 번째야, 최고야’라고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최고라는 것은 그 뒤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내게 첫 번째는 당신이지만 두 번째는 미스 최고, 세 번째는 미스 김이고, 네 번째는 미스 리야’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최고, 첫 번째’ 정도가 아니라 ‘전부’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마음속에서 지워내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 마음을 전부 하나님께만 드리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 혹은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본질 상 ‘하나’이며, 그 뜻에 있어서 ‘연합’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어떻게 살다가 가셨습니까? 아버지의 뜻만 행하고, 아버지가 시키신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버리셨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 놓으셨어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냐?’하고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어떠세요? 예수 믿는 것 참 재미없지요? 지금까지는 내 자식의 출세를 위해,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건강을 위해 예수도 믿고, 교회에도 나와 주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랬는데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그런 것들과 작별을 해야 한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쩌지요?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된 아들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이에는 어떤 불순물도 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완성된 완전한 아들의 표본으로 하나님의 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시고, 자신을 완전히 비워, 아버지로 채워 버리는, 온전한 연합의 상태를 유지하며 평생을 사신 분, 그분이야 말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그 아들처럼 완성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창세전부터 아들로 확정이 된 우리 성도들이 한 둘이 아닌데 왜 성경은 그 예수님을 독생자, 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고백을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아들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아들, 혹은 직임적 아들, 혹은 천상적 존재로서의 아들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님처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부자관계, 즉 본질적 통일성(essential unity)을 가진 아들일 수는 없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다른 많은 아들들과 비교하여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독특성과 구별됨이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 ‘외아들, 독생자, 모노게네스’라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이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4:22~23)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11:1)

1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속에서 아들로 삼은 자들, 즉 이스라엘로 모형이 된 하나님의 교회를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걸 언약적 아들이라 합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아들 됨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자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8:15)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렇지요? 우리는 양자입니다. 적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3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33.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God's only begotten son)라고 불립니까?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비하여, 우리는 그 덕분에 은혜로 양자됨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불림을 받아 임직한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왕이 될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하7:14)

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시편2편에서도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을 하십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아들 됨을 ‘직임적 아들 됨(official sonship)이라 합니다.

 

세 번째로 지상적 존재가 아닌 천상적인 존재들 일반을 지칭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6)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38:7)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이렇게 이 지상적 존재가 아닌 천상적 존재들 일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 셋이 상징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아우르는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외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왕으로 오신, 천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30절에도 보면 주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히브리 사람들의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분이십니다. 아주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만 요한복음 118절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18)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어구가 아주 중요한 어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노게네스’ 즉 ‘독생 하신’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분이십니다. 거기에서 쓰인 동사가 현재분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전에도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것이고, 지금도 그 품속에 계시며, 앞으로도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 낳으셨다’라는 개념을 초대 교부인 오리겐의 주장처럼 ‘유출설’정도로 이해를 하시거나, 아리우스의 주장처럼 ‘피조설’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하여 예수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물이 물통에 가득 차게 되면 밖으로 흘러넘치게 되는 것처럼, 충만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친 존재가 예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존재의 유출로 기인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유출이 된 것이 예수이고, 나머지 우주는 차례대로 유출이 되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겐은 예수를 반신(半神)반인(半人)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나신 것이 아닙니다.

아리우스는 한 술 더 떠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기는 한데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며,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창조가 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진 아들이라는 말은, 우리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아들이라는 것을 주시고, 그 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출산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은(낳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존재로 탄생하게 될 것인지, 또 그 아들들은 하나님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인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그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인지를 힌트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특징을 한 번 짚어 볼까요? 아버지와 아들은 한 피가 흐르고, 필연적으로 서로 닮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존재론 적 유사성을 갖게 되며, 많은 생래적 특성들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인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시던 때가 있었고, 어느 특정한 시기에 예수라는 아들이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은 본질이 같은 분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 개념인 것입니다. 그게 ‘낳았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육신의 아들을 낳았을 때 많은 생래적 특징들을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과 성품과 능력이 하나처럼 동일하신 분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우열이나 서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니까 더 높고 아들이니까 조금 못하고의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낳음의 개념을 쉽게 한마디로 요약하여 줄이면 ‘연합’입니다.

지금도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그러한 개념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의 첫 번째 수신자였던 히브리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설명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을 한 것입니다. 만일 모계사회에 가장 먼저 성경을 주셨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머니와 딸로 비유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항상 국어사전의 개념에서 벗어나, 읽고 이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내용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을 ‘그 외아들’ 혹은 ‘독생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외아들 예수를 ‘맏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8:29)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 아래 동생들을 맏아들처럼 만드시겠다는 의지를 그 속에 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13~15)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렇게 우리 성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다른 말로 모든 면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로 연합이 되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는, 그 자리를 목표로 하여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원과 비전을 이루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관계들과 가치들을 덕지덕지 우리의 살로 담고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 회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마귀를 아비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다했습니다.

(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 말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를 알지 못하던 우리의 옛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잔재에도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 안에서도 항상 두 아비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하나가 마귀의 음성이며, 다른 하나가 우리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제시하는 생존 방법을 열심히 좇아 살았습니다. ‘세상의 힘과 가치를 얻어 내어 너희의 몸을 살찌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한 자가 되어 아무도 너희를 얕보지 못하게 하라, 강함이 진리이며, 약함은 저주이다’ 등등 마귀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 아들들의 눈을 끌어내려 이 땅의 것들을 쳐다보게 만드느라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귀의 음성에 미혹이 되어 이 세상의 것들만을 좇아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세상 마귀가 힘이라고 가르쳐준 그것들에게 나의 마음을 모두 빼앗긴 채 진짜 우리의 아버지를 외면하고 수 십년을 살아 왔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내 마음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바를 요약한 것이지요? 그 사도신경의 ‘신조’가 ‘크레도(credo)’입니다. 그 크레도라는 단어는 라틴어 ‘크레다레’의 1인칭 동사입니다. 그 단어는 ‘꼬르(cor)’라는 단어와 ‘다레(dare)’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라틴어 ‘꼬르’는 ‘심장, 마음(heart)’이라는 뜻이고, ‘다레’는 ‘주다(donation)’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조, 믿는바’라는 것은 ‘내 마음을 주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리지 못하고 돈이나, 재물이나, 건강이나, 자식이나, 소원이나, 비전 등에 빼앗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모든 마음을 주어야 하는 이들이 다른 것에 마음을 주고 있는 상태가 선풍기 아줌마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태에서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대상들을 하나하나 메스로 제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이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져서 당장 끼니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내일이면 전 식구가 다 밥을 굶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집세까지 밀려서 내일이면 당장 그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염려가 되세요? 안 되세요? 염려가 되지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현금으로 100만 불이 생겼습니다. 염려가 됩니까? 안 됩니까? 염려가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그 때 여러분의 염려를 무엇이 가져간 것입니까? 돈이 여러분의 염려를 가져간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이 아닌 돈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힘이 부족할 때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힘이 주어지게 되면 그 염려가 몽땅 사라져요. 그건 돈을 신앙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을 완전히 의지하고, 의뢰하며, 의존하는 아들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손수 쳐 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아버지’하고 불러 줄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많은 아버지들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첫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아빠’하고 부르며 안겼을 때 그 기분이 어떠셨어요? 그 순간은 정말 평생 잊을 수가 없지요? 내 아이가 나를 아버지로 인식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 나를 덥석 껴안았던 그 순간을 우리가 감격스럽게 눈물로 반추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아버지로 인식하고, 완전히 의존하며, ‘아버지’라고 불러줄 그날을 학수고대 하시면서 우리의 삶에 섭리로, 경륜으로 간섭을 하시며 우리를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돈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명예를 아버지로 모시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혹시 자식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게 다 선풍기 아줌마의 얼굴에 살로 붙어 있던 공업용 유지, 콩기름으로 범벅이 된 오물들인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18:8-9)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에 여러분이 하나님 이외에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채워 넣어 보세요.

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명예가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자식이 널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당신을 완전히 의뢰하고 의존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이 제거되고,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향하여 ‘아버지’하고 두 손 들고 나오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 눈을 뽑아버리시고, 우리의 손을 잘라버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시지요?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떠나 세상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더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돼지 밥을 나누어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건 세상이 바로 돼지들의 천국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학벌, 직업, 교양, 재산 등으로 예쁘게 치장을 하고 있지만 돼지는 무얼 입혀놓아도 돼지인 것입니다. 돼지에게 리본 달아준다고 그 돼지가 백설 공주가 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달아준다고 그의 아들이 세상에 나가 돼지들과 경쟁하며 돼지들의 먹이를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할 때 달아준다고그의 모든 시도들을 막아내고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돼지우리가 돼지들점점 돼지가 되어져 가는 꼴을 두고 보실 수가 없겵 그의 아버지는 그 서 달아반드시 그 돼지우리가 돼지들빼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서 은 아버지의 열 자기 결국 그 돼지들의 세상가 돼지들아무 데에서도 환영달아받지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잘 보세요. 그러자 아들이 비로소 자기의 아버지를 생각해 내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공업용 유지들이 하나하나 벗겨지자 그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와 아들을 맞으십니다. 그게 성도들의 신앙 여정이며, 결국입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큰 아들은 어때요? 왜 큰 아들이 탕자가 돌아왔을 때 골을 부렸습니까?

자기 동생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놀았는데도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 주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 말은 그 큰 아들의 인식 속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밖에 나가 허랑방탕 노는 것이 재미난 것이고, 좋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나도 그렇게 놀고 싶었는데 뭔가 목적이 있어서 참고 있었다’라는 아쉬움의 속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큰 아들이 아버지 곁에 붙어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아버지가 가진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아버지가 원하는 뜻을 수행하고 시행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절정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극명한 대조를 봅니다. 그 첫 번째 것이,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간섭하심, 즉 그 분의 섭리와 경륜에 의해 이 세상의 힘들을 모두 무장해제 당하고, 이 세상이 돼지들의 천국이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면목 없이 돌아서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불신앙에 관한 것인데, 불신앙이라는 것은 아버지를 섬긴다고 하면서, 그 아버지가 가진 힘과 소유를 얻어내기 위해 억지로 종교 행위에 묶여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일이 모두 만사형통, 일사천리, 일취월장으로 잘되는 것이 결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님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물론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세상 힘의 소유가 여러분의 눈과 관심을 자꾸 빼앗아 버려, 정작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게 하고,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셔야 합니다.

제 귀에는 지금 지옥이 천둥소리를 내며 이 세상을 덮치기 위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십니까? 돈 세는 소리, 돈 없어 걱정하는 소리, 인기와 자랑을 위해 달리는 소리, 인기 없어 탄식하는 소리 이런 세상의 소리들을 들으시느라 정작 지옥이 달려오는 소리와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세상 것에서 자꾸 눈을 돌리셔야 합니다.

(요일2:15~17)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세상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졸라서 얻어내야 할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꾸 걷어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착념하게 되면 여러분은 절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무기수들이나 장기수들이 양복 재단사를 교도소 면회실로 불러서 죄수복을 맞춰 입습니다. 너무 웃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 교도소 내의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나마 자신을 멋지게 치장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곳에 잠시 있다가 갈 사람들은 죄수복이 어떻든 간에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게 자기 목표가 아니거든요. 빨리 세상에 나가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에 교도소에서 입는 죄수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이 잠깐 있다가 나가는 구치소 같은 곳입니다. 왜 그 구치소 안에서 거들먹거리시려 합니까? 나가야지요? 나가면 이 잠깐의 나그네 인생길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자유와, 풍요와, 기쁨과 안식이 있는데 왜 여기에 자꾸 착념하세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절대 이곳에서의 인기나 자랑이나 소유에 크게 관심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처음 단기 선교를 갔을 때, 그곳에 있는 조선족 안내원이 우리를 데리고 중국 가전제품과 악기를 파는 곳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들이라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하는데, 저는 거기에서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중국 제품들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훌륭한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미국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풍요를 깨달아 알게 된 사람들은 절대 이 세상 것들에 집중하거나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 땅에서 작은 예수들로 지어져 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거기에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하나님 말고 나에게 힘으로,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부질없음과 허망함을 배우셔야 합니다. 거기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쳐 가시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결국 ‘아버지’라는 그 말 한마디 진심으로, 전심으로 쏟아내는 내 아들들의 음성을 듣고 싶으셔서 오늘도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계신 아버지를 잊지 마십시오.

(21:7)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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